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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재집(畏齋集) 이후경(李厚慶)생년1558년(명종 13)몰년1630년(인조 8)자여무(汝懋)호외재(畏齋)본관성주(星州)특기사항정구(鄭逑)의 문인.
畏齋先生年譜 *李厚慶 1558 ~ 1630
선조 | 40 | 1607 | 정미 | 萬曆 | 35 | 50 | 봄, 한강선생을 모시고 郭再祐, 張顯光 등과 함께 龍華山 아래에서 뱃놀이하다. 〈同汎錄〉이 있다. |
三十五年 宣祖四十年 丁未 先生五十歲 春。陪寒岡先生。同郭忘憂,張旅軒。
汎舟龍華山下。朴知郡忠後,李獨村佶成,崔溪景琛,辛寶城礎,趙立巖塡,李陜川潚,盧公克弘,辛上舍邦楫,趙反求垹,羅公翼南,兪上舍諧,李梅竹明怘,朴平山震英,李公明憼,明念,辛奉事膺,李公明愨,明悆,安公侹,李公時馠,郭公瀅,李瑟谷蘭貴,柳公武龍,趙澗松任道,李護軍忠民,崔公門柱及先生諸侄復齋道孜,冷亭道由,護軍道一,子道輔侄孫瀸從之。有同汎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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疆齋逸稿 ( 강재일고 ) 저자:成好正 ( 성호정 ) 생몰년 : 1589 - 1639 자 : 尙夫(상부) 호 : 彊齋(강재) 본관 : 昌寧(창녕) 거주지 : 咸安(함안)
疆齋逸稿 夏山三世稿卷之二 附錄
龍華同汎錄
鄭寒岡諱逑字道可號寒岡謚文穆公
郭右尹諱再祐字季綏號忘憂堂諡忠翼公
朴咸安諱忠後字景述
:: 0088 ::
張旅軒諱顯光字德晦號旅軒謚文康公
李佶汝閒戊戌咸安獨邨
成景琛仲珍癸卯咸安鵲溪
辛礎支叟己酉靈山聞巖
趙埴克成己酉咸安立嵒
李潚汝澄庚戌咸安葛邨
盧克弘毅甫癸丑昌寧沃邨
辛邦楫汝濟丙辰靈山永慕堂
趙垹克精丁巳咸安伴鷗亭
李厚慶汝懋戊午靈山畏齋
:: 0089 ::
羅翼南天紀戊午咸安敎授
李道孜至之己未靈山復齋
兪諧欽哉乙丑靈山進士
李明怘養初乙丑咸安梅竹軒
李道由明之丙寅靈山滄浪叟
朴震英實哉己巳咸安匡西
李明憼一初咸安菊庵
李明志而聖辛未咸安永慕齋
辛膺伯禧壬申靈山奉事
李明懿子純壬申咸安
:: 0090 ::
李明悆慶初癸酉咸安
安侹子長甲戌咸安
李時馠聞遠乙亥高靈
郭瀅淸淑戊寅玄風
李道一貫之辛巳靈山消憂軒
李蘭貴夢與甲申星山瑟谷
柳武龍景溧甲申星山
趙任道致遠乙酉咸安
李道輔益之丁亥靈山益庵
李瀣而浩丁亥靈山
:: 0091 ::
李忠民汝直戊子漆谷慕庵
崔門柱希明己丑陝川松齋
皇明萬曆丁未孟春二十八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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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집(澗松集) 조임도(趙任道)생년1585년(선조 18)몰년1664년(현종 5)자덕용(德勇)호간송(澗松)본관함안(咸安)초자치원(致遠)특기사항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의 문인.
澗松先生別集卷之一 / [序○説○錄○記] / 龍華山下同泛錄後序
皇明萬曆丁未初春。寒岡鄭先生來遊道興步。道興卽龍華山之東麓也。始至之初。先到蒼巖。宿忘憂精舍。其主人則前右尹郭相公也。明日。泝流而上。歷景釀登柰內。以周覽上下山川之勝。然後乃止于道興村而休焉。蓋先生嘗得石之可碣者留置江濱。因失其所在者二十年矣。或慮其沈埋沙水。欲倩海夫搜剔而出之。故有是行云。任道時方讀書于漆原之長春寺。家嚴到上浦江墅。馳書命召曰。二賢住近。盍往拜之。任道卽夕來宿江墅。卽吾季父別業。而與道興通望處也。平朝。陪家嚴,季父。登小艇抵道興。先生已於龍華山下繫舟監搜矣。進謁先生。退敍左右。從之遊者。旅軒張先生及寒岡門徒也。聞而會者。忘憂郭右尹,咸守朴令公也。咸安來者十四。靈山來者十人。昌寧來者一人。玄風來者一人。高靈來者一人。星山來者四人。舟窄不能容。蓋先生於咸郡曾有遺愛。而道興村又在咸境。故會客之中咸人最多。是日。家嚴與季父設壺觴慰群賢。繼而行酒者。靈山前郡守辛丈礎與咸安之校生也。杯盤簡潔。禮儀和敬。肅如也。先生顧謂諸生曰。今日之會。可謂盛矣。其何以不志。於是咸人進士李公明怘應命而作。取紙筆書之。鄭先生居首。其次郭右尹。又其次朴令公。又其次張先生。自此以後。序以齒不以爵。直書其姓名字年居住曁會集之月日。凡三十五員。目爲龍華山下同泛錄。錄旣成。先生命門人藏之。是夕。先生乘藍輿先就寢所。舟中之人。稍稍分散。郭右尹歸江亭。朴令公還郡衙。護先生留宿津頭者。門生十餘人及吾鄕之耆老子弟也。翌日。兩先生渡江而北。任道奉先君返乎劍溪。嗟乎。若鄭先生之英豪德望。張先生之渾厚氣像。郭右尹之灑脫胸襟。聞諸古昔。尙且興感。況今竝生當世。親見其面目。同時咸聚於一舟之中。而任道父子又得參佳會邇淸光。薰襲芝蘭之馨。縱觀江湖之大。眞一代之盛集。人間之勝事也。不幸二月之尾。任道奄抱終天之慟。苟保餘生。無意昔歡者十餘年矣。歲庚申春夏之交。安君侹先生從姊夫 來過柰內之新居。因與逍遙江臺。指點道興。追念龍華同泛時事。慨然而嘆。安君曰。吾家有同泛錄草本藏在篋笥中。任道聞而驚且喜。走伻取來。長跪奉玩。閱之未幾。又復不樂。歔欷太息以悲。同泛之日。是正月之廿八。而先考之沒。在二月之廿八。吉凶哀樂。若是懸絶人。事之不可恃也如此夫。且念郭右尹於丁巳夏乘化。鄭先生於今年春易簀。其餘名在錄中而身歸泉下者亦八人。儒林之慟。存沒之感。顧如何哉。今之在世而吾所斗仰。可賴以自慰者。唯張先生無恙。斯文一脈。未墜於地。畏齋李丈以寒岡門弟。爲先師撰錄言行。衣書之託亦庶乎在是矣。嗚呼。任道於是錄。有所感矣。錄中有可欽仰處焉。有可想慕處焉。其所欽仰者。非二賢之德業文章乎。其所想慕者。非郭仙翁之氣槩風節乎。朋知故舊。鄕黨長老。皆吾父子之所嘗與交遊者。而曾幾歲月。已成陳跡。寓目興思。烏可已乎。於是編紙作冊。移錄其中。而於張先生書以軒號。於先人曰先大人。極知僭妄。然嘗觀佔畢齋之修正靑丘風雅也。論次諸賢姓氏事蹟於卷首。而不書司藝公姓名。直稱先大夫。註于其下曰。諱某字某。則古人之於父也。其不以公義廢私情如此。任道之私自尊親。豈無古據乎。任道旣幸錄之復得。而又嘉安君能保勝跡。於是乎序。
간송별집 제1권 / 록(錄)○서(序)○설(說)○기(記) / 〈용화산하동범록〉 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
황명(皇明)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초봄 한강 정 선생께서 도흥보(道興步)에 와서 노닐었는데, 도흥은 곧 용화산(龍華山)의 동쪽 기슭이다. 처음 창암(蒼巖)에 먼저 도착하여 망우정사(忘憂精舍)에서 묵었는데, 그 주인은 전 우윤(右尹) 곽 상공(郭相公)이다. 다음 날 강을 거슬러 올라 경양대(景釀臺)를 지나 내내(柰內)에 올라 산천의 빼어난 경치를 두루 구경한 연후에 도흥촌에 머물러 쉬었다. 선생께서 일찍이 비석으로 쓸 만한 돌을 강가에 두었는데, 그 뒤 그 소재를 잃어버린 것이 20년이 되었다. 혹시 모래에 파묻히고 물에 빠졌을까 염려되어 어부에게 청하여 찾아내고자 하였으므로 이번 행차가 있게 된 것이라고 한다.
내가 이때 칠원(漆原)의 장춘사(長春寺)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부친께서 상포(上浦) 강가의 별장에 도착하여 급히 편지를 보내 불러들이기를 “두 현인이 가까운 곳에 머무시니 어찌 가서 뵙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곧바로 저녁에 강가의 별장에 와서 묵었는데, 이곳은 계부(季父)의 별장으로 도흥과는 서로 바라보이는 곳이다. 이른 아침에 부친과 계부를 모시고 작은 배를 타고 도흥에 이르니, 선생께서는 이미 용화산 아래에 배를 매어두고서 돌을 찾고 있었다. 선생에게 나아가 배알하고 물러나 좌우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따르며 노니는 자들은 여헌 장 선생과 한강 선생의 문도들이었다. 두 선생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모인 사람은 망우당 곽 우윤(郭右尹)과 함안 군수 박 영공(朴令公)이었다. 그리고 함안에서 온 사람이 14명, 영산(靈山)에서 온 사람이 10명, 창녕에서 온 사람이 1명, 현풍에서 온 사람이 1명, 고령(高靈)에서 온 사람이 1명, 성산(星山)에서 온 사람이 4명이었는데, 배가 좁아 모두 탈 수가 없었다. 대개 정 선생께서 함안 군수로 계실 적에 선정(善政)을 베푼 은덕이 있었고, 도흥촌이 또 함안의 경내에 있었기 때문에 모인 손님 중에 함안 사람이 가장 많았다.
이날 부친과 계부께서 술자리를 마련하여 제현(諸賢)을 위로하였고, 이어서 술잔을 돌린 자는 영산(靈山)의 전 군수 신초(辛礎) 어른과 함안의 교생(校生)이었다. 술상은 간소하고 정결하였으며, 예의(禮儀)는 어긋나지 않고 공경스러워 술자리가 엄숙하였다. 선생께서 돌아보며 제생들에게 말씀하기를 “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고 말할 만하다. 어찌 기록해 두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함안 사람 진사 이명호(李明怘)가 명에 응하여 일어나 종이와 붓을 가져와 썼다. 정 선생을 제일 위에 적고, 그 다음은 곽 우윤을 적고, 또 그 다음은 박 영공을 적고, 또 그 다음은 장 선생을 적었다. 이 이후로는 나이순으로 적고 관작의 서열대로 적지 않았다. 다만 성명, 자(字), 나이, 사는 곳 및 모인 날짜만을 적었는데, 모두 35명이었다.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라고 제목하고 기록이 완성되자, 선생께서 문인에게 명하여 보관하게 하였다. 이날 저녁 선생께서는 남여를 타고 먼저 침소에 가셨고, 배 안의 사람들은 차츰 나뉘어 흩어졌는데, 곽 우윤은 강정(江亭)으로 돌아갔고, 박 영공은 관아로 돌아갔다. 선생을 지키며 나루에 유숙한 사람은 문생 10여 명과 우리 고을 노인들의 자제들이었다.
다음 날 두 선생께서는 강을 건너 북쪽으로 가시고, 나는 선친을 모시고 검계(劍溪)로 돌아왔다. 아! 정 선생의 빼어난 덕망과 장 선생의 혼후한 기상과 곽 우윤의 속세를 벗어난 흉금은 예전부터 들었는데도 오히려 또 감흥이 있었다. 더구나 지금 세상에 함께 살면서 몸소 그 모습을 뵙고 때를 같이하여 배 안에 모두 모였음에 있어서이겠는가. 그리고 나와 선친이 또 좋은 모임에 참여하여 가까운 자리에서 뵙고서 지란(芝蘭)의 향기에 흠뻑 스며들고 강호의 큼을 마음껏 관람하였으니, 진실로 한 세상의 성대한 모임이고 인간사의 좋은 일이었다. 불행하게도 2월 말에 나는 갑자기 종천(終天)의 슬픔을 품었는데, 구차하게 남은 목숨을 보전하면서 예전의 즐거운 일에 마음을 두지 않은 것이 10여 년이 되었다.
경신년(1620, 광해군12) 봄과 여름 사이에 안정(安侹)-선생의 종자부(從姊夫)이다.- 이 내내(柰內)의 새 거처에 들렀는데, 이로 인해 함께 강대(江臺)를 소요하다가 도흥을 가리키자, 용화산 아래에서 함께 배를 띄웠던 때의 일을 추억하며 개연히 탄식하였다. 안군이 말하기를 “우리 집에 〈동범록(同泛錄)〉 초본이 있는데,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서 놀라고 기뻐 노복을 보내 가져오게 하여 꿇어앉아 받들고 완미하며 이를 읽다가, 얼마 되지 않아 또 다시 즐겁지 않게 되어 크게 한숨을 쉬며 슬퍼하였다. 함께 배 띄우던 날이 정월 28일이고 선친께서 돌아가신 날이 2월 28일인데, 길흉과 애락(哀樂)이 이처럼 현저하게 다르니 인사를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구나. 또 생각해 보니 곽 우윤은 정사년(1617, 광해군9) 여름에 돌아가시고, 정 선생은 올해 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 나머지 기록 중에 이름이 있으면서 황천으로 돌아간 이들이 또한 8명이니, 유림의 애통함과 생사가 나뉜 감정이 대체 어떻겠는가. 지금 세상에 살아있으면서 내가 북두성처럼 우러러 의지하여 스스로 위안을 삼는 분 장 선생만이 아무 탈이 없어 사문의 한 줄기 도맥이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이외재(李畏齋) 어른은 한강 선생의 제자로서 스승을 위하여 언행록을 찬술하였는데, 의서(衣書)를 부탁한 것이 또한 거의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 내가 이 기록에 대해서는 느끼는 바가 있다. 기록 중에 흠앙(欽仰)할 만한 분이 있고 사모할 만한 분이 있다. 흠앙할 것은 두 현인의 덕업과 문장이 아니겠는가. 사모할 것은 곽선옹(郭仙翁)의 기개와 풍절이 아니겠는가. 붕우와 고을의 어른들은 모두 우리 부자가 일찍이 교유한 사람인데, 얼마의 세월이 지나 이미 옛 일이 되어버렸으나 눈길을 주고 생각을 일으키는 것을 어찌 그만두겠는가. 이에 종이를 엮어 책을 만들고 그 내용을 옮겨 기록하였는데, 장 선생에 대해서는 헌호(軒號)를 적었고 선친에 대해서는 ‘선대인’이라고 하였으니, 매우 참망(僭妄)됨을 알겠다. 그러나 일찍이 점필재(佔畢齋)가 《청구풍아(靑丘風雅)》를 수정할 적에 제현의 성씨와 사적을 권수(卷首)에 논차(論次)하고서 사예공(司藝公)의 성명을 쓰지 않고 단지 선대부(先大夫)라고 일컫고 그 아래에 주(註)를 달아 “휘는 모이고 자는 모이다.”라고 하였으니, 고인이 자신의 부친에 대해 공의로써 사사로운 정을 폐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았다. 내가 사사로이 스스로 선친을 높인 것이 어찌 옛 근거가 없겠는가. 내가 이미 이 기록을 다행히 다시 얻었고, 또 안군이 능히 훌륭한 행적을 보전한 것을 가상히 여기며 이에 서문을 쓴다.
[주-D001] 경양대(景釀臺) :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진동마을 낙동강 상류 서쪽 강변에 위치한 기암절벽이다.[주-D002] 장춘사(長春寺) : 현 경상남도 함안군 칠북면 영동리에 있는 절이다.[주-D003] 상포(上浦) : 현 경상남도 창녕군의 남지읍 남지리 본동과 남포동의 경계에 위치한 나루터이다. 웃개나루 또는 우질포(亏叱浦)라고도 불렀다.[주-D004] 계부(季父) : 조언(趙堰)으로, 자는 옥여(沃汝)이다. 송인수(宋麟壽)의 문인이다. 조종도의 부친이며, 음보(蔭補)로 선원전 참봉(璿源殿參奉)을 지냈다.[주-D005] 박 영공(朴令公) : 박충후(朴忠後, 1552~1611)로,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술(景述)이다. 사육신 박팽년(朴彭年)의 후손이다.[주-D006] 신초(辛礎) : 1549~1617. 본관은 영산(靈山), 자는 지수(支叟), 호는 문암(聞巖),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현풍 현감, 보성 군수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숙(李潚), 박진영(朴震英) 등과 의병을 모집하였고, 1592년 7월 영산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 전투에서 곽재우의 조전장(助戰將)으로 활약하였다. 《문암충의록(聞巖忠義錄)》이 있다.[주-D007] 이명호(李明怘) : 1565~1624. 본관은 광평(廣平), 자는 양초(陽初),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함안 검암리(儉巖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조식의 문인인 이칭(李偁)이다. 1605년에 진사가 되었다. 저술로 《매죽헌집》이 있다.[주-D008] 35명 : 35명의 명단은 성호정(成好正)의 《강재일고(彊齋逸稿)》 〈용화동범록(龍華同汎錄)〉에 모두 실려 있다.[주-D009] 종천(終天)의 슬픔을 품었는데 : 부모의 상을 당하여 내 몸이 다하도록 그 슬픔이 그지없다는 말이다. 조임도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한다.[주-D010] 안정(安侹) : 1574~1636.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자장(子長), 호는 도곡(道谷)이다. 함안에 살았다. 저술로 《도곡집》이 있다.[주-D011] 의서(衣書)를 부탁한 것 : 전도(傳道)의 뜻을 표시한 것이다. 주자(朱子)가 황간(黃榦)에게 의서를 전한 고사가 있다.
ⓒ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정현섭 양기석 김현진 구경아 김익재 강현진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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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송집 연보 / 간송 선생 연보〔澗松先生年譜〕 [미상(未詳)]
35년(1607, 선조40) 정미 선생 23세
○ 1월. 용화산(龍華山) 뱃놀이 때 한강(寒岡) 선생을 배알하였다. - 당시 선생은 칠원(漆原)의 장춘사(長春寺)에서 글을 읽고 있었는데, 입암공이 서신을 보내 부르자 선생이 입암공을 모시고 가서 한강 선생을 배알하였다. 여헌 장현광 선생, 망우당 곽재우 선생과 함께 배에 탔다. 이 말은 〈용화동범록〉에 실려 있다. - 부인 벽진(碧珍) 이씨(李氏)를 맞이하였다. - 노파(蘆坡) 선생 세마(洗馬) 이공(李公) 흘(屹)의 따님이다. -
○ 2월. 입암공의 상을 당하였다. - 선생은 다른 형제가 없었지만, 입암공은 선생을 외아들이라는 이유로 가르치고 인도하는 방식을 느슨하게 하지 않았다. 선생이 어릴 때, 매미와 나비, 제비와 참새 새끼를 잡아서 입암공 앞에서 놀았는데, 입암공이 큰 소리로 꾸짖고 나무라면서, “곤충과 초목도 모두 천지의 한 기운을 타고 난 것이다. 다만 그 품성이 온전치 못한지라, 사람은 통하고 미물은 막히며 사람은 귀하고 미물은 천하지만, 사람에게 해롭지 않은 것은 마땅히 포용하고 길러서 저마다 그 생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해야 옳다. 어찌하여 하늘이 낸 생명을 해쳐서 함께 살아가는 조화로운 뜻을 해치는가? 옛 사람은 혈기 있는 모든 동물의 몸을 해치지 않았다. 고자고(高子羔)는 땅속에서 금방 나온 벌레를 죽이지 않았으며,주염계(周濂溪)는 자기 뜰 앞에 나는 풀을 제거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처음 배우는 사람이 사모하고 본받을 부분이다.”라고 하였다. 입암공이 병석에 눕자 선생은 대변이 단지 쓴지 맛을 보아 병의 차도를 알아보았으며, 북극성에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이 대신 병을 앓기를 기도했다. 상을 당해서는 물이나 간장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 않았고, 기절하였다가 겨우 소생하였다. 장례를 마치자 묘소 곁에 여막을 짓고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올렸으며 손수 제물을 차리고 하루에 두 번씩 묘소를 살폈다.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추우나 더우나 그만 둔 적이 없었다. 상복을 벗지 않았고 매일 미음을 먹으면서 채소나 과일을 먹지 않았다. 모친께 문안을 드리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여막을 벗어나지 않았다. 모든 상례와 장례와 제례에 있어서 한결같이 《주자가례》를 따랐다. -
[주-D010] 용화산(龍華山) 뱃놀이 : 용화산은 경상남도 함안군에 있는 산인데,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용화산 아래로 흐르는 강을 당시에는 도흥강이라 불렀다. 이 일은 낙강(洛江)의 대표적인 선유(船遊)로 인구에 널리 회자되는데, 이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간송집》 별집 권1 〈용화산하동범록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에 실려 있다.[주-D011] 용화동범록 : 《간송집》 별집 권1 〈용화산하동범록후서(龍華山下同泛錄後序)〉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