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세월(歲月)
[1]
"아니? 등원주께서 웬일로 다 찾아오시었소?"
고헌부는 접객실에 앉아 있는 등인탁을 반갑게 맞았다.
하지만 마지막 말에 힘이 잔뜩 들어가 방문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 기는 냄새가 풍겼다.
실상 그는 기소연과 결혼한 이후 등인탁이 찾아오는 것을 매우 꺼 려했다. 그래서 그 자신도 비등원으로 아직 한 번도 놀러 간 적이 없 었다. 설령 등인탁이 초빙을 해도 선약이 있다는 둥, 침을 맞는다는 둥,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고사해 왔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이 만날 기회란 일 년에 한 번 비무대회를 통해 얼굴을 보는 것이 전부였다.
등인탁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싫어하는 눈치를 알면서 찾아갈 사람도 아니며 기소연이 그리 울 뿐 고헌부의 꼴은 보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도 고헌부가 하는 일 을 의식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긴 대신 심리적으로 과시하고 싶어 세와 부를 축적하기에 바빴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상대방을 힘으로 누르지 못할 어쩔 수 없는 사 연이 숨어 있었다.
상대를 들춰내거나 공격하면 결국 자신의 정체도 노출되기 십상이 다. 하물며 수리마제라는 무서운 맥이 존재하는 한 경솔함은 어리석 은 짓에 불과할 것이다.
두 사람이 무력(武力)을 자제하고 상대방을 정탐하지 못한 이유도 그런 공포심 때문이었다. 이렇듯 복잡한 속셈을 지닌 채 서로 등지고 살아온 지 어언 이십 년째였다.
하지만 아들인 등조민과 약속한 터라 등인탁은 어려운 발걸음을 내 디딘 것이었다. 그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나직이 입을 열었다.
"일전에 영애를 보았소만, 우리 아이가 돌아오면 혼인을 맺는 것이 어떻겠소? 듣자하니 혼처를 물색한다는 말도 들리기에 하는 말씀이 오."
고헌부의 안색이 와락 굳어졌다.
'뭔가 흑심을 품고 자식을 앞세우는 모양인데.......'
그는 은근한 표현을 빌어 냉정히 거절해버렸다.
"험, 영식이 인재임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오. 한데 좀 창피한 말 씀이오만... 우리 여아는 아무도 다룰 수가 없소이다. 자칫 결혼얘기 를 꺼내기도 전에 큰 싸움이 일어날까 염려되는구려."
그는 싸움이라는 말에 대못을 박듯이 힘을 주었다.
등인탁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기도 뭣하여 그는 넌지시 의견을 피력했다.
"본인의 의사를 묻는 것도 좋을 것 같소이다."
고헌부는 막연한 대답으로 다시 거부의사를 밝혔다.
"허허, 우리 아이를 몹시 귀여워하시는구려. 제가 언제 한번 찾아 가 뵈라고 권유를 해보지요. 지금은 강호로 나가서 활동하는 중이라. ......"
이제 피차 속마음을 다 알게 된 셈이었다.
모든 것을 고혜원에게 미루는 이상 대화에 진전이 있을 리 만무했 다. 실상 무가에서는 이렇게 본인의 뜻에 맡기는 경우가 허다하여 흠 잡을 일은 아니었다.
등인탁은 점잖게 수염을 쓰다듬으며 일어났다. "하긴 바쁠 게 없지요. 우리 아이도 무공수련을 떠났으니 여유는 많소이다. 차후에 기회를 만들어 주구려."
하나 그는 내심 별렀다.
'내가 한번 말을 꺼낸 이상.......'
고헌부는 얼른 따라 일어나 문을 열어 주었다.
"잘 생각하셨오이다. 자, 그럼......."
[2]
유청풍이 동방노야의 조수가 된 지 어언 일 년이 지났다.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정리가 끝난 축시 무렵이면 둑 방 위에서 검기무를 추는 동작과 대사를 혼자 연습해왔다.
"재주나 머리는 둘째야. 검기무란 남의 심정을 내 몸으로 표현하되 서로 동화되어야 한다."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어느새 나타났는지 동방노야가 뒤에서 지켜 보고 있었다. 지난 일 년 동안 그는 잡일만 시켰을 뿐 동작에 관하여 가타부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청풍은 먼발치에서 본 것을 늘 혼자 연습해 왔던 것이다.
갑자기 그는 머리 속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군!'
검기무는 특정한 동작의 명칭이 아니라 검무자가 무대에서 춤으로 표현하는 무술행위의 총칭이며 분위기에 맞게 변화함으로써 관객들의 흥미를 끄는 예술적인 동작이었다.
유청풍은 비로소 그 진의를 깨달은 것이었다.
동방노야는 느릿하게 시범을 보여주며 짧게 설명을 곁들였다. "천지광락세(天地光樂勢)가 나타내는 오묘한 변화를 감각으로 연결 하거라. 이렇게......."
그는 발로 십자 형태를 따라가는 한편 손으로 크고 작은 원과 몇 개의 직선을 그리는 매우 간단한 동작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천지광락세는 힘의 강약과 동작의 완급, 그리고 신형이 고 저를 이루어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변화를 담고 있었 다.
지금 동방노야는 마치 초범입성(超凡入聖)의 고수 같으면서도 아름 답고 유려한 무용수처럼 움직여 더 한층 신비감을 자아냈다.
언뜻 바위를 부수고 파도를 가를 만큼 위력적인 동작이 어느 순간 에는 구름을 끌어들이는 것 마냥 부드러운 느낌을 풍겼다. 또한 태풍 을 일으킬 것 같던 자세가 금세 파릇한 초원을 거니는 규수의 모습처 럼 변하는 것이었다.
유청풍이 천지광락세를 한 번 흉내냈을 때 동방노야는 보이지 않았 다.
목숨과 같은 자신의 진수를 가르쳐준 그의 의도는 무엇이겠는가?
그날부터 유청풍은 그 자세를 하루에 수천 반복하고 잠자리에 들었 다.
그리하여 청소를 하거나 밥을 먹는 동안 혹은 북을 두드리는 동작 은 물론이고 심지어 걸음을 걸을 때도 천지광락세가 펼쳐졌다.
[3]
세월유수(歲月流水).
흐르는 물처럼 삼 년의 세월이 지나갔다.
고일두가 공절 혁련달에게 기관학을 배운지도 어언 삼 년이었다.
"젠장! 대체 혼자서 뭘 하고 다니는 걸까? 사부라고 코빼기도 보기 힘드니......."
고일두는 난해한 선과 숫자로 표기된 도면을 말면서 툴툴거렸다.
혁낭(革囊) 하나가 전부인 사부 혁련달, 그래서 별호가 공절이며 그의 발길이 머물면 바로 그곳이 그의 거처였다.
고일두는 동가식서가숙(東家食 西家宿), 정처 없이 떠도는 사부를 따라 중원천지를 헤매고 다니면서 기관학을 배웠다.
말이 교육이지 미처 질문할 새도 없었다.
혁련달은 설계도만 한 장 달랑 던져주면서 다 풀면 오마 하고 말하 곤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고일두는 사부에 대하여 아는 바가 그리 많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다 했느냐?"
느닷없는 음성과 함께 혁낭을 멘 육순쯤 됨직한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말대가리 같이 길쭉한 얼굴에 실처럼 가는 눈을 연신 떴다 감았다 하여 어딘지 음험한 느낌을 풍겼다.
그가 바로 고일두의 사부인 공절 혁련달이었다.
고일두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예......."
그는 자신이 작성한 도면을 좍 펼쳐 보였다.
혁련달은 잠시 도면을 응시하더니 계속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기관학을 배웠느냐?"
고일두는 자신 있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으로 상대할 수 없는 적을 유인 섬멸하는 데 효과가 크기 때 문에 평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의 눈에는 강한 도전의지가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혁련달은 짐짓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어험, 너무 노골적으로 속을 드러내지 말아라. 기관학이 기술인 만큼 인간활동을 능률적으로 보완하는 수단도 되는 것처럼 해야지."
사실 그는 놀라운 기술을 지니고도 단 한 번 이로운 행위를 한 적 이 없었던 것이다.
고일두는 결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제가 배운 목적은 적과 싸우는 수단 뿐입니다."
그의 높은 억양이 긴 산울림을 만들며 산 속의 적막을 깨트렸다.
혁련달은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문주의 명만 아니라면 이놈을 그냥 콱.......'
그는 문주가 누군지 얼굴조차 모른 채 무인연락소를 통해 고일두를 가르쳐 주라는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것 뿐이었다.
고일두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혁련달은 불쾌한 기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다시 물었다.
"타인이 설계한 기관을 쉽게 파괴하는 이치를 말해 보거라."
고일두는 요체를 간단하게 대답했다.
"상대방 심리를 상세히 분석해야 합니다."
잠시 고개를 끄덕이던 혁련달은 최종 강평을 내리는 것 마냥 자세 히 언급했다.
"맞다. 아무리 원리를 잘 알아도 상대를 모르면 안 된다. 기관도 결국 인간이 만든 물건에 불과하다. 어디에 어떤 방식으로 기관의 조 정장치를 두느냐하는 것은 그 사람의 평소 의식구조가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고일두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띄웠다.
"알겠습니다."
혁련달은 습관적으로 혁낭을 들썩거렸다.
"질문 있냐?"
"없습니다." 그들이 서있는 언덕 아래는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혁련달은 작별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휑하니 사라졌다.
"좋아, 그럼 나중에 보마. 나는 여기서 갈란다."
좌측 산길 멀리서 그의 음성이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고일두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언덕 밑을 바라보았다.
우측은 호광성(湖廣省)을 관통한 상강(湘江)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 다.
고일두는 강을 따라 남행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어디 요극초에게 응용해 볼까?"
"그래, 무엇을 느꼈느냐?"
칼칼한 음성이 모옥(茅屋)의 실내를 울렸다.
음성의 주인공은 이마에서 정수리까지 머리칼이 하나도 없는 육순 가량의 노인이었다. 머리 뒷부분에만 남은 모발을 뒤로 늘어트린 그 노인이야말로 한철파류(寒鐵破流)로 오절의 반열에 오른 도절(刀絶) 위강이었다.
한철파류는 단 일 초식으로 구성된 도법이었으나 빠르고 예리하기 가 천하제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등조민은 즉각 대답했다.
"장쾌한 맛은 창술이 으뜸인 줄 알았는데 본 도법은 색다른 장점을 지녔습니다. 하지만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넓은 장소에서 다수의 적과 싸울 때는 창이나 극만큼 현란한 무기 도 흔하지 않다. 그러나 한철파류는 협소한 곳에서도 얼마든지 운용 할 수 있는 독특한 장점을 지닌 도법이었다.
그것이 등조민의 선입견을 깨트려 놓은 것이었다.
위강의 얼굴에는 만족함과 서운함이 교차했다.
'분명 인재는 틀림없으나.......'
아무리 뛰어난 인재도 최소한 십 년 정도 한철파류를 연마해야 팔 성에 도달할 수 있으며 비로소 응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이다 .
따라서 삼 년이란 기간은 겨우 도법의 요체를 이해할 단계였다.
그런데 등조민은 예상을 깨고 어언 칠성 수준에 이르렀다.
문제는 가문의 절기인 창술을 두고 그가 왜 굳이 도법을 배우느냐 하는 점이었다.
등조민은 섣불리 사연을 얘기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부친이 지시 한 사항이자 가문의 존립과 직결되기 때문이었다.
등조민은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사항을 물었다.
"어째서 오절 중에는 검을 사용하는 분이 없는지요?"
위강은 일시에 안색이 굳어졌다.
"수리마제가 존재하는 한 검절은 있을 수 없다."
너무나 단호한 그의 음성이 오히려 섬뜩하게 들릴 정도였다. 순간 등조민은 전신이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직... 그가 살아 있단 말씀입니까?"
설마 도 한 자루로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사부가 수리마제 단궐을 경계할 줄 그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것도 별호만 부르면서 말이다.
위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무공은 살아 있을 테지."
일순 실내는 을씨년스런 분위기가 감돌았다.
등조민은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아, 수리마제는 정말 공포의 검객이구나! 반드시 새로운 검법을 창안하여 그를 능가하는 고수가 되리라.'
"......!"
돌연 두 사람은 입을 꾹 다 물었다.
그것은 물론 단궐 때문만은 아니었다. 웬일인지 두 사람은 안색을 굳힌 채 은연중 결전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등조민은 긴장 속에서 내심 중얼거렸다.
'젠장, 갈수록 살기가 짙어지는군.'
언제부턴가 주위는 짙은 살기로 휩싸여 있었다.
살기의 실체인 적은 매우 노련하여 상대로 하여금 살기를 느끼게 만들면서 서서히 조여왔다.
강한 살기는 곧 보이지 않는 적의 숫자가 늘어난 증거였다. 살수들 은 이쪽의 실력을 충분히 간파했는지 지척에서 살기를 뿜어댔다.
그렇게 대치해 온 세월이 무려 지난 일 년 동안이었다.
등조민은 사부의 타는 듯한 눈을 응시했다.
"저들이 노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늘 그렇듯이 위강은 덤덤히 말했다.
"글쎄... 원인 모를 대결은 무림의 생리니라." 이들 사부와 제자는 적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십여 명으로 추산되는 적은 강하지 않으나 이쪽도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저러한 적은 상상 외로 끈질겨서 은신한다고 될 일이 아 니었다. 오로지 생과 사를 결할 일만 남았을 뿐이다.
위강은 느릿한 어조로 물었다.
"적의 능력을 판단했느냐?"
등조민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전부 상대하기에는 벅찰 것 같습니다."
위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적을 알면 된 게야. 그럼 오늘 실전 도법을 펼쳐보거라."
"예."
등조민은 도를 잡으며 촉각을 곤두 세웠다.
"드디어 왔습니다!" 그는 정체 모를 살기의 접근을 감지할 수 있었다.
위강은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벽장문을 열었다.
그가 벽장 안에서 꺼낸 것은 길다란 단목궤(檀木櫃)였다.
묵직한 단목궤는 흘러 간 세월을 입증하듯 새카만 윤기를 발했다. 그는 뚜껑을 열어 제키고 한 자루의 커다란 도를 집어들었다.
짜라랑!
도신(刀身)이 도갑(刀匣)을 이탈하는 순간 찬란한 은광(銀光)을 뿌 리며 심혼을 뒤흔드는 기이한 방울소리가 울려 나왔다.
등조민의 눈에서 섬광이 이글거렸다.
'구령은배도(九鈴銀背刀)......!'
사부 위강이 오늘 날 무림오절로 추앙 받는 것도 저 구령은배도가 한 몫을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절기에 적합한 무기를 선택하여 최강의 효과를 발휘하는 것이야말 로 병기를 다루는 무인들이 가장 원하는 바가 아닌가? 따라서 무공조예란 절기와 무기 그리고 자기가 발휘할 수 있는 공 력과 자질을 결부시켰을 때 비로소 극대화되는 것이다.
등조민이 구령은배도를 유심히 보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구령은배도는 구환도(九環刀)를 개조한 독특한 병기였다. 도신에 아홉 개의 은방울이 달려 있으며 도폭은 일반 도에 비해 무려 다섯 배나 두터웠다.
시퍼런 날이 오싹한 광선을 뿜어내자 주위가 얼어 버릴 것만 같았 다.
구령은배도를 바라보던 위강은 다시 도갑에 넣었다.
곧바로 사부와 제자는 모옥 밖으로 나왔다.
"......."
여름 날 정오의 햇살도 일만 오천 척의 고지대에서는 서늘하게 변 했다.
잡초가 무릎까지 자란 모옥 입구에 흉신악살 같은 인물이 서 있었 다. 그는 얼굴이 칼자국으로 얽어져서 바라보기조차 역겨운 인상이었 다.
흑의를 입은 우측 가슴에는 살루문을 상징하는 하얀 해골문양(骸骨 紋樣)이 수(繡) 놓아져 있었다.
교차된 두 개의 검 위에 그려진 섬뜩한 해골은 빚을 갚지 않으면 죽음 뿐이라는 살루문의 집행규칙을 나타냈다.
그의 뒤에는 동일한 복장을 착용한 열 네 명의 흑의인들이 반월형 으로 포위망을 구축한 채 위강과 등조민을 노려보았다. 그들은 한결 같이 험악하게 생겼으며 날카로운 흉광을 번뜩였다.
위강은 얼굴에 칼자국이 그어진 흉측한 인물을 향해 먼저 입을 열 었다.
"야심편(夜深鞭)! 잘 왔네. 자네 정도의 피는 묻혀야지?"
등조민은 바짝 긴장하고 말았다.
'헛, 탈명색혼대(奪命索魂隊)의 야심편 반서구(潘緖丘)가 저 자란 말인가?'
탈명색혼대는 요인을 암살하는 살루문의 전위 공격대로 바로 이들 이 과거 수십 개 문파의 고수들을 살해한 장본인들이었다.
대부분의 암살자가 다루기 편한 무기를 사용하는 반면 반서구는 채 찍으로 생명을 수거(收去)하여 야심편이란 별호로 불렸다.
지금까지 야심편에 맞고 살아 남은 자가 없기 때문에 반서구는 죽 음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야심편 반서구는 허리에서 채찍을 천천히 풀어냈다.
"도절답구만!"
말과 동시에 그의 신형이 번쩍이더니 어느새 태양을 마주보고 섰다 .
휘리리링!
그의 뒤는 강풍이 휘몰아치는 까마득한 절벽이었다.
모진 바람에도 불구하고 반서구의 옷자락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 다. 하지만 그의 돌연한 행동은 분명히 상식에 어긋난 것이었다.
그는 뜨거운 햇살에 이마를 잔뜩 찌푸린 채 자신만만한 음성을 발 했다.
"네 약점을 이미 알고 왔다."
비로소 위강은 그가 왜 일 년을 끌었는지 깨달았다.
"그랬었군."
한편 관전하던 등조민은 반서구를 의아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하다. 태양을 등지는 편이 유리할 텐데.......'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맞아. 저 무서운 방울의 빛을 피하려면.......'
등조민이 사부 위강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구령은배도는 햇살을 받아 눈부신 은광(銀光)을 사방에 뿌려댔다.
아무리 절정 고수라도 저 광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즉시 시력(視 力)을 상실할 것만 같았다.
이때 위강은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그는 반서구의 일거수일투족을 예리한 시선으로 응시할 뿐 굳이 좋 은 위치를 점할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스스스!
반서구는 준비한 솜으로 귀를 막은 후 위치를 좌로 또는 우로 신속 히 움직였다.
"이제 한철파류는 춤사위에 불과해. 소리와 빛을 차단하고 신속하 게 대응하면 별 것 아니지. 으흐흐......."
그가 신형을 더욱 빨리 움직이자 순식간에 여덟 개의 분신이 위강 을 빙 둘러 싸 버렸다.
편영팔사(鞭影八蛇)가 전개된 순간 여덟 개의 분신 중 어느 것이 반서구의 실체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슈아악!
돌연 그 분신들은 위강의 목, 가슴, 허리를 뱀처럼 파고들었다. 바 로 그 찰나 위강은 정면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타앗!" 그는 몸을 대각선으로 틀면서 바로 앞에 있는 반서구의 분신을 목 표로 힘차게 도를 휘둘렀다.
짧은 순간 구령은배도가 발한 냉기는 반서구의 전신을 잘라 버릴 듯 휘감다가 사라졌다. 동시에 뒤에서 달려들던 반서구의 분신도 위 강의 전신을 파낼 것처럼 매서운 편강(鞭 )을 후려댔다.
파파파파팟!
날카로운 파공성이 허공을 찢었다.
등조민의 눈은 휘둥그래졌다.
'예... 예상을 깨트리는구나! 어째서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모든 사람들이 기대했던 구령은배도의 아홉 개 방울은 하나도 소리 를 내지 않았다.
그저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동작만 번개처럼 이루어지고 말았다 . 등조민은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약점을 다 알고 왔다더니......?'
탈명색혼대원들은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조용한 걸 보면 간단히 끝난 거야. 으흐흐.......'
이들이 생각하듯 구령은배도의 방울은 분명히 소리를 내야 정상이 었다. 또한 구령은배도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아 더욱 이상했 다.
그렇다면 도절 위강이 패했단 말인가?
모두가 궁금하게 여길 즈음 두 사람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지금 위강과 반서구는 등을 마주한 자세에서 일 장여 거리를 유지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얼마 동안 그런 자세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 다.
휘이잉!
어느 순간 강한 산바람이 휘몰아쳤다.
반서구의 눈은 온통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가... 내 실체를... 알려......? 끅!'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몸은 서서히 분리되었다.
머리끝에서 사타구니까지 갈라지더니 허리마저 상하가 어긋났다. 땅바닥에 뒹군 네 조각 난 시신은 신기하게 한 방울의 피도 쏟아내지 않았다.
아마 칼로 수박을 잘라도 저렇게 매끄럽게 절단하지는 못할 것 같 았다. 위강이 신형을 바로 잡는 순간 시신에서 나온 피가 땅바닥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천년한철도 무처럼 자른다는 한철파류의 위력이었다.
문득 위강은 매부리코의 인물을 떠올렸다.
'와호장주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반서구의 약점을 위강에게 알려 준 사람은 바로 고일두였다.
그 일은 오직 위강 자신과 일 년 전 몰래 찾아 왔었던 고일두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실상 와호장주 고헌부가 그를 포섭하기 위해 펼친 계략이었으나 위강은 모르고 있었다.
탈명색혼대의 무사들은 멍하니 넋 나간 표정을 지었다. "이런... 강북지대장(江北地隊長)이 저리 허무하게 죽다니......."
위강은 제자에게 명을 내렸다.
"네 힘으로 격파해 보아라."
일 년 간 궁리했던 파해법(破解法), 등조민은 벌써 공격의 우선 순 위를 정해 놓은 상태였다.
"열 넷은......."
슉!
그는 최초목표를 향해 벼락같이 신형을 날렸다.
탈명색혼대 역시 습관적으로 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등조민이 나서자 자신감을 되찾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나누었다.
'위강이 나서지 않으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탈명색혼대는 등조민을 에워싼 순간 두 개의 원진(圓陣)을 형성했 다.
"흐흐흐! 탈명회원진(奪命回圓陣)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두 개의 원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회전하는 속에서 그들 열 네 명의 음성은 마치 한 사람이 외치는 것처럼 들려왔다.
하나로 섞여진 공자(功者)와 방자(防者), 이들의 동작은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졌다.
등조민은 마치 태풍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맹수 같았다.
"이야앗!"
동시에 역회전하던 두 겹의 탈명회원진 속에서 연이어 폭갈이 터져 나왔다.
"쳐라!"
"차앗! 놈을 죽여라!"
함성이 구호인 양 열 네 자루의 검은 보이지 않고 오직 살벌한 검 강만 휘몰아쳤다.
파파파파팟! 등조민은 진 속에서 도를 풍차처럼 돌리며 예리한 빛살을 뿌려댔다 . 피차 생사가 불투명한 가운데 처참한 비명 소리가 난무했다.
"으아악......!"
수직으로 세운 도가 번쩍일 때 주위에는 열 네 구의 시신이 뒹굴었 다.
열 네 명의 힘을 한 곳으로 집중시킨 다음 원심력을 이용하여 진세 를 강화하는 것이 탈명회원진의 강점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도리어 약점이 될 수도 있었다. 힘이 결집되기 전, 그 짧은 순간 측면에서 선제 공격을 당하면 쉽게 무너질 확률이 많았 다.
등조민은 이를 눈치채고 먼저 진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한철파류로 격파한 것이었다.
땀에 젖은 승리자 등조민 역시 성한 곳이 별로 없었다. 마치 난도 질당한 듯 그의 전신은 온통 혈선이 그어져 있었다. 아마 탈명색혼대 원 몇 명만 더 있었다면 결과는 예측불허였을 것이다.
등조민은 살기를 번뜩이며 얼굴에 흐르는 핏물을 닦아 냈다. '후훗, 이렇게 죽일 테다. 살루문을 고용하여 날 노린 자여!'
그는 간신히 자세를 바로 잡은 다음 위강에게 허리를 굽혔다.
"가친께서 고맙게 여길 겁니다."
위강은 느릿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나도 섬안비창과 맺었던 두 가지 약속 중 한 가지는 지켰다."
등조민은 사부의 우측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사부가 펼쳤던 수법이 한철파류의 진수였어. 다만 구령은배도로 전개할 때 위력이 배가되는 것 뿐이군.'
조금 전 그는 사부가 반서구를 처치한 동작을 그대로 모방하여 탈 명회원진을 격파한 것이었다. 이는 도법의 묘리를 깨우쳤다는 증거였 다.
위강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정중히 도를 거꾸로 잡았다.
"잘 배웠습니다. 그럼... 천천히 오십시오."
"오냐."
신형이 꿈틀하는 순간 등조민은 바람처럼 정상을 내려갔다.
위강은 주위를 둘러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원수를 찾아 나설 때가 왔군."
그의 뇌리에는 억울하게 죽은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십 오 년 전, 정체 불명의 복면인들은 한밤중에 위강의 집을 급 습했다. 그들은 사전에 철저히 준비한 듯 그의 아내와 아들을 죽인 후 순식간에 흩어져 달아났다.
위강은 그들 가운데 몇 명을 처치했지만 지금까지 아무런 단서조차 얻지 못했다. 다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복면인들이 각자 다른 무공 을 지닌 절정고수들이라는 점 뿐이었다.
[4]
어떤 사람이든 지친 만큼 수면 시간이 길어야 능률도 오르는 법이 다. 피로가 쌓인 천락무예단원들은 오늘도 저녁을 먹자마자 너나할 것 없이 잠자리에 들었다.
모두가 곤히 잠든 축시 무렵이었다.
쾅! 꽈꽈꽝!
어디선가 느닷없이 요란한 폭음이 들려왔다.
동쪽 천막 안에서 잠자던 사람들은 그 소리에 놀라서 벌떡 일어나 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눈을 감은 채 투덜거렸다.
"어이구, 저 놈의 소리... 도대체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외줄 강봉만은 귀를 막으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뒤이어 화염 도종이 벌떡 일어나 눈을 휘둥그렇게 뗬다.
"헉! 이건 또 뭐야?"
그가 식은땀을 흘리는 것으로 보건 데 선잠에 놀란 모습이 역력했 다.
아마 자신이 보관해 둔 화약이 터지는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북치기 노달맹은 으레 그러려니 하는 말투였다.
"단검을 던지는 걸 거야......."
일순 장내는 찬물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해졌다.
기이한 것은 잠이 달아나자 그 소리가 언제 또다시 들릴 것인가 하 고 오히려 기다려졌다.
찌륵... 찌르륵.......
그러나 주위는 고요할 뿐 귀뚜라미 소리만 이따금 들릴 뿐이었다. 도종은 소매로 이마를 닦으며 침묵을 깨트렸다.
"염병, 무슨 단검이 포탄(砲彈) 터지는 소리를 내냐?"
그는 너무나 궁금하여 아예 북치기 노달맹 쪽으로 돌아앉았다.
노달맹은 드러누운 채 눈을 감고 말했다.
"화가 났나봐."
정작 누가, 왜 화가 나 새벽에 단검을 던진다는 말인지 중요한 내 용은 빠져 있었다. 잠이 깬 모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주위의 이목을 의식한 노달맹은 신나게 주절댔다.
"투검(投劍) 영감한테 투검법(投劍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더니 ... 거, 잘 알잖아? 지랄 같은 영감 성질을 말이야. 한데 녀석이 인 상을 쓰더라구. 가르쳐 줄 때까지 철통에다 연습한다면서......."
이때 마치 천지가 개벽하는 것처럼 또다시 무서운 굉음이 들려왔다 .
꽈광! 우르르... 쾅!
천막은 잠시 지진에 흔들리는 듯 기둥이 부르르 진동을 일으켰다. 외줄 강봉만도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어이쿠! 젠장, 잠자다 고막 터지겠네. 대체 저 철통하고 쇠뭉치는 누가 줬어?"
그 역시 완전히 잠이 달아나 북치기 노달맹 쪽으로 돌아앉았다.
노달맹은 밖에 있는 투검자를 의식하여 저음으로 띄엄띄엄 말했다.
"가끔... 마대로 운반하더니만. 거 왜 있잖아? 우리가 거래하는 대 장간... 거기다가 주문한 모양이야."
"아무리 그래도 잠을 좀 자야지... 이게 뭐야."
천락무예단의 잠자리 역시 천막 생활로 전전하는 다른 가무단과 별 반 다를 것이 없었다. 죽 깔아놓은 판자 위에 이불을 펼친 다음 쓰러 져 눈만 감으면 곧바로 잠이 오니까 말이다.
어쩌면 잠이야말로 이들에게 최선의 휴식이자 유일한 낙일지 모른 다.
다른 배역들의 잠자리는 한참 거리가 있는 반대편인 데다가 중간에 몇 겹의 칸막이가 쳐져 있어 어느 정도 방음이 되었다. 어쨌거나 황금보다 더 귀중한 시간에 소란을 부리면 좋아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드디어 조용히 누워있던 탈바가지 안창구 가 소리를 빽 질렀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야? 새벽에 잠도 안자고!"
그는 신경질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자마자 빽 하고 외쳤다.
화염 도종은 이미 감을 잡은 터였다.
"누구긴 누구겠어? 청풍 그 자식이지... 제길......."
그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더듬대더니 겨우 곰방대를 찾아냈다. 이 어 떨리는 엄지손가락이 싸구려 잎담배를 꾹꾹 눌러 재었다.
이때 맨 끝에서 지금까지 듣고있던 투검 영감이 한소리 내뱉었다.
"어서 잠들 자라고. 아직 덜 피곤해서 그래."
영감은 무슨 일을 당했는지 얼굴이 기름에 튀긴 듯 일그러진 곱추 였다. 비록 그는 유청풍 보다 일년 늦게 입단했지만 혹시 등을 밟을 까 염려하여 특별히 안쪽에 자리를 배정 받은 것이었다.
영감은 몸을 돌려 이불을 쌓아놓는 벽 쪽을 향해 모로 돌아누웠다.
순간 열 받은 탈바가지 안창구가 핏대를 올렸다.
"킁, 영감, 누굴 약 올리는 거유?"
그는 어둠 속에서 영감을 잡아먹을 듯이 부리부리한 눈을 번뜩였다 .
투검 영감은 습관처럼 느긋한 음성을 발했다.
"청풍일 보라고....... 저렇게 밤새 단검 던지고 새벽부터 청소해, 장내 정리하랴, 하루종일 무대(舞臺)에 올라도 까딱없잖아."
투검 영감이 새삼 유청풍을 지지하는 것처럼 말한 의도는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입방아를 찧자 일침을 가한 것이었다.
드디어 안창구는 허리띠를 움켜쥐고 후다닥 일어났다.
"아니, 우리가 젊은 놈하고 똑같소? 내 이 자식을 확......!"
외줄 강봉만은 손짓까지 해가며 적극 만류했다.
"어이, 건드리지 마. 성질 몰라서 그래? 오죽하면 원개가 학을 띠 고 갔겠어?"
안창구는 마치 유청풍의 멱살을 잡은 양 주먹을 흔들었다.
"그러니까 저 자식이 더 양양 대는 거 아냐? 크응."
그는 동료들을 부추겨 자기를 납작코로 만든 유청풍에게 복수할 생 각이었다. 그런데 북치기 노달맹은 그럴 의사가 없는지 평소 눕는 순 서대로 그들의 장기를 죽 늘어놓았다.
"대단한 놈이지. 투검만 빼놓고 줄타기, 불 뿜기, 탈춤, 검기무 등 삼 년 동안 모두 배웠으니까."
무술을 춤으로 표현하는 검기무는 전임자 동방노야가 일 년 전 세 상을 뜬 이후부터 유청풍이 맡아왔다.
그가 죽었을 때 유청풍은 남다른 슬픔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후로 북 치는 일은 면했지만 잔일은 여전히 많았다.
어쨌든 이 바닥 전례로 볼 때 삼 년 만에 연극의 주역으로 부상한 것은 엄청난 고속승진이었다. 그러나 유청풍은 입단서열이 늦어 잠자 리가 맨 앞쪽이며 아직도 이불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화염 도종은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배워서 돈 벌겠다는데 어쩔 거여?"
어딘지 부러움이 담긴 듯한 목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캄캄한 공 간 속을 길게 뻗어나갔다. 삽시간에 아리한 연초 타는 냄새가 짙게 번졌다.
탈바가지 안창구는 멈칫거렸다.
'엥이, 놈이 항우장사라... 열 종자가 달라붙어도 못 당하니...... .'
그는 공연히 애꿎은 바지 끈만 풀었다 묶었다 반복했다.
이를 눈치를 챈 북치기 노달맹은 은근히 타일렀다.
"급장수, 그 악랄한 놈이 웃으며 인사하고 도망 갈 정도면 알아 봤 었어야 했는데... 이제 와서 부딪치면 뭐할 거야?"
외줄 강봉만은 구원(舊怨)을 포기한 듯 아예 벌렁 드러누웠다. "맞아, 먼저 건드리지만 않으면 조용하거든. 좌우간 끈기 하나는 질릴 정도로 무서운 놈이야. 평생 한 가지를 배워도 지겨운데....... "
문득 그는 자신이 줄타기를 배우며 고생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자네들도 비슷할 걸? 나도 열 살 때부터 얻어맞으면서 배웠으니까 . 벌써 쉰 둘이니......."
이들은 자기 분야에서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재주꾼들이며 십 년 이 상 밑바닥 생활을 하고서야 겨우 무대 위에 섰다.
한데 그 모든 기술을 삼 년 동안 악착스럽게 익힌 유청풍이 주연으 로 성장했으니 그들은 속이 쓰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유청풍에 대하여 너무나 모르고 있었다.
유청풍은 일성의 뇌운진기를 운용할 수 있으며 동방노야가 가르친 천지광락세와 화절의 절기인 난향비천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초식의 달인이었다.
그는 이런 초식들을 검기무에 응용함으로써 독특한 춤 솜씨를 선보 여 인기와 함께 고속승진의 길을 걸어왔다. 머리 좋고 재주 많은 사람이 어쩐다고 선천적으로 재간을 타고 난 고참들은 한솥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은 항상 따로 놀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그들은 유청풍을 시기하지만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탈바가지 안창구는 만만한 투검 영감을 물고 늘어졌다.
"킁, 영감, 저 녀석에게 빨리 알려 주쇼. 우리 잠 좀 편히 잡시다. "
실상 기죽지 않으려고 체면상 던진 말임을 단원들은 다 알고 있었 다.
환갑을 넘긴 투검 영감은 벌써 신나게 코를 골아댔다.
"드르렁, 쿨쿨......."
안창구는 자리에 누운 후 수없이 악담을 되씹었다.
'두고 봐라, 네놈이 잘 되나. 절대로.......'
여명이 다가 올 무렵, 굉음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마 지금쯤 유청풍은 새벽 청소를 시작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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