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립과 이발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과 정철과 송익필을 중심으로 한 정치 세력은 군자와 소인이 얼음과 불처럼 함께 할 수 없득이 어차피 공존할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정여립과 송익필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면서도 정적으로 비운의 생을 마감했다. 연려시기술에는 그들이 나란히 소개되어 있다.
"호남에는 상도에는 이항이 있었고 하도에는 기대승이 있었다. 기대승은 일찍 죽어서 학문을 강혼하기까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항은 제자는 많았지만 오직 김천일만이 절개로 이름을 떨쳤을 뿐, 학문은 전하는 것이 없었다. 정여립이 그 뒤에 나와 이발, 정개청과 서로 어울려 화답하여 온 도에 기세를 부렸다. 그러나 정여립이 반역?하게 되니 함께 죽음을 당했다. 호남 풍습이 경박해 본래부터 유학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정여립이 패망하여 사람들이 학문하다가 죽게된 일의 시작이라고 하여 호남의 학문은 이로부터 없어졌다. 그와 더불어 서류로서 학문한 이로는 이중호(이발의 아버님), --- 계속
이하에서 송익필에 대한 동영상 설명을 게재한다.
당쟁 역사의 시조(始祖), 조선 사상계를 지배한 송익필의 삶_#책과함께(6편) (youtube.com)
이발의 본관은 광주(광산), 자는 정함이며 호는 동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