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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미 국제성지 해설자료 모아보기. 3편
33. 해미 한티고개
21-1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해미 압송로
해미 성지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성지는 한티 고개이다. 이 고개는 당시 죽음의 길로 악명 높던 순교자들의 압송로로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과 서산시 해미면을 가르는 가야산의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티 고개는 교우들이 무리 지어 살던 면천의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집단으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다.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갯마루 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주막이 있었다는데 지금은 흔적도 없다.
▲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갯마루 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
막으로 뒤돌아보던 곳(보이는 곳이 순교자들의 고향 마을)
가야산(678m)은 덕산면과 해미면의 접경을 이루는 곳이다. 이 산 안쪽에는 유명한 흥선대원군 집안의 무덤들이 있는데, 1866년의 병인박해가 다소 소강상태에 들어갈 무렵인 1868년에 독일 상인 오페르트(Ernst J. Oppert)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파헤친 덕산 굴 총 사건으로 오히려 박해가 가중되었다.
한편 그 도로의 왼쪽으로는 수덕사가 자리하고 있는 덕숭산(495m) 자락에 와 닿고 있다. 그러니까 가야산과 덕숭산이 맞닿는 골짜기, 덕산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가 바로 한티 고개이다.
이곳 한티 고개는 1790년부터 1880까지 내포 지방에서 기꺼이 죽음을 택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매질과 핍박 속에서도 해미로 끌려가면서 주님의 영광을 노래하며 넘던 고개이다. 해미 진영에서 관장하던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대상이었지만 주로 면천, 덕산, 예산 등지에서 살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한티 고개를 끌려 넘어가 해미 진영 서문 밖 사형장에서 처형되었다.
덕산 쪽에서 오르는 길은 덕산 읍내에서 해미 방면으로 가다가 오른쪽에 계고장 2층 건물이 보이는 입구를 막 지나면 오른쪽 입구에 「한티 고개 - 순교자 압송로, 2km」 푯말이 보인다. 푯말 옆에는 남원 양씨 효행 비가 길가에 보인다.
이곳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승용차 2~3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이 보이고 민가의 마당을 관통해서 올라가게 된다. 고갯길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은 고개 정상에 1처가 시작되어 해미 방면으로 14처가 설치되어 있다.
34. 해미 순교자 묘 발굴과 서산 본당 바로 신부
▲ 서산 동문동 성당
서산 동문동 제6대 바로(Barraux, 1903~1946, 范 베드로) 신부는 1935년 해미면 조산리(현 해미 순교 성지) 해미 하천변에 생매장되어 있던 병인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묵주 고상과 유골을 발견하여 수습하여 상홍리 백씨 문중의 묘에 장하였다.
1930년 6월 29일 프랑스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고 1932년 8월 5일 서산 본당 신부로 부임하여 1937년에는 서산 성당을 신축하였다.
사목 활동에도 열심이었던 바로 신부는 어느 날 봉 성체 중에 병환 중에 있는 교우가 영하지 못한 채 뱉어낸 성체를 대신 영하고 결국 병을 얻어 선종하였다.
35. 해미 한티(대곡리) 공소
박해 시대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될 때 넘어온 한티 고개 해미 쪽 공소
1943년에 세운 공소 (80여 년전)
박해 시대 신자들이 해미로 압송될 때 넘어온 한티 고개 해미 쪽 공소다. 한티 고개는 한국 천주교 순교 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곳이다. 그 옛날 천주교 신앙의 전파로였고, 박해 시대 청양, 대흥, 덕산, 홍산, 예산 지역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될 때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교우 촌 재건의 길에 세워진 공소로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한 성소의 마을이다.
한티 공소는 다른 공소에 비하여 그 변화의 추이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데, 이는 한티 공소가 여러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한티 고개의 해미 방향과 덕산 방향의 양쪽 모두에 한티 공소가 있었다. 또한, 해미 쪽에 있는 한티의 경우 1901년 신자 수가 증가하자 좀 더 아래쪽에 한티 공소를 신설하고, 윗 한티 공소와 아래한티 공소라고 하였다.
게다가 이 공소들은 때때로 송 뜸과 벌 뜸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윗 한티, 아래한티, 송 뜸, 벌 뜸 등을 혼용하기도 하였다. 공소가 분리, 독립하기 전까지는 신자 수가 19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해미 쪽의 한티 공소(지금의 해미면 대곡리 1구)는 밭농사를 주로 하는 전형적인 화전민 마을로 출발하였다. 교회 측 기록에 때때로 나타나는 ‘벌 뜸 공소’와 ‘대곡 공소’는 바로 이 한티 공소의 다른 이름이다. 또 이와 함께 기록되고 있는 “송 뜸 공소”(아래 한티, 대곡리 2구)는 이곳 한티에서 해미 쪽으로 1km 남짓 더 가서 고개가 끝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방 이전에 이미 신자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해 버렸다고 한다.
한티 마을은 비록 1893년에서야 합덕 본당의 퀴를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 레오) 신부에 의해 정식 공소로 설정되었지만, 교우촌은 이미 그 이전에 형성되어 있었다. 현지 교우들의 구전에 의하면 적어도 1870년대에는 신자들이 이곳에 살기 시작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우 촌의 초창기에 한티에서는 김씨(김상학 다두,1844-1898), 황씨, 박씨 등의 집안이 같이 교우 촌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 후 이들 집안에 자손들이 번창하고, 다른 교우들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신자 수가 크게 늘기 시작하였다.
해미 쪽 한티 공소의 초대 공소 회장은 최 씨였고, 제2대 공소 회장은 김인제 안드레아였다. 황규천 마태오 회장의 회고에 따르면 이들이 공소 설립 때부터 일본 강점기까지 공소를 이끌어 나갔다고 한다.
이후 한티 공소의 회장은 김씨 집안(2대 회장 김인제 안드레아 의 장남 김동은, 차남 김동석)이 이어서 공소 회장을 맡게 되었다. 특히 제2대 김인제(김동석 회장의 부친) 회장 때, 즉 1943년에는 신자들이 힘을 합하여 마을 중앙에 공소 강당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지금까지 내려오는 한티 공소인데, 지금은 2대 회장 김인제 안드레아의 증손자 김기덕 라우렌시오 회장이 그 옆의 사가에서 살면서 이를 돌보고 있다. 이 공소는 1990년 중반에 신자 수의 감소로 폐쇄되었다. 2008년 현재 신자 세대는 15세대밖에 없으나 신부 3명, 수녀 8명을 배출한 성소의 마을이다.
36. 해미 성지 근처 사적지, 덕산 남연군 묘[南延君墓]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에 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 이구(李球)의 무덤이다. 풍수지리설을 믿은 대원군 이하응이 명당자리를 찾아 이곳에 있던 옛 가야사를 불 지르고 탑을 부순 후 경기도 연천에 있던 부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했다.
그리고 인근 골짜기에 절을 지어 보덕사(報德寺)라 이름 짓고 개운사 주지인 도문(道文)을 초대 주지로 삼은 후에 남연군 묘 수호일품대승(守護一品大僧)이라는 직책을 내려 묘를 돌보게 하였다.
7년 후 대원군은 차남 재황(載晃)을 얻었는데, 이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1868년 독일인 에른스트 오페르트(Ernst Oppert)가 1866년 3월과 8월 두 차례에 걸친 조선과의 통상 교섭에 실패한 뒤 대원군과 통상 문제를 흥정하기 위하여 이 묘의 시체와 부장품을 도굴하려다 미수에 그치기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대외적으로는 서양인의 위신이 크게 떨어졌고, 크게 노한 대원군은 쇄국 정책을 강화하고 천주교 탄압을 가중시켰다.
37. 해미 한티 고개 압송로 도보 순례길
▲ 이곳 (덕산 대치리)에서 도보 순례길이 시작된다.
25-1 한티 고개 도보 순례의 역사
박해가 끝난 후 보존된 순교자들의 무덤을 중심으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점차 순교자들의 행적이 깃든 장소, 나아가 한국 천주교 역사 안에서 기념해야 할 장소 등으로 순례의 범위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은 조선 후기 내내 가장 큰 신앙공동체를 이루었고, 박해 후에도 그 유산은 잘 간직한 내포 지방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내포 지방에서 순례의 모범으로 소개된 사례는 해미 순교자들의 무덤과 관련이 있다. 조선 시대 군사 요충지였던 해미는 1799년부터 1868년까지 내포 지방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가 문초를 받고 순교한 장소이다. 특히 1866년부터 시작된 병인박해 기간 중에는 많은 신자들이 생매장으로 순교한 곳이다.
내포 지역에서 해미성 지로 가기 위해서는 한티 고개를 넘어야 한다. 이 고개는 그리 높지 않지만 내포 평야 일원에서 잡힌 천주교 신자들이 꼭 넘어가야 하는 산길이었다. 순교자들의 압송로이며 동시에 감옥에 갇힌 신앙인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살아 있던 신자들이 걸었던 길이다.
한티 고개 도보 순례는 그동안 크고 작은 행사로 자체적으로 이루어졌다.
2008년 대전교구설정 60주년을 기념하면서 교구 내에 성지들을 중심으로 도보 순례가 이루어지게 되는데 이는 각 성지별로 도보 순례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주기적으로 정례화하지 못한 아쉬움을 돌아보며 2019년부터 제9차 한티 고개 도보 순례를 계기로 매년 4월 첫 번째 토요일 (4/1일 해미 성지 유해발굴일) 에 순교자들의 숭고한 발걸음을 시작해 본다.
38. 해미 한티 고개 압송로 도보 순례길 1
해미순교성지 한티고개 순교자 압송 로 도보 순례길 (1코스, 거리 약 5 km 소요시간 1시간30 ~ 2시간.기도시간포함) | |||
구간 | 거 리 시간 | 주 소 (위치) | 참고 자료 |
1-2 구간 | 1km 15 분 | 예산군덕산면 대치리 522-1 (출발 지점) | 순례길 안내판 입구 오른쪽 계곡장 모텔 |
예산군덕산면 대치리 471 (정상 중간지점) | 마을 끝, 등산로 입구 | ||
2-3 구간 | 1.5km 25분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산92 (한티고개 정상) | 한티고개 정상 내려가는 길 안내 표시 |
3-4 구간 | 1km 20 분 | 서산시해미면 대곡리 산 92 (하산 중간지점) | 하산 중간 지점(14처 끝 지점 지나서) |
4-5구간 | 1.5km 15분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974 (산길도보 끝지점) | 신중일 석산 |
39. 해미 한티고개 압송로 도보순례길 2
해미순교성지 한티고개 순교자 압송 로 도보 순례길 (2코스, 마을길 “순교자 시신 임시보관 처 대곡리 공소 방문) | |||
구간 | 거 리 시간 | 주 소 (위치) | 참고 자료 사진 |
1-2 구간 | 414m 6 분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974 (산길도보 끝지점) (2코스 출발지점) | 신중일 석산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766-1 (대곡리 공소) | 대곡리공소 해미에서 발굴된 순교자시신 상홍리로가기 전, 잠시 모셨던 공소. | ||
2-3 구간 | 1.1km 17분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766-1 (대곡리 공소) |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617-4 (송덕암교차로) 버스승차지점 | 송덕암 교차로 | ||
4-5 구간 | 4.8km 도보1시간 20분 차량7분 | 충남서산시해미면 대곡리 617-4 (송덕암교차로) 버스승차지점 | |
충남서산시해미면 남문2로 143 (해미읍성 성지) | 차량.도보 중 선택 성지, 해미읍성 |
40. 해미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차기진 / 영업 교회사연구소〉
머리말
서산의 해미(海美)는 일찍부터 천주교 박해기의 순교 터로 알려져 왔다. 아울러 그 순교사를 밝히기 위한 노력은 충청도 내지는 내포(內浦) 지역의 교회사를 이해하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관, 되어 왔으며, 그 과정에서 해미 읍성(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6호로 지정)이나 해미의 행정, 군사 제도상의 위치와 역할도 중시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직접 해미 순교사를 파악해 보려는 연구도 발표되었고, 내포 문화권의 연구나 개발과 관련하여 해미 순례지(성지)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지급까지의 연구에 의해 해미지역의 순교사는 어느 정도 자세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오류도 있고 미진한 부분도 눈에 뜨이므로 다시 한번 이를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먼저 해미의 지역사 및 해미 읍성이 지니는 행정, 군사, 치안 제도상의 위치와 역할을 천주교 순교사의 배경으로 살펴본 다음, 해미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내포 지역의 교회사와 함께 해미의 순교사, 해미의 순교자 총수를 자세히 규명해 보고자 하였다. 아울러 현재의 천주교 해미 순례지, 즉 해미 성지의 초기 개발 과정과 그 의의를 함께 설명해보는 기회로 삼았다.
41 순교사의 배경 ‘해미읍성’
해미는 태종 7년(1407년) 기존의 정해현(貞海顯)과 여미현(餘美縣)을 합쳐 ‘해미 현’
(海美縣)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그 이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후 해미의 행정 관할
구역은 지금의 서산시 해미면, 고북면(高北面) 전역과 운산면(雲山面) 일부 지역에 해당하였다. 그러다가 1914년의 행정 구역 개편 때 운산면 지역이 분리됨과 동시에 기존의 해미 현 대부분은 통합된 서산군의 지성 면으로 명명되었다가 1917년 서산군 해미면으로 개칭되었다.
해미는 초선 초기부터 군사적인 측면에서 주목을 받은 지역이었다. 태종 14년(1414
년) 덕산(德山〉에 있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즉 ‘병영’)을 해미로 이설한 이유도 해미가 서해안 지역의 군사 요충지, 즉 왜구의 중요한 방어 기지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미는 병사(종2품 무관)가 관할 하는 군사 지역이 되었고,태종이 이 지역을 순방했던 다음 해인 17년(1417년) 무렵부터는 군사, 행정 기능을 동시에 갖춘 읍성의 축조가 시작되었다.
이어 세조 원년(14^년)에 수립되었던 군익도(軍翼道) 체제가 세조 3년(1457년) 10월
진관(鎭管) 체제로 완전히 변경되면서 해미 병영은 호서(중청도) 육군의 주진(主鎭)으
로 각처의 진영을 관장하게 되었다.
해미 병영의 역할은 효종 2년(1651년)에 병영의 청주 이설이 결정될 때까지 23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이러한 결정과 동시에 해미에는 호서 좌영(湖西左營)이 설치되었다. 동시에 호서의 진관 체제는 청주 병영을 비롯하여 홍주 전영, 공주 우영, 청주 중영, 충주 후영, 해미 좌영 등 5개 진영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효종 3년에는 병영이 청주로 완전히 이설되면서 해미 현 반양리에 있던 현의 치소가
해미 읍성 내로 이전되고, 무관의 겸영장(兼營長, 즉 정3품의 현감 겹 진영장)이 파견되었다. 그 후 호서 좌영은 숙종 19년(1693년) 해미에서 온양으로 잠깐 이설되었다가 숙종 38년(1712년) 다시 해미로 환원되면서 해미의 겸영장이 다시 행정과 군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해미의 겸영장은 토포사(討捕使)를 겸하면서> 해미, 대흥, 온양, 면천, 태안, 결성, 예산, 평택, 아산, 신창, 덕산, 당진 등 12개 군, 현의 군사와 치안을 관장하였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시작된 후 위의 각 지역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어 해미로 압송된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해미 읍성(海美邑城)은 일단 세종 3년(1421년)에 축성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이후로도
중수 작업이 계속되어 성종 22년(1491년)에는 조선 후기의 읍성 형태가 거의 갖추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헌종 13년(1847년) 해미 겸영장으로 부임한 박민환이 이후 2, 3년 동안 폐허 된 읍성을 증수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고종 9년(1872년)에 그린〈해미 현지도>(규장각 소장)에는 동, 서, 남문, 외삼문, 내삼문, 동헌, 객사, 내아, 작청, 향청, 내창, 책방, 청허정 등의 시설들이 수록되어있다. 그러나 읍성 안에 있었다고 하는 옥은 위의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천주교 박해기에는 해미 읍성의 성곽과 관아 건물이 대부분
갖추어져 있던 시기였다. 이 중에서 천주교 순교자들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추정되는
곳으로는 순교자들의 신앙 증거 터인 겸영장의 동헌, 현재 그 터만 남아있다고 하는
읍성 중앙의 옥〉 그리고 순교자들의 형장과 직결되는 곳으로 추정되는 서문과 서문
밖에 있었다고 하는 돌다리 동이다. 이 밖에도 5일마다 열리던 성내 북쪽의 장시도 순교사와 일정한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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