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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4 강 - 懺悔品- 7
善知識아
旣歸依自三寶竟하니 各各至心하라
吾與說一體三身自性佛하야 令汝等으로
見三身了然하야 自悟自性케하리니
總隨我道하되
於自色身에 歸依淸淨法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千百億化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圓滿報身佛하나이다하여라
善知識아
色身은 是舍宅이라 不可言歸向者니
三身佛은 在自性中하야 世人이 總有언만
爲自心迷일새 不見內性하고 外覓三身如來하야
不見自身中에 有三身佛하나니 汝等聽說하라
今汝等으로 於自身中에 見自性에 有三身佛케하리니
此三身佛은 從自性生이라 不從外得이니라
***
육조단경공부가
사홍서원: (41~42강) ·
삼귀의: (43강) ·
오분법신향: (39강).
이 참회품 이라는 것 안에
상당히 중요한 불교의 낱말을 가지고,
쭉~ 육조스님께서 그 깨달음에 입각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경전 상에서 설명한 것도 아니고,
또 불교의 어떤 일반적인 교리사전에 근거해서
설명한 것도 아니고, 그런 해석이야 누구나
할 수 있고,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특히 참회문제.
戒香 · 定香 · 慧香하는
그런 五分法身香의 문제.
四弘誓願이라고 하는 것.
너무나도 일반적인 불교용어지만,
그런 것을 우리가 하면서도 정말 알지 못하고 있는
그런 이치를 육조스님께서는 들어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삼귀의까지도요.
지난 시간에 삼귀의까지 이야기가 되었지요?
삼귀의니 사홍서원이니 참회니 하는 이런 말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고 쉬운 말들이지만,
그 말속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기로 하면
불교의 모든 것이 다 들어있고,
또 그것을 이해해야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라는 차원으로 살펴본 것이 되겠습니다.
오늘은
三身(삼신)이라는 것을 육조스님께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
이것이 또 관심사이지요.
보통 삼신하면 法身(법신) · 報身(보신) · 化身(화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경전에 보면
一切諸佛(일체제불)이 皆有三身(개유삼신)하시니
법신 · 보신 · 화신이다.
※
그래 모든 부처님은 세 가지 몸이 있다. 그런데
그것은 “法身 · 報身 ·化身이다.”
淸淨法身毘盧자那佛(청정법신비로자나불) ·
圓滿報身盧舍那佛(원만보신노사나불) ·
千百億化身釋迦牟尼佛(천백억화신석가모니불).
좀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그렇게 이야기가 되는데,
삼신불을 보통 상식적으로 해석한 것은
어떻게 해석하느냐? 부처님의 깨달음의 세계.
또는 마음의 세계를 法身이라고 하고,
공덕의 세계. 그 동안 수 생 동안 수행을 쌓고
공덕을 짓고, 좋은 일을 많이 한 그 공덕으로
얻은 몸을 과보의 몸이다. 그렇게 합니다.
과보의 몸 = 報身(보신).
원만보신노사나불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화신불은 교화하기 위해서, 應化身(응화신)이라고도 하고,
또 그냥 화신이라고도 하고, 또 응신이라고도 하는데
조금 그것을 달리 해석을 하면서도, 또 합해서
응화신이라고도 하고,
그냥 화신. 또는 응신. 이런 말도 쓰고 그래요.
그런데
그것을 그냥 뭉뚱그려서 여기서 육조스님께서
화신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뭉뚱그려서
우리가 본다면, 교화하기 위한 부처님의 모습이다.
그것이 化身(화신)이지요. 또 應身(응신)하면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나타낸 몸! 그
應자가 맞추어서 이런 뜻입니다.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서...
부처님의 공덕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중생들의 안목으로 그것이 너무 동떨어진
그런 부처님의 모습이라면, 그것이 납득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 사바세계 중생들을 교화하는 데는,
사바세계 중생들의 상식에 걸 맞는 모습으로,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하고 비슷하게 나타나야,
그래도 우리가 가까이할 맛이 나고,
또 이야기가 먹혀들고 그렇지요.
기독교에서 하나님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그런 말이 있듯이, 응화신이라는 것이
그런 부처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소위 역사적인
부처님이지요. 역사적인 부처님!
간혹 또
千百億化身(천백억화신)이라고 할 때는,
역사적인 석가모니 말고도 얼마든지
또 내 이웃, 내 가족, 내 친구, 아무튼
나와 인연 있는 사람들. 좋은 인연이든
안 좋은 인연이든 간에 인연 있는 그런 사람들이,
모두가 나에게 뭔가를 깨우치고 뭔가를 도움을 준다고
생각을 할 때, 그것은 다 부처님의 응화신이다. 화신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부처님에다 두지 말고 사람에다 이끌어서 보면,
우리 마음이 법신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나름대로의 어떤 외모들. 키가 얼마고
얼굴은 어떻게 생겼고 하는 그 모습은 화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화신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그다음
報身은 뭐냐?
報身은 그 사람이 쌓은 공덕. 그 사람이 닦은 수행.
공부에 따라서 끼치는 영향력 이예요.
끼치는 영향력...
선생님들은 선생님이 될 수 있는 그런 공을 쌓았기
때문에 어디 가도 선생님소리 듣는 거예요.
선생님행세 하는 거예요.
이것은 선생님으로서 수행을 쌓지 않았다면
아무나 못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報身(보신)입니다.
果報(과보)의 몸이라고요.
또 학교에선 선생님이지만, 집에 가서 어른 행세를
못했으면 어른위치에 있으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어른이 되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報身인겁니다.
과보의 몸이 그렇다고요.
학교에서도 존경받는 선생님이고 집에서도 존경받는
가장 내지 어른. 친척사이에서도 그렇고 동네에서도
그렇고, 또 어떤 종교단체에 가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또 남을 가르치고, 만약 이런 능력을 쌓았다면 그만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지요.
사실은 報身이라고 하는 것이 거기에 또 묘가 있어요.
그래서 法身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동등한
마음이지만, 그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보신. 그 사람이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은 판이하게
다르다고요. 전혀 달라요.
그리고
化身(화신)은 우리가 지금 갖춘 그 모습. 뭐 유사하지요.
비슷비슷합니다. 차이 있다고 해봐야 50보 100보.
큰 차이가 없지요. 이것을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할 때,
달에다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를 잘 합니다.
본래의 달은 法身이라고 그래요.그런데 달빛은 어떻습니까?
달이 얼마나 가렸느냐 가리지 않았느냐에 따라서 달빛이
다르지요.
초승달은 우리가 신 한 켤레 찾기도 어렵습니다.그러나
보름달은 글도 읽을 수 있어요. 목판본 책자는 충분히
달빛에 글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밝습니다.
아주 환 하지요.
그렇다고 원 달의 형체가 기울어졌느냐하면 그건 아니에요.
원 달의 형체는 똑 같아요. 우리마음은 누구나 똑 같아요.
그러나
우리가 닦은 공덕이 다르면 그 사람이 사회에 나타내는,
어떤 주는 영향력은 차이가 있어요. 같은 달이지만
그 달빛의 차이가 상당히 많은 것이지요. 달빛은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보름달과 초승달은 달빛의
차이가 많습니다. 그것을 報身이라고 합니다.
요는 부처님의 報身을,
圓滿報身盧舍那佛(원만보신노사나불)! 완전무결한
보름달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닦을 수 있는 공덕을
다 닦으신 분이라는 뜻으로 부처님을 보고...
우리는 시원치 않지요. 영 형편없습니다.
그것을 말하자면 부처님은 어마어마한
밝기의 전등이라면, 우리는 방하나 정도
겨우 비칠만한 30촉짜리 정도의 전등이 될까?
조금 밝은 사람은 동네어귀 비치는 가로등 정도
될 수도 있고 그렇겠지요. 그렇게 비유를 합니다.
그러나
전기의 성질은 똑 같습니다. 전기의 성질은요.
그것은 마음자리는 똑 같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화신이라고 할 때는, 화신표현은 달에서 잘
표현하고 있어요.
千江有水千江月(천강유수천강월)
萬里無云萬里天(만리무운만리천)이라.
천강에 물이 있으면 천강에 다 달이 비친다.
여기저기 곳곳에 그림자의 달이 비친다.
그것은 하나의 화신인
그 본체의 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이렇게 법신 · 보신 · 화신. 삼신을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전적인 해석에 조금 더 가미를 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육조스님께서 투철하게 깨달으신
인생사 마음도, 세상사 인간사
일체를 환히 그냥 깨달아 가지고,
참 그런 입장에서 보면
우리들이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이
갑갑하기 이를 데 없지요.
정말 걸림 없이 깨달아버린
육조스님의
안목에서 설명하는 三身입니다.
善知識아
旣歸依自三寶竟(기귀의자삼보경)하니→
선지식아 이미 자삼보에게 귀의해 마쳤다.
자신의 삼보. 저 앞에서 삼보 이야기도,
佛 · 法 · 僧이라는 것도 결국, 나를 떠나서
무슨 불이 있고. 나를 떠나서 무슨 법. 또는
승이 있겠나? 하는 그런 차원에서 전부
自心으로부터 삼보가 있다고...
그래서 자삼보에게 귀의해 마쳤으니,
各各至心(각각지심)하라→ 각각 지극한 마음을 가지라.
吾與說一體三身自性佛(오여설일체삼신자성불)하야→
내가 一體. 일체다 이겁니다. 삼신이라 하더라도 이미
“일체다.” “한마음이다.” 이것이지요. 한마음에서 삼신.
법보와 삼신이 나왔다. 그리고 또 그것 역시 자성불이다.
내 마음이 부처다. 내 자성자리 부처다. 라고
일체삼신자성불. 그것을 설해 주겠다.
그 “설해 주겠다.”고 하는 제목 하에 잘 찾아보면
사실은 이미 해답이 다 있습니다.
그 만치 육조스님께서는
확철하게 깨닫고 보니까 당신의 마음 벗어나서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令汝等(영여등)으로→ 너희들로 하여금
見三身了然(견삼신요연)하야→
삼신을 요연하게 보게 해서,
了然
하게라는 것은 환하게. 앞서 제가 설명한
일반적인 상식. 또는 달에 비유한 그런 정도의 해석.
그것이 아니고 정말 꿰뚫어 아는 것. 법보와 삼신에
대해서 꿰뚫어 알아보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自悟自性(자오자성)케하리라→
자성을 스스로 깨닫게 하겠다.
내 성품을 내가 스스로 깨닫게 하겠다.
자기 성품은 자기가 깨닫지 남이 깨닫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 자성자오. 또는 자오자성 이런 말을 합니다.
自悟自性.
自悟自性. 자성을 자오한다. 같은 뜻이지요.
總隨我道(총수아도)하되→
모두들 내가 말하는 것을 따라하라.
이것은 따라하게 되어있는 거예요.
於自色身(어자색신)에
歸依淸淨法身佛(귀의청정법신불)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千百億化身佛(귀의천백억화신불)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圓滿報身佛(귀의원만보신불)하나이다
어떤 스님은 법문할 때 중간에 꼭 한 번씩
따라하라고 시키는 것이 있어요.
육조스님도
이런 경우는 따라하게 했습니다. 그냥 일방적으로
듣는 것보다 입으로 한번 읊조려 보는 것이 재미있고
좋아요. 또 머리에 박히니까 한번 같이 읽어봅시다.
於自色身에 歸依淸淨法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千百億化身佛하며,
於自色身에 歸依圓滿報身佛하나이다.”
於自色身에→
이 몸뚱이, 이 육신. 이 고깃덩어리로 된 내 이 몸에,
이 몸에서 어떻게 한다고요? 귀의한다. 무엇을?
청정법신불에게 귀의한다는 말입니다.
이 육신을 가진 나예요. “나” 라고 할 때 마음도 물론
그 속에 포함 되었어요. 물론 여기 색신은 “집” 이라고,
사택이라는 표현을 뒤에 하고 있습니다만,
色身이라고 할 때, 이럴 때는 마음과 몸을 동시에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나” 지금 펄펄이 살아있고, 눈 뜨고 감정 있고
추운 줄 알고 더운 줄 알고, 화낼 줄 알고 기뻐할 줄 아는,
바로 여기에서 청정법신불에게 귀의한다. 여기에...
어디 딴 데 法身佛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에요.
또
於自色身에→ 나의 色身. 자신의 색신에 대해서
歸依千百億化身佛한다→ 천백억화신불에
“불을 귀의한다.”이 말입니다. “나”에게서...
어디 뭐 어느 법당에 가고, 무슨 저기 갓 바위 올라가서
그렇게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에게서
귀의천백억화신불을 귀의한다. 이겁니다. 그리고
於自色身에 歸依圓滿報身佛한다→
원만보신노사나불. 원만보신노사나불에게 귀의한다.
이겁니다. 딴 데 가서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 내 자신에게서 삼신불을 다 귀의한다. 이겁니다.
이것은
그냥 안다. 이해한다. 깨닫는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귀의한다. 이겁니다. 歸依! 귀의하는 자는 누구며
또 귀의 받는 사람은 또 누구겠습니까? 이것은 아주
무서운 소리입니다. 이런 설명 없어요. 色身이라고
했을 때 더 노골적인 이야기입니다. 더 아주 직접적인
이야기입니다. “마음”하면 또 애매하잖아요. 사실은
마음이 뭐 있는지 없는지...
그런데
이 육신덩어리, 여기에다가 法身佛에 귀의하고,
여기에 그대로 化身佛 · 여기에 報身佛을 귀의한다.
이겁니다. 이 육신덩어리. 고깃덩어리. 지금 감기 걸려서
콜록콜록 거리는 바로 여기 이 육신에, 법신 · 보신 ·
화신을 다 귀의한다. 이겁니다.
나이 들면 몸이 말도 안 듣고 온갖 병투성이고
그런데, 바로 여기에 “귀의하라.” 이겁니다.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또 이것 밖에 달리 무슨 다른 부처가 없습니다.
찾을 수가 없어요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어요.
우리는 도대체 이것밖에 달리 다른 부처는
못 찾는다는 것이지요.
번뇌 투성이. 모순투성이. 온갖 감정. 희로애락.
남 미워하고 고자질하고 막 그냥 숱한 번뇌 망상.
인간이 가지고 있는 온갖 감정과 모순을 그대로
한 짐 가지고 있는 상태 이대로, 법신 · 보신 · 화신불이다.
그러니 여기에 법신불로 귀의하고. 화신불로 귀의하고.
보신불로 귀의하라.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이 부처님이다.”
그 말입니다.
“사람이 부처님이다.”
사람이라고 하는 그 속에는 이 고깃덩어리의 몸.
온갖 번뇌 망상 투성이의 어떤 인간적인 감정.
그리고 또 어떤 한 면으로 때로는 부처님 같은 마음.
보살 같은 마음. 또 한 번 신심나면 정말 어마어마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인간에게는 있지요.
우리가 무심코 그냥 살기만 해서 그렇지, 우리들
자신을 잘 연구하고 천착해보면, 정말 기기묘묘한
존재가 이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사람이상 가는 부처는 없어요. 사람이상 가는 부처는...
善知識아
色身은
是舍宅(시사택)이라→ 집이라 그랬어요.
不可言歸向者(불가언귀향자)니→
가히 귀향할, 귀의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들 말한다.
못된다.
三身佛은 在自性中(재자성중)하야→
삼신불은 性中에. 성품 가운데 자유자재해서
世人(세인)이 總有(총유)언만→
앞에서 어자색신에 모든 삼신불을 귀의한다.
해놓고, 여기서 색신은 사택이라. 불가언귀향자다.
그러니까
여기는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을 두고 하는 소리입니다.
앞에 한 말이, 우리가 읽었던 그 내용의 본래의 취지지요.
삼신불은 재자성중. 우리의 성품 가운데 자재한다.
在自. 거기 자성중에 있다. 삼신불은 우리마음속에 있다.
世人이 總有언만→ 세상 사람들이 다 가지고 있어요.
삼신불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爲自心迷(위자심미)일새→ 자심이 미하기 때문이다.
우리마음이 그것을 몰라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다 가지고 있는데...
不見內性(불견내성)하고→
안에 그러한 성품을 보지 못하고
外覓三身如來(외멱삼신여래)해서→
법신 · 보신 · 화신 하면 밖으로 그저 찾는 것이에요.
그래서
법신불 모셔놓은 데를
大寂光殿(대적광전)이라고, 이렇게 법당을 따로 지어서
그렇게하고, 화신불을 모셔놓으면 무슨
大雄殿(대웅전)이다. 이렇게 표현하고,
또 법망경 내지 화엄경. 또는 보살계.
이런 것을 보신불이 설했다는 표현들도
있고요. 별별 그런 이야기가 많지요. 삼신여래를 주로
밖으로 찾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외멱삼신여래.
밖으로 삼신여래를 찾아서,
不見自身中(불견자신중)에
有三身佛(유삼신불)하나니→
자신중에 삼신불이 있는 것을 보지를 못한다.
자기 속에 삼신불이 있는데, 그것을 못 본다.
왜냐?
밖으로 눈을 돌리기 때문에요.
안으로 눈을 돌릴 것 같으면 얼마든지 찾을 텐데,
우리는 그저 밖으로 눈을 돌리는 그런 습관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汝等聽說(여등청설)하라→
너희들은 모두들 청설하라. 말하는 것을 들어라.
今汝等(금여등)으로→ 지금의 너희들로
於自身中(어자신중)에서 見自性(견자성)에
有三身佛(유삼신불)케하리라→
자성가운데 삼신불이 있다고 하는 것을 보게 해
주겠다. 그랬어요
此三身佛(차삼신불)은
從自性生(종자성생)이라→
이 삼신불은 자성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스스로의 성품. 우리들 스스로의 성품으로부터
나온 것이지,
不從外得(부종외득)→
밖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개발적으로 이야기를 해놓고,
그 다음에 하나하나 짚어서 넘어가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