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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와집(龍耳窩集) 권뢰(權𡋃)생년1800년(정조 24)몰년1873년(고종 10)자경중(景中)호용이와(龍耳窩), 죽담(竹潭)본관안동(安東)특기사항허전(許傳)의 문인. 鎭海 竹林生
철종 3 1852 임자 咸豐 2 53 3월, 덕유산 일대를 유람하고 〈遊德裕山錄〉을 짓다.
龍耳窩集卷之三 / 雜著 / 遊德裕山錄
時方刊刻桐溪先生續集。而先生宗孫第三弟鄭衡相殷老。與宋止洛潤吾。爲書寫之役。殷老則壬辰生而居本縣薑洞。潤吾則庚辰生而居三嘉並木。與殷老敬審某里齋內數寸烏石。奉安卓上。題崇禎年號止於斯。明歲那堪異曆披。從此山人尤省事。只看花葉驗時移句。而先生親筆。其上懸御製詩賜祭文。再拜出。齋下有庵。庵前有樓。樓之西。揭鳩巢一板。先生親筆。其東揭百世淸風樓花葉樓二板。北曰採薇軒。南曰驗時軒。又有三題咏一記文。文則愚伏鄭先生所撰。樓之南小門外有碑。書皇明朝鮮鄭桐溪文簡公遺墟碑。碑陰有記。千載之下。不覺涕泗自落。敢次本韻。以寓景慕之心。適儒士在座。與之同宿。朝起覔小紙錄同話。柳應龍雲汝乙巳生。陜川梅村。李𨯶叔憲丙寅生。陜川汀㙜。李遠祐君錫丁卯生。居昌矢項。金錫允聖祚丁丑生。安義學洞。吾之從兄弟與鄭,宋二友。凡八人也。相別之際。懷緖不可裁。而雲汝以其省楸之行。共吾而來。至十里乃解。所過水石。可謂漸入佳境而有釜淵噴雪潭。午至
*星川院。院傍有月城草堂。而同春宋先生。避丁丑虜變。㝢居于此者也。其北數里有松臺。
午至利安縣。登光風樓望
*龍門院。院是一蠧,桐溪二先生妥靈之所也。夕至存齋,大笑軒幷享
*黃巖書院。翌朝祗謁。其傍有劉,鄭二義士別祠。二十八日。過咸陽
介坪。坐局甚明朗。龍虎環拱。案對廣濶。水口亦好。眞嶺右名基。古語以盧,鄭,權三姓次第居之云。而玉溪先生出於是。一蠧先生後裔。亦聞于世。抑其次。吾權也。入
渭城。登崔孤雲所刱學士樓。周觀題詠。有玉溪韻而詩意甚好。西北五里許。尋
竹谷村。此亦咸之一名基云。而前有鳳凰臺。後有歸巢峯。必有形格之地。然水勢如反弓。直戛村前。以俗眼觀之。此其所欠者也。夕向校村權兵使舊廬留宿。主人兄弟慇懃迎接。大有族誼。雖苦意强挽。以曠日久客爲辭。則優資買路。二十九日。過
*栢淵書院。卽孤雲,𠌫齋兩先生入享之所。十餘里蹄閒驛踰悟道峙。二十里登龜。十里堂伐過碧松亭。二十里百巫。此去知異上峰三十里也。欲爲上山之行。而衣不綿。槖無齎。遂罷意而歸。豈非吾輩與山無素者歟。十里至亭長村廣巖店。此皆馬川也。登
碧樹林嶺。自店至頂十五里無人家。自頂至河東三井店亦十五里。崎嶇踏石。路之狹險。甚於嶺之北也。升降之際。欲忘勞憊。與從弟遂拈學士樓玉溪韻。因詠卽事。昏黑到七佛庵。今夕乃三十日也。
서명 송계문집 : 松溪文集
원서명 松溪先生遺稿
저/편자 이지번 (李之蕃 , 1469 ~ 1522) 저
德巌鄕院編 덕암사 전말 德巖祠顚末-117
덕암서원실적기 德巖書院實蹟記-121
盧光履 1775 1856 豊川盧公行狀 行狀 張福樞 四未軒集
장복추(張福樞) 1815년(순조 15)~1900년(고종 37)
四未軒文集卷之十一 / 行狀 / 豊川盧公行狀
近古豊川盧公諱光履。字胤之。勿齋號也。天性剛方。孤立不黨。早謝科臼。折節向學。經傳子史。無不該貫。而尤邃於易學。以六十四卦。分配十二辰。而作神明舍圖。以存理遏欲。爲學問頭腦。而作防意城圖。乎抄聖賢至論。爲學令五條。其一。人倫之要。其二。學問之要。其三。變化氣質之要。其四。待人之要。其五。愛物之要。因箴以自警。采摭先世嘉言善行之散出於公牘輿誌先賢題品者。著爲家學圖。庚辰。奉享旁祖弘窩先生於
道谷院。丁亥。有郡底掛書之變。辭連於公。事將罔測。按使鄭公基善。察公志行。且所抆文字。皆天人性命之源。心學義理之微。顧謂諸査官曰。此眞讀書人。卽爲白放。因以登聞。拿罷地主。幷竄兵使及捏誣者。公猶自訟曰。吾行未有素孚於人。曳衰就捕。久曠廬次。實爲終天至痛。自是益勵素守。事母夫人。竭力忠養。地主李公益秀趙公濟晩。聞其孝。月朔米肉。以資厨供。前後相繼。有孀妹殉節而達天聽。㫌其閭。竪先墓三世之碣。勘正姓譜之世曠難稽者。祧埋位田之當歸宗者。付諸族中。以奉無嗣外先之歲薦。生英廟乙未十二月初四日。卒哲廟某年十一月初八日。享年八十二。屬纊前數日。口號自輓曰。勿字旗頭勇字懸。麾諸強賊壁深堅。休言著脚傍無地。只信知心上有天。造次淵冰常戒懼。平居呼吸亦尤愆。而今而後吾知免。含笑怡然指九泉。此可以槩公踐履之始終也。嗟夫世降俗頹。視禮義爲籧篨者滔滔。而惟公知行誼之爲貴。盡孝於親。篤友於弟妹。推及旁外。先義所當爲。勇前不顧。盖其得於天者。有以異於人矣。若使公擢用明時。何事不做。而世不我與。落拓窮巷。歷險履患。而志益固。居窮處困而操不撓。飽飫晩暮之工。鄕射條約。太極問答。有足以嘉惠後學者。未必不自窮厄困苦中得來矣。噫。玉埋而光自著。珠沈而瑩莫掩。洪公章燮。待以南州高士。崔公璜。許以道義交。洪相公奭周。見公斥邪文。再三歎賞曰。盧某文詞浩汗。義理森嚴。令人起敬。此非公實際許邪。有文集若干篇。藏于家。公鼻祖諱裕。麗進士。我世宗朝。有集賢殿學士。淸白吏諱叔仝。箋註經史。號松齋。是生校理諱昐。贈禮判。是生參奉諱友明。號信古堂。己卯名賢。以仲子文孝公諱禛貴。贈吏判。祖孫俱享
道谷書院。是生進士諱禧。是生諱士俊。贈刑判。是生諱胄。壬辰擧義。授參奉。不就。是生諱亨道。値丙亂。與兄諱亨運。倡義旅。是生諱沔。是生諱世重。是生諱琮。以從父弟諱瑛子諱守敬爲後。卽公祖也。考諱稜。妣南原梁氏。重德女。配載寧李氏。毅軒心傳女。毅軒湖左名儒。公之德器成就。有所自云。有一女適禹希舜。後配扶安金氏。義鑑女。無育。以弟光德子奎爲嗣。側室二男。坦載。奎三女。李明善,閔致央。次幼。坦男五鉉,植鉉。女李祖林,韓容樂,李昌容。載男卓鉉,旺鉉,弼鉉。餘幼。公墓在斗洞陽地負亥原。前配墓斗洞酉坐原。後配墓酉谷子坐原。公之胤坦。老且貧甚。齎幣繭足。不遠千里。求墓道銘於許尙書傳。求弁卷文於李承宣敦禹。金臺諫麟燮。又求狀行於福樞。其誠意之勤摯。有足動人。且世誼不凡。有不敢終辭。謹據家狀而刪潤之如右。以塞孝懇云。
사미헌집 제11권 / 행장(行狀) / 풍천 노공 행장〔豐川盧公行狀〕
근고(近古)에 본관이 풍천(豐川)인 노공(盧公)은 휘가 광리(光履)이고 자는 윤지(胤之)이며 호는 물재(勿齋)이다. 천성이 강건하고 방정하며 홀로 외롭게 서며 편당을 짓지 않았다. 이른 나이에 과거시험 공부를 포기하여 종래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지향하여 경전자사(經傳子史)를 두루 관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더욱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심오하여 64괘를 가지고 12진(辰)에 분배하였으며, 신명사도(神明舍圖)를 그려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막는 것으로 학문하는 핵심으로 삼았다. 또 방의성도(防意城圖)를 그린 뒤 손수 성현의 지론(至論)을 초록하여 학령(學令) 5조를 만들었는데, 제1조는 인륜의 요체이고 제2조는 학문의 요체이며 제3조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요체이고 제4조는 사람을 대하는 요체이며 제5조는 사물을 사랑하는 요체이니, 이것을 잠(箴)으로 써서 스스로 경계하였다. 그리고 공문서, 여지(輿誌), 선현의 글에서 흩어져 나오는 선세(先世)의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을 채집하여 가학도(家學圖)를 저술하였다.
경진년(1820, 순조20)에 방조 홍와(弘窩) 선생을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받들어 제향하였다. 정해년(1827, 순조27)에 군청에 대자보가 걸리는 변고가 일어났는데 글의 내용이 공과 연관되어 장차 앞일을 예측할 수 없었다. 안찰사 정기선(鄭基善)이 공의 지행(志行)과 압수한 바의 글들이 모두 천인성명(天人性命)의 근원이며 심학의리(心學義理)의 은미한 것임을 보고 여러 조사관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참으로 독서하는 사람이다.”하고는 곧바로 무죄로 석방시켰다. 인하여 이것을 임금에게 아뢰고 군수를 잡아 신문하여 파직시켰으며, 아울러 병마절도사와 무고를 날조한 사람을 귀양 보냈다. 그러나 공은 오히려 스스로 반성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행실이 사람들에게 본래 믿음을 주지 못함이 있었다. 상복을 입은 채 체포에 응하여 오랫동안 여막을 비웠으니, 실로 종천의 지극히 애통한 일이 된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평소 지키던 절조를 더욱 힘썼다. 어머니를 섬김에 힘을 다하여 충심으로 봉양하였다. 군수 이익수(李益秀)와 조제만(趙濟晩)이 그의 효행을 듣고 매달 초하루에 쌀과 고기를 주어 음식을 공급하는데 도움이 있게 하였는데, 두 군수가 전후로 서로 이었다. 순절한 과부 여동생이 있었는데, 이것을 임금에게 들리게 하여 정려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3대에 걸친 선조의 비석을 세웠다. 또 족보 중에 세대가 오래되어 고증하기 어려운 것은 따져 바로잡았고, 종가에 돌아오는 것에 해당하는 조매(祧埋)할 위답을 종족에게 주어 후손이 없는 외선조(外先祖)의 세천(歲薦)을 받들게 하였다.
영조 을미년(1775, 영조51) 12월 4일에 태어나 철종 모년 11월 8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2세였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구호(口號)로 스스로의 만사를 지어 말하기를
‘물’ 자 깃발 머리에 ‘용’ 자를 매달고 / 勿字旗頭勇字懸
여러 강적을 물리치며 성벽을 깊고 견고하게 하네 / 麾諸强賊壁深堅
발을 디딤에 곁에 땅이 없다고 말하지 마라 / 休言著脚傍無地
다만 마음을 알아줌은 위에 하늘이 있음을 믿네 / 只信知心上有天
잠깐이라도 못과 얼음을 밟듯 항상 두려워하지만 / 造次淵冰常戒懼
평상시 호흡에도 허물을 저질렀네 / 平居呼吸亦尤愆
지금 이후에야 내가 이에서 벗어남을 알았으니 / 而今而後吾知免
웃음을 머금고 기쁜 마음으로 저승을 가리키네 / 含笑怡然指九泉
라고 하였으니, 이 만사에서 공의 평생 이력을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아! 세상이 갈수록 풍속이 퇴폐하여 예의를 쓸데없는 것〔籧篨〕으로 보는 자가 넘쳐나거늘 오직 공만은 올바른 행실이 귀한 일임을 알아서,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고 동생과 누이에게 우애를 돈독히 하여 이것을 방외선조(旁外先祖)에게까지 미루어 적용하였다. 의리상 마땅히 해야 할 것은 용맹하게 전진하며 뒤로 돌아보지 않았다.
대개 공이 하늘에서 품부받은 것이 보통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었으니, 가령 공이 태평성대에 등용되었다면 무슨 일이든 이루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세상이 공과 함께 하지 않고 궁핍한 거리에서 낙척불우하게 만들었다. 험난과 환란을 겪으면서도 뜻은 더욱 견고해지고, 궁핍한데 거처하면서도 지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만년의 넉넉한 공부로 저술한 향사례(鄕射禮) 조약과 태극문답(太極問答)은 후학들에게 아름다운 은혜를 끼치기에 충분했으니, 반드시 궁핍하고 곤궁한 가운데서 터득한 것이 아님이 없었던 것이다.
아! 옥은 흙에 묻혀 있어도 빛은 저절로 드러나고 구슬은 물에 잠겨 있어도 밝은 빛을 가릴 수가 없다. 공에 대하여 홍장섭(洪章燮)은 남쪽 고을의 고사(高士)로 대우하였고, 최황(崔璜)은 도의(道義)로 허교하였다. 그리고 상공(相公) 홍석주(洪奭周)는 공의 척사문(斥邪文)을 보고 재삼 감탄하며 말하기를 “노모(盧某)의 글은 문장은 광대하고 의리는 삼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실제에 입각하여 공을 평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문집 약간 권이 집에 소장되어 있다.
공의 비조의 휘는 유(裕)로 고려 시대에 진사를 지냈다. 조선 시대 세종 때 집현전 학사(集賢殿學士)이며 청백리였던 휘 숙동(叔仝)이 있었는데, 경사(經史)에 전주(箋註)를 달았으며 호가 송재(松齋)이다. 숙동이 교리(校理)를 지냈으며 증직이 예조 판서인 휘 분(昐)을 낳았으며, 분이 낳은 참봉을 지낸 휘 우명(友明)은 호가 신고당(信古堂)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이다. 우명은 시호가 문효(文孝)이며 휘가 진(禛)인 둘째 아들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조 판서에 증직되었으며 조부와 자신이 모두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우명이 진사를 지낸 휘 희(禧)를 낳았고, 희가 증직이 형조 판서인 휘 사준(士俊)을 낳았다. 사준은 휘 주(胄)를 낳았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주가 낳은 휘 형도(亨道)는 병자호란을 만나 휘가 형운(亨運)인 형과 의병을 창도하였다. 형도는 휘 면(沔)을 낳았고, 면은 휘 세중(世重)을 낳았으며, 세중은 휘 종(琮)을 낳았다. 종은 사촌 동생 휘 영(瑛)의 아들 휘 수경(守敬)을 양자로 삼았으니, 곧 공의 조부이다. 아버지의 휘는 릉(稜)이다.
어머니는 남원 양씨(南原梁氏)로 중덕(重德)의 따님이다. 부인은 재령 이씨(載寧李氏)로 호가 의헌(毅軒)인 심전(心傳)의 따님이다. 의헌은 호좌(湖左 전라도)의 명유(名儒)이니, 공의 덕망과 기량의 성취가 여기에서 유래함이 있다. 외동딸만 두었으니, 우희순(禹希舜)에게 시집을 갔다. 둘째 부인은 부안 김씨(扶安金氏)로 의감(義鑑)의 따님이니, 자식이 없어서 공의 동생 광덕(光德)의 아들 규(奎)를 양자로 삼았다. 측실에는 2남을 두었으니, 탄(坦)과 재(載)이다. 규는 3녀를 두었으니 첫째는 이명선(李明善)에게 둘째는 민치앙(閔致央)에게 각각 시집을 갔고 막내는 어리다. 탄의 아들은 오현(五鉉)과 식현(植鉉)이고 딸은 이조림(李祖林),한용락(韓容樂),이창용(李昌容)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재의 아들은 탁현(卓鉉),왕현(旺鉉),필현(弼鉉)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공의 묘소는 두동(斗洞) 양지(陽地) 해좌(亥坐) 언덕에 있다. 전처의 묘소는 두동(斗洞) 유좌(酉坐) 언덕에 있고 후처의 묘소는 유곡(酉谷) 자좌(子坐) 언덕에 있다.
공의 아들 탄이 늙고 매우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폐백을 마련하여 발이 부르트면서 천리를 멀다하지 않고 상서(尙書) 벼슬을 지낸 허전(許傳)에게 묘도명(墓道銘)을 구하였고, 승선(承宣) 벼슬을 지낸 이돈우(李敦禹)와 대간(臺諫) 벼슬을 지낸 김인섭(金麟燮)에게 문집 서문을 구하였고 또 나에게 행장을 지어주기를 구하였다. 그 성의가 부지런하고 정성스러워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족하였다. 또 서로간에 세의(世誼)도 평범하지 않아 감히 끝내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가장에 의거하여 위와 같이 산삭하고 윤색하여 효자의 지극한 정성에 색책한다.
[주-D001] 홍와(弘窩) 선생 : 노사예(盧士豫, 1538~1594)를 말한다. 본관은 풍천(豐川), 자는 입부(立夫), 호는 홍와(弘窩)이다. 경남 함양군 북개평리(北介平里)에서 출생하였다. 30세에 남계서원(藍溪書院) 원장(院長)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김면(金沔) 장군을 돕고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참모로 활약했다. 1609년(광해군1)에 효(孝)와 임진공훈으로 정려(旌閭)가 내려졌고,
1824년(순조24)에 도곡서원(道谷書院)에 제향 되었다.[주-D002] 도곡서원(道谷書院) : 경남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 있었던 서원이다. 1701년(숙종27)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승숙(趙承肅), 정복주(鄭復周), 노숙동(盧叔仝), 노우명(盧友明)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노사예(盧士豫)와 정수민(鄭秀民)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9년(고종6)에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였다.[주-D003] 정기선(鄭基善) : 1784~1839.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백(元伯), 호는 수석(脩石)이다. 1812년(순조12)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829년(순조29)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그 뒤 벼슬이 예조 판서와 대사헌에 이르렀다.[주-D004] 이익수(李益秀) : 1786~?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성겸(聖謙)이다.[주-D005] 조제만(趙濟晩) : 1775~?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자송(子松)이다.[주-D006] 모년 : 향년 82세를 계산하면 모년은 병진년(1856, 철종7)이 된다.[주-D007] 구호(口號) : 시제(詩題)의 하나로 즉석에서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읊은 시를 말한다.[주-D008] 홍장섭(洪章燮) : 1785~?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군헌(君憲)이다. 1807년(순조7) 생원시에 합격하여 함양(咸陽) 군수를 지냈다.[주-D009] 최황(崔璜) : 1783~1874.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국보(國輔), 호는 구암(苟菴)이다. 20세에 반시(泮試)에 합격하여 벼슬은 1823년(순조23) 제릉 참봉(齊陵參奉)을 시작으로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에 이르렀다.[주-D010] 홍석주(洪奭周) : 1774~1842. 본관은 풍산(豐山), 자는 성백(成伯), 호는 연천(淵泉)이다. 1795년(정조19) 전강(殿講)에서 장원을 하고 이어 문과에 급하였다. 벼슬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손부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연천집》, 《학해(學海)》, 《영가삼이집(永嘉三怡集)》, 《동사세가(東史世家)》, 《학강산필(鶴岡散筆)》 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주-D011] 허전(許傳) : 1797~1876.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이로(而老), 호는 성재(性齋)이다. 경기도 연천 사람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판서에 올랐으며, 김해 부사로 재임 중 영남의 많은 선비를 육성하였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주-D012] 이돈우(李敦禹) : 1807~1884.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시능(始能), 호는 긍암(肯菴)이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현손이다. 관직이 이조 참판에 이르렀으며 안동 일직의 소호리(蘇湖里)에서 저술과 강학에 종사했다.[주-D013] 김인섭(金麟燮) : 1827~1903. 본관은 상산(商山), 자는 성부(聖夫), 호는 단계(端磎)로 단성 민란(丹城民亂)의 지도자이다. 1846년(헌종12) 문과에 급제하였다. 고향 산청 단성 단계리의 탐학한 관리들이 농민을 수탈함을 목격하고는 1861년(철종12)에 농민들을 인솔하여 민란을 일으켜 부정한 현감과 이서들을 축출하였다. 1894년(고종31)에는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임명되었으며 1902년에는 통정대부에 올랐다.
ⓒ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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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전(許傳) 1797년(정조 21)~1886년(고종 23)
性齋先生文集卷之二十二 / 墓碣銘 / 盧勿齋墓碣銘
公諱光履字胤之號勿齋。盧氏其先本豐川人。國子進士諱裕爲上祖。名碩相繼。我世宗時有大司憲集賢殿學士淸白吏諱叔仝號松齋。箋註經史。子昐藝文校理贈禮參判。子友明號信古堂參奉。世稱己卯名賢。以仲子文孝公禛貴贈吏判。祖孫俱享
道谷書院。子禧進士。子士俊早夭。以文行贈司冦亞卿。子胄擧義於壬辰之亂。授參奉不就。子亨道値丙子。與兄參奉亨運倡義興師。道聞講和而還。遂隱不顯。子沔子世重。子琮無嗣。以從弟瑛子守敬爲后。子稜。寔公之皇考。妣南原梁氏重德女也。公天性剛方。孤立不黨。早廢科業。專心於爲己之學。竆理以致知。主敬以立本。日用動靜。不離乎規矩。貨利聲色。不留乎心術。氣象莊重。志思澹泊。敎人必先孝悌。接物不設畦畛。然至於利義邪正之辨。一斷於繩墨。不顧人之是非。由是見忤於鄕黨。丁亥邑有匿名匈書之變。時則公居父憂。苫塊守制矣。媢嫉者捏誣於官。逮係獄中。至於上聞。事將不測。道伯鄭基善廉察公篤學力行。意其橫罹。卽致之營庭。躳自問訊。見辭氣安閒。應對眞實。幷覽其平日所著書在搜入者。指示諸査官曰此文字。無非天人性命之原。學問義理之微。左右皆嘖嘖。遂卽白放。反坐其誣捏者及郡守金履綱兵使權應祐。幷竄配之。公自是益復戰兢自守。磬室無甔石。怡然自樂。讀書不撤。奉養偏母。誠敬備至。地主李益秀素無雅分。而下車先訪。哀其非辜。嘉其行誼。月餽米肉。俾供親厨。趙濟晩洪章燮相繼而至。皆厚遇之。然公未嘗一至偃室。李晦淵莅郡數朔而遞。然公之書謄寫以去。洪相國奭周取見之曰文瀾浩汗。義理森嚴。不意嵌巖之僻。有此大段學問。壬辰遭內艱。杖而後起。友于弟。季妹早孀殉節。公爲之上達旌復。誠於追報。竪三世墓碣。正百年之譜系。以至外氏香火之不絶。皆孝之推也。嘗捃摭先世嘉言善行。爲家學圖。又作防意城神明舍兩圖。皆可以爲學則。丙辰歿。距生年乙未八十二。臨終前數日。口呼自輓。命兒子書之曰勿字旗頭勇字懸。麾諸強敵壁深堅。休言着脚旁無地。只信知心上有天。造次淵氷常戒懼。平居呼吸亦尤愆。而今以後吾知免。含笑怡然指九泉。讀此詩者可以想見公踐履之終始也。配寧城李氏。父心傳號毅軒。爲湖左名儒。公之薰炙而肆力於學。有所本云。有一女適禹希舜。後配扶安金氏義鎰女。無育。以弟光德子奎爲嗣。側室二男。坦,載。奎無子。以族子鳳甲爲嗣。三女適李明善,閔致央。次幼。坦二男二女。男五鉉夭,植鉉。女適李祖仁,韓容樂。載五男卓鉉,壬成,弼成,餘幼。公墓在斗洞陽地祖妣塋左亥坐原。前配墓斗洞酉坐。後配墓酒谷敬庵公兆下子坐。銘曰。
天賦純剛。志正氣豪。人好脂韋。我疾桔槹。有橫其逆。有直其謾。遯世无悶。碩人之寬。學問之力。終于勿旗。勒此顯石。物換星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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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 도천리 경충재(咸陽道川里景忠齋)
지정번호 :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486호
지정일자 : 2009년 11월 19일
위치 : 경남 함양군 병곡면 함양남서로 1508-1
규모 : 1동 (661 ㎡)
시대 : 조선시대(1855,04,00)
소유자 : 하 종 규
함양 도천리 경충재는 철종 6년(1855) 4월. 하문도. 하락도 형제가 경충재를 짓고 같은 해 경충재판 『호정집(浩亭集)』을 다시 간행 한 곳이다.
이곳은 철종 12년(1861년) 이후부터 최근까지 후학을 양성하는 기관인 위양서원(渭陽書院)으로 이용하다가 학생이 줄어 문을 닫았다.
문충공 하륜의 사당인 문충사. 위양서원. 선장각. 동. 서재등은 없어졌지만 2009년 11월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경충재를 해체. 보수한 상태로 관리되고 있다.
1976년에 문충공(文忠公) 하륜(河崙)의 제19세손 종손 하경식(河景植)이 경충재 기와를 보수한 이력이 있다. 함양 도천리 경충재는 20세손 종손(宗孫) 하종규(河宗奎60세)가 소유 관리 하고 있다.
재실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묘로 서쪽 두 칸 방과 동쪽 두 칸을 툇마루로 한 건축 양식을 따랐다. 기단과 초석은 자연석으로 만들고, 기둥은 가공한 돌을 놓고 세웠다.
경충재는 서당의 기능에 충실하도록 계획되었으며, 방의 구성등 작은 공간을 적절히 이용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璿章閣原韻 선장각 원운
聖祖龍興日 : 훌륭하신 선조 새 왕조 흥기할 즈음에,
羣英鳳附辰 : 뭇 영웅 임금과 때맞추어 응하셨네.
繪功侔漢將 : 공신 그림은 한나라 장수 같고,
同德邁周臣 : 덕을 같이함은 주나라 신하 같네.
大誓山河重 : 크게 산하를 두고 굳게 맹세하니,
湛恩雨露新 : 맑은 임금의 은혜 비나 이슬처럼 새롭네.
煌煌親署冊 : 찬란하게 친히 회맹서에 서명하셨으니,
是閣鎭千春 : 이 선장각 길이 영원하리.
文忠公冑孫 鍾赫 문충공 주손 종혁 지음
草昧經綸際 ; 임금이 경륜 어두웠을 때,
英豪䟽附辰 ; 영웅호걸 임금과 때맞추어 응하셨네.
同心扶社稷 ; 마음을 합쳐 사직을 부축하니,
一體配君臣 ; 임금과 신하 한 몸 되어 짝하였네.
褒鄂凌煙舊 ; 포악의 능연각(凌煙閣)은 예스럽고,
皐蘷贊日新 ; 고요(皐陶)와 기(蘷) 얻어 날로 새롭게 하였네.
煌煌宏樹立 ; 찬란히 크게 나라 세워,
磐泰奠千春 ; 반석에 올려놓으니, 천년토록 제사 받드네.
觀察使李憲永謹稿 관찰사 이헌영 삼가 지음
※ 凌煙閣: 중국 당나라 태종 때 개국 공신 24명의 초상을 그려 보관하던 장소.
※ 皐蘷: 중국 요임금 순임금시대의 훌륭한 신하.
衆水○東海 : 뭇 강물은 동해로 흐르고,
群星拱北辰 : 뭇 별들은 북극성을 향한다.
槿花君子國 : 무궁화 피는 군자의 나라,
喬木古家臣 : 교목 있는 社稷에 오래된 신하 있네.
鐵券依如舊 : 철권은 의연히 옛날인데,
奎章宛○新 : 璿章閣은 완연히 날로 새롭네.
凌烟豈專美 : 능연각만 어찌 아름다우리오,
仙李萬年春 : 우리 왕조 만년토록 영원하리.
後孫○識 후손 ○ 기록함
丞相勳勞大 : 재상이 큰 공훈 세울 수 있었던 것은,
風雲際會辰 : 바람과 구름 때를 잘 만났기 때문이로다.
光明今日月 : 밝은 빛이 해와 달과 같아,
陟降舊君臣 : 옛날 군신처럼 호응하며 오르내리네.
章閣孫謨永 : 璿章閣 짓는 후손들의 뜻 갸륵하고,
盟書聖澤新 : 會盟書에는 임금의 은택 새롭네.
後生多感慕 : 후손들 모두 감격하고 흠모하니,
廟柏幾經春 : 사당의 잣나무 길이 영원하리.
河東鄭在學 하동 정재학 지음
호정집(浩亭集)
저자는 생전에 시문 20권을 自編하여 보관하였다고 한다.《手稿本》 그러나 이 수고본은 간행되어 전해지지 못하였다.이에 후손 河鎭達이 여러 典籍에서 저자의 시문을 찾아 輯佚ㆍ편차하고, 후인들의 기록을 모아 附錄으로 엮어 1847년(헌종 13) 진주 梧坊齋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였다.《초간본》 현재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零本으로 소장되어 있다.그 후 8년 뒤인 1855년 함양 景忠齋 에서 다시 목활자로 간행하였다.《중간본》 이 중간본은 族人 河必奎가 초간본과는 별도로 蒐集ㆍ編次한 것으로 미처 간행에는 착수하지 못하고 있던 중, 梧坊齋의 초간본이 訛謬된 부분이 있게 되자 河文圖, 河洛圖 형제의 校讎를 거쳐 활자본 2권으로 간행하였다. 현재 계명대학교,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零本으로 소장되어 있다.1940년에는 河涑이 增補ㆍ再編하여 石印本 2책으로 간행하였다.《삼간본》 현재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5권 2책으로 되어 있으며 권1은 詩, 권2~3은 文, 권4~5는 附錄이다.권수에는 柳致明과 李景在의 서문 및 目錄이 실려 있다.권1에는 樂章 2편을 비롯하여 오언과 칠언시 9題(18수)가 실려 있다. 그 외에 逸佚이거나 缺句된 12편의 작품은 題目만이 실려 있다.권2에는 〈乞抑哀聽政疏〉를 비롯한 5편의 疏와 箚 1편, 啓辭 3편, 〈心說〉ㆍ〈性說〉을 비롯한 5편의 說, 그리고 鄭夢周ㆍ李集ㆍ金九容 등에게 써 준 9편의 詩集序 및 送序, 〈慶熙樓記〉 등 11편의 記文이 실려 있다.권3에는 〈頒赦敎文〉을 비롯한 3편의 雜著와, 成石璘과 朴晉老에게 써 준 〈讌坐圖贊〉과 〈眞贊〉 2편, 權近에 대한 제문 1편, 그리고 李穡, 盧嵩에 대한 墓誌銘 2편이 실려 있다.권4~5는 부록으로, 권4에는 敎書 4편, 祭文 4편, 묘갈명, 史氏贊, 碑陰記, 功臣錄, 草記, 諸賢贈遺詩章과 摭錄이 실려 있다. 권5에는 世系圖ㆍ禮曹立案ㆍ草記入啓ㆍ奉安文이 실려 있고, 그 외에 星山李氏事實과 贈辰韓國大夫人敎書ㆍ官誥가 附記되어 있다.권미에는 방손 河晉賢의 발문이 실려 있다.
浩亭 河崙(1347,12,22-1416,11,06)의 문집 2종이다.
진주 오방재 소장 호정집 책판(晋州 梧坊齋 所藏 浩亭集 冊版)
이 책판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이미 지정되어 있는 하윤린의 신도비문과 비음기가 모두 실려 있다. 현재는 비음기가 부분적인 손상을 입어 완벽하게 판독하기 어려운데 이 책판은 이 부분을 완벽하게 복원하게 해 준다. 특히 이 비문과 비음기는 진양하씨 시랑공파의 상대 계보를 알려 주는 최초의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그 중요성이 있다. 더구나 1847년에 간행되었으니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전체 책판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 책판 현황
(1) 책판의 분량 : 46매 86장 (6매 12장 결락) 序 文 : 2매 3장 (1844년 柳致明 所撰 序文, 李景在 所撰 序文) 世系圖 : 1매 2장 目 錄 : 1매 2장 太宗 敎書 및 正祖 賜祭文 : 1매 2장 제1권 : 11매 21장 제2권 : 10매 20장(4매 8장 결락 : 1ㆍ2ㆍ9ㆍ10ㆍ11ㆍ12ㆍ23ㆍ24장) 제3권 : 13매 23장(1매 2장 결락 : 15ㆍ16장) 부 록 : 4매 8장 발 문 : 1매 1장 (1매 2장 결락 : 2ㆍ3장) 변무록 : 2매 4장
(2) 책판의 크기 마구리를 포함한 전체 크기 : 가로 45cm 세로 30cm 광곽의 크기 : 가로 31cm 세로 21.5cm 목판의 두께 : 약 2cm
2. 간행 경위와 그 시기(1) 서발문 찬술자 『호정집』의 서문은 定齋 柳致明(1777-1861)과 李景在에 의해 찬술된 두 편이 있는데, 유치명의 서문이 앞에 위치해 있다. 유치명의 서문이 찬술된 시기는 ‘上之十年甲辰端陽節’, 즉 1844년 5월 5일이며, 이경재의 서문이 찬술된 시기는 밝혀져 있지 않다.발문은 방후손 容窩 河晉賢(1776-1846)이 찬술한 것인데, 역시 찬술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다.(2) 간행 경위방후손인 容窩 河晉賢이 찬술한 『浩亭集』 발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아아, 후손이 없고 병란을 여러 차례 겪어서 남기신 문집이 흩어져 전해지지 않는다. 족인 鎭達 씨가 사방으로 수소문하고 널리 찾아다녀서 비로소 초고를 만들었다. 또 족인 涑이 빠진 부분을 채집하여 겨우 책자를 완성하였다. [噫嗣續零替 兵燹屢經 遺集散佚無傳 族人鎭達氏 旁搜博訪 肇爲草稿 又有族人涑 採緝闕漏 僅成冊子] 그리고 책의 말미에 “정미(1847)년 3월에 오방재에서 간행하다. [丁未三月日梧坊齋開刊]”라는 간기가 남아 있다.발문과 간기를 종합해 보면, 河鎭達에 의해 호정 하륜의 유문이 일차로 수집되어 초고가 이루어졌고, 그 뒤에 다시 河涑에 의해 궐루된 부분이 보충되어 『호정집』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정재 유치명과 이경재의 서문을 받고, 용와 하진현이 발문을 찬술하여, 1847년에 하륜의 묘소 아래 재숙처인 오방재에서 간행하게 된 것이다.하진현은 송정 하수일의 주손으로 진주 사곡에 거주하였던 인물이다. 그는 남계 이갑룡의 문인으로, 당시 수곡과 단목에 거주하던 진양하씨 시랑공파를 대표할 만한 인물이다. 차원부설원록의 기록에 대한 변무록을 저술한 것 또한 하진현의 솜씨로 보인다. 그러므로 하진현이 바로 이 문집의 간행을 주도했던 인물로 보인다.
3. 입록 인물 : 浩亭 河崙(1347-1416) 자는 大臨, 호는 浩亭이며, 아버지는 允潾이다. 1360(공민왕 9)년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1365년 문과에 급제했다. 1388년 崔瑩의 요동 정벌 계획을 극력 반대하다가 楊州에 유배당했으나, 그해 여름 李成桂의 위화도 회군으로 최영이 제거되자 관직을 회복했다. 1391년에는 전라도 도순찰사가 되었다. 그는 李穡·鄭夢周·李崇仁·權近 등과 정치적 입장을 같이함으로써 초기에는 조선 왕조 건국에 반대했다. 그러나 곧 권근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변신을 하여 1393(태조 2)년 경기좌도 도관찰출척사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鄭道傳과의 불화로 그다지 비중 있는 직책을 맡지 못했다. 1394년 첨서중추원사가 되었으나 부친상으로 사직했다. 1396년 예문춘추관학사로 임명되었는데 이때 명나라와의 表箋是非로 정도전과 정면으로 대립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조선에서 명에 보낸 외교문서에 명나라를 모욕하는 언사가 있다고 하여 문서 작성자인 정도전을 압송하라는 명나라 측의 강경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그는 정도전을 보낼 것을 주장했으며 1396년에는 啓稟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서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정도전의 미움을 사게 되어 1397년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계림부윤 재직 시에도 朴子安 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수원에 安置되는 등 정치적 수난을 겪었다.
이에 당시 정도전 등에 의해 세자책봉에서 밀려나고 자신의 병력마저도 빼앗길 위기에 처한 李芳遠과 급속히 가까워져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적극 지지했다. 그 공으로 정종이 즉위한 후 定社功臣 1등으로 晉山君에 봉해졌다. 그해 대대적인 관직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정당문학이 되었으며, 이방원의 세자책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하여 태종의 즉위 직전에는 정승 반열에 올라 서서히 정국을 주도해가기 시작했다. 1400(정종 2)년 문하시랑 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서 관제 개편을 주도하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府事)·우정승 등의 요직을 거쳤다. 그해 태종이 즉위하자 佐命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領三司事로서 知貢擧가 되고 관제를 개혁했으며, 領司評府事 兼判戶曹事로서 楮貨를 유통시키게 했다. 1402(태종 2)년 좌정승이 되었으며, 명나라 永樂帝의 등극을 축하하는 登極使로서 명나라에 가 조선 왕조를 승인하는 誥命印章을 받아왔다. 이후 1405년 좌정승 (世子師가 되고, 다음해에는 重試讀券官이 되어 卞季良 등 10명을 뽑았다. 그 뒤 영의정부사·좌정승·좌의정을 등을 역임하고 1416년 70세로 致仕하여 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치사 후 왕명으로 함길도 선왕의 陵寢을 巡審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죽었다. 시문에 능하고 陰陽·醫術·星經·地理 등에 조예가 깊었으며, 文翰을 주관하여 『동국사략』『태조실록』의 편수에도 참여했다. 신왕조 초기의 한양천도, 문물제도의 정비에 크게 기여했으며 외교정책에 능해 조선 초기 명나라와의 여러 문제를 해결했다. 특히 태종을 보좌하여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집으로 『호정집』이 있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어 있다. 시호는 文忠이다.
4. 조사자 의견 이 책판 안에는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이미 지정되어 있는 하윤린의 신도비문과 비음기가 모두 실려 있다. 현재는 비음기가 부분적인 손상을 입어 완벽하게 판독하기 어려운데 이 책판은 이 부분을 완벽하게 복원하게 해 준다. 특히 이 비문과 비음기는 진양하씨 시랑공파의 상대 계보를 알려 주는 최초의 유일한 자료라는 점에서 더욱 그 중요성이 있다. 더구나 1847년에 간행되었으니 비교적 이른 시기에 간행된 것이라 할 수 있고, 전체 책판 가운데 극히 일부분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다.
함양 경충재
한자 咸陽景忠齋
영어공식명칭 Hamyang Gyeongchungjae
지역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함양남서로 1508-1[도천리 525]
집필자 송지환
[정의]
경상남도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에 있는 문충공 하륜을 위해 건립한 재실.
[개설]
태종 때 영의정을 지낸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 하륜(河崙)[1347~1416]을 위해 건립한 재실로 1855년 하문도가 호정집을 중간한 장소이기도 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서쪽 2칸은 방으로 동쪽 2칸은 마루로 구성하였으며 매년 음력 3월 항례를 올리고 있다.
[위치]
함양군 병곡면 도천리 월암삼거리에서 도천마을 방향으로 들어서다 우측의 임도를 따라 오르면 경충재가 있다.
[변천]
1837년 위양서원(渭陽書院) 사우로 건립하여 1871년 서원철폐령으로 철폐하였다. 1903년 2월 17일 경충재 터에 위양서원의 서당가옥을 이건하여 경충재로 칭하였다가 학생 수 감소로 폐교하였다. 1976년 지붕 등을 수리하였으며 2009년 11월 19일 문화재자료 제486호로 지정된 후 2012년 전면적인 정비를 통해 2018년에 이르고 있다.
[형태]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식 팔작지붕의 형태로 앞쪽에는 툇마루를 두고 서쪽 2칸은 방으로 동쪽 2칸은 마루로 구성하였다. 자연석 외벌대 기단 위에 전면은 원형으로 잘 다듬은 초석을 놓고 원형의 기둥을 세운 후 익공을 끼워 처마를 받았다.
[현황]
구 위양서원의 다른 건물은 모두 철거하고 경충재만 남아 있으며 2012년 7월부터 2년간의 해체 보수를 통해 2018년 기준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되었다.
[의의와 평가]
서당의 기능을 갖춘 건축물이자 호정집(浩亭集)을 간행한 장소로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