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회 머튼의 선과 선불교의 차이에 대한 이해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
박재찬 신부 해설 (약 34분)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 축복 속에서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시간까지 저희는 토마스 머튼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이 관상으로 나아가는 길, 또 불교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불교에 대한 이해를
십우도를 중심으로 십우도 10가지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그림을 중심으로 서로 비교하면서
제가 설명을 드렸습니다. 기억나시지요?
처음에는 목동이죠. 동자승이 소를 찾아 나서는 장면, 소와 하나되고
그리고 또 소가 사라지고 이제 완전한 깨달음, 여덟 번째 그림이죠.
그리고 아홉 번째 그림에서 정말 제대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그 깨달음을 마을 사람들과 중생들과 나누는 그 그림을 통해서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 그리고 깨달음을 통해서 또 새로운 신원, 새로운 재탄생을
맞아가는 자기 초월을 향해 나아가는 변형의 여정을 잘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불교였고 특별히 대승불교였죠.
보살 사상이 있는 이해였고 그 다음에 토마스 머튼의 이런 사상을
그리스도교에서의 관상의 길과 연결을 시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불교에 대한 이해들이 좀 더 지적인 면에서 생각이 되었다면
점점 더 갈수록 더 깊이있는 이해를 하면서 불교 안에서 어떤 그리스도교적인 요소들을
재발견하게되고 하는 그런 과정들을 거치게 되었었죠.
그래서 참된 자아를 찾기, 영적인 깨달음 그 다음에 자비와 사랑의 실천
이 세 단계를 통해서 머튼은 불교를 이해했고, 또 불교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자기 자신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를 더욱 더 풍성히 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도 충만한 것이 많이 있지만
또 다른 종교를 통해서 뭔가를 배워서 더 충만해질 수 있다는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에서의 여정에서 여러가지 기록들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혹은 서구의 수도승적 위탁으로 완벽하고 충만한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가능한 종교적 성숙의 단계에 도달해있으나
불교 혹은 힌두의 영적 훈련과 체험으로부터 그 깊이를 아직 배워야합니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교 안에 충만히 있지만 불교나 힌두교를 통해서 그런 영적인 체험들로부터
그 깊이를 또 배울 수 있다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물론 이런 내용들이 토마스 머튼이 이런 종교적인 혼합주의라든지 모든 종교를
하나로 차별없이 대하는 이런 부분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서로 나눔으로 인해 가지고 서로 변형될 수 있고 서로 나눔을 통하여 서로 충만되어질 수 있고
또 서로 나눔을 통해서 도전을 받을 수 있고 또 영적으로 더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또 영적인 친교를 다른 종교와 나눌 수있다는 것을 머튼이 본거죠.
실은 머튼의 불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번 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이 특별히 발견한게 있는데
선(禪)불교하고 선(禪)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메타 릴리젼(meta-religion)이라고 하는데
선(禪)안에서 머튼은 아주 공통된 모든 종교안에 있는 공통된 요소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이게 무엇인지 또 설명해드리겠고 혹시 시간이 되면 토마스 머튼의 세 가지 불교와의 대화의 방법에 대한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 정도를 살펴보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럼 우선 시작기도를 함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기도문은 토마스 머튼의 단상이라는 책에서 나오는 것을 제가 나름대로 인용해서
꾸며본 기도문입니다. 함께 바치면서 시작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 하느님! 마리아께서 '예' 라고 순종함으로써
당신 아드님의 어머니가 되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셨듯이,
저희도 마주 오는 모든 것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당신의 소리에 귀기울이고
'예' 라고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소서.
오, 예수님! 머튼이 루이빌에서 거리의 사람들 안에서 당신을 만났듯이
저희 역시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하소서.
또한 저희 안에서 다른 이들을 발견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더 많이 다른 이들을 지지하고 자신 안에서 그들에 대한 '예'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더 깊이 참된 자기 자신이 됨을 깨닫게 해주소서.
다른 이들 안에 있는 당신의 사랑을 만나게 하소서.
저희 안에 있는 당신의 마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예'라고 말함으로써
저희는 모든 이들을 사랑하는 당신이 되어가게 하소서.
당신의 보편적인 사랑을 거스르는 모든 것에 '아니요'라고 말함으로써
저희는 모든 곳에 당신의 더 큰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모님께서 순종을 통해서 당신 아드님을 이 세상의 구원자로 올 수 있도록 우리에게
다리역할을 하셨던 것처럼 성령의 어떤 은총과 사랑이 모든 종교안에서 스며들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발견하고 그 가운데서 우리가 '예' 함으로써
우리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 안에 있는
성령과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면 합니다.
자, 우선 이제 이번 시간에 특별히 토마스 머튼이 발견한 중요한 요소중에 하나가 있는데요
이것이 바로 선(禪)에 대한 새로운 이해입니다.
물론 새로운 이야기라기보다는 좀 더 그 동안 사람들이 보지 못했던 그런 요소들을
머튼이 찾아냈죠. 그래서 그 요소들을 설명함으로써 모든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왜 관상이 중요하고 왜 명상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용어 설명을 드리도록 할께요.
우리가 흔히들 이제 선불교, 선종, 영어로는 젠(Zen)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선(禪)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禪)이라는 말은 첫번째는 선불교로써 우리 흔히 얘기하는 선불교 (영어로는 Zen 불교),
불교라는 이야기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불교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고유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뭐죠? 도교라든지 유교라든지 뭐 이런 사상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상들이 인도의 불교와 만나가지고 고유한 선불교가 됩니다.
그래서 이걸 '쵄(Chan)' 이라고 표현을 하죠. 이것이 이제 한국에 들어오면서
이게 선불교 '션(Sean)' 이 됐고 이게 일본으로 갔으니 '젠(Zen)' 이 됐는데
이 모두가 한자말 선(禪) 입니다.
이 한자말에서 선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선불교는 이제 이렇게 쭉 변화되어가면서
나타나는 이 선불교는 다른 종파, 예를 들면 소승불교도 있고 티벳불교도 있고
여러 불교들이 많이 있죠. 그 불교들 가운데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선불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할 때 흔히들 선종 이렇게 얘기하면 바로 여러 종파 가운데
하나를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근데 머튼이 이야기하는 선(禪, Zen)은 좀 다른 불교의 종파로써의 어떤 그런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이걸 첫번째 의미로 한다면
이 두번째 의미는 바로 메타 릴리젼 (meta-religion)이라는 거죠.
초(超)혹은 trans- religion, 혹은 trans-formed religion 이렇게도 볼 수 있겠죠.
consciousness 라고 볼수도 있을 거구요.
이게 무슨 말이냐하면 이 불교의 어떤 섹터(sector)로써, 종교로써, 그 종파로써 선(禪)이 아니라
모든 종교 안에 있을 수 있는 공통적인 요소로서의 어떤 그런 명상이라든지
혹은 관상에 대한 영적인 깨어남, 의식의 변화 이것으로서의 선(禪)의 요소가
모든 종교 안에 있다는 것을 머튼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것은 초종교적인 것(trans- religion) 종교를 초월하는 것,
혹은 또 어떤 형태를 어떤 형태의 의식을 넘어가는 것, trans, 넘어가는 것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선(禪)이 산스크리트어로는 따냐(Dhyana) 이렇게 되겠죠.
이 말은 명상 혹은 관상이라는 뜻입니다. 관상.
그래서 이 토마스 머튼이 발견한 것은 이 용어를 통해 가지고 마치 컵 안에 노란물이 담기면
노란색이 되고 컵이 노란색으로 비치죠. 그리고 또 빨간색 물을 부으면 빨간색으로 비치고
파란색 물을 부으면 파란색 물이 비치는 것처럼 그렇게 이 선(禪)이라는 어떤 요소들은
모든 종교안에 공통적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명상, 의식의 변화를 추구하죠. '의식의 변화 혹은 변형' (transformation of human consciousness) 이야기 많이 들으셨지요.
'의식의 변형' 좀 말이 어렵긴한데 이런 의식의 변형을 위해서 자아를 버리고,
자아를 포기하는 이런 과정들은 모든 종교안에 공통적으로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런 선(禪)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이 공통된 요소를 가지고 대화할 수있는
그런 길을 열어준거죠. 자, 여기 이해되었으니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1968년이죠. 1968년 토마스머튼이 태국 방콕에서 아시아에 있는 여러 수도승들끼리
모여서 종교간 대화를 위한 첫 모임을 가졌는데 토마스 머튼이 참석했었죠.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모임에서 발표를 하고 난 다음에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셨죠.
근데 돌아가시기 전날 토마스 머튼이 사석에서 한 비공식적인 선언이 있습니다.
이 선언이 굉장히 우리에게 큰 시사점을 전해주고 있는데 그 때 모임하는 가운데
존 머피트(John Moffitt )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 존 머피트라는 분이 회의때 내용을
다 정리해서 책으로 엮은 분이기도 합니다.
이 분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禪)과 그리스도교는 미래다.' 이렇게 평했습니다.
'선(禪)과 그리스도교는 미래다.'
왜 하필 선(禪)이라도 이야기했을까요? 그리고 미래는 무얼까요?
토마스 머튼이 한 이 미래란 표현은? 왜 하필 선(禪)에 대해서 설명했을까요?
사실 토마스 머튼이 두 달 동안 여러 티벳 불자들을 만나면서 굉장히
티벳불교에 뭐라할까 매료되었죠.
그래서 달라이 라마 라든지 린포체를 만나고 하면서 티벳 불교에 대해서
굉장히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마치 여기에 나의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는
그런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때 한 말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티벳 불교는 명상과 관상 안에서 지고한 경지에 이른 많은 이들을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선불교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티벳 불자들과 함께 있을 때
마치 집에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낍니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티벳 불자들과 함께 있을 때 굉장히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왜? 근데 왜 Zen 이라고? 왜 선(禪)이 이렇게 그리스도교와 함께 미래다라고 표현 했을까요?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은 선(禪)과 그리스도교 사이 안에서 어떤 관계를 본 걸까요?
또, 선(禪)과 그리스도교만 언급했는데 그러면 다른 불교는 섹터(sector)라든지 혹은 힌두교라든지
뭐 유대교라든지 뭐 이런 다른 종교들은 그러면 미래가 아닌가요?
왜 그런 종교는 무시한 걸까요? 그리고 선(禪)과 그리스도교를 통해서 이야기하고자 했던
미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들을 던져볼 수 있을 겁니다.
'선(禪)과 그리스도교가 미래다.'라고 표현한 그 배경에서 질문할 수 있는 요소들도 있을 겁니다.
근데 이 모피트는 나름대로 머튼이 한 이 선언에 대해서 해석을 하는데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머튼이 선(禪)을 언급할 때 선(禪)은 일반적인 감각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네, 여기 보시면 제가 선불교로서의 어떤 그런 요소들이 아니라 그런 감각에서의 선(禪)이 아니라
본질적으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선(禪)을 의미한다.
그래서 선(禪)은 그리스도교 안에 '포함된' 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머튼의 말을 해석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머튼이 이 때 사용한 선(禪)은 어떤 선불교로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가 두번째 말씀드린 메타 릴리전(meta-religion)이라든지 트랜스 릴리전(trans-religion)
종교를 넘어가는 그래서 그리스도교 안에 포함되어있는 명상이라든지 관상적인 요소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게 나름대로 설명을 합니다.
머튼도 선(禪)과 선불교를 구분합니다. 그래서 그 선(禪)을 내적인 깨달음을 얻기위한
테크닉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禪)은 문화를 초월하고 그 다음에 종교를 초월하고
그래서 어떤 형태를 초월하는 그런 의식으로써 간주합니다.
선(禪)은 다시 말씀드릴께요. 선(禪)은 문화를 초월하고 (trans- cultural) 이 이야기 많이 드렸죠.
문화를 초월하고, 그 다음에 종교를 초월하고, 모든 종교 안에 다 있는 요소이면서
종교를 넘어가는 그리고 어떤 형태를 넘어가는 '의식'(consciousness)이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의식하니까 떠오르는게 있죠. 진아(眞我)는 있고 없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라고 했죠.
그 의식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해탈한다고 했잖아요. 의식이 바뀌면.
그 이야기는 저번 시간에 드렸었습니다.
그래서 선(禪)은 기존에 생각하는 그런 불교 안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 안에서도
우리 종교 안에서도 있죠. 자기의 어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 자신을 넘어서
영적인 어떤 그런 초월, 영적인 변형을 추구하는 것, 명상을 하고 관상을 이야기하는 것들이
우리 종교 안에도 있습니다.
그렇죠. 그래서 이런 종교를 넘어가는 뭔가가 있다는 것을 머튼이 발견하게 된거죠.
그래서 머튼은 선(禪)은 불교에서의 어떤 종파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또 단순한 명상의 방법이나 어떤 반(反)문화적인 삶의 형태를, 형태라는 것을 부인합니다.
형태가 아니다.
선(禪)의 목표는 이원론적인 것, 예를 들면 주체와 객체, 육신과 영혼 , 이원론적인 그런 분리를
넘어서서 순수한 공(空)을 향한 궁극적인 자유이다.
선(禪)의 목표는 '순수한 공(空)을 향한 궁극적인 자유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러한 자유는 어떤 가르침, 배움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아의 깨어남', '깨달음'
'사토리 익스피어리언스 (Satori experience )' 그러니까 깨달음의 체험으로부터 나온다는
이런 표현을 머튼이 하게 됩니다.
'선(禪)과 맹금'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토마스 머튼이 (보여드릴께요 선(禪)과 맹금)
요즘 절판되어서 아마 구하기는 힘드실텐데 이 책에 보면 토마스 머튼이 선(禪)에 대해서
어떻게 인식을 하고 있는지 또 그리고 D.T.스즈키라는 교수님이시죠.
평신도이신데 일본 불교를 서방에 많이 전달한 분 중의 하나입니다. 이 분과 대화 나누었던
서로 서간이 오가기도 하고 서로 대화했던 그런 것, 토마스 머튼이 이런 말을 하면 또 이에 대해
D.T.스즈키 박사님이 이렇게 이야기하고, 서로 주고 받았던 내용들이 주욱 요약되어 있습니다.
선(禪)이란 무엇인가에서 부터 시작해서 2부에서는 토마스 머튼과 D.T.스즈키의
어떤 대화 부분들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시간나실 때 한 번 보시면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선(禪)을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잘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여기에 보면 제목들, 목차를 보시면 선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의식, 한 그리스도인이 본 선,
그 다음에 선(禪), 철학자 니씨다, 초월적 체험, 열반에 대한 것, 여러가지 낙원에 대한
회복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면 자세히 나와있습니다.
근데 여기에서 토마스 머튼은 선(禪)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합니다.
선불교로서의 정의가 아니라 선(禪)은 주체와 객체를 넘어 순수한 존재의 지속적인 깨어남이요,
'이러함(suchness)'과 '저러함(thusness)'안에서 존재에 대해 즉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더 나은 용어를 원한다면 우리는 선(禪)을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하게 영적인 것, 선(禪)은 어떤 개념이 아니라 영적인 깨어남이라는 것을
이렇게 머튼은 강조를 합니다.그리고 난 다음에 나중에 지적인 대화에서 어떤 영적인 대화,
초월적인 대화, 체험적인 대화로 건너가게 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선(禪)은 다른 종교 안에서도 발견되어질 수 있고 다른 모든 종교 안에서도 드러날 수 있고
심지어 종교를 넘어서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는데도 어떤 영적인 깨어남이 일어날 수도 있잖아요.그죠? 그래서 심지어 전혀 종교가 아닌 것으로도 융해될 수 있다 녹아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모든 인간 안에 쉽게 이야기하자면 모든 인간 안에 어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에 의해서
영적으로 깨어날 수 있는 가능성 다시 말하면 머튼이 이야기한 것 중에 제가 볼 때는
바로 관상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관상의 씨앗'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 마음 속에 모든 인간 안에
심어주신 어떤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그런 씨앗을 심어주셨다고 제가 관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알려드렸죠. 기억나시죠?
그래서 이런 모든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종교 안에 있는 공통적인 요소로써 얻은
선(禪)이라는 것을 토마스 머튼이 발견했고 그것이 어떤 사람은 깨어났고
어떤 사람은 덜 깨어났고 또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하게 성령의 은총으로 그것이 깨어나서
새로운 시야, 새로운 어떤 눈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새로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것. 그래서 바로 선(禪)은 종교를 넘어서 모든 인간 안에서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런 선불교 안에서의 선(禪)이 아니라 선(禪) 자체로만 볼 때는
선(禪)은 가톨릭의 신앙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서 오히려 선(禪)을 탐구하고 또 선(禪)을 배울 것을 권장했습니다.
근데 물론 토마스 머튼은 잘 알고 있었어요.
불교의 선(禪)이라든지 그리스도교의 어떤 명상을 비교하는 것이 그 안에 어떤 세계관과
그 다음에 고유한 어떤 인간학들이 다 담겨져 있기 때문에 마치 이것은 머튼 자신이 그럽니다.
'그리스도교와 선(禪)을 비교하는 것은 수학과 테니스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런 표현까지 썼습니다.
사실 수학과 테니스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물론 테니스를 수학적으로 풀이해낼 수, 설명할 가능성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럴 필요가 없는 가치가 없는 거죠. 근데 이렇게 차이가 나지만 오히려 이런 비교를
통해 가지고 서로 이 차이점 때문에 서로에게 보완을 해 줄수 있고 서로를 풍성하게
해 줄수 있다는 것을 머튼이 발견을 했습니다.
차이점하니까 갑자기 이 생각이 납니다.
남녀의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재밌는 이야기가 떠 오릅니다.
우리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뭐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남녀는 서로의 언어의 차이가 다르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야, 나 사랑해?"하면 여자가 이렇게 말하면
남자한테 바라는 것은 이거랍니다.
'나 사고 싶은 거 있걸랑.'뭐 이런 뜻이라 그러네요.
또 "자기 나 얼만큼 사랑해?"라고 이야기하면 그것은
'나 오늘 일 저질렀어.'이런 뜻이 내포되어있다고 합니다.
"쓰레기 봉투가 꽉 찼네." 라고 이야기하면
'빨리가서 쓰레기 버려.'이런 뜻이라고 합니다.
"나 좀 화 안났어"하면 그 속에는 실제로 화가 안난 게 아니고
'나 엄청 열받았어. 이 멍청아!'이런 뜻도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맘대로 해요." 이런 뜻은 실제로 마음대로 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기만 해봐라, 당장.' 이런 뜻이 포함되어있다고 합니다. 역설적이지요.
"우리 이야기 좀 해요." 하자면 그 안에는 '내 불만이 뭐냐하면.'
이런 뜻이 같이 담겨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제가 어느 자매님한테 말씀 드렸더니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대요.
이렇게 해변을 거닐다가 둘이 굉장히 큰 싸움이 났대요.
그래서 이 자매님이 남편한테 "절대 따라오지마" 하고는 막 걸어갔답니다.
근데 실제로 남편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말 속에는 '빨리 따라와서 나를 위로해.'
이런 뜻이 담겨 있었는데 그 남편은 멀리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할 수 없이 돌아갔다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서로 남녀가 다른 것처럼 그리스도교와 불교 안에서도 물론 차이 나는 게 있습니다.
그것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구요 근데 이 남녀가 다르다고 해서 다른 점만 계속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그 안에는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또 서로 다르지만
대화를 통해서 살아가면서 조금씩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는 거죠.
마찬가지로 토마스 머튼은 수학과 테니스를 비교할 만큼 서로 차이가 나지마는
궁극적으로는 그 안에서 같은 인간이 어떤 수행을 해나가고 같은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머튼이 본 거죠.
그래서 참된 자아을 찾고자하는 갈망 그리고 또 사실 불교의 수행방법과 그 다음에
그리스도교의 수행방법은 또 수도자들의 수행방법이 비슷한 게 참 많습니다.
제가 예전에 저스틴 아빠스( Abbas)님이라고 미국의 아빠스( Abbas)님이 한국에 왔을 때 같이 절에
간 적이 있습니다. 불교 사찰에 가서 이런 저런 설명을 많이 드렸습니다.
아침에 기상생활에 대한 것, 예불 바치는 것, 명상하는 것, 이런 것들을 절을 다니면서
설명을 드렸더니 아빠스님께서 미국 아빠스님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똑같네. It's same."이렇게 이야기 하셨어요.
수행방법에서 비슷한게 참 많습니다. 그 스님들도 어떤 결혼생활 하지않고 공동생활을 하고
여러가지 명상을 하고 물론 좀 차이 나는 다른 점도 있지만 그 분들의 어떤 수행생활이나
그리스도교 수도자들의 수행생활에 비슷한 점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가운데 공통적인 특별히 더 공통적인 것은
바로 자기 변형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단순한 에고(ego)나 거짓자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자아를 찾아나가서 의식의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
그게 바로 선(禪)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의식의 변화, 영적인 해방 그리고 또 다 우리 불교뿐만 아니죠.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또 다른 종교에서도 영적인 해방을 추구합니다. 자유로워지기를 바라죠.
그래서 이런 토마스 머튼의 선(禪)에 대한 발견을 '젠 코어 (Zen core)'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선(禪)의 핵' 뭐 이 정도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젠 코어 (Zen core)'라는 발견을 통해서
정리를 해보자면 바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禪)의 관점을 통해서 선불교가 아니고 단순히 선(禪)의 관점을 통해서 머튼은
인간 의식의 변형과 영적인 깨어남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다른 종교적 전통의 수도승들
혹은 관상가들 사이에서 이것을 중심으로 관상적인 대화의 가능성과 가치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선(禪)과 그리스도교가 미래다.'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 주장에서 미래와 관련해서
미래란 무엇인가? 이 미래는 관상적인 이런 대화를 통해서 수도승들이 혹은 관상가들이
수도승간에 혹은 관상가들간에 어떤 영적인 친교를 이룰 수 있고, 영적인 가족 (spiritual family)
형성을 위해서 함께 노력할 수 있고,
이렇게 함으로써 점점 물질주의화 되고 점점 갈라져 있는 이 세상에 인류의 근본적인 일치를 위한
어떤 증인이 될 수있다는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눔으로 인해 가지고 영적인 가족이 되어서
이런 영적인 가족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들에게 어떤 증거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거고
그들에게 어떤 믿는 영적인 자유, 참다운 해방이 무엇인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있다 이것을 토마스 머튼이 발견한거죠.
그래서 관상적인 대화가 얼마나 중요하고 또 관상가들간의 서로의 친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머튼이 본거죠. 그래서 '선(禪)과 그리스도교가 미래다.'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렇다면 모피트는 또 이렇게 봤어요.
여기에서 선(禪)이라는 요소는 공통적인 요소라고 했잖아요. 그죠?
그래서 만약에 토마스 머튼이 힌두교랑 만나서 이야기를 했다그러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선禪과 힌두교가 미래다" 이렇게 말했을 거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선(禪)이라는 요소가 공통적인 요소로써 토마스 머튼이 본거죠.
그런데 그 '선(禪)의 핵'이라는 이 표현에서, '젠 코어(Zen core)라는 표현에서
젠(Zen)하면, 선(禪)하면 우선 우리가 먼저 떠올리죠. 그쵸. 먼저 불교란 용어가 떠오릅니다.
선(禪)그것은 불교 것이잖아 이렇게 여기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제 논문에서는 '젠 코어(Zen core, 선(禪)의 핵)'이라는 표현보다는
'관상적 핵 (contemplative core)'이 좀 더 모든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그런 게 되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관상을 바로 앞으로 우리가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의 핵심이 된다, 관상적인 요소,
명상적인 요소, 의식을 변화시키는 그런 요소들은 관상이라는 눈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죠.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혹은 절대자와의 만남을 통해서
혹은 의식의 깨어남을 통해서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죠.
그러니까 이 contemplative core, 관상적인 코어를 통해서 우리가 대화를 나눌 때
이 관상은 바로 종교간 대화에서의 미래이며 모든 인류의 영적인 어떤 성장에 있어서도
미래를 제시할 수 있다라는 그런 주장을 제가 논문에서 했었습니다.
각기 다른 각각의 종교 안에서는 이 관상적인 깨달음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사토리 (Satori) ,어떤 깨달음, 'O'(오)라고 표현을 하죠.
힌두교에서는 삼매 (Samadhi), 삼마띠라고 표현을 하고, 도교에서는 무위(無爲)라고 표현을 하죠. 그리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하느님과의 일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감
이런 걸로 표현할 수 있겠죠.
그래서 궁극적인 자기 초월, 자기 변형을 얻는 것, 이 모든 것들이 모든 종교 안에서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관상의 핵이라고 볼 수 있고 어떤 모든 종교 안에 어떤 관상적인 핵심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관상의 핵심을 통해서 서로 대화를 나눌 때 우리는 좀 더 더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고, 좀 더 더 서로가 영적인 의미에서의 유대, 또 영적인 일치를 이루어가는 데
있어서 어떤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한 거죠.
그래서 결국은 모든 종교안에 있는 어떤 관상적인 요소 혹은 젠(Zen),선(禪) 에 대한 요소는
모든 종교 안에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종교 안에 있는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서
먼저 서로가 대화를 나눌 때 그 안에서 서로가 말이 잘 통한다는 거죠.
불교의 무위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가 아 도교죠.
도교의 무위(無爲)에 대해서 이야기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어떤 삼매(Samadhi)라든지
그 다음에 또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와 유사하게 연결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리스도교 안에 살아가는 그 사람들이 어떤 그런 온전히 자기를 내어맡김, 위탁
그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굳은 신뢰심으로 모든 것을 내어 맡길 수 있는 영적인 자유로움.
그것들이 다 무위(無爲)와도 연결될 수 있는 거겠죠.
그래서 머튼은 이 모든 것이 관상적인 대화로 갈 수 있는 길이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관상적인 대화는 앞으로의 모든 종교적인 어떤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의 어떤 기본이
되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에 시작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하자 이런 표현을 했는데
결국 이겁니다.그죠?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가 자기 종교 안에서도 깊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가고 자기 종교안에서도 더 깊이 관상의 깨달음을 얻어갈 때 그 안에서
다른 종교를 만나서 그 어떤 융화가, 융회가 일어나는 거죠.
그래서 또 다른 새로운 어떤 자기 정체성은 흔들리지않고 더 깊이있는 깨달음을
얻어나갈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머튼에 있어서의 관상적인 대화의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종교 안에서만 머물러 있지 않고, 다른 종교인을 만남으로 인해서
또 다른 종교의 관상적인 요소를 통해서 더 깊이있는 종교간의 어떤 대화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종교에 대한 이해,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더 충만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머튼이 발견한 관상적인 대화입니다.
자 오늘 이 시간 마무리하면서 제가 세 가지 그 종교간 방법도 이야기 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벌써 다 되었네요. 오늘 이 시간 마무리하면서 내가 내 종교안에서 정말 열심히
하느님을 찾아갈 때 그 안에서 공통적인 요소는 다른 종교 안에서도 발견되어질 수있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다 하느님으로부터 나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겠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더 깊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더 충만히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종교인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고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