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어디까지 체험해봤니? 카페부터 피트니스까지, 레이어드 홈
출처: 나라경제 2021년 03월호, 임지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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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 시대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공간은 다름 아닌 ‘집’이다.
온라인 수업과 재택근무, 랜선 홈파티 등으로 집의 기능이 다양화되기 시작해서다. 집의 기본적 주거 기능에 다양한 부가기능을 얹은 ‘레이어드 홈’이 새로운 주거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홈피트니스부터 슬세권까지 새로워진 집을 만나보자.
장기화하는 코로나19 속 길어지는 집콕 생활에 비대면 라이프스타일이 점점 자리를 잡아가며 주거 환경에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다. 집이 기존의 휴식처에서 재택근무, 취미생활, 운동공간, 자기계발 공간 등으로 점차 영역을 확대해나가고 있는 것. 이런 상황에서 ‘레이어드 홈(layered home)’이 주목받고 있다. 바이러스의 위협을 피해 공부·업무·운동·취미 활동은 물론 사교활동까지도 모조리 집에서 해결해야 하는 ‘집콕’ 시대가 도래한 까닭이다.
길어지는 집콕 생활에 세상을 집 안으로 들인 사람들
레이어드 홈은 집의 기본적인 기능에 취미생활 기능이 더해진 집을 뜻한다. 이미지 편집 프로그램 포토샵의 레이어처럼 다양한 기능이 집이라는 한 공간에 중첩된다. 주거 공간의 측면을 ‘레이어 1’이라고 한다면 학교 및 직장 생활이 이뤄지는 공간은 ‘레이어 2’, 다양한 문화공간을 집으로 끌어들인 영역은 ‘레이어 3’이 되는 식이다. 주거하는 사람이 원하는 기능이 다양할수록 집의 확장 가능성도 커진다. 세상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세상을 집 안으로 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배달 플랫폼, 온라인쇼핑 플랫폼, 커뮤니티 플랫폼이 떠오르는 가운데, ‘집’이야말로 지금 가장 부상하는 플랫폼으로 주목받고 있다.
레이어드 홈의 가장 기초적인 레이어는 아무래도 집 본래의 기능을 강조한 ‘기본 레이어’다. 반강제적으로 집에서 머무는 시간이 많아지자 휴식, 수면 등을 위한 안식처라는 본래의 집 기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여기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바로 ‘교체 주기 축소’와 ‘고급화’다. 코로나19 시대의 인테리어는 단순한 인테리어 소품 교체에 머무르지 않고 침대, 소파, 책상 등 사용 주기가 비교적 길었던 내구재까지 교체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어디가 망가지거나 이사 같은 큰 이벤트를 앞둔 경우가 아니라면 교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물건들에 돈을 쓰게 된 것이다. 집 안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내구재에서 얻는 효익이 그만큼 크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날 수 없는 대신 여행비로 가구를 구매하는가 하면 집을 아예 호텔처럼 꾸미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른바 집에서 ‘호캉스’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이런 추세에 힘입어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전동식 커튼과 블라인드가 불티나게 팔리는가 하면 음성제어시스템이나 그림 정기구독서비스, 로봇 집사 등도 인기를 얻고 있다.
사람들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 즉 사회적 고립을 아예 ‘놀이’로 승화하고 있다. 요즘 SNS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집콕 놀이나 집콕 요리, 집콕 데이트 등은 모두 집을 무대로 한다. 이와 관련해 집에서 즐기는 레트로 게임이나 미용기기 등 홈케어 제품들도 집콕족들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고 있다.
홈카페, 홈관, 홈짐 등 집의 무한변신은 무죄… 집에서 노는 ‘홈루덴스족’의 진화는 어디까지?
고도화된 사회일수록 집 안에서 하던 많은 활동이 집 밖으로 나간다. 학업과 근무는 물론 운동, 세탁, 미용 등이 지속적으로 외주화된다. 레이어드 홈의 두 번째 레이어는 집 밖에서 수행하던 활동들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응용 레이어’다. 코로나19는 외주화된 기능들을 다시 집으로 ‘컴백’하게 했다. 응용 레이어의 주요 화두는 새로운 공간 확보와 솔루션화다. 건설사에서 제공하는 알파룸은 천편일률적인 사용에서 벗어나 운동룸, 취미룸 등으로 변신한다. 거실은 홈시어터로, 주방은 홈카페로, 손님방은 작은 피트니스센터로 수시로 용도를 탈바꿈한다. 잡동사니들을 쌓아두거나 방치됐던 발코니 공간도 홈캠핑, 홈파티장으로 꾸미는 등 재조명받고 있다. 새로운 공간 확보가 어려운 경우에는 새로운 솔루션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설치하면 어떤 공간도 운동공간으로 변신 가능하도록 지원하는 ‘스마트 미러’가 대표적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뉴노멀 시대 집 역할의 확장에 대한 강의를 해온 유현준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겸 건축가는 이러한 레이어드 홈 트렌드에 공감한다. “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실내에서도 야외를 경험할 수 있는 ‘사적인 외부 공간’에 대한 니즈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 더 두드러질 것으로 보이고요.”
이제 집의 개념은 더 이상 ‘집’에 머무르지 않는다. 집이 곧 일터라는 ‘직주일체’, 슬리퍼 차림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역을 뜻하는 ‘슬세권’ 같은 신조어나 도보배송서비스 같은 신개념 서비스들은 집의 개념이 ‘집 근처’, ‘내가 사는 동네’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로 내부에 머무르던 집의 레이어가 외부로 확장된 것이다. 재택근무 시대에는 집과 지하철이 가까운 ‘역세권’ 개념보다 집 안에서 해소하지 못하는 부족한 것들을 집 근처에서 해결하는 ‘슬세권’ 개념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 집 근처에 기분 전환할 카페가 있는지, 급할 때 뛰어가 장을 볼 수 있는 작은 슈퍼마켓이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투자 자산으로서의 집에서 진짜 거주와 생활을 위한 집으로 변신하고 있다. 집이 변하면 집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든 소비 활동 역시 진화한다. 집은 곧 일상을 창조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미래 소비산업의 요람은 단언컨대 집이 될 것이라는 게 서울대 소비트렌드 분석센터의 전망이다. 재택근무, 온라인 수업 등으로 집 안에 콕 박혀 머무르는 ‘집콕족’과 홈(Home)과 놀이하는 인간을 뜻하는 ‘호모 루덴스(Homo Ludens)’가 합쳐진 ‘홈루덴스(Home Ludens)족’은 코로나19 이후 신인류로 불리고 있다. 집을 아늑하게 꾸며놓고 집 안에서 바깥 부럽지 않은 여가생활을 즐기는 데 집중하는 홈루덴스족, 이들의 진화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