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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장 남자(男子) 1 갈대는 흔들림이 커지면서 서서히 그녀를 향해 다가들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쉭! 그녀의 손으로부터 비선과가 날아갔다. 그녀는 좌우로 휩쓸어가는 것이 불리함을 익히 알았기에 신궁점필의 수법으로 비선과를 쏜 것이다. 파파파파! 비선과는 갈대잎을 흩날리며 직선으로 날았다. 그리고 짧은 시간에 갈대 위로 수많은 점을 마치 새가 모이를 쪼듯 찍으면서 움직여나갔다. 그러나 비선과의 추 끝은 항상 옆으로 흐르는 법이 없이 일정 거리를 갔다가 다시 되돌아 왔다. 사이룡은 비선과가 허공에서 번쩍임을 보는 즉시 칠성보로 물러나며 탄지로 자신의 허리를 쳤다. 연검이 튀어 오르며 그의 오른손에 잡히고 허공에서 은빛을 번쩍이며 비선과를 튕겨내기 시작했다. 번쩍번쩍 허공에서 검광이 일고 비선과와 그의 연검이 어지럽게 춤을 추었다. 이제 서로는 확실하게 상대의 위치를 알았고 상대의 무공 수위도 어느 정도 알게 된 셈이다. 둘은 서로를 경계하며 급히 각자의 무기를 거두었다. 피차에 긴장하여 기수식을 취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사이룡의 절기가 무엇인지 세인들이 잘 몰랐던 것은 그가 그만큼 무기를 쓸 상황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늘 수 년 내에 처음으로 자신의 호신용 연검을 뽑게 되었다. 비선과, 바로 비선과가 그를 그렇게 긴장하게 만들었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그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긴장감으로 전신의 신경이 웅웅 울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설의 자객 마고와 마주친 것이다. 이해는 할 수 없었다. 마고는 이곳에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녀가 탈출이라도 했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쨌든 지금 이 여인은 마고다. 마고는 마고대로 초조감으로 입술이 말랐다. 상대는 자신의 비선과를 능숙하게 맞받아쳤다. 비선과를 이렇듯 간단히 받아치는 상대라면 정파무림의 장문인들에 버금가는 무공을 소유한 자다. 그녀는 야유화 때문에 더욱 긴장했다. 상대는 얼마든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서 위치를 바꿀 수 있지만 자신은 야유화의 곁을 떠날 수가 없다. 서로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바로 야유화를 지키느냐 해치느냐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야유화가 죽고 나서는 자신이 아무리 상대를 제압했다 해도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그녀가 패배하는 것과 같다. 그녀는 긴장하여 머리를 굴리는데 상대가 먼저 움직였다. 한 순간, 휙-! 사이룡의 신형이 갈대 위로 떠올랐다. 갈대 위로 떠올라 자신의 모습을 노출시켰다. 마고의 비선과가 이때다 싶어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장하낙일(長河落日). 사이룡의 연검이 좌우로 흔들리면서 위에서 아래로 내리쳐졌다. 허공에서 마고의 연검이 사이룡의 연검을 낚아챘다. 우르릉……! 굉음이 울면서 연검은 허공 높이 솟아올랐다. 마고는 재빨리 비선과의 방향을 틀어 사이룡의 인후혈을 노렸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에 사이룡으로부터 엄청난 장풍이 밀어닥치는 것이 아닌가. 쿠쿵-! 같대밭에 진동이 일고 마고의 몸은 갈대를 등으로 꺾으며 주르르 밀려나갔다. 그녀는 밀려 나가면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얼핏 느꼈다. 그리고 느낀 찰나에 이미 비선과를 계속 허공에서 노닐게 하면서 왼손을 들어 수리검 두 개를 연이어 던졌다. 그러나 상대가 맞아줄 리가 없었다. 사이룡은 허공에서 천룡보주의 신법으로 신형을 틀어 비선과의 공격을 피한 후 다시 도약하여 수리검의 공격을 피해 솟아올랐다. 마고는 사이룡의 놀라운 임기응변과 신법의 변화에 당황했다. 마찬가지로 사이룡 또한 마고의 빠른 대처와 수비와 방어를 겸하는 무공의 현란함에 놀랐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 승부는 결정되고 말았다. 사이룡은 이제 막 허공에서 마고를 향해 쌍장을 내려치려고 하였고 마고는 마고대로 비선과를 다시 날리려는 때였다. 마고의 비선과에 말려서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갔던 사이룡의 연검이 곧바로 야유화의 아랫배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사이룡은 평소에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좋은 보검이나 명검을 가지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저 호신용으로 야들야들한 연검 한 자루를 허리에 감고 다녔을 뿐이다. 그러나 그 검은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진기를 머금었던 터라 살기가 가득했다. 그런 연검이 야유화의 배 위로 떨어져 내려가고 있는 것을 본 사이룡은 급히 쌍장을 거두고 그대로 야유화를 향해 내려가며 자신의 연검을 섭물신공으로 움켜잡았다. 그 모습이 마고에게도 보이기는 했으나 마고의 비선과는 이미 사이룡의 연검을 쥔 신형의 오른쪽 견정혈을 후려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극히 찰나간의 일이었다. 퍽-! 피가 튀고 사이룡의 몸이 야유화의 바로 곁에 털썩 떨어져 버렸다. 연검은 여전히 사이룡의 손에 들려 있었지만 이미 사이룡은 연검을 들고 싸울 형편이 못되었다. 마고는 몹시 당황해서 사이룡을 바라보았다. 비록 부상을 입었다고는 하나 만일 상대가 야유화를 죽이려고 든다면 그건 식은 죽 먹기다. 상대 정도의 무공이면 너무나 간단하게 야유화를 해칠 수 있는 것이다. 마고는 당황해서 비선과를 든 채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미 갈대가 사방으로 흩어져 나가서 야유화와 상대는 눈 앞에 드러나 있었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 장여 정도. 공격을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망설임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상대는 야유화를 노리는 자가 아니었다. 그 뿐 아니라 상대는 야유화를 구하려고 자신의 위험을 아랑곳 않고 공격하려던 손으로 연검을 낚아챘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비선과에 부상을 입었다. 막상막하의 싸움에서 먼저 부상을 입는다는 것은 죽음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이제까지의 움직임으로 봐서 상대가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진대 목숨을 내놓고 야유화를 구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그녀는 염두를 굴리면서도 만일에 그가 야유화를 이제라도 죽이려고 마음먹을 것에 대비하여 비선과를 다시 내쏘려 하였으나 곧 그 동작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사이룡이 몸을 굴려 야유화로부터 떨어져 나갔기 때문이다. 사이룡은 마고가 멈칫하는 사이 재빨리 신형을 일으키고 마비된 한 팔을 내려뜨린 채 연검을 움켜잡고 다시 싸울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안색은 이미 파리하게 변해버렸고 뒤집힌 기혈로 인하여 입가에서 실낱같은 핏줄기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선과는 후대에 전설로 남을 만큼 대단한 절기였다. 그것은 비선과라는 무기 자체가 그렇게 훌륭한 것이 아니라 바로 추의 일인자인 마고가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치명적인 마고의 비선과에 맞았으니 비록 어깨 부위라 하여도 당연히 치명적이었다. 마고는 잠시 비선과를 날리지도 못한 채 그대로 서서 상대를 노려보았다. 상대는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이 서서 자신을 노려보며 자신의 다음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눈빛이 여전히 강하고 서기가 어른거렸다. 낯빛이 창백했지만 체념의 빛은 아니었고 일자로 굳게 다문 입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남자의 기개를 보여주었다. 이제 죽는다는 것에 아무런 회의도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객이 아니고도 저렇듯 죽음 앞에서 태연할 수 있는 것인가. 아니, 냉정한 자의 모습도 아니다. 그의 모습은 갈대밭 위로 떠오르는 붉고 커다란 해와 함께 장엄했다. 마고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비선과를 팔목에 도로 감아쥐었다. 이미 그녀의 마음은 변했다. 그녀는 상대를 경계하면서 야유화를 향해 곧장 걸음을 옮겨갔다. 상대는 더 이상 공격할 수 없을 것이다. 저런 몸으로는 방어조차 힘들 것이다. 설사 공격을 한다 하더라도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정도다. 사이룡은 전신의 기혈이 견정혈에 받은 충격으로 인해 들끓는 것을 느끼면서 마고의 다음 공격을 기다렸다. 무인이니 서서 죽으리라. 쓰러져 절명하지는 않으리라. 남자로 태어나 나이 여섯에 칼을 잡았으니 칼을 알고도 남음이 있고 죽음이 예사다. 서서 죽으리라. 2 해는 서편에 지고 날은 여전히 뜨거운데 후궁에선 여인들의 교소가 쉬임없이 울려 퍼졌다. 해가 지는 쪽에 위치하여 해를 보며 들어가는 곳이 후궁일진대 황제는 아침에 해를 등지고 이곳에 들어왔다. 황제가 나오기를 기다리다 못한 가령공주가 마침내 쌍희 문양의 후궁문을 밀치고 들어간 것은 땅거미가 몰려드는 때였다. 황제는 대체 후궁에 들어가서 무엇을 하는가. 후궁에서 세끼를 먹고 후궁에서 일하고 후궁에서 쉬는가. 후궁에서 세끼를 먹는 것은 맞지만 후궁에서 국사를 보는 것은 아니다. 황제를 대신해서 환관들과 태후가 국사를 대신했다. 새로 임명된 정승, 판서들도 제수된 지 석 달 넉 달이 지나도록 황제의 얼굴 한 번 못 볼 정도로 황제는 후궁에서 나오지 않았다. 가령공주는 황제의 딸이니 후궁에 들어간들 감히 막아서는 자가 없다. 다만 걱정이 되어 공주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황제는 간언을 싫어하고 후궁에서의 열락을 방해받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기 때문이다. 옥, 금, 주, 채, 초, 벽, 현, 호박, 휘장 앞에 서자 뜨거운 열기가 훅 기치면서 여인들의 교소 소리가 어지럽게 귓전을 때렸다. 가령공주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휘장을 홱 젖히고 들어섰다. 안의 광경은 참으로 가관이었다. 열 명에 가까운 여인들이 희디흰 알몸을 그대로 드러낸 채 황제의 주변을 감싸고 앉거나 누워있었다. 그리고 그녀들 중 하나가 이제 막 황제에게 수라를 올리는 중이었다. 황제는 체신도 없이 아랫도리를 훌러덩 까고 앉아서 여인네가 떠 먹여주는 전채요리를 어린아이처럼 받아먹고 있었다. 여인들은 황제를 희롱하고 있는 듯했고 황제는 희롱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싶었다. 가령공주의 등장은 여인들에게는 섬뜩한 일이었으나 황제에게는 신경질 나는 일이었는지 황제의 동태눈에 역정이 떠올랐다. "공주가 여긴 웬일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들어와? 기다리라지 않았느냐?" 황제의 역정에도 가령공주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자신의 사랑하는 연인 사이룡 외에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은 그녀였다. 황제가 자신을 참수한다 하여도 역시 눈썹도 까딱하지 않을 그녀임을 황제도 알고 있다. "아바마마, 사흘을 기다렸습니다. 오도인께서 알현을 청한 지가 나흘이고 소녀가 청한 것이 사흘이옵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리도 귀찮게 하는 것이냐? 이곳은 너같은 처녀가 올 곳이 못되느니라. 무릇 처녀가 드나들 곳이 따로 있는 법이니라." 황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공주를 나무랐으나 역정을 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워낙 대가 센 딸인지라 함부로 대하면 혀를 깨물지도 모른다. 누굴 닮아서 저렇듯 고약할까. 금지옥엽이니 내가 참는다. 황제는 수라를 밀어냈다. "다들 비키거라, 아바마마와 상의할 일이 있으니." 가령공주의 서릿발같은 한 마디에 후궁들이 바르르 해서 여기저기로 튀어나갔다. 다만 수라를 올리던 한 후궁만이 황제와 공주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동창에서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하여 들여보낸 천하 제일의 경국지색의 미인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으니 무서울 게 없었다. 그녀는 교태를 머금은 채 구룡옥배를 들어 황제께 권했다. "마마, 입안을……." 그녀로서는 그래도 될 것이라고 생각되는 일이었다. 수라를 들었으니 옥구를 가셔야 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것이 공주의 눈에는 자신을 업신여기는 행동으로 보이게 되었다. 가령공주의 두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어났다. "너는 귀가 먹었느냐? 아바마마께서는 스스로도 물 정도는 드실 줄 아느니라. 네가 보기에는 아바마마가 스스로 물도 한잔 못 드실 정도의 허깨비로 보이느냐?" 말이야 후궁에게 한 말이지만 그것은 곧 황제에게 하는 말이나 같았다. 황제의 검미가 꿈틀했다. 계집애가 해도 너무하지 않는가. 그러나 참는 게 상책이다. 자칫하면 이 사랑스러운 후궁 하나를 궁 밖으로 내쫓아야 할 판이 아닌가 말이다. "에잉……." 황제는 고개를 돌리고 후궁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서 나가라는 뜻이다. 전번 달에도 공주와 마주쳐서 그녀의 비위를 상하게 한 쌈박한 후궁 하나가 궁 밖으로 쫓겨나는 아쉬운 일이 일어났었다. 공주가 그녀를 궁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자신이 궁을 나가겠다고 공갈을 쳤기 때문이다. 후궁도 떠나고 둘만 남게 되자 공주의 안색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그녀는 후궁들이 앉았던 자리를 더러운 물건이라도 대하는 듯 이리저리 밀어내고 그 위에 앉아 황제를 마주보았다. "그래, 대체 무슨 일이길래 이렇듯 애비를 볶아대는 것이냐? 무슨 난리라도 났느냐? 누루하치가 칸이 되어서 기세가 등등하다더니 어느 변방에서 전쟁이라도 일어났느냐?" "오도인께서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사옵니까?" "오도인이?" 황제는 잠시 생각하더니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흉인의 탄생에 대해서 하던 말이 있었다. 그 일은 오도인에게 모두 맡겼는데 무엇이 잘못 되었느냐?" "오도인께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면 알현을 청하지도 않았을 것이옵니다. 어찌 이토록 후궁에만 집착하시옵니까?" 말투는 고왔지만 표정은 살벌하다. 문득 사이룡이 아쉽고 그 녀석이 있어야 뭔가 될 것만 같다. 그 놈이 궁내에 머무를 때는 공주가 그 놈에게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자신을 괴롭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 그래. 만나면 될 것 아니냐?" 황제는 뼈만 남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3 오도인은 황제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렸다. "오랑캐들은 나날이 세력이 비중해지는데 마마의 지척에선 위험한 사건들이 줄을 이으니 그것이 걱정이옵니다." 황제는 심드렁하니 오도인을 내려다보았다. 공주의 지랄로 하는 수 없이 만났지만 복잡한 것은 질색이었다. 몽고의 얄탄을 제왕으로 봉해주고 나서 그럭저럭 조용한 터에 이 늙은이는 대체 왜 이렇게 말이 많은가. "그럼 저번의 일을 아직 마무리 짓지 못했구려?" 다분히 질책하는 듯한 황제의 말에도 오도인은 두려움이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오도인은 황제와 함께 장거정의 제자로 어쨌든 황제와 동문수학한 사형제 지간이고 황제가 자신의 말이라면 언제라도 믿어주었기 때문이다. "저번의 일을 마무리하기에는 소신의 능력이 너무 부족하여 이같이 아뢰게 되었습니다. 흉인의 탄생을 막으려고 소신이 진력하였으나 흉인의 탄생을 원하는 역적의 무리가 너무 크고 강대하여 소신으로서는 도저히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어느 놈들이 감히……!" 황제는 심사가 뒤틀렸다. 감히 황궁에서 비밀리에 행하는 일에 어느 놈들이 반기를 들고나선다는 말인가. 그런 놈들이 있다면 아예 내놓고 척살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오도인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황제의 심중을 이미 간파해서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자신의 뜻을 비쳤다. "소신이 비사대를 움직여서 그들을 비밀리에 척살하려 한 것은 황궁에서 임산부를 해친다는 오명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비사대가 움직이고 무림의 도움을 받아도 역시 그들과 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무엇이? 아니? 어떤 무리들이기에 비사대도 무림인들도 해치울 수가 없었다는 것이오?" "그들의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흉인을 살려서 황권을 꾀하려는 무리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무리들은 재물이 많아 뛰어난 자객들을 사들여서 대항하고 있습니다. 동창과 깊게 관련되었던 자객 유상이 끼어있었던 것으로만 봐도 상대하기 힘든 자들임이 틀림없지 않습니까?" "그런……." 황제는 머리를 긁었다. 동창의 환관 놈들이 감히 그런 짓에 끼어들 리는 없었지만 환관들과 친하던 인물이 역적질을 했다면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금 오도인이 내게 상의하려 했던 것은 무엇이오? 다른 어떤 방법이 있소?" 오도인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아무래도 주사판관을 끌어들여야 할 것 같습니다." 황제의 안색이 급변했다. "사이룡을 시키자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사이룡이 아니고는 더 이상 비사대를 이끌 인물이 없습니다. 또 무림인들을 더 끌어들이고 흉인을 추적하는 일도 사이룡이 가장 적합합니다."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사이룡을 끌어들이는 일이 달갑지 않았다. 그것이 어떤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의 부친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이룡이야 공주가 죽고 못사는 인물이고 나라 일을 잘해서 백성들에게 황제의 인덕을 칭송하게 하였으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다. 특히 사이룡을 황제가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골치 아픈 당쟁에 끼어드는 일이 없어서 더욱 그렇다. 공주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을 모를 리가 없고 황제인 자신이 아끼는 것도 모를 리가 없는데도 사이룡은 항상 권력에서 멀리 있기를 원했다. 동림당과 동창의 싸움에도 전혀 개입하지 않고 공주가 어쩌다가 참견을 하려 들다가도 사이룡의 만류로 참고는 했다. 그런 사이룡이니 황제가 자신의 일을 맡기는 것에 가장 적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황제는 사이룡의 부친을 생각하면 신경질이 났다. 그 인물은 오도인과 함께 황제 자신의 사형제다. 그러니까 다같이 장거정의 제자였다. 그런데도 자신의 곁에 머물지 않고 강호로 나가 뇌옥이나 운영하면서 지내고 있으니 섭섭하기가 그지없다. 성질이 더러워서 무슨 일이든 사사건건 시비였다. 환관들 보기를 뱀처럼 보고 동림당을 구더기로 보고 후궁들을 창기로 보았다. 그러니 눈 앞에 없는 게 나았다. 만약 이번 일을 사이룡에게 시켰다가 그 사실을 알기라도 하는 날에는 틀림없이 더러운 일이라 말리고 나설 것이 분명했다. 사이룡에게 그 일을 거꾸로 하게 할 공산도 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역적 하나만 더 늘게된다. "아무래도 사이룡은 안되겠소, 짐은 반대요." "심려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헤아릴 수 있습니다만, 소신이 그에 대한 대책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책?" "사이룡을 즉시 불러들여서 가령공주와의 혼약을 천하에 발표하는 것입니다." "그, 그런?" 황제는 긴가민가 했다. 왜냐하면 공주의 혼약은 함부로 결정할 것이 아니고 동림당이나 동창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이러쿵저러쿵 해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공주의 혼인은 권력과도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에 순순히 승낙할 대신들이 없을 것이다. "그리하면 일단 사이룡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고 사사제도 그대로 승복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한 사이룡은 어떤 판단을 하기에 앞서 항상 공주마마를 생각하게 될 것이 아니옵니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이번 일은 사이룡의 힘을 빌어서 해결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럴 듯한 얘기다. 어서 골 아픈 일을 해결하고 자신은 그저 이번에 들어온 그 야들야들한 아이와 질펀한 운우를 즐기기나 했으면 좋겠다. "어서 가서 그렇게 하도록 하시구려." "그럼 혼약을 발표한 후 금룡패를 쥐어주어야 합니다." 오도인은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일이 급하기도 했고 황제가 동창 놈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 마음을 바꿀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동창의 놈들이나 동림당의 떨거지들은 이번 일을 알면서도 황제에게 전혀 아는 체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를 리는 없고 다만 서로가 뒷전에서 무언가 일을 벌이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황제를 알현하고 나서면서 오도인은 그제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제라도 잘 풀릴지 모른다. 사이룡을 나서게 하는 것은 그간의 사이룡에 대한 경계도 말끔히 씻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이룡이 장안성 내에서 열심히 이번 사건에 대해서 추적하는 것을 오도인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는 상대편의 자객이 사이룡에게 추격을 당했다고 한다. 오도인은 그 정보를 접하면서 은근히 결과에 주목했다. 물론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사이룡이 상대를 몹시 괴롭혔다는 것은 들었다. 만일을 생각해서 비사대를 보내거나 무림인들을 보내 돕게도 하고 싶었지만 일부러 모른 체 보고만 있었다. 사이룡이 혹시 다른 추격자들처럼 죽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후회는 되겠지만 역시 어쩔 수가 없다. 오도인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사이룡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그의 무공이 정심하고 뛰어난 것은 알지만 실전에서 얼마나 뛰어난지는 오도인 자신 역시 아직 알지 못한다. 죄인들이나 관군을 습격한 녹림의 도적들을 잡을 때에야 고수라고는 해도 사이룡의 진정한 무공을 시전할 만한 상대들이 아니었다. 사이룡에게 있어서는 이번 추격이 그의 관직생활에 있어서나 무림인으로 마주쳤던 모든 사건들 중에 가장 위험한 상황이 될 것이었다. 그는 사이룡이 흉인을 지키는 자객을 제압하고 돌아오기를 바랬다. 오도인이 천죽헌에 들어서는데 때마침 가령공주가 마주 나오고 있었다. 오도인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숙였다. "소신을 만나려고 오셨다 가십니까?" 공주는 오도인의 얼굴이 환한 것을 보고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근래 들어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근심에 싸여있던 노인네가 오늘은 웬일인가. 오도인이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소신이 좋은 소식을 하나 전하려 합니다." 4 명문혈에 뜨끔한 통증이 왔다. 견정혈이 뜨겁고 머리에서 벌레가 울었다. 아련한 가운데 멀어져가는 배가 일렁였다. 강물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다 번쩍 눈을 떴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는가?" 왕문희가 앞에 앉아서 근심어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뒤에서 타봉신개가 등짝 가득 침을 꽂는 중이었다. 사이룡은 왕문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주변 상황이 눈에 확연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은 분명 죽었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목숨을 부지하고 이곳에 있는가? 자객 마고가 자신을 그냥 살려두고 떠났을 리가 없는데 말이다. "정말 대단한 상대를 만난 모양이구만. 자네가 이렇게 당한 것을 보고 난 심장이 멈출 뻔했다네. 이런 상대를 내가 추적하고 있었다니 말일세." 타봉신개가 콧소리를 냈다. "허튼 소리 말거라. 이 놈이 무슨 대단한 고수라도 된다는 말이냐? 이 놈은 그저 한량에 불과해. 그 걸 이제야 확실히 알게되었다." 타봉신개의 말에 왕문희가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놈의 영감탱이가 입만 벌리면 욕지거리인가. 어디다 대고 하대인가. 마치 어린 아이 다루듯이 말이다. 게다가 사이룡을 한량에 불과하다고 하니 타봉신개가 왕문희 자기를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하게 여기는 듯싶어 불쾌했다. 사이룡이 타봉신개에게 물었다. "제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낸들 알겠나? 여자 둘을 뒤쫓던 네가 장안성 내에서 사라졌기에 내가 사사화를 우리 분타에 데려다 놓고 성 밖을 뒤졌지. 우리 제자 하나가 강가의 갈대밭을 뒤지다가 널 발견한 게야. 개꼬라지를 하고 엎어져 있었다더구만. 그래서 여기 의원으로 데려 온 걸세." 사이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개꼬라지라는 말이 적절한 것 같아서였다. 검을 들고 서서 상대를 바라보다가 혼절했으니 이 무슨 망신인가. 이렇게 살아난 것은 순전히 상대가 자신을 무시하고 그냥 가버린 덕분이다. "그 후로 두 여자는 행방을 감추었습니까?"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알지만 추적하지 못했다. 물길을 거슬러서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으니 조만간 우리 제자들에게서 다시 연락이 올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야지." 사이룡이 다시 물으려는데 밖에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불쑥 의원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관군이 몰려들었습니다." "관군이?" 왕문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관군이 집 앞에 몰려들어 서있었다. 그냥 관군이 아니라 어사대의 장수들이었다. 하나같이 우람한 체구에 육중한 병기를 둘러메고 있었고 붉은 피풍에 번쩍이는 은빛 투구를 쓰고 있었다. 타고 온 말들이 진일위의 검정말들이어서 한눈에도 보통 신분들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선두의 털북숭이 장수 하나가 말에서 뛰어내려 성큼성큼 들어섰다. 등에 멘 도끼자루가 번쩍번쩍 위협적으로 흔들렸다. "안에 뉘 계시오?" "무슨 일들인가?" 왕문희가 앞마당으로 나섰다. 털북숭이는 왕문희를 보고 얼른 머리를 조아렸다. 판관이 나서니 뒤에 있던 장수들도 황급히 말에서 내려 머리를 조아렸다. 아무리 어사대라도 판관을 마상에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집 안에 혹시 주사판관께서 머물고 계시지 않습니까? 황명을 받들라 일러주십시오." "황명?" 왕문희는 눈이 동그래졌다. 황명이라니. 이번 일이 황궁과 연관이 있다더니 급기야 황명이 떨어지는가. 그렇다면 나쁜 일인가 좋은 일인가. 사이룡이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고 가령공주와 절친한 사이이기는 하지만 간신의 무리가 판치는 세상이니 알 수가 없다. "지금 사판관은 일어서 거동할 상태가 못되네. 황상께서 명을 내리셨다니 마땅히 나와서 꿇어 엎드려야 하겠지만 누워서 꼼짝을 못할 처지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털북숭이의 안색이 변했다. 황명임에도 일어나서 나오지 못할 정도라면 중상을 입은 게 분명했다. 사건에 뛰어들어 오도인의 심사를 뒤틀더니만 결국 죽을 만치 당했는가. 고소한 일이다. 그의 눈에 심통이 피어올랐다. "얼마나 몸이 안 좋은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황명을 누워서 받는 법은 없습니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기어서라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의 말투에는 황제를 보필하는 어사대로서의 권위가 배어 있었다. 황명을 가져왔으니 황제나 다름없다. 그는 말을 마치고 뒤로 돌아 대뜸 수하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무엇들 하느냐? 어서 황명을 전할 채비를 하여라." 어사대가 줄을 지어 서고 한 장수가 황명을 적어 넣은 금지를 받쳐들고 앞으로 나섰다. 털북숭이는 보란 듯이 다시 왕문희를 바라보았다. 왕문희는 아무 할말이 없었다. 황명을 들었으니 황제다. 그가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다시 등 뒤에서 한 필의 말이 바람처럼 내달려왔다. 말 위에는 궁장의 여인이 올라앉아서 말고삐를 능숙하게 쥐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의연하고 아름다웠다. 왕문희는 그 여인을 보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말 위의 여인은 가령공주였다. 어사대가 일제히 공주를 바라보고 다시 털북숭이를 돌아보았다. 황명을 받드는 중에는 누구에게도 머리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런데 눈 앞에 공주가 난데없이 나타났으니 고개를 숙일 수도 그냥 버틸 수도 없는 일이 생겼다. 다만 왕문희만이 재빠르게 읍을 했을 뿐이다. 공주는 말에서 내려 어사대로 향하더니 대뜸 털북숭이가 들고 있는 금지를 잡아채었다. 털북숭이는 멍하니 공주를 바라보다가 흠칫 놀랐다. 그러나 놀라는 순간에 이미 금지는 공주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고, 공주마마. 그것은 황, 황명이옵니다." 공주가 털북숭이를 노려보며 앙칼지게 말했다. "내가 직접 전할 것이니 그리 알아라." "그, 그것은 법도에 어긋나는……." 털북숭이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어 버렸다. 공주의 눈초리가 얼음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네 놈이 필시 주사판관에게 앙심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 아, 앙심?" 털북숭이는 눈이 휘둥그래졌다. 이게 웬 말인가. 사이룡에 대해서 질투도 했고 얄미운 것도 사실이지만 앙심이라니. "그, 그럴 리가 있습니까? 소신은 다만……." 공주가 콧소리를 냈다. "아니면? 지금 남의 정인이 누워서 죽어가는 판에 억지로 끌어내어 아주 숨을 끊어버릴 셈이냐? 황명이라 하나 칙서가 아닌 금지 아니더냐? 네놈이 주사판관에게 앙심을 품은 게 없다면 필시 내게 유감이 있는 게로구나." 퍽-! 털북숭이는 그 자리에 엎어지듯 오체복지했다. 머리를 땅에 처박고 움직이지 않았다. 덩치가 아무리 커도 권력만 할까. 힘이 장사라도 세치 혀에 죽는 게 사람이다. 공주의 입에서 앙심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죽어도 할말이 없다. 황제의 애첩을 내쫓아도 황제가 입맛만 다시고 말 정도의 공주다.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는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가 오체복지하자 뒤에 어정쩡하니 섰던 장수들이야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일제히 오체복지하여 숨을 죽였다. 왕문희 역시 머리를 조아리고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저렇듯 대놓고 정인이라 하다니. 공주는 사이룡과 혼인할 작정이라도 한 것인가.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공공연하게 말을 뱉는 것을 보면 공주가 아직 철이 없는 것 같았다. 자칫하면 사이룡이 권력 싸움에 휘말려 동창의 환관들이나 간신배의 무리들에게 척살되기 십상인데 말이다. "이 금지는 내가 전할 것이니 너희는 이 자리에 꼼짝도 말고 엎어져 있거라. 만일 털 끝 하나라도 움직이는 날에는 나와 비무라도 하여야 할 것이다." 공주의 말이 진심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어사대는 바람에 머리털이 날릴까 두려워하게 되었다. 5 해가 서산으로 지자 땅거미가 강바람을 몰고 왔다. 선수에 서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넋을 잃고 있으니 수채의 무리들은 두려워하여 가까이 오지를 못한다. 강남십이수채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다는 청수채. 장강의 태반에 동정호까지 세력권에 있어 웬만한 녹림의 무리들은 얼씬도 못한다. 청수채의 손아귀에 있는 어부들이나 장사치들은 그래서 청수채에 많은 돈을 바치게 마련이고 청수채는 나날이 더 발전했다. 같은 녹림이라도 표국을 습격하는 도적의 무리들과 표국을 지켜주고 길을 터주는 청수채는 그 운영방식이 틀리다. 돈에 팔린 것인지 권력에 솔깃한 것인지 수채의 운명을 걸고 이번 일에 나섰다. 마고가 야유화를 데리고 배에 올랐을 때 수채의 채주 곽충은 마고를 보는 순간 개처럼 숨을 헐떡였다. 그러나 곧 상대 미인이 마고임을 알고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선실 안으로 달아나 버렸다. 마고는 야유화를 선실의 깊은 방에 두고 홀로 나와 선수에 기대서서 흐르는 강물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강을 거슬러 올랐다. 주변의 수채 무리들은 거칠고 뱀같은 자들이었으나 마고 주변에서는 헛기침도 하지 못했다. 그저 멀리서 그 정갈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바라볼 뿐이었다. 저렇듯 아름다운 여인이 그렇게 무서운 게 사실일까. 그들은 못내 믿기지 않는 표정들이었다. 마고는 손목에 감긴 비선과를 만지작거렸다. 흐르는 강물에 한 남자의 모습이 찰랑였다. 남자를 대한 지도 오래다. 어릴 적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에게 방중술을 배웠으나 그를 남자로는 여기지 않았다. 느끼지도 못하고 배운 것이 전부였다. 여느 여자들은 몸과 마음이 따로라던데 그녀는 그렇지가 못했다. 냉정하게 자라난 탓인지도 모른다. 그녀는 마음이 동해야 몸이 반응했다. 마음이 동하면 모습만 보아도 숨이 막혔다. 뇌옥에 갇히기 전이니 십 년도 넘게 지난 일이다. 별볼일 없는 시인 하나를 만나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외딴 찻집의 난간에 기대앉아 비파를 뜯으며 먼 하늘의 갈매기를 부르듯 노래하는 모습에 그녀가 먼저 반했었다. 한심한 놈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그 시인의 은자와 비파를 뺏으려고 했기에 그녀는 그를 도울 수 있었고 그게 인연이 되어 함께 차를 마셨다. 벼슬도 없고 재물도 없는 서생이었다. 그저 시나 읊고 책이나 읽으며 사는지라 세상도 모르고 여자도 몰랐다. 입맞춤 한 번이 그녀와의 사랑이었고 입맞춤 한 번으로 그녀는 전신을 참새처럼 떨었다. 자객 마고가 남자와 입을 맞추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겠거니와 마고가 입맞춤 한 번에 전신을 덜덜 떨었다고 하면 세인들이 배를 잡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정말 그랬다. 입맞춤 한 번으로 그를 다 가진 듯했고 그가 원하면 더한 것도 하리라 마음먹었었다. 이 세상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란 없다. 그러나 어울려서 결과가 나쁜 때는 종종 있는 법이다. 그녀가 그랬다. 시인은 그녀를 좋아했고 그녀를 무인인 줄만 알았지 자객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와 가까이 하는 것에 겁을 내지 않았다. 그녀는 아름다웠지만 아름다운 반면에 차가웠다. 눈빛이 맑았으나 유리알처럼 무의미했고 오똑한 코와 가는 뺨의 선은 날렵하여 예뻤지만 어딘가 접근하기 힘든 냉정함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녀가 시인을 바라볼 때에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시인이 보기에 마고는 충분히 부드럽고 연약했다. 다만 말수가 적고 무인인지라 애교가 없을 뿐이라고 느꼈다. 어느날 마고가 관군에 포위 당해서 잡혀가는 일만 아니었다면 둘은 더 깊은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시인은 마고를 위해 언제나 노래를 지어 불러주었고 마고는 노래를 들으며 행복해했지만 뇌옥에 갇힌 후로는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정신이 나약해지면 힘없는 일개 여자로 변해버린다. 일개 여자가 되어서 뇌옥 생활을 하면 이내 정신에 이어서 몸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것이 두려워 애써 잊어버렸다. 훈련의 힘은 대단해서 한 번 잊기로 마음먹자 곧 까마득하니 잊어버렸고 그 이후로는 그런 기억조차 없던 것처럼 되었다. 자객은 그래서 자객인 것이다. 자신에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잊어야 한다면 잊는다. 어린아이를 해친 일이든 사랑하는 사람을 해친 일이든. 그래야 자객이다. 눈을 감았다 잊어야 한다. 지금같은 때에 남자를 생각하다니. 내가 많이 약해졌는 모양이다. 뇌옥에서의 생활 때문인지 여자로서 한참 물이 오를 때여서인지 사이룡과 대치한 후로 그의 얼굴이 끊이지 않고 떠오른다. 마고는 자신을 나무랐다. 이미 실수를 범한 것이다. 살려두고 오지 말았어야 한다. 자신의 손으로 죽였더라면 당연히 연이 끊기고 잊어버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을 살려두고 왔으니 이 모양으로 마음이 흔들린다. 지나고 보니 후회스럽지만 그 때는 어쩔 수가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순간을 맞는다. 아무리 냉정하고 차가운 인간이라도 자신이 이제까지 겪어보지 못한 이성을 만났다면. 그것도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존경스러운 인물을 만났다면 마음이 흔들리는 것이 당연하다. 그녀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무인들을 만났다. 그들과 싸우고 죽이고 굴복도 시켰다. 임무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켜서 말을 듣게 하는 것일 때도 있었다. 그런 때는 상대의 자존심을 허물어뜨리고 공포감을 준다. 상대는 어김없이 죽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인다. 죽음에 초연한 자도 몇은 보았지만 어제 본 남자같지는 않았다. 만일 보통의 무인들이라면 야유화를 해쳤을 것이다. 정도 무림인이라도 그건 자명하다. 혹 야유화를 죽이지 않더라도 야유화를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치명상을 입으면서 야유화를 구했다면 그 대가를 바랬을 것이다. 싸움이 멈추기를 원하던가 야유화를 볼모로 위기를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남자는 벌떡 일어나서 칼을 잡고 싸우려고 했다. 그것도 야유화가 다치지 않도록 멀리 몸을 굴려서 자리를 잡았다.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남자는 이미 전신의 진력이 소모되었고 비선과에 맞은 어깨가 떨리고 있음도 눈에 보였다. 그러나 남자의 굳게 다문 한일자의 입술에서는 조금도 위축됨이 느껴지지 않았고 남자의 눈빛도 달라지지 않았다. 형형한 안광을 쏟으며 살기가 아닌 의지를 내뿜었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면 두려워하거나 비장해진다. 자객이 아닌 이상은 거의가 그렇다. 고승이 입적할 때 담담하다던데 그녀는 입적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대한 고승들은 모두 무승들이었으므로 죽을 때는 비장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그 예외는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달랐다. 남자는 마치 비무 대회에 나서서 목검을 쥔 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객이면 담담할 수도 있겠지만 남자는 자객도 아니었다. 남자는 관리였다. 훌륭한 판관이라고 했고 황궁에 힘이 있다고 했다. 그런 자는 권력이 있으니 목숨이 아깝지 않겠는가. 남자가 자신을 노리고 움직이지 않을 때 떨어져 내리는 해와 함께 그의 머리칼이 흩어져 나부끼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장엄해 보였다. 문득 다른 한 남자가 생각났다. 이 남자처럼 장엄하게 보았던 기억이 있다. 자신이 뇌옥에 들어갔을 때 처음 마주친 그 모습. 나이가 들어 백발이 성성하던 그는 청초한 남빛 장삼에 금빛 보도를 허리에 차고 서서 자신을 맞이했다. 모두가 존경의 눈빛으로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었지만 그는 그런 것에 눈을 두지 않고 그녀를 향해 말했었다. '네가 자객 마고로구나. 어린 나이에 몹쓸 운을 지녔으니 세상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으되 세상을 원망하여 한을 품지 말아라. 내가 칼을 차고 이곳에 있는 것이나 네가 사슬에 묶여 이곳에 있는 것이나 다 제 운명이니라.' 그는 인자하고 공명정대하여 죄수들을 핍박하는 일이 없고 죄수들보다는 옥리들에게 더 엄했다. 그의 뜻이 그러해서 옥리들도 죄수들을 이유없이 핍박하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왜 생각났을까. 마고는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누군지나 알아야겠다. 어제의 남자를 살려 두었으니 나중을 위해서라도 누군지는 알아야 한다. 만일의 경우 다시 손을 쓰기 위해서라도. 곽충은 선실로 들어선 마고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자기를 좋아해주면 참 좋을 여자다. 그러나 자기를 좋아할 리가 없는 여자다. "한 가지 물을 게 있다." 대뜸 반말이었다. 그러나 하나도 어색하게 들리지 않았다. 곽충은 나이가 자기보다 열 살이나 아래이고 배분을 따져도 한참 아래일 터인 젊은 여자를 올려다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같이 하대를 하기엔 좀 캥긴다. 시비가 일어나면 죽는 수가 있으니까. "난…… 별로 아는 게 없는뎁쇼." "네가 알만한 것을 묻겠다. 장안성 내에서 나를 뒤쫓던 인물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하거라." "장안성 내에서라면 저도 모릅지요." 마고의 눈매가 상큼 치켜진다. 이 놈이 알아서 대답할 일을 자꾸 쓸 데 없는 말을 시키는구나 싶었다. "강가에 남아있던 남자 말이다." "아, 그 남자라면 압니다요. 워낙 유명해 놔서 소호강호에 모를 자가 없지요. 주사판관이라고도 하고 미초서생이라고도 불리우는 사이룡입니다." 마고가 선실 안의 기둥에 기대며 탁자에 허리를 걸쳤다. 곽충은 마고가 자신과 말벗을 하려는 줄 알고 얼른 자기도 자리에 앉아 마고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기는 진짜 아름답다. 눈빛이 유리알만 같은 줄 알았더니 수정처럼 끝없이 반짝이는구나. "난 들어 본 일이 없는데?" "그야 당연합지요. 강호 십 년이면 배분이 변한다는데 십 년을 뇌옥에 계셨으니 모르는게 당연합니다. 아, 그렇군요. 여협께서 갇혀 계시던 바로 그 뇌옥의 주인이 바로 사이룡의 부친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바로 그가 판관으로서 워낙 공명정대하고 일을 잘 처리해서 유명해진 것이죠.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바로 가령공주의 정인이라 소문이 파다하여 더 알려졌지요. 하여튼 강호에 적이 없고 녹림이든 마도든 그와는 친구가 아닌 자가 없으니 조정의 동창 놈들이나 친구를 안할까 누구나 다 친구가 되고 싶어하는 인물입죠." "……." 마고는 다시 그 남자의 얼굴이 앞에 떠오르는 듯했다. 그랬구나, 그런 남자였구나. 한 나라의 공주가 사랑한다 하니 새삼 다시 느껴진다. 판관이고 무림인이며, 특히 자신이 갇혀있던 뇌옥의 주인이 부친이라니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아마도 부친에게서 피로 이어받은 심성이 있을 것이다. 뇌옥의 주인은 그 공명함 정도가 아니라 죄수든 옥리든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었다. "그런데 그 사이룡이라는 자가 어찌하여 우리를 뒤쫓는 거지? 그 자가 우리의 일에 대해서 얼마나 알지?" "아마도 아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요. 그 자는 우릴 뒤쫓는 것이 아니라 살인사건을 뒤쫓을 뿐입지요." 마고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니 야유화를 살려주었지. 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바로 선실을 나섰다. 바로 그때, 강 상류에서 폭죽 하나가 신호탄처럼 떠올랐다. 마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개방의 신호가 아닌가. 수채의 무사들이 이리저리 뛰더니 선실에서 채주 곽충이 달려나왔다. "개방에서 우리 배를 발견하고 어딘가에 신호를 보내고 있습니다." "개방도 조정의 편에 섰다는 말이냐?" "그런 것은 아니고 아마도 사이룡과 같은 연유로 우리를 감시하는 것일 테지요." "공격해오지 않으면 우리도 그냥 곱게 지나간다. 섣불리 먼저 공격하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곽충은 부하들에게 손을 저어보이고 도로 선실로 향했다. 마고는 선수에 서서 폭죽들이 여기저기서 마치 불꽃놀이를 하듯 번져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아무래도 사이룡이라는 남자의 모습은 밤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즐독 ㄳ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