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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전서 제44권 / 부록(附錄) / 연보(年譜)
갑자년(1624, 인조2) 선생 77세
○ 2월 경인일 -6일- 에 상소를 올려 스스로에 대해 탄핵하였다.
그 당시에 역적 이괄(李适)이 부수(副帥)로서 거병(擧兵)하여 반란을 일으켜 경성(京城)이 계엄(戒嚴)하였다. 선생은 상소를 올려 늙고 병들어 곧바로 서울로 달려가서 문안하지 못한 상황을 진달하고 대죄(待罪)하였다.
○ 대가(大駕)를 일신역(日新驛)의 앞길에서 맞이하여 배알하였다.
역적의 군사들이 곧장 서울을 향해 내려와 상이 남쪽으로 행행(幸行)하였으므로 선생이 드디어 대가를 맞아 호위하고서 공주(公州)로 들어갔는데, 행조(行朝)의 상하 사람들이 선생을 의지하면서 중하게 여겼다. 며칠 동안 있은 뒤에 역적이 평정되었다는 장계(狀啓)가 들어왔다.
○ 경자일 -16일- 에 행궁(行宮)에 입시하였다.
선생이 나아가 아뢰기를,
“난역(亂逆)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어찌 오늘과 같은 경우가 있었겠습니까. 이후의 국사(國事)가 더욱 염려스럽습니다. 민심은 서둘러 수습하지 않아서는 안 되니, 종묘의 제향(祭享)과 상께서 드실 음식물로부터 별진상(別進上)이나 삭진상(朔進上)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효를 줄이거나 덜어서 백성의 힘이 펴지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로 돌아간 뒤 3, 4년 동안을 기한으로 하여 진상(進上)을 줄이거나 덜도록 하라.”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나라의 재용이 고갈되어 백관들의 녹봉을 산료(散料)로 지급하는 것이 또한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가 살고 있는 연산(連山)의 집은 여기에서 몇 리쯤 되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여기서 60여 리쯤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를 따라 상경하여 원자를 가르쳐 주었으면 좋겠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여기에 떨어져 남아 있는 것은 온편치 못한 듯하니, 성상의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다만 노병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머물러 있을 수는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 백성들의 요역(徭役)은 광해조 때에 비해서 겨우 10분의 2, 3밖에 안 됩니다. 그러나 광해조가 수탈한 뒤끝이어서 백성들의 힘이 이미 다한 데다가 지난해의 흉년으로 인해 백성들이 더욱 곤궁합니다. 선혜청(宣惠廳)의 팔두미(八斗米)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공세미(貢稅米)와 한꺼번에 징수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더욱 지탱해 낼 수 없어서 원망이 많습니다. 신이 그 폐단을 목격하고서 지난해 가을에 상소를 올려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오늘날 역적의 변란이 있자 공주(公州) 근처 7, 8개 고을의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키고는 신을 장수로 삼겠다고 청하기에, 신이 말하기를, ‘팔십 노인이 어떻게 감히 감당해 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께서 남쪽으로 피난하여 왔으니 편안히 집에 있을 수만은 없다. 마땅히 천안(天安)과 직산(稷山) 사이에서 영접해야 할 것이니, 그때 동행하면 좋겠다.’ 하고서, 곧바로 통문(通文)을 보내어 공주의 갑사(岬寺)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유생의 경우에는 그 모임에 찾아온 자가 많았으나, 백성들은 간혹 불손한 말을 하였습니다. 민심이 윗사람을 원망하고 있으니, 몹시 걱정스럽습니다.”
하니, 박지계(朴知誡)가 아뢰기를,
“토적(土賊)의 변란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박지계의 말 또한 옳으나 역적이 다시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승지 권진기(權盡己)가 아뢰기를,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 23일인데, 이날은 바로 패일(敗日)입니다.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자, 박지계가 아뢰기를,
“마땅히 음양가(陰陽家)들을 모아서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는 아뢰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임금은 마땅히 사람이 해야 할 일을 닦을 뿐입니다. 음양가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나라의 재용이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지난 가을에 거둬들인 선혜청의 쌀 4두(斗)를 절약해서 쓴다면 그래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춘등(春等)의 쌀 4두를 감면할 수 없겠습니까? 그리고 종묘의 제사에 쓰는 고니의 값은 무명 2, 3동(同)에 이르고 있습니다. 종묘의 제사에 구태여 고니를 쓸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고니는 이미 없애고 다른 제물을 대신 쓰고 있다.”
하였다.
○ 아들 반(槃)이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당시에 대가(大駕)가 공주에 머물러 있으면서 과거 시험을 설행하여 선비를 뽑은 것이다.
○ 대가를 따라서 서울로 돌아왔다.
○ 무신일 -24일- 에 상의원 정(尙衣院正)에 제수되었는데, 사업(司業)을 그대로 겸임하였다.
호조에 특별히 명해 종과 말과 양곡을 지급해 주라고 하였다.
○ 3월 임신일 -18일- 에 경연에 입시하였다.
상이 공주에서 서울로 돌아와 비로소 경연을 열고서 선생을 인견하여 진강(進講)에 참석하도록 하였다. 상이 《논어》의 남인유언장(南人有言章)을 읽었는데, 그 집주(集註)에 ‘무당과 의원이 비록 천한 일이나 더욱 항심(恒心)이 없어서는 안 된다[巫醫雖賤役 尤不可以無恒]’는 말이 있었다. 이에 선생이 아뢰기를,
“이곳에서의 ‘우(尤)’ 자는 신의 생각에는 ‘유(冘)’ 자를 잘못 쓴 것으로 보입니다. 유(冘)는 ‘유(猶)’ 자의 고자(古字)인데, ‘우(尤)’ 자와 ‘유(冘)’ 자가 서로 비슷한 까닭에 잘못 쓴 것입니다. ‘유(冘)’ 자를 ‘우(尤)’ 자로 쓴 곳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중용혹문(中庸或問)》, 《역학계몽(易學啓蒙)》 등에 보이는 것이 한둘이 아닙니다. 《역학계몽》의 경우에는 선유(先儒) 이황(李滉)이 ‘유(冘)’ 자로 바꿔 썼습니다. 문맥으로 볼 때, 만일 ‘우(尤)’ 자로 썼을 경우 그 뜻은 대개 ‘성인의 도도 오히려 항심이 없어서는 안 되지만, 무당과 의원의 경우에는 더욱더 항심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 되니, 이치에 해가 됨이 큽니다.”
하니, 상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귀(李貴)가 아뢰기를,
“당초에 역적의 우두머리를 베어 오면 논공행상한다는 어명이 있었는데, 지금 대간(臺諫)이 도리어 기익헌(奇益獻)과 이수백(李守白) 등에게 죄주기를 청한 것은 신의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아무리 대간의 말일지라도 따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이귀의 말은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그러나 근일에 대간이 이 일에 대해 논하면서 오늘은 파직을 청하고 내일은 고신(告身)을 빼앗기를 청하고 또 그 이튿날은 귀양 보내기를 청하여, 일정한 견해가 없습니다. 이는 모두가 상께서 대간의 말을 듣지 않은 결과 서로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버티면서 결정하지 못한 까닭에 이처럼 어지럽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당시에 사면령(赦免令)을 내리려고 하였기에, 상이 판의금부사 이정귀(李廷龜)에게 이르기를,
“죄인들을 속히 가려 뽑아서 아뢰도록 하라.”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죄인들을 모두 방면(放免)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어떻게 모두 방면할 수 있겠습니까. 중죄인은 양이(量移)해 주고 가벼운 자는 모두 풀어 주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광해조 때의 후궁 및 궁녀의 경우는 모조리 석방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옳습니다. 저 부인네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권 숙의(權淑儀)가 지금 연산(連山)에 정배(定配)되어 있는데, 그 어려움과 고생이 불쌍합니다.”
하니, 이귀가 아뢰기를,
“죄인이 귀양살이하는 것은 국가의 명맥(命脈)에 손상이 있을 것입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그가 지은 죄로써 죄를 주는 것인데 국가의 명맥에 무슨 손상될 바가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오늘날의 고역(苦役)으로는 조군(漕軍)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한 몸을 보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족과 이웃까지도 그 피해를 입어서 이리저리 떠돌면서 제자리를 잃는바, 보기에 아주 딱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해변의 고을은 임사선(賃私船)을 바로 바치도록 하고 산간의 고을은 작목(作木)으로 바치도록 하며, 아산창(牙山倉)에 실어다 바치는 11개 고을도 임사선을 바치도록 한다면, 조군의 폐단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 여깁니다. 10여 년 전부터 누차 해운판관(海運判官)을 적임자에게 맡기지 않았던 탓에 처음 조운(漕運)할 적에는 조졸(漕卒)을 모조리 승선케 하였으나, 두 번째 조운할 적에는 쌀을 싣는 배가 많지 않아 조군의 절반 이상을 쓸 곳이 없게 되자 판관이 사사로이 그들에게 쌀을 바치도록 하여 많게는 수백 석이나 되는 것을 사사로이 다 쓰고 있으니, 너무도 형편없는 짓입니다. 이제 마땅히 별도로 과조(科條)를 세워 금년에 쓰고 남은 조졸을 명년에 승선토록 하여 돌아가면서 차례대로 승선하게 한다면, 그 역(役)이 가벼워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기묘일 -25일- 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제수되었으며, 겸직은 전과 같았다.
○ 경진일 -26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 세 차례 정고(呈告)하여 말미를 받았다.
○ 4월에 명(命)에 숙배하고는 다시 아뢰어서 인피(引避)하였다.
사헌부에 내린 전교가 온당치 않다는 것과 사헌부가 경연 석상에서 중신(重臣)에게 지적당하였다는 이유에서였다.
○ 정사(呈辭)하여 선묘(先墓)에 귀성(歸省)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말과 요전상(澆奠床)을 지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 계축일 -30일- 에 하직 인사를 하고 남쪽으로 돌아갔다.
상이 선온(宣醞)하고, 납제(臘劑)를 하사하였다. 원자가 성상의 하교로써 전하기를, “되도록이면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 5월 계유일 -20일- 에 상소를 올려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상소를 보고 그대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체득해서 속히 올라오도록 하라.” 하였다.
○ 6월 갑진일 -22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며, 겸하여 열세 가지 일에 대해서 진달하였는데, 상이 따스한 내용의 비답을 내려 본직(本職)을 체차하였다.
그 조목은 바로 대본(大本)을 세우고, 구업(舊業)을 회복하고, 홍범(洪範)을 준행하고, 《소학(小學)》을 강론하고, 성효(聖孝)를 다하고, 사전(祀典)을 공경하고, 구족(九族)을 친히 하고, 군신(群臣)의 뜻을 체득하고, 청정(聽政)을 친히 하고, 민폐(民弊)를 개혁하고, 선혜청(宣惠廳)을 혁파하고, 군정(軍政)을 닦고, 금위(禁衛)를 엄하게 하는 것이었다.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상소를 보았다. 그대의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충성심을 가상하게 여긴다. 조목별로 진달한 열세 가지 일은 실로 몸을 수행하고 폐단을 구제하는 방책인바, 내가 어찌 감히 명심하고서 힘써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본직을 체차하는 일은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무더위에는 올라오기가 어려울 것이므로 우선은 마지못해 따라 준다. 그대는 가을이 와 서늘해지기를 기다려서 올라와 간절히 바라고 있는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이성징(李聖徵), 신경숙(申敬叔), 이옥여(李玉汝), 오여익(吳汝翼) -윤겸(允謙)-, 정경임(鄭景任) -경세(經世)-, 조비경(趙飛卿) -익(翼)-, 정자용(鄭子容) -홍명(弘溟)-, 최자겸(崔子謙), 장지국(張持國)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초에 영월 군수(寧越郡守) 박지계(朴知誡)가 상소를 올려 사묘(私廟)를 건립하여 예묘(禰廟)로 삼고 삼년복(三年服)을 입으며, 신하들은 종복(從服)을 입기를 청하였으며, 또 이의길(李義吉)이란 자가 있어 박지계와 서로 잇달아서 상소를 올려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추숭(追崇)하자는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선생이 향리로 돌아갈 때를 당하여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가 예조 판서로 있으면서 와서 전별하면서 말하기를, “사묘에 대한 논의가 일치되지 않는데, 상께서는 그에 대한 시비(是非)를 알고자 하신다. 이에 이 예에 대해서 밝힐 수 있는 자들의 설을 모아 보여 드리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선생이 경사(經史) 및 선유(先儒)들의 설에 의거하여 조목조목 논변하여 한 통을 만들고는 이를 편지에 써서 제공(諸公)에게 보내어 보여 준 것이다.
선생은 이미 제공에게 보낼 편지를 지어 놓고는 이어 이 예에 대해 논저(論著)한 것과 주고받은 편지를 차례대로 편차하여 기록한 다음 《전례전서(典禮全書)》 -어떤 본에는 《전례문답(典禮問答)》이라고 되어 있다.- 라고 이름 붙였다. 그 뒤에 유고(遺稿)를 간행할 적에 선생의 증손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문정공(文正公) 우암(尤菴) 송시열에게 물어본 다음 보관해 두고서 간행하지 않았다.
○ 8월 기유일 -27일- 에 특별히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승진되었다.
좌의정 윤방(尹昉), 예조 판서 이정귀가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오늘날의 현자(賢者)로는 김장생과 장현광(張顯光)이 있는데, 모두 아직 등용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이에 이때에 이르러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 9월 경신일 -9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으며, 겸하여 소회를 진달하였다.
당시에 사헌부에서 내노(內奴)를 잡아 가두고서 죄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일이 자전(慈殿)과 관계되었으므로 상이 엄한 전지를 내려 준엄하게 책하였다. 정원에서 그 전지를 봉환하자 또 추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상소 가운데에 그 일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 대략에,
“폐조(廢朝) 때 인심을 잃게 된 원인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내노로 인한 폐단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법관(法官)이 내노들을 다스렸다는 일을 어찌 들어 볼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날에는 위에 밝고 슬기로운 전하가 계신 까닭에 아래에 법을 집행하는 대관들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도리어 그들을 준엄하게 질책하셨습니다. 신은 그것이 진실로 자전의 뜻을 받들려는 데에서 나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긴 합니다. 그러나 전하의 이번 거조는 도를 밝히는 의리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대각(臺閣)에서 불법을 저지르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수수방관한다면, 장차 그런 대각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리고 승지들이 그저 임금의 잘못된 거조를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서 잘못을 바로잡는 도리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저 명령을 출납하기만 하는 것을 공경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사알(司謁) 하나만 두면 족할 것인바, 어찌 구태여 승지를 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비록 작은 잘못이기는 하지만, 그 병통의 근원을 찾아보면 전적으로 사사로운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다. 만일 이를 작은 일이라 생각하여 가벼이 여기시면, 마음에서 발생한 것이 정사에 나타나고 정사에 나타난 것이 나랏일에 해가 될 것이니,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반드시 병의 뿌리가 있는 곳을 정밀하게 살피시되, 터럭 한 올만큼이라도 제거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통렬하게 징계하여 완전히 끊어 버려서 그런 조짐이 자라나지 못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소장을 보니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잘 체득하여 굳게 사양하지 말고 되도록 속히 올라오라. 상소 말미에서 진달한 일에 대해서는 유념하겠다.”
하였다.
○ 신유일 -10일- 에 유지(有旨)를 내려 특별히 명소(命召)하였다.
사직하는 상소를 본도에 바쳤으나 미처 계문(啓聞)하지 못한 탓에 명소하는 유지를 내려 말을 타고 올라오게 한 것이다.
○ 10월에 소명에 나아갔다.
○ 임진일 -11일- 에 주강(晝講)에 입시하였다.
상이 바야흐로 《맹자(孟子)》를 강하고 있었는데, 등문공(滕文公)이 “제(齊)나라를 섬겨야 합니까? 초(楚)나라를 섬겨야 합니까?”라고 묻는 대목에 이르러 선생이 아뢰기를,
“등(滕)나라는 작은 나라로서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어서 아무리 왕정(王政)을 시행하려고 해도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께서 왕정을 시행하려고만 하신다면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으십니까?”
하자, 상이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이 응교(應敎) 이윤우(李潤雨)가 아뢴 말을 인하여 나아가 아뢰기를,
“소신이 지난날 수령으로 있을 때 비록 크게 죄를 저지른 일이 없는데도 암행어사(暗行御史)가 도내에 와 있으면 마음에 꺼려지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제 암행어사를 자주 내려 보낸다면 수령이 제멋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누락된 전결(田結)이 매우 많아 민간의 요역(徭役)이 공평하지 못합니다. 만일 양전(量田)을 한다면 요역이 공평하게 될 것입니다. 민심 또한 이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소신이 시골에 살면서 살펴보니, 대동(大同)에 따른 요역이 과중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많으니, 시행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시발(李時發)이 막 양호(兩湖)에서 올라왔으니 반드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시발이 아뢰기를,
“백성들이 과연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청주(淸州)의 백성들은 무명으로 바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청주는 뱃길이 조금 먼 까닭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으로는 무명으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들이 더욱 지탱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겠습니까? 민간에서는 무명 1필의 값이 쌀 10말의 값이며, 전라도의 경우에는 많게는 12, 3말에 이르고 있는데, 오늘날 조정에서 정한 바는 단지 5말뿐입니다. 이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한다면 백성들이 반드시 곤궁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이시발이 아뢰기를,
“그러나 대동법을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일은 본디 백성들을 위해서 만든 것인데, 지금 백성들의 원망이 이와 같으니, 혁파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 정유일 -16일- 에 원자 강학관(元子講學官)을 겸임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공조 참의 김장생은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서 여러 차례 은혜로운 명을 입어 병을 무릅쓰고 올라왔습니다. 그러니 그로 하여금 경연에 출입하게 해야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원자를 보도하게 하면 도움이 됨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전에 원자의 요속(僚屬)으로 계하하였으나, 지금은 품계가 올라갔으니 그대로 요속이라고 칭하는 것은 온당치 않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 칭호를 고치고서 그로 하여금 강하는 데 참석하게 하라. 내가 때때로 인견하고자 하였으나, 근래에 경연을 드물게 연 탓에 지금까지 지체되었다.”
하니, 이조가 아뢰기를,
“칭호를 개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신들에게 의논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강학관으로 계하하라고 청하였다.
○ 체차되어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 이사로(李師魯) -덕수(德洙)- 에게 편지를 보냈다.
안방준(安邦俊)과 서로 의논하여 중봉(重峯)의 《동귀봉사(東歸封事)》를 간행하도록 권하였다.
○ 11월에 상소를 올려 향리로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그대가 올린 상소를 보니,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그대가 비록 늙기는 하였으나 근력이 아직 쇠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물러나 쉴 생각을 하지 말고 원자를 가르쳐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을축년(1625, 인조3) 선생 78세
○ 1월 무오일 -9일- 에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에 제수되었다.
○ 정축일 -28일- 에 특명으로 인해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되었다.
세자(世子)를 책봉한 데 대한 은혜를 널리 펴기 위해서였다. 상이 선생과 오윤겸(吳允謙), 정경세(鄭經世), 정엽(鄭曄)에게 가자(加資)를 직접 받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세자를 가르친 공을 기록한 것이다.
○ 2월 신사일 -2일- 에 상소를 올려 새로 받은 자급을 사양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경들이 원자를 가르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므로 가상하게 여기면서 탄복한 지 오래되었다. 경은 사양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 을유일 -6일- 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제수되었다.
○ 계사일 -14일- 에 정사(呈辭)하여 선묘(先墓)에 가토(加土)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요청하였다.
상이 말미를 주고 말과 요전상을 지급해 주라고 명하였다.
○ 을미일 -16일- 에 상소를 올려 사례하면서 겸하여 소회를 진달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신이 한 번 서울을 떠나고 나면 다시는 성상의 얼굴을 뵈올 길이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더욱 성학(聖學)에 힘쓰시고 더욱 성덕(聖德)을 더하소서. 그리하여 마음가짐을 정대히 함으로써 치우치거나 얽매이는 사의(私意)를 끊고, 과감한 결단으로써 정사를 제재하시어 우유부단한 잘못을 경계하시며, 사람을 임용함에 있어서는 오직 실지(實地)를 취하여 허위에 현혹되지 마시고, 아랫사람을 대하면서는 성의를 다하시되 겉으로 드러내 보이려고 하지 마소서. 그리고 또 귀에 거슬린다고 하여 충언을 싫어하지 말고 고요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들을 가벼이 여기지 말며, 널리 여러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는 데 힘쓰고 정밀하게 재량하고 선택하는 데 힘쓰며, 선입견을 고집하여 많은 사람의 공의를 물리치지 말고 상규(常規)에 얽매여서 사기(事機)를 놓치지 말아서 큰 뜻을 분발하여 지극한 다스림을 이룩하소서. 그럴 경우 신은 설령 초야에 묻혀 죽더라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가상하게 여기면서 비답하기를,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물러나 돌아갈 생각은 하지 말고 선영(先塋)에 소분(掃墳)한 뒤에 곧바로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 무술일 -19일- 에 동문(同門)의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상소를 올려 스승의 원통함을 신원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보다 앞서 동인(東人)들이 구봉(龜峯) 선생을 죽이고자 하여 안가(安家)를 사주하여 송사(訟事)를 일으키게 하고는 법을 어기고 천인(賤人)으로 돌아가게 하였는데, 이때까지도 신원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선생이 병조 판서 서성(徐渻), 대사헌 정엽(鄭曄), 청천군(菁川君) 유순익(柳舜翼), 제용감 정(濟用監正) 심종직(沈宗直)과 더불어 연명(聯名)하여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의 대략에,
“신들은 어려서 송익필(宋翼弼)에게 수학하였습니다. 송익필의 문장과 학식은 한 시대에 뛰어나 이이(李珥), 성혼(成渾)과 더불어 서로 학문을 강마하는 벗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발(李潑)과 백유양(白惟讓) 등이 이이와 성혼을 원수처럼 미워한 나머지 송익필까지 기어이 사지로 몰아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송익필의 아비인 송사련(宋祀連)은 고(故) 재상 안당(安塘)의 서얼 누이동생의 아들입니다. 송사련의 어미는 이미 양민(良民)이 되었고 송사련은 또 잡과(雜科)에 급제까지 하였으니, 2대를 연이은 양역(良役)입니다. 그리고 또 ‘60년의 연한을 경과한 자는 환천(還賤)할 수 없다.’는 것이 법전(法典)에 분명하게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발 등은 기회를 틈타 사주하여 법을 무시하고 환천시켰습니다. 무릇 법이란 것은 역대 조정의 금석(金石)처럼 귀중한 전범입니다. 송사련이 아무리 사류(士類)들에게 죄를 얻었고 송익필이 아무리 당시 사람들의 노여움을 범했다 할지라도, 어떻게 한때의 개인적인 노여움으로 인해 역대 조정의 금석 같은 전범을 왜곡시키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마음을 통쾌하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선조대왕이 전에 서쪽으로 몽진하였을 적에 송익필의 억울함을 호소함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원한을 풀어 줄 단서를 발하였으나, 형관(刑官)이 성상의 뜻을 받들 겨를이 없었던 탓에 ‘우선은 서울로 돌아가 판결하겠다.’는 내용으로 회계(回啓)하였습니다. 그 뒤에 신의 스승 또한 죽고 나자 다시는 하소연하지 못하고 마침내 덮어 둔 채 오늘에 이른 것입니다. 돌아가신 스승은 고금을 널리 통한 학문을 가지고서도 살아서는 미처 임금의 인정을 받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노비라는 비천한 이름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신들만의 지극히 마음 아픈 일이겠습니까. 국법이 무너진 것에 대해서도 식자들이 깊이 걱정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해조(該曹)에 내려 회계하게 하라는 내용으로 비답을 내렸다.
○ 기해일 -20일- 에 조정을 하직하였는데, 세자가 특별히 알현하게 하였다.
세자가 유시하기를, “지체하여 머물러 있지 말고 소분한 뒤에는 곧바로 올라오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 4월 임진일 -15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상소에서 한 말을 잘 보았다.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니 속히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5월 경오일 -23일- 에 경연 특진관(經筵特進官)으로 계하(啓下)하였다.
○ 이옥여(李玉汝)에게 편지를 보냈다.
구봉 선생을 신원하는 일에 대해서 논하였다. 또한 김류(金瑬)에게도 편지를 보냈는데, 그 일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 6월에 최양포(崔楊浦) -전(澱)- 문집의 발문(跋文)을 지었다.
○ 7월 병자일 -30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상소를 보았다.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니 경은 굳게 사직하지 말고 되도록 속히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 10월에 손자 익후(益煦)가 출생하였다.
병인년(1626, 인조4) 선생 79세
○ 1월에 신경숙(申敬叔)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 당시에 상이 계운궁(啓運宮)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이 입을 복제(服制)에 대해 혹자는 부장기(不杖期)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혹자는 장기(杖期)를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고, 혹자는 삼년복(三年服)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조정의 의논이 분분하였는데, 끝내는 장기를 입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신공(申公)이 우상으로 있으면서, 병환이 위중해 창졸간에 어찌될 염려가 있자 편지를 보내어서 서로 물었다. 이에 선생은 답장을 보내면서 주자(朱子)가 말한 ‘들어와서 대통(大統)을 이은 자는 소생부모(所生父母)를 위해서 부장기를 입어야 한다.’는 설을 인용하여 장기를 입는 것은 예에 있어서 근거가 없음을 밝혔다.
○ 2월에 서울로 들어갔다.
상이 상중(喪中)에 계시므로 대궐에 나아가 진위(進慰)하기 위해서였다.
○ 임진일 -19일- 에 정사(呈辭)하였다. 세자가 여러 차례 사람을 시켜서 안부를 물었다.
노병(老病)이 더욱 심해져서 조정의 반열에 나아갈 수가 없다는 내용으로 체차해 주기를 청하였기 때문이다.
○ 세 번 정사하여 체차되었다. 행 호군(行護軍)에 제수되었다.
○ 계묘일 -30일- 에 남쪽으로 돌아갔다.
정원이 아뢰기를,
“김장생이 오늘 내려가려고 한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덕이 높고 노성한 사람으로는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니 그가 조정에 있다면 보탬이 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비록 산림(山林)에 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불러와야만 마땅합니다. 지금 이미 올라왔다가 갑작스럽게 돌아간다고 하니 성상의 현인을 탐내고 덕 있는 이를 좋아하는 도에 있어서 그가 가고 머무는 것을 임의대로 하게 하여 떠나간 것조차 몰라서는 안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들의 말이 옳으니, 만류하여야만 한다.”
하였다. 정원이 상의 명으로 글을 보냈으나, 선생의 행차는 이미 한강을 건넌 뒤였다.
○ 3월에 상소를 올려 사례하고 사직하였으며, 이어 진계하는 말을 덧붙여 권면하였다.
지극한 정을 억제하여 성궁(聖躬)을 보호하는 도에 대해서 두루 말하였으며,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를,
“신은 오늘날의 변례(變禮)에 대해서 대충 본 바가 있어서 이미 전일에 올린 소장에서 진달드렸습니다. 이에 감히 애통한 가운데에 계시는 전하께 다시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때 계운궁의 복제를 끝내 장기(杖期)로 정하였으므로 상소 가운데에서 언급한 것이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이 올린 상소를 보고서는 지극한 정성을 잘 알았다. 경이 나의 뜻을 체득하지 않고서 곧바로 돌아갔기에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상소에서 한 말은 유념하겠다.”
하였다.
○ 황산서원(黃山書院)을 건립하였다.
황산은 양호(兩湖)가 교차하는 지점에 처해 있고 강산(江山)의 경승(景勝)이 있으며, 또 계상(溪上)과 아주 가깝다. 병오년(1606, 선조39)간에 문인(門人) 송흥주(宋興周), 최명룡(崔命龍) 등이 선생에게 여쭈어 보고 서당(書堂) 몇 칸을 지어 강학(講學)하는 장소로 삼고자 하였는데, 선생이 가서 그 지역을 살펴보고는 그들로 하여금 짓게 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동인(東人) 무리들이 저지함으로 인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서 서원을 건립하고 율곡(栗谷)ㆍ우계(牛溪) 두 선생을 향사하였다. 이에 대한 내용은 송명보(宋明甫) -준길(浚吉)-, 이사심(李士深) -후원(厚源)- 에게 보낸 답장에 자세하게 나온다. 선생이 돌아가신 뒤에 또 선생을 아울러 향사하였다. 그 뒤에 정암(靜庵)ㆍ퇴계(退溪) 두 선생 및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앞뒤로 향사되었으며, 죽림서원(竹林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았다.
○ 여름에 최자겸(崔子謙)에게 답장을 보냈으며, 겸하여 장지국(張持國)과 정자용(鄭子容)에게도 보여 주었다.
최공(崔公)이 인조가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에 대해서 고(考)라고 칭하고 계운궁의 상에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논의를 주도하면서 그 차본(箚本)을 보내고 편지를 보내어 가부(可否)를 물어 왔으므로 선생이 답장을 보내어 조목별로 밝힌 것이다.
○ 7월 임오일 -12일- 에 용양위 부사직(龍驤衛副司直)으로 옮겨 제수되었다.
○ 8월 신유일 -21일- 에 상소를 올려 시사(時事)에 대해 논하였다.
당시에 조정의 의논이 군액(軍額)이 텅 비었다는 이유로 호패법(號牌法)을 강구해 시행하고자 하여 사목(事目)을 반포하고 어사(御史)를 파견하였는데, 선생은 ‘변방의 걱정이 한창 급하니 믿을 것이라곤 인심뿐이며, 또 백성들을 소요시키는 것은 선후와 완급의 순서를 크게 잃은 것이다.’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앞서 이미 경연 석상에서 직접 진달하였으며, 지금 또 상소를 올려 진달한 것이다.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그 뜻을 잘 알았다. 경의 나라를 걱정하는 정성을 가상하게 여긴다. 진달한 어사(御史)를 파견하는 일은 이미 뒤로 물리는 것으로 정하였다.” 하였다.
○ 12월에 상소를 올려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차자에서 한 말이 사실이 아님을 밝혔다.
가을쯤에 이공(李公)이 찾아와서 사묘(私廟)의 전례(典禮)에 대해 말을 나누었는데, 이공의 소견은 본디 선생의 소견과 상반되었다. 그러므로 논변한 것이 아주 많았으나 끝내 선생의 말을 듣지 않고 가 버렸다. 이때에 이르러서 또 차자를 올려 전례에 대해 논하면서 선생이 가설(假說)해서 한 말을 끌어 대어 자신의 설을 증명하였다. 이에 선생이 상소를 올려 밝힌 것이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의 소장을 보고 경의 뜻을 잘 알았다.” 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선생 80세
○ 1월에 사묘의 칭호에 대해 논하였다. 한사앙(韓士仰)에게 답장을 보냈다.
○ 정해일 -19일- 에 양호 호소사(兩湖號召使)에 제수되었다.
상이 유지(有旨)를 내리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오랑캐들이 변경을 침범해 들어와 의주가 함락되었으며, 잇달아 선천(宣川)과 정주(定州)가 함락되었다. 만일 오랑캐들이 양서(兩西) 지방을 꿰뚫고 지나와 복심(腹心)이 되는 지역까지 깊이 쳐들어오게 된다면 나라를 회복시킬 바탕이 오로지 남방(南方)에 있으니 걱정거리를 미리 염려하는 방도에 있어서 잘 헤아려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에 경을 호소사로 삼고 인신(印信)을 내려 보내니, 경은 의병(義兵)들을 규합하여 그들을 거느리고 와서 근왕(勤王)하라.” 하였다.
○ 경인일 -22일- 에 삼가 유지를 받들고는 곧바로 장계를 지어서 올린 뒤 가까운 경계 지역으로 가서 머물러 있었다.
그 장계의 대략에, “지금 성명(成命)을 받들었습니다. 신이 비록 늙어 귀가 먹기는 하였으나 어찌 감히 온 마음과 온 힘을 다하여 전하께서 맡겨 주신 뜻에 부응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곧바로 의병들을 불러 모아서 온 힘을 다하다가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입니다.” 하였다.
○ 신묘일 -23일- 에 막부(幕府)를 세우고 양호(兩湖)에 격문(檄文)을 띄웠다.
선생이 이미 장계를 지어 올린 다음 드디어 전 부사(府使) 송흥주(宋興周)를 뽑아 부사(副使)로 삼고, 전 지평(持平) 윤전(尹烇)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고, 전 군수(郡守) 송이창(宋爾昌)과 전 박사(博士) 송국택(宋國澤), 처사(處士) 유즙(柳楫)을 참모(參謀)로 삼고, 전 별좌(別坐) 안방준(安邦俊), 전 현감 고순후(高循厚)를 의병장(義兵將)으로 뽑았다. 그러자 제공이 모두 의병을 일으켜 호응하였다. 또 전 현감 기정헌(奇廷獻)ㆍ박지효(朴之孝)ㆍ정민구(鄭敏求), 전 별제(別提) 신필(申滭), 진사 유평(柳玶)ㆍ박충렴(朴忠廉)ㆍ구영(具瑩), 유학(幼學) 고부민(高傅敏)ㆍ유술(柳述)ㆍ윤경(尹熲)ㆍ김해수(金海壽)ㆍ이복길(李復吉)ㆍ김준업(金峻業) 등을 유사(有司)로 삼은 다음, 의병과 군량 및 병기를 불러 모으고는 이들을 시켜 개유(開諭)하고 수합(收合)하게 하되, 절대로 억지로 끌어 모아 백성들을 소요시키지 말도록 하였다. 그러자 관군(官軍) 외에 충의위(忠義衛)나 교생(校生), 한유인(閑遊人) 등이 본관(本官)과 더불어 상의하고서 편의에 따라 수합하고 모집하였는데, 산행(山行)이나 사포수(私砲手) 등은 모두 뽑게 하였다. 그 당시에 안방준은 보성(寶城)에 살고 있었는데 선생이 편지를 보내어 면려하였으며, 고순후는 광주(光州)에 살았는데 광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제공의 집에도 오히려 그 당시의 문이(文移)가 전해졌으니, 선생이 조치한 바를 대략 알 수가 있다. 양호 지방에서 의병장이나 유사로 차정(差定)된 자들이 이에 그치지 않을 것인데, 다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 2월에 세자(世子)를 공주(公州)에서 맞아 알현하였다.
당시에 상이 묘사(廟社)와 자전(慈殿)을 받들고 강도(江都)로 행행하였으며, 세자가 분조(分朝)하여 남하하였다. 선생은 끌어 모은 군량과 병기를 가지고 행조(行朝)에 두루 나누어 주었으며, 몸소 분조에 나아가 의병들을 규합하여 거느렸다. 그러자 세자가 곧바로 불러 면대하고는 아주 극진하게 위로하고 유시하였다.
○ 세자를 호종하여 전주(全州)에 이르렀다.
어느 날 저녁에 오랑캐들이 이미 임진강(臨津江)을 건넜다는 거짓 경보가 들려오자, 분조에 있던 여러 재신(宰臣)들이 어찌할 줄 모르면서 세자를 받들고 영남의 바닷가로 떠나가고자 하여 인심이 무너져 토붕와해될 형세가 현저하였다. 이에 선생은 먼저 체찰사(體察使)를 만나서 그것이 좋은 계책이 아님을 역설하고, 또 면대를 청하여 이해(利害)를 조목조목 진달하였다. 그러자 세자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렇다.”고 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와언(訛言)이 저절로 잠잠해졌다.
○ 호남(湖南)에서 청주(淸州)로 가서 여러 의병을 불러 모아 장차 강도로 들어갈 것을 기약하였다.
당시에 민성휘(閔聖徽)가 호남백(湖南伯)으로 있었는데, 선생이 잇달아 군사(軍事)에 관한 일로 편지를 보내어 상의하였다. 그 가운데 한 편지에 이르기를,
“저는 여산(礪山)에 도착하였으나 큰비로 인해 길이 막혀 이틀 동안 머물러 있다가 오늘에야 은진(恩津)을 경유해서 청주로 향하였습니다. 여러 의병을 모아 직접 거느리고서 근왕(勤王)하라는 명에 응할 것입니다.”
하였다.
○ 3월 을해일 -8일- 에 행재소(行在所)로 나아갔다.
2월 보름 이후부터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는데, 호소사(號召使)가 모집한 군병은 출발시키지 말라는 명이 있음으로 인하여 선생은 드디어 문인(門人)들과 더불어 강도(江都)로 달려간 것이다.
○ 경진일 -15일- 에 행궁에 나아가 배사(拜辭)하고 드디어 입대(入對)하였다.
상이 전교하기를,
“경은 늙고 병든 사람으로서 이처럼 나라가 위급한 지경을 당하여 나랏일에 온 정성을 다하고 있으니, 내가 몹시 가상하게 여기며 기쁘게 여긴다.”
하자, 선생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망극합니다. 신은 늙고 병들었으며 재주도 엉성해서 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는 탓에 한갓 왔다 갔다만 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오랑캐들의 형세가 조금은 느슨해졌으니, 직명(職名)을 풀어 주어 향리로 돌아가서 죽을 수 있게 해 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이 아직도 우리나라 경내에 머물러 있으니, 그대로 직임을 맡은 채 돌아갔다가 혹시라도 위급한 사태가 발생하면 관할하고 있던 일에 대해서 종시토록 온 마음을 다하라.”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동궁을 호위해 모시고 공주에서 전주로 간 적이 있었는데, 동궁의 자질이 빼어나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 변란이 일어났을 때 그곳의 인심은 어떠하였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전라도는 어떠한지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본도에는 선비들이 많기 때문에 심하게 미워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직 내포(內浦)와 청주(淸州)는 인심이 아름답지 못하였습니다. 지난날 의병을 불러 모을 때 불손한 말을 하는 자가 많았고, 또한 자주 익명(匿名)으로 투서를 하였습니다. 신이 충분히 알아듣게 타일렀으나 겨우 몇 사람이 모였다가 곧바로 흩어졌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이번에 강화(講和)한 것이 비록 편의에 따라서 임시방편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척화(斥和)에 대한 의논도 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말이 혹 과격하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들의 의논이 매우 옳으나 간혹 근사하지 않은 말이 있으며, 심지어는 ‘항(降)’ 자까지 더하고 있으니, 지극히 그르다. 그러나 척화의 의논에 대해서 어떻게 감히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윤황(尹煌)의 말이 참으로 과격하지만, 또한 꺾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윤황은 신과 나이는 같지 않으나 성혼(成渾)의 사위이고, 강석기(姜碩期)는 바로 신의 족친(族親)으로서 또한 신에게 수학한 까닭에 이 두 사람을 신이 익히 잘 알고 있는데, 이들은 결코 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대개 전부터 간언하는 자가 혹 파직을 당하기도 하고 혹 외직으로 전보되기도 하였는데, 이는 매우 온당치 못한 것입니다. 그 말이 옳지 않으면 상께서 쓰지 않으시면 그만입니다. 죄주기까지 한다면 훗날 누가 기꺼이 진언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왕명을 받았을 때 한 일들을 미처 장계로 올리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말씀드리고자 해도 귀가 어두운 증세가 심해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신의 노병이 이와 같고 적의 형세 역시 조금 늦춰졌으니, 다시 직명을 거둬 주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적의 형세를 보고서 그만두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하자, 선생이 아뢰기를,
“이 적들이 갑자기 철수하여 돌아간다는 것은 보장하기 어렵습니다. 설령 철수하여 돌아간다 할지라도 반드시 다시 침략해 올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군사들은 본래 훈련되어 있지 않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 점이 매우 염려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도승지에게 이르기를,
“김장생은 노병이 있는 사람으로서 나랏일을 위해 올라왔으니, 해조에 말하여 옷감을 보내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 4월 무신일 -12일- 에 상소를 올려 호소사(號召使)의 직임을 해직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선생은 이미 향리로 돌아온 뒤에 황산서원(黃山書院)으로 가서 머물러 있으면서 병량(兵糧)에 대해 처리하고 출납 장부를 정리하였다. 그러고는 드디어 상소를 올리고 아울러 인신(印信)을 올려 보낸 것이다.
○ 5월에 송복여(宋福汝)의 상에 나아가서 곡하였다.
선생은 송공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영결(永訣)하기 위하여 달려가다가 중간에 부음을 듣고는 그대로 상차(喪次)에 나아가 곡하였다. 뒤에 선생이 행장(行狀)을 찬하였다.
○ 9월에 윤덕요(尹德耀) -황(煌)- 에게 답장을 보냈다.
척화(斥和)하는 일 및 전주(全州) 분조(分朝) 때의 일에 대해 논하였다.
○ 손자 익희(益煕)가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의종 열황제(毅宗烈皇帝) 숭정(崇禎) 원년 무진(1628, 인조6) 선생 81세
○ 9월에 형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 10월 정유일 -10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상소를 보고 경의 간절한 뜻을 잘 알았다. 경이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다. 그러니 모름지기 굳게 사직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 정사일 -30일- 에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 12월 무술일 -12일- 에 체차되고서 용양위 부호군(龍驤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전교하기를, “늙고 병든 사람이 날씨가 추운 때 올라오기가 쉽지 않을 것이니, 우선은 체차하라.” 하였다.
기사년(1629, 인조7) 선생 82세
○ 1월에 삼공(三公)과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제공(諸公)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당시에 송광유(宋匡裕)가 상변(上變)하여 윤운구(尹雲衢)를 무고(誣告)하면서 임위(林㙔), 조평(趙平) 등 아무런 죄도 없는 선비들을 많이 끌고 들어갔다. 송광유는 바로 구봉 선생의 얼손(孼孫)이기 때문에 선생이 평소에 그의 흉패스러움을 잘 알고 있었으며, 호남 지방과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가 거짓을 꾸며댄 전말을 상세히 들을 수 있었다. 이에 드디어 제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알리고는 진위(眞僞)를 분명하게 가릴 것을 권면하여 선비들로 하여금 화에 연루되어 걸려들지 않게 한 것이다.
○ 윤4월 병진일 -1일- 에 별도로 유시를 내려 특별히 명소(命召)하였다.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추숭(追崇)하자는 논의가 성대하게 일어난 뒤로는 소명을 내리지 않은 지 오래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경연의 신하가 풍속(風俗)을 도탑게 하는 일에 대해서 논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장생과 장현광은 모두 숙덕(宿德)인 사람인데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으며, 비록 올라오더라도 곧바로 돌아간다. 이것은 나의 정성이 얕고 예우가 소홀한 소치이다. 어떻게 하면 서울로 올라와서 오랫동안 머물러 있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우상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김장생은 본디 향리(鄕里) 사람이 아닙니다. 상께서 만약 일반적인 규례로 부르지 않고 정성을 다해 예우한다면 혹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곧바로 정원에 명하여 하유하게 하기를,
“경은 숙덕의 기유(耆儒)로서 사람들에게 혜택을 끼쳐 주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니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당하여서는 조정에 나와 있으면서 나라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오랫동안 향리에 머무른 채 서울로 올라오려 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나의 성의가 얕고 예우가 소홀한 소치인 바, 내가 몹시 부끄럽게 여긴다. 현재 절서(節序)가 맑고 화창하여 길을 나서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경은 가마를 타고 올라와 목마른 듯이 갈구하고 있는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처음에는 ‘역말을 타고 올라오라.[乘馹上來]’고 써넣었는데, 상이 특별히 명해 가마를 타고 올라오게 한 것이다.
○ 병자일 -21일- 에 상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손수 비답을 써서 내리면서 도타이 불렀다.
손수 써서 내린 비답에 이르기를,
“경의 상소를 보았다.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다. 경은 나라의 대로(大老)로서 덕행이 뛰어난바, 만약 올라와서 서울에 머문다면 사대부들의 모범이 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나를 계옥(啓沃)해 주는 보탬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바야흐로 자리를 비워 두고서 기다리고 있으니, 경은 다시금 사양하지 말고 속히 올라와서 나의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늙어 죽을 때가 다 되어 정력이 이미 소진되었으니 은혜가 융숭하다는 이유로 거취를 잘못해서는 안 된다.’ 하여 드디어 잇달아 상소를 올리면서 더욱더 강력하게 돌아가게 해 주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 5월 기유일 -25일- 에 다시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였다. 경은 굳게 사직하지 말고 가을이 되어 서늘한 바람이 분 뒤에 올라와서 나의 지극한 바람에 부응하라.” 하였다.
○ 8월 갑술일 -22일- 에 세 번째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상이 비답하기를, “경의 상소를 보고 나의 마음이 몹시 서운하였다. 굳게 사직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니, 되도록이면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 9월에 정시회(鄭時晦)가 지은 《근사록석의(近思錄釋疑)》의 서문을 지었다.
선생은 일찍이 자신이 편찬한 《근사록석의》 1책을 정엽(鄭曄)에게 부탁하여 감정하도록 하였는데, 그 뒤에 정공이 선현(先賢)들의 정론(定論)을 더욱 많이 모아 편집하여 조목별로 보충해 넣고 그 사이에 또 선생의 설을 덧붙여 기록한 다음 4책으로 편집하였다. 정공이 졸한 뒤에 선생이 비로소 그것을 얻어 보고는 마침내 서문을 지은 것이다. 서문에 “그 가운데에는 혹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정공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평론(評論)하여 귀일시키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 갑진일 -23일- 에 네 번째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이때 내린 비답은 전해지지 않는다.
○ 《왕언첩(王言帖)》의 서문을 지었다.
선생은 평소에 받은 왕언(王言)을 없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겨 여러 자손들로 하여금 모아서 첩(帖)을 만들게 하고서 서문을 쓴 것인데, 대략 전후로 관직에 나아가거나 시골로 돌아온 시말(始末)을 서술하였다.
○ 변계구신독분동정설(辨戒懼愼獨分動靜說)을 지어 양진익(梁振翊)에게 보여 주었다.
그 설의 대략에,
“주자(朱子)의 초년 견해는 《중용집주(中庸集註)》와는 차이가 있다. 호계수(胡季隨)가 말하기를, ‘계구(戒懼)라는 것은 기쁨과 성냄이 발하기 전에 함양되는 것이며, 신독(愼獨)이라는 것은 기쁨과 성냄이 이미 발한 뒤에 성찰하는 것이다.’ 하니, 주자가 말하기를, ‘이 말이 매우 좋다.’ 하였으며, 율곡 또한 이 말을 《성학집요(聖學輯要)》에 기록하였다. 이는 계구와 신독을 동정(動靜)으로 구분 지어 본 것이다. 그러나 《중용집주》와는 차이가 있다.
《중용집주》에서 말한 ‘항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다.[常存敬畏]’는 것은, 서 있을 때에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앉아 있을 때에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말할 때에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음식 먹을 때에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니, 비록 보고 듣지 않을 때라도 또한 감히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이에 동(動)한 곳으로부터 정(靜)한 곳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계구해야 함을 이른 것이다.
아래 문장에서 말한 ‘이미 항상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서[旣常戒懼]’라고 한 것도 동정(動靜)을 겸하여 말한 것이며, ‘이에 더욱 삼간다.[於此尤加謹焉]’고 한 것은 동한 곳에서 더욱 삼간다는 뜻이다. 《중용혹문(中庸或問)》에서는 중(中) 자를 화(和) 자의 상대 개념으로 보아 말하였다. 그런즉 중(中)은 정(靜)이 되고 화(和)는 동(動)이 된다. 그러므로 계구(戒懼)하는 것을 정(靜)할 때의 공부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신독(愼獨)을 할 때에도 어찌 계구하는 공부가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 12월에 손자 익경(益炅)이 출생하였다.
경오년(1630, 인조8) 선생 83세
○ 3월에 정경임(鄭景任)에게 편지를 보냈다.
문인(門人)인 문정공(文正公) 송준길(宋浚吉)이 세마(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자, 선생은 그의 지취(志趣)를 가상하게 여겼는데, 정공이 취임하라고 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기를, “송명보(宋明甫)가 학문에 뜻을 두고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그 뜻이 몹시 아름답다. 그런데 공께서는 그의 뜻을 꺾으려고 하니, 남의 아들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자, 정공이 부끄러워하면서 사죄하였다.
○ 4월 신유일 -12일- 에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진하였다.
당시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이 있어서 전례에 따라 승진한 것이다.
○ 가을에 문인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격치(格致)와 사칠(四七) 및 심성(心性)과 정의(情意)의 뜻에 대해 논하였다.
송 문정공(宋文正公)은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 출입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막 상제(喪制)를 마치고는 곧바로 선생에게 와 다시금 학문을 닦았다. 선생이 몹시 중하게 기대하고 허여하여 그를 위하여 자상하게 논변(論辨)해 준 것이다.
○ 10월에 《독서강의(讀書講義)》의 서문을 지었다.
바로 조린(趙遴)이 찬한 것으로, 선생이 서문을 지었다.
○ 11월에 제송호부헌예설후(題宋戶部憲禮說後)를 지었다.
송 호부(宋戶部)는 바로 중국 사람인데, 우리나라 사신으로부터 전례(典禮)에 대한 논의를 듣고는 설을 지어 사신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서 ‘추숭(追崇)하고 입묘(入廟)하는 것은 마땅히 의(義)로써 일으켜야 한다.’고 하였는데, 선생이 그렇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 장지국(張持國)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는 없어졌다.-
당시에 목릉(穆陵)을 천장(遷葬)하는 예를 행하였는데, 상이 시복(緦服)을 입었다가 우제(虞祭)를 지낸 뒤에 곧바로 벗어 버리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크게 예를 잃은 데 대해 개탄하면서 장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례(古禮) 및 주자(朱子)의 의논을 갖추어 말해 주고는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선생 84세
○ 장지국에게 답장을 보냈다.
당시에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을 추숭(追崇)하자는 논의에 대하여 온 조정이 쟁집(爭執)하고 있었다. 상이 선생에 대하여 여러 차례 온당치 않은 전교를 내렸는데, 심지어는 “온 조정에서 추존(追尊)하고 있는 자인 김장생이 숙(叔)이라고 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더니 이제는 오히려 조짐을 막는 계책이라고 하고 있다.”고까지 하였다. 이에 최명길(崔鳴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김장생은 신의 스승입니다. 나이와 덕이 높고 학술이 순후하여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추대하는 바이며, 성상께서도 몹시 장려하는 바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왕왕 허물을 돌리는 말씀을 하십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유신(儒臣)을 높이고 도(道)를 중히 여기는 뜻이 이로 인하여 조금이라도 해이해질까 걱정스럽습니다. 그럴 경우 세도(世道)의 걱정스러움이 실로 이루 말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으며, 이귀(李貴)도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성상의 전교 가운데에 김장생을 경시하는 것은 몹시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다. 대개 선생의 의론은 대통(大統)을 승계한 것을 중히 여기고 사친(私親)을 숭봉(崇奉)하는 것을 그르게 여긴 것으로, 혼자서만 뭇사람들의 설을 배척하여 위로 주상의 뜻을 거스르기까지 하였으며,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자들 역시 많이 헐뜯었다. 그런데도 선생은 처음의 견해를 확고히 지키면서 끝내 조금도 변치 않았다.
○ 5월에 풍습증(風濕症)을 앓았다.
선생은 본디 체질이 강하여 병이 없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대단찮은 병이 생겨났다. 이에 집안사람들이 손님을 사절하고 조용히 요양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도 선생은 듣지 않은 채 날마다 문인들과 더불어 강론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일상생활과 잠자는 것을 평소와 다름없이 하였다.
○ 8월 갑진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다.
8월에 이르러서 병세가 갑자기 위독해졌다. 3일 유시(酉時)에 정신과 기운이 어지럽지 않은 가운데 조용히 서거하였다. 당시에 둘째 아들인 문경공(文敬公)이 곁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문인들과 더불어 한결같이 선생이 평소에 정해 놓은 상례(喪禮)를 써서 장사 지냈는데, 대개 《가례(家禮)》를 위주로 하면서 《의례(儀禮)》를 참조해 썼다. 막내아들인 참판공(參判公)은 조정에서 관직에 있었으므로 선생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말을 달려 내려왔으나, 미처 임종하지 못하고 염빈(斂殯)을 마친 뒤에 도착하였다.
당시에 문인으로서 상복을 입은 자가 수십 인이었는데, 백포건(白布巾)을 쓰고 수질(首絰)을 두르고 소대(素帶)를 띠고서 장사 지냈다. 이는 황면재(黃勉齋)가 주회암(朱晦菴)의 상에 복을 입은 제도를 쓴 것이며, 또한 선생이 율곡(栗谷) 선생을 곡한 때의 고사(故事)를 준용한 것이다.
○ 부음(訃音)을 아뢰자 상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치부(致賻)하였는데, 규례보다 더함이 있었다.
예조 좌랑 서정연(徐挺然)이 내려와서 예를 행하였는데, 바로 9월 임진일 -21일- 이었다.
○ 왕세자가 궁관(宮官)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세자가 강연(講筵)을 폐하고 소식(素食)을 행하였으며, 궁료(宮僚)들에게 이르기를, “예전에 내가 학문을 몰라 꽉 막혀 있을 적에 김공(金公)이 잘 가르쳐 주었는바, 그 은혜를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필선(弼善) 정홍명(鄭弘溟)이 내려와서 예를 행하였는데, 바로 9월 갑술일 -3일- 이었다.
○ 본도(本道)에 명하여 상을 치르고 장사 지내는 것을 돌보아 주게 하였다.
참찬(參贊) 장유(張維)가 경연 석상에서 아뢰기를, “김장생은 숙덕(宿德)으로서 사문(斯文)에 공이 있으니, 의당 추증(追贈)하는 전례를 거행하고 장사 지내는 것을 돌보아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이런 명이 있었다.
○ 10월 기미일 -19일- 에 진잠현(鎭岑縣) 성북리(城北里)의 해좌(亥坐)의 산등성이에 장사 지냈다.
새로 잡은 묏자리이다. 이때 원근에서 장례에 참석한 자들이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임신년(1632, 인조10)
○ 4월에 부인(夫人)의 묘를 천장(遷葬)하여 왼쪽에 합부(合祔)하고 합봉(合封)하였다.
○ 가장(家狀)이 완성되었다.
윤자(胤子)인 문경공(文敬公) 집(集)이 찬하였다.
갑술년(1634, 인조12)
○ 제생(諸生)이 계상(溪上)에 서원(書院)을 세웠다.
문인 이항길(李恒吉) 등이 원근에 사는 선비들과 함께 창립하여 이때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5월 정해일에 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기를 예법대로 하였다. 현종(顯宗) 경자년(1660, 현종1)에 돈암서원(遯巖書院)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고 관원을 보내어 치제하였다. 우암(尤菴)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묘정비(廟庭碑)를 찬하였다.
그 뒤에 제생이 문경공 신독재(愼獨齋)를 배향(配享)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과 문정공 우암 송시열(宋時烈) 역시 추가로 배향하였다.
이 외에도 선생이 향사된 서원으로는 익산(益山)의 화산서원(華山書院)과 안성(安城)의 도기서원(道基書院)이 있는데, 이들 서원은 선생을 전향(專享)한 곳이다. 그리고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회덕(懷德)의 숭현서원(崇賢書院),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峯書院), 연기(燕岐)의 봉암서원(鳳巖書院)은 병향(幷享)한 곳이다. 해주(海州)의 소현서원(紹賢書院), 공주(公州)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은 주자(朱子)에게 배향한 곳이다. 파주(坡州)의 자운서원(紫雲書院), 봉산(鳳山)의 문정서원(文井書院), 청송(靑松)의 병암서원(屛巖書院)은 율곡(栗谷) 선생에게 배향한 곳이다. 월봉서원과 문정서원에는 또 문경공(文敬公)도 배향하였다.
○ 8월에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완성되었다.
문인인 계곡(谿谷) 장유(張維)가 찬하였다.
을해년(1635, 인조13)
○ 묘지명(墓誌銘)이 완성되었다.
문정공(文正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 찬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경연의 신하가 또 포증(褒贈)하라고 건의하였기 때문이다.
신사년(1641, 인조19)
○ 1월 을유일 -9일- 에 연산현(連山縣) 남쪽의 우수리(牛首里)에 있는 고정산(高井山)의 곤좌(坤坐)의 산등성이에 천장(遷葬)하였다.
바로 선조비(先祖妣) 허씨(許氏) 무덤의 뒤쪽으로, 서북쪽으로 황강공(黃岡公)의 묘와의 거리가 겨우 1리 정도밖에 안 된다. 성북리(城北里)에 있는 묘터가 길하지 않아서 옮긴 것이다.
갑신년(1644, 인조22)
○ 묘표음기(墓表陰記)가 완성되었다.
문인인 기암(畸菴) 정홍명(鄭弘溟)이 찬하였다.
경인년(1650) 효종대왕 원년
○ 4월에 행장(行狀)이 완성되었다.
문인인 문정공(文正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병신년(1656, 효종7)
○ 12월에 시장(諡狀)이 완성되었다.
문인인 문정공(文正公)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이 찬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
○ 10월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에 추증하라고 명하였으며, 문원공(文元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경연의 신하가 건의함을 인해서 내린 것이다. 처음에 담당 관서에서 의논하여 선생의 시호를 올리면서 문원(文元)을 부망(副望)으로 의망(擬望)하였는데, 동춘당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상소를 올려 선조(先朝)에서 부망으로 의망된 것을 쓴 고사(故事)를 인용하면서 선생의 덕이 문원(文元)이라는 시호와 서로 걸맞다고 하니, 상이 따라 준 것이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고 하고, 주의행덕(主義行德)을 원(元)이라고 한다.
을사년(1665) 현종대왕 6년
○ 4월에 상이 온양(溫陽)의 온천(溫泉)에 행행(幸行)하였는데, 근신(近臣)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致祭)하였다.
신유년(1681) 숙종대왕 7년
○ 12월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는 것이 마땅함을 논하였다.
당시에 상이 율곡과 우계 두 선생을 문묘에 종사하는 것을 윤허하였는데, 송 문정공이 이를 인하여 상소를 올려 종향(從享)의 승출(陞黜)에 대해서 논하고, 이어 선생이 사문에 공이 있음을 진달하였다. 그 상소의 대략에,
“주자께서 예서(禮書)에 대해 반도 채 바로잡지 못하고 돌아가시면서 황면재(黃勉齋)에게 부탁하여 뒤를 이어 완성하게 하였는데, 황면재도 미처 주자께 여쭈어서 증명하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자가 이른바, ‘마침내 천고(千古)의 한(恨)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원공(文元公) 신 김장생(金長生)은 정자(程子)와 주자의 학문을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에게서 얻어들어서, 이미 그 학설을 모두 물려받아 마음에 징험하고 몸에 체득하였습니다. 만년(晩年)에는 오로지 예서(禮書)에 뜻을 두었는데, 이는 대개 황면재의 글 가운데에는 오히려 유감스러운 점이 있어서 다시 상량해 보아야 할 점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문원공이 편찬한 여러 책들은 털끝만 한 것조차도 세밀하게 분석하여 물을 담아도 새지 않을 정도여서, 국가의 전장(典章)과 사가(私家)의 경례(經禮)와 변례(變禮)로 하여금 모두 절충(折衷)하는 바가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한결같이 정자와 주자의 학설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비록 추향하는 길이 다른 사람들조차도 준용(遵用)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그 공로가 참으로 크다고 할 만합니다. 무릇 정중(鄭衆) 등의 여러 유자(儒者)들은 단지 《주례(周禮)》의 글을 주석(註釋)한 것만 가지고서도 오히려 성무(聖廡)의 향사(享祀)에 참여되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문원공(文元公)처럼 우리 동방(東方)의 예가(禮家)를 대성(大成)한 데이겠습니까.
지난해에 유생들이 신에게 말하기를, ‘문원공은 사문(斯文)에 공로가 있는데, 종사(從祀)하자는 의논이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그만둘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기에, 신이 그들을 만류하기를, ‘그 말이 비록 공변된 마음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온 나라 사람들이 같은 내용으로 말한 다음에야 백세(百世)토록 의혹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으며, 겸해서 또 ‘양현(兩賢)에 대한 주청도 아직 다 끝나지 않았으니, 모름지기 차례를 두어서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논의가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이제 양신(兩臣)을 종사(從祀)하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윤허를 받았으며, 신이 외람되게 통변(通變)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이 만약 이러한 즈음에도 단지 좋아하는 사람에 대해서 아첨한다는 혐의만을 돌아보고서 끝내 전하를 위하여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공의(公議)가 터져 나오기만을 기다린다면, 신이 지난날에 그 의논을 중지시켰던 것이 사림(士林)의 무궁한 한(恨)이 되지 않을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러나 신이 청하는 바 역시 감히 성상께서 위에서 독단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진신(搢紳)들과 관학(館學)에 널리 의논하고 외방의 여러 유생들에게도 널리 물어보아서 이설(異說)이 없기를 기다려서 해야만 합니다. 그런 다음에 또다시 옛 의리를 가지고 헤아려 보고서 시행하여야만 마땅할 것입니다.”
하였다. 영의정 김수항(金壽恒), 판부사 김수흥(金壽興)ㆍ정지화(鄭知和), 우의정 이상진(李尙眞)에게 수의(收議)하니, 모두 ‘선생의 덕과 공은 종향(從享)하는 것이 합당하며, 차분히 거행하여 사체를 중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며, 좌의정 민정중(閔鼎重), 사업(司業) 이상(李翔)은 즉시 승향(陞享)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상이 전교하기를,
“문원공의 높은 학문과 도덕에 대해서는 내가 본래 환하게 알고 있다. 다만 종향하는 것은 사체가 중하니, 경솔하게 올려서 배향할 수는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신들이 수의에서 우선은 뒷날을 기다리자고 한 것 역시 마땅함을 얻었다.”
하였다. 이 뒤에 관학(館學) 및 팔도의 유생(儒生)들이 해마다 상소를 올려 요청하였다. 대개 종사(從祀)하자는 논의는 인묘조(仁廟朝) 을해년(1635, 인조13)에 처음 나와 이때에 이르러 사론(士論)이 일제히 일어난 것이다.
을축년(1685, 숙종11)
○ 겨울에 문집(文集)을 간행하라고 명하였다.
선생은 평소에 저술하기를 일삼지 않은 탓에 유초(遺草) 몇 권만이 집 안에 간직되어 있었다. 상이 경연에 임하여 하교하기를, “내가 문원공(文元公)의 문집을 보고자 하니, 옥당(玉堂)에 명하여 들이게 하라.” 하였다. 이에 우암 송 문정공이 편차(編次)하고 《근사록석의》와 함께 상소를 갖추어서 올렸다. 그러자 상이 교서관(校書館)에 명하여 간행하게 하였다. 그 뒤 《경서변의(經書辨疑)》, 《가례집람(家禮輯覽)》, 《의례문해(疑禮問解)》 등이 모두 차례로 간행되었다. 선생은 예학(禮學)에 쏟은 공력이 가장 깊어 고증(考證)이 정확하고 넓었으므로 사람들이 변례(變禮)나 의문(疑文)이 있을 경우 반드시 선생에게 나아가 바로잡았다. 문경공(文敬公)이 여러 문인들과 더불어 선생이 묻고 답한 것을 모아 종류별로 나누어서 8편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바로 《의례문해》이다.
정유년(1717, 숙종43)
○ 2월에 상이 온천(溫泉)에 행행(幸行)하면서 근신(近臣)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致祭)하였다.
○ 5월 계유일 -20일- 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라고 명하고, 예관을 보내어 가묘(家廟)에 치제하였다.
이보다 앞서 경진년(1700, 숙종26)에 유생 최운익(崔雲翼) 등이 상소를 올려 해조(該曹)로 하여금 품의하여 조처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예조에서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대신 이세백(李世白)과 신완(申琓) 및 유신 권상하(權尙夏)가 헌의(獻議)하여 모두 종사하기를 청하였다. 이해 2월에 관학유생(館學儒生) 조겸빈(趙謙彬) 등이 또 상소를 올려 전에 요청한 것을 다시금 청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특별히 명을 내려 속히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라고 하였다. 그 당시에 선생의 묘(廟)는 이미 친진(親盡)이 되어 증손인 도정(都正) 만증(萬增)의 집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종향(從享)한 선현(先賢)의 묘(廟)는 예전 규례를 보면 으레 모두 불천(不遷)하였다.’고 아뢰었다. 이에 종손(宗孫)에게 명하여 봉환(奉還)하게 하였으며, 이틀 전인 신미일 -18일- 에 예관(禮官)이 내려가서 교서(敎書)를 선포하고 치제하였다. 이때 주인(主人)에게 제직(除職)하고 승사(承事)할 것을 명하였는데, 종손인 상열(相說)이 나이가 어렸으므로 5대손인 천택(天澤)이 대신 제사를 지내고 관직에 제수되었다.
경오년(1750) 영종대왕 26년
○ 9월에 상이 온천에 행행하였는데, 근신을 보내어 묘소에 치제하였다.
계묘년(1783) 정종대왕 7년
○ 1월에 각신(閣臣)을 보내어 석담서원(石潭書院)에 치제하였다.
주위(主位)와 배위(配位)의 각 위(位)에 각각 제문(祭文)이 있었는데 모두 어제(御製)이다.
정묘년(1867) 홍묘(洪廟 고종) 4년
○ 12월에 지방관(地方官)을 보내어 가묘(家廟)에 치제하였다.
지난해에 양요(洋擾)가 일어나 종가(宗家)가 연산(連山)의 묘 아래로 피해 있었는데, 대신이 경연에서 치제하는 일에 대해서 아뢰어 윤허를 받았으므로 지방관을 보내어 치제한 것이다.
을유년(1885, 고종22)
○ 4월에 예관을 보내어 가묘에 치제하였다.
당시에 종손 영구(永耉)가 보은(報恩)의 수령이 되어 사판(祠板)을 받들고 군아(郡衙)로 갔다. 윤자(胤子)인 덕수(德洙)가 계미년(1883, 고종20)의 감제(柑製)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해에 이르러 방방(放榜)하였는데, 상이 특별히 음악(音樂)을 하사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한 것이다.
임자년(1732, 영조8)
○ 연보(年譜)를 간행하였다.
선생의 외증손인 지호(芝湖) 이선(李選)이 처음으로 연보를 편찬하였으나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다. 바닷가에서 임종할 당시에 선생의 현손인 진옥(鎭玉)과 진태(鎭泰)에게 영결하는 편지를 지어 보내면서 초본(初本)을 맡겼다. 그 뒤에 차례차례 가다듬었으나 오히려 완성하지 못하고는 그럭저럭 미루면서 보관해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때에 이르러 여러 후손들이 끝내는 완성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다시금 유고(遺稿) 및 기타 근거로 삼을 만한 기록들을 상고하여 몇 조항을 보충해 넣은 다음 간행한 것이다.
191년이 지난 임술년(1922)에 전서(全書)가 완성되었다.
[주-D001] 별진상(別進上)이나 삭진상(朔進上) : 별진상은 연례(年例)나 월례(月例) 이외에 별도로 올리는 진상을 말하고, 삭진상은 다달이 정례로 각 도(道)에서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을 말한다.[주-D002] 산료(散料) : 녹봉을 사맹삭(四孟朔)으로 나누어 주지 않고 다달이 급료를 주는 것을 말한다. 주로 잡직(雜職)의 구실아치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급료를 주었다.[주-D003] 패일(敗日) : 음력으로 매월 5일, 14일, 23일을 일컫는데, 이날에 일을 하면 불길하다고 한다. 파일(罷日)이라고도 한다.[주-D004] 기익헌(奇益獻) : 인조 2년(1624)인 갑자년에 이괄과 함께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킨 역신(逆臣)이다. 본디 천얼(賤孼) 출신으로 갑산 부사(甲山府使)를 지냈으며, 이괄의 난 때 이괄의 부하 장수가 되었다. 뒤에 이괄이 관군인 장만(張晩) 등에게 패해 이천(利川)으로 달아나자, 묵방리(墨坊里)에서 이수백(李守白)과 모의하여 이괄의 목을 베어 바치고 그 공으로 처벌을 모면하였다.[주-D005] 양이(量移) : 섬이나 변방으로 멀리 귀양 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등하여 내지(內地)나 가까운 곳으로 옮겨 주는 일을 말한다.[주-D006] 작목(作木) : 전세(田稅)로 징수하는 곡물을 무명으로 환산하여 받는 일을 말한다.[주-D007] 납제(臘劑) : 해마다 연말에 임금이 가까운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환약으로, 청심원(淸心元), 안신원(安神元), 소합원(蘇合元) 등이며, 내의원에서 납일(臘日)에 조제하였다. 납약(臘藥)이라고도 한다.[주-D008] 정경임(鄭景任) : 원문에는 ‘정경인(鄭景仁)’으로 되어 있는데, 잘못된 것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9] 종복(從服) : 인척(姻戚)이나 임금의 친속(親屬)을 위하여 입는 상복을 말한다.[주-D010] 계운궁(啓運宮) : 인조의 생모인 인헌왕후(仁獻王后)를 가리킨다. 인헌왕후는 구사맹(具思孟)의 딸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에게 시집와서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가 인조가 왕위에 오른 뒤에 연주부부인(連珠府夫人)으로 올려졌으며, 궁호(宮號)를 계운궁(啓運宮)이라고 하였다. 인조 4년 1월 14일에 경희궁(慶煕宮)의 회상전(會祥殿)에서 승하하였다. 이때 상제(喪制)를 상례(常禮)에 따라 할 것이냐 변례(變禮)에 따라 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었는데, 김장생(金長生)과 정경세(鄭經世) 등은 인조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을 상주(喪主)로 삼고 인조는 부장기복(不杖期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 등은 인조가 상주가 되어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인조가 처음에는 삼년복을 입으려고 하다가 조정에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함에 따라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주-D011] 분조(分朝) : 전란 등으로 인해 임금이 피란하였을 경우 행재소(行在所) 이외에 따로 설치한, 세자를 수반으로 하는 작은 조정이다. 행재소를 원조(元朝) 또는 대조(大朝)라 하고, 분조를 소조(小朝)라고도 한다.[주-D012] 계옥(啓沃) : 신하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열어 임금의 마음에 부어 넣는다는 말로, 성심을 다해 임금을 보좌하는 뜻으로 쓰인다.[주-D013] 목릉(穆陵)을 천장(遷葬)하는 예 : 선조의 능인 목릉은 본디 태조(太祖)의 능인 건원릉(健元陵) 서쪽에 있었는데, 물이 차서 불길하다는 설이 있었다. 이에 인조 8년(1630)에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의 능인 유릉(裕陵) 곁으로 천장하였다.[주-D014] 정중(鄭衆) : 후한(後漢)의 개봉인(開封人)으로, 자가 중사(仲師)이다. 나이 11세 때 아버지로부터 《좌씨춘추》를 받아 읽고는 《춘추잡기조례(春秋雜記條例)》를 지었다. 또 역(易)과 시(詩)에도 아주 정통하였으며, 황제의 명을 받고 《춘추》의 19편을 산삭하기도 하였다. 대사농을 지냈으므로 정 사농(鄭司農)이라고 칭하며, 또 선정(先鄭)이라고도 칭한다.[주-D015] 191년이 …… 완성되었다 : 연보가 간행된 임자년(1732)부터 191년이 지난 임술년(1922)에 《사계전서(沙溪全書)》가 간행되었다는 뜻이다. 사계의 연보가 간행된 시기에 대해서 《국역 사계전서》 해제에는 1912년 임자년에 간행되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연대를 잘못 추산한 것인 듯하다.
ⓒ 한국고전번역원 | 정선용 (역) |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