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앞선 두 단락을 통해 저작권과 특허권에 대한 개념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봤고, 그리고 이러한 지식 독점에 대해 반하여 생겨난 카피 레프트, 그리고 삼성과 애플의 특허 전쟁을 통해 애플의 지식 독점을 가볍게 살펴봤다.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에서도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는데, 책에서는 지식 독점의 폐해로써 와트의 증기기관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특허권을 통해 자신의 발명이 보호받고 있던 기간 동안 증기기관의 발전은 더디었는데, 기한이 되어 특허권이 소멸된 다음부터 증기기관의 발전 속도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는 예를 통해서 이를 보여주는데, 그러면서 책은 이러한 모습을 '지대 추구 행태'라는 말로써 정리한다.
지대 추구(rent-seeking) 행태라는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특허를 통해 자신이 직접 이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특허에 대한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하고, 자신은 그에 대한 대가로 돈을 챙기는 형태다. 즉, 자신에게 일정한 땅이 주어져 있다고 할 때, 이 땅을 자신이 직접 경작하거나 건물을 세워서 이익을 챙기기 보다는 그 땅을 남에게 빌려줘서 지대를 받는 데에 그친다는 이야기이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이러한 예를 들었지만, 사실 이렇게 든 예는 굉장히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적용된다. 누구든지 어떤 경제적 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하기 때문에 특허권자가 땅을 자신만이 이용한다면 그것 역시도 곧 지식의 독점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시 한 번 지대 추구 행태를 언급한다면 '특허를 통해 독점적인 권리만을 누리려고 하는 행태'를 나타낸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결국 자신은 경쟁자로써 시장에 참여하지 않고 특권만을 누리려고 하는 것이다.
즉, 지적 재산에 대한 배타적 권리의 폭 넓은 인정은 곧 지식에 대한 독점을 만들고, 이는 사회 전체의 경쟁을 저해하게 된다. 글의 서두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는 경쟁이 없는 사회가 어떤 결말을 맺는지를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경쟁이 없는 사회의 결말을 굳이 재언급 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책의 내용을 빌리자면 '작가와 발명가들의 작품과 발명품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일정 기간 동안 보호해줌으로써 과학과 실용기술의 진보를 촉진할 수 있다'는 미국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이 내용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책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는 이러한 생각에 반기를 들며 '그렇다면 한번 지식 독점 없는 세상을 상상해보라'라고 독자에게 주문한다. 책은 '제트 엔진이나 인터넷은 배타적 권리를 확보하고자 하는 바람에서 이뤄진 것이 아니다'는 예를, 그리고 에이즈 치료제를 예로 들며 '저작권과 특허로 인해 상당한 사회적 비용이 지출된다'라며, 지식 독점이 양날의 칼이라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지식 독점이 양날의 칼이라는 점은, 세상 모든 일에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이 있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에 부합하기 때문에 '지식 독점을 막아야 한다'는 근거로는 사실 부족한 측면이 있다.
그래서 책은, 보다 원론적인 이야기에 접근한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지적 재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은 시장 경제 체제에서의 사유 재산 제도가 존재하는 이유와 같다고 말했었다. 즉, 기술의 발전과 창의성에 대한 보상을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행동을 장려하고자 한다고 말이다. 책은 지적 재산권이 존재하는 원론적인 이유를 환기시키며 '그렇다면 과연 지금의 지적 재산권법이 그러한 활동을 장려하고 있는가?'라고 독자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애플과 삼성의 예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책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는 단호히 이야기한다. '지식 독점은 혁신의 원동력이 아니라 혁신을 방해하는 걸림돌에 불과하다'라고. 그러며 책은 지적 재산권을 사회의 '암'으로 묘사한다. 그래서 책은 '이 암덩어리는 크기를 줄이는 데에 그 목적을 두지 말고, 완전히 제거하는 데에 그 목표를 두어야 한다'며 급진적인 결론을 우리에게 던진다. 하지만 이를 이행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단계적으로 축소시키는 것이 알맞을 것'이라며 점진적으로 지적 재산권을 없애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지적 재산권 자체가 문제시 된다는 그들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거대 자본이 지식을 독점함에 따라 사회의 창의성 발현에 방해가 되었다는 사례는 책속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일언반구의 가치가 없다고 단정 짓기는 곤란하다. 또한 우리는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지적 재산권은 자본력이 없는 한 개인, 또는 기업이 혁신적인 물품을 개발해냈을 때, 그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보호하고, 충분히 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해주는 역할도 맡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그러한 법적인 보호 장치가 없다면, 그들이 아무리 혁신적인 것을 개발해낸다고 한들, 결국은 거대 자본에 의해 단 한 푼의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잠식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전에 문제가 되었던 그룹 씨엔블루의 인디 밴드 곡 표절 논란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도 생각해볼 수 있다. 거대 자본이 신생 기업의 특허를 모두 사들이거나, 또는 팔지 않을 경우 그들의 시업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하여 지식을 독점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으니 말이다. 흔히 이를 '특허 괴물(patent troll)'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지적 재산권법이 가져올 수 있는 최고의 폐해라고 할 수 있겠다. 또는 기존의 특허를 바탕으로 새로운 혁신적인 발견이 나오는 것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면면들을 고려하면, 책은 지적 재산권법은 반드시 없애야만 한다고 단언하고 있지만, 지적 재산권이 가져다주는 단점뿐만 아니라 이점 역시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섣불리 없애야 한다, 또는 존속해야 한다고만 주장하기는 어렵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지적 재산권법은 온전히 사라지기보다는, 기존의 아이디어를 활용하는 자유와, 그리고 창안에 대해 충분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 사이에 균형을 이룰 필요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럼 어느 정도의 균형을 맞춰야 할 것인가? 이 부분은 지속적으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할 부분이라 생각된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책 '지식 독점에 반대한다'에 대해서 살펴봤다. 이 책은 지적 재산권이 가져오는 여러 부정적인 면면들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에 대해 관심이 없거나, 또는 무조건 보장돼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 책을 통해 반대 의견을 접함으로써 사고를 확장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Making Capitalism More Creative
자본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향상시켜 주었다.. 그럼에도 경제적인 불확실성의 시대를 맞아 사람들은 그러한 사실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 간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소외된 채 살아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많은 것들이 필요하지만 시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나 표현수단이 없어서 계속 가난하였고 예방할 수도 있는 병들에 시달렸으며 생명을 살릴 기회를 갖지 못했다. 달리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어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그들을 돕는 역할들을 감당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단독으로 그 일을 한다면 너무나 긴 시간이 요구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술을 요하는 발명품들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것은 기업체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술의 효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필요하다. 즉 시장의 힘을 최대한 확대하여서 보다 많은 기업들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살수 있도록 하는 일을 하면서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시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들은 세계를 위해 많은 좋은 일들을 해온 제도(자본주의)속으로 보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일 새로운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이 있지만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이미 우리들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어떤 기업체들은 휴대전화와 같은 삶을 변화시키는 기술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가 아주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냈다. 또 다른 기업체들은 때로는 사회운동가들의 주의 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좋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들에게도 좋은 방법들을 찾아냈다.
실제적인 예를 들면 몇 년 전에 나는 보노(Bono)와 빠에 앉아 있었다. 그때 솔직히 말한다면 나는 그를 약간 별난 녀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보노가 세계적인 빈곤과 질병 퇴치를 돕기 위하여 기업체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며 나에게 불을 붙인 것은 몇 순배의 술잔이 돌고 난 후였다. 그는 몇몇 대기업 회장들의 개인 전화번호를 직접 돌려 나보고 들어보라고 전화기를 넘겨주었는데 나는 거기에서 비록 잠에 취한 목소리기는 하였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는 그들의 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날 밤에는 미친 짓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보노의 끈질긴 노력으로 곧 세계적인 빈곤과 질병퇴치 캠페인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갶(Gap), 홀마크(Hallmark), 델(Dell)과 같은 브랜드 상품을 생산하는 회사들이 AIDS 퇴치운동에 그들의 이익의 일정액을 기부하고 있다. 회사들이 그들의 수입의 일정액을 기부함으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소비자들도 좋은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을 살리는 일을 위하여 그들의 지원을 보내고 있다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지난 1년 반 동안에 AIDS와 폐결핵 그리고 마라리아 퇴치를 위한 기금으로 세계적으로 1억달라가 조성되었으며 그것으로 8만 여명의 빈곤지역 사람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도록 약을 공급하고 1백60만 명이 HIV 테스트를 받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한 일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란 어떤 커다란 새로운 경제이론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 자체를 부셔버리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떻게 자본주의의 이윤을 보다 효과적으로 널리 사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자본주의가 제공할 수 있는 삶의 질의 향상을 소외된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 하는 중차대한 문제에 해답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세계는 더 나아지고 있다
개스 값이 개론 당 $4.00이 넘어 섰고 많은 사람들이 주택융자 갚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때에 창조적인 자본주의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는 게 이상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오늘날의 경제적 어려움은 실제적인 것으로 사람들이 그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즉각적인 주의를 기울여야 할 부분이기도 하다. 창조적인 자본주의란 비교적 단기적인 경제 싸이클의 부침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그것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삶의 질을 증진시켜온 한 세기 동안의 역사적인 발전에서 소외되었다고 하는 장기적인 사실에 대한 하나의 대응인 것이다. 많은 나라들에서 지난 100년 동안에 인간수명이 급격히 증가되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선거에 참여하여 자기들의 의견을 표현하며 그 어느 때 보다 경제적인 자유를 즐기고 있다. 오늘날 우리들이 직면하는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인간 웰빙의 높은 지점에 있는 게 사실이다. 세계는 훨씬 더 좋아졌다.
문제는 그러한 향상의 속도가 아니라 그러한 향상이 모든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1억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지 못하고 깨끗한 물이나 전기 없이 살아가고 있다. 수많은 생명들의 삶을 향상시켜준 백신이나 마이크로 칲과 같은 놀라운 발명품들이 이들에게는 비켜갈 뿐이다. 그래서 정부와 비영리 단체들이 개입하여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본대로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는 자신에 대한 관심과 다른 사람들을 돌보려는 두 개의 위대한 힘이 있다. 자본주의는 자신에 대한 관심에 도움이 되고 그것을 유지하는 방법을 잘 활용하여 왔지만 오직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만을 위해서였다. 정부의 지원이나 자선가들의 도움은 대가를 지불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한 우리들의 돌봄의 채널을 제공한다. 그리고 정부나 비영리기구들이 보다 많은 지원과 보다 효과적인 원조를 하는 역할을 잘 감당함으로 세계는 여전히 남아있는 커다란 불평등-즉 AIDS나 빈곤이나 교육면제등-에 계속해서 진전이 이루어지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향상은 만약 우리들이 아주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에 맞춘 새로운 상품들을 포함하여 시장의 힘이 정부나 비영리단체들이 하는 일들을 보충하도록 길을 열어주면 더 빠르게 더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들은 새로운 발명가들과 사업가들이 지금 우리들이 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좋은 방법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물론 기업체들이 더 많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어떤 종류의 것이건 간에 대가를 지불 하는 게 필요하다. 이것이 창조적 자본주의의 핵심이다. 그것은 기업들더러 보다 더 자선단체가 되라거나 회사들 보고 보다 도덕성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업체들에게 그들의 전문성을 새로운 방법으로 적용하는데 대하여 실제적인 인센티브(유인책)를 주는 것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면서 어떤 대가를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은 두 가지 방법으로 가능하다. 회사들이 스스로 그러한 기회를 찾아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부나 비영리기관들이 현재는 없지만 그러한 기회를 만들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것이다.
그동안 상실했든 것들 프라하라드(C.K.Prahalad)는 <피라밑 바닥에 감추인 보물>( The Fortune at the Bottom of the Pyramid) 이란 그의 책에서 전 세계적으로 비지네스 업계가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있던 시장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세계인구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5兆($5 trillion)달러의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 시장의 힘이 개발도상 국가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느린 주요 원인은 이러한 시장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충분한 관심을 가지고 시간 들여 연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그것을 분명히 보았다. 여러 해 동안 마이크로소프트는 회사의 기부금을 사용하여 3억불 이상의 현금과 소프트웨어를 들여 달리 그런 기술을 습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디지털 간격을 좁혀 주려고(bridge) 시도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의 전문기술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소프트웨어를 쓰는데 있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들이 깨달은 것은 개발도상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에 대한 전문지식을 충분히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지금 하는 것은 비지네스 문제로서의 불공정성과 함께 자선을 통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다. 우리들이 준비하는 프로젝트의 하나는 시각작용을 통해 문맹이나, 반 문맹인들이 최소한의 훈련을 통해 컴퓨터를 즉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작업이다. 우리들이 하는 또 다른 프로젝트는 컴퓨터 하나로 전 학급 학생들이 사용토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생들이 각자 자신들의 마우스로 특정한 색깔의 커서를 조정할 수 있게 하여 50여명의 아이들이 한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였다. 이것은 각자 자기의 컴퓨터를 가질 수 없는 학교를 위해서는 커다란 진전이며 우리가 전혀 시도해 보지 못했든 시장을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다.
휴대용 전화기도 좋은 예이다. 그것들은 발전도상의 세계에서도 지금은 한창 붐이 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보면 기업체들은 그들의 가능성을 아주 낮게 평가하였었다. 2000년 보다폰(Vodafone)이 켄야의 한 휴대용 전화기 회사의 주식을 많이 매입하였을 때 켄야의 시장은 기껏해야 40만 정도 되리라고 생각하였다. 오늘날 사파리콤(SafariCom)으로 개명한 그 회사는 천 만 명 이상의 사용자들을 확보하고 있다. 그 회사는 저소득층 켄야인들에게 봉사할 방법을 찾는 가운데 그러한 업적을 이룬 것이다. 예를 들면 수요자들은 분 단위가 아니라 초 단위로 요금을 내게 되는데 그렇게 함으로 경비를 줄이고 있다. 사파리콤은 이윤을 낼 뿐 아니라 다른것들도 만들어 내고 있다. 농부들은 근처 시장에서 가장 좋은 값을 받을 수 있는 곳을 휴대용 전화를 이용해서 찾아낸다. 휴대용 전화를 이용하는 몇 가지 새로운 방법들은 만들어 내었다. 많은 켄야 사람들은 현금을 저장하고(전자 돈을 이용하여) 송금하는 일들을 휴대전화를 이용하여 하고 있다. 먼 거리를 현금을 직접 들고 가야 할 형편이라면-말하자면 시장에서 집에까지-이와 같은 새로운 발명은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줄 것이다. 더 이상 현금을 직접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강도 당할 위험도 무척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기업체들이 그 동안 미처 알지 못하고 있든 기회들을 발견하였을 때 사람들이 도움을 얻는 방법이다. 그러나 금년 초 내가 창조적인 자본주의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새로운 시장이 있다는데 대하여 회의하는 회의론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들은 “그러한 기회들이 정말 있다면 지금쯤 다른 사람들이 이미 그것들을 찾아냈을 것이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주장은 기업체들은 이미 그들의 상품을 위한 가능한 시장을 모두 조사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들의 태도는 친구와 함께 길거리를 걷던 경제학자에 대한 농담을 떠올리게 한다. 한 경제학자가 길을 걷다가 땅바닥에 놓여있던 10달러짜리 지폐를 발로 밟았다. 친구가 왜 그 지폐를 집지 않느냐고 물었다. “돈이 그대로 거기에 있을 수는 없지, 만약 진짜 지폐가 거기에 있었다면 벌써 다른 사람이 집어 갔을게 아닌가!”하고 그는 말하였다. 어떤 회사들은 이와 꼭 같은 과오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모든 10달라 짜리 지폐들은 이미 누군가가 집어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그런 기회를 놓쳐버린다면 부끄러운 일이 될 것이지만 만약 그대신 기업체의 연구원들과 전략가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잘아는 전문가들을 정기적으로 만나 그들의 최고의 아이디어들을 새롭게 적용하는 방법들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면 큰 변화를 가져 올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시장을 발견하고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것 외에도 기업체들은 때로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주 싼 값에 상품들을 갖게 함으로서 이익을 얻을 수 도 있다. 예를 들면 소프트웨어나 제약 산업들은 원가가 매우 저렴하다. 그럼으로 부유한 시장에서는 많은 이윤을 남기면서 팔고 가난한 시장에서는 원가나, 적은 이윤을 남기고 팔므로 시장을 석권할 수 있다. 물론 다른 비지네스에서는 이러한 가격조정은 할 수 없겠지만 값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서 오는 대중들의 인정과 높아진 명성으로 큰 덕을 볼 수도 있다. 이러한 캠페인에 참여한 회사들은 좋은 일에 동참하기를 원하는 새로운 고객들을 끌어들일수 있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저 상품이 아니라 이 상품을 고르게 하는 비결이 될 수 있다.
그 외에도 기업체들로 하여금 일을 잘 하도록 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점이 있다. 그들은 훌륭한 직원들을 뽑아오고 붙잡아 두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그들이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기구들을 위하여 일하기를 원한다. 그들에게 어떤 회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그들의 전문기술을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 그들은 회사를 위해 헌신함으로 보상하여 줄 것이다.
새로운 유인책들(INCENTIVES)을 만들기
기업체들이 힘들다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창조적인 것으로 생각하거나 간에 세상에는 현재 존재하는 시장의 유인책으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마라리아가 좋은 예이다. 새로운 약이나 예방약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은 돈을 내고 사기가 어려운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약이나 백신을 더 이상 만들지 않는다. 이런 경우 정부나 비영리기구에서 유인책들을 만들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창조적인 자본주의가 날개를 달 수 있는(효과를 낼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이다. 유인책이란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는 회사들에게 일반대중들의 찬사를 모아주는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금년 여름에 The Access to Medicine Foundation이라는 네델란드의 한 비영리 기구에서 어떤 제약회사들이 발전도상국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약들을 많이 만들고 있느냐?에 관한 성적표를 만들어 발표하였다. 내가 제약회사들의 사장들과 이야기할 때면 그들은 그 동안 등한히 하였든 병들을 위해 더욱 힘을 쏟아야 되겠다고 이야기 하면서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크레딧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성적표가 바로 그러한 크레딧 역할을 한다.
공개되어 출판된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것만으로는 기업체들이 참여하도록 설득하기에 충분치 못할 때도 있다. 아무리 선전을 잘해준다 하여도 10여년동안 새로운 약을 위해 쏟은 연구비를 채워줄 수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보다 재정적인 유인책을 만들어 주는 정부의 참여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작년에 시행된 미국법(U.S. law)에 따르면 마라리아와 같이 관심을 갖지 않았던 병들에 대한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한 제약회사들은 식.약품 관리청(FDA)으로부터 자기 회사의 다른 제품에 대한 우선 심사권을 받을수 있다. 만약에 당신이 마라리아에 대한 새로운 약을 개발했다면 당신이 개발한 수익을 크게 올릴 수 있는 코레스트롤 약을 다른 회사들 보다 1,2년 먼저 시장에 내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우선 심의권은 수 억불의 가치를 가질 수 있다. 그것은 정부가 그들이 이미 하고 있는 원조 이상의 좋은 방법이며 시장의 힘을 통해서 보다 많은 생명들이 증진될 수 있도록 하는 좋은 방법이다.
물론 개발도상국의 정부들도 자신들의 자본주의를 부양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그들은 시장이 번성하도록 법과 규정등을 통과시켜야 하고 경제적 성장의 혜택이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사실 그것이 창조적인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논의의 또 다른 이유이다. 즉 “우리들은 자본주의가 더욱 창조되도록 할 필요가 없다. 우리들이 필요한 것은 정부가 간섭을 중지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 많은 나라들은 재산권을 보다 분명히 보장해 주고,손해에 대한 보상을 해준다면 국내와 국외로부터-보다 많은 비지네스 투자를 자극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서서히 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기다릴 수가 없다. 사업가로서 나는 기업체들이 비록 이상적인 조건은 아니지만 당장 새로운 시장을 열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리고 자선사업가로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려면 지금 당장 그들을 도와주라는 압박을 받았다. 우리가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보다 많은 사람들이 불필요한 고통을 당하게 된다.
다음 단계
지난 6월에 나는 ‘빌과 멜린다 재단’을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을 사용하기 위하여 마이크로소프트의 일상업무에서 손을 떼었다. 나는 정치지도자들과 그들의 정부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늘일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며 창조적인 자본주의를 통해서 보다 효율적인 지원을 하며 새로운 파트너들을 끌어들이는 일을 할 것이다. 나는 최고경영자들과 그들의 회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를 이야기 할 것이다. 한가지 아이디어는 그들의 최고 연구진들이 1%의 시간을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문제들에 할애하는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기여는 부유한 사람들의 생활을 더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든 두뇌의 일부를 그 축에 끼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향상시키는데 바치는 것이다. Merck and GlaxoSmithKline과 같은 제약회사들은 이미 이런 일을 하고 있다. 일본의 Smitomo Chemical회사는 자신들의 기술을 탄자니아의 한 섬유공장에게 나누어 주어 마라리아를 퇴치하는데 중요한 도구인 수백만의 모기장을 생산하도록 도와주고 있다. 다른 회사들도 식품이나, 휴대용 전화나, 금융관계에서 이와 같은 도움을 주고 있다
바꾸어 발하자면 창조적인 자본주의는 이미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할 일은 많이 있다. 정부는 FDA 보증서와 같은 유인책 들을 더 많이 만들어야 한다. 의약품 산업에 적용되던 성적카드제도를 다른 분야에도 확대하여 좋은 일들을 하고 있는 회사들에게는 크레딧을 주고 순위를 공개하도록 하여야 한다. 소비자들도 그들의 제품들을 구매함으로 자신들의 몴을 감당하여야 한다. 종업원들도 고용주에게 어떻게 회사가 기여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보다 많은 회사들이 그들의 산업분야에서 가장 창조적인 조직의 선례를 따른다면 그들은 세상의 가장 어려운 문제들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30년전 폴과 나는 모든 가정에, 모든 책상위에 컴퓨터를 하나씩 놓는 운동에 한 몫을 감당하기 원했기 때문에 마이크로소프트 회사를 시작하였다. 10년전 메린다와 나는 다른 운동에 한 몫을 담당하기 원해서 우리 재단을 시작하였다. 이번에는 하루에 1달러를 가지고 겨우 살아가거나, 이미 어떻게 하면 방지할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는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는 운동이다. 창조적인 자본주의는 이러한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기를 바란다.(김상신 번역)
미국에서 창조적인 자본주의에 앞장 섰던 사람들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강철왕)
1889년 당시 최고의 부자인 카네기는 <부(富)의 복음>이란 글에서 백만장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후견인으로 행동하여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부(富)를 축적한 후에는 그것을 사람들이 보다 낳은 삶을 살도록 도움을 주는 기구들-도서관이나, 공원 그리고 대학교등-을 만드는데 기부함으로 자본주의를 키워가야 한다고 하였다. 카네기는 생전에 2,509개의 도서관을 만들었고 죽기 전에 자신의 재산의 90% 이상을 기부하였다.
헨리 포드(Henry Ford, 자동차왕)
자동차 왕이였든 포드는 1914년 종업원들의 수입이 올라야만 그들이 고객으로 돌아온다며 당시 다른 회사들의 2배나 되는 임금을 지불하였다. 그는 고객의 구매력은 올리고 자동차의 가격은 낮추는 윈윈 전략이 회사를 번영케 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의 조치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뉴욕 타임스는 "너무나 환상적인 생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을것이다"고 하였고 웰 스트리트 져널은 "범죄는 아니지만 경제적인 실책임에 틀림 없다. 비지니스 업계에는 원래 존재하지 않는 영적 원리를 적용하는 우(寓)를 범했다 "고 비난하였다.
아돌프 벌리 와 메릭 다드 (법대 교수)
이들 두 교수는 1931년 부터 jHarvard Law Review란 잡지를 통해서 거의 10여년 동안 기업의 목적이 무엇인가? 에 대한 논쟁을 계속하였다. Berle 교수는 기업주의 주 임무는 주주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Dodd 교수는 기업들은 주주만이 아니라 종업원들이나 고객 그리고 커뮤니티와 같은 다른 그룹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빗 팩커드(Dave Packard, HP 컴퓨터 회사의 창업자)
1960년 Packard 창업자는 "많은 사람들이 회사의 존재이유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기업들이 존재하는 중요 목적이지만 우리들은 좀 더 깊이 들어가 우리들의 존재 이유를 찾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을 같이 모아 기업을 운영하면서 개인적으로는 이룰수 없는 무엇을 집단적으로 이루어 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데이빗 락펠러(David Rockefeller, Chase Manhatttan Bank회장)
1962년 <미국 철학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사업주들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옛 생각이 사업주들은 사회적인 책임에서 자유로울수 없다는 믿음으로 발전하고 있다. 오늘날의 경영자들은 사업주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종업원들과 모든 사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있다."고 주장 하였다.
비슷한 때에 경제학자 데오도어 레빗(Theodore Levitt) 교수는 Harvard Business Review에서 "기업체들은 더 이상 돈 많이 버는 것을 자랑하는 세상이 아니라 얼마나 '대중들을 위하여 봉사'하느냐를 자랑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1976년 23개의 회사들이 회사 수입 5%를 자선기금으로 희사하는 Minnesota Keystone Program 에 참여하였으며 현재는 220여 기업체가 참여하고 있다. 그 가운데는 Target, Medtronic, Cargill, Northwest Airline, Comcast 그리고 General Mills 같은 회사들이 가입해 있다.
1980년 American Express 회사는 고객들이 물건을 구입할때 마다 일정액을 '좋은 사업'을 위해서 기부하는 "cause-related marketing"이라는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으며 그 기금으로 처음 한 일이 '자유의 여신상'을 보수하는 것이었다.
1988년 Hedge-fund 매니저 폴 튜돌 죤스( Paul Tudor Jones)가 뉴욕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 위한 재단을 설립하였다. 재단들이 직접 모험적인 자선사업을 벌리는 일들이 시작되었고 그러한 방법들이 비지니스 업계의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기본소득이란 모든 사회구성원의 ‘적절한 삶’을 보장하기 위해 정치공동체가 모든 구성원에게 개별적으로 아무런 조건 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특히 오늘날에, 어떤 (정치)공동체가 구성원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 그리고 이를 위한 이러저러한 방도가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 대표적으로 복지국가의 다양한 복지 제도와 정책이 그런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주장과 관심이 커지는 이유는 사회구성원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한다는 기존의 방책들이 이제는 별로 효과가 없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반대 효과를 가져왔다는 인식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명제 아래 완전고용을 추구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주요 목표였지만 저성장 혹은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에 이것이 가능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 시장의 효율성을 통해 모든 사람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하겠다는 신자유주의의 약속은 사실상 거짓이었음이 드러난 지 오래이다.
오늘날 기본소득의 필요성은 우선 경제체제의 운영 방식이 보이는 한계에서 나온다. 전 세계적으로 보면 1980년대 이후에, 한국으로 한정하면 1997년 이후에 본격화된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불안정노동체제와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본격화이다.
불안정노동체제는 비용 절감을 통해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기업의 전략 속에서 일반화된 사회적 양상이다. 이 속에서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뿐만 아니라 고용 불안에 시달리며, 다른 한편으로 아예 일자리가 없어서 삶의 불안에 시달린다. 이런 사태가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이후 자본-노동 사이의 힘의 관계가 바뀐 데 있다. 물론 여기에 더해 기계화와 자동화가 늘어난 것도 한몫했다. 특히 기계화와 자동화는 점점 고용 자체를 줄이는 경향을 띤다.
다음으로 금융시장 자본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실물 경제와 무관한 방식으로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즉 적절한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 매우 제한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제로섬 게임처럼 누군가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를 수반한다.
그런데 어떤 경제체제이든, 생산-유통-소비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며 돌아가지 않을 경우, 그 체제는 무너질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체제는 극단적인 이윤 추구 속에서 소득 분배가 너무나 불균형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다수가 소비할 수 있는 몫 자체가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따라서 경제 위기는 항상적이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조건을 빼앗기면서 사회 자체가 해체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현존 경제체제의 한계에 더해 생태 위기라는 더욱 큰 문제가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생태 위기는 크게 보아 자원 고갈과 기후 변화로 인한 생태계의 위기를 가리킨다. 우선, 우리 문명을 떠받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석유 자원을 생각해 보자. 석유 자원의 고갈 문제는 이미 오래전부터 운위되었는데, 이제는 국제에너지기구조차 2006년에 이미 피크 오일이 지나갔다고 말할 정도이다. 연료로서의 석유는 광범위하게 쓰일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의 원천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석유 없는 세상은 지금과 많이 달라질 것이다. 다음으로 기후 변화도 심각한 문제이다.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은 수많은 해안가 도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이른바 이상 기후로 인한 다양한 피해도 벌써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중의 문제에 대해 기본소득이 주요한 해법이 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소득과 자산에 따른 심각한 사회양극화를 넘어서서 모든 사회구성원이 적절한 삶을 누릴 뿐만 아니라 생태 위기가 극복할 수 있는 방도가 될 수 있는가?
우선 기본소득이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지급된다면 최소한의 삶을 재량껏 누릴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 마련되는 셈이다. 그러면 당연히 소비가 어느 정도 늘어 경제가 좀 더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원을 무엇으로 마련하느냐에 따라 (소득세, 자본 이득세 같은 경우) 소득 재분배 효과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이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더욱 적극적인 효과가 나온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고용에 목을 매는 것은 다르게 먹고살 수 있는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른 조건이 없다면 나쁜 일자리(저임금, 장시간 노동, 위험한 일)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이 주어지면 굳이 오랜 시간 일하지 않아도 되고, 임금이 적거나 위험한 일은 거부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이렇게 된다면 사람들이 더 많은 시간을 다른 활동, 예를 들면 문화 활동, 돌봄 노동, 정치 활동 같은 활동에 쏟을 수 있게 되어 이른바 문화 사회로 이행할 수 있고, 민주주의도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이런 효과의 연장선에서 기본소득은 생태 위기의 해법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생태 위기를 낳은 근원은 이윤의 극대화를 위한 과도한 생산과 소비라 할 수 있다. 자본은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판매하려고 하며, 다수의 사람들은 이 속에서 그저 소비자로 존재한다. 즉 인격이 아니라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느냐를 잣대로 자신과 타인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많이 생산하고 많이 소비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닫게 되었다. 다시 말해 ‘좋은 삶’은 물질적 풍요에 있는 게 아니라 자아가 충만해지고, 인간 및 자연과의 관계가 풍부해지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제 어렵게나마 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사람들이 더 적게 일하고, 비물질적, 문화적 활동에 더 많은 시간을 낸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경제 성장이 아니라 삶과 자연의 증진을 원리이자 목표로 삼게 될 것이다.
분명 기본소득은, 실현된다면 이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하지만 아직 다수가 기본소득을 지지하고 있지는 않다. 아마 그것은 낯설기 때문일 것이다. 이때 낯설다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소득이란 일한 대가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해 기본소득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정당하다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러저러한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권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것 혹은 출발점이 생명과 생존의 권리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실 인간의 생명 혹은 생존은 개인의 권리가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므로, 생명권이나 생존권은 권리 이전의 권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권리란 어떤 정치공동체 내에서 혹은 그런 공동체를 통해서만 보장된다. 다시 말해 인간의 권리라고 말하지만 현실은 시민의 권리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정치공동체 밖에 혹은 정치공동체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의 무권리 상태가 문제가 된다.) 이런 시민의 권리는 현대 사회에서는 헌법으로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현실의 또 다른 논리는 자본주의적 상품시장경제이다. 생산수단(자본)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시장에서 팔고 그 대가로 받은 임금으로 살아가야 하는 게 자본주의의 논리이다. 이때 모든 사람이 적절한 가격으로 자신의 노동력 상품을 팔 수 있다면 큰 문제는 드러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자본주의적 경기 변동에 따라 나타나는 임금 등락은 말할 것도 없고, 거시경제적으로 보면 아예 일자리가 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 할수록 이런 경향은 심화된다. 여기에 더해 또 다른 현실은 노동력 상품 판매자가 보통 말하는 ‘을’의 지위를 차지하며, 이는 노동 과정에서의 소외, 부당한 대우까지 감수해야 하는 처지에 빠지게 한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존권을 박탈당하거나 불완전하게밖에 보장받지 못하는 처지에 빠질 수 있다.
기본소득은 이런 현실의 논리를 뒤집고, 정치라는 관점에서 모든 구성원의 생존 혹은 생존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방도로 제출된 것이다. 정치공동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우선 공화주의적 견해를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기원하는 공화주의는 모든 사회구성원(시민)의 자유의 확대 및 참여를 보장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는 정체(政體)이다. 이를 시민의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공적인 일을 우선시하는 것이며, 자신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충성심의 표현인 애국심으로 나타난다.
이런 사회가 성립하고 작동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모든 시민이 그 무엇보다 독립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독립성은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 것 모두를 포함한다. 다시 말해 타인에게 자신의 삶을 의탁해야 할 정도로 가난한 사람이거나, 타인에게 어떤 판단을 의존해야 할 정도로 빈약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공화국의 시민으로서 자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물론 고대 사회는 노예에게 물질적 생산을 의존했기에 시민들이 정치와 예술에 참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벌 수 있었다. 또한 완전한 독립성을 갖춘 시민이란 어찌 보면 이상(理想)이었지 현실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시민의 자유가 보장되는 정치공동체를 우리의 목표로 삼는다면 시민의 독립성은 가장 중요한 전제가 된다.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인 오늘날에는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이다. 한 가지 방식은 ‘완전 고용’을 통해 그리고 부수적으로 부당한 계약 조건의 제약을 통해 시민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 사회주의 국가처럼 생산수단을 국가가 소유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일자리를 ‘할당’하는 것도 바람직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거기서는 그 무엇보다 공화주의가 지향하는 자유가 부족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수준의 기본소득을 통해 시민들의 물질적 조건을 보장하는 것이 양자의 위험을 피하는 길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기본소득은 모든 자원의 공유라는 관점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자연 혹은 대지는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인간의 노동이 들어감으로써 인간적으로 유용한 어떤 것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모두에게 동등한 몫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몫이 있는 것은 분명하며,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정치공동체의 업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알래스카이다. 미국 연방에 가입한 1959년에 알래스카는 주 헌법을 통해 알래스카의 모든 자연자원은 알래스카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원칙을 천명했다. 이에 따라 이후 발견된 석유에서 나오는 수익금을 알래스카 영구기금으로 만들었고, 이를 ‘배당금’으로 알래스카 주민에게 매년 지급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에 대해 석유 같은 자원이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말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유 자원이 하나도 없는 나라 혹은 지역은 없다. 그것 없이는 인간의 삶 자체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공유 자원 가운데 하나는 전파이다. 이를 사적 소유나 배타적 이용으로 할 것이 아니라 만인의 것으로 하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의 일부를 기본소득 재원으로 삼을 수 있다.
기본소득을 공화주의적 관점에서 보건, 자원의 공유라는 관점에서 보건 모두 경제 우선의 논리를 뒤집는 시도이다. 다시 말해 경제는 인간적, 시민적 삶의 기초이지 통제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본소득은 기존 사회의 논리를 문제 삼는 것이고 어떤 심대한 변화를 겨냥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을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지급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는 경우에도 언제나 이런 질문이 나온다. 그 많은 돈을 어떻게 마련할 수 있지? 역사상 사회구성원의 안녕과 복지를 최대로 추구했다고 할 수 있는 20세기 후반의 유럽 복지국가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으며 약화된 것을 감안하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다.
아니, 좀 더 근본적으로, 어떤 조건도 없이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할 경우, 누가 일을 할 것이며, 따라서 뭔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선 전자에 대한 이러저러한 대답을 찾아보자. 기본소득을 정치공동체, 대체로 보아 국가가 지급한다고 하면 당연히 먼저 떠오르는 것이 조세 체계의 개혁이다. 기본소득 지급을 위한 조세 개혁과 관련해서 ‘좌파적’ 관점은 소득과 부의 재분배를 겨냥하여 각종 소득세와 자산세를 ‘누진적으로’ 추가로 걷는 것이다. 사실 이는 기존 복지국가의 재원 마련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가 2014년 봄에 제시한 모델도 주로 이를 따르고 있다.
1인당 연간 360만 원을 지급하고자 하는 이 모델에 따르면 필요한 재원이 181조 5000억 원이다. 이를 위해 소득세 범주에 포함할 수 있는 것으로 근로소득 및 종합소득 27조 1000억 원, 배당 또는 이자소득 종합과세 15조 원, 증권양도소득 종합과세 30조 원 등을 추가로 걷어야 하며, 자산세라 할 수 있는 토지세는 공시지가의 1% 징수 원칙에 따라 39조 원을 걷게 된다. 이외에 생태세 40조 원, 지하경제 과세 20조 원, 기본 사회복지 지출 전환금 13조 1000억 원 등이 있다. 그리고 이 모델을 시뮬레이션해 본 결과, 소득세 증가에도 불구하고 순수 세금 납부액이 기본소득으로 받는 돈보다 많아서 ‘손해’를 보는 경우는 소득 구간 85%(연소득 7957만 원) 이상이다. 따라서 상당한 재분배 효과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토지세로 걷는 부분은 공유 재산에 대한 모두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볼 수도 있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토지는 ‘주어진 것’이지 인간이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용권을 누릴 수는 있어도 배타적 소유권을 행사하고, 또 이를 상속한다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일이다. 따라서 현행 토지 소유권을 다시금 모두의 것으로 돌리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적절한 세금을 매겨 ‘환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럴 경우 토지세는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공유 재산의 재형성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토지세에 대해 이런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은 기본소득 재원 마련과 관련해서 소득세 중심의 방법과는 다른 방식을 고려할 수 있게 해 준다. 그것은 알래스카 모델과 유사하게 공유 재산에 대한 동등한 접근권의 일부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반론이 있다. 석유와 같이 가치 있는 자원이 없는 경우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토지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의미 있는 공유 재산이 없는 공동체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대표적인 공유 재산이라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전파이다. 현재는 이동통신회사라는 기업이 돈을 버는 데 이용하는 자원이지만, 이것을 모두의 것으로 보고 여기서 나오는 수익을 배분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적인 경제 활동은 전통과 유산,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공동 활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생산물의 생산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일정한 지분이 있는 것 …… 국민배당 혹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의 권리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할 수 있는 또 다른, 매우 혁신적인 방법이 국가화폐에 기초한 국민배당 혹은 사회배당이다. 이는 영국의 엔지니어였던 더글러스 클리포드가 1930년대에 입안한 사회 신용론에 기초한 것이다.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상품의 가격은 언제나 임금 등 소득에 비해 크기 때문에 상품이 제대로 팔리지 않으면서 발생하는 공황이 불가피하다는 것, 그리고 사적 기업인 은행이 창출하는 신용은 부채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미래를 차입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따라 그는 금융 체계의 개혁을 요구했는데, 그것은 은행의 화폐 발행 및 신용 창출 기능을 없애는 대신에 국가가 부채를 기반으로 하지 않는 화폐를 발행하는 것이었다. 또한 구매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국민배당이라는 이름의 기본소득을 제안하였다.
그런데 클리포드는 구매력을 높이기 위해서만 국민배당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보기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창조적인 경제활동은 전통과 유산, 그리고 사회구성원의 공동활동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특정 생산물의 생산에 직접 기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모든 구성원에게는 일정한 지분이 있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국민배당 혹은 기본소득은 사회구성원의 권리였던 것이다.
끝으로 재원 마련이라는 문제는 얼마만큼의 기본소득을 지급할 것인가라는 문제와 뗄 수 없는 것이다. 앞서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의 모델은 일인당 연간 360만 원, 즉 매달 30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의 생계비 수준을 감안할 때 가족 구성원의 숫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는 액수이다.
물론 생태적 한계에 부딪힌 오늘날에는 물질적 소비는 생태 문제와 함께 고려해야만 하며, 정치공동체가 지급하는 기본소득의 액수는 민주적으로 결정돼야 할 것이다. 여기에 더해 기본소득의 지급액은 우리가 기본소득으로 이루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것인가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음에 논의할 문제이다.
우리는 앞에서 기본소득의 필요성, 정당성, 재원 등에 관해 살펴보았다. 기본소득이 필요한 이유는 한편으로 현재의 불안정노동체제가 더 이상 ‘일자리=생존’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 생태적 위기로 인해 더 이상 (물질적) 성장 지향 사회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정당성과 관련해서는 자유로운 시민들로 이루어진 공화정이 그 구성원의 물질적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과 모든 사회구성원은 공유재에 대해 일정한 몫이 있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끝으로 재원과 관련해서는 부의 재분배를 목표이자 근거로 하여 소득과 자산에 적절한 과세를 해서 기본소득 재원을 마련하는 것, 앞서 말한 공유재인 자연적, 사회적 자원에서 나오는 수익을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는 것, 국가화폐의 발행을 통한 배당을 지급하는 것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렇게 보면 기본소득은 얼핏 보기에는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라고 할 수 있지만, 매우 복잡한 근거와 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해당 사회와 그 사회구성원은 다면적이고 심층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후 사회에 대한 전망 없이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이러한 전망이 ‘좌파’ 내에서 기본소득을 둘러싼 쟁점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간단히 말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냐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것이냐 같은 식의 논쟁 지형이 있다.
자본주의의 극복과 기본소득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과거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논의와 경험을 참조해야 한다. 유럽 사회주의 (정당) 운동은 주로 마르크스의 입론인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관점 등에 입각하여 19세기~20세기 초에 정렬했다. 그런데 바로 그 시기는 보통선거권의 확대를 통한 민주주의의 진전, 독점자본과 주식회사의 발전, 민족주의의 확대, 제국주의적 팽창 등이 이루어진 시기였고, 이런 정세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는 부르주아 정치 질서에 대한 태도, 권력 쟁취 방식, 대안적인 생산양식의 모습 등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면서 국제 사회주의 운동의 분열을 낳았고, 그 결과 소비에트식 공산주의와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방향을 지향하기 시작한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사적 소유를 폐지하고 주로 국가 소유에 기초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 했으며,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시장에 대한 정치적 통제를 통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완화하는 방식을 택했다. 성장이라는 점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뒀지만 현실에서 여러 문제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체제의 붕괴로 이어진 것은 공산주의였다. 이에 반해 현실에 맞는 수정을 여러 수준에서 거듭한 사회민주주의는 살아남았다. 하지만 꾸준한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한다는 의미에서의 개혁주의는 사라졌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사회민주주의가 지금의 사회와 다른 세상을 꿈꾼다고 말하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 더구나 1980년대 이후 ‘대안이 없다는’ 분위기 속에서 훨씬 더 오른쪽으로 돌아서면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 자체가 부끄러울 정도로 바뀌기까지 했다.
경제 모델의 구상과 관련해서 우선 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 시장 자체는 사회의 다양성을 도모하고 개인들의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게 필요한 일이 된다. 이때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뒷받침함으로써 이런 기능을 하게 될 것
1980년대 초중반에 유럽에서 기본소득 아이디어가 제기될 때 상황이 이러했다. 이런 맥락에서 기본소득은 어떻게 하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공동체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지금은 선명해졌지만 당시로서는 크게 도드라지지 않았던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었다.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의미에서의 시장 속에서 개인의 선택을 가능하게 하고, 시장 외부에서의 개인의 선택 또한 뒷받침하며, 그러면서도 사회구성원의 공동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방향을 기본소득 아이디어로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물론 기본소득 자체가 어떤 경제 모델을 자동으로 낳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기본소득 아이디어를 가장 잘 실현할 수 있는 경제 모델을 구상할 필요가 있다. 경제 모델의 구상과 관련해서 우선 화폐로 지급되는 기본소득은 시장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이는 자본주의와 시장을 구분하는 것이며, 자본주의는 다른 무엇보다 이윤극대화와 경제활동 자체를 우선시하는 체제라고 본다는 것이다. 도리어 시장 자체는 사회의 다양성을 도모하고 개인들의 개별성을 발휘할 수 있는 제도이며, 따라서 자본주의가 시장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는 게 필요한 일이 된다. 이때 기본소득은 특히 노동력의 탈상품화를 뒷받침함으로써 이런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사회적 연대의 의미가 있는 경제활동, 주체들의 참여가 제약되지 않는 경제활동이 필요한데, 이는 협동조합과 사회적 기업 등의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특히 자본주의 경제활동의 주요 특징인 생산자 중심 경제 혹은 그 반대편에서 나타나는 낭비 경제를 넘어서서 사회구성원들이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끝으로 여전히 공적 소유 혹은 국유 부문이 필요할 것이다. 인프라스트럭처 부문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며, 어떤 영역이 그렇게 될지는 민주적 절차와 자체 합리성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다.
기본소득은 크게 보아 두 가지 내용을 담는 미래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는 경제를 다시금 사회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인들이 충분한 자기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사회는 새로운 기술과 조직, 새로운 윤리를 필요로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