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 사건
김정숙
┃앞부분 줄거리┃ ‘강태국’은 2대째 내려오는 오아시스 세탁소의 주인으로, 세탁소 일을 정리하고 세탁 편의점을 하자는 아내 ‘장민숙’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세탁소를 지켜 내고 있다. ‘강태국’은 자신이 하는 일이 사람의 마음을 세탁하는 일이라는 신념으로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의 가족인 ‘안유식’과 ‘허영분’, ‘안경우’, ‘안미숙’이 세탁소로 다짜고짜 쳐들어와 할머니의 간병인이 맡긴 것을 내놓으라며 난동을 부린다.
안 패거리가 가게 앞의 쇼핑백을 찾아 온갖 인상을 찌푸리며 냄새나는 똥 바지들을 뒤져 보며 무언가를 찾는다. 사람들 기가 막혀 바라본다.
안미숙: (토한다.) 아유, 언니, 나 못 찾겠어뒤적인다.
허영분, 스카프를 강도처럼 입에 두르고 옷을 뒤적인다.
서옥화: (안미숙에게 놀리듯이) 넘으 똥 아녀, 어무니 똥인데…….
장민숙: (코를 잡아 쥐며) 이게 무슨 일이야?
서옥화: 남 없는 귀 가졌나, 콧구멍으로 들어? 할매가 돈을 세탁소에 두었 다고 그랬다잖아!
염소팔, 강태국: (동시에) 예?
장민숙: 언제요?
강태국: 할머니가?
염소팔: 못 움직이잖어?
강태국: (안유식과 허영분에게 다가가서) 뭔가 오해가 있으신 모양인데 이리 오셔서 차분히 말씀…….
안유식: (무조건 목에 힘주고) 당신 말야, 세탁!
강태국: ……?
안유식: (강태국을 세탁소 안으로 밀고 들어가며) 당신 말야, 우리 어머님 옷 찾아내! (멱살을 잡아 팽개친다.)
강태국: (넘어지며) 어이쿠!
장민숙: (놀라) 아이고, 여보, 이게 무슨 짓이에요!
안유식: (아내와 동생들에게) 야, 너희들, 뒤져!
안 패거리: (세탁소로 들이닥치며) 예!
강태국: (말리려) 아니, 이것 보세요!
안경우: (팔을 잡아 결박을 지어 놓으며) 어딜 도망가실려고.
허영분: (호기 있게 달려들어 옷들을 잡아당겨 뒤진다.) 아가씨는 저쪽을 뒤져요.
안미숙: (의심하여) 싫어요, 나도 여기서 찾을래…….
안경우: (서로 의심하여) 거기 뭐 좀 있어?
허영분: 없어요.
난장판이 되는 세탁소.
장민숙: (달려들며) 어머나, 어머나, 아니 저 여자가 미쳤나. (붙잡아 막으며) 왜 남의 세탁물은 망가뜨려요?
허영분: (장민숙을 밀어 넘기며) 옷이 문제야, 지금? 전 재산이 왔다 갔다 하는 판국에…….
장민숙: (잘못 넘어져 다친 손목을 흔들며) 아이고, 손이야. 야, 염소팔 뭐 해?
염소팔: (달려와 허영분을 말리며) 아니, 이 아줌마가 돌았나?
허영분: 그래, 돌았다. 건드리기만 해, 아주. 폭행죄로 처넣을 테니까.
염소팔: 뭐여?
장민숙: (손목을 흔들어 보이며) 아구구, 폭행은 누가 했는데…….
서옥화: (양은 대야를 두들기며) 그만! 잠깐만! 지 말 좀 들어요. 아니, 뭘 찾든지 간에 이름을 알든지 옷을 알든지 해야지. 사장, 사모님 자 듣는 분이 이게 뭔 경우래요? (안 패거리에게) 찾으시는 게 뭐래요?
허영분: (당황하여) 여보, 뭐지?
안미숙: (안경우에게) 김순례 아냐?
안경우: 아냐, 안중댁이라고 그러는 거 같던데…….
허영분: 그거야 어머님 고향이 안중이고…….
강태국: (안경우를 밀치고 나와) 저리 비켜요! (한심하여 옷들을 주워 올리며) 이름도 모르고, 무슨 옷을 맡겼는지도 모르고……. 그래, 그 어머님 자식들은 맞나요? 세탁소 그렇게 막 하는 거 아닙니다.
서옥화: 이거 봐유, 내가 코치 한마디 할게, 들어 볼래요? 어서 이 양반들한티 사과하고 이실직고하고 협조받으시는 게 상책이여.
장민숙: 사과도 싫고, 이실직고도 싫고, 협조도 안 해!
강태국: 대영아!
안 패거리 서로 눈을 마주친다. 슬쩍 안유식을 앞에 내세운다.
안유식: (일단은 떠밀려 나와) 흐흠, 미안하오. ( 궁리를 하듯) 우리 어머니가, 병이 오래되셨는데, 뭐, 오늘을 넘기기가 힘들다고 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하는 말인데……. (또 궁리) 으흠, (포기하고)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 어머님이 재산이 꽤 됩니다. 아버님 집안이 재산가이신 데다가 우리 집이 부동산이 워낙 많았고,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이 노인네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어디다 잘 둔다고 하긴 한 모양인데, 건강하실 때 다 두루 분배두 하구 알려두 주고 해야 할 일을, 말 한마디 못하고 덜커덕 풍을 맞아 갖구, 저렇게 식물인간으루다가 누워 지내다가 오늘 돌아가신다 하니까, 무슨 정신이 나는지 ‘세탁’, ‘세탁’ 이렇게 두 마디 간신히 하고 입을 달싹 못 하시니 노인네는 인전 가신다고 봐야겠고 재산은 보전해야 되는 게 장남의…….
안경우, 안미숙: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는 헛기침) 험!
허영분: (비아냥) 흥!
안유식: (안 패거리 눈치 보고) 또 자식들 된 도리가 아닌가 하는 말이지요. 나는 똥 싼 바지에다 숨기셨나 했는데 그건 아닌 거 같고, 뭔가 이 세탁소에다 뭘 하시긴 한 것 같은데, 통 모르겠단 말이지…….
장민숙: (설움이 북받쳐) 아니 그래, 그 통 모르겠는 일을 가지고 남의 세탁소를 이렇게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단 말이에요?
허영분: (아주 고상한 척) 아주머니, 미안해요. 저희가 급한 마음에……. 용서하세요,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 드리겠어요.
서옥화: 돈이 요사를 떠는 것이냐, 사람이 본디 요물이냐. 통 모르겄네…….
장민숙: (염소팔에게 코를 풀어 제끼며) 옷, 바닥에 떨어진 옷들 다 세어 봐. 사과는 사과고 셈은 셈이지.
허영분: 아이고, 그럼요.
장민숙: (염소팔에게) 빨리 세어 봐!
염소팔: (마지못해 일어나며) 알았어요. (억지로 세러 가서는 이쪽에 귀를 쫑긋거리고 듣는다.)
강태국: 그러니까 지금 할머님 말씀만 듣고 ‘세탁’, ‘세탁’ 해서 오셨는데, 한두 푼 찾는 것도 아니고 전 재산 운운하시니까 참 난감합니다. 세탁소가 은행도 아니고…….
안미숙: 근데 ‘세탁’, ‘세탁’ 그랬대요. 쓰러지고 그게 처음 말한 거예요.
안유식: 엄마 쓰러지신 지 얼마 됐지?
안미숙: 오 년, 육 년?
서옥화: 사 년 칠 개월!
안경우: 와 미치겠네, 진짜. 노인네 정말…….
안유식, 휴대 전화가 울린다.
안유식: (받는다.) 여보세요. 아, 김 박사님. 예? 임종이요? 아니 찾지도 못했는데……. 아, 예, 그런 게 있어요. 아, 가야지요. (소리 지른다.) 지금 간다니까! (끊는다.)
안미숙: 엄마 간대?
허영분: 어머님도, 조금만 더 인심 쓰시지 않고. 세탁이 뭐야, 달룽 세탁!
서옥화: 어서 가 보세요. 혹시 남은 반토가리 말이라두 들을지 알아요?
안경우: 맞아요, 형, 사람들도 곧 올 텐데…….
안유식: (세탁소 사람들을 훑어보며) 알았어, 일단 가자고. (강태국에게 명함을 주며)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게 있으면 전화 주시고……. 저희가 다시 오겠습니다. (강태국에게 슬쩍) 명함 보시면 아시겠지만 만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믄, 뭐,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죠?
강태국: (기가 막혀 웃으며) 어쨌거나 어머님 잘 보내 드리시죠.
안유식: (가다가 돌아서서)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저, 말이지……. 누구든지 먼저 찾는 사람한테 50 프로를 주겠소!
사람들: (놀라) 50 프로!
허영분: 여보!
안경우: 형!
안미숙: 그냥 세탁소를 통째로 사!
안유식: 가자고! (나간다.)
안 패거리, 종종거리며 따라간다.
서옥화: 50 프로라! (세탁소를 둘러보며) 오아시스가 아니라 보물 세탁소네요. (강태국에게 애교를 부리며) 강 사장님, 50 프로!
강태국: (난감하여) 어허 참…….
장민숙: 아니, 저 여편네가!
서옥화: (웃으며 나간다.) 헤헤헤헤헤…….
귀신에 홀린 듯이 남은 세 사람. 황혼의 세탁소. 참담하게 세탁소를 바라보는 강태국. 엉거주춤하니 서서 은근슬쩍 옷을 뒤져 보는 염소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는 장민숙.
장민숙: (낯선 목소리로) 두 사람!
두 사람 돌아본다.
장민숙: (처음 보는 얼굴로) 정말 할머니한테 아무것도 안 받았어?
강태국: (세탁소로 달려간다.) 에이! (세탁소를 부순다.) 이눔의 세탁소 다 불 싸질러 버려! (세탁소를 뒤엎는다.)
장민숙: (남편을 붙잡으며) 아이고, 여보, 잘못했어!
염소팔: (말리며) 형님, 참아요!
음악 - 와장창창.
암전. 무대 밝아지면 어두운 무대. 다림질대를 밝히는 백열전구 아래 강태국이 러닝셔츠 차림으로 열심히 김을 뿜어 대며 다림질을 하고 있다. 어두운 무대에 작은 불빛들이 반짝이며 움직인다. 어둠 속을 누비는 불빛들. 장민숙과 강대영, 염소팔, 안유식과 허영분, 안경우, 서옥화, 안미숙이다. 곡예를 하듯 옷과 옷 사이를 누비고 숨으며 각기 결심을 피력한다.
안유식, 허영분 팀
허영분: (한 푼도 줄 수 없다는 듯) 50 프로가 뉘 집 애 이름이야?
안유식: 그러다 몽땅 갖고 날르믄 또 어떡해?
허영분: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찾아야지!
안경우, 안미숙 팀
안경우: (안미숙에게) 정말 김순녀 맞아?
안미숙: 맞다니까, 증 확인했어. 큰오빠는 미쳤어. 정말, 반이 뭐야?
염소팔, 서옥화 각기 홀로 팀
염소팔: 내 이번 한 번만 봐주믄 다시는 도와 달라고 하지 않을 팅게 지발 덕분에 우리 엄니랑 두 다리 뻗고 잘 집 한 칸 마련하게 도와주십시오. (확인하듯이) 집 한 칸, 아가씨 데려다 앉히고 엄니 모시러 가고……. 엄니, 내는 이자부터 도둑놈입니다.
서옥화: 누구든 찾기만 해라. 내가 쪽쪽 다 빨아먹어 줄 테니. 서옥화 팔자 한번 바꾸어 보드라고!
장민숙, 강대영 팀
장민숙: (이를 악물며) 나두 하구 싶은 거 있는 사람이야. 이젠 다 하구 살 거, 아야! 아우, 혀 깨물었다! 아우!
강대영: (짜증 내며) 엄마가 하고 싶은 거에 왜 나까지 끌어들여. 진짜 짜증 나!
장민숙: (머리를 쥐어박으며) 너 하고 싶은 거에 왜 부모 끌여들여? 연수 갈라믄 어서 찾기나 해! 아우, 아파!
그들은 강태국의 뒤에서, 밑에서, 앞에서 숨어서 마치 임무를 수행하는 첩보원들처럼 검은 복색 일색으로 우스꽝스럽게 꾸며 입고 세탁소에 잠입하여 서로가 모르려니 제 생각만 하고 옷들을 뒤지기 시작한다. 서로의 소리에 놀라면 야옹거리고, 서로의 그림자에 놀라면 찍찍거려 숨으며, 서로 스쳐 지나가면서도 돈에 눈이 가리어 알아보지 못한다.
어둠 속에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욕망의 불빛들. 작은 전등을 입에 물고, 머리에 달고, 손에 들고 옷과 옷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누비는 불빛들. 전등 불빛에 드러나는 옷들이 마치 귀신 형상처럼 보인다. 불빛에 춤을 추는 옷들, 이리저리 집어던져져 날아다니는 옷들. 도깨비 옷 파티.
염소팔이 던진 옷에 백열등이 크게 흔들린다. 놀란 사람들 제풀에 얼른 옷 사이로 숨는다. 강태국이 백열등을 고정하며 주위를 둘러본다.
강태국: 뭐여? 왜 이래? 누구 있어?
염소팔: 야웅.
강태국: 가라, 가. (솔로 옷을 턴다.) 우리 마누라 알뜰해서 너 먹을 거 없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에 대고 맛을 본다.) 어디 보자. 이게 뭐냐? 떫은맛이 나는 것도 같고, 어디 보자. (상자 속에서 옛날 아버지 잡기장을 꺼내 읽어 본다.) 이 법은 옷에 묻은 물의 맛에 따라 그와 반대되는 맛 가진 물건으로 빼는 것이니……. (아버지 생각에 어깨를 들썩이며 운다.) 아버지, 미안해요. (다시 상자를 뒤지며 세탁대 밑에서 소주병을 꺼내며 먼지를 닦아 한 모금 마신다.)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세탁소를 하나? (또 한 모금 마신다.) 인간 강태국이가 세탁소 좀 하면서 살겠다는데 그게 그렇게도 이 세상에 맞지 않는 짓인가? 이 때 많은 세상 한 귀퉁이 때 좀 빼면서, 그거 하나 지키면서 보람 있게 살아 보겠다는데 왜 흔들어? 돈이 뭐야? 돈이 세상의 전부야? (술 한 모금 마시고) 느이놈들이 다 몰라줘도 나 세탁소 한다. 그게 내 일이거든…….
사람들 자기 자리에 숨어서 강태국을 보며 제각기 분통을 터뜨린다.
강대영: ( 방백) 진짜 짜증 나, 아버지 왜 저러지?
허영분: (방백) 미쳤어!
염소팔: (방백) 돌아 버리겠네.
안경우: (방백) 확 죽여 버릴까…….
장민숙: (비명 지른다.) 악!
강태국: (놀라) 거 누구요?
사람들: (그들도 놀라 다급하게 저마다 동물 소리를 낸다.) 아야용, 찍, 찍.
강태국: 세탁소가 갑자기 동물의 왕국이 됐나?
강태국, 고개를 갸웃거리며 옷들 사이를 이리저리 살펴본다. 다시 흥얼거리며 옷을 정리하는 강태국. 잠깐 놀란 듯이 멈추며 옷을 들고 서 있다가 세탁대로 와서 아버지의 잡기장을 뒤진다.
강태국: 그렇지, 할머니가 처음 세탁물을 맡겼을 때가 아버지가 살아 계셨을 때니까. (세탁대에 앉아 잡기장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버지! 그래, 여기 있네, 있어.
사람들 더욱 조급해진 마음에 제각기 구시렁댄다.
염소팔: (방백) 원수가 따로 없구먼.
안유식: (방백, 명령조로) 불을 꺼 버려!
서옥화: (방백) 두꺼비집을 내려!
안미숙: (방백) 어서요!
염소팔: (놀라 얼떨결에) 예! (두꺼비집을 내린다.)
어두워지는 세탁소. 반짝이는 불빛들의 대이동.
강태국: (뭔가 느끼고) 뭐야, 염소팔이냐?
염소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으응! (놀라) 끄응!
사람들: (점점 더 음흉스럽게 짐승 소리로 으르렁댄다.)
강태국: (알겠다는 듯이 짐짓 과장스럽게) 우리 세탁소에 도둑괭이들이 단체로 들어왔나?
사람들: (단체로) 예, 야옹!
강태국: (잡기장을 단단히 말아 손에 움켜쥐고) 알았습니다. 그럼 사람은 이만 물러가야지. 이거 어두워서, 빨리 비워 드리지 못하겠는걸.
사람들: (손전등으로 안채로 가는 길을 비춰 준다.)
강태국: 고맙다. (안채로 간다.)
음악. 어둠 속에서 본격적으로 벌어지는 수색 전쟁. 이때 세탁소에 불이 확! 켜진다. 드러난 사람들 꼬라지. 코피 찍, 머리 산발, 자빠지고, 엎어지고, 찢어지고, 터지고…….
강태국이 두꺼비집 옆에 서 있다. 놀라는 사람들. 놀라는 강태국.
강태국: 대영아!
강대영: (머리를 부여잡고 운다.) 아빠!
강태국: (아내에게) 다, 당신 미쳤어?
장민숙: 미쳤, 아야, 또 혀 깨물었다!
강태국: 염소팔, 너 이놈!
염소팔: 히히이잉……. 헹님!
강태국이 사람들 사이에 널브러진 시체 같은 옷들을 주워 든다. 분노에 찬 강태국.
강태국: 이게 사람의 형상이야? 뭐야! 뭐에 미쳐서 들뛰다가 지 형상도 잊어버리는 거냐고.(손에 든 옷 보따리를 흔들어 보이며) 이것 때문에 그래? 1998년 9월 김순임?
장민숙: (감격에) 여보!
강대영: 엄마, 아빠가 찾았다!
안경우: (동생을 때리며) 야, 김순임이잖아!
안유식: (다가가며) 이리 줘!
강태국: (뒤로 물러서며) 못 줘!
장민숙: 여보, 주지 마!
사람들: (따라서 다가서며) 줘!
강대영: 아빠, 나!
강태국: (물러서며) 안 돼. 이렇게 줄 순 없어!
안경우: 날 줘요. (엄마에게 응석 부리는 것처럼) 나 부도난단 말이야!
허영분: (거만하게 포기하듯이) 아저씨, 여기요, 50 프로 줄 테니까 이리 줘요!
안미숙: (뾰족하게) 내 거는 안 돼!
허영분: 내 거가 어딨어? 결혼할 때 집 사 줬으면 됐지!
안미숙: 나만 사 줬어? 오빠들은?
안유식: (소리친다.) 시끄러! (위협적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내놔!
사람들: (따라서) 어서 내놔!
강태국: 당신들이 사람이야? 어머님 임종은 지키고 온 거야?
사람들: 아니!
강태국: 에이, 나쁜 사람들. (옷을 가지고 문으로 향하며) 나 못 줘! (울분에 차서) 이게 무엇인지나 알어? 나 당신들 못 줘. 내가 직접 할머니 갖다 드릴 거야.
장민숙: 여보, 나 줘!
강대영: 아버지, 나요!
강태국: 안 돼, 할머니 갖다 줘야 돼. 왠지 알어? 이건 사람 것이거든. 당신들이 사람이믄 주겠는데, 당신들은 형상만 사람이지 사람이 아니야. 당신 같은 짐승들에게 사람의 것을 줄 순 없어. (나선다.)
안유식: 에이! (달려든다.)
강태국: (도망치며) 안 돼!
사람들, 강태국을 향해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고 뿌리치며 간다. 세탁기로 밀리는 강태국.
강태국, 재빨리 옷을 세탁기에 넣는다. 사람들 서로 먼저 차지하려고 세탁기로 몰려 들어간다. 강태국이 얼른 세탁기 문을 채운다. 놀라는 사람들, 세탁기를 두드린다.
강태국, 버튼 앞에 손을 내밀고 망설인다. 사람들 더욱 세차게 세탁기 문을 두드린다. 강태국, 버튼에 올려놓은 손을 부르르 떨다가 강하게 누른다. 음악
이 폭발하듯 시작되고 굉음을 내고 돌아가는 세탁기. 무대 가득 거품이 넘쳐 난다. 빨래 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이 유리에 부딪혔다 사라지고, 부딪혔다 사라지고…….
강태국이 주머니에서 글씨가 빽빽이 적힌 눈물 고름을 꺼내어 들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강태국: (눈물 고름을 받쳐 들고) 할머니, 비밀은 지켜 드렸지요? 그 많은 재산, 이 자식 사업 밑천, 저 자식 공부 뒷바라지에 찢기고 잘려 나가도, 자식들은 부모 재산이 화수분인 줄 알아서, 이 자식이 죽는 소리로 빼돌리고, 저 자식이 앓는 소리로 빼돌려, 할머니를 거지를 만들어 놓았어도 불효자식들 원망은커녕 형제간에 의 상할까 걱정하시어 끝내는 혼자만 아시고 아무 말씀 안 하신 할머니의 마음, 이제 마음 놓고 가셔서 할아버지 만나서 다 이르세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우리 아버지 보시면 꿈에라도 한번 들러 가시라고 전해 주세요. (눈물 고름을 태워 드린다.)
음악 높아지며, 할머니의 혼백처럼 눈부시게 하얀 치마저고리가 공중으로 올라간다. 세탁기 속의 사람들도 빨래집게에 걸려 죽 걸린다.
강태국: (바라보고) 깨끗하다! 빨래 끝! (크게 웃는다.) 하하하.
김정숙(1960~ )
극작가. 연극뿐만 아니라 창작 뮤지컬, 드라마, 아동극 등 다양한 분야의 대본을 집필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아빠의 청춘」, 「병국이 아저씨」, 「들풀」, 「블루 사이공」, 「반쪽이전」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