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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1 강 - 般若品- 7
善知識아
不悟하면 卽佛是衆生이요
一念悟時엔 衆生是佛이니
故知萬法이 盡在自心이어늘
何不從自心中하야
頓見眞如本性고
菩薩戒經에 云, 我本元自性이 淸淨이니
若識自心見性하면 皆成佛道라하며
淨名經에 云, 卽時豁然하면 還得本心이라하시니라
善知識아
我於忍和尙處에 一聞하고 言下에
便悟하야 頓見眞如本性일새
是以將此敎法하야 令學道者로 頓悟菩提하야
各自觀心하고 自見本性케하노니
若自不悟인댄 須覓大善知識인
解最上乘法者의 直示正路니
是善知識은 有大因緣이라
所謂化導하야 令得見性이니 一切善法이
因善知識하야 能發起故니라
三世諸佛의 十二部經이 在人性中하야
本自具有언만 不能自悟일새
須求善知識指示하야 方見이어니와
若自悟者는 不假外求니
若一向執謂, 須他善知識하야 望得解脫者인댄
無有是處니 何以故오 自心內에 有知識自悟니
若起邪迷하야 妄念顚倒하면 外善知識이
雖有敎授라도 救不可得이어니와
若起正眞하야 般若觀照하면 一刹那間에
妄念이 俱滅이니 若識自性一悟하면
卽至佛地하리라
***
善知識(선지식)아
不悟(불오)하면→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卽佛是衆生
(즉불시중생)이요→ 말짱한 부처인데
그대로 중생이요. 못 깨달아서 저렇게
좋은 부처가 그냥 중생노릇 한다 이것입니다.
一念悟時(일념오시)에→ 한순간 깨달을 때에,
衆生是佛(중생시불)이예요.→
중생이 그대로 부처예요.
중생. 중생 하던 것이 그대로 부처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衆生衆生者(중생중생자)
說非衆生(설비중생)이다.
여래 설 중생. 중생자는 곧 중생이 아니고,
이름을 그저 중생이라고 했을 뿐이다 이 것입니다.
뭐라고 붙여도 상관없지요.
그것이 뭐 어디 중생이라는 것이 정해져 있습니까?
우리는 부처님하고 중생하고 너무 귀에 익숙하니까
부처님이 따로 있고, 중생이 따로 있는 걸로
그렇게 이미 익숙해져 있어요.
그것도 큰 병입니다. 큰 병이라고요.
그런데 그 중생이니 부처니 하는 그것이
뭐 그냥 붙인 이름이지 뭘 그리 특별한 것이 있나요?
그냥 우리가 붙인 이름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단, 마음이 환히 밝아졌느냐?
밝아지지 않았느냐?
그냥 그 차이가 있을 뿐 이예요.
중생시불이다. 중생이 부처다.
그것은 참, 추호만한 차이도 없는 관계지요.
무슨 옷 색깔이 달라지거나,
무슨 눈썹이 하나 더 나거나,
뭐가 하나 더 생기거나 덜 있거나,
전혀 그런 차이가 없지요.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너무나도, 차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차이지요.
없는 것 가운데 있는 그런 차이...
故知萬法(고지만법)이
盡在自心(진재자심)이어늘→
그러므로 알라. 온갖 법이 모두가 내 마음에 있다.
전부 마음에서부터 부처님이 이런 소리하고
저런 소리 하고, 이 말 지어내고 저 말 지어내고,
온갖 말을 그냥 만들어 가지고는
그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서...
어쨌든 참, 대단한 분이지요.
아무리 깨달았다손 치더라도
어찌 그런 능력이 있는지 참 알 수가 없어요.
진재자심이어늘→
모두 자신에게 있거늘, 자기 마음에 있거늘,
何不從自心中(하부종자심중)하야
頓見眞如本性(돈견진여본성)가→
어찌 자기 마음으로부터,
자기 마음 가운데로 부터서
진여의 본성을 돈견 하지 않는가.
頓見.
한꺼번에 본다 이겁니다,
조금씩. 조금씩 오늘 조금 보고
내일조금 보는 것이 아니고,
한꺼번에 다 보는 것을 돈견. 그래요.
몰록 본다.
한꺼번에 본다.
頓見이라고 합니다.
진여본성.
우리의 마음자리를 표현할 때,
如如(여여)하다. 변함이 없다.
그러한 참답고 여여한 본래의 성품.
본마음이지요.
그것을 왜 보지를 않는가?
한꺼번에 보지를 않는가?
그러니까 괜히 밖으로 쏘다니면서,
공부한답시고 그럴 것이 아니라,
바로 촌보 도 움직이지 않고,
한 걸음도 떼지 않고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앉은 그 자리에서,
내 속의 마음. 내 마음으로부터
내 속 마음으로부터,
眞如本性.
그 부처를. 부처의 성품이지요.
진여본성을 왜 보질 않느냐? 이것이지요.
“제발 좀 봐라”이것입니다.
뭐 어디 가서 절에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산에 올라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물에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들에 가서 보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있던지 앉은 그 자리.
서 있는 그 자리에서 바로 본성을 보는 것.
菩薩戒經(보살계경)에 云(운)→
보살계 경에 이르되,
육조스님께서 본래는 무식한 입장에서,
경전의 말씀을 듣고 견성을 하고,
그 다음에 출가를 해서,
행자생활 8개월 하고, 법을 전수받고,
그리고는 그 당시 상황이 어려워가지고,
15년이라는 세월을 사냥꾼들 틈바구니에서
몸을 피해서 숨어서 살았지요.
그러는 과정에, 그리고
그 후 법성사에 가서 정식으로 계를 받고,
선지식 노릇을 하는 그런 과정에서,
경을 많이 봤어요.
그 다음부터는 아주 본격적으로
선지식 수업을 깨닫고 나서부터 한 것이지요.
깨닫기 전에 한 것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부터 하면서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을 많이 보신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보살계경.
그 다음에 정명경. 열반경. 법화경.
그런 경전 이야기도 많이 등장해요.
보살계 경에 이르되,
我本元自性(아본원자성)이→
나의 근본. 본원의 자성이
淸淨(청정)이니
若識自心見性(약식자심견성)하면→
그러니까 나의 本元이고 근본자리.
그러면서
自心의 性品(성품). 그것이 본래 훌륭해요.
청정해요. 깨끗해요. 그러니
만약에 자심을 알아가지고.
자기 마음을 알아가지고 성품을 본다면,
식자심견성 이라는 것이 말을 하자니
“자심을 안다.”
“성품을 본다.”
그렇게 했지만, 사실 자심을 아는 것이
성품을 보는 것이고, 성품을 보는 것이
자심을 아는 것입니다.
약식자심견성하면
皆成佛道(개성불도)라→
다 불도를 이룬다.
불도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마음자리. 자기 마음자리를
제대로 들여다보는 것.
이것이 말하자면 불도를 이룬 것이다 하며,
淨名經(정명경)에 云(운)→ 정명경에 이르되,
卽時豁然(즉시활연)하면→
즉시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앉은 자리
이 순간을 즉시 라고 합니다.
“卽席(즉석)”
그러지요? 이 卽(즉)자를 불교에서는 잘 써요.
특히 禪門(선문)에서 잘 쓰는데, 즉시하면
이 순간. 이 자리 이 순간을 말합니다.
卽時豁然하다.
바로 이 순간에 활연히 깨달을 것 같으면,
이 말이지요.
豁然은
깨달음을 형용하는 말입니다.
활연히 깨닫다.
豁然하다. 역시
“시원하게 깨달았다.” 그런 뜻이지요.
還得本心(환득본심)이라하시니라→
또한 본심을 얻는다.
깨달으면 본심을 얻는 것이고,
본심을 얻는 것이 곧 깨달음을 얻는 것이고 그렇지요.
그것도 또 둘이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자니 그렇게 되었지요.
그러니
여기에 보살계경 하고 정명경하고
부처님말씀을 왜 이렇게 갖다 놨느냐?
증거지요.
당신은 스스로 깨달아서 이야기한다고는
하지만, 당신 말을 어떻게 믿느냐 이것이지요.
어쨌거나 “
“불교”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준인데,
그 기준에 잘 맞느냐 안 맞느냐 이겁니다.
그런 것들을 스스로
육조스님께서 증거로 갖다 놓으셨지요.
그러니 육조스님말씀이 부처님말씀과
딱. 들어맞는 것이고,
육조스님말씀이 부처님말씀이고
부처님말씀이 육조스님말씀이니
결국 그래서 둘이 아니다 이것이지요.
깨닫게 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은 이치여야 되는 것이지,
이치가 다를 수가 없지요. 그러니까
같은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善知識(선지식)아
我於忍和尙處(아어인화상처)에
一聞(일문)하고→
내가 인화상. 5조 홍인이지요.
忍이라고 하는 것은
5조 홍인스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5조 홍인화상의 처소에서 한 번 듣고,
한 번. 금강경 말씀이지요.
應無所住(응무소주)
而生其心(이생기심).
“반드시 머물지 말고 이 마음을 내라.
”또는 “
이 마음은 머물지 않고 나는 것이다.
이 마음은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것인데,
중생들은 왜 자꾸 어디에 머물려고 하느냐?
매다느냐?”
이것이지요. 그 말에 그냥 깨달았지요.
그 말 한마디를 듣고는...
言下(언하)에
便悟(편오)하야→
그 말밑에서 바로 곧 깨달아서,
頓見眞如本性(돈견진여본성)일새 →
진여본성을 돈견했을새.
“眞如本性” 하니까
“우리마음”
하는 말보다 훨씬 무게가 있지요?
우리 마음을
진여본성이라고 표현 했습니다.
是以將此敎法(시이장차교법)하야→
그러므로 이 교법을 가져서
令學道者(영학도자)로→
도 배우는 사람으로 하여금,
頓悟菩提(돈오보리)하야→
보리를. 깨달음을.
보리는 보리자성이라고도 하고,
깨달음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하고
깨달을 수 있는 본성을 말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여기서
보제를 돈오한다.
한꺼번에 깨닫는다 하면,
우리자성을 말하는 것이지요.
깨달음의 자성을 볼록 깨달아서.
各自觀心(각자관심)하고→
각각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고,
自見本性(자견본성)케하노니→
스스로 본성을 살펴보도록 그렇게 하노니,
若自不悟(약자불오)인댄→
만약 스스로 깨닫지 못할진댄,
須覓大善知識(수멱대선지식)인
解最上乘法者(해최상승법자)의
直示正路(직시정로)니 그랬어요.→
須覓.
모름지기 찾아나서야 된다.
누구를 찾아나서야 되느냐?
대 선지식을 찾아나서야 된다.
선지식에 大자를 붙였어요.
대중을 부를 때는 그냥“선지식 아”라고 했는데,
깨달은 선지식하고, 보통 선지식하고 차이를
대자를 하나 붙여서, 차별화를 했네요.
대선지식을 꼭 찾아야 된다.
그럼 대선지식은 어떤 사람이냐?
이 밑에 설명 이예요.
解最上乘法者라→
최상승의 법을 이해하는 사람.
그 최상승의 법을 이해하고 마느냐?
이 밑에 또 부연 설명이 있어요.
최상승법을 이해하기 때문에 그 분들은,
直示正路니→
바른 길을 곧바로 보여줘요.
뭐 남겨 놨다가 보여 주거나,
빙 둘러서 중언부언 이야기하거나...
바로 그냥. 한 마디로 이야기해주면 될 텐데
빙 둘러가지고, 괜히 여러 번 우려먹는 식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즉시 정로한다. 이겁니다.
바른 길을 바로 보여주는 그런 선지식.
그것이 대선지식이고, 그 사람이야말로
最上乘法을 제대로...
最上乘法이란 것은
불교에 있어서, 또는 깨달음의 도리에 있어서,
더 이상 높을 수 없는 최상의 가르침.
최상의 도리를 이해하는 사람.
그래서 정로를 바로 보여주는
그런 선지식을 꼭 찾아나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육조스님도
사실은 처음부터 교리를 익힌 것이 아니고,
그저 사람과 사람관계에서 그냥 바로 깨달은 것이지요.
사람 만나서 그냥 깨달은 거예요. 그러니까
육조스님에게는 사람이 더욱 절실 하지요.
우리는 경전. 불행하게도
지금 그런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니까
그런 분들이 남겨 놓은 이 경전을 통해서
그런 선지식을
우리는 간접적으로 만나고 있습니다만,
육조스님은 우리하고 달랐지요.
우리는 그래도 글자라도 몇 자 안다고
이런 과정을 통하는데,
육조스님은 글자를 몰랐을 뿐 더러...
어쩌다보니 사람에게, 사람의 말소리를 통해서
바로 깨달았다고요. 그러니까
그 과정이 우리하고는 다르지요.
그러니까 “사람을 만나라.
어쨌든 선지식인 사람을 만나라. 대선지식.
그리고 제대로 아는 사람. 제대로 가르치는
그런 선지식을 꼭 만나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놓고 선지식이란 뭐냐?
善知識(시선지식)은→
우리 수행하는 사람에게,
불교 공부하는 사람에게,
깨달음을 지향 하는 사람에게
이 선지식이란 무엇인가?
有大因緣(유대인연)이라→
큰 인연 이다. 자기 인생에 있어서,
부모와의 인연보다도 어쩌면 더 깊고
더 소중한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대인연이 있는 것이다.
부모와의 인연도 소중한 인연이지요.
나를 이 세상에 존재 하게한 그런 인연이니까
더 이상의 인연은 없지요.
그러나
불법 가운데 이것은 세세생생의 일이기 때문에,
선지식을 제대로 만나는 것이 큰 인연이지요.
所謂化導(소위화도)해서
令得見性(영득견성)이니라→
왜냐?
선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큰 인연인데
어째서 큰 인연이냐?
이를테면 선지식은 나를 교화하고 인도해 줘요.
어디로 교화하고 인도해 줘요?
見性하게 해 준다 이겁니다.
자기의 本性을 보게 해주는 가르침을 펴니까,
얼마나 큰 인연입니까?
一切善法(일체선법)이
因善知識(인선지식)하야
能發起故(능발기고)니라→
모든 좋은 법이 전부
선지식이 나에게 가르쳐주고,
선지식으로 인해가지고서 전부
거기서부터 일어난다. 이겁니다.
“네가 부처생활을 하고,
중생을 제도하고,
앞으로 세세생생
그냥 온갖 좋은 일들은 많이 할 텐데,
그 좋은 일들은 결국은 선지식을 통해서 들었고,
선지식에게 의지해서 배웠고
내가 또 그런 일을 펼치게 된다.
그러니 선지식이야말로 얼마나 큰 인연이냐?”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선지식이라고 하는데 대해서는
우리가 똑같이 생각을 해야 하고,
또 이 육조스님은 선지식을
그 당시 살아있는 5조 홍인스님이나 하는
그런 등의 선지식. 직접 살아있는 선지식을 뜻 한다면,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경전에서 또는 조사스님들의
어록에서 선지식을 만나면 틀림없어요.
지금은 사람. 예를 들어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나면 위험한 일이 많아요. 사실...
“선지식입네”
하면 금강경에서 뭐라고 했지요?
“이미 그는 선지식이 아니다.”그랬잖아요?
그러니까 진짜 선지식은 “선지식입네”하지 않고...
진짜 선지식은 찾을 길이 없고,
“선지식입네”
하는 것은 전부 가짜 선지식이고...
금강경에 딱. 그래 놨잖아요?
“그는 가짜다.”
했잖아요? 보살이 만약에“나는 보살행을 한다”
하면 “그는 이미 보살이 아니다.”
그러면 가짜다 이겁니다.
선지식이
“선지식입네”
하면 이미 그건 가짜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절대 귀담아 들을 필요 없고,
관심 기울일 필요 없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제대로 된
선지식을 만난다는 것은,
과격한 표현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까지 말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가 경험한 바로는...
사람을 잘 의심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우리는 다행히 말세에 사는 덕을 봐요.
말세에 사는 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육조단경 같은 것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사실. 이것이지요.
경전이 다 있지요. 조금만 관심 기울이면
그 경전의 가르침!
조사스님의 어록의 가르침!
육조단경의 가르침이 이 대로 있어서
조금만 신경 쓰면
바로 육조스님을 만나는 거예요 여기서...
그러니 괜히 의심스러운 선지식을
만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내가 선지식을 제대로 볼 안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분이 진짜 선지식인지도 모르고요.
올 겨울에는 어떤
“선지식입네”
하고 설치다가 쫓겨났다고 하는 소문도 들리고...
아마 들어서 알 거예요. 아는 사람들은요.
어떻게나 선지식이라고 자랑을 하는지...
그러니까 대중이 당장 쫓아내 버렸잖아요.
경전에 진짜선지식 가짜선지식을
분별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많이 나와 있어요.
말세에 사는 덕을 우리가 톡톡히 본다고요.
이런 것을 앉아서 그대로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좋은 조사 어록도 많고 경전도 많잖아요?
그 속에서 선지식을 찾으면 됩니다.
令得見性이다.
化導(화도)해서
令得見性(영득견성)이다
一切善法(일체선법)이
因善知識(인선지식)하야
能發起故(능발기고)다.
일체선법이 좋은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 선지식으로 인해서 일어난다.
三世諸佛(삼세제불)과
十二部經(12부경)이
在人性中(재인성중)하야→
삼세제불과 모든 부처님과,
부처님의 12부경.
12가지의 어떤 형식으로 갖춰진
경전이,
在人性中하야, 사람의 성품 가운데
이미 있어서,
本自具有(본자구유)언만→
본래 스스로 우리 스스로 전부 갖추어 있건만,
우리 속에 다. 우리 한마음속에 없는 것이 없지요.
12부경만이 아니라, 1200부. 12000부의 경전도
그 속에 다 있고, 우리 한마음 속에 별의별 것,
없는 것이 없어요.
온 우주가 우리 마음속에 있고,
모든 부처님이 그 마음속에 있고,
일체 것이 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데
뭐 더 말할 나위 없지요.
本自具有 언만
不能自悟(불능자오)일세→
그런데 말은 들어서 긴가민가 싶지요.
그러려니 또 은근히 믿어지기도 하고요.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깨달아야 돼요.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 하고 있는 것.
이것이 우리의 과제이지요.
능히 스스로 깨닫지 못 함일세.
須求善知識指示(수구선지식지시)하야→
그러면 모름지기 선지식의 지시를 구해야 돼요.
선지식이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가르쳐주는...
우리는 육조단경이 선지식 이예요.
육조단경을 선지식으로 삼으면
육조스님을...
천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가지고
바로 육조스님을 스승으로 마음으로부터
모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선지식의 지시를 구해서
方見(방견)이어니와→ 바야흐로 보게 된다.
若自悟者(약자오자)는→
만약 스스로 깨닫는 사람이면,
不假外求(불가외구)니라→
스스로 깨닫는 사람이면 어떻게요?
육조스님이 필요 있어요 없어요?
하등의 필요 없는 것이지요.
밖으로 구함을 假者(가자)하지 않는다.
빌리지 않는다.
육조스님이든, 부처님이든 그때는 필요 없지요.
그때는...
밖에 있는 육조.
밖에 있는 부처님. 뭐가 필요 있겠어요?
자기가 이미 깨달았는데...
若一向執謂(약일향집위)→
만약 한결같이 (일향이란 한결같이 입니다.)
집착해서 말하기를,
須他善知識(수타선지식)하야→
“하, 선지식을 만나야 되는데...”
“선지식을 만나야 되는데...”
자꾸 저 밖에 있는 선지식을,
須자는
“수구한다. 필요로 한다.”이런 뜻입니다 이럴 때는...
저 밖에 있는 선지식.
타선지식 이라는 것은.
저 밖에 있는 선지식을.
제삼자의 선지식을,
꼭 그렇게 밖에 있는 선지식을 구해야 된다.
일향이라고 하는 것은 그 말입니다.
한결같이 집착을 해가지고
저 밖에 있는 다른 선지식을 구하는...
“아, 육조스님 같은 이가 없나?”
“없나?”
하고 자꾸 그렇게 해가지고서,
望得解脫者(망득해설자)인댄→
해탈을 바라는. 희망하는 사람이라면,
無有是處(무유시처)라→
그건 필요 없다. 그건 틀렸다 이겁니다.
내가 선지식을 찾으라고 했다고 해서,
꼭 밖에 있는 선지식을, 자신을 놔두고
밖에 있는 선지식을 찾아 나선다면,
그것 또한 편견이고 옳지 않은 行(행)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유시처다.
경전에도 잘 나오는 말입니다.
“옳지 못 하다.”이 말입니다. “옳은 것이 없다.”
何以故(하이고)오→ 왜냐?
自心內(자심내)에→ 자기 마음 안에
有知識自悟(유지식자오)하여→
선지식이 있어서 스스로 깨달아...
결국은 육조스님이든,
부처님이든 수천 명이 있더라도,
결국은 내 마음을 내가 깨닫는 것이지,
그 분들은 어느 정도 안내를 해줄 수는 있어요.
어느 정도 가르쳐 해줄 수는 있지만,
암만 가르쳐줘도 못 깨달으면 그 뿐 이예요.
결국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안에 지식이 있어 스스로 깨닫는 것입니다.
若起邪迷(약기사미)하야→
만약에 삿되고 미혹함만 자꾸 일으켜가지고서,
妄念顚倒(망념전도)하면→
망념. 잘못되게 생각하고, 전도될 것 같으면,
外善知識(외선지식)이→ 바깥 선지식이
雖有敎授(수유교수)라도→
그 생각이 바르지 못할 것 같으면
밖에 있는 육조스님 같은 이가 천명 만 명이
와가지고서 비록 교수함이 있더라도,
救不可得(구불가득)이라→
구제하지 못 한다. 육조스님이 천명 만 명 있고,
부처님이 살아서 천명 만 명이 살아서
옆에 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생각이 잘못되어 있으면...
그 잘못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자기 안에 있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해요.
이것이 바른 생각 이고, 바깥사람으로부터
어떤 “법을 얻는다.” “마음을 깨닫는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 그런 말입니다.
그 차이예요.
비록 교수함이 있더라도
구제함을 얻지 못하거니와,
若起正眞(약기정진)하야→
만약 바르고, 참다운 생각을 일으켜가지고서,
般若觀照(반야관조)하면→
“지혜로서 딱 살펴본다.”이겁니다.
“관조한다.”
이겁니다. “지혜로서 관조한다.”
정말 지혜롭게 이것이 밖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내 내면의 진여자성으로부터,
내 안에 있는 진여자성의 발로인가?
밖에서 쑥 들어오는가?
물건 건네주듯이 건네주는 것인가?
“법을 전한다.”
“전한다.”
하니까 선지식이 물건 건네주듯이,
품안에 있는 소중한 물건을 떡 건네주듯이
그렇게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 내면에 저 깊은...
지금은 아직 몰라요. 요량도 안 되고요. 아득해요.
암만 들어도 참 아득해요.
진짜 그런 것이 내 마음속에 있는가?
없는가?
있으면 안에서 뜨겁거나 차거나
이럴 때 안에서 요동이라도 좀 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러나 사실은 너무 목전에 분명히 있지요.
그것이 얼른 요량은 아니 되지만, 그렇더라도
안으로 관조를 해야 돼요.
內心을 잘 관조 하면 반야로서
잘 그것을 옳고 그름을 살필 것 같으면,
一刹那間(일찰라간)에
妄念(망념)이
俱滅(구멸)이니→
한 찰나사이에 온갖 망상들이 다 함께 소멸한다.
그러니까 지혜롭게 내면을 비추는 것.
그러니 이 불교공부는 참 뭐 도구도 필요 없고,
장소도 필요 없고, 그저 앉으나 서나 어딜 가나
차에 앉아 있으나 그저 자기 내면을 가만히 살피고
비추고
“이 뭣고”
하던지,
그냥 묵묵히 속으로 자기 마음을 찾던지,
그것이 그냥 최상의 공부거든요.
그럴 것 같으면
망상이 저절로
소멸 하는 거예요.
온갖 잡념이 일어나서 “아이고, 잡념이 많았어요.”
“잡념이 많았어요.”그럴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바로 제대로 관조하는 명상이라고 할까.
그런 어떤 형식을 통해서 떡 관조 할 것 같으면,
망념이 저절로 가라 앉아버려요. 사라져버려요.
若識自性一悟(약식자성일오)하면→
만약 자성을 알아 가지고
한번 척 깨닫고 나면 그대로,
卽至佛地(즉지불지)예요.→
곧바로 그냥 부처의 경지에 올라가 버린다 이겁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러버려요.
언제 뭐 시간이 걸리고 무슨 강을 건너고
산을 넘고 하는 것이 아니고, 즉지불지입니다.
곧 바로 그냥 일초도 안 걸리고
부처의 경지에 이르고 만다.
바로 그 부처의 경지라는 것이
우리마음자리를 보는 것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육조스님은
정말 이 불교라고 할까?
불법이라고 할까?
그 불법의 정곡을 찌르는 그런 가르침 이예요.
평소에 생각하던 온갖 너절하고, 갖춰야하고
알아야 하고 지켜야 하는, 많은 가지가 펼쳐져 있는
불법에서, 싹. 가지를 추려버리고 줄기만 딱. 세워놓는...
정말 필요한 줄기 하나만 딱 세워 놓는
가르침 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들어보시면 아마 그런 것을 느끼실 거예요.
불교 안에는
웬 그런 알아야 할 것이 많고
지켜야 할 것이 많고,
합장은 어떻게 해야 된다.
절은 어떻게 해야 된다.
법당에 발은 어느 발부터 들여놔야 된다.
웬 그런 것이 많은지...
육조스님은 그런 말 한 마디도 없어요.
한 마디도 없이 뼈대만 딱.
그 지엽적인 것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
세월이 가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고,
몰라도 상관없는 것이고요.
근본만 알면 나머지 지엽적인 것이야
무슨 문제냐?
이렇게 육조단경은 가르치는 형식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불교공부를 상당이 하신 분들이
공부를 하면 참 시원하고 그 동안 공부했던
것을 싸~악 그냥 정리해주고, 뭐라고 할까
물을 뿌려서 먼지를 싹 쓸어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그런 가르침이지요.
말이 아주 간단명료하고,
그러면서 뜻은 깊은 것이 육조단경의 특색이지요.
불교 공부를 많이 했든 아니했든
그것은 심성의 문제이고,
심성의 문제는 불교를 어떤 의미에서 보면,
아주 지름길로 질러가는
徑截門(경절문)!
成佛圖(성불도)를
가지고 놀아보면 제일 빨리 성불하는 길이
경절문!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정초에 사찰에서 놀이를 하는데요.
우리나라는 정초에 다 노는 풍속이 있잖아요.
설이 되어 출가한 스님들도 놀려고 꿈틀꿈틀 대니까,
서산대사가 뭔가 방편을 써야 되겠다 싶어 가지고
,“성불도”
라고 하는 그림을 그렸어요.
지금 불교서점에 가면 팔아요.
“성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불교 다 있어요.
선도 있고
염불도 있고
교도 있고
뭐, 온갖 33천 돌아가면서 지옥도 있고
천상도 많이 있고, 그림 한장 안에
그것이 다 되어 있어요.
윷놀이 하듯이 주사위를 던져요.
주사위 하나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보현보살 문수보살
무슨 보살 무슨 보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주사위를 던져서 무슨 패가 나오면,
예를 들어서 ‘어디로 간다.’‘어디로 간다.
’말[馬]을 그렇게 쓰게 되어 있어요.
처음에는 人道에서 출발해요.
사람에서부터 출발 합니다.
어떻게 잘못 던져 놓으면 지옥이 나오는 거예요.
그럼 지옥으로 가야돼요.
이것이 지옥으로 한 번 갔다 하며는...
그런데 지옥으로 간 것은 차라리 괜찮아요.
거기서보면...
다시 한번 올라오면 되니까요.
그런데 천당으로 가면요.
성불할 길이 까마득해요.
지옥으로 가면 재수있으면 다시 나와서 가는데,
천상으로 가면 천상에서 낙을 받느라고
이 천상. 저 천상. 천상이 33천 뭐...
육욕천. 천상이 얼마나 많습니까?
불교 안에 천상 이야기하는 것이 참 많거든요.
그래서
천상세계를 몇 생을 돌아다니는 거예요.
천상에서 천상으로 가기는 쉬운가 봐요.
조금만 뭐 해도 그냥 그 안(=천상)에서 노는데,
차라리 지옥에 떨어지면 한번만 잘 나오면
다시 인간으로 간다고요.
그래
인간에 가서 잘만 나오면
徑截門(경절문)입니다.
경절문은 바로 질러가는 코스.
딱 바로 위에 있어요.
제일 밑에 인간이 있고
저 위에 [成佛(성불)]해가지고 부처자리인데,
딱 직선 코스가 경절문!
그 다음에 옆쪽에는
염불문.
또 옆쪽에는
圓頓門(원돈문)해가지고
교리상으로 가는 것.
원돈문과 염불문이 약간 틀어서가고,
경절문은 참선문 이라 해서
바로 직행하도록 그렇게 되어 있고요.
기회 있으면 그것도 놀아보면 아주 재미있어요.
놀이 이야기가 이렇게 나왔으니까,
놀이를 이렇게 해서 맨 먼저 성불하는 사람하고,
두 번째. 세 번째 성불하는 사람하고 뽑아요.
맨 먼저
성불하는 사람은 중앙에 부처님이 딱 되고,
두 번째 성불하는 사람은 左補處(좌보처). 왼쪽에 앉고,
세 번째 하면 右補處(우보처)가 돼요.
좌우보처를 딱 모시고 법상에...
법단도 아주 근사하게 차리고, 밀가루 이겨가지고
귀를 이렇게 달아요. 얼굴을 완전히 佛像(불상).
부처님형태로 분장을 시켜줍니다.
대개 밀가루를 이겨가지고
귀가 늘어지도록 해가지고,
그런 형식으로 해서 세 분을 그렇게 모시지요.
딱 부처님처럼 그렇게 법상을 차려서 법문하게 합니다.
그런 놀이를 서산스님이 만들어가지고
절에서 명절에 그런 놀이를 한 3일간 하도록...
오늘은 어떤 법회가 이루어졌고,
그 다음에 그 이튿 날...
정초에 한 3일간은 그런 놀이를 해서
불교공부를 하도록 이론적으로도 익히고, 거기서...
그거 잘 하면 그대로 불교공부가 다
그 속에 있으니까요.
참 그 생각을 잘 해냈더라고요. 그런 것이 있습니다.
육조스님은 경절문 으로 가는 것.
성불도로 말하면 바로 질러가는 코스.
염불도 아니고, 교리쪽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달리 뭐 천상으로 가는 건 더욱 아니고,
경절문 으로 가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