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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 극복을 위한 불교 수행
(2)참회기도의 응용
우리는 살아가면서 금전적인 문제, 친구나 친척과의 불화, 신체적 질병 등 갖가지 우환(우울증의 원인)으로 시달린다.
이러한 불행을 불교적으로 극복하는 방법 중 가장 바람직한 것은 앞의 '불교적 인지치료'를 통한 극복이지만, 박복으로 야기된 불행은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가르침에 비추어 전생을 포함하여 현생동안 저지른 죄업을 참회하는 방법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즉 현재 내가 겪고 있는 불행과 앞으로 닥칠 불행을 막는 방법 중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것이 참회기도이다.
참회기도는 백팔예참(百八禮懺)이나 삼천불, 만불 명호집 등을 봉독하며 참회절을 하는 것이 가장 대중적이며, 자자나 포살이라는 의식을 통해서 자신의 잘못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방법도 있다.
그러나 백팔예참이나 불명호집을 봉독하며 절을 하다보면 자칫 자신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절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기에 이를 응용하여 우울증 환자를 예를 들어 '대상에 따라 차별화된 참회기도법을 새롭게 제시하고자 한다.
신체질환으로 인한 우울증 환자가 자신이 현재 병으로 고통받는 것을 전생 또는 현생에 알게 모르게 저지른 살생죄임을 뉘우치고 참회하는 식으로 참회내용을 작성하여 자신의 상황에 맞게 참회를 하는 '맞춤식 참회기도'를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참회기도를 하면 더 마음 속 깊이 와 닿게 되어 진참회를 할 수 있다.
김성철 교수는 "진정한 참회가 이루어지려면, 10선계의 계목 하나하나를 내가 어김으로써 다른 생명체가 받았을 고통을 떠올려야 하고 고결하지 못하게 행동한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하며 다시는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진정한 다짐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일한 참회문을 기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보다는 내가 저질렀던 구체적인 죄목을 떠올리며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참회하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라고 진참회 방법에 대해 제언하였다.
(3)위빠사나 수행
위빠사나란 초기불교의 경전어인 빨리어pāli를 음역한 것이다. 이 용어는 두 개의 낱말이 결합된 합성어로서, 위vi란 '분리하다', '쪼개다', '관통하다' 등을 의미하고, 빠사나passanā란 '관찰', '식별' 등을 의미한다. 위빠사나의 온전한 의미를 번역하면 '꿰뚫어 봄' 혹은 '통찰洞察' 정도가 적당하다. 위빠사나로 대변되는 붓다의 가르침은 오로지 있는 그대로만을 관찰·자각케 한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제반 현상을 사실대로 수용하고 통찰하게 되며 종국에 이르러서는 그것의 참된 모습을 깨닫게 된다. 궁극의 목표로 제시되는 열반의 경지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숙된 위빠사나를 통해 우리는 편견과 왜곡으로부터 벗어난 성명한 눈으로 사물의 참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즉 내면의 번뇌에 영향을 받지 않게 되는 것은 물론 그것 자체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터득하게 된다. 따라서 위빠사나는 탐냄貪ㆍ성냄嗔ㆍ어리석음癡의 소멸로 정의되는 열반의 경지와 그대로 통해 있다.
붓다는 대념처경에서 위빠사나에 대해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고 열반을 실현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나열하면 ①마음의 청정-번뇌의 제거, ②슬픔과 근심의 극복, ③비탄의 극복, ④육체적인 고통의 극복, ⑤정신적인 고뇌의 극복, ⑥세 가지 도와 과의 성취, ⑦열반의 성취를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위빠사나를 설명하고 있다.
선(禪) 수행의 종류에는 크게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a)로 대별된다. 사마타는 마음을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여 정신을 통일하는 수행으로 집중하는 모든 시간 동안 그 대상을 견지한다. 위빠사나는 주관의식과 객관의식을 순간순간 꿰뚫어 보는 수행으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대상으로 삼는다. 사마타는 지(止) 또는 정(靜), 위빠사나는 관(觀) 또는 혜(慧)로 번역된다. 불교의 선정은 이 둘을 함께 수행하는 것(정혜쌍수)을 의미하며 그 9단계를 9차제정이라 한다.
즉, 지·관을 합하여 지관이 되는데, 이는 선정과 지혜를 의미하는 말로, 마음을 안정시키고 내면의 지혜를 개발하여 모든 진리를 올바로 관찰하는 것으로 한마디로 요약하면, 마음을 가라앉히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고 올바르게 관찰하는 선정의 수행으로 정의할 수 있다.
위빠사나 수행은 몸과 마음에서 매순간 일어나는 현상을 예의 주시한다. 처음에는 호흡에 주의를 모은다. 호흡에 따라 배의 기복을 느끼면서 배가 부를 때 '일어남'하고 알아차리고 배가 꺼질 때 사라짐하고 알아차린다. 명상이 진행되면서 일어남과 그것을 알아차림, 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상으로서 물질적인 과정과 알아차리는 정신적 과정만 관찰한다.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하고 알아차리고 도중에 소리가 들리면 들음하고 알아챈다. 좀 더 나아가면 몸의 움직임에 선행하는 의도를 하려고 함이라고 분명히 알아챈다. 하려고 함을 알아차리다 보면 모든 움직임마다 의도하는 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몸의 행위가 알아차리는 마음보다 빨라서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지만 집중력이 커지면서 미세한 움직임도 알아채고 움직임 전에 마음이 선행함을 알아차리게 된다. 도중에 몸의 가려움, 아픔, 뜨거움 등을 느끼자마자 관찰하고, 관찰하면 그냥 사라지는 체험이 반복되면서 화날 경우 바로 알아차리고 화가 바로 사라지고 욕구도 쾌감도 그렇게 일어나서 사라짐을 관찰하며 찰나지간의 일어남-사라짐 사이에 영속성이 없음과 실체적 자아가 없음을 분명하게 깨달아 가고, 영혼이나 나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모든 것이 덧없고 '나'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불교의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은 이론으로 이해되어지는 교리가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저절로 깨달아지는 본득지 이다. 수련이 진보되면 일어나는 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만 관찰하게 된다. 초기단계에서 알아차림은 대상의 이름이나 대상의 특징이다. 지혜가 커지면 대상의 사라짐이 알아차려진다. 여기에서 수행자는 3단계(대상을 알아차림-대상이 사라짐-사라짐을 알아채는 의식도 사라짐)를 분명히 인식하고 이 3단계가 모두 빠르게 연속해서 일어남을 안다.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모든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림이 계속되면 잠드는 순간과 깨어나는 순간도 알아채게 되고 나아가서 잠 가운데에서도 계속 알아차림이 끊이지 않는 수준까지 간다. 이런 가운데 빛이 나타나기도 하고 환희가 일어나기도 한다. 몸과 마음이 점점 경쾌해지고 편안해지며 행복해진다. 이렇게 수행을 계속하면 모든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불안과 근심, 분노와 성욕 등 감각적인 욕구 등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평정을 얻게 되며 수련이 보다 진전되면 대상과 둘이 아닌 상태를 체험하고 지극히 자애로워지고 지혜로워져, 모든 존재의 행복을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되고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되면 흔들리지 않는 마음의 평온함이 저절로 생긴다.
현대의 발달된 심리학과 우울증치료에서는 이런 위빠사나 수행을 우울증치료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특히 21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위빠사나의 치료적 원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되고 있다. 이제 그러한 작업들은 심리치료 분야 자체만이 아니라, 역으로 명상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도 도움을 주고 있다. 예컨대 정신분석(psychoanalysis)의 입장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해석해 들어간 인물로서 마크 옙 스타인(MarkEpstein)의 경우가 있다. 그에 따르면 "불교 명상은 일상적인 마음을 자연스러운 출발점으로 하며 내면의 무엇인가를 강제적으로 바꾸거나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불편한 정서나 느낌 따위가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체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나아가 다양한 육체적·정서적 현상들이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조건에 따라 발생하고 사라지는 허망한 현상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언급한다. 이러한 설명은 위빠사나의 실제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동시에, 그것을 통해 얻게 되는 무상(無常)의 가르침을 자연스럽게 포함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많은 심리치료자들이 위빠사나의 원리가 되는 '마음지킴(念, sati)'이라는 심리적 기능에 관심을 기울인다. '지속적인 주의 집중'을 의미하는 이것에 대해 베넷 골만(Bennett-Goleman)은 "고정화된 지각으로부터 탈피하여 매 사건을 처음 접하는 것처럼 보게 하고 있는 그대로를 수용적으로 직면하게 하는 과정"으로 정의한다. 또한 존 카밧진(Jon Kabat-Zinn)은 "현재의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능력으로서 의도적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면서 순간순간 체험하거나 느낀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규정한다. 이들의 설명은 위빠사나의 기술적 측면에 관련된 것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몸과 마음에 대해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가에 대한 답안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본격적인 신경증 치료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가 거론되곤 한다. 노출효과(exposure)·탈자동화(deautomatization)·수용(acception)·탈동일시(disidentification) 등이 그것이다. 이들은 위빠사나를 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인 동시에,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신경증 치료의 원리로 거론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노출효과란 태양에 노출된 눈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리듯이, 관찰의 힘에 의해 부정적인 정서와 사고가 되는 것 해소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컨대 격한 감정 상태에 처해 있을 때 그러한 감정 자체를 지긋이 응시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완화되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스스로의 행실에 대해 냉정하게 주시를 하다보면 어느덧 들뜬 마음도 가라앉고 불손했던 생각들도 잠잠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위빠사나에 포함된 치료 원리로서의 노출효과이다.
탈자동화란 습관적인 사고를 개입시키지 않고 매 순간의 경험을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몇 번의 반복 경험을 통해 고정화된 자동적인 사고를 일으킨다. 이것은 먹이를 먹을 때마다 "구구"소리를 들은 닭이 나중에는 그러한 소리만 들어도 먹는 시간으로 착각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형성된 타성적 습관에 영향을 받는다. 예컨대 칭찬에 인색한 부모 밑에 자란 사람은 매사에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서 성공보다는 실패만을 걱정한다고 한다. 자신이 행해 왔던 일에는 으레 꾸지람이 뒤따랐다는 과거의 경험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습관이 스스로의 긍정적인 면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탈자동화란 그러한 강박적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유연하고도 탄력적인 자세로 사고하며 변화무쌍한 현실 세계를 마주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이란 모든 경험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심리적 저항감과 압박감을 해소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경험하는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제대로 누리지도 못한 상태에서 더욱 많은 즐거움을 얻기 위해 골몰한다. 또한 괴로움이 주어지면 그것의 실제를 파악하지도 않은 채 도피하려는 생각에만 몰두한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 갖가지 심리적인 중압감을 걸머지게 된다. "백년도 못 살 인생이 천년 걱정을 하며 산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의 통찰을 통해 우리는 현재의 사실을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 안주하는 능력을 키우게 된다. 그리하여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차분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게 된다.
마지막의 탈동일시는 부정적인 생각이나 감정들을 단지 관찰해야 할 현상으로 보게 하여 자기 자신과 상관없는 것으로 분리시키는 것을 말한다.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스스로의 감정과 사고를 주체하지 못하고서 그들의 노예로 살아가는 경향이 있다. 한순간의 탐욕과 분노에 휘말려 긴 시간을 후회로 살아가는 경우가 그것이다. 따라서 내면의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훈련이 필요하다. 위빠사나의 능력이 커짐으로 인해 우리는 스스로의 정서와 사고가 덧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그러한 현상들을 관찰 대상으로 남겨 두는 여유를 갖게 된다. 이러한 탈동일시는 자신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영역으로까지 확대·적용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그간 '나'라고 믿어 왔던 것들에 대해 한 발짝 떨어져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들 모두가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상은 위빠사나를 행하는 와중에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것으로, 심리치료자들에 의해 신경증의 치료를 위한 기제로 활용되고 있다. 물론 위빠사나와 심리치료는 그 목적을 달리한다. 전자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괴로움을 극복하고자 개발된 반면에, 후자는 특정한 병증의 개선과 치료에 주력할 뿐이다. 따라서 심리치료는 위빠사나의 본래적인 취지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건강 문제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탐욕과 집착 따위를 조장하기 십상이며, 새로운 유형의 육체적·정신적 괴로움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위빠사나는 단순히 관찰 지혜만 일컫는 것이 아니라 8정도의 정견과 정사유, 정념과 정정 그리고 정혜를 포괄하고 있고 사마타를 포함하고 있다.
<우울증에 대한 불교적 심리치료 방안 연구/ 장지호(보우)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