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의 박해로 순교하다.이명호
이명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경기 감사였던 그의 양아버지 이익운은 여러 사람과 합세하여 그에게 독약을 먹였다.
?~1801, 세례명 요한, 서울에서 아버지의 박해로 순교
이명호(李明鎬,요한)의 본관은 연안이며, 문장가로도 유명한 오사(五沙)이정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숙부 이익운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정운은 본기 충청도 신창(新昌) 사람으로,과거에 급제한 뒤 충청도 관찰사와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순조가 즉위하던 1800년에는 형조 판서로 임명되었고, 양아버지 이익운은 신유박해 당시 경기도 관찰사로 천주교 박해에 앞장섰었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그는 천주교를 믿고 있었다.
이명호가 천주교를 믿게 된 것은 당시 남인계 청년 선비들의 한 경향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그의 누나가 당시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하에서 신부로 임명된 홍낙민의 형 홍낙교의 며느리로 시집간 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는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洪株榮, 프로타시오)과 매우 친하게 지냈는데, 홍재영은 동서인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과 이경도, 김건순 등 당시 양반 명문가의 자제들과 교유하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점으로 보아 이명호 역시 그들과 만나며 신앙 생활을 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너는 계속 천주교를 믿다가 죽으려 하느냐?”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명호는 천주교를 계속 믿을 것인가 믿지말아야 할 것인가로 심각하게 고민한 듯하다. 그것은 홍재영의 다음 진술로 알수 있다.
“저는 1799년 목욕을 하기 위해 의소묘(務弼墓)가 있는 동네 어귀 안 개울가에 갔다가 거기서 동서인 황사영을 만났는데,황사영이 천주교를 믿으라고 온갖 말로 권유하여 그것이 잘못인 줄 모르고 믿은 것이 몇 년이 되었습니다.
함께 믿은 사람으로는 한림동 사는 이연기의 손자 곱사등이 오희(五喜)와 여주 사는 김건순과,정동 사는 이정운의 아들 이명호입니다. 지난해 가을 명호의 집을 찾아갔더니, 명호가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명령이 지엄하고, 천주교 신자들을 모두 체포하는데 너는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를 믿다가 죽으려 하느냐?’ 하였습니다.”
홍재영의 말대로라면 이명호가 한 말은 홍재영에게 ‘앞으로는 믿지 말라’고 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홍재영이 자신의 배교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이명호의 말을 거두절미하고 인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말은 “너는 앞으로도 계속 천주교를 믿다가 죽으려 하느냐, 아니면 믿지 않겠느냐?”는 질문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홍재영은 앞으로는 믿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두 사람은 앞으로 천주교를 계속 믿을 것인가 아닌가로 심각하게 고민한 듯하다.
그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여기저기에서 반대파들의 비난이 들끓었다. 1801년 3월 29일 목인수와 한재유는 태학(大學)에 통문을 보내 ,“위로는 속이 시커멓고 흉악한 사람들부터 아래로는 여염집 서민에 이르기까지 조금이라도 천주교 신자로 지목된 자는 모두 체포되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도, 아직까지 천주교의 흉악한 소굴,요사스러운 사람으로 열 손가락안에 꼽을 수 있는 자가 그 명성과 권세를 빙자하여 안연히 무사한 자가 있다.
바로 이익운의 아들 명호가 그렇다. 이 역적은 이가환과 정약종의 요사 스러운 법을 전수받고 그것을 지켜 가며, 남모르게 황사영의 학문(천주교)의 소굴 주인이 되어 밤낮으로 사람들을 모아 난만하게 설법(교리 강습 및 미사 봉행)을 하며, 어버이를 버리고 도망쳐 숨어 지내다가 통문이 태학에 이르자, 집을 팔아 분가해 나가 살며 오로지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별원(別院)으로 불러모아 위세로 위협하기도 하고, 무식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에제는 재물을 나누어 주며 요사스러운 말로 민중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라고 고발하였다. 또한 그의 아버지 이정운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가환이 조문을 와서, 어버이도 스승도 아닌데 머리에 두건을 쓴 것은 천주교를 믿는글은 혈당(血黨)이기 때문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는 이명호가 아직까지 체포되지 아니한 것은 옥사(獄事)를 처리하는 데 있어 어딘가 빈틈이 있고 느앞된 일일뿐만 아니라, 크게는 사림(士林)의 수치라고 하였다.
또 부호군 최중규도 상소문을 올려 이익운은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자들을 잘 가르치지 못한 죄가 분명한데도 경기 감사에 그대로 두는 것은 조정의 수치 라고 하였다.
아야버지가 아들에게 독약을
사태가 이렇게 악화되자 이익운은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 죽여 버렸다. 샤틀르 달레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그의 신앙 생활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의 죽음이 사람들 눈에는 혹 덜 영광스럽게 보일지 모르나, 하느님 앞에서는 공로가 덜하지 않을 것이다. 남인 양반 집의 자손인 그는 천주교에 들어와, 자기의 쌀쌀한 성질을 죽이고 모든 행동을 예수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모범을 따라 조절하기에 힘썼다. 그는 끊임없이 식사에 극기를 하고, 세속적인 모임에는 발을 끊고 외따로 떨어진 방에서 혼자살았다. 주일이 되어야만 집을 나가 몇몇신자들과 모여서, 그들과 함께 기도를 드리며 성서를 읽고 거룩한 이야기를 나누곤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행동이 집안 전체에 미칠 위험을 생각하고 겁이 나서 그에게 신앙을 배반하게 하려고 별별 짓을 다하였으나 아무 성과도 없었다. 위험은 점점 더 급박하게 되었고, 또 그 집의 높은 지위로 보아 도망쳐서 그 위험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순순히 섭리의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공포와 분노로 눈이 어두워 요한에게 독약을 마시라고 하였다. 요한은 그렇게 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아버지와 합세하여 그를 꼭 붙들어 놓고 억지로 독약을 마시게 하였다. 요한은 몇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목인수와 한재유가 태학에 보낸 통문 끝에, 그 통문이 “태학으로부터 국청으로 보내지자 명호는 그날로 죽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이명호는 1801년 3월에 순교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 한국교회사연구소발행 『순교는 믿음의 씨았이되고』 [신유박해 순교자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