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2월 28일(수) 잠언 3:13-20 찬송 211장
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는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16. 그의 오른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의 왼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20. 그의 지식으로 깊은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으며 공중에서 이슬이 내리게 하셨느니라
(개역 개정)
- 지혜의 가치 -
어제 말씀(1-12절)이 지혜를 추구하는 방법 및 그 결과로 주어지는 유익에 관한 기술과
25-35절 역시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자의 바람직한 행동 및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축복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반면
오늘 말씀은 그 중간 삽입 부분으로서 모든 것에 우월하는
지혜의 완성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신적 지혜의 가치 및
그 지혜에 따르는 자가 받게 될 축복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1-12절과 더불어 젊은이를 위한 솔로몬 잠언(1:8-9:18)
열 다섯 가지 충고 가운데 네 번째 충고이다.
이러한 본 단락은 다시 3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전반부 13-15절은 이 세상에서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는
여러 가지 것들과 비교하여 그것보다 훨씬 높은 가치를 지니는
지혜의 상대적 우월성을 밝힌다.
그리고 중반부 16-18절에서는 신적 지혜를 소유한 자에게 주어지는 유익을 통한
결과적 측면으로 본 지혜의 우월성을 밝힌다.
이어지는 후반부 19, 20절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나타난 지혜의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 모든 것의 근원적인 존재 원리로서의 지혜의 가치를 밝힌다.
이처럼 비교법, 대조법, 반복법, 의인법 등과 같은 다양한 수사법을 사용하여
지혜의 우월성을 밝히고 있는 본문이 지닌 영적 교훈은 다음과 같다.
① 신적 지혜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우월한 가치를 지닌다.(전2:13)
인간의 상대적 지식과 방편적 요령과 대조되는 신적 지혜는
그 기원에 있어서부터 창조주이시며 역사의 섭리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조물인 인간의 최우선적인 추구의 대상은 마땅히 신적 지혜여야 한다.(잠4:7)
② 본문에서 보여지듯이 신적 지혜가 부여하는 유익에는
이 지상에서 받게 될 복도 포함되어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영적 생명의 획득에 있다.
따라서 신적 지혜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이 지상에서의 복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으나
이는 보다 확실한 영적 생명을 소유케 하려는
다른 형태의 오묘하신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해하여야 한다.(약3:17)
18절)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생명나무란 에덴 동산에 있던 나무로서
아담의 범죄 후에 두루 도는 화염검에 의해 그 길이 차단되었다.(창3:22-24)
그런데 솔로몬은 지혜가 우리에게 현존하는 생명나무 실과가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할 것을 염려하셔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철저하게 막으셨던
그 하나님께서 이제 그 진노의 감정을 누그러뜨리셨음을 반증한다.
이제는 먹고 영원히 살아도 좋다는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주신 사건 자체가 이미 그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솔로몬이 왜 그렇게 지혜를 예찬하고
거기에 집중 조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허락하신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감히 구할 수조차 없는 것이지만 마음으로 심히 원하던 그 일이 허락된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주심은 그것을 의미한다.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를 가로막고 섰던 두루 도는 화염검이 사실상 철수된 것이다.
지혜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진실로 경외하기만 하면
그것은 사실상 생명나무 실과를 먹는 것과 동일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배려인가? 크신 사랑인가?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말씀을 배척하거나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다.
솔로몬은 그것이 안타까워서 여기에서 이렇게
강조에 강조, 반복에 반복으로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접하고, 이 지혜를 받고 지혜를 베푸신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완전하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회복함으로써 영생의 삶을 맛보며 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절의 말씀은 지혜에 대한 찬가이기도 하지만
이를 따라 살므로써 복을 누리기를 바라는
솔로몬의 애절한 호소임과 동시에 절규일 수 있다.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왜 이처럼 소중한 축복이 담긴 지혜를
거부하느냐는 반문이요, 질책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축복, 이 은혜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
하나님이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그 길,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잔치로 인도하는 지혜의 말씀을
얼마나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는가?
바울 사도는 이와 관련해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향해
‘영생을 취하라’(딤전6:12)는 강력한 권고를 한 바 있다.
이는 단지 디모데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감사함으로,
감격함으로 적극적으로 받고 취하고 따라야 할 말씀이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지혜가 담긴 말씀을
매일 적극적으로 받고 취함으로써 영생의 삶, 참 생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딤후3: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