인도 뉴델리, 바하르간지에 있는 한인식당 '인도방랑기' 벽면에 남김 흔적^^
1-7 배낭 무게가 인생의 무게
‘좌충우돌 옥 패밀리!’ 인도 델리에 있는 한국식당 벽에 우리가족이 적은 글귀였다. 모기약 하나 없이, 배낭여행의 ‘배’자도 모르고 갔던 인도, 네팔의 연습여행이었다.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남편과 나는 ‘세계 일주를 위해서는 정말 철저히 준비 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정 반대로 말했다.
“엄마, 아빠, 배낭여행 진짜 별거 아니지요?”
둘째의 말에 두 명도 찬성표를 던졌다.
“그래 맞아! 괜히 마음을 졸였는데, 해보니까 다 되는 걸 말이야?”
“엄마, 아빠도 그러시죠?”
이런 걸 세대차이라고 해야 하나? 책임감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 똑 같은 상황을 겪고 왔음에도 이렇게 다르다니... 그래도 가족의 먹 거리를 책임지는 안주인으로서 난 마음이 바빠졌다.
“여보, 아무래도 고추장은 넉넉해야겠죠? 약품도 정말 중요하고, 아! 작은 모포하나는 꼭 챙겨야 할 것 같고...”
챙기면 챙길수록 필요한 것들은 왜 그리 쏙쏙 생각이 나는지? 이건 평소 기억력 없던 내가 아닌듯했다. 그 결과, 20kg 가방을 하나씩 둘러메고(아참, 나는 5kg...), 앞쪽에도 덤으로 가방하나를 더 메고 우람하게 출발했다. 곧 있을 통곡의 시간은 눈치 채지 못하고, 본 여행의 첫 목적지인 필리핀으로 향했다.
필리핀을 가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 여행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또 다른 준비물 때문이었다. 바로 ‘영어’라는 놈이다. 인도에서 언어 때문에 여러 차례 곤욕을 치렀던 관계로, 2개월간 영어공부를 하기로 했다. 천하를 평정할 것처럼 비장한 마음으로 갔지만, 영어가 어디 두 달 만에 정복 할 수 있는 만만한 존재던가?
초등학생부터 50대 후반까지의 한국인만 모여 있는 어학원은 재미난 풍경을 연출했다. 수업시간에는 모두 한마디라도 영어를 더 말하려고 난리였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마치 신선한 공기를 마시 듯 한국말로 인사를 나누기에 바빴다.
“어제 한국뉴스 봤어요? 곧 결혼한다는 영화배우 있잖아요, 속도위반이라 곧 아빠가 된대요.”
“이번 주말에 수영장 갈 건데 같이 가요.”
한국 축소판이지 필리핀이 아니었다. 한국식 식사, 청소 및 빨래까지 필리핀 아떼(도우미)들이 다 해주는데도, 더운 날씨와 기억력 부족을 탓하며 남편과 나는 일치감치 넉 다운 되었다. 출발을 앞두고 치솟는 환율을 우울하게 쳐다보던 남편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애들은 또 어디 갔나?”
저녁을 먹고 나면 기숙사는 또 다른 활기를 띄는데, 아이들은 마음에 맞는 선배들과 인맥을 쌓느라 정신이 없었다. 출발을 하루 앞둔 저녁에도, 환송모임 한다며 사라져버린 아이들로 인해 남편은 뿔이 났다. 급기야 비행기 출발하는 당일 아침까지 짐을 챙겼으니... 살림을 살았던 것도 아닌데, 두 달 새 짐이 많이 늘어났다. 도저히 배낭에 다 들어가지를 않아 짐을 버리기로 했다. 한 박스를 정리해서 버려도 배낭은 빵빵했다.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태국, 캄보디아의 동남아시아 여정을 위해 밤 11시, 싱가포르 행 비행기를 탔다.
“헉, 헉, 헉”, “아이쿠, 죽겠네!”
다음 날 오후 6시, 싱가포르에 도착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배낭을 메야 했는데, 계속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렇다고 배낭을 버릴 수 도 없고, 예약 해둔 숙소까지는 가야 했다. 가장 먼저 살려달라고 SOS를 보낸 것은 나였다. 작은 배낭 한 개 달랑 메고도 어깨가 짓누르고 힘들어 더 이상 걷기가 힘들었다.
“나, 도저히 못 가겠어요.”
20kg씩 메고 있는 4명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구원을 요청한 결과, 나의 배낭은 남편어깨로 넘어갔다. 아들 중 한명이 받아주면 좋으련만 자기들도 죽겠다는 표정만 짓고 있으니, 속이 타면서도 그렇다고 도로 멜 자신은 도저히 없었다. 공항에서 지하철, 다시 지하철에서 숙소까지 가는 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4명의 얼굴은 처참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필리핀에서 그렇게 많이 버렸는데 아직도 무겁다니, 숙소를 가는 내내 버려야 할 것들과 남겨야 할 것들이 내 머릿속을 왔다 갔다 했다.
모두 무거운 배낭의 여파인지 숙소에 도착하자, 저녁도 먹는 둥 마는 둥 곧장 골아 떨어졌다. 나는 누워서도 계속 버릴 것과 남길 것에 대한 대차대조표를 그렸다. 컴퓨터 휴지통을 비운 뒤, 필요한 자료까지 버렸던 쓰라린 경험이 왜 하필 그 순간 떠올랐을까? 여전히 마음은 오락가락, 배낭을 비웠다가 채우기를 반복하니 머리만 복잡해져 갔다.
싱가포르 일정을 마치고, 태국까지 가는 싱마타이 열차를 타러 가기 전날, 모두 배낭 속의 물건을 쏟아 내었다. 여벌옷, 접착력도 뛰어난 한국산 밴드, 고추장, 모기 기피제, 혹시 먹을 게 없을 때를 대비한 미숫가루까지... 대부분이 음식과 입을 옷 그리고 책이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남편이 과감히 분류작업에 들어갔다.
“옷은 갈아입을 것 하나만, 속옷도 오직 두벌만, 양말도 목적지 도착하면 씻어서 신으면 되니까 두개만, 여행 다니면서 읽겠다는 책자도 한권씩만, 이런 원칙으로 정리해라.”
남편은 내 배낭까지 메고 왔던 처절한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듯 강경했다. 정리하니 버려야 할 짐이 배낭 한 개 분량이었다. 이렇게 많이 들고 왔단 말인가? 미련 없이 버리는데, 딸이 무심히 한마디 했다.
“배낭 무게가 꼭 인생무게 같네! 많이 갖고 있으면 그만큼 당하는 고통도 크니까 말이야...”
짐을 챙기며 혼자 중얼거리는 17살의 딸을 남편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동안 온갖 것을 넣어서 무거운 배낭을 들고 다녔던 우리에 대해 정확히 표현한 말이었다. 딸의 이 말에 아무런 부정도 않고 물건을 내어 놓는 두 아들 역시 그 의미를 아는 듯 했다. 아이가 뜨거운 냄비를 만지고서야 뜨겁다는 의미를 알듯이, 아이들도 배낭무게의 고통을 통해 인생의 뜨거움을 체험한 것이리라.
인생의 무게를 줄이듯이 두 박스의 짐을 버리고, 조금은 가벼워진 배낭을 메고 말레이시아로 출발했다. 태국으로 가는 싱마타이 열차를 타기 위해 말레이시아의 기차역으로 가던 중, 막내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아! 아빠, 배낭끈이 끊어 졌어요.”
배낭끈이 끊어지다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잦은 이동과 과도한 무게를 못 이긴 배낭끈이 결국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후 둘째 배낭도 끊어져버렸다. 두 아들의 배낭이 가장 무거운데 낭패다. 나머지 한쪽마저 끊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지, 두 아들은 큰 배낭을 가슴에 안고 끙끙대며 이동하기 시작했다. 역사 한쪽에 자리를 잡고 배낭을 꿰매 주는 곳을 찾아 나섰다. 우리나라 지하상가처럼 온갖 가게들이 있지만, 가방을 수선해 주는 곳은 없었다. 달리 생각나는 방법이 없어 돌아 왔는데, 잠시 후 아이들이 다시 가보겠다고 했다. 얼마 후 아이들은 여행자용 바늘과 가느다란 실이 들어 있는 반짇고리를 사가지고 왔다. 이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며...
기차에 올라 침대에 누우니 긴장이 풀리며 피로가 몰려왔다. 두 아들은 작은 바늘로 배낭끈을 꿰매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는데, 잘 안되는지 도움을 요청했다. 도저히 승산 없는 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이 작은 바늘로 두꺼운 배낭끈을 꿰맬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일단은 몇 겹으로 되어 있는 배낭을 작은 바늘로 통과해야 한다는 것과 튼튼하게 만들려면 여러 번 왔다 갔다 하는 방법밖에 없음을 시범으로 보여 주었다. 아이들에게 맡기고 피곤을 이기지 못해 누웠는데, 일어나보니 아침이었다. 곧바로 아이들 배낭을 살펴보니, 두 녀석이 밤새 낑낑대며 꿰맨 흔적이 보였다. 얼기설기 꿰매었지만, 두꺼운 면을 통과시키면서 튼튼하게 만들어 놓았다. 밤새 작은 바늘 하나로 가방 끈을 꿰맸을 두 아들은 세상모르고 자고 있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조목조목 다 챙겼을 때는, 앞으로의 여행에 대해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많이 챙긴 것 때문에 고통을 받았고, 결국 감당할 수 없는 것들은 버려야 했다. 열심히 챙기느라 분주했던 만큼, 버리기 위해서도 무던히 힘을 쏟았던 것 같다. 없어도 별 문제 없는 것들에 대해 왜 그리 집착했을까?
‘조금만 가지고, 제발 간편하게 갑시다!’
시위라도 하듯, 두 아들의 코고는 소리는 갈수록 더 세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