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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03-02)
아브넬을 선대한 다윗과 요압의 반발
사무엘하 3장 17-26절
골프선수 최경주는 2002년 PGA tour에서 우승한 이후로 꾸준한 활약으로 세계 랭킹 5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는 전남 완도의 작은 어촌 마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으로 세계에서 성공한 그의 이야기 뒤에는 그는 샐러리맨들이 하루 8시간 일하듯, 성공한 후에도 하루에 8시간씩 공을 치며 노력하였고, 골프를 자신의 천직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성실함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도와 계속해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야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요압은 동생의 원수인 아브넬을 복수심으로 불탔습니다. 그래서 아브넬이나 요압은 다윗 왕국을 위해 무엇인가 열심히 일했지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이루시려는 방법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감정에만 충실하며 일했습니다.
아브넬의 설득(17-19)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때, 때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과 전혀 다른 인간적인 방법으로 하는 사람들이 판치도록 공간을 내어줍니다. 야망과 복수심에 가득찬 아브넬과 요압과 같은 사람들이 지도자로 나설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을 망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이런 과정들 속에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나가심을 믿어야 합니다.
17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18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19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17-19)
유다 지파를 제외한 열한 지파들은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아브넬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브넬이 사울 왕의 첩과 동침한 사건에 대해 이스보셋과 다툰 후, 이스보셋에게서 등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는 교활한 방법으로 자신의 살길을 찾았습니다. 다윗을 모든 이스라엘의 왕 만들기에 앞장섰습니다.
(1) 이스라엘 장로들과의 만남(17)
이스라엘 장로들과 베냐민 지파 백성들을 찾아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통일 왕으로 세우고자 설득해 동의를 얻어냅니다. 이 만남은 미갈을 데리러 가기 전에 있었을 것입니다.
아브넬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17)라고 말합니다. 이전에 자기들을 다스릴 왕으로 다윗을 계속 요구하였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전에는 이들의 요구를 아브넬이 거부했을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약속(18)
아브넬은 이제 때가 되었으므로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전에 요구했던 바를 실천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근거로 제시합니다.
아브넬은 하나님께서 이미 다윗에 관하여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아브넬이 인용하는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 대해 하셨던 말씀이 이와 비슷합니다(삼상 9:16). 아마도 아브넬이나 다른 사람들은, 다윗이 기름부음 받았던 일을 기억하면서, 이스라엘을 다윗의 손으로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 불립니다. ‘종’이라는 칭호는 주인의 전폭적인 지지와 신뢰를 얻으면서 주인으로부터 중요한 사명을 받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모든 대적에 대해 말하기 전에 블레셋을 언급한 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이 블레셋이었음을 보여줍니다. 한글성경의 ‘벗어나게 하다’는 원문에 ‘구원하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블레셋과 다른 모든 대적을 멸망시키실 것입니다.
(3) 베냐민 사람들과의 만남(19)
아브넬은 교활하게 양다리를 걸칩니다. 베냐민 사람들을 이스라엘과 구분하여 언급함은 베냐민 지파가 이스보셋 왕국의 중심 세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의 지파인 베냐민 족속도 다윗을 왕으로 모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아브넬의 이름이 두 번 언급되는데, 그 이름에는 각각 강조 어구 ‘감’(ם)이 선행하고 있습니다. 한글 성경은 ‘감’을 한 번만 ‘또’라고 번역합니다. 이는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집중시키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합니다. 지금 모든 일을 추진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넬입니다. 아브넬이 변화를 만들었고, 아브넬이 다윗에게 온 이스라엘을 이끌고 있습니다.
아브넬의 헤브론 방문(20-21)
성도들은 인생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될 때, 스스로 제동을 걸어 멈추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순탄함이 항상 축복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늘이 없고 그림자가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 없는 오만의 내리막길은 가파를 뿐입니다. 아브넬은 헤브론 방문해서 다윗과 협상을 통해 좋은 결과를 받았지만, 피살로 뜻하지 않게 물거품이 됩니다.
20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21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20-21)
다윗의 성대한 환대에 아브넬이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충성에 대한 화답으로 다윗은 서둘러 안위를 보장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밀담은 하나님의 뜻을 위한 단합이 아니라 불순한 야합이었습니다.
(1) 아브넬을 위한 잔치(20)
19절에 이어 20절에서도 아브넬이라는 이름이 두 번 사용되면서, 아브넬에 대한 관심을 이끌고 있습니다. 다윗은 호의적으로 자신을 찾아온 그를 위해 잔치를 배설합니다. “잔치”는 ‘미쉬테’인데, 보통 술 마시는 잔치를 가리킵니다.
한글 성경은 아브넬과 함께 헤브론으로 왔던 사람들을 ‘부하’라고 칭합니다. 원문은 단순히 아나쉰(사람들)입니다. 이들이 각 지파의 대표거나 장로들이었다면 달리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아직 다윗의 태도를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각 지파가 자신들의 대표를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나쉽’은 흔히 군인들을 가리킵니다(삼상 14:12;17:52). 따라서 이 사람들은 ‘무기 든 사람’이라 불리는 친위부대로서 아브넬을 수행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참조, 18:15). 다윗이 잔치를 베푼 것은 아브넬과 그 사람들에 대한 깊은 호의를 나타냅니다.
(2) 아브넬의 제안(21)
21절에서도 아브넬의 이름이 계속 언급됩니다. 그리고 아브넬은 다윗에게 자신이 다윗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을 세 가지 방식으로 강조하며 설명합니다.
첫째, 1인칭 연장형(cohortative) 동사를 세 번 반복하여 사용합니다. ‘내가 일어나서’, ‘내가 가서’, ‘내가 모으겠습니다.’ 1인칭 연장형은 말하는 사람(아브넬)의 의지와 소원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아브넬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옹립하려는 자신의 의지가 확고하며, 자신이 이 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려 함을 다윗에게 자랑하듯 말합니다. 둘째, 아브넬은 이미 다윗을 “내 주”(아도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셋째, 온 이스라엘 무리를 모으겠다고 말합니다. 이스보셋의 왕국에 참여한 지역과 지파들의 목록을 고려한다면, 아브넬이 이스라엘 전체를 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아브넬은 온 이스라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언약을 맺게 하고”, 즉 이스라엘은 다윗과 언약을 맺을 것입니다. 이 언약은 다윗을 왕으로 모시는 충성의 서약일 것입니다.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는 왕의 권세와 의지를 존중하려 할 때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나단이 다윗에게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7:3)라고 말한 것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을 ‘평안히’ 떠나보냈습니다. 다윗에게 아브넬을 해지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압의 분노(22-26)
교만이나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었는지, 상대방의 비극에 대한 불감증이나 부주의 때문이었는지, 아브넬은 요압이라는 잠재적 위험 요인을 간과했습니다. 별것 아닌 실수 같았지만, 그 일이 아브넬에게 치명적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22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23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24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25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하시는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26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22-26)
요압은 성공적인 전투를 마치고 다윗에게 돌아옵니다. 헤브론에서 아브넬이 다윗에게 왔다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특히 다윗이 그를 평안히 돌려보냈다는 소식에 매우 기분이 나빴습니다. 아브넬은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원수였기 때문입니다.
(1) 아브넬의 방문을 알게 된 요압(22-23)
아브넬이 헤브론을 방문하는 동안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은 여러 지역을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한글 성경이 “적군을 치고”라고 번역했으나, 원문에는 ‘적군’이라는 말이 없고 단지 ‘거두드’, 즉 습격부대가 되었다가 돌아왔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요압에게 알리지 않았고, 요압이 없을 때에 맞춰서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이 요답과 아브넬의 적대적 관계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기회에 요압을 쫓아내려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요압이 습격하여 노력한 지역이 어느 곳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요압은 유다를 공격해온 적군과 맞서 싸운 것이 아니라 평안히 있는 이방 민족의 땅을 노략하였습니다.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많은 노략물을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요압은 헤브론에 도착한 후, 아브넬이 왔다가 평안히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21절에 사용된 단어 ‘평안히’가 22절과 23절에 각각 다시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아브넬의 평안한 귀환이 요압에게 큰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2) 다윗 왕을 질책하는 요압(24-25)
분노한 요압은 다윗에게 가서 왜 그렇게 했느냐고 따지면서 다윗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잘(=확실히) 가게 하셨나이까”라는 아브넬이 이미 떠나서 헤브론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의 행동을 정탐하기 위해 헤브론에 왔다고 거짓으로 고발합니다. 요압에 따르면, 아브넬은 다윗의 행동을 정탐한 뒤 다윗을 공격하려는 의도에서 헤브론을 방문한 것입니다. 요압은 아브넬이 다윗을 속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요압이 거짓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요압은 다윗을 왕이라고 부르지 않고 단지 ‘당신(아타)’이라 부릅니다.
(3) 아브넬을 데려오는 요압(26)
요압은 다윗에게 자신의 말만 외치고 다윗의 말을 듣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사신들을 보내 아브넬을 뒤쫓게 하였는데, 그들이 시라 우물가에서 그를 만나 데리고 왔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가 아브넬을 위해 잔치를 베푼 사실이나, 아브넬을 죽이려는 요압의 작전을 몰랐다는 사실은 아브넬의 죽음에 관해 다윗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음을 보여줍니다. 시라는 헤브론에서 북쪽으로 4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으로 여겨집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헛된 야심과 악한 복수심과 같은 악한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을 따라 크게 생각하고 대범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특히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인간적인 방법으로 행동하지 않도록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일과 그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기도하고 순종해 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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