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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고전 1:26-31
(고전 1:26, 개정)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부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들의 부르심의 상태와 우리들이 변화되어야 할 상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고전 1:27, 개정)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정)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우리들 각자의 부르심 모두가 한결같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다수의 부르심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태로 부르심을 받았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여러분을 향한 각자의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왜 부르셨는지 또한 이러한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들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알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유능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무능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비록 처음에는 미숙한 상태였을지라도 배우게 하시고 자라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는 성소의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을 통하여 잘 알 수 있습니다(출 36:1-2).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모두가 더욱 성숙하고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에 대하여 능력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힘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들의 부르심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혀서 우리들을 유능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의 목적을 알았다면 우리들의 부르심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도우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변화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할지라도 우리들이 변화되기를 사모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지기 위하여 하나님과 마음을 같이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의 부르심에 대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랑해야 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랑하라는 말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래 인정받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우리들에게 되어진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우리들을 감추고 부인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시면서 누가복음 17장에서 우리들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눅 17:9, 개정)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눅 17:10, 개정)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7장에서 이런 비유를 드신 이유는 믿음에 대하여 가르치실 때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바르게 작동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행하는 믿음의 일들이 바르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겸손이라는 것이 마땅히 해야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것은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삶을 의미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계에는 겸손을 가장한 불순종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겸손을 가장한 거만함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들 또한 우리들이 지향해야 될 일들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우리들이 잘되었을 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우리들이 잘되는 것이 어렵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일이 어렵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됨됨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 정도 되니까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여도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부러워 하지만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사람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하려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손길이 나타나야 하고 그 손길로 말미암아 그로 말미암아 여러분이 변화가 되는 일들이 있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이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만약 여러분이 말하기를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무엇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을 어떻게 변화시켰다는 말입니까?
다시 강조하면서 말씀드리자면 여러분의 삶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딛 2:11, 개정)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딛 2:12, 개정) 우리를 양육하시되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면 그 사람이 양육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라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여러분에게 지금 자라가는 일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개입하심으로 말미암아 변화되어지고 달라지는 일들이 여러분의 삶과 가정과 교회에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도 바울이 권면하는 것처럼 여러분은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말씀하심
몇 해 전에 제가 아는 여자 집사님이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터라 무엇인가 도움을 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는 법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누가복음 17: 26-29을 읽으라고 하고 질문을 했습니다. 주님의 때에 대하여, 마지막 때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본문의 내용에는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안보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주님께서 왜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마지막 때의 사람들의 특징이라고 하신 것인데 이런 것은 지금도 우리들이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눅 17:26, 개정)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눅 17:27, 개정)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눅 17:28, 개정)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눅 17:29, 개정)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그랬더니 이 목사님의 대답이 가관입니다.
“성령께서 그러시는데 ‘거기에 내가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이 말씀을 듣고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가르칠 말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 목사님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자랑하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 안에서 자라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여자목사님처럼 “이렇게 살아가야 무엇인가 내가 변화되었는데 이런 변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하고 자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갈망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이렇게 부르셨습니까? 왜? 지혜롭지 못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까? 능하지 못한 우리들을 부르셨습니까?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우리들을 왜 부르셨습니까? 미련하고 약한 우리들, 세상에서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삶을 사는 우리들을 왜 부르셨습니까?
이 시간 여러분 자신을 좀 아는 시간이 되고 여러분의 본질을 깨닫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좀 더 힘쓰고 애를 쓴다고, 노력 좀 한다고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 길로 조금 더 가다 보면 벽에 부딛칠 것입니다. 그대로 더 가다가는 자포자기 할 수 밖에 없고, 좌절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의지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개입이 여러분의 삶에 나타나야 먼저 여러분이 깨닫고 변화되고 성숙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을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만이 답입니다.
(고전 1:30, 개정)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왜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까요?
예수님이 우리를 지혜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함에 이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쓰임받을 수 있는 정도로 지혜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구원함을 이루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대개 본문의 설교는 여기서 마무리가 되어집니다. 그리고 청중들은 그래 예수님을 더 의지해야지 생각하고 돌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간 그들이, 그들이 원한 만큼 변화되고 승리하는 삶을 살았을까요?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이 원하는 결과를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상태와 목적에 대해서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것을 어떻게 이루는지는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말씀을 배경에 두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변화되기를 원하며 조금 더 말씀을 드리기를 원합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예수님이 우리들의 길이고 방법이란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면 그런 도우심을 우리들이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또한 여러분은 이런 예수님의 도우심을 통하여 조금씩 변화되고 더 부르심에 가까이 나아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일을 하실 수 있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이해하기 위하여 각도를 조금 틀어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받았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과정을 로마서 1장 17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롬 1:17, 개정)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도우심을 받으려면 믿음으로 시작해서 믿음에 이르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고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구원을 받을 때 무엇을 믿었습니까?
(요 3:14, 개정)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정)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들이 처음 믿을 때 갖는 믿음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처음 접했을 때 이 사건이 마음에 감동이 되고 감사가 넘쳐나던가요? 그런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 사건을 마음으로 수용하며 그 사건을 믿을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어느 순간 그 내용이 믿어지고 감사가 넘쳐나고 진정으로 예수님의 주님으로 모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사건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요 3:7, 개정)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요 3:8, 개정)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어느 순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들이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때가 온전히 믿음이 역사하는 때였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온전히 역사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수용하는 과정이 필요했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실질적으로 변화되는 일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먼저는 “믿음으로”의 시간이 있었고, 그 다음 “믿음에 이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다시 오늘의 본문으로 돌아가서 어떻게 우리들이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먼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내가 변화된 것을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될 것이 아닌 변화된 것을, 이미 완료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처음 믿고자 원했을 때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하신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었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신 일들을 이미 이루어진, 완성된 사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잘못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온전히 변화시키셔서 완전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능하게 하셔서 우리들이 변화된 것으로 믿어야 하는데 앞으로 그렇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바른 믿음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은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우리들의 삶에 임하고 우리들이 변화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들이 변화될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의로워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강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능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들이 온전해진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들의 삶에 임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는 다면 또한 우리들은 우리들이 믿는 바를 입술로 고백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고후 4:13, 개정)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이 믿는 믿음은 우리들의 입술의 고백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성경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곳이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다가 믿음으로 행하여 치료받은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또 한 곳이 있는데 마가복음 7장에 나오는 더러운 귀신들린 어린 딸을 둔 스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막 7:25, 개정)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막 7:26, 개정)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막 7:27,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막 7:28, 개정)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막 7:29, 개정)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믿음으로 고집하며 간청을 하였는데 그의 말이 그의 믿음을 온전케 하여 그의 어린 딸을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힘이 들고 어려울 때, 고통이 다가와서 힘이 들 때, 믿음의 말을 하였더니 그 고통에서 해방된 경험이 있습니까?
제게는 믿음의 고백을 함으로 영적인 고통에서 자유케된 경험이 있습니다.
저는 참으로 오래 전부터 마귀의 공격으로부터 시달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기도도 많이 하고 있었고, 주의 일에 열심히 있었고, 그랬는데도 마귀가 어떤 생각을 집어넣고 그 생각이 떠나지 않아서 그 생각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면서도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말씀을 많이 읽고, 기도를 꾸준히 하는 노력을 하면서 그 시간을 보낸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쉬었다가 다시 안산에서 목회를 하게 되었는데 어떤 목사님을 만나서 교제를 하다보니 이 목사님을 귀신 쫓는 은사가 있는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만나서 교제를 하다보면 귀신이 어떻게 역사했고, 어떻게 쫓아냈는지 그런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제 마음 속에 “내게 그런 일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영적으로 열려있어서 하나님의 감동이 제 머리를 밝혀서 잠도 잘 자지 못할 정도일 때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하시고 은혜가 충만하였음에도 제 심령에는 마귀의 역사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 한편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집에서부터 교회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가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방언으로 기도하며 교회에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들어가서 성도들이 앉는 장의자에 앉아서 주님께 입술로 고백하였습니다.
“주님! 비록 마귀가 제게 이러한 두려움의 생각을 불어넣고 있지만 주님께서 저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 마음에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이렇게 고백하였기 때문에 마귀가 이런 영역에서는 더 이상 너를 공격하지 못할 것이다.”
몇 십년을 신앙생활을 해왔고, 하나님의 음성을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던 영역이 내가 믿음으로 고백하는 순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내게 다가왔던 것입니다.
내가 믿음으로 고백했더니 그 고백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온전하게 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고백을 믿음의 일들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목회에서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이 있습니까? 주님께서 하신 일을 여러분의 것으로 받아들여서 믿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스로보니게 족속의 여인에게 “네가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하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들의 믿음의 말에 응답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의 말은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실재를 드러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내용이 시편 81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 81:10, 개정)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 네 하나님이니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였으나
(시 81:11, 개정) 내 백성이 내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이스라엘이 나를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입을 크게 열라”고 말씀하셨는데 입을 크게 여는 것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당시의 일을 기록한 것이 신약성경에도 잘 나와 있는데 히브리서 4장입니다.
(히 4:1, 개정)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히 4:2, 개정)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히 4:14, 개정)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 4:14, 한글킹) 그러므로 우리에게 위대한 대제사장이 계시니, 곧 하늘들로 올라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라.
히브리서 4: 14절에서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라는 말씀은 “우리의 고백을 굳게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통하여 알 수 있는 것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제자들도 믿음의 고백을 가르친 것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고백을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른 믿음의 고백을 하지 못하고 믿음 없는 말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부정적인 생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의 사고를 묶어두는 앵커링
배가 어딘가에 정박할 때 닻을 내리는 것을 앵커링(Anchoring)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크고 거대한 선박도 앵커링이 되어있으면 항해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앵커링 효과는 성공을 관장하는 뇌 영역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의 무의식에 성공을 막는 앵커링이 걸려있으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삶이 항상 제자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인생만 고되어져 갑니다. 마치 닻을 내려놓고 엔진을 풀가동 시키면 배의 엔진이 과열되어 고장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감각 기억으로 이뤄지는 앵커링
앵커링은 우리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과거의 경험입니다.
비슷한 예로 '밧줄에 묶인 코끼리 실험'이 있습니다. 커다란 코끼리가 다리에 얇은 밧줄이 메어져 나무에 묶여있습니다. 코끼리는 나무도 쓰러뜨릴 정도의 힘이 있지만, 밧줄을 끊을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는 힘이 없던 어릴 적부터 그 밧줄에 묶여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밧줄을 끊을 수 없다고 믿어온 코끼리는 커서도 밧줄을 끊을 수 없다고 촉각적 앵커링이 걸려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관점으로 볼 때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잘못된 앵커링에 걸려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능력과 기적을 보여주셨어도 그들의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노예근성을 벗을 줄을 못랐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믿음없이 생각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잘못된 앵커링을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요?
불신앙의 사고를 어떻게 믿음의 생각으로 바꿔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바로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조셉 머피 박사는 “잠재의식의 힘”이란 책에서 잠재의식을 바꾸려면 현재의식을 활용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현재 의식을 꾸준히 활용하다보면 우리가 가진 현재의식이 잠재의식으로 내려가서 우리들의 삶을 이끈다고 하였습니다.
간단한 예를 든다면 우리들은 처음에는 자전거를 탈줄을 모르고, 운전도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의식을 활용하여 자전거를 꾸준히 연습하다 보니 나중에는 현재의 나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자전거를 잘 타게 되고, 자동차 운전이 처음에는 막막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운전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되는데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운전을 하는 것이 내가 의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나의 속사람인 잠재의식의 지배하에서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것이 내 삶에 익숙하지도 않고 적응도 안되지만 꾸준히 하다 보면 그 고백이 익숙하고 믿어지는 자리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그 믿음을 입술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들을 억압하고 짓눌렀던 잘못된 앵커링, 잘못된 사고방식이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제가 다시 목회를 하기 전에 과로로 운전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을 해야 먹고 살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운전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치유의 말씀을 붙들고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이 안가고 힘들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간절함이 더해지고 믿음으로 질병을 대적하게 되고, 결국에는 치유에 대한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치유와 관련하여 좋은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이 쓰신 『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이라는 책에 인도의 선교사요, 긍정적인 믿음을 가진 스탠리 존스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유명한 저술가요 선교사요 복음 전도자였습니다. 존스 목사는 모든 일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건강하게 살았으나 89세가 가까웠을 때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렇게 수개월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간호사에게 부탁했습니다. 아침이든 밤이든 자신을 보면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해 달라고 말입니다. 자신은 온몸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말을 간호사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호사들은 그를 보면 언제나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선포해 주었고, 그러면 목사는 “아멘!” 하고 대답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어리석다며 웃어 댔습니다. 그러나 존스 목사는 입으로 하는 말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히말라야 산지로 잠시 휴양을 떠났을 때도 계속해서 간호사들과 함께 힘을 합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라고 되풀이하여 말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존스 목사는 마침내 89세의 노인의 몸으로 중풍을 완전히 이겨 냈습니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의 힘이었습니다. 말로써 믿음을 풀어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조용기『3차원의 인생을 지배하는 4차원의 영성』서울:교회성장연구소, 2022. pp. 206-207.)
어떻게 우리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랑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믿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믿는 다는 것은 두 가지 단계로 이루어지는데
첫째는 주님께서 이루신 것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둘째는 내가 믿는 믿음을 말로 풀어내는 것입니다.
(롬 10:10, 개정)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오늘 본문에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이러한 일들을 통하여 우리들의 부족함들 즉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던 우리들의 모습들이 변하여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먼저 우리들 자신의 모습을 바르게 보아야 합니다.
약한 모습이 아니라 강하게 보아야 합니다.
선지자 요엘이 말한 것처럼 우리들은 스스로를 강한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욜 3:10, 개정) 너희는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지어다 낫을 쳐서 창을 만들지어다 약한 자도 이르기를 나는 강하다 할지어다
우리들 스스로를 거룩하고 의롭고 구속받은 자로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들을 향하여 그렇다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처음 자전거를 타고, 차를 운전하는 것처럼 어색하고 마음에 내키지 않겠지만 꾸준히 믿음으로 고백하다 보면 자전거를 타고 운전을 하는 것이 내 몸에 잘 맞는 옷을 입은 것처럼 즐거움으로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경험한 감각지식이 우리들의 삶을 방해할 것입니다. 잘못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잘못된 앵커링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바라보고 생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말하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더 나은 삶을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꿈을 품으며 믿음으로 말하며 살아갈 때 우리들의 믿음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을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모든 억압에서 자유할 것이고, 기쁨이 충만하게 되어질 것입니다.
믿음은 꿈을 꾸고 생각하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목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달라질 것을 꿈을 꾸고, 그렇게 되는 목회를 생각하고, 그렇게 된 목회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그대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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