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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과 王族이 쓴 시조 작품들 /유 준 호 [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
유교(儒敎)와 성리학(性理學)이 사회규범이 되어 살아가던 조선조이기에 이때의 상층 지배계급의 성향과 정서도 이에 준하여 문학을 하였으리라 추측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들도 한 인간의 바탕에 깔린 심성(心性)은 일반 백성과 다르지 않음을 왕과 왕족의 시조에서 알 수 있었다. 한두 편을 빼고는 탈속경(脫俗境)과 안빈낙도(安貧樂道), 물아일체의 감흥을 그들도 느끼고 있었으며, 이별의 아쉬움을 잔잔한 정으로 풀어내고 있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월산대군(月山大君)(덕종의 맏아들, 성종의 형)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낙시 드리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빗만 싯고 뷘 배 저어 오노라.
"가을 강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갑구나. 낚시를 들이쳐 놓으니 고기는 물지 않는구나. 욕심이 없는 달빛만 싣고 빈 배를 저어 오노라" 하는 시조로 세속적 명리(名利)를 초탈한 전원생활에서의 여유와 멋을 노래한 시조이다. 넉넉한 자연, 욕심 없는 삶의 태도 등을 중심으로 한가로운 전원생활 속에서 느끼는 한정(閑情)과 풍류가 표현되어 있다. 지은이는 애초부터 고기를 잡으려고 낚시를 물에 담근 것이 아니다. 그저 마음의 여유를 즐기기 위하여 달밤에 배를 띄우고 낚시를 물에 담그고 있었다. 그런 물욕(物慾)과 명리(名利)를 벗어나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 바로 이것이다. 가을 달밤에 배를 띄워 낚시로 풍류를 즐기는 한가하고 여유로운 삶을 한 폭의 동양화처럼 선명하게 제시한 대표적인 ‘강호 한정가(江湖閑情歌)’로서 여유로움 속에 멋을 즐기는 옛 선비들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중장의 ‘아니 무노매라’와 종장의 ‘무심’, 그리고 ‘빈 배’의 표현에서 화자가 마음을 비우고 여유 있게 자연의 풍취를 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빈 배에 고기 대신 달빛만 가득 싣고 돌아오는 풍류는 바로 욕심을 버린 작가의 마음을 반영한다. 지은이 월산대군은 왕위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당시 권신(權臣) 한명회 등의 농간(弄奸)을 겪게 되자 양화도 북쪽에 망원정(望遠亭)을 짓고 풍류로 여생을 보낸 어쩌면 정치적으로는 불행한 왕자였다.
있으렴, 부디 갈다./성종(成宗)
이시렴 브듸 갈따 아니 가든 못할쏟냐 무단히 슬튼야 남의 말을 드럿는야 그려도 하 애도래라 가는 뜻을 닐너라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내 곁에 있으려무나. 그래도 꼭 가야 하겠느냐 아니 가면 안 되겠느냐? 까닭도 없이 서울 벼슬이 싫단 말이냐 그렇지 않으면, 남의 말을 듣고 충동이 되어 그러는 것이냐 어쨌든, 애달프고 매우 서운하구나. 그래도 가야 한다면 네 생각이나 속 시원히 말해다오"하는 시조로 이 시조는 임금의 신하에 대한 태도라기보다 어버이가 자식을 대하는 태도와 같이 다정다감하다. 임금이 지녀야 할 법도를 벗어난 인간미가 넘치는 성품이 속속들이 마음에 배어들어 있어 흐뭇하기만 하다. 성종 임금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여지승람'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던 유호인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고자 굳이 지방관직으로 물러가려 할 때에 만류하다 못해 술잔을 권하면서 읊은 것이라 한다. 이 작품은 초장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고려속요 「가시리」에 비견될 만큼 직설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중장에서 이를 심화하여 귀향 이유를 묻는 데서 절정을 이룬다. 주제어(主題語)는 “이시렴”이고 가는 뜻은 귀성노모(歸省老母)이다. 세상 사람들이/ 인평대군(麟坪大君)(인조의 셋째 아들, 효종의 아우) 세상 사람들이 입들만 셩하여셔
오면 가려하고/선조(宣祖) 오면 가랴하고 가면 아니 오네. 오노라 가노라니 볼 날히 전혀 업네. 오날도 가노라 하니 그를 슬허 하노라. “오기가 바쁘게 가려하고, 한번 가면 다시 올 줄을 모르니, 오노라 가노라 하다가 결국 만나 볼 날이 전혀 없구나. 오늘도 또 간다고 떨치고 나서니 그를 슬퍼하노라 하는 시조로 사랑하는 신하를 떠나보내는 아쉬운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라 했던가. 만나서 정들자 곧 이별이라니, 선조 임금은 자신을 등지고 떠나야만 하는 사랑스런 신하가 한편으론 야속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안타깝기도 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풍기는 임금의 은총과 정은 비단 군신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보다 차원을 높여 순수한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우러나는 정 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이 작품은 1572년 선조 5년 조신(朝臣) 노진(盧愼)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 갈 때 한강을 건너자 선조가 이 노래를 지어 은쟁반에 담아 임금의 명을 전하는 궁중 내시인 중사(中使)를 보내어 전했다고 한다. 임금과 신하 사이의 정이 참으로 진솔하고 인간적이다. 작품에서 풍기는 임금의 은총과 정은 군신(君臣)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보다 차원 높인 순수한 인간과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정을 느끼게 하고 있다. 기교면에서 ‘오’자를 두운으로 하여‘오다’와 ‘가다’의 반복으로 시적 재미를 더해주고 있다. ①청석령 지나거다/효종(孝宗)(봉림대군)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냐 초하구(草河口)ㅣ 어듸매오 호풍(胡風)은 참도 찰샤 구즌비는 무스 일고 아므나 행색(行色) 그려내여 님 계신듸 드리고쟈 ②앗가야 사람되랴/효종(孝宗) 앗가야 사람되랴 온몸에 짓치 도쳐 구만리 장천(九萬里 長天)에 프드득 소사 올라 님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을 구버볼가 하노라.
위 작품은 효종이 임금이 되기 전 봉림대군으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나서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으로 볼모로 끌려갈 때와 볼모로 있을 때 지은 시조로 우리의 슬픈 역사의 한 토막을 엿보게 하는 작품이다. ①은 "청석령을 지났느냐. 초하구는 또 어디쯤인가? 북녘에서 불어오는 호풍이 차기도 찬데, 궂은비는 또 웬일이란 말인가? 아무나 우리의 초라한 모습을 그려서 임금께 보내드리고 싶구나."는 시조이다. 청석령을 지났을 때에 지은이는 무척 고생이 많았을 것이다. 초하구는 아직 멀었느냐? 북풍은 차갑고 비도 내리니 더 처량하였다. 누가 나의 초라한 행색을 그려다 임에게 보여드렸으면 하고 생각한다고 하고 있다. 이 작품은 봉림대군이 청나라로 끌려갈 때 지은 시조다. 청석령, 초하구는 평북 의주 근방 만주 땅의 지명인데 엄동설한에 볼모로 잡혀가는 통한의 심정이 '궂은비'로 표현되고 있다. 참담한 심정을 님(인조) 계신 데 전할 이도 없는 막막한 현실이 가슴 아프다. 봉림대군은 청나라에서 9년 만에 귀국하여 소현세자가 죽자 인조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올라 북벌군을 일으켜 지난날의 치욕을 씻고자 노력 하였으나 끝내 뜻은 이루지 못한 효종이다. 이 시조를 받은 인조는「내라 그리거니 네라 아니 그릴넌가. 천리(千里) 만향(蠻鄕)에 얼매나 그리난고/ 사창(紗窓)의 슬픠 우난 저 뎝동새야 불여귀(不如歸)라 말고라 내 안 둘 데 업새라.」하는 시조로 화답했다 한다. 8년간 두 아들을 볼모로 보낸 애타는 마음을 무슨 말로 이를 수 있었으랴. 그래서 “나도 네가 그립기 그지없는데, 너라고 하여 그립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천 리나 멀리 떨어진 오랑캐 땅에서 얼마나 그립겠는가? 창 밖에서 슬피 울고 있는 저 접동새야 돌아가지 못한다고 하지를 말아라. 나의 안타깝고 그리운 심정을 둘 곳이 없구나” 하고 그 심회를 표현하고 있다. 봉림대군과 효종의 시조에서 효심과 자애심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슴 저린 것은 바로'국력'이요, 왕은 곧 나라였으니 국가 원수가 다시는 고립무원의 경지에 빠져 곤욕을 치름이다. ②는‘"아깝도다! 어찌 사람이 될까 보냐? 차라리 온몸에 날개라도 돋아나서 구만리장천 하늘로 푸드덕 솟아올라 아바마마가 계신 대궐을 굽어보았으면 하노라" 하는 시조로 중국 심양(瀋陽) 땅 머나먼 이역(異域)에서 고국산천(故國山川)과 부왕인 인조(仁祖)를 그리는 비통한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새처럼 마음대로 날지 못하는 신세를 원망하고, 차라리 새가 되어 훨훨 날아 고국산천과 어버이를 만나보고 싶다는 애절한 심정을 읊은 노래이다. 어제도 亂醉하고/ 유천군(儒川君)(선조(宣祖)의 증손) 어제도 난취(亂醉)하고 오늘도 또 술이로다. 그제 깨었던지 그끄제는 나 몰래라. 내일은 서호(西湖)에 벗 오마니 깰동말동 하여라.
"어제도 몹시 취했는데 오늘도 또 술이구나. 그저께 깨어 있었는지 그끄저께는 어쨌는지 알 수 없구나. 내일은 또 서호(경치가 아름다운 곳)에서 벗이 온다하니 깰 날이 있을지 어떨지 알 수 없구나" 하는 시조로 술은 우리 고시조의 소재로 많이 다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시조 종장에 “아니 먹고 어이리”, “아니 취코 어이리”, “아니 깬들 어떠리” 등등 술에다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속에 젖어 들어감을 노래한 것이 많다. 술에 취함으로써 작게는 세상살이의 어려움에서, 크게는 생의 무의미와 허무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경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조의 작가는 그끄저께도,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술에 취해 있으며 내일도 또 술에 취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있다. 술에 취해 있는 동안이 마음 편하고 행복스런 시간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연일장취(連日長醉)함으로써 모든 것을 망각(忘却하려고 하는 체념과 퇴폐(頹廢)의 노래로 볼 수 있다. 어버이 날 낳으셔/낭원군(朗原君)(본명 이간(李侃). 호 最樂堂. 효종의 당숙) 어버이 날 나흐셔 어질과쟈 길러내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 몸 나서 어질소냐 아마도 지극(至極)한 은덕(恩德)을 못내 가파 하노라. "어버이가 날 낳으셔서 어질게 키워내시니, 이 두 분 아니시면 내 홀로 어찌 어질 수가 있겠는가? 아마도 지극한 은덕을 못내 갚지 못할까 근심하노라" 하는 시조로 덕의 근본이라고 일컬어지는‘효’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어버이의 은혜는 자신이 자식을 가진 후에라야 비로소 알게 된다고 한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별로 없다고 한다. 그런 것 같다. 자식을 낳아서 길러 보아야 지난날 나를 키우면서 애쓰던 어버이의 심정이나 노고를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제 별로 부족함이 없는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으로도 제자리를 찾게 되면, 내게 오늘날이 있게 한 부모님의 남다른 은공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메이게 한다. 이제까지는 부모보다도 자신의 일을 우선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기도 한다. 이것은 개체의 발전을 위하여 어찌할 수 없는 조물주의 배려인가 보다. 나는 고생을 하더라도 자식이 잘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만족이고 여한이 없어 한다. 그래서 부모에게서 받은 신체발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근본이고, 출세하여 이름을 날리는 것이 효도의 궁극이라고 한 소학(小學)의 가르침이 오늘날에 있어서도 진리가 되는가 보다. 秋水는 天一色이요/숙종(肅宗) 추수(秋水)는 천일색(天一色)이오 용가(龍舸)는 범중류(泛中流)이라. 소고일성(簫鼓一聲)에 해만고지수혜(解萬古之愁兮)로다. 우리도 만민(萬民) 다리고 동락태평(同樂太平)하리라. “가을철 맑은 물은 하늘빛과 한가지로 푸르며 용을 새긴 임금이 타는 배는 물 가운데 떠 있구나./ 퉁소와 북소리가 어울리는 풍악 소리는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온갖 근심 걱정이 다 풀리는 구나/ 우리도 만백성과 함께 태평 성세를 즐겨 누리도록 하겠다.”고 하는 시조로 유유자적한 태평성대를 희원하는 마음이 잘 나타난 작품이다. 임금이 지은 시조로 규모가 크고 기상이 당당하다. 비록 한자어가 많아 우리말의 곡진한 맛을 느낄 수는 없지만 임금의 배포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초장은 강에 배를 띠우고 가을 경치를 감상하는 상황이다. 가을 물은 맑고 푸르기가 하늘빛과 한가지고 임금이 탄 용모양의 배는 강물 가운데로 흘러가는 중이다. 웅혼하고 도도한 분위기가 군주의 기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중장에는 피리소리 북소리가 한번 울리니 만고의 시름이 다 풀린다고 했다. 만고의 근심은 대개 늙어가는 근심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국정의 여러 가지 근심일 수도 있겠다. 그의 치세에는 유난히 당쟁이 심했던 만큼 시끄러운 국정이 그의 시름을 더했을 것이다. 종장은 임금의 소원을 토로한 것이다. 임금의 소원인즉 만백성과 더불어 태평함을 누리고 싶다는 것이다. 백성이 없이는 임금도 없기 때문이다. 군왕으로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싶은 마음이 담뿍 담겨 있다. 초장은 당나라 왕발의 시 <등왕각시서(滕王閣詩序)> 중 [(落霞與孤騖齊飛(낙하여고무제비) 秋水共長天一色(추수공장천일색)-저녁노을은 외로운 따오기와 나란히 날고, 가을 강물은 아득한 하늘과 같은 색이로구나]에서 따온 말이다. 揮毫紙面何時禿/대원군(大院君)(조선 26대왕 고종 생부) 휘호지면하시독(揮毫紙面何時禿)고 마묵연전필경무(磨墨硏田畢竟無)ㅣ라 뭇노라 뎌 사람아 이 글 뜯즐 능히 알고다. 기인(其人)이 완이이소(宛爾而笑)하고 유유이퇴(唯唯而退) 하더라. "붓을 종이에 내두르니 어느 때나 모지라질까? 먹을 벼루에 가니 끝내는 달아 없어지리라. 묻노라 저 사람아, 이 글의 뜻을 능히 아시겠는가. 그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알았다고, ‘네네’하며 물러가더라" 하는 시조로 붓은 종이에 휘둘러도 부드러워 쉽게 몽당붓이 되지 않지만 딱딱한 먹은 벼루에 갈면 이내 닳아 없어진다. 원만한 사람은 자신을 보전할 수 있으나 모난 사람은 몸조차 기동하기 어렵다는 뜻을 말하고 있다. 묵란(墨蘭)을 치며 때를 기다리던 불우한 시절을 암유하고 있다. 명심보감에 "입은 사람을 상하게 하는 도끼요. 혀를 베는 칼이니, 입을 막고 혀를 깊이 감추면 몸이 어느 곳에 있어도 편안할 것이다."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말 한마디 잘못한 것으로 인해서 돌이킬 수 없는 근심을 불러오게 되고, 재앙이 몸에 미치며, 심지어는 생명을 잃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니 말을 지극히 삼가 하여야 한다는 뜻이다. 위 작품 역시 유연한 붓은 종이에 휘둘러도 쉽게 닳아서 몽당붓이 되지 않지만, 딱딱한 먹은 벼루에 갈면 곧 닳아 없어지듯이 사람의 처세도 원만한 사람은 자신을 보전할 수 있지만, 모나게 구는 사람은 스스로 손해를 본다는 것을 깨우쳐주는 시조이다. 왕과 왕족은 일반 백성에 비하여 특수계층이기는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사상은 인간의 본성과 인간적인 계율이 일반 백성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즉, 강호한정(江湖閑情)과 인간정리(人間情理), 삶에 대한 윤리의식(倫理意識), 애닯은 정서, 효심에 대한 생각 등을 문학적 소재로 하여 그 감회를 표현하는 점에서는 대동소이(大同小異)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고시조 가운데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위의 숙종과 대원군의 작품은 거의 한문 문구에 토를 달아놓은 꼴이라서 아쉬움을 자아낸다. 어쩌면 시조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한시나 한문을 수용하여 본 시조의 모습을 잃고 있다. 세종대왕의 핏줄들인 왕과 왕족들이 세종대왕의 뜻을 거스른 것만 같아 마음이 허전하고 짠하다. 그래도 시조의 율(律)은 잃지 않았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가람문학 2020년도, 통권41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