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3 대림 12월 23일 – 133위 007° ‘하느님의 종’ 정종호
“그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1,64).
133위 007° ‘하느님의 종’ 정종호
이름 : 정종호(鄭宗浩, 세례명 미상)
출생 : 1751?년, 여주
순교 : 1801년 4월 25일(약 50세), 참수, 여주
정종호(鄭宗浩)는 경기도 여주 출신으로, 친절하고 점잖으며 조용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한 뒤 그의 가족 모두가 그의 모범을 따라 열성과 충실함을 다해 천주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정종호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1]
천주교에 입교한 뒤 정종호는 이중배 마르티노, 원경도 요한과 가깝게 지냈다. 그리고 1800년 3월(음력)의 주님 부활 대축일에는 당시의 풍습대로 개를 잡고 술을 빚어 이중배 마르티노와 원경도 요한 등 여러 교우들을 자신의 집에서 대접하였다. 그뿐 아니라 하루 종일 길가에 모여 잔치를 벌이면서 부활삼종기도를 함께 바치고 큰 소리로 성가를 합창하였다.[2][2.1]
그런데 이 무렵에 천주교 신앙을 뿌리 뽑으려는 마음을 갖고 있던 여주의 관장이 포졸들을 풀어 은밀히 신자들을 찾고 있었다. 바로 그때 천주교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있다는 밀고가 들어왔고, 관장은 곧바로 포졸들을 그곳으로 보내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게 하였다.
관청에 끌려가자마자 정종호와 동료들은 배교를 강요당하면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들은 6개월 동안 옥에서 생활해야만 하였고, 1800년 10월에는 경기 감영으로 이송되어 다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으나, 누구도 신심이 흔들리지 않았다.
다음 해 1801년에 신유박해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자, 경기 감사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을 다시 끌어내 형벌을 가하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정종호는 이에 굴하지 않았으며, 동료들과 함께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서로 용기를 북돋워나갔다.[3]
경기 감사는 마침내 최후 진술을 받아서 조정에 보고하였고, 조정에서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처형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이 경각심을 갖게 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따라 정종호는 동료들과 함께 여주로 압송되어 1801년 4월 25일(음력 3월 13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 50세가량이었다.[4] 이에 앞서 경기 감사가 조정에 올린 정종호의 사형 선고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예수를 받들어 모시며 감히 훼손하거나 배척하지 않을 정도로 천주 교리에 깊이 빠졌고, 또한 조상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5]
註__________
[1]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f. 114b.
[2]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79; 황사영, 「백서」 , 8-9행. 이 「백서」는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1] 1800년 4월 13일 주님부활대축일, ‘하느님의 종’ 정종호(鄭宗浩) 집과 여주 관아 뜰과 옥에서 ‘부활영성’을 본다. 이중배 마르티노와 그의 이종사촌인 원경도 요한은 정종호의 집에 모여 부활대축일에 기쁨에 차서 ‘부활삼종경’을 바치며 “알렐루야, 알렐루야!”를 환호하였다. 개를 잡고 술을 나누어 마시며 바가지를 두드려가며 큰 소리로 부활을 찬송하며 기도문을 외웠다. 온종일 축제를 벌이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본 이웃 외교인이 밀고하자, 여주 목사는 포졸을 급파하여 전종호 집에 있는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들은 포악한 형벌을 받을 때나 옥에 갇혀 있을 때나 부활의 기쁨을 잃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4-2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라는 부활신앙과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는 ‘파스카의 신비’에 흠뻑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3]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f. 90-92.
[4] 규장각 소장, 「공거문」(公車文)(古 5120-29-v.2-110), 경기 감사 이익운 상소, 1801년 2월 21일; 『일성록』, 1801년 2월 21일; 『추안 및 국안』, 1801년 2월 25일; 『순조실록』, 1801년 3월 11일; 황사영, 「백서」, 32행;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f. 115; 이기경 편, 『벽위편』, 1801년 3월 15일.
[5] 『사학징의』, 1권, 168면, 여주 정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