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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신
무력 각간의 아들인 서현 각간 김씨의 맏아들을 유신이라 하고 아우를 흠순이라고 이름 지었다. 맏누이는 보희라 하며 어릴 때 이름은 아해였다. 그 동생은 문희이며 어릴 때 이름은 아지이다.
유신공은 진평왕 17년 을묘(595)에 태어났는데 해와 달과 목, 화, 토, 금, 수 별들의 정기를 받아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으며, 또 신령스럽고 기이한 일이 많았다.
나이가 18세 되던 임신(612)에 검술을 익히고 술법을 터득해 국선이 됐다. 이 당시 백석이란 자가 있었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었으나 여러 해 동안 낭의 무리에 속해 있었다.
유신랑이 고구려와 백제를 치려고 밤낮으로 깊이 몰두하고 있을 때 백석이 그 계획을 알고 은근히 다가와 “청컨대 저와 공이 함께 아무도 모르게 먼저 저 나라를 정탐한 후에 일을 도모하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은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길을 떠났다.
그러나 신라의 호국신들이 나타나 백석은 고구려의 첩자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유신이 백석을 결박해 고문하면서 그 내막을 다그쳐 물었다. 백석이 “나는 본래 고구려 사람이다. 유신은 본래 우리나라의 점쟁이인 추남이었는데 왕비의 미움을 사서 죽임을 당했다”며 “추남이 ‘내가 죽은 후 대장이 되어 반드시 고구려를 멸하리라’고 했다”고 털어놓았다. 고구려는 후환을 없애기 위해 유신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유신은 즉시 백석을 처형하고 온갖 음식물을 갖춰 삼신에게 제사를 지내니 삼신 모두가 사람의 몸으로 나타나 제사를 받았다.
- 김유신의 흔적으로 재매정, 생가터, 천관사지, 단석산, 김유신 장군묘, 황성공원 동상, 통일전 사적비, 흥무공원 숭무전.
- 김유신의 전쟁 : 관산성 전투, 상주 당나라 소정방군 전멸, 매소성 전투,
- 김유신의 사랑 : 풋사랑 천관녀, 결국 유신은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곁에 두지 못하고, 늦게 무열왕과 누이동생이 낳은 조카와 인연을 맺었다.
◆ 김춘추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아버지는 26대 진지왕의 아들로 신라 각간의 벼슬을 지낸 용춘 혹은 용수이다. 어머니는 진평왕의 둘째 딸 천명공주다. 선덕여왕은 춘추의 이모다.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 장군의 누이동생 문희다. 문희는 언니 보희가 선도산에서 오줌을눴는데 서라벌이 잠기는 꿈을 꿨으며 그 꿈을 비단을 주고 사고 나서 왕비가 됐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누구라 할 것 없이 전쟁터는 물론 삶의 기술에서도 전술전략이 뛰어난 인재였다.
김춘추는 신라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눈부신 활약을 했다. 가장 먼저 당나라 군사를 빌려 백제를 멸했다. 물론 김유신과 같은 뛰어난 장군을 가까운 지기로 두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없었다면 삼국통일도, 왕위에 오르는 일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을 해도 전혀 틀림이 없는 말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어릴 때부터 화랑으로 함께 손잡고 뜻을 키웠다. 전쟁도 사랑도 두 사람은 함께 했다. 일생을 한 가족처럼 함께하는 동반자였다.
김춘추는 유신의 여동생과 혼인을 했고, 김유신은 춘추의 여식과 인연을 맺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잡혀있을 때 김유신은 군사들을 이끌고 구출 작전에 나섰으며, 백제를 멸하는 마지막 전쟁에서도 목숨을 걸고 함께 전투에 임해 승리했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시대에도 장군으로, 대신으로 큰 역할을 했다. 반란을 제압하고, 다양한 법과 제도를 만들어 왕을 보필하며 나라를 경영하는 일에 깊숙이 가담했다.
가장 먼저 춘추는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김유신을 벗으로 삼았다. 김유신 또한 할아버지가 가야의 왕이었으므로 어엿한 왕손이지만 패망한 나라의 후손이라 신라에서의 입지는 그다지 당당하지 못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겪는 젊은이라고 할까.
춘추는 유신과 뜻이 맞아 크고작은 일에 마음을 하나로 모아 세력을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배경으로 서로의 생각도 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유신은 자신의 여동생을 춘추의 부인으로 정략적 결혼을 성사시켰다.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당시 주변국가에서 침공해오는 횟수가 빈번해졌다. 이때 대야성주로 나가있던 춘추의 사위와 딸이 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죽음을 당했다. 이 소식을 들은 춘추는 사흘 밤낮을 통곡하다 정신을 차리고 “장부로 태어나 복수를 못하겠는가”라며 의지를 다졌다. 백제 멸망을 위한 대계를 수립하고 당나라까지 건너가 군사를 빌려왔다.
김춘추는 당나라 군사를 빌려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했다. 자신의 딸자식을 죽인 백제 윤충 장군의 목을 직접 베어 복수에 성공했다.
왕위에 올라 백제에 이어 고구려를 정벌하는데 온 힘을 집중하던 무열왕은 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할아버지에 이어 왕손으로 대를 잇기 위해 아들 법민을 왕좌에 앉혀야 했다. 그러나 상대등의 지위에 오른 김유신 장군의 세력이 워낙 강해 은근히 걱정이 됐다.
무열왕은 자신의 딸을 환갑에 이른 유신에게 신부로 보냈다. 이중삼중 결혼의 고리로 유신의 발목을 묶었다. 왕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과 김유신 장군을 번갈아 보며 신라의 삼국통일 대업을 이뤄 줄 것을 당부하며 눈을 감았다.
◆ 문무왕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이름은 법민이다.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을 따라다니며 전쟁터를 누비며 훌륭한 장군으로 자랐다.
법민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훌륭한 혈통을 이어받아 외모가 준수하고, 체력적으로도 뛰어났으며 총명하고 지혜로웠다.
궁중이나 전쟁터에서도 어려운 일들을 쉽게 풀어 해결해 주는 재능을 보여 주변에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법민은 또 백제와 고구려 전투에 직접 나아가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는 장군이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서도 전쟁터의 앞장에 나서는 장수가 돼 당나라를 몰아내고 완전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통일대왕이 된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루고도 문무왕은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해 “죽은 후에는 동해에서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될 것”이라며 “내가 죽으면 화장하고, 동해에 장사를 지내라”고 유언했다.
문무왕의 아들 정명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신문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을 동해에 장사지내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감은사를 짓고, 바닷가로 나와 아버지를 기렸다.
신문왕은 아버지와 경쟁하며 어머니를 마음에 품고 있던 장인어른인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키자 제압해 목을 베고, 왕비는 반란군의 여식이라 하여 폐하고 김흠운의 딸을 다시 왕비로 맞았다.
- 문무왕 삼국통일
무열왕이 백제를 멸하고 죽자다. 큰아들 법민이 왕위를 물려받아 문무왕으로 즉위했다. 문무왕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인문, 흠순 등과 함께 당나라 군사와 합세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신라가 고구려를 멸하고 이어 당나라를 몰아내려고 하자 당 고종은 670년 2월에 유인궤를 계림도총관으로 임명해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당나라 유격병과 장병들이 주둔지에 머물면서 신라를 습격하려 했지만 문무왕이 이를 미리 알고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인 전쟁을 했다.
이듬해 당 고종이 문무왕의 동생인 인문을 감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켜 설방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치려고 했다.
이때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불법을 공부하러 갔다가 인문에게서 그 사실을 듣고 귀국해 이 같은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문무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놓고 방어할 계책을 논의했다. 김천존의 추천으로 명랑법사에게 비법을 물었다. 명랑법사는 남산에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개설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당나라군이 벌써 국경까지 쳐들어왔다는 소식에 무늬 있는 비단으로 집을 꾸미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유가에 밝은 12명의 승려들이 명랑을 우두머리 삼아 문두루비법을 펼쳤다.
그러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나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 그 후에 낭산에 절을 지어 이름을 사천왕사라고 불렀다.
671년에 당나라가 다시 5만의 병사로 쳐들어왔으나 신라는 또 문두루비법으로 배들을 침몰시켰다.
당시에 한림랑 박문준이 인문과 함께 감옥에 있었는데 고종이 문준에게 그 비법을 물었다. 문준은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의 남쪽에 새로이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빌고 있다고 했다. 고종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 사실을 알아보게 했다.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이 온다는 것을 미리 듣고 즉시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놓고 사신을 기다렸다.
사신은 새로 지은 절에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서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이라 했다.
이에 신라 사신들이 당나라 사신에게 은자 3천 냥을 선물로 주고, 주색으로 인사불성이 되도록 접대했다.
이에 사신은 본국으로 돌아가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를 절에서 빌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그 이후 당나라 사신의 말로 인하여 사천왕사 앞에 지은 절을 망덕사라 불렀다.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통일을 이뤘지만 당나라와 마찰이 생겼다. 신라와 당나라는 밀약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킬 경우 대동강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한다고 약속을 했지만 이를 어겼기 때문이다.
두 나라를 치고도 당나라가 입장을 바꿔 옛 백제의 땅에 웅진, 마한, 동명, 금연, 덕안 등의 5도독부를 설치했다.
또 당나라의 강압에 의해 취리산에 도착한 문무왕은 655년 웅진도독부의 수장인 부여융과 당나라의 사신 유인궤와 함께 회맹의 의식을 가졌다. 회맹은 당나라가 은혜를 베풀어 부여융에게 선대의 제사를 받들고, 옛 백제의 영토를 보전하게 해준다는 내용과 문무왕에게 묵은 감정을 버리고 화친을 요구한 것이다.
당나라의 강요나 다름이 없었던 이날의 회맹은 이후 지켜지지 않은 약속으로 남았다. 회맹에서 굴욕을 느낀 문무왕은 당나라를 몰아내어야 한다는 결심을 하고 나당전쟁을 다짐했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뒤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고구려라는 공동의 적이 있었기에 나름의 균형을 유지하던 당나라와 신라의 관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풍전야의 상황이었다. 드디어 문무왕이 670년 요동지역에 대한 공격과 함께 나당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기세가 오른 신라는 671년 옛 백제 지역의 영토를 차례로 점령해갔다. 하지만 당나라가 반격을 가하면서 672년 석문 전투에서 신라가 대패를 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당나라에 사죄사를 보내며 죄를 청하는 한편 물밑으로 전쟁 준비를 계속했다. 문무왕은 옛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들을 지원하며 당나라 축출이라는 공통된 목적의식을 형성했다.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보장왕의 서자로 알려진 안승을 고구려의 왕으로 봉했고, 이어 지금의 익산의 금마저에 보덕국을 세우게 했다.
당나라와의 기나긴 전쟁은 675년 육지에서의 매소성 전투와 676년 기벌포 해전을 끝으로 신라의 승리로 당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고 막을 내렸다.
문무대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해인 6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유언에 따라 동해의 큰 바위 위에 장사를 지냈다. 장지는 경주 감포 앞바다에 있는 해중왕릉인 대왕암이다.
◆ 김인문
김인문의 자는 인수,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많은 책을 읽었고, 특히 예서를 잘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으며, 향악을 잘했다.
넓은 식견과 훌륭한 기예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으며 김춘추와 김유신을 도와 백제·고구려 정벌에 힘썼고, 여생을 당나라에서 보내면서 양국간 정치적 분규의 해결과 중재에 많은 공을 세웠다.
김춘추는 김유신계열과 결속하여 신흥세력을 이끌면서 선덕왕·진덕왕을 세워 구귀족의 반발을 무마시켜갔다. 642년(선덕여왕 11)의 대야성(지금의 합천) 함락은 김춘추·김유신 가문의 결속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전기로 김춘추는 정치·외교 활동에 새로운 방향을 맞게 되었다.
특히 김춘추는 고구려원병에 실패하고 또 일본방문에서도 아무런 결실을 거두지 못하자,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꾀하게 되었다. 먼저 648년(진덕여왕 2)에 아들 김문왕(金文王)을 대동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원조의 약속을 얻어냄으로써 김문왕을 숙위로 머물게 하였다.
인문은 651년에 김문왕과 교대하여 숙위로 파견되어 당나라 조정에 머물면서 양국간 현안문제에 있어 중개 임무를 맡게 되었다. 23세에 당나라에 가서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이라는 직함으로 5년간 머물면서 백제정벌에 따른 구체적 문제를 협의하였다.
656년(무열왕 3)에는 그에 대한 준비를 명목으로 한 번 귀국했으나, 실제로는 아버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따른 인사와 아울러 국내의 전략 점검을 위한 태종무열왕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658년 다시 당나라에 가서 660년 백제정벌의 당나라측 부사령관으로서 사령관인 소정방을 도와 수군과 육군 13만을 거느리고 백제정벌군을 지휘하였다.
백제의 지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작전수행상의 이점이 있어 당군의 선봉을 이끌고 덕물도(지금의 덕적도)에 도착하였다. 이어 기벌포(지금의 장항)에서 백제군을 무찌른 뒤, 7월에 김유신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하였다.
661년 8월에 김유신의 진두지휘하에 고구려 정벌을 떠나 평양 근교까지 이르렀으나 일기 불순과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당군이 퇴각했고, 신라군도 후퇴하였다. 이 때 추격하는 고구려군을 격파하여 1만여급을 목베는 대전과를 올려, 김유신과 더불어 본피궁(本彼宮)의 재화·전장(田庄)·노복을 받게 되었다.
668년 6월 당나라 고종의 칙지를 가지고 당항진에 닿은 유인궤(劉仁軌)와 삼광을 맞아들여 최종적인 고구려 정벌 작전을 수립하였다. 이때 김유신이 풍병으로 출정하지 못하자 신라군 사령관으로서 이적의 당군과 함께 9월에 평양성을 함락시켰다.
당나라의 영토적 야욕을 목도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잔민을 앞세워 당군을 공격하는 등 대대적인 배당운동(排唐運動)을 전개했는데 설인귀의 항의문에 잘 나타난다.
674년 신라가 고구려의 반란민을 받아들이고 백제의 고토를 잠식하면서 노골적인 대당항쟁을 계속하자, 당나라는 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세우고 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으로, 이필(李弼)과 이근행(李謹行)을 부관으로 하여 쳐들어 왔다. 이에 왕이 형식상 사죄사를 보내자 김인문도 도중에서 돌아가 임해군(臨海君)으로 봉해졌다.
그뒤 여생을 그곳에서 보냈으며, 양국간의 정치적 분쟁도 거의 사라져 대우를 받았다.
694년(효소왕 3) 4월 당나라 수도에서 죽었다. 당나라에서는 그의 유해를 사례시 대의서령(司禮寺大醫署令) 육원경(陸元景)의 호송으로 본국으로 옮겼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다음 해서악(西岳)에서 장례를 치렀다. 무덤은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에 있다.
첫댓글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 순으로 꼽는다.
지위의 높낮이로 순서를 정한 듯하다.
나이나 공으로 보면 단연코 김유신이 앞자리에 위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