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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약할 그 때에
2010년 1월 13일 / 삼일예배 / 고린도후서 12장 1-10절
■ 맹인이 한국 사람으로는 맨 처음 박사 학위를 받고 연세대학교 교수가 된 분이 있습니다. ‘강영우’ 박사입니다. 그는 중학교 3학년 때에 친구들과 축구시합을 하다가 공에 눈을 맞아 맹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맹인이 되기 2년 전인 13살 때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목사가 되겠다던 자기 아들이 맹인이 되어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는 충격을 받고서 뇌일혈로 쓰러져 그가 맹인이 된지 1년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맹인 소년 강영우는 몇 년 사이에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년 4개월 만에 가장이었던 누나가 고등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동생 3명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돈벌이에 나섰다가 너무 심한 고생을 한 탓에 쓰러져 18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16살의 맹인 소년 강영우는 13살짜리 남동생과 9살짜리 여동생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어야 했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맹인이 어린 두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고,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절망이 엄습할 때마다 그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강영우의 집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집안 대대로 섬기던 조상신들이 노해서 벌을 준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러나 맹인 소년 강영우는 절망의 자리에서 인생을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남동생은 철물점에서 먹고 자면서 잔심부름을 하며 저녁에는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했고, 여동생은 보육원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맹인학교에 입학해서 낮에는 안마술과 공부를 했고, 저녁에는 검정고시 학원에 다녔습니다. 맹인이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오해와 편견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그는 열심히 공부해서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10등으로 입학했고, 4년 뒤에는 2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자기를 도와주던 자원봉사자 누나와 결혼을 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3년 8개월 만에 2개의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가 절망적인 환경과 숫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성공적인 인생을 창조해 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이런 시련과 역경을 주신 것에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이런 역경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실명했기 때문에 사물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한 존재이고 하나님께서 능력 주시면 못할 것이 없다는 신념에 차 있었습니다. 처음 실명을 하고 의지했던 가족들마저 자신의 곁을 떠나갈 때에는 하나님이 원망스럽고 두려웠지만, 자신의 고통과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뭔가를 하시길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로는 그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 일어설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어둠을 비추는 한 쌍의 촛불’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의 실명은 장애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간에 교량 역할을 하는 도구입니다. 또한 장애인 재활을 통한 국제 이해와 우호 증진에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사명의 도구로 인해서 나의 실명에 감사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 기쁘게 갈 것입니다.”
◆ 사도 바울 역시 “육체에 가시”라고 하는 신체적인 장애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 육체의 가시가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했는지 모릅니다. 인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바울도 너무 힘들어서 그것을 없애달라고 하나님께 3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위대한 전도자로 쓰면서도 신체적인 장애를 없애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말씀만 하실 뿐입니다.
▶ 사도 바울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예수 믿기 전에 출세의 탄탄대로를 걷던 사람입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환경 속에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할만한 조건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자랑할거리가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는 빌 3:5-6과 행전 22: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빌 3:5-6 / 나는 순수한 유대인 혈통을 이어받아 오랜 전통의 베냐민 가문에 태어났으며, 난 지 여드레 만에 유대인의 표지를 받기 위해 할례의식을 치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디 한군데 흠잡을 데 없는 진짜 유대인입니다. 게다가 유대교의 모든 율법과 관습을 지키기를 가장 엄격하게 요구하는 바리새파 회원이었습니다. 6) 얼마나 그악스러웠던지 교회를 모조리 핍박했고 유대교의 모든 규칙과 규정을 빠짐없이 지키려 온 힘을 쏟았습니다. 행 22:3 / 나는 유대 사람입니다. 길리기아에 있는 다소시에서 태어나 여기 예루살렘에 와서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선생의 문하생으로서 나는 유대의 율법과 관습을 철저히 지키도록 엄격하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에도 남보다 더 열성적이어서 오늘 여러분이 나타낸 그 열성에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랑할거리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율법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흠 잡힐 데가 없을 정도로 철저했던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이 얼마나 열심이었던지 유대교와 율법의 이단이라고 생각한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뛰어 다녔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인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랍비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모든 랍비들 가운데 오직 7명만이 유대인들로부터 ‘우리 랍비’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가말리엘이 그 중 하나입니다. 바울은 그런 가말리엘로부터 율법과 학문을 배웠기 때문에 학문적으로나 율법에 대한 지식에서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당시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미국에 건너가서 미국시민권을 얻으려는 것 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가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행 22장에 보면 당시 군대의 최고급 장교였던 천부장도 많은 돈을 써서 시민권을 샀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졌습니다. 순수한 유대 혈통을 가진 사람이 로마 시민권을 갖고 태어난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경우입니다.
이런 배경을 가졌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세상적인 것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결심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이후 그런 세상적인 것이 결코 자신에게 최고의 가치가 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이런 선언을 합니다.
빌 3:7-8 / 그러나 한때 대단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던 이런 것들을 지금에 와서는 모조리 내던졌습니다.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그분에게만 소망을 두기 위해서입니다. 8) 그렇습니다. 나의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알게 된 것이 너무도 존귀해서 이것과 비교하면 다른 것은 다 무가치하게 여겨질 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 외에는 다 쓰레기처럼 여기고 모두 내버렸습니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바울은 신앙적으로도 자랑할거리가 많았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그가 한 사람을 소개하는데,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 온 사람을 소개합니다. 바울은 직접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셋째 하늘(천국)에 올라갔다 온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을 가리킵니다. 이어서 천국에 가서는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는데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그런 큰 경험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게 결코 자랑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천국에 갔다왔다고 간증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뭔가 엄청난 것을 보았고,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자랑하고 다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엄청난 신비스러운 경험을 했음에도 그것에 대해서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위하여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자랑할 것이 그렇게도 많은 사도 바울이 왜 자신을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까? 왜 자랑할지라도 약한 것들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고 말합니까?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왜 그 많은 자랑거리를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약한 것들을 자랑하겠다고 하는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밝히고 있습니다.
❶ 고후 12:6 / 내가 비록 이런저런 자랑을 한다 해도 그것이 모두 사실이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내 생활과 설교에서 실제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과장할까 싶어 그만두겠습니다.
사람들은 신비한 이야기를 들으면 이야기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누군가가 예언의 은사를 받아서 예언을 하면 그 은사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을 위대한 사람인 것처럼 추앙하다보니 덩달아서 날 뜁니다. 어떤 사람에게 신유의 은사가 있어서 안수함으로 병을 고친다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역사하심을 보아야 하는데, 신유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 것처럼 그에게 관심을 갖고 높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그런 큰 경험을 했기에 당연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데, 그 이야기를 하면 자신을 위대한 사람으로 추앙할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랑거리가 있어도 자랑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실 이 땅에서의 자랑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에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마태 25장에 나오는 것을 보십시오. 행한 대로 심판받을 뿐입니다. 설령 자랑거리가 있다할지라도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집시다. 내가 그것을 자랑함으로 그 자랑이 내게로 돌아오면 차라리 자랑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자랑을 하더라도 나에게 좋은 아내나 남편을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다. 아들딸이 잘 자라서 성공했다면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셨다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 자랑거리는 바울과 같이 다 배설물로 여기십시다.
기도를 열심히 한다거나 새로운 사람을 전도했다거나 성경을 많이 읽고 봉사를 많이 했다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내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혜이기에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십시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9:23-24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똑똑한 사람도 자신의 똑똑함을 자랑하지 말고, 힘이 센 사람도 자신의 힘이 센 것을 자랑하지 말며, 부자도 자신의 부유함을 자랑하지 말라. 오직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총명하고,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뿐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사랑과 법과 정의이기 때문에 내가 바로 그런 것들을 세상에 실현하는 자인 줄 깨달아 아는 사람은 자랑할 근거를 충분히 지닌 사람이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이것만 자랑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 1:31) 즉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가졌다고, 조금 더 낫다고 자랑하지 마십시다. 오늘도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 그분만을 자랑하십시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자랑거리를 주실 것입니다.
❷ 자신의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고후 12:9-10 /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 된다. 그러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마. 네게 내리는 은총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내 능력은 약한 사람에게 가장 잘 나타난다.” 이제 나는 내 약한 것을 기쁘게 자랑합니다. 나의 힘이나 능력을 나타내 보이기보다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생활로 증거하는 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10) 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알기에 그 가시도 모욕도 고통도 박해도 어려움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내가 약할 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력해질수록 나는 그만큼 더 그리스도를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육체적으로 매우 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본문에는 ‘육체에 가시’라고 표현되는 질병으로 그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시가 자신을 찌르는데 너무나도 고통스럽습니다. ‘사단의 사자’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을 힘들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것에나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에 결코 유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것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3번이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병을 고쳐주겠다고 응답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그 병을 그냥 안고 살아가는 것이 더 났다. 네가 약해야 네 약함을 통해서 내가 능력을 나타낼 수가 있어.’라는 응답을 들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도한 바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심술을 부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를 오히려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후 12:7 / 다만 이 말을 덧붙여 두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 놀라운 경험 때문에 교만해질까봐 내 몸에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병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려면 얼마든지 자랑거리가 많았습니다. 바울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인간인지라 언제 교만한 마음이 들어서 자신을 자랑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는 마음을 늘 갖도록 하나님께서 그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 그를 낮추신 것입니다. 바울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연약한 존재이기에 언제 교만해질지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교만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낮추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니까 육체의 가시인 질병이 힘은 들지만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낮아질 때에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당신의 능력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우리를 낮추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바울처럼 우리에게서 건강이나 재물을 거두어가시거나 때로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우리를 사용하시기도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약해지지 않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을 의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쓰시지 않고 언제나 부족하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들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모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실 때에도 자신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40세 젊은 때에 부르시지 않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처절하게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무능하다’고 느끼게 하시고 난 후인 80세에야 쓰셨습니다.
사사기 6:15-16에 나오는 기드온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는 “나는 이스라엘을 구원한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이스라엘 가운데서도 가장 약하고, 내 아버지의 가문 중에서도 제일 약한 자일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자신은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할 때 그를 부르셔서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라”는 약속을 믿고 가도록 하셨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도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을 왕으로 택하셨다’는 말을 듣고는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지파에 속한 사람이고, 가장 작은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가족에 속한 가장 미약한 사람인데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 왕이 되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스스로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사울을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다윗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울로부터 사위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나같이 천한 사람이 어찌 왕의 사위가 될 수 있겠느냐?’고 거절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겸손한 다윗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선지로 부르심을 받을 때에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렘 1:6)라고 고백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데, 말할 줄도 모르는 어린 아이와 같은 자신이 어찌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스스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티끌만한 지혜를 의지하려 하고, 얼마 안 되는 재물을 의지하려 하고, 하찮은 자신의 용맹을 의지하려 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약한 자리에 앉히십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시기 바랍니다. 내가 약할 때에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당신의 강함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할 그 때가 하나님의 평안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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