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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가톨릭과 개신교회의 논쟁점-2
3. 성사 제도와 성직자의 사죄권
개신교회가 2가지 성례(세례, 성찬)만 인정하는 데 반해 가톨릭교회는 7가지 성사(세례, 성찬, 신품, 고백, 견진, 혼인, 종부)를 주장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외형상 가톨릭교회가 개신교회에 비해 성사 제도가 5가지 더 많다는 차이보다도 성사 제도에 대한 두 교회의 내적인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는 훨씬 더 심각하다. 이 차이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것은 성직자들에게 죄를 사하는 사죄권이 있다는 가톨릭교회의 주장이다.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우리의 죄는 가톨릭의 사제들에 의해 사죄 된다. 세례를 통해 우리의 원죄가 용서받고 고백성사를 통해 우리들의 자범죄가 사죄 된다. 또한 종부성사 때 우리의 눈과 귀와 입과 손과 발에 기름을 바르고 신부의 기도가 있으면 이 땅에서 지은 죄가 사죄 되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게 된다. 이 성직자들의 사죄권은 마태복음 16장 19절과 요한복음 20장 21~23절에 근거되어 있다는 것이 가톨릭교회의 주장이다.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 속에는 사죄권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9)라는 예수의 말씀은 죄를 용서하거나 죄를 보류하는 권세가 포함된 것으로 가톨릭교회는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권세는 교황과 주교를 통해 사제들에게 전달된 권세이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오직 사제들을 통해서만 용서받을 수 있는가? 직접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을 수 없는가? 오늘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죄의 사함은 고백성사로만이 아니라 전례와 기도와 (특히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나) 심심 기도로도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단 여기에 반드시 통회가 따라야 하며 큰 죄는 고백을 꼭 해야 한다.
위의 가톨릭 교리서의 주장을 통해 우리는 신심 기도로 직접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큰 죄는 반드시 고백해야 한다는 마지막 부분에 붙어 있는 중요한 언급이다. 가톨릭교회는 대죄와 소죄를 구별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대죄는 우리의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큰 죄이다. 가톨릭에 의하면 탐욕, 호색, 분냄, 시기, 게으름, 미사에 불참하는 것 등은 대체로 대죄에 속한다. 그러나 대죄와 소죄의 구분은 불명확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는 대죄는 반드시 사제를 통한 고백성사를 통해 사죄를 받아야 된다는 이 단서는 결국 사제를 통하지 않고는 큰 죄의 용서는 불가능하다는 선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가톨릭교회의 주장은 작은 죄는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 죄를 용서받을 수 있지만 큰 죄는 반드시 사제를 통해서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이 결론은 지극히 위험하고 우려할 만한 결론이라 아니할 수 없다. 결국 가톨릭교회에서는 큰 죄는 사제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용서하는 존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의 가톨릭 교리서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에게 우리의 죄를 고백하여 용서받는다는 말이 의미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가톨릭교회에서는 사제들이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탈하고 있다는 비판이 부분적으로는 지나치다고 해도 상당 부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죄의 용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의 사건이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세리의 기도는 죄 용서가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 만남의 사건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 준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 세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직접 상달되었고 예수에 의하면 이 세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 예수께서는 죄를 고백하기 위해 사제에게 가야 한다고 한 번도 가르치신 적이 없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거듭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초의 만남의 사건도 사제들의 세례가 아니다. 가톨릭교회에 의하면 사제들이 세례를 통해 원죄가 사해진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이것은 잘못이다. 인간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에 대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그 죄가 사해지는 것이다. 즉, 죄의 용서와 칭의는 일차적으로 말씀의 사건인 동시에 믿음의 사건이다.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다(눅24:47). “그(그리스도)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가톨릭 사제의 세례가 없이는 원죄의 용서가 불가능하다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죄의 용서와 칭의가 말씀의 사건이요 믿음의 사건이라고 가르치는 성서의 정신과 충돌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13:38~39). 죄의 용서와 칭의는 제도적인 가톨릭교회 속에 폐쇄된 것이 아니고 복음의 전파를 통해 나타나는 말씀과 성령의 사건이다. 이 말씀과 성령의 사건을 가톨릭이라는 제도적인 교회 속에 유폐시키면 안 된다.
성사 제도에 나타나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의 본질적인 문제점은 가톨릭교회에서는 성직자들이 그리스도와 성령을 직접적으로 대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그리스도께로 직접 나아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성사 제도와 안수를 통해 죄가 직접적으로 용서되고 성령이 직접적으로 주입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이다. 이 잘못된 신념은 신품성사와 견진성사에서도 나타나는데 신품성사와 견진성사 때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직접 주입된다고 가톨릭교회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신품성사 때 주교의 안수를 통해 성령의 능력이 신부들에게 주입되고 견진성사 때 신부의 안수를 통해 성령이 신도들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은 성령이 결국 교회의 제도 속에 유폐된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바로 이와 같은 성사 제도의 문제점은 아직도 고쳐지지 않고 있는 화체설과 더불어 가톨릭 성사 제도의 심각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4. 교황과 교회의 무오성
1870년 로마에서 개최되었던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 무오성의 교리를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우리는 신적으로 계시된 교리인 교황에 대하여 가르쳐 확실히 하고자 하나니, 교황이 그의 지고한 사도적 권한을 인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목양하고 치료하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그의 자리에서 말할 때는, 신적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향하여 믿음과 도덕에 관계되는 교리들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부여하신 무오성을 소유하게 된 축복받은 베드로에게 약속하신 신적인 지원에 의해, 온 세계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과 도덕에 관계된 교리를 분명하게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황 자신이 언급한 이러한 정의들은 교회의 동의가 있더라도 변경시킬 수 없다.
교황 피우스(Pius) 9세에 의해 주장되기 시작하고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확정된 교황 무오성의 교리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에서도 계속적으로 추인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주교단의 으뜸이신 로마교황이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최고 목자와 스승으로서 형제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기 위하여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결정적으로 선포할 때에, 교황은 직무상의 무류성을 향유한다. 그러므로 교회의 결정은 교회가 동의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개정될 수 없는 것이라 함이 마땅하다. 그것은 베드로 안에서 이미 교황에게 약속된 성신의 도움을 받아 선포된 것이므로, 이 결정은 누구의 승인도 필요치 않고 다른 판단을 요구하는 어떠한 상소도 있을 수 없다. 그럴 때에는 로마교황이 개인 자격으로 선언한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의 무류의 은사(카리스마)를 특별히 지니고 있는 세계 교회의 최고 스승으로서 가톨릭 신앙의 교리를 설명하고 옹호하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결국 오늘의 가톨릭교회는 종교개혁 시대에도 공인되지 않았던 교황 무오의 교리를 놀랍게도 이 개명한 시대에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가톨릭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무오성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그 첫째는 교회의 무오성이고 둘째는 교회를 정점으로 하는 주교단의 무오성이다. 이 무오성은 내용적으로 교황이 주재한 공의회의 무오성을 의미한다. 셋째의 무오성은 전체 교회의 무오성이다. 이 세 가지 무오성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공적으로 선언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무오성은 내용상으로 살펴보면 결국은 교황의 무오성으로 집약된다. 왜냐하면 전체 교회의 무오성이라는 것은 전체 교회를 사실상으로 대변하는 기관은 주교들의 모임인 공의회뿐이고, 공의회의 결정은 교황이 인가할 때 비로소 유효한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결국 세 가지의 무오성은 내용적으로는 로마교황의 무오성으로 귀착되는 것이다.
그러면 교황의 결정은 정말 오류가 없는가? 이 문제에 대해 먼저 그 유명한 갈릴레오 재판을 또 올릴 수 있다. 교황 바오로 5세(1605~1621)와 우르반 8세(1623~1644)는 갈릴레오를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은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 된다고 선언했고 갈릴레오를 심문하고 종교재판소의 지하 감옥에 가두지 않았던가? 1691년 5월 5일에는 코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로 정하고 지구가 돈다는 이론은 성서와 완전히 위배 되는 것으로 탄핵하지 않았는가? 이와 같은 세인들의 질문을 잘 알고 있는 가톨릭교회는 교황 무오의 이론에 “신앙이나 도덕에 관한 교리를 선포할 때” 무오하다는 단서를 붙였다. 즉, 자연과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에 대해 무오하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1854년 교황 피우스 9세가 마리아의 무염시태 교리를 선포했는데 그것이 과연 무오한가?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가 성모승천의 교리를 선포했는데 그것이 과연 무오한가? 동정녀 마리아는 평생 동정이었는가?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성서와 근본적으로 충돌되는 잘못된 교리라는 것을 이미 살펴보았다. 뿐만 아니라 교황 식스투스(Six-Tus) 5세는 라틴어 성서인 불가타(Vulgate)의 옛 번역을 좋아해서 이 옛 번역을 조금이라도 고치는 자는 출교하겠다고 선언했는데 그 번역문은 이미 수없이 고쳐진 채로 개정판이 출간되고 있다. 또한 우리는 공개적으로 무오성을 부인했던 교황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다. 그들 중 대표적인 사람은 이노센트 3세, 클레멘트 4세, 그레고리 11세, 하드리안 6세, 바오로 4세 등이다.
무오성은 하나님의 속성이지 인간의 속성이 아니다. 로마 가톨릭의 교회는 교황이 지상의 그리스도 대리자라는 잘못된 교리를 극단적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교황이 교황의 보좌에서 행하는 일은 오류가 없는 그리스도의 일과 동일화시킴으로 교황의 보좌에 앉은 교황을 신격화시키는 대단히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는 성서와 신학에 대한 자유로운 연구를 지극히 제한할 뿐만 아니라 이런 연구를 통해 밝혀지는 진리가 교회적으로 탄압받을 심각한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5. 최근의 가톨릭교회의 긍정적 변천
지금까지 우리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상의 중요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다. 그중에서 마리아론 이나 교황과 교회의 무오에 대한 교리 등은 종교개혁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오늘의 새로운 가톨릭교회의 심각한 문제점들이다. 이와 같은 교리들은 가톨릭교회의 교리 중 일부는 종교개혁 시대보다 더욱 문제가 있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정적 발전에 비해 긍정적인 쪽으로 변천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도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중에 눈에 띄는 대표적인 것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개신교회에 대한 인식의 변천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로마 가톨릭교회는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면서 “서구의 갈라진 교회와 교단”이라는 항목에서 개신교회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교령에서 바티칸공의회는 개신교 성도들에 대해 “갈라진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리서와 비교해보면 상당한 변천을 느낄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전까지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회를 ‘열교(裂敎)’ 혹은 ‘이단’(Haeresis)이라고 하고 그 신봉자들은 열교인이라고 한다 …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단자는 한두 번 경고해 보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그와 관계를 끊으시오. 그대도 알다시피 이런 사람은 옳은 길을 이미 벗어나서 죄를 짓고 있으며 스스로 단죄하고 있는 것입니다’(딛3:10). 여기서 이단자란 열교인을 뜻한다.” 이와 같은 구원이 없는 이단인 열교도인 프로테스탄트 신자를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표현한 것은 놀라운 변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프로테스탄트가 성서를 존중하고 성서를 통해 하나님을 찾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기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초로 사랑과 덕행을 행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긍정성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개신교회와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형제적 대화로써 점차 일치를 달성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개신교에 대한 인식의 변천은 긍정적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변천에도 불구하고 로마 가톨릭의 교회가 개신교회를 가톨릭교회와 대등한 형제교회 내지는 부분적으로만 결함이 있는 훌륭한 교회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여전히 개신교회를 “신품성사의 결여로 성체성사의 본연의 완전한 본체를 보존하지 못하고” 있는 교회로 인식하고 있고, 이 점 때문에 개신교회는 동방 정교회보다 훨씬 더 열등한 교회이다. 즉 개신교회는 교회의 은총의 젖줄이라고 할 수 있는 사도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교회로 성세성사나 성체성사를 통해 흘러나오는 성령의 은총을 받는데 대단히 결함이 있는 교회인 것이다.
2) 평신도의 성서 읽기와 말씀의 전례
루터의 종교개혁이 가져다준 큰 공헌 중의 하나는 성서를 모국어로 번역해서 평신도들이 성서를 직접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것이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 성서에 직접 접근할 수 없었고 성서의 번역도 금지된 당시의 상황 속에서 이룩한 가히 혁명적인 업적이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그토록 억압했던 성서의 모국어 번역과 평신도들의 성경 읽기가 오늘의 가톨릭에서는 모두 허용되고 있다는 것은 가톨릭교회 내에서의 개신교 정신의 승리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은 또한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를 허용함으로써 개신교회의 설교와 약간 유사한 말씀의 선포가 공적 미사에 등장한 것도 매우 긍정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가 미사 중에 「말씀의 전례」가 허용되었다고 해서 그 가치를 너무 크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회 예배에서 말씀의 선포가 차지하는 중요한 비중은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는 성체성사가 차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즉, 가톨릭은 철저히 성사 중심의 교회이고 개신교회는 말씀 중심의 교회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가톨릭교회 내에서 성서 번역과 읽기가 허용되고 있다고 해서 개신교회에서처럼 자유로운 번역과 읽기가 허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가톨릭교회는 말씀을 해석하고 선포하는 권한은 철저히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권에 속한다. 즉, 자유로운 성서 번역과 해석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서와 교회와의 관계는 개신교회의 관계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개신교회에서는 성서의 권위가 교회의 권위를 지배하는 권위인 데 반해 가톨릭은 그 반대로 교회의 권위가 성서의 권위를 보호하는 틀로 작용한다. 이점에 있어서는 종교개혁 시대의 신학적 문제점이 오늘에 있어서도 가톨릭교회 내에 그대로 존속하고 있다. 가톨릭교회가 교회와 교황의 무오성을 최근까지 강조하고 있는데 반해 개신교 내에서는 오랫동안 강조되던 성서의 무오성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도 교회와 성서 사이의 관계에 대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입장이 어떠한가를 잘 알 수 있다.
3) 사회정의와 이웃 및 세상에 대한 책임의 강조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등장하는 가톨릭 정신의 가장 중요한 변천은 사회정의와 이웃 및 세상에 대한 책임성이다. 이점은 오늘날 가톨릭교회가 칭찬받을 가장 훌륭한 점인데 이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주도한 교황 요한 23세의 탁월한 정신과 깊은 관계가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인간의 권리(인권)의 중요성과 사회정의에 대해 강도 높게 강조했고, 사회적 책임과 사회 참여의 중요성을 환기시켰다.
이와 같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은 라틴 아메리카로 건너가서 메델린(Medellin)의 제2차 라틴 아메리카 주교 회의의 기본 정신으로 발전되었고 이웃과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가톨릭의 모습이 구현화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급진적이긴 하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이 형성되게 되었다.
과거의 가톨릭교회는 결코 사회정의를 위한 교회로 지칭하기 어려운 교회였다. 과거의 가톨릭은 대체로 지배자의 종교였고 지배 권력과 결탁한 특징을 많이 나타내는 교회였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기점으로 가톨릭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과 함께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인권과 민주화와 사회정의를 위해 일하는 교회라는 강한 인상을 전 세계에 심게 되었다.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가톨릭은 점차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시작했고 세계적으로 가톨릭의 교세는 크게 확장되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황의 무오성이나 마리아론과 같은 잘못된 교리를 추인하는 심각한 오류를 범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톨릭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새롭게 하는 분수령이었다.
오늘의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는 과거 종교개혁 시대와 같은 심각한 갈등 상황 속에 있지는 않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을 발표하면서 일치운동에 방해되는 온갖 경솔한 열심을 피할 것을 전체 가톨릭 신도들에게 권고하고 있다. 이 권고는 훌륭한 권고라고 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 내에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교리상의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도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가 일치로 나아가는데 불필요하고 경솔한 열심은 피해야 한다. 그러나 개신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진정한 일치를 위해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교황 수위권 및 베드로 수위권, 마리아론, 성사 제도 및 성직자의 사죄권, 교황 및 교회의 무오성 등은 신학적 오류이므로 가톨릭교회가 다시 검토해서 바른 신학적 입장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나타나고 있는 가톨릭교회의 사회정의와 이웃과 세상에 대한 책임성은 훌륭한 발전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