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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막1:21-28)
21 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Jesus went into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22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not as the teachers of the law. 23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impure spirit cried out, 24 “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25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26 The impure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
27 The people were all so amazed that they asked each 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and with authority! He even gives orders to impure spirits and they obey him.” 28 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회당의 등장
이스라엘의 중심지는 예루살렘입니다.
거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전이 특별한 장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입증하셨습니다.
앗수르가 유대를 공격했을 때 히스기야 왕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그가 확인한 일입니다.
35. 이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친지라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었더라(왕하19:35)
그들은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것과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 스스로 지키신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성전이 바벨론에 의해 여지없이 훼파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을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나야 했다는 것입니다.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사58:6-9)
하지만 어리석게도 이런 종교 행위들을 이웃 사랑의 면죄부로 여기면서 반복하는 경우 그들이 드리는 제사들의 뜻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사66:3,4)
결국 하나님의 성전은 훼파되었으며 그들은 포로로 끌려왔습니다.
그들은 이제 성전이 아닌 성경을 중심으로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그렇게 수 천 년을 회당에 모여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미국에서 보니 한국의 2세들은 이미 한국어를 못합니다.
그런 식이었다면 그들도 다른 민족에 섞여 사라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말대로 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후 또 다시 가혹한 재앙이 그들에게 터진 것입니다.
재건되었던 성전이 이제는 로마에 의해 또 다시 무너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중심에 두고 율법의 순종 행위가 그들의 구원의 보장이라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들은 율법의 준수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 것이 아닙니다.
이 차의 성전 훼파는 믿음을 통한 구원의 새 시대가 열린 것을 알린 것입니다.
두 번의 급격한 변화의 중심에는 성전파괴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훼파 때마다 말씀 성취의 중대한 변곡점이었습니다.
물론 그 변화가 너무나 커서 사람들의 눈에 그것을 말씀의 폐기로 오해될 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의 실천은 말씀의 완전한 성취이셨습니다.
그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섭리는 일관하셨던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하나님 섭리의 일관성 속에서 변화를 읽어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에 불안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믿음에 율법 행위의 최소한의 보증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에 더불어 할례를 베풀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럴듯한 그들로 인해 안디옥 교회는 혼란으로 몰려갔습니다.
믿음의 요구에다가 최소화된 율법인 할례를 더해 구원을 보장 받으려던 일은 거부되었습니다.
안디옥 교인을 혼란하게 했던 이 일이 오히려 초대 교회의 신학을 정립하는 계기를 제공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당은 믿음으로의 완전한 전환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초기에 예수님도 이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회당에서 가르치실 기회를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고등학교에서 수학 선생님이 수학공식을 가르치시듯이 논리적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듣고 그 가르치심이 당시의 서기관들과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토라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만약 토라의 말씀에 모세 개인의 사견이 들어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신성 모독을 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랍비들은 이 위대한 토라에서 유대인들이 일상에 적용할 모든 법칙과 규례를 찾아냈습니다.
이 법에 대한 적용들은 각각의 특수한 경우마다 거기에 따른 법칙과 규례로 더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신앙이 끝없는 규칙의 나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규칙들에 대해 존경심으로 인해서 자신들의 사적 판단을 적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들이 신앙의 이름으로 판사의 판례처럼 기계적으로 반복 적용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판례가 성령 하나님의 역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 시간이 가장 그럴듯한 기독교 윤리의 나열의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독립적으로 성령과 일치된 살아계시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위는 드럼을 쳐대면 소리를 질러대는 감정의 자극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초한 이성적 가르침과 성령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거기에서 기존의 랍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가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 설교를 통해 설교란 무엇인지 보이신 것입니다.
설교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나야하는 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귀신들린 사람과 함께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귀신들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위협을 느끼지 못했고 성도와 함께 아멘을 외치 있었던 것입니다.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3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impure spirit cried out,
그런데 그 동안 잠잠하던 귀신이 놀라 소리 지른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 일은 예수님께서 먼저 귀신을 위협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기 위해 강단에 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패륜을 일삼는 자가 강대상에 서서 탁월한 설교 기술을 가지고 귀신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안 되는 자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른 적이 있습니다.
13.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삼아 악귀 들린 자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의지하여 너희에게 명하노라 하더라
14.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16.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뛰어올라 눌러 이기니 그들이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19:13-16)
존재라고 하니 감히 우리가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를 이른 것이 아닙니다.
교인 한 사람이 귀신에 들렸는데 축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을 두고 찬양을 하며 축귀를 하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남편을 위해 만사 재껴두고 전국의 용하다는 부흥사를 다 찾아다닌 것입니다.
집사님의 기도 같지 않는 그 기도 그 하소연에 귀신이 질겁하고 도망한 것입니다.
귀신은 예수 안에서 남편을 사랑하는 존재인 그 아내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제 남편을 예수님 안에서 사랑하는 존재가 귀신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지금 등장해야 할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셨다면 예수님은 좋은 백신이 나오기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에게 단순하고 직접적 명령을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에게 바로 그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코로나 19는 동기가 될 수 있는지 모르나 그것이 신앙의 목적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그것이 귀신과 똑 같은 더러운 존재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닌 모든 잡것들은 인간을 파괴하는 더러운 귀신에 불과합니다.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하지만 영적 기능을 가진 이 더러운 존재에 대해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존재의 변화가 우리 목표입니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5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그 때에 주님이 하신 이 말씀을 따라할 수 없는 사람이 여기 누구 있습니까?
이것이 괴이한 글씨의 부적처럼 비밀스러운 주문에 속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축귀의 말씀은 누구나 사용하는 간단하고 명료한 말입니다.
하지만 그 간단한 말씀이 예수님의 입에서 나갔을 때에 귀신은 꼼짝없이 그에게 복종한 것입니다.
그런 기이한 일은 초대 교회에서나 통한다는 신학자들이 있지만 성령은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중대한 문제는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인격이 활동하시느냐는 것입니다.
예수 설교는 단순한 윤리적 종교 윤리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설교란 예수님과 귀신이 샅바를 잡고 하는 씨름이었습니다.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6:12)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안식일 날이면 회당을 찾았던 그 일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대를 물리면서 반복했던 일입니다.
하지만 그 예수님의 첫 설교 자리에서 그들이 처음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일이면 교회를 나온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그들이 놀란 것은 더러운 귀신을 능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입니다.
실로 예수의 가르침은 장황한 랍비의 교훈과는 판이한 것이었습니다.
28.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막1:
28 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입이 있는 사람은 그 일을 본 이상 그 말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예수님을 아주 난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대체 그의 일을 하실 수가 없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 전해도 김 서방은 귀신들려 데려온 제 동생 축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막1:37,38)
그런 식으로 모인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예배는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개 아들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했을 것입니다.
메시야가 오셨으니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렸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열렸다가 아니라 그들은 병이 나았다고 할 것입니다.
이런 간증과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말이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첫 번째의 설교에서 권위를 회복한 설교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이셨습니다.
신문을 보니 아마 2차의 심각한 원인은 의학적인 대처의 문제 때문이 아닙니다.
마스크를 쓰라고 하는 질본의 요구가 틀려서가 아니라 이제 정신적으로 지쳐서 그 일을 안일하게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에 그치지만 믿는 사람들은 다른 한 가지 사실을 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