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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와 정난주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제주교구 학술대회 및 제213회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 발표회
개회사: 문창우 주교(제주 교구장)
발표1 : 기억과 기록을 통해 본 정난주(정명련)의 삶에 대한 검토
- 호명(呼名)의 역사에 대해서
권이선 (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2 : 문학으로 만나는 천주교 여성,정난주와 유섬이
김윤선 (고려대학교)
발표3 : 정난주 유배길 연구 - 제주 산록길을 중심으로
김장환(한국교회사연구소)
발표4 : 정난주 기념관의 방향성 모색 , 역사와 활용 사이에서
송란희 (한국교회사연구소)
폐회사: 조한건 신부(한국교회사연구소장)
제3 발표
정난주 유배길 연구一제주 산록길을 중심으로
김장환 (한국교회사연구소)
1. 머리말
2. 서울〜제주 유배길
3. 제주〜대정 산록길
4. 맺음말
1. 머리말
정난주(원명 정명련[丁命蓮],1773~1838)는 정약현(丁若絃,1751〜1821)의 맏딸로 외삼촌인 이벽(李檗,1754-1786), 고모부인 이승훈《李承勳,1756-1801), 삼촌인 정약전(丁若全,1758〜 1816).약종<若鍾,1760〜 1801),약용<若鏞,1762-1836) 형제들 가운데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정난주는 황사영(黃嗣永,1775~1801)과 혼인하여 황경한(黃景漢,1800〜1859)을 낳았고,주문모(周文模,1752-1801) 신부와 함께 활동한 정약종.황사영.홍재영(洪梓榮,1779〜1839)을 도운 것으로 여겨진다.
1801년 11월 5일(음 9월 29일) 황사영이 제천 배론에서 체포되어 북경 주교에게 보내는「백서(帛書)」 가 압수 되었다. 황사영은 대역부도(大逆不道)죄로 능지처참(陵遲處斬)형을 받았고,정난주는 연좌죄인으로 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었다. 조정은 신유박해를 정당화하는 증거를 확보하여,「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하고 박해를 그쳤다.
정난주는 제주로(濟州路)1)를 따라 경기, 충청, 전라를 거쳐 해남에 이르고,추자도에 들러 바다를 건넌 후,산록길12)을 따라 대정현으로 갔다. ‘정난주가 걸어간 제주 옛길3)은 어떤 노선일까’ 하는 의문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이 연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19세기 전반 제주-대정 산록길 노선을 밝힐 수 있다.
둘째,제주 산록길 형성 과정과 제주 옛길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다.
셋째,정난주 유배 순례길 활용 방안을 살필 수 있다.
최근 제주에 관한 역사 지리 연구가 활발해졌지만,제주 옛길에 관한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2021)는 신경준의 지리지4)와 김정호의『대동지지(大東地志)』를 통해 조선 전기보다 제주도에 대한 인식이 후대에 갈수록 위상이 저하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제주 옛길에 관한 설명은 지리지와 지도에 의한 고찰에 그치고 있어,제주-대정 산록경로가 현재 지방도로(1135번[평학로])와 비슷하지만,이생촌과 금물덕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고만 밝히고 있다.5) 양상호(2011)는 1914년 지적원도에서 '신작로 삭제 기법’을 통해 구한말 제주읍성 도로를 복원해 밝히고 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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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 후기 지리지『동국문헌비고』「여지고(輿地考)」(1770)에는 9대로(의주,경흥 서수라,평해,부산, 통영,통영일,젠준, 충청수영, 강화),『도로고』(1770)에는 6대로(의주, 경흥,평해,동래,젠준,강화L『대동지지』(1861〜1666)에는 10대로(의주,경흥,평해,동래,봉학,통영별,화!남,충청 수영, 수원별,강학)가 있었다.
2) 신경준은『도로고』에서 제주〜대정,제주〜정의 간 도로를 ‘산록 지름길’(산록경로[山麓經路])로 칭했다<신경준,『도로고』,「제주삼읍로」; 류영환 편저,『여암 신경준과 역주 도로고』, 역사문학,2014). 본 글에서는 ‘산록길’로 사용하고자 한다.
3) 길은 ‘사람,동물, 자동차 등이 지나갈 수 있는 땅 위의 일정한 너비의 공간’(최종희,『고급 한국어 학습 사전』, 커뮤니케이션북스,2015)을 말하고,도로는 ‘사람, 차 등이 잘 다닐 수 있도록 만든 비교적 큰길’(『교학 한국어 사전』,교학사,2008)을 의미한다. 길은 자연적으로 생성•발전•소멸하는 소극적인 개념이고,도로는 인위적 계획과 조성•보수•유지•관리하는 적극적인 개념이다. 또 길은 하늘•바다 포함한 공간과 삶•역사의 시간 개념을 포함하기도 한다. 본 글에서는 현재의 도로와 구분하여 조선시대 도로를 ‘길’로 사용하고자 한다.
4)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조선 후기 실학자로 1770년『동국문헌비고』「여지고」를 담당했고,『팔도지도』와『동국여지도』를 완성했으며,지리지『강계지』,『도로고』,『산수경』,『산경표』등을 저술하였다(『한국사대사전』5, 교학사,2013).
5) 도도로키 히로시,「전국지리지에 나타난 제주도 위상」,『제주도 연구』56, 제주학회,2021, 77〜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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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도로는 군주의 통치를 위한 군사. 행정 목적으로 만들어졌고,역원제(驛院制)로 운영되었다. 역과 원은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하는 지점이다. 병조(兵曹)는 역에 찰방(종6 품)과 역승(종9품)을 파견하고 역장,역리,역졸을 두어 관리했다.7) 유배 죄인은 관직이 있는 경우 의금부 도사나 서리, 나장이,관직이 없는 경우 형조 관할 하에 역졸이 호송을 담당하였다.8) 역졸은 형조에서 작성한 호송첩(護送帖)을 휴대하여 지나는 읍과 역마다 죄인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9)
정난주 유배길 노정에 관한 구체적인 1차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다. 따라서 연구 범위를 19세기 전반으로 넓혀 먼저 제주로와 바닷길을 살펴보고,제주-대정 산록길 노선을 밝힌 다음,마지막으로 이길의 형성 과정과 제주 옛길의 특징을 고찰하고자 한다. 연구 방법은 조선 후기 지리지와 지도에서 지점과 노선을 찾아 근현대 지도와 비교하고,배 다른 여행(부임,유배) 기록을 살펴본 후,제주의 지형.역사.마을을 고찰하면서 답사를 통해 이를 확인하였다.
2. 서울〜제주 유배길
1)서울〜해남(제주로)
황사영이 잡히기 전 정난주를 비롯한 가족과 노비들은 포도청에서 도피처를 추궁받았다. 황사영이 처형되고 12월 11일(음 11월 6일) 이들은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총되어,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13일,11) 제주속[屬]) 관비로,아들 황경한은 추자도(13일) 관노로,시어머니 이윤혜는 거제부 관비로 편입되었다.I2) 시숙부 황석필은 함경도 경흥(24일)으로,노비 육손은 갑산(15일반)으로,돌이는 함경도 삼수17일 반)로,여종 판례는 평안도 위원(17일)으로,복덕은 전라도 흥양(11일 반)으로,고음련은 경상도 단성(10일)으로, 여종 남편 박삼 취는 경상도 거창(8일)으로 유배되었다.
네 공모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정약전은 흑산도로,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14) 사학죄인의 유배지가 각기 다른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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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양상호,「구한말 제주읍성의 도로체계에 관한 연구」,『건축 역사 연구』20-6, 한국건축역사학회, 2011, 169〜183쪽.
7) 김의달,『한국 국토개발사 연구』,대학도서,1983, 220~223쪽.
8) 정2품 판서 이상 대신(대감)과 위리안치 죄인은 도사가,종2품 참판 이하에서 정3품 당상관(영감)까지는 서리가,정3품 당하관 이하는 나장이 압송했다《박명양•이의현 편,김영석 역주,『금오헌록 역주』, 서울대학교 출판문학원,2016, 26쪽). 조정은 말을 지급하여 배려했고,유배인은 시종을 거느리고 고을 수령들의 호의를 받으며 여유롭게 유배길을 갔다(김경숙,「조선시대 유배길」, 『역사비평』67, 역사문제연구소,2004, 265〜266쪽).
9) 서울부터 강진 유배지까지 죄인의 신상(나이,신장,얼굴색, 수염, 흉터, 기타 등)을 적어 지나가는 각 읍(邑) 및 각 역(驛)에서는 군인을 다수 지정하여 차차로 호去함으로써 중간에 도망가지 못하도록 했다(「1875년 형조 유배죄인 이성영(李聖榮) 호송첩」, 고려대학교 해외 한국학자료센터).
10) 제주 옛길을 표시한 지도는『대동여지도』(1861년L「동여도」(1849〜1863),『1872 지방도』「제주삼읍지도」이다.『도로고』(1770),『대동지지』(1861〜1866),『대동여지도』(1861)에서 노정을 찾아 국토지리정보원「구지도」(1918)八현지도」(2023),「네이버 지도」 (2023)와 비교 분석하였다.
11) 형조에서 규정한 각 유배지 도착 일정이다(『의금부 노정기』,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12) 洪羲運,以義禁府言啓曰,卽接漢城府牒報及西部成冊,則大逆不道罪人嗣永應坐諸人,査出以來矣.其母允惠慶尙道巨濟府,妻命 連全羅道濟州牧大靜縣,竝緣坐爲婢,子景漢年二,以年未滿,依律文免絞,全羅道靈巖郡楸子島爲奴,而右罪人等今方捉囚,當部竝 令刑曹押送于各其配所, 何如? 傳曰, 允(『승정원일기』, 순조 1년 11월 7일).
13) 조광 역,『역주 사학징의』1,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 2001, 273〜274쪽.
14) 정약전•약용은 11월 5일(음) 서울에서 출발하여 11월 21일(음) 아침 나주 율정 주막에서 흑산도와 강진으로 헤어져 유배길을 갔다(최성환,『유배인의 섬 생활』,세창미디어, 2020, 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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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모여 천주교 신앙을 하지 못하도록 결정한 조정 정책이었다.15)
정난주는 황경한을 업고 1802년 1월 22일(음 12월 19일)내) 제주로를 따라 시어머니(이윤혜)여종(복덕, 고음련),여종 남편(박삼취)과 함께 출발하여,삼례에서 이들과 헤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정난주 일행은 역졸이 호송을 담당하여『의금부 노정기』일정에 맞추어 바쁜 걸음으로 간 것으로 보인다.⑺
산과 하천이 많은 한국의 옛길은 산모퉁이를 돌고,고개를 넘거나,내[川]를 따라서 형성되었다. 조선시대 도로는 대로(大路,서울 길),중로(中路,고을 길),소로(小路,마을 길)의 형태로 관리되었고,지방도로는 10리마다 소후(小堠)를,30리(1식[息])마다 대후(大堠)를 세우고 역을 두었으며,후(堠)에는 이수(里數)와 지명을 새기도록 하였다.18)
정난주가 유배 간 제주로는『도로고(道路考)』와『대동지지』에서 노선의 지점과 거리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리지 발행과 정난주 유배 간에 시점 차이가 발생한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순조 연간(1800〜 1834)에 제작된『동역도(東域圖)』를 통해 노정을 살피고자 한다.⑼
『동역도』는 노선 지점과 거리(里,숫자)를 상세하게 표시하고 있어,19세기 전반 제주로 노정을 밝힐 수 있고,『도로고』.『대동지지』 와 비교하면 제주로 변학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20)『동역도』에 따른 제주로 노정은〈표 1〉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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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조광 역,앞의 책,63〜64쪽 ; 이기경 편,『벽위편』권2, 대왕대비전교,서광사,1978, 350352쪽.
16) “위의 사람들은 황사영이 체포되기 전 포도청에 아울러 체포되었다. 1801년 11월 6일(음) 본 형조에 이舍되어 왔고,12월 19일 (음)에 국청의 분부로 정배 보냈다”(조광 역,앞의 책, 274쪽.278쪽).
17) 역졸은 자신이 소속한 역도(驛道) 구간을 호송한 후,다음 관할 첫 역에서 인계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로를 지나는 역도는 서울《청파역L 양재도(과천, 양재역),성환도(천안, 성환역), 삼례도(전주, 삼례역),청암도(장성, 청암역),벽사도(장흥, 별진역)이다 (류명환,앞의 책,378〜388쪽).
18) 『경국대전』공전(工典) 교로조(橋路條)에 의하면 도성 안 도로 너비는 대로 56척(尺),중로 16척,소로 11척으로 하고 양옆 도랑은 너비 2척으로 하도록 하였다(법제처,『경국대전』,부산일보사,1965, 205쪽). 건축에 쓰는 영조척 1척은 31.2cm(정연식, 「조선시대 도로에 관하여」,『한국사론』42, 서울대학인문대학국사학과,1999, 546쪽)이므로 대로는 약 17.5m,중로는 약 5m, 소로는 약 3.4m였다. 유형원은 도성 안 도로는 대로 36보(步),중로 18보, 소로 9보로 하고, 외방 도로는 폭이 대로 12보(읍성안 : 18보), 중로 9보, 소로 6보로 규정하고 있다(유형원,한장경 역,『국역주해 반계수록』4, 충남대학교, 1968, 416〜419쪽).
19) 19세기 전반(1800〜1822년 추정)에 작성된 1첩(8절)의 필사본 채색도이다. 고성(古城)과 고지명,고을과 월경지,수영, 진영,봉화대, 역과 찰방 등의 지명이 풍부하다. 산줄기와 물줄기는 물론 길과 거리를 표시하고 있고,봉화로와 해로까지 표시되어 있다 (『동역도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 류명환•김기혁,「『여지고』와『동역도』의 9대로 비교 연구」,『문학역사지리』25-1,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13, 24쪽).『동역도는 노선,지점과 거리를 표시(十, 卄,*)하고 있다.
20) 『도로고와 비교하면 ① 수원 읍치가 화성(華城)으로 이동하고, ② 영학《迎華)역이 새로 생겨났으며,③ 장성〜나주 구간은 북창을 거치는 노선을 표시하고 있다. ④ 이성(尼城)이 노성(魯城)으로 고을명이 바뀌었고, ⑤ 호현(현 남태령), 대백치,황화정 지점을 추가했다.『대동지지』는『동역도』에 비해 ① 오산점이 발달하여 청호(靑好)역이 없어지고,② 공주를 우회하는 노선(모로원〜금강진〜효가리)이 생겨났다. ③ 공주 광정창(倉)이 광정역(驛)으로,장성 청암(靑岩)역이 단암(丹岩)역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④ 승방평,인덕원, 가천, 홍경비,노령 지점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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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고』와『대동지지』이정(里程) 표기는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 구간이 1리(里)21 22 23 24 25) 단위인 데 비해, 서울에서 먼 충청•전라 구간은 5리40리 단위이다. 이는 지리지 저술과 지도 제작 시 답사•실측의 지역적 한계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로 서울에서 먼 지역일수록 지점과 거리의 정확성이 떨어진다.『동역도』는 5리.10리 단위로 거리를 표기하고 있다. 서울에서 이진까지 총 955리를 조선시대 하루에 걷는 70〜90리(평균 80리)로 나누어 계산하면 12일 소요하는 거리이다. 정난주 유배 제주로 노정을『동역도』를 참조하여 추정해 보면〈표 2>와 같다.
2)해남〜제주(제주 바닷길)
제주로 가는 바닷길은『도로고』,『대동지지』에 의하면 영암 이진26), 해남 관두, 강진 남당에서 출항하고,주로 이진을 이용했다. 고려시대에는 출발하는 장소는 달라도 모두 추자도에서 바람을 기다려 해협을 건녔으나,27) 18세기에는 소안도에서 지름길로 건넜다. 신경준은 바람을 놓치면 전복하기 쉬우므로 옛사람처럼 추자도를 경유하는 것이 정로(定路)라고 조언한다. 육지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은 화북포와 조천포를 이용하였다. 사람들은 제주 바다를 건널 때 파선·표류에 대비하여 별도 구조선, 혼탈피모(渾脫皮毛), 표주박, 미숫가루와 떡 등을 마련했다.28) 〈표 3〉은 『도로고』에서 제주 바다를 건너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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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계(鷄)’를‘제(蹄)’로 표기한 오류로 보인다.『도로고』와『대동지지』에는 ‘금제역(金蹄驛)’이다.
22) 영암에서 월남점까지는 약 20리(8.8km)이고,월남점에서 석제원까지는 약 10리(4.5km)이다.『동역도』의 오류로 보인다.
23) 밑줄은『도로고』에서 추가,변경된 부분을 나타낸다.『동역도』는 고을과 가까운 역(양성〜가천역,공주〜일신역,여산〜양재역, 전주-행곡역,태인〜거산역,나주〜청암역,영암〜영보역,해남〜별진역) 표기를 제외하고 있다(『동역도』,규장각 한국학연구원).
24) 조선시대 1리는 360보이고 1보는 6척이었다(법제처,『속대전』,1965, 323쪽). 도로의 거리를 재는 주척(周尺) 1척은20.7(20.66/20.81)cm였다《남문현 외,『동률도량형』, 문학재관리국,1992, 70〜72쪽[문화재청 홈페이지 검색]). 따라서 조선시대 1리는 약 450m, 10리는 약 4.5km로 여겨진다.
25) 『동역도』노정으로 추정하고,기상 및 상황에 따른 대기 기간은 제외했다.
26) 당시 이진 해남 땅에 속해 있지만 영암 월경지(越境地)였다.
27) 옛 지리지에 ① 나주 영산포(무안 대굴포〜영암 학무지〜미도〜해남 어란포〜거요량[광아도]),② 해남(삼재포〜울도〜거요량),③강진(군영포〜고자황이〜노슬도〜삼내도)을 출항하는 세 노선은 모두 추자도를 거쳐 제주로 갔다(류영환 편,앞의 책,424〜4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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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가 탄 배는 이진에서 출발하여 황경한 유배지 추자도(하추자 당포[堂浦]30)를 들러 별도(학북)포31)로 간 것으로 여겨진다. 김병준은『교회와 역사』1977년 10월호에 채집 전승인「황사영 처자의 귀양길」을 게재했다.32) 이 글에서 음력 11월 21일 출발,1명 시녀 동행,목포 출항,동짓달 중순 도 착은 사실과 다르고,황경한을 예초리 바위에 내려놓은 이야기는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33) 추자도로 유배된 황경한은 보수주인(保授主人)34) 오 씨 민가에 맡겨진 것으로 여겨진다. 정난주가 별도 포구에 도착하여 1박 후에 중산간 오솔길로 100여 리를 가서 대정현에 도착한 이야기는 일반적 사실에 부합 한다. 또 저고리 동정 안에 이름을 적어 놓은 일,35) 경한과 편지를 왕래한 일36)은 사실로 보인다.
3)다른 여행 기록
1817년 대정 현감으로 부임하는 김인택(金仁澤)은 6월 10일(음 4월 26일) 출발하여 시흥,수원,아산,임천,김제,고부,영광,함평,나주,영암,해남을 거쳐 13일 걸려서 이진에 도착했다. 김인택은 제주로가 아닌 서쪽 평야 고을을 들르는 노정을 이용하였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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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혼탈피모는 털 없는 가죽옷으로, 바닷물에 부풀면 구명복과 비상식량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김오진,「조선시대 이상기후와 관련된 제주민의 해양활동」,『기후연구』4-1, 건국대학교 기후연구소, 2009, 47〜48쪽).
29) 류명환 편,앞의 책,421〜426쪽 ;『대동지지』,552〜554쪽.
30) 하추자도 예초리 부근으로 보인다(『동여도J1849〜1963] :『1872 지방도』「영암추자도지도」).
31) 별도포는 제주도에 도착한 유배인을 제주목으로 인계하는 가장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황경수,「해방 이전 제주항로의 변천사 연구」,『탐라문화』23, 2003, 110쪽).
32) 음력 11월 21일 서울에서 출발한 정난주는 시녀 1명과 목포에서 배를 타고 오던 중 추자도 근처에서 나졸에게 패물을 주어 황경한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하게 하고,저고리 동정 안에 이름을 적어 넣고 예초리 서남단 바위 언덕에 아이를 버렸다. 춘자도에 내려오는 전설에는 소에 풀을 뜯기던 뱃사공 오 씨 부인이 울음소리를 듣고 아이를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동짓달 중순(음 11월 15일) 저녁에 학북포에 도착하여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고 출발하여 중산간 오솔길(현 제주시 서쪽 애월면 광령리)을 거쳐 1백여 리 길을 걸어 대정현에 인계되어 객사에서 며칠을 유숙했다(『교회와 역사』25히1977년 10월], 한국교회사연구소, 2쪽).
33) ① 두 살배기(걸음마 단계) 어린아이를 위험한 바위에 놓아둔 일,② 유배지인 추자도에 내려놓으며 바다에서 죽었다고 허위 보고할 이유가 부족한 점,③ 김상집 편지에 “추자 예초 적객(귀양살이) 황 서방 우중 입납”으로 시작한 점(「정난주 부고 편지」 용수성지 기념관 : 홍동현,「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마리아)의 제주도 유배 생활과 천주교」,『다산과 현대』10,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2017, 256쪽).
34) 조선시대 유배 죄인의 거처와 음식을 마련하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던 책임자(네이버 어학사전).
35) 이름이 적힌 배냇저고리는 1965년 오 씨 집 학재로 소실되었다(『제주 천주교회 100년사』,2001, 48쪽).
36) 김상집 편지에 “종전에 뵈온 바 없사오나 소식 종종 들어 아읍더니 근래에 소식 듣지 못하오니 매우 딱합니다”(「정난주 부고 편지」,용수성지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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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에서 2일 기다려 6월 26일(음 5월 12 일) 출항하고,소안도에서 또 하루 머문 후 출발했으나,비와 바람으로 추자도로 피항했다. 추자도에서 14일을 대기하고 7월 11일(음 5월 27일) 떠났으나 평온한 무풍으로 노를 저어 별도포에 도착하였다.38) 다음 날 제주목에서 하루 쉬고 7월 13일(음 5월 29일) 대정으로 출발했다. 총 90리 길인데,45리 이왕원에 도착하니 아전,군졸,별감 등 50〜60명(말 50〜60필)이 대기하고 있었다. 점심 후 출발하여 광림수39)에 이르렀는데 날이 어둑어둑하고 앞이 안 보여 자단리에서 묵었고,다음 날 대정현에 도착했다.40)
정난주가 사망한 2년 후에 김정희(金正喜,1786〜1856)가 윤상도 옥사 사건 재론으로 대정현에 위리안치(圍離安置) 유배형을 받았다.41) 김정희는 9월 29일(음 9월 4일)42 43) 제주로를 따라서) 의금부 도사(안종식)와 함께 20여 일 걸려 해남에 도착하고, 대둔사<현 대흥사)에서 초의선사(草衣禪師,1786〜 1866)를 만났다.
초의선사는 강진 유배 중이던 정약용과 친밀했던 김정희의 오랜 벗이었다. 김정희는 이진에서
10월 22일(음 9월 27일) 아침에 출항해 순풍으로 저녁 무렵 학북진에 도착했다. 다음 날 이진에서 동행한 제주목 아전(고한익) 집에서 이틀을 묵고,10월 25일(음 10월 1일) 대정으로 출발하여 산록길을 갔다. 80리 길로, 절반은 인마가 다니기 힘든 돌길이었고, 절반은 평탄한 숨속 길로 햇빛이 실낱같이 비치는 풍광이었으며,겨울에도 푸르고 내지(內地)와 다른 빨간 단풍인 아름다운 나무들이었다고 아우(김명희)에게 전했다.
저녁 무렵 대정현에 도착하여 보수주인 총계순 집에 거처하였다.44) 김정희는 1848년 해배(解配)되어 이 길을 되돌아온 것으로 여겨진다.
3. 제주〜대정 산록길
제주는 학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섬으로 한라산이 가운데 있고, 중산간 지역45)에 많은 측화산 오름과 평원 목초지가 형성되어 있다. 제주 마을은 용천수가 솟아나는 해안가를 따라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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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여러 고을을 들러 견문을 넓히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38) 백규상 역,『역주 대정현 아중 일기』,제주문학원,2021, 10〜19쪽.
39) 제주와 대정현의 경계 부근 광림평에 있었던 늪이나 덤불[薮]로 보인다(『해동지도』「제주삼현도」[175이 ;『제주군읍지』「제주지도」[1899]).
40) 백규상 역,앞의 책,18〜21쪽.
41) 1840년 김정희의 동지 부사 연행 출발을 앞두고,헌종 친정 후 세력 기반 강학를 위해 안동 김씨 세력과 김우명(김정희가 1826년 암행어사 때 비리 혐의로 파직)이 1830년 윤상도 상소(김노경 고금도 3년 유배) 사건을 들추어 모함한 사건이다. 김정희는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고 제주 대정에 위리안치 유배되었다《안외순,「추사 김정희 가의 ‘가학’와 '윤상도 옥사’」,『추사연구』4, 추사연구회,2006, 288〜295쪽). 달레『한국 천주교회사』에 유진길이 김정희에 천주교를 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달레,『한국 천주교회사』중,425〜426쪽 각주 9), 김정희와 관련한 기록에서 천주교에 관한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42) 吳取善,以義禁府言啓曰,鞫囚罪人正喜大靜縣圍籬安置事,承傳啓下矣.正喜大靜縣圍籬安置,而以承傳內辭意,具罪目,依例發 遣府都事,押送配所,何如? 傳曰,允(『승정원일기』,헌종 6년 9월 4일\
43) 유배길 도중에 예산에 내려와 있던 부인이 천안으로 찾아가 만났다<김경순,「추사 김정희의 한글 편지 해독과 의미」,『어문연구』75, 2013, 16-19쪽).
44) 김정희,김익환•홍명희 편,『완당선생전집』책2, 영생당,1934, 131~133쪽 ; 양순필,「추사 김정희의 한문서한고」,『탐라문화』
9,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소, 1889, 89〜90쪽 ; 유홍준,「추사 김정희 : 유배지에서 피어난 꽃」,『역사비평』45, 역사비평사,1998, 302〜303쪽 : 양진건,『제주 유배길에서 추사를 만나다』,푸른역사,2011,64〜68쪽.
45) 제주도를 해발고도에 따라 해안 지역( ~200m),중산간 지역(200〜600m),산간 지역(600m〜 )으로 나누고 있다<제주도한라산생태 문학연구소,『한라산의 인문지리』,2006, 45〜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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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길은 해안 마을을 이어 가는 길(연포대로[沿浦大路],하대로[下大路])이 먼저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길로 제주에서 한라산 남쪽 마을로 가려면 숙박이 필요했다. 따라서 목장과 중산간 마을이 생긴 후,하루 만에 갈 수 있는 산록 지름길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46)
조선은 1416년(태종 16) 제주를 제주목,대정현,정의현 3개 읍으로 나누고,군사, 행정 목적에서 제주〜정의 산록길과 제주〜대정 산록길(상대로[上大路,웃한질]47)을 개선, 정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은 중산간 마을을 지나며 관영 목장을 관리할 수 있었다.
『도로고』「제주 3읍로」해안길은 제주에서 대정 경계(100리),대정에서 제주 경계(40리),대정에서 정의 경계(50리),정의에서 대정 경계(85리),정의에서 제주 경계(45리),제주에서 정의 경계(100리)에 이르는 총 420리이다. 동쪽 산록길은 제주에서 정의 경계(50리),정의에서 제주 경계(20리)로 총 70리이고,서쪽 산록길은 제주에서 대정 경계(50리),대정에서 제주 경계(30리)로 총 80리이다.48) 그러나『도로고 』 「고을관할」 에 동쪽산록길은 70리로 같으나, 서쪽산록길은 제주에서 대정경계(70리),대정에서 제주 경계(30리)총100리로 20리
차이가 난다.49)『대동지지』제주길은『도로고』에 비해 서쪽 산록길 자단촌〜대정현,동쪽 산록길 빈래촌〜정의현 거리가 각 10리씩 늘었다.50) 또『대동여지도』에 제주 동쪽 별방길(현 하도,80리),제주 서쪽 명월길(현 한림,60리),대정 서쪽 차귀길(25리)이 추가되었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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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전영준,「고려〜조선 시기 제주 동부지역 교통로와 보문사지」,『역사민속학』58, 민속원,2020, 94쪽.
47) 대로는 폭이 넓은 서울 길을 말하는데,제주에서는 해안길•산록길을 대로로 표기•기록한 점이 주목된다.
48) 류영환 편저,앞의 책,224-225쪽.『1872 지방도』「제주지도」•「정의군지도」•「대정군지도」의 해안길은 제주〜(95:35)〜정의~(75:57)~대정~(37:10아~제주로 총 399리이다.
49) 류영환 편저, 앞의 책,338〜339쪽.
50) 『1872 지방도』에는 제주〜(58:32)〜대정(90리)과 제주〜(50:20)〜정의(70리)에 산록길 경계를 표시하고 있다. 또『대동여지도』에 제주~정의 간 거리 표시가 70리인 점으로 보아『대동지지』의 오류로 보인다.
51) 제주〜별방,제주〜명월 길은 실제 개통되지 않았던 것 같다는 견해가 있다《김중근,『증보 제주 건설사<도로,교량,교통)』,반석인쇄사,2020, 29쪽). 김정호는『대동지지』정리(程里)편「제주로」에『대동여지도』에서 표시한 제주〜별방길,제주〜명월길의 정리(程里)는 기록하지 않고 있다《김정호 편,『대동지지』,한양대학교 국학연구원,1974, 546쪽). 그러나「구지도」와 현대 지도에 유사한 길이 부분적으로 존재한다(세학〜덕천〜선흘-도련〜제주,제주-노형〜고성〜장전〜납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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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난주 유배 제주 산록길 노선은 다음 5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화북진에서 제주목까지
고개(해발 67m)를 넘는 해안길이다. 2단계는 제주목에서 노형촌(80m)까지 서서히 오르막길이다. 3단계는 노형촌에서 이생촌(230m)까지 중산간 1차 오르막과 무수천을 건너 유신촌(220m)을 지나고 금물덕(280m)까지 허리길이다. 4단계는 금물덕에서 원(440m)을 지나 광판(440m)에 이르는 중산간 2차 오르막과 허리길이다. 5단계는 자단촌(320m)을 지나 대정현(50m)까지 서서히 내리막길이다.
국토지리정보원 「구지도」/「현지도」에서 지점 높이와 구간 거리를 측정하여, 『도로고』·『대동지지』와 비교해 보았다. 전체 거리는 약 90.9/88.3리(41.1/39.8km)로 『1872 지방도』, 『대정현 아중 일기』의 90리와 유사하다. 『도로고』에 비해 제주목~노형촌 구간에서 약 1.3/1.1리, 노형촌~이생촌 구간에서 약 5.8리, 금물덕~광판 구간에서 약 2.7/1.7리가 늘었다. 지리지에서 누락된 원(院)의 거리는 제주에 서 약 46.5/45.2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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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김정호 편, 앞의 책, 546쪽. 밑줄은 『도로고』와 차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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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북진~제주목(고개 넘는 해안길)
해안길은 바닷가에서 깊거나 넓어진 하천으로 끊어진다. 하천을 건너려면 산 쪽으로 올라 바닥이 낮은 곳을 건너 내려와야 한다.55) 이 지점에 길이 만들어지고, 다리가 설치되었다.
화북진(禾北鎭) : 제주시 화북1동이다. 제주목 동쪽 10리에 있는 포구로 영아를 두고 진지를 쌓았다.56) 지금은 세 겹으로 방파제를 설치하고, 조금 떨어진 바닷가에 별도연대(別刀煙臺)와 환해장성(環海長城)이 일부 복원되어 있다.
화북진~제주목 : 화북진에서 서쪽으로 비석거리57)를 만나고 화북천 옆길을 따라 산 쪽으로 가는길이 옛길 노선으로 보인다. 오현고 앞에서 큰길(1132번[일주도로])을 만나 화북천을 건넌다.
수령들이 서울로 오가는 길이라 다리(별도천교[화북교])58)가 있었다. 다리를 건너 오르막으로 제주교육대학, 국립 제주박물관을 지난다. 사라봉 기슭과 고개(현 일도 파크빌)를 넘어59) 언덕길(현 동문로)을 내려갔다. 제주성 동문으로 들어가 산지천 돌다리(가락교)를 건너서 제주목 관아에 도착했다.
제주목(濟州牧) : 제주시 삼도 2동이다. 삼국시대에 제주는 ‘탐라’라는 나라였으나, 1105년(고려 숙종10) 탐라군이 되고, 고종 때(1214~1259) 제주군으로 바뀌었다. 1273년에 원(元)은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여 목장을 운영했으나, 1294년(충렬왕 30) 고려에 돌려주었다.
조선시대 1416년(태종 16)에 3개 읍으로 나누고, 1894년 군으로 행정명을 바꾸었다.60) 조선은 해안가에 둘레 5,489척(약 1,713m), 높이 11척(3.43m), 3문(동·서·남)인 제주읍성을 쌓았다.61) 현재 군사 훈련장이었던 관덕정이 옛 모습대로 있고, 제주목 관아는 새로 복원되었다.
2) 제주목~노형촌(서서히 오르막)
제주목~노형촌 : 관덕정에서 복개한 병문천을 지나 서문로를 따라가면 오른쪽에 제주향교가 있다. 더 가면 한천교를 건너고 용문로를 따라간다. 조선시대 한천에 돌다리(대천교)가 있었다. 제주공항 끝에서 왼쪽으로 월성로4길을 따라 명신 마을 복지회관을 지나면 신제주 입구 교차로와 도령로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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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구지도」 무동동과 「현지도」 동광리의 마을 위치가 변동되어 차이가 발생한다.
54) 국토지리정보원 「구지도」에서 등고선을 이용해 지점 높이를, 「구지도」/「현지도」에서 거리 측정 도구를 이용해 구간 거리를 산출하여 리 단위로 환산했다. 「구지도」 지도 측정 거리는 옛길과 유사한 노선이나 정확성이 부족하고, 「현지도」 지도 측정 거리는 정확성은 높으나 직선화로 개량된 노선이다. GPS를 활용한 인터넷 지도상 거리 측정 도구를 이용한 것으로, 직접 답사해 실측한 정확한 수치는 아니지만 유의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55) 해안 마을 간에 길이 끊어지면 배를 이용했다. 해안 마을은 중산간 마을과 활발히 교류하여 하천을 건너는 길이나 다리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로도 여겨진다(『1872 지방도』 「제주삼읍도」).
56) 1678년(숙종 4)에 동서 120m, 남북 75m로, 둘레는 187m의 타원형 형태로 축성하고 동문과 서문이 있었다(『해동지도』 「제주 삼현도」[1750] ; 디지털 제주 문화 대전).
57) 제주 수령의 공덕을 기리는 선정비로, 화북성 근처 흩어져 있던 13기를 화북 포구로 모아 세웠다가 다시 화북동사무소 500m 서쪽으로 옮긴 후 도로 구획 정리하면서 현재 위치로 옮겼다(향토 문화 전자 대전).
58) 제주목의 다리는 『탐라지』에 가락교, 화북교, 대천교, 석량(이원진, 『탐라지』[1653], 한국학 중앙연구원 디지털장서각, 본문 14 쪽), 『대동지지』에 별도천교, 대천교, 가락교, 함덕포석교, 화북천교를 기록하고 있다(『대동지지』, 앞의 책, 280쪽). 화북천교는 별도천교와 중복으로 보인다. 국토지리정보원 「구지도」에는 별도교, 동문교, 서문교, 삼양교가 ‘] [’로 표시되어 있다.
59) 김오순, 「화북포구에서 제주성 안까지 옛길을 걷다」, 『제주발전포럼』 38, 제주발전연구원, 2011, 117~124쪽.
60) 1894년 갑오경장 때 주, 목, 군, 현을 모두 군으로 바꾸고 월경지를 폐지했다.
61) 『해동지도』 「제주삼현주기」(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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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령로를 따라 남녕고 앞에서 흘천(노형교)을 건너 노형촌(원노형)이 나온다.
노형촌(老衡村) : 제주시 노형동이다. 노형촌은 한라산 북서 사면 마을로 남쪽에 어승생오름이 있고, 600년 전 사냥과 목축을 생업으로 생긴 마을이다. 현재는 신제주 중심가로 바뀌었다.
3) 노형촌~이생촌~유신촌~금물덕(중산간 1차 오르막과 허리길)
중산간 지역에 목장과 마을이 형성되어 하천과 능선을 따라 해안 마을을 오가는 길이 생겨났다. 중산간 마을끼리 길은 하천을 건너고 하잣성을 따라 허리길이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제주 하천은 사방으로 빠르게 흘러 바다로 빠져나간다. 평시에는 돌바닥을 드러낸 건천이고, 비가 오면 큰 물살을 이루는 좁고 긴 세장형(細長形) 하천이다. 한라산 북서면 중산간 지역은 급한 경사로 발달한 하천 여러 개를 건너야 하는 구간이다. 제주 하천은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고 바닥이 낮아져 건너기가 쉬워진다.
중산간 지역은 얕은 화산토와 현무암 암반 지대여서 물이 고이지 않고, 우물을 깊이 팔 수도 없다. 중산간 마을은 용천수가 나오는 곳에 만들어지고, 그렇지 않으면 빗물을 모으거나 작은 연못이나 암반에 고인 깨끗한 물(봉천수[奉天水])을 이용해야 했다.62) 제주~대정 산록길은 식수를 만나는 중산간 마을인 이생촌, 유신촌, 유수암, 금물덕을 거쳐 갔다. 이 마을은 목장 4~5소장과 하잣성을 따라 만들어졌고, 목장 출입구와 유수지가 있었다.
고려 말에 설치된 목장은 조선시대에 10개 소(所)로 운영되었다. 1430년경부터 하잣성63)을 쌓아 위쪽은 목장, 아래쪽은 경작지로 구분했다. 1440년부터 제주 목사가 3읍 감독관을 겸직했고, 제주목은 물장오리오름에서 거문덕이오름까지 1~6소장, 대정현은 7소장, 정의현은 8~10소장을 관리했다. 17세기 중반에 11개 소장(제주목 7개)이었다가, 1704년에 다시10개 소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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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강수경, 「제주 물의 이용 양상과 민속적 의식」, 『제주도 연구』 57, 제주학회, 2022, 76~77쪽.
63) ‘잣’은 성을 의미하는 고어인데, ‘목장 경계에 쌓은 돌담’을 말한다. 15세기 해발 150~250m에 농경지와 방목지를 구분하는 하잣성을, 18세기 후반 우마의 동사 방지를 위해 350~400m에 상잣성을, 19세기 말 350~ 400m에 농목(農牧) 교체 방식이 등장하면서 중잣성을 쌓았다(강만익·송성대, 앞의 글, 458~4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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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에 들어 총과화포 등 병기가 발전하여 말의 수요가 줄면서 목장은 축소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중산간 목장 내에 경작지가 생기고, 목장 일부가 폐쇄되기 시작하였다.64)
『1872 지방도』 「제주지도」에는 고을을 연결하는 길을 표시하면서 ‘상대로(上大路)’와 ‘하대로(下大路)’란 글자를 길 방향으로 표기하고 있다. 상대로는 노형리에서 이생리 방향으로, 하대로는 대독리(현 용담1동)에서 도두리(현 도두동) 방향으로 표기되어 있다.65)
노형촌~이생촌 : 노형촌에서 이호천·원장천을 건너 도근천·어시천·무수천(현 광령천)을 만나게 된다. 어시천을 건너기 전 노형촌(80m)에서 이생촌(230m)까지 오르막을 올라야 한다. 이생촌 가까이에 어시천을 쉽게 건너는 지점이 있다.66) 노형촌에서 이생촌까지 지도 측정 거리는 약 10.8리(4.9km)로 『도로고』의 5리(2.2km)와 차이가 난다.
이생촌(伊生村) : 제주시 해안동 2650번지 주변이다. 국토지리정보원 「구지도」에 해안리 위쪽에 ‘이생동(伊生洞)’이란 표시가 있다. 옛 지도에는 이곳에 목장 4소 출입구(粱 : 도)와 못(㤠古池)이 있었다.67) ‘이승이’라고 불리던 이생촌은 50~60가구 마을로 산간 밭을 일구고, 죽세공품을 만들었다고 한다.68) 1948년 4·3사건69) 때 마을이 불타고 살아남은 주민들은 아랫마을(해안동)로 이주했다. 지금은 돌담밭, 대나무 숲, 4·3사건 표지석 등 흔적이 남아있으며, 펜션이 들어서 있다.
이생촌~유신촌 : 현재 광령교에서 천을 따라 위쪽 약 1.5km 지점이 무수천70)을 건너던 곳으로 보인다. 이생촌에서 옛 마을 우물(복음물)을 지나 무수천 바로 앞까지 직선 길이 남아 있고, 해안동 「지적원도」에 도로 표시가 되어 있으며,71) 무수천 양쪽(현 해안동, 광령동)에서는 지금도 밭을 경작하고 있다.
이 지점을 건너 이생촌에서 유신촌까지 지도 측정 거리는 약 4.9리(2.3km)이다. 무수천을 건너 간간이 길 흔적은 있으나 이어지지는 않는다.72) 현재 평화로가 산을 절개하여 확장되면서 옛길은 끊어 졌지만, 육교(차량, 도보)를 건너면 유신촌으로 갈 수 있다.
유신촌(有信村) : 제주시 애월읍 광령2리 마을이다. 조선시대 목장 5소장 유신량(有信梁)이 있었다.73) 『대동여지도』 무수천 동쪽에 있는 유신촌은 ‘이생촌’을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구지도」에는
‘(有信洞)’으로 표기되어 있고, 마을 가운데 공동 우물 ‘거악대물’이 있다. 이생촌과 비슷한 높이(220m)로 북쪽 해안을 멀리 바라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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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강만익·송성대, 앞의 글, 434~441쪽.
65) 동쪽 산록길 상대로는 제중원(濟衆院)에서 동쪽 정의현 방향으로 표기되어 있고, 동쪽 해안길 상대로는 소흘리(현 삼양2동)에서 신촌리로 가는 길에 표기되어 있다(『1872년 지방도』 「제주지도」).
66) 이 지점은 해안동 1714번지 지점으로 하천 폭이 좁고 바닥이 낮아 쉽게 건널 수 있다. 지금은 세월교로 하천 건너 밭을 가꾸고있다(2022년 7월 25일 답사 확인).
67) 『해동지도』 「제주삼현도」(1750).
68) 이생촌에서는 ‘복음물’, 해안촌에서는 ‘독성물’을 식수로 이용했고, 복음물 부근에 무수천을 가로질러 애월로 건너가는 지점이있었다고 한다(2022년 7월 21일 해안 마을 주민 김승규[77세] 증언).
69)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많이 희생한 사건이다. 남로당 무장대는 일본이 숨긴 무기와 한라산의 자연 동굴을 이용해 경찰지서를 습격했고, 미군정이 이들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중산간 마을이 불태워지고 14,532명의 사망자를 냈다(네이버 지식백과-두산백과).
70) 무수천은 1936년 광령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하천은 한라산 정상 서북벽과 장구목 일대에서 시작하는 Y계곡이 발원지이고 어승생 수원지를 통과한다. 하류에 진달래소(沼), 고냉이소, 진소, 검은소 등이 있고, 하천 부근에 솟는 물은 중산간 마을 식수로 사용되었다(『한라산의 하천』, 제주도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2006, 48~50쪽).
71) 「지적원도」 해안동 75-61호.
72) 이 지점을 건너 유신촌과 광령촌으로 가는 길이 분기했을 것으로 보인다(「지적원도」 광령리 72-15호).
73) 『해동지도』 「제주삼현도」(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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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촌~금물덕 : 광령2리 마을을 통과해 광상로를 만나 고성천을 건너고, 항파두리성 회전교차로를 지나 석재공장 앞에서 소왕천을 건넌다. 하천을 건너자마자 오른쪽 좁은 샛길이 유수암 마을로 가는 옛길로 보인다. 마을에서 산 쪽 언덕을 올라 유수암 평화로, 유수암로1길, 유수암로, 유수암로4길로 수산천을 건너 거문덕이 마을 표지석을 만난다.
금물덕(今勿德) :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1474번지 주변이다. 거문덕이 오름 아래에 형성된 마을로목장 5소장 출입구(허문랑[許門梁])와 회연지(淮連池)가 있었다.74) 금물덕은 서쪽 내(수산천)와 동쪽 내(흐리물) 사이에 자리한 마을로, 동쪽 내를 경계로 유수암 마을과 구분된다.
국토지리정보원 「구지도」에 노형리에서 중산간 마을(해안리·이생동·광령리·유신동·유수암·금물리)을 거치지 않고 산록으로 바로 가는 노선(현 평화로)이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노선은 식수가 있는 마을을 거치지 않고, 이호천·원장천·도근천·어시천·무수천을 잇달아 건너야 하며, 노형촌(80m)에서 새마을금고 연수원(440m)까지 약 23.7리(10.7km)를 바로 올라야 한다. 조선시대 말이나 가마, 걸어서 다니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노선이다.
따라서 이 노선은 이생촌에서 무수천을 건너는 지점이 끊어진 후 일부 이용하다가,75) 일제 강점기에 교량(세월교[洗越橋]), 산 절개 등의 기술을 이용해 노선을 개선한 것으로 보인다.
4) 금물덕~광판(중산간 2차 오르막과 허리길)
제주 기후는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은 서늘하나, 바람이 많고 변화가 심하다. 강수량이 많아 봄과 여름에는 비가 많고, 가을과 겨울엔 산간 지역에 눈이 많다. 중산간 지역은 기상 변화가 잦고, 지형성 강우가 발생한다. 여름엔 태풍, 겨울엔 북사면 북풍이 강하고, 가을에서 봄까지 한라산 정상에서 저지대로 흐르는 차가운 공기 ‘노롯’이 있다.76) 이 구간은 목장 6, 7소장을 지나는 산록 지름길로 숲과 벌판이 펼쳐져 있다.
금물덕~원(院) : 거문덕이 마을 입구에서 수산천 지류가 둘로 갈라진다. 서쪽 내를 따라가는 길이 옛길이다.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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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위의 지도.
75) 노형촌~광령교~금물덕~원을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제주의 옛지도』, 「탐라약도」[1914~ ],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1996, 63쪽).
76) 김오진, 「조선시대 제주도의 기상재해와 관민의 대응 양상」, 『제주 지리론』, 한국학술정보, 2010, 170~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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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오르다 가파르게 올라가며 수산천을 따라간다. 숲속 오솔길을 오르면 새마을금고 연수원(440m)이 있는 평화로를 만난다. 여기서부터 평탄한 산록 허리길이다. 평화로는 4차선 포장도로로 교통량이 많고 자전거길, 도보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원 : 제주시 애월읍 소길리 원동 마을이다. 금물덕에서 10리 거리 금성천과 만나는 지점이다. 기상 변화가 심하고 마을이 없어 여행자의 안전과 숙식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78) 제주 산록길 중간에 있는 원이 『도로고』,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에 누락되어 있다. 현재 원동 마을은 간이식당과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원~광판 : 어음 교차로를 지나 평탄한 허리 길로 광판까지 이어진다. 넓은 벌판과 오름(바리메, 새별, 동물, 왕이메 등)이 좌우에 펼쳐져 있고, 서쪽에 해안 마을, 해안선, 비양도(飛揚島)가 보인다.
광판(廣阪)79) : 제주시 애월읍 봉성 교차로 부근으로 추정된다. 새별오름을 지나면 넓고 평평한 목초지 벌판을 만난다. 조선시대 6소장 목장 지대이다. 제주도에서 가장 높은 마을인 화전마을(560~570m)80) 버스 정류장이 있다.
5) 광판~대정현(서서히 내리막)
광판~자단촌 : 광판에서 약 2.8리(1.3km)를 가면 제주~대정 경계이다. 경계 부근에 광림수(숲)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81) 경계를 지나 정면에 산방산(山房山)을 보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이다. 감낭오름, 원물오름을 서쪽에 두고 지나면 동광 6거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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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동쪽 내는 원래 작은 물(흐리물)이었으나, 20세기 말 경마장 등 중산간 개발로 모든 물길 방향을 틀어 동쪽 내가 커졌음을 설명 하고 있다(거문덕이 마을 흘이물 유적비).
78) 『해동지도』 「제주삼현도」(1750)는 서쪽 중산간 지역에 ‘광제원(光濟院)’을 표기했다. ‘이왕원(利往院)’을, , 『1872 지방도』 「제주 지도」에는 ‘이왕원(利往院)’을, 동쪽 중산간 지역에 ‘제중원(濟衆院)’을 표기하고 있다.
79) ‘광판’이란 지명은 『도로고』와 『대동지지』, 「동여도」, 『대동여지도』에만 등장한다. 『해동지도』 「제주삼현도」에 광제원 옆 6소장에 ‘광제원평대(光濟院坪代)’를 표기하고 있고, 『1872 지방도』 「대정현지도」에는 제주 경계(7소장) 밖에, 「제주지도」에는 대정 경계 밖(6소장)에 광림평(廣林坪)을 표기하고 있다. 현재 지명으로 광평리(서귀포시 안덕면)가 있다. 광평(廣坪)의 오기로도 보인다.
80) 제주시 애월읍 봉성리 화전(火田) 마을로, 19세기 말 관영 목장 안에 화전 경작을 허용하여 생겨났다(한라산 생태문화연구소, 『한라산의 인문지리』, 2006, 15쪽).
81) 『해동지도』 「제주삼현도」에 제주(6소장)~대정(7소장) 경계에 빽빽한 숲을 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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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만든 평화로는 이곳을 우회하지만, 옛길은 동광 마을을 관통해 지나간다.
자단촌(自丹村) :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이다. 동광리는 대정현에서 21.5/18.9리로 『도로고』 20리와 유사하다. 18세기 여러 지도에서 표시된82) 자단촌은 원래 ‘단이’, ‘단리’에서 ‘광쳉이(光淸里)’ 로 바뀌었고,83) 「구지도」에는 제주~대정길을 중심으로 동쪽은 무동동, 서쪽은 마전동으로 나뉘었다.
자단촌~대정현 : 동광 마을을 지나 다시 평화로를 만난다. 서광1교차로를 지나 넓게오름(광해악) 가까이에 있는 오른쪽 좁은 길이 옛길로 보인다. 넓게오름이 끝나는 지점에서 갈림길이 나타나는데, 서쪽길(화순서로)이 옛길이다. 이 길은 다시 평화로319번길, 큰길 평화로와 만난다. 큰길에서 좁은 길 추사로36번길로 들어서면 대정현 읍성이 있다.
대정현(大靜縣) : 서귀포시 대정읍 보성리와 안성리 일대이다. 제주 남서쪽 끝에 있는 마지막 고을이다. 완만한 내리막에 둘레 4,890척(약 1,525m), 높이 9척(2.8m) 3문(동·서·남)인 읍성을 쌓았고, 성(城)안에는 객사·영아·창고·과수원(귤)이 있었다.84) 현재 읍성을 복원하고 있고, 추사 적거지와 전시관이 조성되어 있다.
대정현~정난주 묘 : 추사로를 따라 서쪽으로 보성초등학교(옛 고을 자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약 300m를 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왼쪽 보성상로로 직진하여 추사로247번길 교차로를 만나 남쪽으로 약 330m를 가면 오른쪽에 정난주 무덤(대정 성지)이 있다. 추사 적거지에서 약 5리(2.2km) 거리이다.
〈그림 6〉은 정난주 유배 제주 산록길 전체 노정에서 거리에 따라 높이를 표시한 그림이다. 화북포 에서 고개를 넘어 제주목에 도착한 후, 서서히 올라 중산간 지역을 2단계(230m, 440m)로 나누어 오르고 서서히 내려가는 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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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한라장촉」(1702), 『해동지도』 「제주삼현도」(1750), 『호남지도』 「제주지도」(1700) 등에 표기되어 있다.
83) 광청이[자단이][마을] 동광리와 서광리를 통틀어 일컫는 말(『한국지명총람』 16, 전남 Ⅳ 제주편, 389쪽) ; 디지털서귀포문화대전 ; 『1872 지방도』 「대정군지도」).
84) 『해동지도』 「제주삼현주기」(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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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맺음말
이번 연구를 통해 제주〜대정 산록길 노선의 형성 요인을 알 수 있었다. 첫째,고려시대 목장 설치로 중산간 마을과 길이 생겨났다. 둘째,조선시대 제주를 3개 읍으로 나누고,목장을 점검할 수 있는 중산간 지역과 마을을 지나는 노선을 취했다. 셋째,식수를 얻을 수 있는 마을과 원을 거쳤다. 마지막으로 하천 바닥이 낮은 지점을 건너는 노선으로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지리지『도로고』와『대동여지도』의 오류와 누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신경준의『도
로고』에서 총거리(80/100) 20리 차이의 오류가 있었다.8 6 ) 김정호는『대동여지도』에서『1872 지방도』 와 같은 90리로 바로잡았다. 둘째,김정호는 총거리 차이 10리를 대정현〜자단촌 간에 반영했다.87)
그러나,대정현〜자단촌 지도 측정 거리는 약 21.5/18.9리로,『도로고』와 유사하다. 실제 차이는 노형촌-이생촌(5.8리),금물덕〜 광판(2.7/1.7리) 등에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셋째,김정호는『대동여지도』이생촌 자리에 ‘유신촌’을 표기하고,‘이생촌’은 노형촌과 유신촌 사이에 잘못 표기했다. 마지막으로『도로고』에서 누락한 ‘원’을『대동지xᅵ』와『대동여지도』에서도 빠트렸다. 조선시대 지리지를 편찬하거나 지도를 제작할 때 이전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여 오류가 반복되었다.
김정호가『대동여지도』에 직선으로 길을 표시하고,10리 단위의 점으로 거리를 표시한 작업이 힘든 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 옛길의 특징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역이 없다. 제주 옛길은 1〜2일 노정으로 말을 교대할필요가 없고,자갈길이 많아 걸어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지점과 거리를 표시하는 장승,후수,후비가 없다. 외지인이 길을 이용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셋째,하천은 대부분 돌다리를 놓았다. 하천 바닥이 현무암 암반으로 나무 기둥을 세울 수 없고,비가 오면 큰 돌이 굴러 나무다리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옛길 노선이 잘 보존되어 있다. 정난주 유배길에서 끊어진 곳은 이생촌〜유신촌 한 곳뿐이다. 조선 후기 무수천을 건너는 지점이 끊어져88) 현재 지점으로 건너게 되었고,그곳에 다리(광령교)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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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국토지리정보원「구지도」에서 거리에 따른 높이(등고선)를 찾아 표시했다.
86) 신경준은『도로고』서문에 “이수(里數)에 대해서는 자로 재지 못해 바드시 정밀하지는 않다. 하천의 물길이 쉽게 변하고 읍리는 많이 옮겨지고,길의 곡직과 장단은 고금에 달라졌기에 지리지에 있는 옛 기록을 기준으로 할 수가 없었다. 듣고 물어본 것이 많아 바드시 오류가 있을 것이므로 뒷사람이 고쳐서 바로잡기를 기다릴 뿐이다”(류명환,앞의 책, 175쪽).
87)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자단촌을 제주〜대정 경계에서 제주 쪽으로 3〜4리 정도에 표시하고 있다. 이 지점은 ① 제주에서 60리,대정에서 30리로『도로고』(대정에서 20리)와 맞지 않고,②『대동지지』에는 광판과 자단촌 사이에 제주〜대정 경계가 있다(『대동지지』, 546쪽)고 기록해 모순되며,③ 그 지점에 마을이 있었던 기록이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88) 무수천을 건너는 지점이 끊어진 이유는 세장형 하천의 침식 작용인 하식(河蝕) 작용으로 보인다. 물속에 흐르는 자갈과 모래가 단단한 암반을 만나면 바닥을 매끈하게 하거나, 하상에서 암괴를 뜯어내 오목한 웅덩이(폭호,폭포)를 만들고,측면 암반을 뜯어 내 하천 깊이나 폭을 확장한다(『한라산의 하천』,제주도한라산생태문학연구소, 2006, 32〜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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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목장이 쇠퇴하면서90) 제주에 대한 관심도가 낮아지고,일제 강점기에 병참 기지화하면서 신작로와 다리가 만들어졌다. 제주 도로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960〜70년대 산업개발과 함께 내국인 관광객이 늘면서부터이다.
1967년부터 서부산업도로가,1969년에 제주〜서귀포 간 5.16도로가,1973년에 1100도로가 확장, 직선화, 포장 등 보수공사가 시작되고,1978년 제주도 종합 개발계획에 따라 중문관광단지 조성이 시작되었다. 1996년에 도로 및 기반 시설 공사를 착수하여 2002년 서부산업도로가 왕복 4차선으로 확장, 개통되었다. 오늘날 제주는 국제 관광단지로 급부상하면서 해외 관광객도 늘었다. 천혜의 자연 속에 골프장,올레길,오름 탐방 등 콘텐츠들이 개발되고 레저 인구가 유입되어 관광산업이 크게 발전하고 있다.
제주는 고유언어와 역사가 잘 보존된 세계 자연 유산 섬이다. 이 땅을 살았던 조상들은 나무에 맺히는 빗물 한 방울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육지에서는 도로 개량,철도,고속도로,터널,신도시,산업단지 조성으로 옛길 노선이 끊어지고 사라졌지만,제주는 옛길 노선을 잘 보존하고 있어 복원도 용이하다. 91)
정난주는 한국 천주교 공동체 초기에 세례받은 여성으로,명도회(明道會)를 통해 신앙을 전파한 정약종과 황사영을 도운 것으로 여겨지며,제주 대정현에 유배되어 37년을 살고 묻혔다. 제주 사람들은 고난 속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덕행을 실천하며 살아간 신앙인의 모습을 보았다. 정난주 유배길 복원을 통해 올바른 스토리텔링과 의미 있는 순례길이 만들어지길 희망한다.
오늘날 신앙인들은 순교자와 증거자들이 태어나고,살고,처형되고,묻힌 곳을 자주 찾아간다. 그 이유는 그들과 같은 공간을 기억하며 마음을 나누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 천주교회는 순례길 조성이 한창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성된 순례길은 교구 경계를 넘지 못하고 있다. 박해 시기 신앙 조상들이 걸었던 사실에 맞도록 교구를 이어가는 순례길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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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광령교는 1967년 9월에 개통했다. 이전에는 목교를 설치해 이용하다 홍수로 유실되었고,세월 다리를 이용해 임시 통행하는 형편이었다(『제주개발실록 역사보고서』, 제주특별자치도,2018, 326쪽).
90) 1894년 감목관제와 공마 제도가 폐지되어 공마 수송이 종료되고,1897년부터는 공마를 금납으로 대신하여 관영 목장이 없어졌다(강만익,舍성대,앞의 글,441쪽).
91) 무수천을 건너는 끊어진 지점에 구름다리를 설치한다면 쉽게 복원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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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발표 토론문
정난주 유배길 연구一제주 산록길을 중심으로’에 대한 토론문
一정난주 유배길에 대한 질문과 제언一
이건용(제주교구 신부)
제주도는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활용하기 시작하여,조선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유배지로 활용
되기 시작한다.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원악도(遠惡島)’1)라고 불렀으며,유배 장소로는 삼 읍인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곳곳에 적거(謫居)하였으나 특히 가장 악처(惡處)로 꼽힌 곳이 바로 ‘대정현’이었다. 현재까지 유배에 관한 선행 연구에 의하면 ,제주에 유배된 인원은 200〜3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 제주에 유배되어 온 자들은 주로 사화와 붕당 등 정쟁의 결과로 오거나,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며 대립하다 온 자들,정쟁의 피해를 입어 온 자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제주도민과의 관계를 통해서 제주 문학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자들도 있었다. 오늘 학술대회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난주 또한 남편인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으로 인하여 제주로 유배되어 왔지만 제주도민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였던 자로 알려져 있다.
앞선 유배에 관한 연구들은 유배 인원수, 유배 장소, 유배 원인, 유배 영향에 초점을 맞추며 연구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기존 정난주에 관한 연구도 이와 같은 맥락 안에서 어디서 유배 생활을 하였는지,유배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유배 이후에 어떠한 생활을 이어 나갔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 2) 발표자의 오늘 연구는 다소 생소한 주제라고 볼 수 있는 ‘유배길’에 중심을 둠으로써 다소 새로운 시각으로 정난주의 유배 생활에 대해서 접근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고 생각한다.
발표자는 발표문에서 우선적으로 정난주가 제주까지 이어지는 유배길을 서울에서 해남에 이르는
제주로, 해남에서 제주로 오는 바닷길을 나누어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주도 내부에 이르러서는 제주에 입도한 후 대정현에 이르기까지,정난주가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노정을 이어갔을지에 대해서 제주-대정 산록길을 통해서 밝히고자 하였다.
끝으로는 제주목에서 대정현에 이르는 제주 산록길의 형성 요인과 제주 옛길의 특징을 밝히며,오늘날 제주에서는 이러한 산록길과 옛길에 대한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유배길 복원을 통해서 만들어가는 순례길에 대해서 제안하였다. 토론자는 발표자의 발표 내용을 통하여,정난주의 유배길 노정을 따라가며 그 길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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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살기가 어려운 섬’을 일컫는 말로, 옛사람들은 ‘원악도’라고 하면 제주도를 떠올렸다.
2) 홍동현,「다산 정약용의 조카 정난주(마리아)의 제주도 유배 생활과 천주교」,『다산과 현대』10, 연세대학교 강진다산실학연구원,201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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험난했을지에 대한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앞으로의 추가적인 연구와 활용을 위해서, 발표문을 보며 들었던 생각에 대한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 나누어보고자 한다.
우선,정난주 유배길을 순례길로 조성하기 위한 추가적인 내용,요소에 대한 질문이다. 정난주의
유배길은 작게는 제주도 내의 화북포에서 대정까지 이어지는 노정에서부터,크게는 서울에서 해남,해남에서 제주까지 이어지는 노정에 이르기까지,짧거나 길게 그 유배길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난주 유배길은 오롯이 정난주의 길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배길을 통해 순례길을 조성할 때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은,그 유배길과 특정 인물을 엮어서 풀어갈 만한 고유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앞선 발표에서 살펴본 내용은 정난주 유배길을 보았다고도 볼 수 있지만,제주도로 유배 받은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이동했을 수 있는 유배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정난주 유배길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성에 대해,발표자께서는 어떠한 의견이 있으신지 듣고 싶다.
두 번째는 정난주 유배길을 순례길로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방향성에 대한 부분이다. 이미 제주교구에서는 제주도정과 제주관광공사와 공동으로 주관하여 2012년부터 성지 순례길을 조성해왔다. 그래서 대정에는 ‘정난주길(고통의 길)’이라는 성지 순례길이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대정에서,앞선 발표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추사愀史)3) 김정희(金正喜,1786〜1856)에 대한 ‘추사 유배길’도 조성되어 있다. 이렇게 이미 조성되어 있는 정난주 순례길과 추사 유배길을 살펴볼 때,오늘 이야기한 이 정난주 유배길은 어떠한 방향성으로 조성해야 할지 이에 대한 발표자의 의견을 청해 듣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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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확하게 김정희의 호는 ‘추사《秋史)’가 아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미 조성되어 있는 ‘추사 유배길’의 명칭을 따온 내용에 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위와 같이 호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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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