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 김애린 기자(KBS 광주)가 운명을 달리 했다. 2024년 12월 29일 비행기 사고로, 그의 남편이자 동료인 안윤석 PD(목포MBC)와 한날한시에 세상을 등졌다. 쓰면서도 여전히 믿기진 않는다.
대전의 좁은 스터디룸에서 같이 대학원 줌 수업을 들었던 게 2주 전이다. 대학원 종강 모임에서 이야기 많이 못해서 아쉽다면서 전주나 광주에서 또 만나자고 한 게 불과 일주일 전이었다.
“선배, 저는 요즘 그런 생각해요. 가끔 뭐랄까 어려지고 싶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게 아니고, 한 10년 건너뛰고 싶다. 그럼 토끼같은 아이들도 어느 정도 커있고(애린 기자가 아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양가 부모님한테는 적당히 효도하고, 직장에서도 사건(기자) 벗어나서 좀 나으려나 이런 생각...”
“하지만 선배 저는 또 영원히 살고 싶어요. 우주 가야 하나. 진짜 타임캡슐 같은 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이런 시덥지않은 대화를 카톡으로 깔깔 거리면서…“너도 참 기자스럽지 않다. 나도 그러는데…. 웃겨.” 했었다.
세명대 저널리즘 대학원 혁신학과 1기로, 그녀를 알게 된 진 반 년밖에 안되지만, 그녀는 그렇게 특유의 친화력으로 주변을 무장해제 시키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왠지 그 어떤 취재원에게도 높지도, 낮지도 않게, 그저 옆에 서서 취재했을 것 같다. 그녀의 부모가 ‘애린’이라는 이름을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뜻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 이름이 그런 뜻인 것만 같다.
믿기 어려운 애린 기자의 소식에도 나는 낮에는 일도 하고, 밥도 먹고, 뉴스도 보고, 아이랑 웃으며 대화도 했다. 그러다가도 새벽에 잠이 깨면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생생해 다시 잠을 청하기가 어려웠다. 그녀의 가족은, 이에 비할 수 없는 슬픔을 앞으로 몇 번을 더 반복해야 할까. 비통하고, 잔인한 연말이 지나고 있다.
6개월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꿈을 나눴기에 우린 모든 걸 했다. 나중에 만나서 얘기 더 많이 하자고 했지만, 이미 많이 아끼고 사랑했으니, 수십 번을 더 만난 것이나 다름 없다. 팍팍한 현실 속에서 우린 좋은 기자를 희망해보자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좋은 기자였다.
그녀의 남편인 안윤석 PD도 최근 이주 노동자 관련 다큐를 세상에 내놓았었는데, 너무 일찍 스러졌다. 모두 편히 쉬기를, 그리고 아파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기도한다.
김애린 기자가 생전에 쓴 훌륭한 기사가 많겠지만, 대학원에서 안수찬 교수님 수업을 들으며 함께 발전시켰던, 이 기사를 공유한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 기사가 될 줄 몰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