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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산행기
작성자 : 배 진 한
우리 69학번 상산회 회원들은 매년 해외산행을 계획하곤 하였는데 2019년에는 신임 신상기 상산회장이 일본의 최고봉 후지산(정상(劍が峰)은 해발 3,776m)의 등정을 봄부터 계획하였다. 산행기를 쓰게 된 필자로서는 2017년 북알프스 산행이후 두 번째 일본 산행이었다. 여행개요는 다음과 같다.
여행일 : 2019. 7/13 ~ 7/16 (3박 4일)
여행지 : 일본 후지산 및 인근 둘레길 트레킹
참가자 : 김상희, 김호경, 남영우, 방영민, 배진한, 신상기, 윤용국, 이계혁, 이정우, 이종원, 장인주, 정찬인, 최해관의 총13명과 산행가이드 심재철(Passang)
이번 268차 산행으로 상산회 후지산 산행의 의미 한 가지는 일본의 최고봉인 후지산 정상을 한 번 올라보고 가능하다면 여기서의 일출도 구경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산회 최고의 건각들과 함께 갑갑한 일상에서 벗어나서 우리 인생 70대 시기 우정의 추억을 후지산 일대에서의 여유로운 트레킹으로 만들어보자는 의미도 있었다.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바로 옆에 있는 나라이고 정치․경제․사회면의 여러 가지 제도들에서 폭넓은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에 잘 알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잘 모르는 부분이 의외로 많은 나라라는 생각이 든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따르면 일본사람들은 ‘모든 것은 그 알맞은 장소에’라는 것을 가장 중요한 좌우명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들의 생활양식이란 각자에게 알맞은 권위를 할당하고 그 각각의 권위에 알맞은 영역을 규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각자가 알맞은 위치를 가진다’가 매우 중요하다. 서울대 경제학부의 김병연교수는 최근 한 시평에서 이 『국화와 칼』은 2차 세계대전 말과 직후, 미국의 대(對)일본 정책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책은 인명 피해를 줄이며 전쟁을 종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일본 천황의 항복을 받는 것임을 알게 하였고, 민주주의를 도입하되 천황제도는 보존하는 방향으로 정책 가닥을 잡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한국인들은 ‘법도 이치에 맞아야 한다’고 보지만 일본인들은 ‘법을 이치보다 우위에’ 두는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것이 최근 한일갈등의 씨앗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일본인들은 겉으로 보기에 일단 법과 규칙과 약속을 금과옥조처럼 지키려는 사람들이다. 『국화와 칼』은 또한 일본인들은 ‘온(恩)’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도 매우 충실하다는 점도 지적해두고 있다.
첫째 날(2019. 7. 13. 토) :
여하튼 우리는 인천공항을 떠나 후지산 인근의 시즈오카(靜岡)공항으로 향했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소지품을 자꾸 놓치고 다음 장소로 떠나는 사례가 자주 발생했다.
버스로 점심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식사는 생선튀김 정식이었다. 식사 후에는 후지노미야(富士宮) 등산구로 이동(해발 2,400m)하였다. 가는 도중에도 날씨가 흐려 차창밖으로 가깝게 보이는 경치는 너무나도 울창한 삼(杉; すぎ)나무들이다. 나무들이 모두 아름드리들인데 쭉쭉 곧게 하늘로 뻗어있다. 저것들로 배도 만들고 집을 짓는데도 썼겠지. 물론 시즈오카시내에도 높은 건물은 잘 보이지 않고 1~2층의 목조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버스는 내일 후지산 너머 반대편 지역 주차장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그 버스를 타려면 반드시 산을 넘어가야 한단다. 우리 대원 13명과 산악가이드 1명, 그래서 모두 14명은 16:00경부터 신7합목(新7合目; 이는 ‘신7부능선’을 의미) 산장으로 등산하면서 이동하였다. 산악가이드는 한국인인데 지금은 네팔에 살고 있다고 했다. 히말라야 등산에도 경험이 많고 후지산에도 여러 번 왔다고 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바람도 많이 분다.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다. 산정상은 물론 보이지 않는다. 나무도 없다. 추울 것이라고 지나치게 걱정을 했는지 옷을 너무 많이 껴입은 것 같다. 그렇지만 비옷바지는 잘 꺼내 입은 것 같다.
이윽고 18:00경 오늘밤 숙소인 고라이코(御來光)산장(해발 2,780m)에 도착하였다. 여장을 풀고 산장 특제 카레라이스로 저녁을 먹었다. 20:00경에 한 칸에 3명씩 누워 억지로 잠을 청했다. 고산증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타이레놀 등 약도 준비는 해왔지만 먹지는 않았다.
사실 후지산 등산이 쉽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어서 3,000m를 넘는 고산 등산을 위한 체력단련은 제법 한 셈이다. 아침마다 일정거리의 조깅에다 스쿼티운동, 기타 상체 근력운동 등도 꾸준히 해왔다. 혹시 어려운 상황이 닥친다면 다른 대원들에게 부담주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 혹시 다른 대원들의 어려움에는 적절한 도움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자정에 일어나려면 잠을 자야 하는데 많이 시끄러웠다. 일본인들이 떠드는 것인가? 아니면 여행 온 외국인들이 떠드는 것인가? 일본어 대화가 많이 들리는 것을 보니 여기 산장을 방문한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 안면에 대해 무심한 것인가?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둘째 날(7. 14. 일) :
자정에 산장을 출발하였다. 강한 비바람 맞으면서 전진하였다. 그렇지만 내려치는 폭풍우와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대원들이 준비한 헤드랜턴들이 침수되거나 배터리가 방전되어 빛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장갑이 금방 젖어서 손 역시 시리기 시작했다. 비내리는 고산에서는 고무장갑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겠다. 등산복 바지 위로 덮어 입은 비옷바지는 등산화 목부분을 완전히 덮을 수 있어야 빗물이 등산화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겠다. 겉옷으로 입은 고어텍스 등산복 상의 역시 고어텍스 기능이 상당정도 마모되었는지 빗물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땀인지 빗물인지 분간도 되지 않는다.
해발 2,700m 이상의 고산에서는 숨이 쉽게 가빠진다. 고산증을 예방하려면 조금씩 가다가 자주 쉬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다리도 이상하게 휘청거린다. 다리에 힘이 제대로 가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쉽게 넘어진다. 몇 번 엉덩방아도 찧었다. 그런데 흰 비옷자켓을 덮어 입은 윤용국 대원은 저만치 잘도 올라간다.
필자는 손전등까지 추가로 준비했었지만 스틱을 쥔 손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억수같이 내리는 빗속에서는 그것도 큰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야간이니 눈이 나빠 안경까지 쓰고 있는 대원들에게는 어려움이 한층 더 가중되었을 것이다. 비가 올 때는 안경위에 덮어쓸 수 있는 고글 역시 매우 요긴할 것 같다. 체력단련 준비는 열심히 하였다고 해도 우중의 야간등산 장비 준비부족을 뼈아프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갔으려나, 상산회 등산대원의 선두는 야마구치산소 산장(간소(元祖)7합목 3,010m) 근방까지 도착하였지만 엄청난 폭풍우 조우로 더 이상 산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중간부분 대원들이 견디지 못하고 하산하기로 먼저 결정했던 것 같다. 배낭은 물론이고 속옷까지 젖어 들어와 강한 비바람으로 저체온증이 심하게 우려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보온에 문제가 있었는지 이계혁 대원과 장인주 대원 등은 입술까지 퍼렇게 보일 정도였다고 한다. 게다가 방영민 대원은 등산화 밑창이 떨어져나가는 어려움도 겪었다고 한다.
2010년 8월경 상산회 백두산 등정 때의 무서웠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당시 비가 내리는 해발 2,500m 정도의 천지 옆 분화구 경사지에서 점식시간에 몰려온 저체온증이 온몸을 정말 사시나무 떨듯 떨게 만들었던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접한 ‘무리한 등정욕심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수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 덕에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남았다’는 등산가 허영호 대장의 말이 생각난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하산하는 과정에서 신상기 상산회장이 넘어져 심한 안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결국 야간산행 출발점이었던 고라이코산장(2,780m)으로 다시 후퇴하여 날이 밝기를 대기하면서 신회장 지혈 조치 및 치료를 시도하였다. 다행히 간호경력이 있었다는 산장주인 부인이 상처에 소독약과 지혈제를 바르고 붕대도 꼼꼼하게 감아주었다. 약간의 사례를 하려고 했지만 극구 사양하는 바람에 정말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마음에 새겨두기로 하였다.
남영우 대원, 윤용국 대원 등 몇몇 대원들은 휴대폰을 켜두고 있었는데 이것들이 주머니 속에서 침수되어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기도 했다.
날이 밝은 후 지급받은 도시락(빵 2개와 음료)으로 조식을 해결하고 신회장 치료를 위해 먼저 후지노미야 등산구 주차장으로 신속히 하산(2,400m)하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날씨가 좀 흐려서인지 여태 우리는 바로 옆에 왔어도 후지산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시즈오카 상공 비행기에서 내려다 볼 때 구름 위로 삐죽 올라온 시커먼 후지산 봉우리가 전부였다.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도 대원들의 분위기는 침통했다. 이제 몸은 나이를 먹어가더라도 마음만은 청년 못지않아 해외의 명산들을 차례로 정복해나가는 경험이 정말 소중했을 텐데 중도에 하산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었을까. 김호경 대원은 평소의 디스크자키 역할도 내던져버리고 장인주 대원, 김상희 대원, 이정우 대원 등과 함께 버스 뒷 좌석에 앉아서 후지산 정상에서 즐기겠다고 배낭에 준비해왔던 여러 가지 안주를 벗 삼아 소주나 축내고 있었다. 신회장은 자신의 부상이 대원들의 일정에 지장을 초래하지는 않을까 매우 신경쓰면서 미안해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전날 산장에서 만난 또 다른 한국인 등산팀은 초저녁에 등정을 시도하다가 폭풍우로 중도 하산하여 쉬었다가, 오늘 아침 재차 등정을 시도했지만 9합목 근방에서 역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위로성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다.
신회장 병원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주차장 인근의 이온몰(AEON mall) 후지노미야를 방문하고 약간의 쇼핑도 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온몰은 2011년에 이온그룹(지분율 100%)이 세운 몰인데 일본의 대표 할인마트 체인이자 가장 많은 점포를 보유하고 있는 할인점이다. 일본 내에서는 한국의 이마트 정도의 인지율을 가지고 있는 대표적인 유통업체라고 한다. 대원들은 약국에서 더러 잘 알려진 상비약들을 구매하기도 했다.
몰 구경을 마치고 대중목욕탕에서 목욕을 마치고 목욕탕 내부 식당에서 점심식사까지 하였다. 목욕탕 내부에 식당까지 있으니 바로 한국의 찜질방 느낌이 난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많다.
식사 후 우리는 야마나카(山中)호수 지역으로 이동하여 숙소인 썬프라자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호텔이 크지도 않고 호화롭지도 않았지만 저녁과 다음날 아침의 호텔식사가 대부분 대원들의 칭찬을 받을 만큼 훌륭하였다. 평소에 인근 국가들 여행객들이 많이 투숙한다고 한다. 이날은 대만여행객들이 많았다. 우리는 호텔 코인세탁실에서 젖은 옷들을 세탁하고 건조시키는 시간도 가졌다.
셋째 날(7. 15. 월) :
일본에서는 이 날도 마침 공휴일이라고 한다. 노천탕이 있는 호텔목욕탕에서 아침에 사우나를 즐기는 시간도 잠깐 가졌다.
호텔 옆에 있는 야마나카수와(山中諏訪) 신사와 야마나카센겐(山中淺間) 신사를 구경하였다. 신사에서 남영우 대원, 이정우 대원, 최해관 대원과 만났는데 표정이 쌩쌩하다. 그런데 나중에 안 일이지만 센겐신사는 후지산신을 주신으로 모신다고 한다. 센겐신사들은 후지산을 센겐(浅間)님, 혹은 센겐대신(大神)이라고 부르며 신앙대상으로 삼는데, 센겐이란 말이 화산을 뜻한다고 한다. 후지코우(富士講)(후지산을 숭배하는 종교단체) 신자들은 후지산을 오르는 일도 등배(登拜)라고 한다. 신사에는 금년에 거행된 일본 천황의 즉위와 令和(れいわ) 연호시작을 축하하는 배너도 걸려있다.
맑은 날 아시호에서 보이는 후지산
10:00경 버스로 이동하여 후지산 둘레길 탐방코스의 하나로 2013년 6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후지산 구성자산, 오시노핫카이(忍野八海)를 방문하고 8개의 연못을 구경하였다. 오시노핫카이는 형태, 수질, 수량, 보전상황, 경관, 불교사상(후지 신앙) 등의 관점에서 1934년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1985년 환경청으로부터 전국명수백선, 또한 1993년에는 현(縣)의 후지산백경 선정지로도 지정된 유명한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http://www.oshino.jp/spot_Blakes.php).
들어가는 입구 근방에는 곳곳에서 먹거리들이나 비싼 복숭아를 팔고 있다. 바로 길 옆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이 매우 맑고 깨끗해 보인다. 마침 일본의 공휴일이라 방문객들도 많다. 8개의 연못은 出口池(수심 0.5m), お釜池(수심 4m), 底拔池(수심 1.5m), 銚子池(수심 3m), 湧池(수심 4m), 濁池(수심 0.5m), 鏡池(수심 0.3m), 菖蒲池(수심 0.5m)로 이루어져 있다. 연못마다 커다란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있다. 그런데 이 연못들을 ‘바다’라고 부르다니 일본사람들도 과장이 너무 심하다. 따로 공원 기념품 매점 가까이에는 후지산으로부터 지하로 흘러내려온 수심 8m의 용수구(中池)가 예쁘게 조성되어 있다. 물이 매우 맑아서 8m 아래까지 물고기들이 유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 연못들은 우리나라 제주도의 해변가 용천대에서 흔히 발견되는 용수구들과 닮아있다. 한라산도 화산활동 시기에 분출된 화산재로 이루어져 있어서 비가 오면 산록 경사면의 물들은 대부분 지하로 스며들고 단단한 지층을 따라 지하에서 산 아래로 흘러내리게 된다. 이 물들이 해변 가까이에 와서 다시 지상으로 솟아오른다. 제주도의 해변가 지역에서 용출되는 물들이 바로 이렇게 해서 흘러나오는 용천수인 것이다.
『韓の食卓』이라는 한국식 식당에서 인상적인 중식을 즐겼는데 각자가 자기 몫의 고기를 자유롭게 구워서 먹을 수 있도록 개인별 고기접시를 따로따로 제공해주는 식이었다. 여러 명이 둘러앉아 고기를 경쟁적으로 구워서 먹는(속도 빠른 사람이 많이 먹는다) 한국의 고깃집과는 사뭇 다른 방식이다. 방영민 대원은 이 방식에 상당히 매력을 느끼는 눈치다. 그렇지만 회비를 약간 걷어 식사 때마다 대원들의 요구를 입안에서 구르는 혀처럼 들어주는 궂은 일을 기꺼이 맡았던 이종원 대원의 노고에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점심식사 후에는 온시하코네(恩賜箱根)공원으로 이동하여 트레킹을 즐기는 시간을 가졌다. 이 공원은 현립공원으로 되어있는데 관광객들이 트레킹하기 좋게 매우 잘 가꾸어져 있었다. 날씨는 조금씩 비가 내리거나 흐렸는데 울창하게 조성된 숲들이 피어오르는 안개와 구름 사이에서 홀현홀몰하는 것이 신비스러운 느낌까지 준다. 70세 전후의 머리 희끗희끗한 우리들의 귀한 시간이 이 시공 속에서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대원들도 있었지만 정찬인 대원(목사님이다)의 우스개 이야기는 여전했다. 하필 그날 엘리베이터가 고장 난 아파트 30층에 사는 회사원이 일요일날 당직 때문에 출근하는 얘기는 자꾸 들어도 재미있다. 이야기 순서가 복잡해서 다른 사람에게 꼭 같이 재미나게 옮기려면 그 순서를 정확히 복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일본의 관광산업은 우리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 최근 국내 관광 관련 연구들이 각 지방의 자연경관적․역사적․문화적 특성과 특산물, 그리고 특색 있는 음식들을 수준 높은 관광시설들과 체계적으로 연결시켜 즐길 수 있도록 해주는 일본의 관광산업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여기에는 지방관광 주도 조직인 일본판 DMO(Destination Management Organization)의 육성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버스로 이동하여 숙소인 리조피아 하코네호텔에 도착해서 노천온천을 즐기다가 저녁식사를 하였다. 일본식 전통의상을 입고 코스요리를 즐기는 대원들도 있었다.
넷째 날(2019. 7. 16. 화) :
오늘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에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칼데라, 아시(芦)호수를 유람하고 일본 최대 출렁다리인 미시마(三島) 스카이워크(길이 400m)를 산책하기로 하였다. 하코네 코지리터미널에서 유람선을 기다리고 있는데 호수에는 커다란 잉어들이 유유히 놀고 있다. 물이 매우 맑다. 관광객들이 던져주는 먹이에 익숙해있었는지 사람들 근방에서 먹이를 기다리는 듯하다. 호수둘레가 21km에 이르고 수심이 43m 정도라고 한다.
유람선이 도착하여 승선하고 조용히 흘러가는 배위에서 40여분의 아침시간을 보냈다. 유람선 속에서 외국인 관광객들도 만났다. 서양 외국인들이 많이 보인다. 상산회 대원들과 외국인 관광객의 대화가 한동안 지속되기도 했다.
유람선을 내려서는 일본 최대 출렁다리라는 스카이워크를 왕복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다리는 큰 계곡을 가로지르는 현수교인데 출렁다리라고 부르지만 안전장치들을 많이 구축했는지 다리에서는 별로 흔들리는 느낌도 없다. 푸른 하늘이 잠깐 보이기도 했지만 섭섭하게도 후지산은 여전히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상산회 대원 13명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버스로 3~4시간을 달려 나리타(成田)공항으로 이동하였다. 21:00경 우리는 나리타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우리 상산회 대원들은 신회장의 쾌유를 기원하면서, 그리고 건강하고 유쾌한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면서 헤어졌다. 우리들의 이번 후지산 산행여행은 이렇게 많이 아쉽게 끝났다.
최근 우리는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 갈등관계에 놓여있다. 그것은 물론 반일로 풀 문제는 결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으로 극일은 우리의 중요한 과제들 중의 하나이다. 우리가 젊어서부터 존경하고 배웠던 국문학자 김윤식 교수는 평생을 바쳐 한국근대문예비평사를 연구했지만 자전적 에세이집 『내가 읽고 만난 일본』(2012)에서 다음과 같이 극일의 방뱡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 유학생 이광수들이 있다고 치자. 그들이 읽고 만난 일본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혼신의 힘을 기울이었던가. 아니었다. 그럴 수 없었다. 이광수들이 읽은 책을 모조리 살피고 나도 그것들을 읽어야 했다. 그가 만난 일본을 나도 체험해야 했다. 이 작업이란 너무 허황한 것이어서 길을 잃고 만 것이다. 정작 이광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내 앞에 나타난 것은 만년설을 머리에 인 거대한 산맥들(필자주: 이들은 일제시대 조선인들이 영향 받고 배웠던 훌륭한 일본인들을 가리킴)이었다.’ ‘자기를 찾자마자 동시에 자기를 잃었다는 것. 그것은 일본과는 무관한 인류사의 숙명이었던 것. 그렇다고 그냥 있을 수는 없소.’ 그래서 김교수는 나는 겨우 여기까지만 왔을 뿐이므로, 그래서 후세의 젊은이들(필자주: 상산회 대원들도 이 젊은이들에 포함될 수 있을까?)을 향해서 글 속에서 외친다. ‘자 이제 지체 없이 떠나라. 나의 손오공이여, 문수보살이여. So mein Kind, jetzt gehe allein weiter! (그래 내 아이야, 이젠 혼자서 가라, 더 멀리 더 넓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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