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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분석) 백색소음은 여러 가지 빛을 섞으면 흰색이 되는 것처럼 일상의 주변 음이 합쳐져 듣기 좋은 소음이 된다는 의미다.
시를 읽는 키워드
일반소음(불협) vs 백색소음(화합)
부분(근시안) vs 전체(통합, 큰 눈)
담 vs 순응
구별(자아/에고) vs 무화(self/알아차리기)
읽는 이를 읽는 이의 삶 속으로 돌려보내는 시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특별한 순간을 탐구하는 '시 창작 스터디' 시집
문학동네 시인선 138번째 시집으로 이다희 시인의 『시 창작 스터디』를 펴낸다.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서 “돌올하게 신선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등단한 그의 첫 시집.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과의 관계, 즉 우리가 담겨 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와 사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믿음직스럽고, 말의 꼬리를 붙잡고 조근조근 할말을 밟아나가는 말의 운용 방식 또한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끈기 있게 밀고 나가는 자세에서 저력이 느껴졌다”고 심사평이 이어졌었다. 부러 도발하지 않고, 쉽게 도피하지도 않고, 묵묵하고 차분히 시 세계를 꾸려간 이다희 시인의 시 50편을 데뷔 3년 만에 내놓는다.
백색소음 / 이다희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백색소음」 전문
눈을 뜨면서 시작하고 감으면서 끝나는 시 「백색소음」, 이다희 시인의 등단작이다. 제목에서 예상되는 청각적 이미지보다 ‘나’와 사물의 관계가 풍성한 시각적 디테일로 채워져 있다. ‘나’가 먼저가 아니라 사물이 먼저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 ‘나’의 생각이 아니라 사물들의 생각이 전개되는 순간들에 대한 시라 할 수 있겠다. 고요히 관찰하는 눈이 인상적이다. 사물/대상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위선도 위악도 위장도 없이 “친교에 순응하는 편”을 택한 이의 눈이기에,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인 내 ‘피부’와 그 피부에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으로 내려앉는 습기를 관찰하며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라 물을 수 있다. 요컨대 내가 내 경계라 믿어온 피부에 구멍을 내고 스며들고 감각되는 습기를 관찰함으로써,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특별한 순간을 읽는 이로 하여금 마주하게 하는 것.
이렇듯 이다희의 시쓰기는 무언가를 터뜨리고 발산하기보다는, 잘 알 수 없는 순간을 포착해 고요 속에 가만히 가두고 골똘히 들여다보는 일에 가깝다. 새벽에 유독 잘 들리는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거나(「아침의 예감」), 몸은 아직 잠 속에 있는데 눈만 깜박이며 익숙한 듯 생경한 듯 나를 둘러싼 풍경을 짚어보거나(「새벽 네시 삼십분의 알람」) 할 때의 그 고요, 소리 없는 시선의 움직임 말이다. 그런 때에 우리의 인생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므로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않는다 말할 수는 없으리란 것을 시로써 보여주는 시쓰기.
긴 복도를 따라 걷는 발걸음이 있다
발소리가 길게 따라붙는다
홀로 걷는 사람은
자신의 발소리를 자신만 듣는다
(…)
복도가 휘는 것은
시간이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긴 것에 대한 착시일 뿐이라고
(…)
아무도 복도에서 생활하지 않고
걸어오다 문득
사라지는 사람이 있다
햇빛이 복도를 오래 사랑했다
―「플랫폼」에서
해설을 쓴 신용목 시인은 이 시의 제목이 ‘플랫폼’인 이유가 “인생은 사건으로 구조화된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들이 드나드는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썼다. 또한 이 시와 짝을 이루는 「플랫폼 2」에서 ‘복도’를 모두 ‘사랑’으로 대체해 쓸 수 있었던 것 역시 “사랑은, 인생은, 사건과 사건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그것들이 잠깐 반짝이다 몸속으로 침몰하는 순간들”로 볼 수 있다고. 여기에 고개 끄덕인다면 “바닥에 닿지 않는 커튼이 계속 아름다운 직물의 모습을 보여줄 때”(「포춘 쿠키」) 그것이 바닥과 무관한 일이냐는 이어지는 질문에 ‘아니오’라 답하게 되리라. 바닥에 어른거리는 커튼의 무늬가 삶에 드리운 그 순간들을 형상화했다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또한 그 형상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일이 시인이 이 세계와 개인의 경계를 지우고 또 새로이 분리해보는 작업과 닮아 있음 또한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비단 ‘나’와 사물간의 관계뿐 아니라, 타인을 향한 시인의 시선에서도 특장인 관찰력과 차분함이 돋보인다. “텅 빈 상자를 보면 상자를 채우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한번 밟아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채우면 채워지는 선물이 좋아요. 밟으면 구겨지는 내면이 좋아요”(「( )」) 같은 시나, “많이 아프냐고 이마를 짚는 사람이 있고 왜 자꾸 아프냐고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두 사람은 한 사람이다”(「복통으로 걸어가는」)라 말하는 시, “당신이 이렇게 힘이 없으니까 나는 괜히 우쭐하고 어쩐지 불공평하다고 느껴 당신은 깊은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악몽을 꾸는 사람 같기도 하고 외로워 보였다가 순식간에 편해진 사람 같아 그런데 우리가 불공평하지 않은 적이 있던가”(「아마추어」) 등에서 보이는 통찰이 근원이 거기에 있을 터.
4부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연작시 10편은 ‘나’의 안으로 침잠해, 내 안의 다양한 ‘나’들을 관찰한다. ‘열 명의 사람들’로 대표되어 나의 여러 시절들을 나눠 가진 분신들. “뒤를 돌아보니 열에 아홉이 올라오고 있었다 (…)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나를 그냥 스쳐지나갔다”(「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10」는 구절로 대표되는, 나에게 따라붙거나 스쳐지나 앞질러가거나 하는 분열된 사유들은, 기억으로 때로는 환영으로 존재하며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
우리 열 명의 사람이 우리의 재능으로
누군가는 미래에 있었고 누군가는 아프기 시작했으며 누군가는 질투심을 사용했다
하나의 꽃이 피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는 것을 영영 이해하지 못하듯 걸었다
누군가 바다를 한 번도 본 적 없다는 사실을 수줍게 고백했다 우리 열 명의 사람은 바다로 갔다 수줍은 사람은 바다를 앞에 두고 잠시 말이 없었고 우리는 그의 감동까지 더해져 그날의 바다를 아름답게 느꼈는데, 수줍은 사람은 바다를 무서워했다 수줍은 사람은 무서워하는 사람이 됐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1」에서
한번 깨진 거울은 다시 깨질 수 없고 그녀의 피부는 부드러워서 깨진 거울에 찔리면 피가 날 것이다. 거울이 깨진 경험에서 거울을 빼면 어떻게 될까. 거울이 없이도 거울이 깨질 수 있을까. 처음을 두 번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두 개의 붉은 줄」에서
“사랑 안에서 무력한 저에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할 힘이 있다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부디 그 힘이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상처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먼 길을 달려 노래가 된다면 좋겠습니다”라고 신춘문예 당선소감을 밝혔던 시인. 그가 계속해갈 ‘시 창작 스터디’가 환기할 일상 속 이상하고 아름다운 순간들, 불러일으킬 내 안의 초상들, 그 시를 통과해 비로소 마주할 특별한 노랫소리를 기대해본다.
이다희의 시는 적대를 피하려고도 하지 않지만 그것을 관념화하지도 않아서, 손쉬운 대결과 선명한 선언 속에 미적 싸움을 가두지 않는다. 일상의 시간을 찢되 그 조각을 다시 일상의 자리에 내던짐으로써, 읽는 이를 읽는 이의 삶 속으로 돌려보낸다. 언어의 재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삶을 끝없는 재현 속에 위치시키는 것. 이 역전의 방식이 때로 시간을 그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라도 그 마지막에서 우리는 비로소 ‘우리’로서 정확해질 것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과정을 나는 알지 못한다.
_신용목, 해설 「우리가 우리로서 정확해질 때?이다희의 시, 내 몸속에 우글우글한 내계인 보고서」에서
작가 소개
이다희
1990년 대전에서 출생했다.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목 차
시인의 말 005
1부 내일은 당신이라도 좋아요
포춘 쿠키/ 얼음 위에 두 발이/ 희극/ 곡선의 이유/ 일직선 슬픔/ 초가 타는 시간/ 늦게 오는 자장가/ 백색소음/ 깨진 컵의 위로/ 아침 오믈렛/ 햇빛이 오는 쪽/ 개구리와 독수리/ (2020)/ ( )/ 아침의 예감
2부 햇빛이 복도를 오래 사랑했다
플랫폼/ 강아지를 찾습니다/ 인터뷰/ 개들/ 스크립트/ 시 창작 스터디/ 공기 무덤/ 트렁크/ 수업 결석에 관한 사유서/ 새벽 네시 삼십분의 알람/ 공복/ 플랫폼 2
3부 비는 모두를 버리고 내린다
복통으로 걸어가는/ 4월과 농담/ 대답하는 사람/ 아마추어/ 검정코트의 어려움/ 색맹/ 외설이 지나가고 슬픔이 지나간다/ 행진/ 문 앞에서/ 모래시계 장난/ 눈에는 눈/ 헹가래/ 나무가 있는 초상화
4부 처음을 두 번 할 수 있을까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1/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카페에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3/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두 개의 붉은 줄/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목요일 저녁에/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6/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한 개의 붉은 줄/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옆사람의 옆얼굴/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조금 센치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아서 10
해설| 우리가 우리로서 정확해질 때—이다희의 시, 내 몸속에 우글우글한 내계인 보고서
| 신용목(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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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현 해설
눈”을 뜨는 행위는 사실 '조용히'라는 부사가 없어도 소리 없이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바깥으로부터 밀려들어오는 이미지는 정교해져서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날이 생기므로 어쩔 수 없이 대상은 존재 그 자체로 예각이며 보는 자에게 아픔이 될 소지-가능성입니다. 눈을 감고 있지 않는 이상 세계는 시각의 영역에서 인지될 수밖에 없고 이 하나의 감각이 청각, 촉각, 후각, 미각을 압도합니다. 활자화되어 읽힐 수밖에 없는 시에서 주체로서의 화자가 지닌 시선의 힘은 무해하거나 무력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말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대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에서 주체와 대상은 결코 빈자리로 둘 수 없습니다. 반성하거나 의심하며 질문하는 일: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졌다는 사실이 선행되면서 이 상황은 의심의 대상에서 벗어나 하나의 전제조건이 됩니다. '손을 가진' 주체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주어 - 서술어 관계에서 새로운 주체-대상의 관계를 맺게 된 “컵”과 “미끄러
짐”의 문제입니다. 컵과 미끄러짐은 모두 “믿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대상과 대상의 행위 중 한쪽만을 믿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있었던가
요? 종교에서 '유일신'이라는 배타적 세계관은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되어 믿는 자들에게 주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경우 '믿음'은 세계를 구성하는
단일한 논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컵"도 “미끄러짐"도 주체 없이는 무엇도 할 수 없는 수동적인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우리는 믿음에 앞서 우리의
눈부터 먼저 의심하는 게 일반적인 태도로 느껴집니다. 시는 참 이상해, 시는 아무리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는 일부 사람들의 말 혹은 낙인 효과에 기대면 시인은 오히려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화자는 “유일한 목격자"이기에 그 어떤 증인도 옆에 둘 수 없는 외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 독
자는 이해가 아니라 오로지 '믿음'만으로 수동태로서의 시에 다가갈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없이 지속되는 백색소음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의식에 의해
포섭된 뚜렷한 이미지들로부터 탈주하여 잠-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통로입니다. 말(나)을 덮어버리는 소리(이불)입니다. 잠이 꿈으로 연결된다면 이미지들의 질서와 정교한 서사 등은 사라지고 언어는 의미를 갖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갑니다. 꿈 혹은 시에 해몽(解夢)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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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희 시인 인터뷰
https://naver.me/FMAJO8e2
Q 이다희 시인님은 데뷔작 백색소음」을 쓰실 때 어떠셨나요?
A. 이다희 : 이 시의 화자가 제가 생각할 때는 계속 누워있는 사람이거든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눈을 뜰때부터 누워있고 다시 눈을 감을 때까지 계속 누워있는 사람의 시선이라서 선반을 보면서 '선반의 모양과 내 모양이 비슷하구나.'라고 「백색소음」을 쓸때 얼핏 느꼈던 것 같아요.
내가 지금 누워있지만 뭔가를 버티고 있듯이 선반도 그런 상태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니까 그런 사연 같은 건 다 빠지고 "필사의 직립"이라는 단어가나오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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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 정윤수 교수
https://naver.me/xYTFWMEu
진정한 백색 소음은 그 무슨 집중력을 높여 학습이나 업무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일그러지고 바스라진 기억의 무늬를 쓰다듬는, 무념인 듯하면서도 실은 자기 삶을 천천히 복기하는, 그런 생각의 골짜기에 흐르는 음악인 것이다.
https://naver.me/GMWZI62U
백색소음/이다희<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감상 홍정식)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이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눈을 뜨는 건 시인입니다만, 사물을 분간하는 것은 눈꺼풀과 눈길의 영역입니다. 사물이 도와주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셈이지요.
사람이 보기에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은 필사의 직립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보아 넘기는 모든 것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담을 높이는 공사는 칼라소음입니다. 하지만 누군가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이름을 적어놓았습니다. 새도 와서 발자국을 남기고 강아지도 멋모르고 뛰어들었다가 흔적을 남깁니다. 내 피부에도 누군가 아픈 상처가 되어 이름을 남겼습니다. 날씨마저 습해서 상처가 덧날수도 있지만 시인은 상처에 순응하는군요. 누가 시인에게 상처를 입혔을까요?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날씨가 습합니다. 습한 날씨는 나에게 상처가 되었고요. 그 습한 날씨에 이상한 일들이, 믿고 싶지 않은 일들이 발생합니다. 컵이 저절로 미끄러지는군요. 손대지 않은, 의심하지 않던 일이 일어납니다.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손대지 않은 컵이 미끄러지는 일,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벌어지는 일, 상처가 되는 일. 누가 원인일까요? 나일까요, 아니면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일까요?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그런 나를 지켜보는 이가 참 많습니다. 눈도 잠도 나를 지켜봅니다.
소음에는 칼라소음(color noise)와 백색소음(white noise)가 있습니다. 칼라소음은 높은 음역대의 소음이지만 백색소음은 넓은 음폭의 소음대를 유지합니다. 쉽게 말하면 백색소음은 좋은 소음이라는 뜻이죠. 바람소리, 빗소리, 파도소리, 그리고 일상의 소리와 같은 것들이 모두 백색소음입니다. 내 피부에 조용히 내려앉은 습기는 소리로 치자면 백색소음일까요? 우리는 수 많은 소음을 들으며 살아갑니다. 나에 관한 소문, 평가, 비교, 그런 것들이 모두 상처가 되어서 나에게 가라앉습니다. 하나하나는 칼라소음이지만 모든 것들은 익숙해져서 백색소음이 됩니다.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들도 늘 우리 주변에 머물죠. 그들이 상처입은 나를 지켜봅니다. 말은 없지만 '오래 나를 지켜보는'걸 보면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죠.
저는 되도록 시를 긍정적으로 해석하고 싶어요. 슬픔의 시들도 결국은 희망을 주고자 하는 것 아닐까요. 일교차가 너무 심해졌어요. 나무들도 필사의 직립을 하고 있겠죠. 늦게 핀 코스모스도, 쑥부쟁이도, 구절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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