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인가 일본에서는 잘 닦아놓은 청동투구처럼 윤기이 나는 뿔과 단단한 껍데기를 자랑하는 8㎝짜리 왕사슴벌레가 1억원에 팔려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검은 보석이라는 이 사슴벌레는 쌀독을 열면 쌀알 사이로 쏜살같이 사라지는 바구미와 같은 딱정벌레류다. 현존하는 곤충의 1/5가 딱정벌레류다. 그러므로 혹 길 가다 만난 곤충의 이름을 모르는데 등짝이 딱딱하다면 그냥 딱정벌레라고 해도 틀린게 아니다. 바구미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몸을 뒤덮은 단단한 딱지날개 등이 딱정벌레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바구미는 부채처럼 큰 귀만 없을 뿐 생김새가 영락없는 작은 코끼리며 전 세계에 4만여종이 있으며 곤충 중에서 가장 종이 많다. 우리나라에도 220여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긴 코는 식량 수급보다는 후손 양육에 도움이 된다. 긴 코를 이용해 낱알이나 잎과 줄기에 작은 구멍을 내서 그 속에 알을 낳기 때문이다. 덕분에 알에서 깨어난 애벌레는 구멍 속에서 안전하게 잎을 갉아 먹으면서 쑥쑥 자랄 수 있다.
우리나라에 흔한 쌀바구미는 견과류, 콩, 곡물, 종자, 옥수수 등에 서식한다. 전 세계적으로 농작물에 큰 피해를 주는 해충으로 분류하고 있다. 그래서 바구미는 혐오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결정적 이유는 씨앗이나 곡물 알갱이에 구멍을 뚫고 알을 낳은 다음 개구부를 밀봉하기 때문이다. 알이 부화하고 태어난 이 물컹한 애벌레는 씨앗 내부를 파먹고 자란다. 완전히 자란 성충은 곡물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즉시 결합하여 짝짓기한다.
일반적으로 땅에 사는 바구미는 대부분 날지 못한다. 숲의 느린 리듬과 영원할 것 같은 숲의 존재에 이미 적응했기 때문이다. 이동 거리도 1년에 10m 정도이며 사실 그 이상은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길을 걷다가 바구미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 숲이 정말 오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조림한 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는 살지 않는다. 걸어서 옆에 새로 생긴 숲으로 가기에는 너무 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날 수도 있다. 이런 종 중 가장 많은 곤충 하나는 '붉은 야자 바구미'다. 이 곤충은 때때로 먹이와 짝짓기를 할 장소를 찾기 위해 하루 반 마일 이상 비행한다고 한다. FAO(유엔식량농업기구)에서는 동남아시아에서 유래된 이 곤충을 전 세계적으로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해충으로 지정하고 있다. 이 곤충은 나무의 내부에서 성장 조직을 먹어 치워 침입 초기 단계에서 탐지가 어렵고, 다른 야자나무는 물론이거니와 국경을 넘어 아랍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특히 아랍 지역의 경우 세계 대추야자 생산의 77%를 차지하고 있다. 원주민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야자나무에 사는 바구미임에도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할 곤충으로 사랑받는 곤충도 있다. 에콰도르에 사는 '야자 바구미'는 야자나무를 파먹는 해충으로 유명하지만, 원주민들은 오히려 이 바구미를 키워서 단백질 공급원으로 삼고 있다고 한다. SBS에서 방영된 정글의 법칙에서도 야자 바구미의 애벌레를 구워 먹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바구미 중에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몫하는 바구미가 있다. 필리핀과 대만 남부에는 ‘보석 바구미’라는 곤충이 있는데 성인의 손으로 눌러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다고 한다. 표본을 만들 때 워낙 단단해서 핀이 들어가지 않고 휠 정도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곤충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표본을 수입하고 있다.
미국 앨라배마주의 엔터프라이즈(Enterprise)에는 '목화 바구미(boll weevil)'를 기념하는 기념물이 있다. 이 곤충은 1915년에 앨라배마에 유입되며 이 지역의 주산업이었던 목화를 초토화시켰다. 이 때문에 농부들은 땅콩으로 작물 재배를 전환했는데 다행히 대성공하였다. 그래서 주민들은 이 곤충 덕분에 목화 재배에만 의존하지 않고 다른 작물로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념물을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농작물을 땅콩으로 바꾸고 여러 용도로 만들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발명가이며 농업 경제학자였던 '조지 워싱턴 카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흑인이었다. 그래서 이런 황당한 기념물을 세운 것은 흑인인 카버의 공로를 알리기 싫어서 바구미 기념물을 세운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앨라배마는 흑백 차별이 매우 극심한 곳임을 고려하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통계상으로 앨라배마 흑인 남성의 30%가 옥살이 경험이 있고 이에 따라 평생 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라고 한다.
목화 바구미와 관련된 인종차별 역사는 또 있다. 미국 작가 패트릭 필립스의 '근원의 피(Blood at the root)'라는 책은 조지아주 포사이스 카운티에서 100여 년 전 벌어졌던 '인종청소'에 대해 쓴 책이다. 지금도 이곳은 백인들만 살고 있는데 그들은 흑인이 살지 않는 것은 백인 우월주의단체 KKK의 폭력 또는 목화 바구미라는 벌레의 창궐로 목화 농사가 안됐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이곳에는 목화 바구미도, KKK도 없었다. 작가가 파헤친 실상은 이랬다. 1912년 이곳에 사는 백인 여성이 성폭행당한 후 피살된 채 도랑에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그 뿌리였다. 대부분 백인인 마을 주민은 진실을 확인도 하지 않은채 흑인의 소행으로 단정 지어 버렸다. 백인들은 이를 기회로 흑인을 몰아내고 백인만이 사는 마을을 만들기 위해 폭력과 테러가 자행했고 결국 마을에서 흑인은 모두 '절멸(絶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