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陽明學錄』 제5조︰「與戴子良」 서신과 왕양명 42살의 심학 강학 어려움
2021년 4월 5일
5、「대덕유(戴德孺)에게 보낸 서신」(癸酉, 1513, 왕양명 42살)︰
(* 이 서신은 왕양명 42살 11월 25일에 남경 홍려시에 도착하여 근무한 뒤에 보낸 서신입니다.)
왕옥(汪玉, 1481-1529)을 저주(滁州)에서 만났을 때, 형님(戴德孺, ?-1523)의 자질이 따듯하고 순수한 사람이며 뜻을 세워서 성인이 되는 학술을 공부하려고 결심하고 평범한 착한 사람으로 남는 것을 걱정한다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결심한 사람은 끝내 성공한다고 합니다. 형님도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학술이 밝지 못한 것은 하루 이틀이 아닌데 결심한 사람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착한 덕(德)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타고난 본성이다.”고 말하는데 결심한 사람이 아예 없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이 사욕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속의 습관이 빠져서 결심(志)도 없습니다. 우리 벗들 가운데 학술을 밝히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있으니 정말로 기쁩니다. 그런데 결심하기(志)는 어렵고 세속 습관에 빠지기는 쉬우니 깊이 걱정스럽습니다. 형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황관(黃綰)이 벌써 북경에서 고향(절강성 天台縣)으로 내려왔는데 아직 만나지 못하였습니다. 북경에서 강학에 참여하였던 당신의 과거시험 동년(1505) 합격자 진정(陳鼎, 字大器)과 고응상(顧應祥) 그리고 왕옥(汪玉), 양곡(梁穀), 왕원정(王元正), 소민(蘇民) 등을 자주 만나 공부하고 있으며 이밖에도 3-4명이 더 있습니다. 저의 생각을 여러 벗은 스스로 잘 알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결심한 지식인은 반드시 스승과 벗에게 도움을 요청한다고 합니다. 당신과 급히 헤어지느라고 제가 당신에게 하고 싶은 말은 1%도 다하지 못하였기에 떠나는 길에서 당신의 좋은 뜻을 생각하며 기쁘면서도 정말로 아쉬웠습니다. 언제 다시 만날지는 모르지만 공부하는 데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셔서 반드시 뜻을 이루시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5、「與戴子良(戴德孺)」(癸酉,1513,42살)曰︰
汝成(汪玉)相見於滁,知吾兄之質,溫然純粹者也,今茲乃得其爲志,蓋將從事於聖人之學,不安於善人而已也。何幸何幸!有志者事竟成,吾兄勉之!
【學之不明,已非一日,皆由有志者少。好德,民之秉彝,可謂盡無其人乎?然不能勝其私欲,竟淪陷於習俗,則亦無志而已。故朋友之間,有志者甚可喜,然志之難立而易墜也,則亦深可懼也。吾兄以爲何如?】
宗賢(黃綰)已南還,相見且未有日。京師友朋如貴同年陳佑卿(陳鼎)、顧惟賢(顧應祥),其他如汪汝成(汪玉)、梁仲用(梁穀)、王舜卿(王元正)、蘇天秀(蘇民),皆嘗相見,從事於此者,其餘尙三四人。吾見與諸友當自識之。自古有志之士,未有不求助於師友。匆匆別來,所欲與吾兄言者百未及一。沿途歆歎雅意,誠切怏怏。相會未卜,惟勇往直前,以遂成此志,是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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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서(席書)에서 보낸 서신(辛巳, 1521)」:
(* 이 서신은 왕양명이 50살 7월에 강서성 감주에서 절강성 소흥부로 가는 길에 쓴 것입니다.)
얼마 전에 서신과 육상산의 억울함을 풀어주신 서적 『명원록(鳴冤錄)』을 받았습니다. 읽어보니 1509년 11월에 귀주성 귀양에서 헤어진 뒤에 학술이 크게 발전하신 것을 알았습니다. 올바른 학술을 맡겠다는 우뚝하신 책임감은 아마도 세상 사람 모두 비난하더라도 흔들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 부화뇌동하며 남들을 따라 비난하고 비웃는 사람들과는 천리만리 다르십니다. 지극히 다행입니다! 서신 가운데 어떤 내용은 꼭 만나서 토론할 것도 있으나 만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최근에 듣기로는 우부도어사(右副都御史)에 발탁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북경에 가시면서 반드시 강서성 연산현(鉛山縣)을 지나가신다고 생각하고 저도 고향에 돌아가는 길에 배를 멈추고 묵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사람을 강물이 나뉘는 분수(分水)로 보내 기다리게 하였으나 선발대 소식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신성현(信城縣)에서 닷새를 기다렸다가 아쉬워하며 떠났습니다. 아마도 인연이 되지 않았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학술이 밝혀지지 않은 까닭은 우리가 보고 들은 것만 입으로 말하고 내자신의 마음과 몸에서 깨달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술을 마시고 밥을 먹듯이 많이 말한다고 취하거나 배부른 사실이 있겠습니까? 저는 최근 몇 년 동안에 학술의 본령을 깨달았는데 정말로 백세 뒤의 성인이 나타나서 보시더라도 틀렸다고 말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함께 공부하는 벗들 가운데 몇 사람은 제가 깨달은 양지를 믿고 배우며 아직도 저를 떠나지 않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사람도 있고 믿는 사람도 있고 아직 찬반을 결정하지 못한 사람도 있는데, 대체로 주자학설에 너무 단단히 묶였기 때문입니다. 또 주자학을 배반하면 손해를 보거나 비난을 받을까 걱정하기 때문에 저의 양지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함께 앉았더라도 또는 서로 어깨를 스치고 지날 만큼 가까이 있더라도 이들에게는 자세하게 설명하여 설득할 수 없습니다.】
육상산의 학술은 쉽게 돈오하는 것이며 맹자 이후에 가장 뛰어난 학자입니다. 『중용』 “널리 배우고 따져서 묻고 깊이 생각하고 잘 판단하고 굳게 실천한다.”는 학문사변(學問思辨)과 『대학』 “치지하고 격물한다”는 치지격물(致知格物)에 관한 육상산의 견해는 비록 속(俗學, 일반적인 경전 주석)학의 영향을 받은 것이 있으나 본원(本原)을 깨달으라는 주장만큼은 다른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좋은 주장입니다. 당신께서 평소에 육상산 학술을 깊이 믿으실 수 있으니까 이 점을 잘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순금을 얻으려면 반드시 불속에 넣고 녹여서 순수하게 하고 다른 것이 조금도 섞이지 않도록 하여야만 녹슬거나 변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학술의 옳고 그름이 확연하게 다르기에 미세한 내용도 잘 보아야 합니다. 양적(楊績, 字用熙) 선생을 벌써 북경에 도착하였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양적 선생은 당신의 오랜 벗이며 정도 깊으신데 관직에 나가시지 않으시겠다면 당신께서 학문을 공부하시도록 권하시길 바랍니다. 맹자의 “존심양성(存心養性)” 이외에는 올바른 학문이 없다고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곧 만날 것을 약속하며 먼저 서신을 올립니다.
〔與席元山書(辛巳,1521)曰︰
向承敎箚及『鳴冤錄』,讀之見別後學力所到。卓然斯道之任,庶幾乎天下非之而不顧,非獨與世之附和雷同從人非笑者,相去萬萬而已。喜幸何極!中間乃有須面論者,但恨無因一會。
近聞內台之擢,決知必從鉛山取道,而仆亦有歸省之便,庶得停舟途次,爲信宿之談,使人候於分水,乃未有前驅之報。駐信城者五日,悵怏而去。天之不假緣也,可如何哉!大抵
【此學之不明,皆由吾人入耳出口,未嘗誠諸其心身。譬之談飲說食,何由得見醉飽之實乎?仆自近年來始實見得此學,眞有百世以俟聖人而不惑者。朋友之中,亦漸有三數輩篤信不回。其疑信相半,顧瞻不定者,多以舊說沈痼,且有得失毀譽之虞,未能專心致志以聽。亦坐相處不久,或交臂而別,無從與之細說耳。】
象山之學,簡易直截,孟子之後一人。其“學問思辯”、“致知格物”之說,雖亦未免沿襲之累,然其大本大原,斷非餘子所及也。執事素能深信其學,此亦不可不察。正如求精金者必務煆煉足色,勿使有纖毫之雜,然後可無虧損變動。蓋是非之懸絕,所爭毫厘耳。用熙(楊績)近聞已赴京,知公故舊之情極厚,倘猶未出,亦勸之學問而已。“存心養性”之外,無別學也。相見時亦望,遂以此言致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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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孟子、告子上』:“天生丞民,有物有则。民之秉彝,好是懿德。”
『中庸』:“博學之,審問之,慎思之,明辨之,篤行之。”
『大學』:“致知在格物,物格而後知至。”
인명 자료 :
戴德孺(?-1523):
字子良,號雙江,浙江台州府臨海縣人。弘治十八年(1505)進士。
汪玉(1481-1529):
浙江鄞縣人,字汝成,號雷峰,一號嘿休。正德三年(1508)進士。
黃綰(1480-1554):
字宗賢、叔賢,號久庵、石龍。浙江省黃岩縣人。
陳鼎:
字大器,其先宣城人。弘治十八年(1505)進士。正德四年(1509)授禮科試給事中。
顧應祥(1483-1565):
字惟賢,號箬溪,長興縣人。
明弘治十八年(1505)進士,正德三年(1508)授江西饒州(今江西鄱陽)推官。
梁穀(1483-1533):
字仲用,山東東平人。正德六年(1511)進士,授吏部主事。
王元正(?-1524):
字舜卿,盩厔人。明正德六年(1511)進士。
蘇民(?-1538):
字天秀,秦州人,弘治十八年(1505)進士,授榆次知縣。
席書(1461-1527):
字文同,號元山,四川省潼川州遂寧縣人。弘治三年(1490)進士。
楊績:
字用熙,號蘆泉,江夏人,弘治三年(1490)進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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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곡 정제두 선생께서 서신 2통에서 인용한 부분만 보고 공통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서신에서는 학술이 밝혀지지 않는 까닭이 본성을 깨달아 성인이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적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심하였더라도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둘째 서신에서도 학술이 밝혀지지 않는 까닭이 눈과 귀로 보고 듣고 입으로 말하고 실제로 마음을 깨닫는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석서(席書)의 사례처럼 학술을 굳게 믿고 남들의 어떤 비난과 따돌림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혼자 공부하지 말고 함께 공부하자는 뜻을 강조하였습니다.
왕양명은 42살에 북경에서 절강성 소흥부로 내려오기 이전에 담약수와 황관 셋이 관직을 사퇴하고 강남지역에 돌아가 가까이 살면서 함께 공부하자고 약속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북경에서 여러 사람이 찾아와서 강학에 참여하였으나 실제로 공부하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적고 그냥 궁금하여 찾아온 사람이 많았습니다. 또 찾아와서 강학하는 것을 들은 뒤에는 주자학이 옳고 왕양명, 담약수, 황관 셋이 강학하는 내용이 주자학에 어긋난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래서 왕양명이 이런 이야기를 서신에 썼던 것입니다.
학곡 정제두 선생께서 서울에 사시면서 『양명학록』을 늦어도 39살 이전에 편집하셨는데, 서울에서 40살까지 사시는 동안에 함께 공부할 사람들 찾았으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학을 함께 연구하고 수양공부를 함께 하는 것이 명나라거나 조선에서도 이렇게 어려웠습니다. 주자학이 그만큼 뿌리 깊게 내려서 새롭게 다른 학술을 연구하자고 권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하곡 정제두 선생이 서울에서 40살까지 사시는 동안에 어떻게 외롭게 공부하셨는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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