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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 행복론 **
- 출처: 신동기&신태영 著 「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 성공 행복론의 의미 *
성공의 종류는 다양하다. 대학교 합격, 직장 입사,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 운전면허시험 통과, 승진, 자기 집 마련, 산 정상 오르기, 다이어트 목표 달성과 같은 일상 삶에서의 성공을 비롯해,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 국회의원 당선, 혁신기술 개발 성공, 기업 상장과 같은 특별한 성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성공이 있다. 그러나 자기계발서 같은 데서 다루는 일반적인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는 성공은 역시 물질적인 성공이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형태의 성공 중 적지 않은 것들이 사실 물질적 성과로 바뀜으로써 비로소 현실적으로 성공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전공 선택, 직장 선택, 승진, 자기 집 마련 그리고 올림픽에서의 메달 획득, 혁신기술 개발, 기업 상장과 같은 성공들이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결국 물질적인 부 자체이거나 물질적인 부를 위한 것이거나 또는 물질적 성과로 바뀌지 않으면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결혼이나 국민의 공복으로 봉사하는 선출직 공무원의 기회마저 현실에서는 물질적 향상을 위한 기회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성공 행복론은 무소유 행복론, 도덕행복론, 이성 행복론, 종교 행복론, 감성 행복론과 비교할 때, 물질적 성공을 중심으로 영향력, 명예, 자유와 같은 ‘성공’을 자신의 주된 ‘행복가치(Happiness Value)’로 추구하는 행복론을 의미한다.
성공 행복론은 인간의 본성과 궁합이 잘 맞다. 첫째로 ‘인간적 이기심’과 그렇다. 인간뿐만 아니라 인간 이외의 동물과 식물 등 살아있는 이 세상 모든 존재는 이기적이다. 자기를 우선하고 자기를 먼저 위한다. 이기심의 근거는 다름 아닌 생존이다. 먹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몸을 덥히고 쉬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고, 이성을 유혹하지 못하면 자손을 남길 수가 없다. 따라서 이기심 자체는 선악의 법정을 벗어난다. 일반 동물과 식물은 정확히 여기까지다.
그런데 인간은 예외다. 인간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한참 더 나간다. 식물과 동물은 ‘지금 당장’ ‘여기에서’ 필요한 먹을 것, 덥힐 것 그리고 쉴 곳을 확보하면 이기심이 작동을 멈춘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기억’과 ‘상상력’ 그리고 ‘창의성’이 있다. 따라서 인간은 현재뿐만이 아니라 과거 그리고 자신이 죽고 난 뒤의 먼 미래까지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이기심을 작동한다.
더 이상 이기심을 작동시킬 여지가 없을 때는 ‘창의성’을 발휘해 새로운 필요를 만들어내서라도 이기심의 활동 대상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한다. 과거를 ‘기억’해 내 현재와 비교해 지금 더 많이 가져야 되고,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의 노후는 물론 자손만대까지 먹고사는데 문제가 없도록 물질을 쌓아놓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상황이 더 이상 물질을 필요로 하지 않을 때는 새로운 놀거리(생존에 필수적이지 않는 ‘문화’라는 것들 등)를 ‘창의적’으로 생각해내어 물질이 더 필요하도록 상황을 만들어내기까지 한다. 성공 행복론은 이런 인간의 이기심에 정확히 부합한다.
두 번째로, 성공 행복론은 인간의 자기실현(Self Realization) 욕구와 잘 들어맞는다. 식물과 동물에게는 자기실현이라 할 것이 없다. 주어진 자연법칙에 따라 저절로 자기실현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이다. 각자가 이성으로 즉, 자기 의지로 자기실현을 하도록 되어 있다.
자기실현은 다름 아니다. 글자 그대로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적 가능성을 현실에서 최대한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실현이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목표 지향적이어야 한다. 현실에만 묶여 있으면 잠재적 가능성은 그냥 가능성으로 끝나고 만다. 성공 행복론은 이런 목표 지향적 자기실현에 가장 적합한 행복론이다.
성공 행복론은 자본주의 작용원리와 잘 들어맞는다. 자본주의는 ‘개인’이 부富 소유의 주체가 되고 또 거래의 당사자가 되는 경제체제이다. 따라서 자신의 노력에 따라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해질 수도 있으며, 그 결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을 지거나 향유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이 모두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 자본주의의 시조인 A. 스미스(1723-1790)가 이야기한 것처럼, 어느 한 사람이 부자가 되고자 법 테두리 내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 할수록 다른 사람들과 사회의 이익도 함께 커지기 때문이다.
A.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이 이 개인의 이기주의적 행동과 사회적 이익을 연결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은 사실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다. ‘보이는 손’(Visible Hands)이다. 바로 그 사회가 정한 ‘법’이 그것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법이,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의 이익 향상으로 연결되도록 되어있지만, 불공정한 사회에서는 개인의 이익 추구가 사회적 해악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 같은 이유들로 ‘공정한 사회’를 전제할 때, 자본주의에서는 사회구성원 모두가 부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 ‘선善’이고 가난을 자초하는 것은 ‘악惡’이 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에 기본적으로 잘 들어맞는 행복론은 바로 이 성공 행복론이다.
플라톤(BC428?-BC348?)은 사회 정의(Justice)를 이야기하면서 각 계급의 자기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즉 각각의 계급이 자신들의 고유 기능을 제대로 할 때 사회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수 있고 그것이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플라톤은 사회를 세 계급으로 나눈다. ‘지배자 계급’, ‘수호자 계급’ 그리고 ‘시민 계급’ 셋이다. 먼저 정치를 담당하는 지배자 계급은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라를 지키는 전사인 수호자 계급은 ‘용기’가 있어야 하고, 일반 시민은 적절한 ‘욕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정치인에게는 ‘지혜’, 전사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사람들은 쉽게 수긍한다. 그런데 일반 시민에게는 왜 윤리나 복종과 같은 것을 강조하지 않고 ‘욕망’이 필요하다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일반 시민들 각자가 잘 살겠다는 ‘욕망’을 갖지 않으면 그 사회는 상품이 제대로 생산되지 않아 모두 빈곤해지고 말기 때문이다. 굳이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더라도 어느 시대 어떤 경제체제에서나 사회가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 각자가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되고 또 사회가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
20세기 100년 동안의 실험에서 공산주의 국가들이 ‘빈곤의 평등’을 이루게 된 것은 바로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공산사회’ 개념은 가져오면서 이 시민 계급의 ‘욕망’의 중요성은 간과한 결과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양한 종류의 성공이 결국 돈 문제로 귀착되는 것은 사실 자연스럽다. 인간의 삶에 필요한 대부분의 것들이 모두 돈과 교환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은 돈의 모습을 띠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빵이고, 생수이고, 따뜻한 옷이고, 편안한 집이고, 사람들과의 친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인격이고, 가족의 행복이고, 건강이고 심지어 생명이기까지 하다. 돈이 없으면 빵, 생수, 따뜻한 옷, 편안한 집을 살 수 없고, 마음 편하게 친구를 만날 수가 없으며, 자기의 소신을 당당히 지킬 수도 없다.
가족의 행복 역시 돈으로 살 수는 없지만 돈이 없어서는 유지하기가 쉽지 않고, 건강과 생명 역시 항상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언제라도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성공 행복론에서 성공의 대상은 주로 ‘물질적 성공’이지만 ‘영향력’, ‘명예’, ‘자유’도 중요한 성공의 대상이다. ‘영향력’의 전형은 주로 선거에 당선됨으로써 정치인들이 갖게 되는 권력이다.
한 사회의 규칙을 정하거나 그 규칙에 따라 국가 자원을 배분하는 것이 장치인의 역할인 만큼 그 영향력은 기업과 같은 일반 사적 분야에서의 영향력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명예’란 다른 사람보다 탁월함으로서 갖게 되는 가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거나 노래 오디션에 나가 우승을 하거나 학교에서 1등을 하는 것과 같은 경우다. 다른 사람들을 능가하는 우월함에 큰 가치를 둔다.
‘자유’는 다름 아닌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타인의 간섭에 의한 구속과 생존 위협의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다. 임대 소득이나 이자 소득만으로 또는 인세印稅(Royalties) 소득으로 생존을 넘어선 문화생활까지 가능한 경우를 의미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것인 만큼 성공 행복론의 주요 대상 중 하나다.
그런데 ‘공적 영향력’과 탁월함에 의한 ‘명예’는 사실 일시적이고 유한하다. 즉 국회의원에 당선되더라도 그 임기 동안뿐이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더라도 그때 잠시 얼마 동안뿐이다. 그 기간이 지나면 기억과 자부심으로만 남을 뿐이다. 아니 오히려 영향력을 가졌을 때나 영광의 순간 이후 찾아오는 상실감이 그 이전의 행복을 상쇄하고도 남기까지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영향력’이나 ‘명예’를 성공 목표로 정한 경우에는 ‘영향력’이나 ‘명예’ 자체가 끝나더라도 그 효과가 그 뒤로도 ‘물질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기도한다.
전직 대통령이나 65세 이상의 전직 국회의원에게 평생 지급되는 연금과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이고,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평생 지급되는 연금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돈으로 환산된 명예인 격려금, 광고모델료와 같은 것들이 그런 결과다.
타인의 간섭과 생존의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는 인세印稅(Royalties)와 같은 수입에서 비롯된다. 성공 행복론의 대상으로의 ‘자유’ 추구는 결국 성공 행복론의 중심인 ‘물질적 성공’ 추구와 같은 방향이다. 다만 ‘자유’는 한계가 있고 ‘물질적 성공’ 추구는 한계가 없다. 결국 ‘물질적 성공’을 직접 추구하는 것 이외의 성공의 주요 대상인 ‘영향력’, ‘명예’ 그리고 ‘자유’와 같은 것들도 현실에서 결국 ‘물질적 성공’ 추구로 대체로 수렴되고 만다.
성공 행복론은 인간 본성인 ‘이기주의’나 인간의 존재 이유인 ‘자기실현’ 욕구와도 잘 맞고 ‘자본주의 작동 원리’와도 잘 어울린다. 그리고 성공 행복론에 있어서의 성공은 현실에서 주로 ‘물질적 성공’을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무소유 행복론이나 도덕행복론, 이성 행복론, 종교 행복론 그리고 감성 행복론과 비교해 볼 때 그런 의미로 규정할 수 있고, 돈 이외의 주요 성공 대상이라 할 수 있는 ‘영향력’이나 ‘명예’ 그리고 ‘자유’와 같은 다른 가치들도 현실에서 결국 돈으로 환원되고 만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 성공 행복론의 한계 *
성공 행복론은 ‘이기주의’라는 인간의 본성, ‘자기실현’이라는 인간의 존재 의미와 잘 어울리고 ‘자본주의의 속성’과도 궁합이 잘 맞지만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다.
먼저 성공 행복론에서 ‘물질적 성공’과 ‘자유’는 사실 처음부터 같은 방향이다. 둘 사이의 차이는 물질적 성공은 ‘The more the better' 입장인 반면에, ‘자유’는 일정한 수준의 물질적 성공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성공 행복론에서 비교적 소박한(?) 대상에 해당되는 ‘자유’는 타인으로부터의 간섭과 생존 위협으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물질적 성공’처럼 부를 추구하긴 하지만 자신의 ‘독립’ 정도 수준을 목표로 한다. 현실에서 물질적 부가 없으면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 타인으로부터 구속받아야 하고, 어느 정도의 물질적 부를 쌓게 되면 타인으로부터의 구속을 벗어남과 동시에 자기 독립을 이룰 수 있고, 그 이상의 부를 쌓으면 이번에는 처음과 반대로 타인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자유’ 추구는 이 세 단계 중 두 번째 단계를 목표로 한다. 생존을 위해 더 이상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현재의 부가 줄어들지 않으면서 문화생활이 가능한 삶의 상태다. 구체적으로 임대 소득, 이자 소득, 인세 소득과 같은 연금 성격의 과실果實적 소득이 인간의 삶과 정신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즉, 기본적인 생존 이상의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상태다.
그런데 이런 자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측면으로 현실에서 달성하기가 쉽지 않다. 첫째로는 그 정도 수준의 물질적 부를 쌓는 것이 쉽지 않고, 두 번째로는 그 정도 수준의 물질적 부에서 부 쌓기를 멈추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첫 번째의 부 쌓기의 어려움은 일단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부의 크기 자체가 그리 낮지 않기 때문이다. 임대소득률(=연간 임대료/해당 부동산 가격) 및 은행 예금금리가 2%이고 문화생활을 보장하는데 필요한 금액이 연 1억2천만원(월 1천만원)이라 가정하면, 그때 필요한 부의 크기는 세금을 고려하지 않을 때 60억원(=1억2천만원÷0.02)이다. 직장인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자기 사업을 통해서도 만들기 쉽지 않은 금액이다.
‘자유’를 보장하는 부의 크기는 임대소득률 및 은행 금리와 문화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연간 필요금액에 의해 달라진다. 즉 임대소득률 및 은행 금리가 낮아지면 필요한 금액의 크기는 늘어나고 문화생활에 필요로 하는 금액이 낮아지면 필요한 금액의 크기는 줄어든다. 따라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금액의 크기는 시간이 갈수록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금리는 낮아지고 필요금액은 높아지기 쉽기 때문이다.
사회가 한창 발전해 나가는 고성장기에는 사업기회도 많이 존재해 경제성장률, 부동산 가격상승률 모두 높다. 따라서 금리수준도 높게 유지된다. 그러나 사회간접자본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고 경제 성장이 한계에 이르러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게 되면 사업기회의 감소는 물론 임대소득률, 은행 금리도 낮아진다. 심지어 연금(Annuity)도 낮아진다. 연금 역시 그 사회의 경제성장률 및 금리 수준과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화생활에 필요로 하는 금액은 늘어나기 쉽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문화생활이 더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인세印稅(Royalties) 소득은 재능이 뛰어난 특정한 사람들에 국한된다. 극히 일부의 작가, 작곡가와 같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처음부터 인세 소득과 같은 수단은 고려대상에 넣지 않는다. 이런 몇 가지 이유로, 자신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수준의 물질적 부를 쌓는 것은 쉽지 않다.
두 번째의, ‘자유’가 가능한 수준의 물질적 부에서 멈추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은, 상상력이 풍부한 인간의 무한대 이기주의가 사람들을 어느 정도의 부 확보에서 멈추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부를 추구하는데 있어 처음에는 ‘타인으로부터의 간섭과 생존 위협으로부터의 자유’를 목표로 한다. 그러나 막상 그 수준에 이르고 나면 거의 관성처럼 그 이상의, ‘타인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목표를 자연스럽게 변경한다. 즉 ‘자유’가 아닌 ‘물질적 성공’으로 목표를 상향 조정한다. 성경에서의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전도서6:9)라는 말 그대로이다.
그런데 성공의 대상을 ‘자유’로 정하는 데 있어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 달성 이후다. ‘자유’를 달성하고 난 뒤의 상태가 참으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맹자가 ‘사람은 우환에 살고 안락에 죽는다’(生於憂患 而死於安樂)고 말했다. 현실에서 우리는 맹자의 이 경고가 고리타분한 도덕론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심심치 않게 확인한다. 일부이겠지만, 임대소득 생활자의 무료하고 무기력한 생활, 고액 복권 당첨자의 인생 파산, 주식 투자 벼락부자의 무절제한 삶 등을 볼 때, ‘자유’를 가능하게 한 부는 부럽지만 그 ‘자유’ 상태가 가져온 그들의 삶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그런 모습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삶을 퇴락시킨 ‘자유’가 그들만이 아닌 우리 어느 누구에게도 그렇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자유’가 진정 자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자유’의 삶에 대한 건강한 철학이 미리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결국 ‘자유’ 수준에서 부 쌓기를 멈추는데도 철학이 필요하고, 그 ‘자유’를 감당하면서 자신의 행복으로 연결시키는 데도 철학이 필요하다. 사람들 대부분이 간절히 원하는 ‘자유’이지만 철학 없는 자유는 행복 아닌 불행, 파멸이 되기 쉽다.
‘자유’ 단계를 넘어 계속 물질적 부 확대를 추구하는 것은 ‘물질적 성공’ 추구에 해당된다. ‘물질적 성공’은 이기주의와 자기실현 그리고 자본주의 원리와 잘 들어맞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궁극적 목적인 자기 행복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가장 큰 문제는 ‘물질적 성공’을 위한 부 추구가 끝이 없는 무한대 게임이라는 것이다. 끝이 없으면 만족의 순간이 있을 수 없고, 만족의 순간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항상 행복 결핍 상태, 어쩌면 불행 속에서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자기실현이 100% 이루어지고 개인의 욕망 추구로 사회를 물질적으로 크게 향상시킬 수 있겠지만 그 자신의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는 결과적으로 부를 확대시키는 데만 집중적으로 쓰이게 된다. 물론 사회를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한다는 것은 사회적 규칙 내에서 정당하게 부를 추구했을 때 한해서다.
‘물질적 성공’은 부의 확대를 추구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1등을 추구하기도 한다. 1등을 하는 방법은 내가 남보다 열심히 하는 방법도 있지만 상대방을 주저앉히는 편법도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법 테두리 내에서 보통 이 두 방법을 같이 쓰고 때로는 법의 담장을 넘어서면서까지 상대방을 주저앉히는 것에 비중을 두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거나 이기주의적 게으름이 두드러지게 드러날 때는 숫제 상대방을 주저앉히는 것만으로 1등을 하려고 하기도 한다. 물론 이 정도 되면 이미 법 테두리를 완전히 넘어선 게임이다.
장자에서 말한 ‘대체로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거짓을 행하고 지력이 미치지 못하면 남을 속인다’(夫力不足則僞 知不足則欺) 그대로이다. 따라서 ‘물질적 성공’ 추구가 자기행복이 되기 위해서는 ‘자유’ 추구 이상의 자기 성찰과 철학이 필요하다. 자기 성찰과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을 때 ‘자유’ 추구 행복론이 자기방종이나 자기불행 정도에 그친다면, ‘물질적 성공’ 추구 행복론은 사회 부조리와 사회 가치 전도 그리고 국가 불행까지 초래할 수 있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가장 관심을 끈 인물은 미국의 수영 황제 마이클 펠프스였다. 펠프스는 리우에서 금메달 5개를 추가함으로서 통산 23개 금메달 획득으로 올림픽 사상 개인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그런데 펠프스가 세계인의 관심을 끌게 된 데는 최다 금메달 획득 말고 또 다른 스토리가 있었다. 바로 ‘수렁에서 수영장으로’의 자기 극복 스토리였다. 금메달 4개, 은메달 2개를 딴 2012년 런던 올림픽 이후 펠프스는 은퇴를 선언한다. 그리고 무절제한 생활에 빠져 마약 흡입과 음주·과속 운전 등으로 경찰에 입건되고 급기야 선수자격 정지를 당하기까지 한다. 그러다 헤어졌다 만나기를 반복하던 여자 친구 니콜 존슨과 2014년 본격적인 연인관계로 발전하면서 안정을 되찾고 리우 올림픽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마침내 2016년 갓 태어난 아들의 자랑스런 아빠가 되겠다는 각오로 리우 올림픽에 나서 금메달 5개와 은메달 1개를 목에 걸고 영광스런 선수 생활 마감을 선언한다.
1등, 최고의 명예를 추구하는 성공 행복론의 문제는 먼저 그리스신화의 탄탈로스 스토리처럼 목표가 끊임없이 새롭게 멀어진다는 데 있다. 탄탈로스는 자식을 죽여 신들을 시험한 죄로 제우스에 의해 타르타로스의 물웅덩이에 갇힌다. 탄탈로스는 목이 말라 허리를 숙이지만 물은 허리를 숙인만큼 낮아지고, 배가 고파 머리 위의 과일을 따 먹으려 손을 내밀지만 사과는 손을 내민 만큼 더 높아진다.
스포츠 세계에서의 최고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금메달을 따면 연속해서 몇 차례 금메달을 따거나 올림픽을 비롯한 여러 세계 주요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는, 이를테면 그랜드 슬램 달성을 목표로 한다. 결국 끝이 없다. 아니 끝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 끝은 반드시 실패다. 실패해야 끝나니까. 그래서 어떤 ‘1등’은 가장 화려한 전성기 때 영원한 ‘1등’으로 스스로 정상에서 내려오기도 한다.
그런데 이 끊임없는 더 높은 목표 추구 말고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최고의 목표가 고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최고를 달성하고 난 다음 이제부터 자신을 행복하게 할 것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다. 펠프스뿐만이 아니라 일시적이든 영원한 추락이든 스포츠와 같이 최고를 다투는 세계에서 영웅의 추락은 사실 우리에게 그리 낯설지 않다.
끝이 없는 더 높은 목표 추구에서의 궁극의 실패와, 목표 달성 이후 갑자기 찾아오는 정신적 공허, 혼란은 최고 추구 성공 행복론에서 거의 필연이다. 더구나 그런 정상 등극이 아직 삶의 굴곡을 감당키 어려운 20대 정도의 인생의 이른 때라면 더욱 그렇다.
끊임없이 목표를 높여가거나 고정된 목표를 향해 매진하거나 그 어느 경우에나 자기 철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일상의 소중함과 일상의 행복에 대한 인지 능력과 향유 능력을 갖춰야 한다. 삶의 본질은 사실 가장 높은 단상이나 열광적인 환호가 아닌 무채색의 일상이니까. 포대기에 싸여 세상모르고 잠든 어린 것의 자랑스런 아빠가 되는 것이 금메달을 따야 하는 이유, 세계 최고의 선수로 마지막을 마무리해야 하는 이유인 것처럼.
‘영향력’ 중 가장 큰 영향력은 국회의원·대통령과 장관처럼 선거와 임명에 의해 주어지는 정치 권력과 행정 권력이다. 이런 공적 권력은 일반 사적 영역의 그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고 크다. 정치 권력은 기업 활동과 같은 사적 영역은 물론이고 공적 영역에 대한 규칙을 정하고, 행정 권력은 정치 권력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자원의 분배를 결정하고 집행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성공 행복론에서 권력을 그 대상으로 삼은 이들이 자기 인생의 정점으로 여기는 것이 보통 이 정치 권력 또는 행정 권력의 획득이다.
그런데 이런 공적 권력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중심축인 자본 권력의 작용 규칙을 정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만, 자본 권력은 영원한 데 반해 정치 권력과 행정 권력은 유한하다는 것이다. 임기가 끝나면 일개 시민으로 다시 돌아와야 하고,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음 선거에서 기필코 당선되거나 선거로 새롭게 당선된 이로부터 임명을 받아야 한다는 것(장관의 경우)이다.
그래서 플루타르크가 ‘헛된 영광에 일생을 보낸 나는 뭇사람들에게 부림당하는 노예였다네’라고 말한 것처럼, 공적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은 만인에게 머리를 조아리거나, 판세를 잘 읽어 옮겨 다니면서 특정인의 호감을 사야한다. 뭇사람들의 노예이거나 특정인의 노예가 되기 쉽다. 따라서 권력을 가져 보았던 이들 중 어떤 이들은 권력과 그 권력 획득에 빼앗긴 자신의 인생을 따져보고 주위에 권력의 허상을 한탄하기도 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원한 권력은 기업 오너와 같은 자본 권력이다. 그리고 승자는 결국 오래 남는 자이다. 따라서 영향력 중 가장 큰 권력인 정치 권력 또는 행정 권력을 쥔 자들은 틈만 나면 자신의 막강한 권력을 자본 권력으로 바꿀 것을 기도한다. 임기가 끝나는 순간 그에게는 어떤 권력도, 심지어는 생계와 노후생활을 유지할 능력마저 남아있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음 선거에서 다시 선출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을수록 이런 유혹은 더 강해진다. 그런 결과 수많은 정치인들과 장관들이 임기 후 또는 임기 중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추락해 하루아침에 영어囹圄의 몸이 되기도 한다.
권력 지향적 성공 행복론에서 행복과 관련된 제일 큰 문제는 사실 권력 지향 속성 자체에 있다. 선출직들은 1등(단체장, 소선거구 의원)만 당선된다. 그리고 2등은 없다. 스포츠와 같은 분야에서는 금메달에 큰 가치를 두기는 하지만 은메달도 있고 동메달도 있다. 그리고 4등도 있다. 권력 게임에서는 2등이 없다. 1등 외 나머지는 모두 실패한, 불행한 이들이다.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모두 그렇다. 따라서 스포츠처럼 경쟁을 하는 게임이긴 하지만 사생결단의 경쟁이 될 수밖에 없다. ‘All or nothing’ 게임에서 나만 잘하는 전략은 순진하다. 상대방을 끌어내리는 온갖 술수도 함께 동원된다. 추악한 싸움이 되기 십상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정치에만 들어가면 인상이 바뀌고, 또 정치인 하면 곧바로 연상되는 감언이설과 몰염치의 배경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성공 행복론이 자신의 행복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자기 철학이라는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첫째, 인생은 옷이나 신발과 같은 제품이 아니다. 옷이나 신발은 자체로서의 ‘완성’을 위해 시간과 과정을 필요로 한다. 즉 ‘완성’ 전의 시간과 과정은 ‘완성’을 위해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이성적 존재로 태어나, 태어난 이후 죽을 때까지의 모든 시간들이 의미를 갖는다. 즉 행복의 대상은 ‘순간의 결과’가 아니라 ‘살아가는 전 과정’이다. 어떤 일시적 결과가 큰 기쁨을 주더라도 그 뒤는 다시 무료한 과정이 기다리고 있고, 그 일시적 성공마저도 사실은 삶이라는 과정의 어느 한 순간일 뿐이다.
둘째, 개인의 성공은 사회의 성공과 같은 방향일 때 비로소 그 개인의 행복으로 이어진다. 개인의 부는 다른 사람들의 만족을 향상시킬 때, 즉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때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따라서 부富는 간접적 결과이며 사실 직접적인 목적은 아니다.
부자를 목표로 한다면 어떻게 사람들을 그리고 사회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소비자가 나의 상품을 선택하고 행복해야 내가 돈을 벌 수 있다. 이것은 도덕론이 아닌 경제 기본원리다. 경제원리에 충실할 때 비윤리나 탈법과 같은 문제들은 처음부터 아예 끼어들 여지가 없다.
공적 권력은 사실 그 소유권이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에게 있지 않다. 국민에게 있다. 그들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잠시 위임받은 것일 뿐이다. 따라서 공적 권력은 권력 수임자 자신이 아닌 국민을 위해 써야 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당연한 이 원칙을 분명히 인식하게 되면 위임된 권력은 이제 더 이상 ‘권력’ 아닌 ‘의무’가 되고, ‘향유’ 아닌 ‘봉사와 희생’이 된다.
따라서 원칙대로라면 정치인이나 장관을 목표로 하는 것은 ‘성공’ 행복론에 포함되지 않아야 타당하다. 물론 나라와 국민에 대한 봉사와 자기희생의 기회를 갖는 것이 ‘진심으로’ 자신의 성공 기준이고, 또 그것이 자신을 행복하게 한다면 성공 행복론에 해당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주의적 속성에 비추어 볼 때 정치인이나 장관을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강제로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장관을 시키는 상황도 심심치 않게 발생해야 맞다. 온갖 음해와 술수까지 동원해 이전투구를 벌이면서 ‘기필코 내가 봉사와 자기희생을 하고야 말겠어’하고 나서는 싸움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다.
공적 권력은 개인의 이익을 도모하는 기회가 아닌 것은 물론이고 향유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 원칙 그대로 ‘봉사이자 희생’이다. 사회와 국가 입장에서 본, 앞서 플루타르크의 ‘노예’의 또 다른 의미이다. ‘국민의 머슴’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성공 행복론은 다른 성공 행복론에 비해 타인과 사회에 유해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낮지만 마찬가지로 유익한 영향을 미칠 일도 없다. 타인의 간섭과 생존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독립을 추구할 뿐, 그 이상 타인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지 않는 행복론이기 때문이다.
‘자유’를 추구하는 행복론의 문제는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누구나 간절히 원하는 자유지만 막상 자유가 찾아왔을 때 기대했던 만큼 행복을 만끽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되는’ 소극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무엇인가를 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자유’는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즉 행복의 가능성을 높이는 수단이지 ‘자유’ 자체가 행복은 아니다. 따라서 성공의 대상을 ‘자유’로 정했을 때는 그 자유 이후 나를 행복하게 할 ‘그 무엇’도 함께 정해져야 하고 바로 그것이 진정 나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셋째, 물질적 성공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성공 행복론에서 개인 능력의 크기는 반드시 윤리
적 태도와 비례해야 한다. 물질적 성공과 권력은 반드시 타인과 관계를 맺어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 데, 윤리가 전제되지 않으면 그 끝은 사회적 불행이기 때문이다.
탁월한 능력이 비윤리와 더해져 거악의 괴물이 되고, 민주주의적 사고가 결여된 권력이 국가적 재앙을 낳고, 윤리가 장착되지 않는 거대 자본이 사회적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을 우리는 늘 목도한다. 정상적인 이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사회를 불행에 빠트리고 저 혼자 행복을 느낄 수 없다.
A. 스미스는 ‘이기주의(Self-love)는 칭찬받을 가치도 없지만, 그렇다고 어떤 비난을 받아서도 안된다’라고 말한다.
성공 행복론을 추구하는 것 자체에는 어떤 문제도 없다. 다만 그것이 타인, 사회와 관계할 때는 그렇지 않다. 한 사람의 성공 행복론이 다른 사람의 행복 향상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고통, 재앙 그리고 폭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결 방법은 다름 아니다. 성공 행복론을 추구하는 이가 성공의 무게만큼 준법 이상의 윤리도덕을 갖추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타인의 행복뿐만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도 위하는 방법이다.
시인 도연명(365-427)은 ‘하루 종일 이익을 쫓아 분주할 뿐, 지혜를 찾는 이를 찾아볼 수가 없구나’ ‘終日馳車走 不見所問津’라고 한탄했다. 물질은 넘쳐나고 성공 스토리는 쌓이는데 정작 사회는 오히려 더 음울해지고 있는 이유다.
- 출처: 신동기&신태영 著 「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M31 刊,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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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에게 한 권의 '행복'을 자기주도적으로 행복을 누리는 법 ■ 신동기·신태영 '오늘, 행복에 한 걸음…' 출간 2018년 03월 06일(화) 17:14 |
http://www.jndn.com/article.php?aid=1520324091254018103 |
자녀와 학생의 진로를 고민하는 학부모, 교사들에게 '강추'할 행복인문학 지침서가 나왔다.
전남매일에 매주 금요일 '인문학으로 세상보기'를 연재 중인 인문경영학자인 신동기 박사가 장녀 신태영 씨와 함께 쓴 '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이다.
행복한 삶에 대한 인생설계를 하고자 하는 20·30대와 좀 더 의미 있는 실버 라이프를 보내고자 하는 장년·실버세대를 위해 쓴 책이다.
지난 2월 출간 이후 학생과 교사들의 호응에 힘입어 책 주문과 강의가 잇따르고 있다. 오는 30일에는 조선대 경영대 학부생 40여명을 대상으로 강의가 예정돼 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의 공통점은 '자기 주도적 학습'입니다. 그리고 목적지에 가장 쉽게 이르는 방법은 지도와 내비게이터를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자기 주도적 행복 추구로 '자신만의 행복 내비게이터'를 준비할 수 있도록 도움을드리고자 합니다."
저자 신동기 박사는 "내가 언제 행복한지, 무엇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지 대략이라도 알아야 그것을 더 많이 즐기고 향유하며 행복의 시간을 늘려갈 수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동서양 사상가들이 오랜 기간 숙고하고 성찰한 행복론들을 종합해 총 6가지 행복가치를 제시하고 그에 따른 행복론을 정의한다. 바로 △성공 △무소유 △도덕 △이성 △감성 △종교 행복론이다.
어떤 사람은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새로운 것들을 알아가는 데서 가장 큰 행복을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부를 쌓고 권력을 손에 쥐는 것에서 크나큰 기쁨을 느낀다. 봉사활동을 하는 순간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활동을 할 때 제일 가슴 뛰는 사람도 있다. 가치관과 성격, 개성이 서로 다른 만큼 저마다 가장 큰 행복을 느끼는 가치들도 다르게 마련이다.
자신의 '행복가치'를 파악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행복 로드맵'을 작성해볼 차례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을 기본 틀로 삼아 4단계 행복 로드맵 작성 노하우를 자세히 일러준다. 행복에 대한 적절한 답을 주는 책이다.
저자 신동기는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및 경영대학원을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시사저널' 인문경영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전남매일에 매주 '신동기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세상보기'를 고정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현대경제연구원이 '휴가철 CEO가 읽어야 할 도서(2015년)'로 선정한 '네 글자의 힘'을 비롯해 '오래된 책들의 생각', '아주 낯익은 지식들로 시작하는 인문학 공부', '회사에 대한 오해와 착각을 깨는 인문학적 생각들', '생각여행', '인문경영으로 리드하라', '인문학으로 스펙하라', '해피노믹스', '독서의 이유', '직장인이여 나 자신에게 열광하라', '미래사회 리더의 경영 키워드' 등이 있다.
저자 신태영은 호주 THE KILMORE 인터내셔널 스쿨을 졸업하고, 영국의 UNIVERSITY OF BATH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현재 삼정KPMG BCS-HEALTHCARE본부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근무 중이다.
M31. 276쪽. 1만4,000원.
/이연수 기자
- 오늘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갑니다 -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행복인문학 2021. 6. 19 |
https://www.youtube.com/watch?v=Dbl2byc33I0 |
*****(2021.07.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