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군과 전주 화약을 맺은 후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했어. 조선의 문제는 조선 사람들이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겠으니, 너희들은 물러나라는 의미였지. 그러나일본은 조선 정부의 요구를 무시한 채, 오히려 고종을 협박하여 자신들의 의도대로 갑오개혁을 추진하며 아산만에 정박해 있던 청나라 군함을 급습하여 청·일 전쟁을 일으켰어(1894).
동학 농민군은 도저히 두고 볼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다시 군대를일으켰지. 고부 민란으로 시작된 첫 번째 봉기가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는 반봉건적 성향이 강했다면, 두 번째 봉기는 조선의 정치에 간섭하고 우리 영토에서 청과 전쟁을 하는 일본을 쫓아내기 위한 반제국주의적 성향이 강한 봉기였어.
하지만, 농민군은 근대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내지 못하고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치른 채 패퇴하고 말았어.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재기를 꿈꾸며 농촌 깊숙이 몸을 숨겼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자주 국가를 세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농민들의 꿈도 사그라지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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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발통문
‘통문’이란 여럿이 모여 어떤 일을 할 때 사람들을 모으려고 돌리는 문서로, ‘사발통문’은 사기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처럼 둥글게 모의를 꾸민 사람의 이름을 적어 놓은 통문이다. 이처럼 주모자 이름을 둥글게 쓴 이유는 참여자 모두가 공동으로 책임을 지기 위함이다. 아래는 사발통문 내용을 해설한 글이다.
각리 리집강 기하
아래와 같이 격문을 사방으로 전하니 논의가 들끓었다. 매일 어렵기만 하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다. 그냥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라도 남아 있겠는가?”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렸다. 이때에 도인들은 선후책을 토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의 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운집하여 순서를 결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죽일 것
- 무기 창고와 화약 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의 것을 빼앗은 부정한 관리를 공격하여 징계 할 것
-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바로 향할 것
이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전략에 능하고 만사에 재빠른 영도자가 될 장(이후 분실됨)
동학 농민 운동의 숨가뿐 하루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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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민란
① 1894년 1월 10일
전봉준이 주동하여 고부 군수 조병갑을쫓아내기 위한 고부 민란이 일어났다.
② 1894년 3월 23일
안핵사 이용태의 횡포에 맞서 농민 봉기를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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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봉기
③ 1894년 3월 25일
백산에서 농민군의 대열을 가다듬다.
④ 1894년 4월 7일
정읍시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을 격퇴하다.
⑤ 1894년 4월 23일
서울에서 내려온 중앙군을 장성 황룡촌에서 장태를 이용하여 격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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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7 전주 점령
⑥ 1894년 4월 27일
전라도의 중심 도시 전주를 점령하다.
⑦ 1894년 5월 5일
청군이 아산만으로 들어오다.
⑧ 1894년 5월 6일
일본군이 인천으로 들어오다.
⑨ 1894년 5월 7일
정부의 요청으로 농민군이 전주에서 화약을 맺다.
⑩ 1894년 6월
일본의 강요로 갑오개혁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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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 전쟁
⑪ 1894년 6월 23일
일본의 청나라 군함 기습으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다.
⑫ 1894년 9월
2차 농민 봉기가 시작되다.
⑬ 1894년 11월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농민군이 패퇴하다.
※ 위 날짜 표기는 모두 음력 기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