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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무엇하는 사람들인가?
글쓴이 : 이용혁
- 목차 -
1.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
2. 사제를 교회 밖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3. 이름 잘못 지었소. 그대들의 호칭도 바꿔야겠소.
4. 패륜은 다시 패륜으로 이어진다.
5. 인간의 정의로는 절대로 어두움을 걷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정의는 희미한 국부조명에 불과할 뿐이다.
6. 당신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가?
사제이기 전에 신자! 맞는가?
7. 왜인가? 어째서인가? 무엇 때문인가?
8. 표리부동에서 벗어나시오. 그것이 정의구현의 첫걸음입니다.
9. 성경을 읽으며 그대들을 생각한다.
10.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간판은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11. 하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첨부자료 ; 정의구현 사제단의 성명서
정의구현사제단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1.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길이 없다.
2010년 12월10일 4대강공사에 대한 추기경의 기자회견에 불만을 품은
일단의 사제들이 “추기경의 궤변”이라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이름으로 발표된
이 성명은 욕설이나 진배없는 비난을 추기경께 퍼부었고 여기에 원로사제라는
사람들이 덩달아서 서울 대교구장의 ‘용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그야말로 경천동지! 하늘이 놀라 쪼개지며 땅이 꺼지고 바다가 뒤집어지면서
산더미처럼 치솟아 오르는 파도가 교회를 집어 삼킬 듯 밀려오고 있었다.
사제들에 의하여 촉발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변괴의 쓰나미가 교회를
덮치면서 평신도들의 가슴 하나하나를 산산조각 내며 물러갔고 폐허로 변한
그 자리에는 증오의 인광이 번득이는 검은 파도만 암흑 속에서 넘실대고 있었다.
설사 추기경께서 돌이킬 수없는 과오를 저지르셨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교회안팎을 다독였어야할 사제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추기경 담화의 말꼬리를 잡아 쥐고 교회를 태질치고 있었으니
이것은 평소에 그들이 뱃속깊이 숨겨두었던 온갖 편견과 독선,
아집과 증오에 영웅심이라는 환각제가 뿌려지면서 천방지축으로 날뛰며
좌충우돌한 광란의 회오리였다고 밖에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다
.
세월의 흐름에 거의 모든 권위가 쓸려가 버리고, 남아있던 몇 안 되는
권위조차 거의 무너져 내린 이 시점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사제들이
추기경의 권위마저 뒤집어엎으려고 악다구니 쓰는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맑은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패륜을 저지르는
그들 언행의 어디에도 거룩한 사제의 모습은 찾아볼 길
없고 칠흑 어두움 속에 섬뜩하도록 차디찬 마귀의 숨결소리만
귓전을 때리고 지나간다.
평소의 마귀라면 사제 앞에서 오금이 저려 뒷걸음질이나 치는 것이
고작이었을 텐데 어떻게 무슨 수를 썼기에 사제를 수십 명씩이나
한꺼번에 낚아챌 수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의의
절벽에 가로막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충격이 지나가고 정신이 들자 이번엔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마음속 깊이 간직했던
“용서”의 은총마저 불태워버린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적개심
하나밖에 없는 나 역시 복수의 화신으로 돌변
하여 눈으로는 시퍼런 증오의 불길을 뿜어내고 혀로는 더러운
저주의 독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아무리 입을 틀어막아도 취객의 입에서 오물 쏟아져 나오듯
꾸역꾸역 미여져 나오는 욕설을 막아낼 도리가 없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나 자신을 포기한다.
예라! 나도 모르겠다.
터져 나오는 대로 다 뱉어 버리자! 어차피 더 당할
망신도, 더 구길 체면도, 더 감출 치부도 없는 마당이니
쏟아져 나오는 대로 그냥 내버려두자!
마지막 날 지옥
문이 열리고 그리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뱉어낼 것
시원하게 다 털어버리고 주님의 심판을 기다리자!
죄 값도 한꺼번에 모두 치러두는 편이 오히려 마음 편할 것 같다.
2. 사제를 교회 밖으로 잡아당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제단 신부님들! 어떻게 받은 사제수품이었습니까?
얼마나 황홀한 주 예수그리스도의 신비이었습니까?
당신들의 사제 서품식 때에 자리를 함께했던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목이 메어 눈시울을 붉혔을
것입니다.
해맑고, 싱싱하고, 아름답고, 건장한 젊은이들이
하늘나라로 가는 봇짐을 가볍게 하려고 자기
마음과 몸의 한쪽 부분을 사정없이 찍어내고, 비워내고, 도려냅니다.
잘려나간 心身의 잔해들이 홍수에 떠
내려 온 나뭇가지처럼 식장을 가득 메울 때, 주교님을 비롯하여
모든 하객들이 마음의 팔을 뻗어 서로를
얼싸안고 그대들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며 殺身의 아쉬움에 눈물지었고
다음에는 눈처럼 희어지고 깃털처럼 가벼워진 영혼들에게
하늘 문을 활짝 열어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와 환희의 눈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몸은 비록 지상에 머물더라도 영혼은 하늘나라를 왕래하면서
평화의 씨앗을 이 세상에 가져다 뿌리는 좋은 몫을 그대들은 차지하였고
그 은총에 대한 보답으로 이 한 목숨 오롯이 도로 바쳐 복음전파에
정진할 것을 주님 앞에서 다짐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약조를 지키기 위하여 고난의 가시밭길 마다 않고
어제도 오늘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손 한번 못써보고 이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사탄의 속이 쓰리다 못해
두 눈이 뒤집히고 입에는 허연 거품이 입니다.
궁지에 몰린 사탄 역시 필사적으로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기회를 엿보다가
승부를 겁니다.
“기왕에 씨를 뿌렸거든 열매까지 거둬야지 중도에
그만두면 무슨 보람이 있겠소? 손수 가꾸어 좋은 열매를
거두도록 하시오! 그래야만 주님께서도 더욱 대견해하고
기뻐하실 것 아니겠소?” 천사로 가장한 사탄
의 이 유혹에 귀가 솔깃해지는 그 순간부터 비극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대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벨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진 수렁 천지인 교회 밖으로 한발 내디디게 되었고 한번 빠진 발은 점점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가 헤어날 길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내려옵니까? 여기는 개똥밭 진 수렁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평신도들이 악마와 대치하는 전쟁터입니다.
전황이 지지부진하여 뒤로 밀리기도 하고 방향이 흔들리며 우왕좌왕하기도
하겠지만 오늘도 우리는 악마의 허리춤 움켜쥐고 진땀 흘려가며
칠전팔기 끝에 조금씩, 조금씩 아주 조금씩 꾸준히 밀고 나갑니다.
주님께서는 시간 같은 것 개의치 않으시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이 그 가냘픈 체구로
마침내 악마를 밀어내고 주님의 영광을 찬란하게 들어낼 때까지
끈질기게 참고 기다리실 것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길을 찾아 싸우게 그냥 놔두십시오.
아무리 답답해도 훈수는 절대 안 됩니다. 훈수를 두는 순간
모든 게임은 몰수게임이 되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모두가 빈 쭉정이가 되고 맙니다.
훈수는 분명 하느님 창조사업에 대한 역기능입니다.
우리를 한명이라도 더 끌어 모아 더욱 강한 하느님의 군대로
조련하는 것이 사제의 몫입니다. 응원 차 잠시
들렀다면 모르겠으되 어쩌자고 이 개똥밭 싸움에 몽둥이를 들고 끼어듭니까?
사제가 직접 싸움판에 나선다면 입고 있는 제의는 검은 전투복이 되는 것이며
그 전투복에 묻힌 개똥 냄새가 온 성당 안에 진동하게 되고 그
옷 속에 싸여있는 사제의 마음에도 개똥 냄새가 배어들지 말라는
법이 없을 터인즉, 이보다 더 두렵고 무서운
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교회 안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내 집 안에 있는 양떼를 돌보는 기쁨과 보람을 되찾는 것만이 사제의 행복이요,
주님께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추기경님 기자간담의 취지도 대략
이러한 내용들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평소대로라면 의당 어른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어야 할 사제들이 어찌된 영문
인지 다짜고짜로 꽹과리부터 두드리며 떼를 지어 동네방네 한 바퀴 돌고나서
대문 부수고 들어와 공중제비를 넘어댑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필자는 필자대로 그대들의 무분별에 치가 떨리고,
그대들은 그대들대로 필자와 같은 흉물의 어깃장에 치를 떨게 될 것인즉,
남은 길은 오직 하나, 외나무다리 위에서의 단판승부로 둘 중에
과연 누가 사탄의 편인지를 결판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되었습니다.
3. 이름 잘못 지었소. 그대들의 호칭도 바꿔야겠소.
세상일로 하여 뜻을 같이하는 몇몇 사제들이 모여
단체 하나를 만들고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라는
어마어마한 간판을 내걸었다. 성명철학관에 드나든 적은 없었지만
이름이라는 것이 때로는 그 주인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우리 민초의 선조들께서는 아이들을 ‘개똥’, ‘쇠똥’,
‘돌쇠’라고 부르며 결코 귀한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다.
‘개똥’이나 ‘쇠똥’처럼 내 몸을 낮추며 나를 썩히어 남의
거름으로 내놓을 수 있는 겸손과 아량을 갖추고 돌이나 쇠처럼
강하게 온갖 고난과 싸워 승리하는 자 되어달라는
비원이 담겨 있었으리라.
무지렁이인 줄로만 알고 있던
그분들의 혜안과 깊은 성찰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름이 좋다고 다 그리 된다면야 무슨 이름인들 못 갖다 붙이랴?
박주교, 이통령, 최총장, 등등 얼마든지 좋은
이름이 널려있지만 이런 이름을 취할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禮를 벗어나는 길이니 염치를 아는 자가 갈 수 없는 길이요,
다음에는 허명이 불러올 횡액이 불을 보듯 빤하니 후진을
아끼는 자가 택할 수 없는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이라는
거창한 이름은 태생적으로 비극을 안고 태어난
팔삭둥이일 수밖에 없다.
천주교 사제들이 만든 단체라고 하여
그 이름에 반드시 ‘천주교’ 와 사제단이라는 말을
넣어야 한다는 법은 없을 터인데
왜 “정의구현”의 머리에 구태여
“천주교”라는 거창한 모자를 씌워서 권위를 돋
보이게 해야 했고 아랫도리에는 “전국 사제단”이라는
긴치마로 오지랖을 넓혀야했는지 모를 일이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라면 한국천주교를 대표하는 공식기구라는
인상이 짙게 풍겨지는 이름이다.
만약에 이러한
과대포장에 조금이라도 의도적인 노림이 포함되어 있었다면
이야말로 사제로서의 양식과 품위에 직결되는 중대
문제라는 점을 분명히 밝혀두고 싶다.
오이 밭에서 신발 끈을
고쳐 매지 말라고 당부하셨던 선현들의 말씀이 불현
듯 생각는 대목이다. 이름의 중심부인 “정의구현”에 대하여는
그 부당성을 다음 장에서 별도로 논할 것이다.
이제부터 ‘사제’라는 호칭을 삭제키로 한다.
‘사제’ 대신 ‘당신’ 또는 ‘그대’가 되는 것이고 “정의구현 사제단”
역시 “사제”가 빠진 ‘정의구현단’(이하 ‘정구단’)으로 축소된다.
얼핏 듣기에 평신도가 감히 사제의 신품에 대하여
왈가왈부하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고,
다만 지금부터 시비곡절을 가리는 논쟁을 시작해야 되겠
는데 ‘사제’라고 부르며 막말하기도 난감한 노릇이니 적어도
이 글이 끝날 때까지는 직품을 떠나서 하고픈 말 속
시원히 다 털어놓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보아 틀림이 없을 것이다.
4. 패륜은 다시 패륜으로 이어진다.
성명서는 “고령을 감안하고 막중한 직무를 존중하여 추기경에 대한
쓴 소리는 삼가고 삼갔다.”라고 조롱
인지 수인사인지 모를 빈정거림과 함께 참으로 듣기 민망할 정도의
험담을 퍼붓기 시작했다.
사제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되는 패륜의 한계에 육박하는
당신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원죄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해
아직도 뱀의 유혹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이 새삼스레 측은하고 애처로워진다.
이 뱀들이 지금 교회 내부에까지 파고들어 둥지를 틀고
온갖 유혹의 맹독을 거침없이 뿌려대고 있음을 확인한 이상, 어쩌
겠는가? 내 비록 변변찮고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하다지만
무디고 녹슨 칼이나마 뽑아들고 뱀 굴로 뛰어들지 않을
수가 없다.
추기경님이 어떤 분이신가?
개인적인 신망은 차치하고라도 추기경이라는 직품은
그 자체만으로 서울대교구의 수장이요, 전국사제들의 장상
이요, 한국 가톨릭의 머릿돌이고 상징이며 전 가톨릭신자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품격을 지닌 자리이다.
이런 분의 면전에서 당신들은 알몸을 거의 들어내고 종 주먹 대며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부를 편드시는 혹은
꼭 그래야만 하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중략
(“추기경께서 성경의 예언자들을 소개하기 위해 새 책을 썼다던데
그분의 예언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중락
(“시중에 나도는 4대강 ‘난개발’과 명동성당 ‘불법개발’이
한 통속이라는 소문이 자꾸만 솔깃하게 들린다.”)중력
(“새삼스레 지도자의 덕목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본다.”)중략
라고 볼품없이 배배꼬인 말 꽈배기 몇 개를 사람들 앞에
흔들어 보이면서 기세를 올린다. 이것이 정의와 생명을 입
버릇처럼 내세우는 ‘정구단’ 사제들이 만인 앞에서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장상을 향하여 내던지는 성명서의 한 단면
이다. 기가 막히고 숨이 멎을 것 같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참혹한 언어의 폭력이요, 참을 수 없는 악취가 진동
하는 언어의 쓰레기다. 교회 안에 있을 수 없는 일이요,
교회 안에서 절대로 용인되어서도 안 되는 반역적 패륜이다.
당신들의 언행을 보고 있자니 용돈이 부족하다고 부모를 두들겨 패는 못난이,
공부하란다고 부모를 불태워 죽이는 패륜아, 실속 없이 웃자라서
스승을 폭행하고 심지어 성희롱까지 서슴지 않는 것이 자랑인 얼간이
早熟兒들, 오직 국민만을 위한다면서 이권 싸움이라면 신들린 무당처럼
나대는 여의도의 철부지 어른들 .....등등이 꼬리를 물고 나타나
머릿속에 얼굴을 내민다.
이러한 합석이 어쩌다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고 하나의 맥락을 이루며
거대하고도 불길한 물줄기를 형성하려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싶어
더욱 시름이 깊어지는데 끝내 부루타스! 너도냐?
너까지 여기에 끼어
들어야 하겠느냐? 실로 낭떠러지 끝에서 굴러 떨어지는 듯한
절망 끝에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만다.
패륜은 다시 패륜으로 이어진다.
첫째로 당신들은 추기경님을 고이는 대부분의 신자들 가슴속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넣고 나서 무자비하게 후비고
도려내었다. 대부분의 성실한 평신도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분노하였는지 당신들 상상이라도 해보았는가?
양떼의 가슴팍을 물어뜯은 것이 목자가 아니고 차라리 이리였더라면
상처 입은 양들의 가슴팍이 이렇게까지 통째로
시퍼렇게 멍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목불인견이다.
부모나 형이 아들이나 동생의 물고를 내는 패륜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둘째로 당신들은 당신들이 존경하여 마지않는 주교회의의 권위마저 실추시켰다
당신들이 자신의 언행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주교회의의 4대강에 대한 언급내용이
필요했다면 반드시 주교회의의 허락을 얻고 나서 성명서에 인용했어야했다.
도대체 언제부터 당신들이 주교회의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언제 주교회의가 당신들에게 홍보업무를 위탁하였
는가? 주교회의의 공식적인 신임을 얻어오라! 주교회의의 의견이
당신들과 맞느냐? 맞지 않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한국교회사상 초유의 핵탄두급 자살폭탄 테러를 감행하는
아수라장에 당신들 멋대로 주교회의를 끌어드리는 발상,
그 자체가 방약무인한 무례이고 패륜이다.
주교회의는 당신들이 필요할 때에,
당신들 멋대로 손을 잡아끌어도 되는 당신
들의 예하기구가 아니다. 불한당들도 저희들 싸움판에 부모형제를
끌어들이지는 않는다.
추기경의 권위를 짓밟고 주교회의
의 권위마저 실추시키고 나면 당신들에게 남는 것이 무엇인가?
무엇이 그 빈자리를 메울 것인가? 그대들의 영광인가?
셋째로 그대들의 원로라는 자들이 서울 대교구장의 자진 사퇴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며 교구장을 핍박하였다.
이것은
자신들에게 교구장 해임권이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으니
교황성하의 인사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명색이 사제라면서 정신이상이 아니고서야 어찌 교황성하의 권위에
공개적으로 맞서려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이 광기를 벗어던지지 않고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다면
평신도가 앞장서서, 평신도의 주도하에 반드시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여기서 관용을 생각하며 어영부영 없었던 일로 덮어둔다면
일정기간의 잠복기를 보낸 후에 치명적인 악성종양으로 변해 결국 교회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게 될 것이다.
필자와 같은 일개 평신도가 감히 사제단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섞어가며
비판하는 파행 그 자체가 이러한 광기에서 직접적으로 연유되는 초기 암 증세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전염성이 아주 강한 악성패륜이다.
넷째로 그대들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기도하고 나서 어떤 자세로 기다려야 할지,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에 어떻게 순응해야 할지, 두서를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는
착란증세를 들어냄으로서 수많은 평신도들이 마음속에
신앙에 대한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당신들! 무슨 억하심정으로 선배,
동료 사제들이 피와 눈물과 땀으로 일백년이 넘
도록 쌓아놓은 업적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는가?
이 마당에 당신들의 원로라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젊음을 불살랐노라고 공치사가 한창인 모양인데 이것이 스스로를
얼마나 초라하게 만드는 철부지 짓이며, 골고타의 예수님을 향한
또 하나의 삿대질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진정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당신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다 해서 하느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
당신들이 아무리 악마와 절친한 사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당신들은 영원토록 사제로 남는다.
울화가 치민다 해서 함부로 무뢰배를 흉내 내도 좋은 신분이 아니다.
창녀가 빵을 위해 몸을 더럽힌 것과 규중규수가 쾌락을 탐해서
몸을 더럽힌 것은 죄질이 같을 수 없다.
한 사람은 곤장 몇
대에 끝나겠지만 한사람은 여러 사람의 돌팔매 앞에 서야 할 것이다.
5. 인간의 정의로는 절대로 어두움을 걷어내지 못한다.
인간의 정의는 희미한 국부조명에 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십수년간 당신들의 짓거리를 보아오며 말 못하는
벙어리 냉가슴 앓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를 뼈저리게 절감하
였다.
참기 어려울 때마다 그리스도께서 마지막에 남기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는 말씀을 수없이 되새기며 입에 재갈을 물리고 살아왔다.
군부독재를 무너뜨리고 정치적인 민주화를 이룩하는데
헌신한 당신들의 공로를 과소평가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몇 년 전인가 우리 교구에도 민주화 기념탑을 세운다는 말이 들렸다.
그것은 민주화의 완성을 선언하는 동시에 민주화
과정에서 당신들이 이룩한 공적을 내외에 과시할 필요를 느끼고 있다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과연 그러한가? 군사정권의 종식은 민주화의 첫 단추이지 완성이 아니다.
멀고도 험한 길, 민주화의 갈 길을 앞에 놓고 당신들은 갑자기 가던
길을 멈추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동시에 민주화는 헛바퀴를 돌기 시작했고,
다음 단추인 갈등 단계,
다시 말해 高聲不敗의 혼돈시대, 철부지 떼보들의 생떼 시대,
입만 달린 괴물들의 군무시대를 18년이나 보내고도 아직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오리무중을 헤매고 있다.
集團利己에 눈이 멀어 남이야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식으로 뒤죽박죽 얽혀버린 그물
에 걸려 몸부림치는 것이 아마도 우리의 민주주의가 처한 현주소일 것이다.
여기에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반민주 파괴
세력과 묘하게도 발맞추면서 들어나지 않게 세운 당신들의 공로
또한 만만치 않음을 부정할 수 없다.
당신들은 민주화의
투사로서 지켜야할 원칙을 시종일관하여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곳에 따라, 때에 따라 적당히 휘고 옆길로 새기가 일수
라면 그 운동은 결국 민주주의의 파괴를 향하여 줄달음질치는 역주행일 뿐이다.
당신들이 심혈을 기울여 구현했다는 정의의 면면을 몇 가지만 되짚어본다.
‘정구단’은 소위 김용철의 양심선언을 통하여
삼성그룹의 조세포탈 혐의를 규명하는데 용감하게 앞장섰었다.
추호도 삼성의 비리를 비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문제
는 왜 하필이면 우리가 남의 이불속까지 파고들어가 그 치부를
요모조모로 떠들어보아야 하고 나아가서 남들 앞에 그것
을 시시콜콜 발겨내야 하는 신성한?
사명을 당국을 대신하여
천주교 사제단의 이름으로 스스로, 기꺼이, 짊어져야 한다는
말인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삼성에 들어가 잔뼈가 굵어질
때까지 삼성의 부정에 견마지로를 다하여 협력한 대가로
남부럽지 않게 살아온 직장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양심이라는
이름을 빌려 과거의 주인을 난도질하는 자리에 자랑
스러운 모습으로 당당하게 얼굴을 내미는 일단의 사제들을 바라보며
교회 전체가 머리통부터 발끝까지 온통 오물을 뒤집
어쓰는 듯한 수치감에 얼굴 들고 나다니기조차 부끄럽던
기억이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
조선시대에 탐관오리들이 무고한 백성의 주리를 틀 때,
즐겨 쓰던 전가의 보도가 있었으니 이르기를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라는 금과옥조였다. 나도 이 편리한 말의 덕을 좀 보려 한다.
“삼성 사건에 앞장섰던 진짜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당신들은
알고도 남음이 있으렸다!!”
어디 이뿐인가?.
‘정구단’의 구성원 중 몇몇은 교회를 하나의 전시품으로 전락 시키는 데
남다른 공적을 세운 바 있었으니 비운에 가신
노무현 전 대통령 국장 때의 일이었다.
스님들이 나오셔서 불교의식에 따라
고인의 명복을 빌고 단하로 내려가는가 싶었는
데 난데없는 신부 셋이서 올라와 가톨릭의 전통 의식에 따라
집전을 끝내고 내려간다.
다음에 다시 개신교 목사, 그 다음에는
원불교 교직자가 차례로 올라와서 제각기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이를 지켜보던 내 얼굴이 쓴웃음으로 뒤틀리다말고 차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붉어진다.
유가족이 고인의 유골을 사찰에 봉안하기로
결정한 이상 불교의식 하나 만으로 족하다. 스님
들이 정성껏 마음을 다해 부처님의 자비를 빌어드렸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만장의 조객들이 조용하게 각자의 종교에 따라,
한마음으로 지성껏 고달펐던 고혼의 안식을 빌어드렸으면 그것으로 되는 것이다.
잘~ 그린 불화에 구태여 서양 붓으로
서양물감을 덧칠한다고 해서 그 그림이 더 좋아지는가?
그림을 망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원작자에게 더할 수 없는 모욕을
퍼붓는 결과가 된다.
남대문 시장 상인들의 유객 행위도 아닌 터에 육체를 갓 떠난
고혼을 사방에서 잡아당겨 곤혹스럽게 만든다면
이 또한 산 사람들의 도리가 아니요, 고인에 대한 무례이고 불경이다.
여기가 종교 박람회장인가? 아니면 종교의식 관광코스인가?
“오늘은 절간으로, 내일은 천주교회로, 모레는 기독교로,
글피는 원불교로 여기저기 패키지코스를 한가하게 돌아보며 극락의
고요 속에 마음 곱게 빗질하고, 천국의 평화 속에 마음 차분히 달래보고,
천당의 사랑 속에 마음 따뜻이 데워보고, 진리의 참
세상에 마음 깨끗이 씻어보고 하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경사가 어디에 또 있으리오?
과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홍복이옵니다.
경하 드리나이다.” 이런 의미인가?
그도 아니면 고인의 영혼이 유일신이 되어 四大종교를 통합하였으니
사인교를 꾸며서 그 위에 번듯하게 모셔보자는 의미인가?
대한민국 종교계의 현주소가 이쯤이라면 불쌍한 것은 순박한 신자들이요,
큰일인 것은 나라일 뿐이다.
종교란 이승의 삶과
내세의 삶을 연결하는 죽음의 외나무다리를 떨어지지 않고 건너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교는
진검승부보다도 더 진지한 것이다.
상품이 아님은 물론이요, 장식품이어서도 안 되고, 더더구나 놀이일 수는 없는 것이다.
너무 배타적인 것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종교의식을 합동으로
거행한대서야 말이 되지를 않는다.
이 속빈 강정들아! 염치없는 위선자들아! 낯 두꺼운 사기꾼들아!!
하늘의 엄위함을 전해야 할 사람들이 하늘을 돈벌이용 연극 공연장으로 만들려고
작심하였단 말인가?
거기에 얼굴을 내밀었던 신부의 면면을 알만 한 사람은 다 안다.
불자로 타계한 고인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자기이었노라고
자부심이 대단한 신부도 있었다. 고인이 누렸던 국민적 인기와
애도의 후광을 곁불로라도 한번 쪼여보는 것이 그리도 커다란 기쁨이요
영광이었던 모양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돌아와서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예수님께 무어라고 말씀 드렸을까?
“다행히 국장에 참례하여 두 번째로라도 이름을 올려놓고 한 몫 하였습니다.
그 양반의 영혼을 불국 정토에서 빼내어오라
하시면 그리 하겠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여기 제가 있습니다.”라고 하였을까?
생각할수록 끔찍한 일이다!
광우병의 회오리!! 처음에는 산들바람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차차 바람이 거세지더니 나중에는 거대한 돌풍으로
변해 온 나라를 집어 삼킬 듯이 휘몰아쳤다. 그 중심에 ‘정구단’이
우뚝 서서 광우병의 깃발을 휘두르며 국민을 둘로 찢고
나라를 흔드는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그 때에 두드려대던 당신들의 꽹과리 소리가 모두 빈 깡통소리였음이 백일하
에 드러난 지금, 부서져버린 양심 쪼가리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웅크리고 숨어있어야지 어쩌자고 또
‘생명’이라는 깃발을 휘두르며 나 보라는 듯 거리를 활보하려는 것인지
참으로 그 후안무치함에 할 말을 잃고 만다.
파렴치 지수 일백을 돌파하는 진기록을 수립하였으니
기네스북에 올리도록 백방으로 힘써서 청사에 기리 남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자연생태계의 보존에 이의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4대강 토목공사만은 반드시
중지시켜야겠다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당신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공사현장은 완공을 향하여 치닫고
있으니 그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가 대재앙이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생태계의 복원이 될지, 얼마 안 가서 밝혀질 터이다.
문제의 핵심은 오히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무자비하게 제거시켜버리고야 말겠다는 사고방식에
있다. 독재시절을 대표하는 구태의 상징물을 한 점,
한 획도 빠뜨리지 않고 완벽하게 재생하고 있는 것이 바로 역전의 민주
투사들이라니 참으로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정의도 이현령비현령으로 세월 따라, 입장 따라 적당히 변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또 깨달아야 하는 팔자의 운명이 참으로 기구하다.
국민정부 시절이었던가?
맹인들의 생업이었던 안마시술 업이
멀쩡한 사람들에 의하여 무참히 유린당하는 만행이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데도 ‘정의구현 사제단’! 당신들은 일언반구도 말이 없이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고 오늘날까지도 그 특유의 도덕
불감증은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그 끈질긴 역사와 전통을 면면이 이어가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을 막론하고 성도덕이 땅에 떨어져 불륜이
범람하고 종당에는 성가정의 기반까지 흔들릴 지경에 이르러도,
전국 학력고사에서 교사들끼리 야합하여
자기네 학교의 평균성적을
태연히 날조할 정도로 교육계의 집단적 양심마비 증상이
골수에 깊어도, 입시지옥에 시달리다 못한 학생들이 배타적,
고립적 사고의 인간으로 변질되어 가슴 한쪽이 녹아 없어진 이면에는 어른들의
추악한 허영심이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제자식의 피를 빨고 있어도,
같은 사건의 판결이 법관에 따라서 정반대로 뒤집히는 무원칙이 횡행하여도,
전관예우라는 불문율에 편승하여 법조계 원로라는 사람들이 법 앞에서,
법으로, 법을 농락하며 암묵적 담합으로 모리배보다
더한 짓을 하고도 양심의 가책은커녕 당당한 위풍으로 하늘을 가려도,
염불보다 잿밥에 눈이 어두워진 정치인들이 쏟아내는 구정물 썩는 냄새에
중독 된 국민들의 코 역시 어느 것이 향기이고,
어느
것이 악취인지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썩어문드러지고 말았어도,
이리저리 얽히고설킨 이익 집단들이 옳고 그름을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않고 오직 집단이익에만 눈이 멀어 너나할 것 없이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 되어도,
사촌 논사면 배 아프다는 극단적 경쟁의식에 젖어 너 살고 나 살자는
생각보다는 너 죽고 나 죽자는 배타의식이 모두를 공멸의 늪으로 끌어들여도,
인민의 기아를 딛고 개발한 핵이 비수로 변해 동족의 목줄을 겨누어도,
인권의 동토에서 울부짖는 동족의 통곡이 하늘에 닿고 땅속에 메아리저도,
.....등등, 이런 곳에는 그 요란한 당신들의 정의가
꼬리를 내리고 엎드려서 어디로 숨었는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사람 낚는 어부들이 사람 썩는 곳에는 얼씬도 않으면서
강물 썩는다고 호들갑을 떨고 사람이 줄줄이 죽어나가는 곳에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물고기 죽는다고 난리굿판을 벌리니 그대들의 정의가
어쩌다가 이렇게도 지독한 사팔뜨기 편집증에 걸려 볼품없는
몰골로 말라 비틀어졌단 말인가? 그 해맑던 정의의 요절에 애끊는 조의를 표한다.
당신들이 지나갔던 길목에 뚜렷이 남아있는 발자국 몇 개가 눈에 뜨이기에
궁금증이 들어 자세히 살펴보았다.
근래에 우리 국어가 암세포에 전이되었음인지 언론에
자주 사용하는 상당수 용어의 말뜻이 불과 몇 년 사이에 사전을 다시
고쳐 써야할 정도로 심각하게 굴절되어 있다.
예를 들어“민주주의”,
“국민의 뜻에 따라”, “마음을 비우고”, “진보”, “좌파”,
“개혁”과 같은 말들이 본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오 남용되고 있는데,
여기에 그대들이 “양심”, “정의”, “화해”와 “일치”
를 추가하였고 이번에는 “사제”, “궤변”, “용퇴”, “반공”이라는 말까지
날렵하게 끼워 넣는 전과를 올렸다.
그 신출귀몰의 맹약
에는 탄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당신들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말들의 뜻을 비틀어놓을 것 인지
실로 걱정이 태산 같다.
정의는 치우치지 않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휘어져있지 않고
올곧아야 하는 것이니 한쪽으로 치우치고 비틀어져있다면 그것은
이미 정의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애를 써도 결국
한편으로 치우쳐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간사고의 한계이니
그래서 인간이 말하는 정의는 참다운 정의일 수가 없는 것이다.
감히 단언한다. 인간의 정의로는 절대로 어두움을 걷어내지 못한다
.
인간의 정의는 어두움 속에서 반짝이다 속절없이 사라지는
반딧불처럼 희미한 국부조명에 에 불과할 뿐이다. 인간의 정의가
아무리 밝아도 새벽의 어두움을 뚫고 솟아오르는 태양일 수는 없는 것이다.
6. 당신들 정말 교회를 사랑하는가? 사제이기 전에 신자! 맞는가?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추기경님 말씀의 진의는 4대강 문제에 대한
찬반자체를 논하기보다 “그런 현실적 문제에 교회가
끝까지 집착한다는 것은 교회의 본령을 벗어나는 일일 수도 있다.” 라는
취지였을 것으로 안다.
여기에 정구단이 쌍지팡이를
짚고 나섰으며 세칭 원로단(원로 사제에서 “사제”를 생략 )도
팔뚝을 걷어 부치고 두 주먹을 부르쥐며 뛰어들었다.
추기경님은 이러한 망동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려던
교구 긴급 사제회의에 자중을 권유하시고 “화합과 일치를 위해 기도하자”
고 앞장서시었다.
구원이었다. 이것은 망언을 자행한 저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해야 한다는 결심이요,
결단이었다. 용서라기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온전히 의탁하는 믿음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참된 용기와 인내의 結晶이었다.
이 진정한 용기 앞에 숙연히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한다
.
추기경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기경님의
이 한 말씀으로 고통 받으시던 예수님과 평신도들의 얼굴에 다시 화색이 돌기
시작합니다.
만약에 긴급 사제회의에서 징계가 운위되고 사제가
양편으로 갈라서서 피 터지는 편싸움을 버렸다면 저는 아마도
십자가 봇짐에 싸서 짊어지고 교회를 바라보며 허무의 눈물
한번 뿌린 다음에 영원히 발길을 돌렸을지도 모릅니다.
다 아는 옛날얘기 하나가 새삼 머리에 떠오른다.
어린아이 하나를 놓고 각기 자기가 친어미라고 두 여자가 서로 다투고 있었다.
싸움은 재판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판관의
결심이 섰다. “아이를 양쪽에서 당겨라! 이기는 쪽을 친어미로 하겠다!”는
선고가 떨어졌고 당기기가 시작되었다.
팔이 찢어질
듯 아픈 아이가 숨넘어갈 듯 울자 한쪽이 눈물을 삼키며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고
승자는 춤을 추었다. 그러자 판관이 다시 이르기를 “당기기에 진 어미가
아이를 데려가라!! 네가 진실로 친어미 이니라!”
당신들은 더는 당길 수 없어 교회의 팔을 놓을 수밖에 없었는가?
아니면 찢어져 피를 볼 때까지 당기려 하였는가?
묻노니 과연 그대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교회를 사랑하는가?
사제이기 전에 신자! 맞는가?
7. 왜인가? 어째서인가? 무엇 때문인가?
당신들은 “유감스럽지만 4대강공사 때문에 빚어진
교회분열의 가장 큰 책임은 추기경께 돌아간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라고 필살의 장풍을 날렸다.
교회의 팔이 떨어질
정도로 찢어놓고서는 재빠르게 발을 빼며 네 탓이
었노라고 상대의 심장에 비수를 꽂는 기민성과 교활성,
그리고 그 잔인함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이것은 절대로 사제의 표양이 아니다. 지고 가야할 십자가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결단코 교회의 일치를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사명감보다 교회가 분열되는 한이 있어도 우리의 양보는
있을 수 없다는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측면이 훨씬
강하다.
절대적인 신분보장이라는 방패 뒤에서 무소불위,
無事不成의 경지에 이르러 거칠 것이 없는 정의의 사도들
이시여! 착각하지 마시오! 교회 내에서 당신들 목소리가 홀로
우렁차게 울리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다수가 입을 봉한
채, 인내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조금은 눈치 채야 하는 것 아니겠소?
당신들의 輕擧 때문에 상심하고 말없이 교회를
떠나가는 양이 상당수 있다는 것을, 교회를 찾아오던 수많은
양떼가 당신들의 妄動 때문에 고개를 저으며 발길을 돌렸다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한마디로 당신들은 교회의 기생충이다! 교회 안에 몸담고 있으면서
교회야 어찌되든 오직 나 하나 건사하면 그만
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들을 기생충이라고 부르지 않고 무어라 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내 뜻을 이루는
것만이 곧 교회가 사는 길이요, 내 뜻이 꺾인다면 이것이 곧 교회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환각에 빠진 무리가 있다면
이야말로 뱃속에 독충을 품고 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다.
만인의 구원을 위하여 성자 그리스도께서 세워주신 교회!
순교성현들의 피로 축대를 쌓고 그 눈물로 터전을 다졌던 한국 교회!
수많은 성직자, 수도자의 땀을 먹고 자라난 우리 교회!
그대들이 청춘을 불살라 헌신하려했던 그 교회를
왜, 어째서 스스로 허물어버리려 하는가?
인간에게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랑할 의무가 있을 뿐,
자의로 하느님을 선택할 권리는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신심이
깊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일수록 부지불식간에 하느님을 자신의
취향에 맞도록 성형 수술해놓고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만의 찬미와 경배에 몰두하다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이에게까지도 이것을 강요하는 일이 비일비재함을 우리는
역사와 체험을 통하여 알고 있다.
홍해의 기적을 보고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우상숭배의 유혹에 빠졌었다.
그대들이 믿고 따르던 사랑의 하느님께서 왜 지금은 교회를 흔들고
나라를 부수고 닥치는 대로 찢고 흩으려 드는 파괴의
하느님으로 변하였는가? 왜 작은 것에 집착하여 더 큰 것을 보지
못하는 무분별한 하느님으로 변하였는가? 어째서인가?
무엇 때문인가?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는 사람”)
성명서는 이렇게 시작되고 아래의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평화의 경륜’이나 벼랑 끝에 몰린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의 지혜’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대화를 촉구하고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던
교황들의 심정을 대변해야 할 추기경이 대중의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미움이나 부추기는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다.”)
그랬었다. 성명서의 첫 머리에서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는 사람”) 이라고
당신들은 읊조렸다. 지난번에 창궐한 광우병 때문에 뇌신경에
입혀진 손상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는지는 모르겠
지만 자기가 하는 말의 뜻이 무엇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 말을 뒤집어 말하면 “ ‘정구단’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종이고, 추기경은 죄의 종이 되어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다.
”라는 뜻이 된다. 이것은 욕설의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저주이다. 그것도 철천지한이 맺힌 저주중의 저주이다.
설사 영겁의 세월이 흘러도 씻겨지지 않을
만큼 한이 서려있다 하더라도 이것을 지워 없애려고 애쓰는 것이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의 도리이거늘 시국관이
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갈며 저주를 토해낸다는 것은 스스로
‘순종하는 종’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이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나는 의이고 너는 불의다.”라고 절규한다.
가소롭다. 의사당 안에서나 들을 법한 이런 말을
사제단의 입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듣게 되다니! 그래서
이 글의 첫머리에 경천동지의 변괴라고 하였다.
유치한 이야기 또 한마디 하고 넘어간다. 이제껏 살면서 시험 잘 쳤다고
뻐기는 학생 쳐놓고 성적 잘나오는 것을
본적이 없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 한 점 없다고 장담하는 사람 쳐놓고
올바른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무엇이 그대들을 이러한 단세포 동물로 퇴화 시키고 말았는가?
그대들이 말하는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평화의 경륜’이나
벼랑 끝에 몰린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의 지혜’”
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아보고 싶지만 그 화려하고 고압적인
언어의 기세에 눌려 맞설 용기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비유의 형식이라도 빌려서 그대들이 나라에 대하여 평소에
보여준 몸가짐을 살펴보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엄청난 산통을 겪으며 어렵사리 태어난 대한민국이 그 열악했던
출생환경을 딛고 하고많은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
에서 비록 갖가지의 상처와 지병을 얻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더라도
그 품속에서 자란 것이 바로 우리이고 그 터전
에 꽃 피운 것이 우리의 교회이다.
이제 엄마가 병마에 몸져누웠는데 의사가 되어 돌아온 아들은 고난 속에 거칠어진
엄마의 손 부여잡고 단장의 아픔을 못 이겨 오열하기는커녕,
어름처럼 차디찬 손에 정의라는 메스를 들고 아물어가는
상처까지 사정없이 찢어발기며 왜 조심 하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렸느냐고
핀잔이나 퍼붓는 것이 효도인줄 알고
있으니 아들 기다리며 눈물 닦던 손수건이
이제는 피눈물에 젖어 검붉게 물들고 만다.
어떻게 생겨먹은 정의가 그리도 편벽되고, 차갑고, 질수가 있단 말인가?
왜인가? 어째서인가?
8. 표리부동에서 벗어나시오. 그것이 “정의구현”의 첫걸음입니다.
그대들이 다시 이르기를
(그러나 남북대화를 촉구하고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던
교황들의 심정을 대변해야 할 추기경이 대중의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미움이나 부추기는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다.”)
라고 비분강개한다.
지금이 어느 때인가? 태평성대인가?
46명의 무고한 젊은이들을 수장시키고도 성이 차지 않아
대한민국의 영토에 포탄을 퍼부으며 군인은 물론 민간인
까지 살상하는 지옥의 칼춤이 아직도 살기가 등등하여 피를 부르고 있는 이 마당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천인공노의 공분”을 느꼈어야 하고 국민이라면
의당 “국민적 분노”에 몸을 떨었어야 하거늘 “대중의 흥분”이고 “미움”이라니!
내 나라와 내 국민이 이렇게까지 당했는데도 당신들의 눈에는
“천인공노의 공분”이 한낱 “대중의 흥분”으로
,
“국민적 분노”가 천박한 “미움”으로 밖에 비쳐지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누구이며 무엇을
하려는 사람들인지 그 정체부터 스스로 밝혀야한다.
이것은 나라와 국민을 명백하게 배반하는 반역행위이다.
배반자들에게 묻는다. 장차 무슨 낯으로 대한민국 국민들과
살을 부비며 얼굴을 마주하고 살아갈 배짱인가?
추기경께서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다.”라고 마침내 그대들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리도 삼가고 삼가왔다던 말이 바로 이 말이라면
좀 더 삼가고 삼갔어야 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 ‘정구단’이
골수 용공주의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으니 이야말로 교회의
커다란 행운이다”라는 말이 된다. 말실수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당하게 본색을 밝힌 자백이다
.
용공과 반공의 대결이라면 절대 뒤로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니 차라리 먼저 칼을 뽑아드는 것이 상책이다.
묻노니 추호라도 토를 달 생각 말고 단답형
으로 빼놓지 말고 정직하게 답변하라!
교회를 사랑하는 정의와 민주의 투사들이여!
공산주의와 독재는 친 교회적인가? 반 교회적인가?
한반도 북쪽에는 민주주의가 살아있는가? 죽었는가?
반공은 반민주이고 용공은 민주인가?
대한민국은 당신들이 지켜야할 자유의 요람인가?
아니면 말살해야 할 제국주의 식민 잔재인가?
답신을 기다리는 동안 주제넘은 대로 귀에 익은
당신들의 구호를 답 대신 인용해 본다.
“반공, 용공 양편으로
편부터 가르는 작태야 말로 시대착오적인 수구세력들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나오는 반동적 음모이다. 우리는
오직 민족의 자주독립, 화해와 통일, 통일된 조국과 민족의
평등적 번영을 위하여 헌신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민족’은 당신들이
논리에 궁할 때에 방패로나 써먹으라고 만들어놓은
말이 아니다. 國史가 배워도, 안 배워도 좋은 선택과목으로 전락되었을 때,
당신들은 손끝 하나 까딱 않고 있었다.
추기경님 기자간담 이후 이틀이 지나기도 전에 단체성명서를 드려대는
그 순발력은 어디에 숨겨놓고 꿀 먹은 벙어리처럼 쥐죽은 듯 조용하였는가?
그러고도 아무 때나 편한대로 “민족”을 앞세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당신들이 즐겨 쓰는 말 가운데 이씨조선인지, 북한인지,
대한민국인지, 앞으로 건국하려는 새 나라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한 말 “조국”이 있다
.
그러니 답변을 하려거든 “민족”과 “조국”이라는 두 단어를
빼놓고 해주어야 답변으로서 인정된다는 점, 다시 말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게 된다는 점을 명심하기 바란다.
구태여 당신들의 자백을 빌리지 않더라도, 남쪽이 비위에 거슬린다 하여
핵 공갈을 일삼는 북쪽과, 추기경의
어조에 심사가 뒤틀린다 하여 “용퇴”라는 말 폭탄을 터뜨리는
당신들의 모습에서 둘 사이에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공유되고 있는 인식의 틀이 엄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그대들의 정의는 正義를
벗어나 酊義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酊 ;술 취할 정) 술에 취해 사안의 옳고
그름과 사태의 경중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얼굴이 붉어졌다 해서
정신마저 붉어지면 안 되는데 붉은 것만 집어 드는 偏色
症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다면 차라리 살고 싶은 곳의
국적이라도 마음대로 취득하게 내버려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
사랑하지도 않는 나라에 살면서 계속 그 신세를 지는 것은
떳떳하지도 못할 뿐더러 의롭지도 않은 것이니
이 나라가 싫거든 차라리 떠나시오! 떠날 수 없거든 본색이라도
당당히 밝혀야 하오! 그래도 막상 헤어지기가
조금이라도 아쉽거든 조건 달지 말고 대한민국을 사랑하시오!
표리부동에서 벗어나는 것이 “정의구현”의 첫걸음입니다!
9. 성경을 읽으며 그대들을 생각한다.
합창에서 보듯이 각기 다른 음들이 서로 상응하고 어울리면
아름다운 하나의 화음을 이루어낸다. 그런데
여기에 불협화음이 끼어들어 서로 어깃장을 놓으면 화음은커녕,
참기 어려운 소음으로 돌변하고 만다.
당신들의 불협화음이 내는 소음을 견디다 못해 마태복음부터 다시 읽으며
마음을 추슬러 보려하는데 구절마다
그대들이 앞을 가로막고 나서며 코웃음치고 비아냥거린다.
나 역시 이에 질세라 한껏 눈을 흘기고 주먹을
흔들어대며 기죽지 않으려고 악을 쓴다. 그 꼴이 남세스러워
그냥 덮어두고 갈까 하였지만 역시 깨끗이 털어
내고 가는 편이 홀가분할 것 같아 마음을 바꿔먹는다.
5장-13절 ; (원문)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 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나의 말) 소금이 물에 녹아야 짠 맛을 낼 터인데 날이 갈수록 형체를
들어내며 덩치를 불려가니 종당에는 소금바위가 되어 굴러와 우리를
깔아뭉갤 것이다.
5장-16절 ; (원문)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내말) 당신들이 우리 앞길을 비추는 등불인줄 알았는데
정신차리고 보니 우리 집 처마 끝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6장-3절 ; (원문)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정구단의 변) 주님! 자선과 정의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둘 다 꽃이기는 매한가지로되 자선은 음지
에서, 정의는 양지에서만 피어나는 꽃이랍니다.
6장-6절 ; (원문)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정구단) 네! 틀림없이 골방으로 숨으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기자들에게 들키고 말았으니 저희
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
7장-5절 (원문)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정구단) 결단코 우리 ‘정구단’눈에 들보나 티눈 같은 것은 없습니다.
억지로라도 빼내야 한다면 ‘정의’라는 이름의 콘택트렌즈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 색깔이 좀 붉은 것뿐이지 다른 티는 하나도 없습니다
.
7장-21절 (원문)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내말) 정의를 입으로 외친다고 정의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의의 길은 천국으로 통하는 가시밭길이지 무개차 타고
방송국으로 직행하는 포장도로가 아니다.
7장-22절, 23절 ; (원문)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이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
내게서 물러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聯想) 그날에 ‘정구단’이 주님께 ‘주님, 주님!’ 저희가 정의의 이름으로
재계를 정화하고, 정의의 이름
으로 교회를 성화하고, 정의의 이름으로 민족의 화합을 도모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고할 때, 주님께서 “내가 먼저 안다.
내게서 물러나라! 이 정의의 옷만 걸친 바리사이들
아!”하고 고개를 돌리실 것이다.
8장-22절 (원문)“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연상) 너는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라.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이 하게 내버려 두어라.
9장-13절 (원문)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내말) 정의의 사도들이시여! 이 말씀 다시 새겨들으소서.
12장-34절, (원문)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한데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 사실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
(연상) 들을 귀가 있는 자는 알아들어라!
15장-8절 ; (원문)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내말) 과연 예언자 이사야 이십니다.
18장-22절 ; (원문)“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정구단) 좌측 손의 잘못은 만 번이라도 용서해야하고
우측 손의 잘못은 단 한번이라도 용서해서는
안 되며 붉은 손의 잘못은 아예 보지도 말
아야 하는 것이 주님의 뜻 이니라.
19장-17절 ; (원문)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분뿐
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연상) 어찌하여 너희가 정의를 입에 올리느냐? 정의로운
분은 한분 뿐이시다. 진실로 네가 정의
를 원하거든 입은 다물고 귀를 열고 너의 등을 돌려대어라.
19장-24절 ; (원문)“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연상) 썩어나는 밀과 보리로 창고를 가득 채운 사람이나,
독선과 오만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운 사람
이나 하늘나라 가는 길이 바늘구멍 이기는 매한가지일 것이다.
19장-30절 ; (원문)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내말) 이 사람들 지금 자신들이 첫째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22-21 ; (원문)“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연상) 세상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하느님의 몫은 하느님께 돌려라! 너희 종들의 몫은 하나도,
둘도, 복음 전파뿐이니라!
23-15 (원문)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버리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는다.
(내말) 불행하여라. 현대판 바리사이들아! 당신들 때문에
목장 안에 있던 많은 양떼가 울타리 너머로
떠나갔고 들어오려던 양떼도 수없이 발 길을 돌렸다.
주님! 저 고집쟁이, 사팔눈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23-26 ; (원문)눈먼 바리사이야! 먼저 잔속을 깨끗이 하여라.
그러면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
(연상) 눈먼 현대판 바리사이야! 먼저 너희들 마음속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증오와 영웅심과 편견
부터 털어내고 참다운 정의로 채워 보아라.
그러면 입술이 아닌 땀구멍을 통하여 정의가 절로
배어나올 것이다.
10.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간판은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지금 누가 나에게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대답을 못하고 망설일 것입니다. 입교하면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이 정의와 사랑, 그리고 감사와 평화와
겸손인데 알듯알듯하다가도 모르겠고, 들으면
들을수록 그 뜻이 새로워지는 말이 바로 이 말들입니다
.
참으로 신비로우면서도 끝 모를 깊은 뜻이 담겨있습
니다. 좀 더 간결, 명료하게 말뜻의 윤곽만이라도 알아볼 수는
없을까하고 궁리 끝에 “정의와 사랑”, “감사”와
“겸손” 그리고 “평화”라는 말을 수식어로 섞어서 주님의
도문을 다시 써보았습니다. (망발이라면 용서를 빕
니다.)
하늘의 “정의와 사랑”이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인 “정의와 사랑”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 나라의 “정의와 사랑”을 이곳에도 전하시어
아버지의 뜻인 “정의와 사랑”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을 “감사”로 받자옵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겸손”으로 용서하오니
“정의와 사랑”을 저버린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가 유혹에 빠져서 “평화”를 잃지 않게 하시고
“겸손”앞에 악마가 스스로 무릎 꿇게 하소서.
이러고 보니 참으로 놀랍게도 주님의 기도문 속에서 이 말들이
가족처럼 서로 화답하며 어울리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삼위일체로
하나의 하느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의”
“사랑” “겸손”의 세 단어도 삼어일체로 “평화” 하나를 의미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
뿐만 아니라 “정의”
“사랑” “겸손” 그리고 “평화”는 결국 성부와 성자와 성령
그리고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마치 칠흑 어두움 속에서 불꽃이 터져
나오듯 섬광이 번쩍이며 인간이 감히
“정의”의 이름으로 무엇을 장담한다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외람되고 섣부른 짓인지 그 초라한 모습
이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하느님 구원계획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정의구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칩니다.
이름 하여 “정의구현사제단!!” 얼핏 듣기에 참 좋은 이름이다
. 그러나 정의구현 청년단이나, 정의구현 노동
연맹 같은 이름이라면 그런대로 애교가 있지만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면
개발에 편자라고나 할까?
마치 시골
머슴이 집신 신은 채로 베잠방이 위에 주인의 양복 윗저고리
한 벌 걸쳐 입고 주인인양 거들먹거리는 주제꼴을
대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민망스럽다.
이제까지 인간에 의하여
구현된 정의는 오직 인간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일 뿐이고 앞으로도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는 오직 이 하나뿐일 것이다.
당연히 ‘정의구현’과 ‘사제’라는 말은
동격으로 연결되어 사용될 수 없는 말이다.
“이 세상에 정의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고 하느님
구원사업의 최종 着点 역시 정의구현이다.
하느님창조사업의 정점에 우리 인간이 있고,
인간창조의 정점에 “정의와 사랑”이 있다.”라고 감히 결론짓는다
.
아무리 시간이 걸릴망정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이 땅에
정의와 사랑이 충만한 평화를 이룩하실 것이다. 평화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우리는 먼저 떠나가겠지만 정의와
평화 쪽으로 머리를 두고 살다가 떠나면 그때 주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평화의 나라로 품어 안고 가실 것이다.
그것을 믿기에 오늘도 주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의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것이다.
변함없이 끈질기게 정의를 추구 하십시오.
그러나 “정의구현 사제단”이라는 간판은 내려져야 마땅합니다.
만약에 “정의구현사제”임을 끝내 포기할 수 없다면 그것은
“내가 곧 주님의 분신이노라”고 만천하에 선포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11. 하느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날마다
내가 어제 한 일 중에 주님의 평화에 어긋난 일은 없었는지?
내가 어제 주님의 평화를 위하여 무엇을 봉헌하였는지?
내가 오늘 하려는 일 가운데 주님의 정의에 어긋나는 일은 없을는지?
나는 오늘 주님의 정의를 위해 무엇을 봉헌하려 하는지?
죄 짖는 이들의 죄만 보지 말고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가
등잔에 기름 채우고 심지에 불 붙여 어두움을 쫓아내주려고 애썼는지?
세상 썩는 냄새가 구리다고 고개 돌리거나 소란 떨지 말고
나 스스로 짜디짠 소금이 되어 그들 속에 녹아들려고 애썼는지?
조급한 나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뜻에 맞는 우상을 만들어
주님 옆자리에 앉혀놓고 내 뜻대로 살려고 발버둥친 적은 없었는지?
끊임없이 성찰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 가신 길 따르도록
기도하며 열심히 살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믿습니다. 사제단 여러분들이 진리탐구의 험한 벼랑길을
맨발로 오르다가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피범벅
이 된 것은 더욱 훌륭한 사제로 키우려는 주님의 채찍이라는 것을....
반드시 이 고통을 이기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일어나서 오르던 길 다시 올라야 합니다.
참으로 외람된 그러나 간곡한 말씀 한마디 올립니다.
이제 그만 교회 안으로 돌아오십시오.
주님께서 집나간 아들을 눈 빠지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돌아오시면 저 같은 일꾼들에게 아드님을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라고 하시겠지요.
잡고말고요. 기꺼이 고기 드시고, 옷 갈아입고, 춤 한번 추시고 나서
우리와 함께 들녘으로 나가 죄인들끼리 손잡고 소리 내어 실컷 울어봅시다.
모든 앙금 눈 녹이듯 다 녹여버리고 하느님 품안에 함께 안겨보십시다.
하느님의 품은 참으로 넓고 크고 따뜻하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주님! 저와 저분들이 지은 죄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어
사랑으로 미움을 삭이고, 겸손으로 오만을 누르며,
포용으로 분열을 막고, 넓음으로 좁음을 감싸게 하여주소서.
저희들의 마음을 언제나 똑바르게 바루어주시고 깨끗이 씻어주시어
모든 이들이 바르게 보고, 바르게 들으며, 바르게 말하고,
바른 것에 맛들이며, 바른 것을 숨 쉬고 바른 길 가게 하시어
이 나라와 우리의 교회가 주님 보시기에 참으로 좋은 나라와 교회로
거듭거듭 새로 날 수 있도록 특별히, 아주 특별히 보살펴 주시옵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첨부자료 [성명서] 추기경의 궤변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는 사람” (로마서 6,15-23)
“고령을 감안하고 막중한 직무를 존중하여 추기경에 대한
쓴 소리는 삼가고 삼갔다.”
그런데 더 이상의 인내는 별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게 되었으니
최근의 언행이 생명과 평화라는 보편가치에
위배되고 사도좌의 가르침마저 심각하게 거스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12월 8일의 기자간담회의 말씀은
교회 안팎에 엄청난 파문과 혼란을 일으켰다.”
추기경은 파괴를 위한 개발과 발전을 위한 개발은 구분되어야 한다며
현행 4대강사업이 ‘파괴적 개발’인지
‘발전적 개발’인지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하셨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정부를 편드시는 혹은 꼭 그래
야만 하는 남모르는 고충이라도 있는 것인지 여쭙고 싶다.
더욱 심각한 사실은 사견을 밝힌 것이 아니라 주교
회의의 결정을 함부로 왜곡하셨다는 점이다.
“주교단이 4대강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했다. 오히려 (주교회의 성명은)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경향신문 12.8)
아, 이게 무슨 말씀인가! 그렇다면 “평화를 이루려면 피조물을 보호하라”는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2010년도
신년 메시지는 어떤 호소였을까? 또 “조상 대대로 금수강산이라
일컫던 자연 환경은 우리의 무관심과 어리석음
으로 망가졌고, 지금도 자연 파괴는 계속되고 있다.
...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4대강에서 동시에 벌어지고
있는 4대강사업은 대표적인 난개발”이라는 주교회의
거듭된 질타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창조질서회복을 위한
우리의 책임과 실천, 2010.10.27) 추기경의 과오는
사도좌의 높은 가르침을 거슬렀다는 것과 이천년 교회전통인
주교단의 합의정신(sinodalitas)과 단체성(collegialitas)을 깨뜨린
이 두 가지부터 출발한다.
게다가 4대강사업에 대한 판단은 “자연과학자들이 다루는 문제요,
토목 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지 종교인들의 영역이 아니”라고 하셨다.
물론 그렇다. 동의한다. 그래서 주교회의는 4대강사업 초기부터
정의평화위원회 산하 환경소위원회를 중심으로 전문가들의 다양한
견해를 여러 차례 경청했으며, 지난 봄 닷새에
걸친 총회에서 전국 교구 주교들과 수도회 아빠스가 모여
이 문제를 깊이 검토하고 논의한 끝에 마침내 올해 3월
12일의 결론을 주교단의 이름으로 내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잘못이란 말인가? 추기경은 주교회의의 분별력
을 경시했고 그 정도의 판단행위마저 부정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가릴 줄 아는 분별의 힘이 아니
라면(필립 1,10 참조) 교회는 무엇으로 교회가 되는가?
다음, 추기경은 4대강사업에 대해서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영산강은 제대로 간다고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이런 말씀은 당신이 사목적 혜안을
과감하게 포기했거나 아예 갖추지 못했음을 스스로 인정
해버리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추기경께서 성경의 예언자들을 소개하기 위해 새 책을 썼다던데 그분의 예언자
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잠자코 결과를 기다리자는 것은 거짓 예언이다.
주님의 예언자들은 훗날의 멸망을 내다보고 당장의 회개를 촉구하였다.
결과를 지켜보고 말해야 한다는 일반론도 4대강사업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정부가 예비타당성조사 등 법이 규정해둔 절차와 과정을 대부분
건너뛰거나 무시한 것은 삼척동자까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추기경께선
이런 점을 아니 보시고 양들의 침묵을 바라시니 어찌된 셈판인가.
시중에 나도는 4대강 ‘난개발’과 명동성당
‘불법개발’이 한 통속이라는 소문이 자꾸만 솔깃하게 들린다.
유감스럽지만 4대강공사 때문에 빚어진 교회분열의 가장 큰
책임은 추기경께 돌아간다는 말씀을 드려야겠다.
작년 말 정부가 4대강공사를 기습 강행하면서 찬반양론에
시달리던 교회는 춘계주교회의의 결의 이후, 빠른
속도로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
다소 이견이 분출되기도 하였으나
“신앙의 유권적 학자요 스승으로서 주교
들이 한국교회의 모든 백성들에게 드리는 주교단의 일치되고
공통된 가르침이니 신자라면 당연히 순명하고
지켜야 한다.”는 강우일 의장주교의 말씀으로
(6.14 양수리성당) 대부분의 잡음은 잦아들고 있었다.
그런데
전국사제기도회가 명동성당의 탄압에 시달린데 이어
“4대강사업은 과학적, 전문적 분야이고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다른 의견이 있는 만큼 종교계가 판단하는 것은
비합리적이고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일보 7.21)는
추기경의 발언이 나오면서 신자들은 다시 우왕좌왕했고
찬반진영의 갈등이 심화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새삼스레 지도자의 덕목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본다.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평화의 경륜’이나 벼랑 끝에
몰린 생태계를 살리는 ‘생명의 지혜’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대화를 촉구하고 인도적 지원을 호소
하던 교황들의 심정을 대변해야 할 추기경이 대중의 흥분을
누그러뜨리지 않고 미움이나 부추기는 골수
반공주의자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으니 이는 교회의 불행이다.
오리무중, 오늘의 시름에서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답답하다. 노여우시겠으나 부디 사제들의
충정을 헤아려 주시기를 삼가 청한다.
2010년 12월 10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일부 천주교 신부들에게 묻는다. 어제 보낸 이메일입니다만 다시 보냅니다. 보실 때에 이메일 맨아래 표시하기를 믈릭하셔야 제가 애써 만든 프래시 작품을 볼수 있습니다 꼭 맨 아래 표시하기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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