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제 7 장 전개(展開) 휘익! 천향루의 전각 위를 스치는 바람이 있다. 곳곳에 은밀히 은신해 천향루를 경계하는 수많은 무사들을 스치는 바람! 유성백리탄. 단궁비가 색마신의 초절한 경공을 펼쳐 나타난 현상이다. 그는 어느 전각의 지붕 위에서 잠시 신형을 멈추었다. 주위는 간간이 여인의 자지러지는 교음과 사내의 질퍽하고 거친 숨소리만 들려 올 뿐 적막했다. '분명히 어딘가에 단서가 있을 것이다.' 단궁비는 내심 중얼거린 후 재차 신형을 날렸다. 흡사 바람에 실려가듯 그의 신형은 한 줄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천향루의 후원 깊숙한 곳. 이곳은 짙은 어둠과 괴괴한 적막감만이 흐느적거리듯 감돌고 있었다. 그 적막감 속에 한 채의 거대한 전각이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전각은 천향루의 다른 일반 전각과는 대조적이었다. 우선 전각의 문이 견고한 철문으로 되어 있었다. '만년금강철(萬年金 鐵)로 된 철문이로군' 만년금강철! 보검으로도 손상을 입힐 수 없는 강철이다. 단궁비는 예리한 시선으로 전각을 살펴보았다. 전각의 육중한 철문은 문제가 아니다. 전각 곳곳에 은신한 인물들에게서 느껴지는 가공할 기도가 문제인 것이다. '대단한 고수들이다.' 일개 기루에 고도의 은신술을 닦은 자들이 몸을 숨기고 있음은 그 부피 만큼의 비밀을 품고 있다는 뜻! 단궁비가 막 침입하기 위해 사방을 둘러볼 때였다. 인기척이 울리며 한 사람이 이 수상한 전각을 향해 다가왔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미미한 파공음이 울리며 검은 장포를 입은 인물이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증표!" 까마귀가 울 듯이 음침한 음성이다. "꼭 매번 이래야만 되겠소? 무상신패로는 내 신분을 믿지 못한단 말이오?" 무상신패를 내밀며 짜증스런 음성을 발하는 인물은 대호산장의 가주인 철수단명 뇌종원이었다. 검은 장포의 인물은 냉랭하게 말했다. "증표!" "할 수 없군." 체념한 듯 뇌종원은 자신의 혀 끝을 깨물었다. 푸앗-! 그리고 허공을 향해 입 안에 고인 핏물을 내뿜었다. 그러자 검은 장포의 인물이 가볍게 우수를 떨치자 새하얀 백광이 그의 소맷자락에서 뻗어 나와 뿌려진 핏물을 덮었다. 푸스스스! 괴이한 음향이 울리며 핏물이 파랗게 변해 인광처럼 번뜩였다. 마치 수많은 반딧불이 허공에서 반짝이는 듯 어찌 보면 매우 환상적인 아름다움이었다. "녹혈행공류(綠血行空流)!" 검은 장포인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피에 녹아 있는 쾌활춘분산(快闊春粉散)까지 바꿀 수는 없는 법, 귀하는 철수단명 뇌종원이 분명하군." 단궁비는 절로 놀라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기이한 방법으로 신분을 확인하는 단체가 있다니! 검은 장포인이 척 손을 들자 만년금강철로 만든 철문이 활짝 열렸다. "자, 그럼 수고들 하시오." 뇌종원이 번쩍 몸을 날렸다. 그가 사라짐과 동시에 만년금강철로 만든 철문이 굳게 닫혔다. 그러나 누구도 몰랐다. 이 순간 뇌종원의 신형에 묻혀 두 사람이 잠입한 것을! 사실 뇌종원의 신형에 묻혀 잠입한 두 사람도 서로의 종적을 모를 정도로 그들의 신법은 절묘했다. ---유령미리보(幽靈謎里步)! 유성백리탄을 변형시킨 신법으로 펼친 인물은 당연히 단궁비이고, ---취팔선보법(醉八仙步法) 허허실실의 극치인 취팔선보법을 펼친 인물은 다름 아닌 불패괴옹이었다. 같은 날, 천향루에 잠입한 두 사람이 동시에 괴상한 전각에 들어 선 것이다. * * * 전각 안은 벽에 걸린 유등(油燈)만이 희미하게 회랑을 비추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다란 회랑의 양쪽으로는 수많은 방문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그러나 방 안에는 누가 있는지 쥐죽은 듯이 조용하기만 했다. 뇌종원은 한 방문 앞에 멈추어 서더니 문을 밀쳤다. 방 안에는 옥을 깎아 만든 화려하고 널찍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서너 명이 한꺼번에 뒹굴어도 될 만큼 너른 침상이었다. 그런데 지금 침상 위에는 이미 두 사람의 선객이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어딘가 모르게 넋이 빠진 듯했고 눈빛도 초점이 없이 몽롱했다. "흐흐흐, 자네들이 먼저 와 있었군." 뇌종원이 괴소를 날리며 침상 위에 몸을 눕혔다. 그는 두 사람을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초점없이 몽롱한 눈길로 허공을 바라보는 두 사람. 그들은 바로 날수신권 송악과 비영검 냉소였다. 중원의 후기지수 중 뛰어난 인재로 촉망받는 이들이 천향루의 깊숙한 음지에 이렇듯 풀어진 모습으로 있을 줄이야! 방 안에는 기이한 기향이 흐르고 있었다. 한쪽 구석에 놓여 있는 향로에서 나는 향이었다. 그 향은 사람의 혼백까지 빼어 버릴 듯 감미롭고 황홀했다. 뇌종원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잠시 후 그의 눈빛도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초점이 흐려지고 몽롱하게 변해 가기 시작했다. "흐흐흐! 천상에 오르는 기분이군!" 뇌종원이 눕자 침상이 철커덩 뒤집혀지며 그들은 전혀 새로운 공간에 당도했다. 대전의 바닥에는 발목까지 잠기는 천축산의 최고급 양탄자가 깔려있었고 좌우에는 커다란 청동향로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도 청동향로에서는 끊임없이 파란 연기가 뭉클뭉클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 해괴망측한 광경을 보라! 대전의 바닥. 이곳에서는 해괴망측한 혼음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아, 아흐흑!" "헉, 아학!" 백발의 노인도 있었고 중년의 사내도 있었다. 또 약관의 청년도 보였다. 이렇듯 제각각 틀린 연령층이건만 이들에게는 한 가지 뚜렷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눈빛과 행동이었다. 노소를 막론하고 사내들은 모두 두 눈에 핏발이 곤두선 채 허리를 바삐 놀리고 있었다. 푹 척, 푹 척! 장단을 맞추듯 일정한 소리들! 사내들은 기계적으로 몸을 놀리고 그 밑에 깔려 두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사내들을 맞이하는 계집들의 입에서는 쾌락에 겨운 교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하아 더… 더 깊이! 아흑!" 여인들은 이십 세 미만으로 하나같이 절색의 소녀들이었다. 대전의 천장,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그런 군상들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향로에서 타오르는 것은 쾌활춘분산(快闊春粉散)! 제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짐승처럼 변하고 만다. 나 역시 오래 머물 수는 없다.' ---쾌활춘분산! 환락미염산보다 몇 배 더 강한 최음향이다. 태워도 태워도 끝없이 솟구치는 욕정으로 말미암아 종내는 이성을 잃게 하고 폐인으로 만들어 시술자의 종으로 전락시키는 저주받은 약물! 더욱이 여인들은 천향루의 일급 기녀들로 환희미염공을 수련한 색녀들이다. 하지만 한때 무림을 뒤흔들었던 고수들은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욕정에 잠겨 여체에 그들의 정혈을 혼신의 힘을 다해 쏟아 붓고 있었다. 단궁비는 짧은 시간 괴이한 전각을 둘러보고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뇌종원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그들은 기향에 중독되어 인성을 잃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호에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 무기력하게 당할 정도로 기향의 중독증상은 심각했고, 일단 향에 중독된 사람들은 천향루의 꼭두각시로 전락하고 있었다. '이런 가공할 짓을 저지름은 천향루의 뒤에 누군가 있다는 뜻! 과연 어느 단체가 이렇듯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는 것일까?' 단궁비는 마음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우선 중독된 사람들을 해독시킨 연후에 이 음모의 배후세력을 캐야 한다. 그 전에 먼저 이들의 광태를 멈추게 해야 한다.' 결정을 내린 단궁비는 번개처럼 열 손가락을 떨쳤다. 파파파팟---! 대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미친 듯이 색에 몰두했던 사람들의 눈동자가 멍하게 변했다. "최소한 두 달 동안은 이성을 찾지 못할 것이나 기다리시오. 반드시 당신들을 구해 줄 것이니!" 안쓰러운 눈으로 송학, 뇌종원 등등을 지켜보던 단궁비의 눈에 돌연 붉은 혈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크! 쾌활춘분산이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구나!' 단궁비가 급히 내공을 끌어올릴 때였다. 종을 두드리듯 우렁찬 고함소리가 울렸다. "크크크! 어린 놈아, 재미가 좋으냐? 무얼 그리 넋이 빠져서 보고 있는 게냐? 잠시 후면 독 안에 갇힌 쥐새끼 꼴이 될지도 모르니 빨리 빠져 나오너라." 불패괴옹의 전음이다. 쿠우우웅---!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울렸다. 쾌락을 탐한 누군가 들어 선 모양이다. 그 순간 단궁비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단궁비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와 침상에 누웠다. 그의 뇌리로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났다. 천향루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은 하루아침에 계획된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일일 것이다. 그의 가슴을 더욱 묵직하게 하는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 복면인에게 패한 아버지, 그의 몸에 가해진 폐혈제맥수! 아버지는 과연 이 음모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설마 아버지도 이들처럼 쾌활춘분산에 중독되어 천향루의 꼭두각시로 변한 게 아닐까? 그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단궁비는 머리를 저어 상념을 떨쳤다. 중요한 것은 지금 그가 이곳에 있다는 점, 천향루의 음모 한가운데 그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굳이 천하대의를 위한다는 거창한 구실을 붙이지 않아도 이 문제는 자신이 개입해야 할 문제였다. '이런 패악(悖惡)을 저지르는 악인(惡人)이 누구인지 내 필히 응징하고 말리라.' 결심을 굳히던 단궁비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그의 예민한 감각을 자극하는 강한 기도를 감지한 것이다. "선배, 모습을 보이시지요." "껄껄껄! 놈! 역시 무공이 보통을 넘는구나. 노부가 온 것을 알아채다니." 팟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 바로 불패괴옹이다. 단궁비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은 듯 담담한 웃음을 띠고 불패괴옹을 쳐다보았다. 불패괴옹의 꼬부라진 가는 눈이 예리한 빛을 뿜었다. "네놈은 음마신과 어떤 관계냐?" 아마도 단궁비가 펼친 유령미리보(幽靈謎里步)를 알아 본 모양이다. 단궁비는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쾅! 단궁비의 머리에 벼락이 떨어졌다. "건방진 놈! 이놈아, 약간의 인연으로 색마신의 절대절기(絶對絶技)를 익혔다는 게 말이나 되느… 크악!" 기세 당당하게 외치던 불패괴옹의 얼굴이 완전히 썩은 감자처럼 변하고 말았다. "후후후! 내 머리가 동네북입니까? 그나저나 노선배, 아직도 정정하십니다, 그려." 단궁비의 손, 그 손이 쥐고 있는 것은 무엄하게도 불패괴옹의 거시기였다. 조금 전 쾌활춘분산을 미량 흡입해 불끈 솟구친 그것을 단단하게 움켜 쥔 것이다. 단궁비가 느물거리며 말했다. "음마신께서는 소생의 사부가 되시니, 배분을 논하자면 제가 한 배분 높은 사숙일 터, 그런데 감히 사숙의 머리를 종치듯 칠 수 있는 겁니까?" "크으! 이놈, 이 무식한 놈, 어서 그걸 놓지 못할까? 십 년 만에 기적적으로 살아난 그걸… 크윽!" "예로부터 고목에 싹이 트면 봄이 지난 줄도 모른다 했소이다. 소생이 이렇게 고통을 줌은 행여 천향루의 마녀들에게 홀릴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단궁비는 다시 한 번 강하게 그것을 쥔 후에야 비로소 손을 풀었다. 불패괴옹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하긴 준수하고 야들야들하게 생긴 단궁비가 이런 기습을 가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것이다. 일단 숨을 고른 후 번쩍 고개를 든 불패괴옹은 다짜고짜 일장을 날렸다. 칠십 평생을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기인답게 불패괴옹의 일장에는 태산을 뭉갤 힘이 담겨 있었다. 단궁비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한 터, 거침없이 일권을 날렸다. 빡! 굉음이 울리며 불패괴옹의 어깨가 휘청 흔들렸다. 단궁비 역시 어깨를 흔들 뿐 한 걸음도 밀리지 않았다. 불패괴옹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사문은 천 년 전의 기인인 천무공과 관련이 있다. 단궁비가 오마신의 제자라면 남남이랄 수도 없다. 그러나 새까맣게 어린 후배에게 손해를 볼 수는 없지 않은가! "어헝!" 노갈을 날린 불패괴옹이 다시 일장을 날릴 때, 단궁비가 샥 잽싸게 피하며 잽싸게 포권례를 올렸다. "아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불패괴옹은 멍한 얼굴로 단궁비를 바라보았다. 이 종잡을 수 없는 작은 괴물을 어찌 할까 망설이는 표정이 다분했다. "너…!" "선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 역시 쾌활춘분산에 중독되어 추태를 부릴 뻔했습니다." 숙이고 들어오는 인간에게 모진 인간 없는 법! "흥, 그놈 참. 인사성 한 번 바르군." "노선배께서 저를 찾은 것은 그 일 때문입니까?" 단궁비가 묻자 불패괴옹은 의자에 앉은 후 단궁비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참으로 준수한 녀석이다. 기생오라비같이 얼굴만 희멀건한 작자들과 다르게 녀석에게서는 진한 사내의 냄새가 풍긴다. 불패괴옹은 흐뭇하게 웃었다. "이놈아, 솔직히 말해 봐라. 넌 무슨 목적으로 천향루에 든 것이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불패괴옹의 표정이 자못 진지해졌다. 단궁비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불패괴옹도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 기다릴 뿐이다. 이윽고 단궁비는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먼저 노선배께서 저를 찾은 이유를 말씀하시면 저 또한 대답을 하겠습니다." "허, 그놈 참!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좋다. 정 그렇다면 내가 먼저 보따리를 푸마." 불패괴옹은 정색을 했다. "노부는 오래 전부터 이곳을 주시해 왔다. 아니 노부가 몸담고 있는 문파에서 주시했다고 말해야 정확하겠지." 문파! 독불장군으로 소문 난 불패괴옹이 소속된 문파! 불패괴옹 같은 고수가 누군가의 명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 문파의 위력은 능히 알 수 있을 터! 허나 불패괴옹은 자신의 문파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았다. 궁금증이 일었으나 단궁비 역시 구태여 묻지는 않았다. "자네, 무림에는 삼대기향이 있음을 알고 있나?" 삼대기향! ---환락미염산! ---쾌활춘분산! 환락미염산은 염후가 사용하던 최음제의 일종이다. 쾌활춘분산은 환락미염산을 한 단계 더 발전시킨 향으로 환락미염산의 최음성분보다 네 배는 더 강한 저주의 마물이다. 허나, 그것보다 더욱 무서운 향이 있으니, 그건 가히 인간세상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마도의 향이었다. 천향루에서 벌써 두 가지 기향이 사용되었으니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뿐이다. 단궁비는 긴장한 얼굴로 불패괴옹을 바라보았다. "천향루를 조사하던 난 누군가 의도적으로 천단율금향(天團律金香)을 사용하여 무림의 고수들을 무력화시키는 사실을 알아냈다." "천단율금향이라구요?" ---천단율금향(天團律金香). 지금은 사라진 밀교(密敎)에서 사람의 혼백을 제어하기 위해 제조했던 마향이었다. 천 이백 년 전 서장 밀교의 라마승들이 중원을 혼란으로 몰아넣었던 마향이기도 했다. 누구든지 한번 천단율금향에 빠져들면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단궁비가 놀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그도 천단율금향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무릉도에 한가지 신비로운 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단율금향을 품은 식물을 재배하기 위해서는 특이한 물이 필요했다. 그것이 무릉도에 있었던 것이다. '지심정(地心井)….그렇다면 그때의 복면인들이 아버지에게 원했던 것은 지심정의 옥령천수(玉靈天水)였다.' 이제야 모든 게 확연해진다. 아버지의 죽음이, 자신이 금제를 당해야 했던 이유가! 아버지는 이들의 음모에 꿋꿋하게 구 년을 버티다가 마침내 그들의 포악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되자 장렬하게 죽음을 택한 것이다. 단궁비의 표정이 침중해졌다. 불패괴옹은 그의 표정을 보고 내심 기이한 생각이 들었으나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천향루를 주목하던 난 한 가지를 알아냈다." "?" "이곳을 조종하는 사람이 과거 희대의 음녀였던 염후(炎后)와 관계가 있다는 점이지." "염후라면?" "일 갑자 전까지 천하의 숫한 영웅들을 파멸시킨 마녀다!" "그럼 그녀가 아직도 생존해 있단 말입니까?" "왜? 그녀가 살아 있으면 한바탕 어울려 보려고?" "노선배!" 단궁비가 버럭 고함을 지르자 불패괴옹이 대소를 터뜨렸다. "녀석! 성질하고는! 잘 들어라. 우리가 취한 정보에 의하면 염후의 생존 여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범인은 염후가 아니다. 배후에서 염후를 조종하는 제 삼의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어떠냐? 놀랍지 않냐?" 불패괴옹의 말에 단궁비는 씩 웃었다. "노선배, 그 정도는 나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천향루가 독단적으로 이런 음모를 꾸미기에는 벅차거든요." "염병할, 어린 놈이 완전히 능구렁이군!" 그 말을 끝으로 불패괴옹이나 단궁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자칫 무림 전체가 천단율금향에 중독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하제패(天下制覇). 만일 암중의 음모자가 천하를 노린다면 이보다 더 쉬운 방법이 어디 있을 것인가? 상상만 해도 전신에 왕소름이 돋는 전율지사(戰慄之事)였다. "노선배, 천향루의 음모를 천하에 공표해 버립시다." 불패괴옹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한심한 놈!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냐. 이 일을 공표(公表)한다 해도 누가 믿어? 너라면 네 부친이 중독됐다고 소문을 낼 수 있겠냐?" "그건 그렇군요!" 대답을 하며 단궁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노선배는 어떤 복안을 갖고 있습니까?" "우선은 천단율금향에 중독된 무림인들을 해독시켜야 되네. 그것도 흉수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말일세." "쉽지는 않군요!" "물론 어렵지.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어!" "예? 더 어려운 일이라고요? 그게 뭡니까?" "천향루는 그들을 완벽하게 제압하기 위해서 그들의 뇌(腦)속에 혈질(血蛭)을 심어 놓았네. 혈질은 묘강에서 자생하는 일종의 독거머리인데 놈에게 매일 같은 향을 맡게 하며 먹이를 주면, 나중에는 그 향만 맡아도 피를 빨지! 뇌에 있는 피를 빨며 독이 퍼지면 사람은 즉사야. 무공도 필요 없어!" "으음!" 단궁비는 낮은 신음을 흘렸다. "정말 지독한 놈이군요!" "그래, 내 칠십 평생 동안 이렇게 지독한 악마들은 처음 봐! 더 무서운 점은 혈질과 천단율금향을 동시에 없앨 방법이 없단 점일세!" 시무룩한 불패괴옹의 말을 듣던 단궁비가 갑자기 활짝 웃었다. 한 가지 사실이 번개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난 것이다. "가능해요. 노선배, 흡백충(吸白蟲)이면 혈질과 천단율금향을 동시에 해독할 수 있습니다." 단궁비의 말을 들은 불패괴옹은 여전히 시무룩하게 말했다. "알긴 아는군! 그러나 알면 뭐해!" "예?" 불패괴옹이 지그시 단궁비를 응시했다. "흡백충은 이대 절곡 중 하나인 광풍곡(狂風谷)의 만년백향목(萬年白香木)에만 서식한다. 광풍곡은 독지야. 그곳에 들기 위해서는 만독불침의 신체를 타고나야 해. 현 무림에는 그런 인물이 없어!" 침울하게 말하던 불패괴옹이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어 단궁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크하하하핫! 괜한 걱정을 했구나!" "?" "네놈은 오마신의 절기를 모두 익혔지 않느냐? 흡백충을 구하는 데 넌 유일한 적임자야!" 단궁비는 씩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났지만 불패괴옹이 좋아진 것이다. 칠십 노구에도 불구하고 무림의 안위를 위해 이렇듯 고뇌하는 그에게 존경심과 친근감을 동시에 느꼈다. "좋습니다. 노선배님께서 소생을 믿어 주시니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윽고 단궁비는 자신이 천향루를 찾아온 동기와 전각에 숨어든 이유 등을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복면인들이 찾아와 옥령천수를 원했다는 사실과,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한 단청운으로 인해 아버지와 자신이 십년금제를 당하고, 자신이 오마신의 절기를 얻는 과정에서 금제가 풀린 일 등을 빠짐없이 얘기했다. 불패괴옹은 단궁비의 말을 넋을 놓고 듣다가 갑자기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오묘하다. 하늘의 섭리여. 절묘하다. 신의 안배여!" * * * "자네 부친을 살해한 인물이 백색의 장인(掌印)을 남겼다 했느냐?" "그렇습니다." "거기다 미간에 뇌전(雷電)모양의 작은 도흔(刀痕)이 있다고?" "예! 혹시 노선배께서 아는 무공입니까?" 불패괴옹은 고개를 저었다. "무릉도의 무공은 아니라고 했지?" "그렇습니다." "천향루에는 그런 무공을 쓰는 사람이 없어!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넌 광풍곡에서 흡백충을 구해 오는 거야. 너는 강호초출이니 흉수(兇手)도 널 모를 거 아니겠냐? 그 동안 노부는 네 부친을 살해한 흉수를 파악해 주마." 그렇다. 부친의 가슴에 백색의 장인을 남긴 인물. 그 흉수만 알아낸다면 이 사건을 막후에서 조종하는 원흉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더구나 불패괴옹은 강호의 산전수전(山戰水戰)을 다 겪은 인물이 아닌가? 불패괴옹이 나선다면 암중흉수(暗中兇手)의 윤곽은 의외로 빨리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때 불패괴옹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조용! 누가 이리로 오고 있다." 단궁비도 이미 미세한 기척을 감지했다. 불패괴옹이 품 안에서 흑빛을 띤 죽패를 꺼내 단궁비에게 건넸다. "흡백충을 구한 후 낙양(洛陽)의 만금장(萬金莊)으로 찾아와라. 이 묵죽패(墨竹牌)를 보이면 누군가 자네를 내게 안내해 줄 거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불패괴옹의 신형이 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신출귀몰한 신법이군!' 단궁비는 내심 탄복을 금치 않았다. 불패귀옹이 사라짐과 동시에 방문이 살짝 열렸다. 이어서 그윽한 방향과 함께 왜소한 인영이 실내로 들어섰다. 들어선 인물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실내는 기분 좋은 향기로 가득 찼다. 그녀는 청미에게 지시를 내리던 의문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몸에 꼭 맞는 취옥색(翠玉色) 궁장(宮裝)을 차려입고 있는데 보는 사람의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매혹적인 몸매의 소유자였다. "호호호, 이렇게 불쑥 찾아와서 실례를 범하진 않았나요?" 단궁비는 환하게 웃었다. 청미를 건드리면 누군가 찾아 올 줄 알았다. 아마도 그녀는 천향루에서 상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을 터, 단궁비는 색마신의 색공을 믿고 도박을 펼치려는 것이다. 사실 혈질과 천단율금향을 푼 여인을 제압하면 굳이 흡백충을 구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사족을 붙인다면 청미를 취하며 남녀간의 교합에 상당한 흥미를 느꼈음도 부인할 수 없다. 단궁비도 분명 사내인 것이다. 단궁비는 침상을 가리키며 빠른 어조로 입을 열었다. "실례는 무슨! 좀 늦은 감이 있는데! 어서 눕지!" 단궁비의 반응에 면사여인은 경악할 듯이 놀랐다. 그 틈에 단궁비는 웃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하의를 벗으려 바지춤을 잡고 넉살 좋게 이죽거렸다. "뭐해? 나보고 벗겨 달라 이거야? 기녀주제에 뭘 그렇게 따져? 훌훌 벗고 어서 하자니까?" 여인의 몸이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얼굴은 반안, 송옥을 능가할 정도로 준수한 인물이 입은 수채구멍같이 걸다. '기생? 이 자식이….!' 면사여인은 내심 발끈했지만 사실이니 어쩔 것인가? "호호호, 역시 배짱이 있어요. 청미의 청백지신을 취할 자격이 있는 인물이군요!" "하하핫! 자고로 여자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그래, 청미 그녀가 벌써 그 사실을 그대에게 알렸을 줄이야! 뭐라고 해? 죽여 준대지? 잘 왔어. 아직도 몇 명은 해치울 힘이 남았으니까, 어서…!" 말을 맺기도 전에 단궁비는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놀란 여인은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지만, 찌이익 소리가 울리며 얼굴을 가린 면사가 찢어지고 말았다. 그 순간 단궁비의 콧속으로 스며드는 기이한 향기! 단전이 삽시간에 타오르며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었다. 중독된 것이다. 세상에 다시 없을 춘약에! 단궁비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그 후 그의 얼굴은 삽시간에 충격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말았다. 질질 흘러내리는 침, 떡 벌어진 입, 연신 벌렁거리는 코! 아울러 저 하체 한가운데서 불끈거리며 맥동하는 거대한 그 무엇! 단궁비의 두 눈은 여인의 얼굴에 못박혀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와! 대단해.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은 처음이야. 사람들이 늘 우물(尤物), 우물 하는데 당신이 정말 우물이군! 청미처럼 당신도 처음이지? 설마 그 우물에 누가 숟가락을 먼저 담근 건 아니지?" 속사포처럼 터지는 단궁비의 말에 여인은 대꾸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날리고 있었다. '호호! 걸렸어! 이 염후의 색공에 걸린 이상 넌 끝장이야.' 그랬다. 단궁비는 엄청난 오판을 한 것이다. 그녀의 수작에 걸려든 순간 그는 지난 수십 년 동안 무림의 영웅들이 그랬던 것처럼 전설의 마녀 염후의 색공에 침몰하고 만 것이다. 허나 염후는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외면으로는 냉굴처럼 싸늘한 기색으로 다시 한 번 단궁비를 시험했다. "너 이놈,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녀는 매섭게 단궁비의 뺨을 갈겼다. 그러나 단궁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염후의 몸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부른다. 여체가! 갈증에 목이 탄 여체가 그를 부른다. 그녀의 맑고 큰 두 눈은 사내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서러움과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 타는 듯한 애절함이 절절이 배어 나왔다. 풍만한 몸 곳곳에 드리운 음영은 그녀의 몸이 토해 내는 울음처럼 단궁비의 혼을 들쑤시고 있었다. 샥! 바람처럼 움직이며! 파바바박! 번개처럼 손을 놀리니! 찌이이익---! 궁라의가 찢기는 소리가 상쾌하게 울린다. 침을 질질 흘리며, 눈에서는 색광을 번갯불처럼 날리며 단궁비는 발광하기 시작했다. "죽여 버릴 거야! 너 같이 아름다운 여자는 모든 사내의 적이야. 그러니 죽여 버려야 해!" 번쩍! 그 동안 익힌 무공이 모두 이 여인 염후의 옷을 벗기기 위함인 듯 단궁비는 번개처럼 그녀를 나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 색마가…!" 염후가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런 자세가 단궁비를 더욱 미치게 한다는 것을 어찌 모를 것인가! 수치심에 몸을 굽혀 수밀도처럼 탄탄한 유방이 무릎에 눌리고, 그로 인해 쩍 벌어진 둔부 사이에서 숨쉬는 여체의 신비는 이제 피가 펄펄 끓는 단궁비를 색마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덥석! 염후의 섬섬옥수를 움켜쥔 단궁비는 다짜고짜 그녀를 침상으로 던져 버렸다. 연후 어흥 소리를 내며 달려든 그, 이미 팽팽하게 곤두선 용두장군은 제 집을 찾아 들 듯이 충천하는 기상으로 곤두서 있다. 염후는, 정녕 우물처럼 아름다운 이 여인은 모든 것을 망각한 듯 백치 같은 얼굴로 살며시 입을 벌린 채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샤샤샥! 무슨 소릴까? 수밀도를, 기름지고 풍만한 그녀의 아랫배를, 그리고 다시 위로 올라가 그녀의 붉은 입술을 꿀물을 빨 듯 핥는 색마 단궁비의 혀놀림이지 무엇이겠는가! 염후는 농염하게 웃었다. 그녀의 붉은 입술이 조금 더 벌어지며 꿈결같이 나른한 음성을 토했다. "그래요! 저를… 마음껏 짓밟아 주세요!" 그것은 차라리 애원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끈끈한 애욕(愛慾)이 가득 넘치는 욕화(慾火)의 덩어리였다. "카카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 말을." 미쳤다. 그 말 이외에는 단궁비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는다. 하긴, 쾌활춘분산에 노출된 데다가 천하의 우물인 염후의 색공에 당했으니 그가 어찌 제정신일 것인가? "당신 들어봤어? 내 다섯 명의 사부 중 한 사람이 여자를 다룰 때는 미친놈처럼 다뤄야 한대. 아무런 생각도 못하게 죽여 버릴 듯이 거칠게 다뤄야 한대! 각오는 하고 있지?" 염후는 몽롱한 얼굴로, 붉은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서… 어서 나를 거칠게 다뤄 줘요! 죽여도 좋아요!" "카카카! 알았어!" 불덩이처럼 솟구친 양물을 번쩍 든 후 그대로 내리찍으려는 찰나! "안돼!" 거대한 종소리처럼 울리는 음성! "이 미친놈아! 건드릴 여잘 건드려. 그 여자가 바로 염후야. 수백 명의 영웅을 몰락시킨 마녀인 염후란 말이다. 너 그 구정물에 몸을 담그는 순간에 이승 하직이야. 당장 떨어져!" 불패괴옹의 전음이었다. 단궁비는 흠칫했다. 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 무슨 괴상한 일인가? 염후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자 불패괴옹의 경고음이 귓전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시야를 메우는 것은 염후의 붉은 입술과 미려한 콧날과 나른한 눈길 뿐이다. 그 정도로 염후의 색공은 지독했다. 단궁비는 푹 고개를 숙였다. 염후면 어떻고, 마녀면 어떤가? 이 갈증을 풀면 그만이지. 쪽쪽 소리나도록 염후의 농염한 입술을 빨자 혼이 아득하게 빠져나갔다. 염후가 입맞춤의 순간을 이용해 단궁비의 내공을 빨아들이는 것이다. 아울러 그녀의 타액에 섞인 최음제가 단궁비의 피를 더욱 빠르게 만든 것이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청천벽력 같은 외침이 울렸다. "야, 단궁비! 너 정말 죽고 싶어?" 단궁비는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하면 안될까? 살짝만 담갔다 빼면 안될까?" "미친 놈! 일단 교접하면 종치는 거야. 당장 떨어져!" 단궁비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죽어도 할 거야!" 그러자 단궁비의 밑에 깔려 그의 거대한 양물을 허벅지에 끼고 몸을 떨던 염후가 요염하게 웃었다. '그럼, 그렇지! 네가 아무리 무공이 강하다고 해도 이 환희염소(歡喜炎笑)와 환희섭혼술(歡喜攝魂術)을 이겨내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녀가 허리를 가볍게 놀리자 불덩이같이 솟구친 그 끝 부분이 싸한 것을 느낀 단궁비는 으스러져라 그녀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아흑!" 굴강한 사내의 팔힘이 허리를 조이자 염후는 자신도 모르게 숨넘어가는 비음을 토했다. "아… 아음…!" "죽어도 좋아! 죽어도 좋단 말이야! 그러니 늙탱이 상관하지 마!" 단궁비가 번쩍 허리를 들었다. 그때 방문 밖에는 이들의 행동을 엿듣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이 있었다. 바로 청미였다. 그녀의 두 눈에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루… 주가?' 그녀의 가슴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화염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것은 바로 질투의 불꽃이었다. '안돼, 누구도 그를 가질 수 없어.' 청미의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쏟아져 나왔다. 이윽고 그녀는 소리 없이 일성지력을 날렸다 막 염후의 비문을 짓이기려던 단궁비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회음혈, 인간의 생체 중 가장 오묘한 그곳에 대침처럼 콱 박힌 일성지력! 쉽게 말해 똥침이다. 더욱이 청미가 날린 지력에는 극음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어서!" 염후가 재촉했다. 그러나 단궁비는 반응이 없었다. 부스스 일어난 단궁비는 자신의 양물을 보이며 기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이렇게 작아졌어!" "!" 단궁비의 그것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축 늘어져 있었다. 아울러 그것은 단궁비가 염후의 지독한 색공에서 벗어났음을 뜻했다. 단궁비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염후! 당신의 환희미염공은 정말 무섭구려." 단궁비는 담담히 말했다. 그의 눈빛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부동의 수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당황한 것은 염후였다. '이… 이놈이…. 환희미염공과 환희섭혼술에… 걸려들지 않았단 말인가?' 그녀의 옥용이 새하얗게 탈색이 됐다. 지금까지 자신의 환희미염공 앞에서 이지(理智)를 상실하지 않은 인물은 전무(全無)했던 것이다. 백(百)이면 백, 모두가 개[犬]처럼 자신의 나신을 핥아 대지 않았던가? 단궁비는 자신이 조금 전 미친 듯이 날뛰었던 여체를 보며 쓰게 웃었다. "그런 대로 몸뚱아리는 아직 쓸 만해. 우리 다음을 기약하지." 염후가 경악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단궁비는 그녀를 번쩍 들어 허공으로 던져 버렸다. 만일 시간을 지체한다면 위기가 닥칠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다음엔 좀더 자극이 강한 것으로 부탁하리다." 말소리가 끝나는 순간 단궁비의 신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알몸으로 네 활개를 번쩍 펼치고 허공을 나는 염후의 두 눈에서 시퍼런 녹광이 번들거렸다. "이… 이 개자식…! 다음에는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말겠어." 단궁비는 그렇게 천향루에서 사라졌다. 흡백충을 구하기 위해서! * * * 그 문파는 심산유곡에 자리하고 있었다. 백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대지에 건립된 이 문파는 수백 개의 고루거각과 수만 명이 상주하는 말 그대로 용담호혈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 거대한 문파는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세인들의 눈에는 단 한 번도 포착되지 않았다. 이 거대문파의 주변에는 하늘 아래 가장 신비한 진법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고루거각의 한가운데 웅장한 건물의 심처 깊숙한 밀실(密室). 실내는 무척 정갈하고 검박했다. 가구라고는 한쪽에 놓인 목침상과 서탁 뿐이다. 그 실내의 한가운데 한 여인이 포단(蒲團) 위에 그림같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앞에는 불패괴옹이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이 여인의 모습을 보라! 인간 세상에 어찌 이다지도 황홀한 아름다움을 가진 미녀가 있는가? 세상의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도 오히려 그녀의 아름다움을 모독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녀의 미(美)를 표현할 수 있는 어휘(語彙)는 아마도 세상에 존재치 않을 것이다. 단지 바라보는 것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는 성결미를 지니고 있었다. 칠흑 같은 머리는 궁형으로 틀어 올려 봉황잠(鳳凰簪)을 꽂았고 수많은 별빛을 모은 듯한 봉목엔 혜지(慧智)가 충만했다. "총령(總領), 방금 하신 말씀이 모두 사실인가요?" 그녀의 옥음은 천상의 새소리였다. 듣는 이의 심금을 매우 기분 좋게 해주는 청량음이기도 했다. "그렇습니다. 단궁비란 젊은이는 문주(門主)께 큰 힘이 되어 줄 기재가 틀림없소이다.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서광이 비칩니다." 총령과 문주! 불패괴옹은 자신이 어떤 집단에 소속된 것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불패괴옹이 그 신비집단의 총령이고 이 절미의 소녀가 그가 상전으로 모시는 문주란 말인가? 도대체 이 여인의 신분이 무엇이기에 불패괴옹 같은 기인을 수하로 두고 있을까? "그렇군요. 어쩌면 훗날 그분으로 인해서 나백의 천년암계(千年暗計)를 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백의 천년암계! -성검은 구천을 지배하고, 흑풍은 팔황을 거느린다. 흑풍이 만마를 거느리니, 중토가 혈수에 잠기도다. 성검이 현신해 쌍봉쌍령을 취하니, 구천십지와 사해팔황이 성검의 발 아래 있도다. 이것은 바로 마도의 대조종 백만마종주 나백의 후인과 일대 격전을 벌일 한 절대기재의 탄생을 알리는 전설이었다. 천 년 전 통분의 한을 안았던 나백은 신군 천무공과의 대결에서 패한 후 천 년 후를 기약했었다. 그런데 이 여인의 입에서 나백의 이름이 거론된 것이다. "문주! 소신은 각주의 천상보령체(天上寶靈體)와 짝을 이룰 삼봉쌍령금상지체(三鳳雙靈金上肢體)는 틀림없이 어딘가에 존재하리라 믿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지만 고금(古今)이래 한 번도 등장한 적이 없는 절대지체(絶對肢體)인 삼봉쌍령금상지체가 현 시대에 현신하다는 막연한 기대로 지금 눈 앞에 닥친 난국을 타개할 수는 없어요." 눈 앞에 닥친 난국! 그것은 이들의 문파에 무언가 긴박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여인의 입에서 나직한 한숨이 토해져 나왔다. "더욱 어려운 것은 또 한 명의 금령지극체(金靈地極體)가 삼봉쌍령금상지체를 보좌해야 비로소 나백의 후인을 대적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우린 그 동안 금령지극체를 찾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지만 아직 종적을 파악치 못했잖아요." 나직한 음성을 발하는 여인의 안색은 극히 어둡다. 불패괴옹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문주, 하늘은 언제나 정의를 외면하지 않았소이다. 창(槍)이 있으면 방패(方牌)도 어딘가는 있게 마련이오이다. 이번 대전에서 승리는 난망하나 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 동패구상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패괴옹의 말에 여인의 안색이 조금은 밝아졌다. "제가 추태를 보였군요. 그래요. 내일 나백의 후인과의 대결에서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우리 신비각(神秘閣)은 최선을 다해야 해요." 신비각(神秘閣).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진 단체다. 다만 한 가지 이들이 장장 천 년의 긴 세월을 오직 나백의 후인을 대적하기 위해 존재해 온 문파인 것은 확실하다. "단궁비! 그분을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군요." "두 달 후, 만나 보실 수 있을 거외다." 여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두 달 후…!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군요. 총령께서는 그가 부탁한 대로 그의 가문의 원수를 찾아보세요! 나백의 후인과의 대결은 제가 직접 진두지휘하겠어요." "위험합니다." 여인의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두 눈에 결연한 의지가 서렸다. "세상사에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을 얻는 일입니다. 단공자가 그렇게 뛰어난 인물이라면, 우리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까지 해야 해요!" 모든 것을 준다. 대신에 그에게서 절대적인 충성을 얻어낸다. 무서운 심력을 지닌 여인! 그녀가 바로 신비각의 문주, 주약란(周略蘭)이었다. * * *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초입. 태양도 눈이 부실 절세의 미소년이 나타났다. 바로 단궁비였다. 중원을 떠나 이곳 서역의 음산산맥에 있는 이대절곡 중 하나인 광풍곡을 찾아 나선 것이다. 웅장한 기암괴봉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기봉의 위용은 언제나 인간을 초라하게 만든다. "이 많은 봉우리 중에서 어떻게 광풍곡을 찾아낸단 말인가?" 실로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요행히 사냥꾼이라도 만난다면 길이라도 물어 보련만 인적도 없는 험한 산중이다. "아무튼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궁비는 신형을 날려 산 속으로 향했다. 흐르는 유성처럼 몸을 날리던 단궁비가 문득 신형을 멈추었다. 그의 귓가로 미세한 음향이 감지된 것이다. 단궁비는 천리지청술(千里地聽術)을 펼쳤다. 둥! 둥! 둥! 그것은 대고음(大鼓音)이었다. "백장(百丈) 밖이다." 말이 끝나는 순간 그의 신형은 호선을 그리며 한 점이 되었다. 흡사 호로병처럼 생긴 계곡! 좀처럼 사람의 눈에 띄지 않을 모양새의 협곡 안은 상당히 넓은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고 초지 위에는 십여 채의 모옥(茅屋)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데 이 무슨 냄샌가? 피, 피 냄새다. 모옥 앞 너른 공터에 두 집단이 대치하고 있었다. 흉흉한 모습을 한 사십대의 무림인으로 보이는 네 사람! 촌락민으로 보이는 주민 수십 명이었다. 그렇게 대치하고 있는 그들 중간에는 삼십대의 여인이 나동그라져 있었고 좀 떨어진 곳에는 여인의 남편이 피 거품을 게워 내고 있었다.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 그건 이 기묘한 대치를 이루고 있는 집단과는 떨어진 촌락의 후면이었다. 그곳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이 계속 대고(大鼓)를 치고 있었다. 아마도 사냥을 나간 주민들에게 마을의 긴급상황을 알리는 모양이었다. "흐흐흐, 이런 산중에서 저런 미색의 계집 살맛을 보게 될 줄이야… 우리 음산삼귀(陰山三鬼)가 대복이 터졌구나!" 음산삼귀! 이들은 음산(陰山)일대에 악명이 자자한 세 명의 악당이다. 음소를 날린 자는 대형인 음산일귀(陰山一鬼) 표영수(票英水)였다. 그리고 나머지가 이귀(二鬼) 탁무일(卓無一), 삼귀(三鬼) 유광(兪光)이었다. "흐흐흐, 형님! 우선 계집의 속살부터 맛봅시다. 그놈의 광풍곡인지 나발곡인지 찾느라 무려 한 달 동안 계집 맛을 못 봤더니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소." 이귀가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삼귀도 재촉의 눈빛을 보냈다. "알았다. 내 빨리 일을 끝내 주마." 일귀는 음침한 괴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안… 안돼요, 제… 발… 제발 살려주세요." 여인은 몸을 잔뜩 움츠리며 애원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의 그런 모습은 이미 발정한 수캐들을 더욱 자극하는 불씨일 뿐이다. "흐흐흐흐!" 찌이익---! 일귀의 거친 손길에 여인의 옷자락이 사정없이 찢겨져 나갔다. "안… 안되오." 이미 이들에게 심한 부상을 당한 여인의 남편이 일어나려 꿈틀거리며 안타까운 부르짖음을 토했다. "당…신들의 요구대로… 광풍곡을… 가르쳐 주지 않았소! 헌데 이 무슨 짓이요?" 심각한 내상을 당한 그의 입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주르르 흘러나오고 있었다. "흐흐흐흐, 이놈아! 인간사(人間事) 중에 제일 호사(好事)는 색사(色事)라 하지 않더냐. 보아하니 네놈은 밤일[夜事]도 제대로 치를 힘도 없어 보이니 내 특별히 고마움의 표시로 네 계집에게 은총을 내려 주겠다." 일귀는 짐짓 성인군자(聖人君子)의 표정과 말투를 흉내내며 거드름을 피웠다. "크크! 언변 좋고!" "큭큭큭! 형님 언제 그렇게 유식해지셨소?" 이귀와 삼귀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킬킬거렸다. "이놈들, 무슨 소리냐! 이래봬도 주워들은 풍월은 서당 훈장보다 나은 사람이 바로 이 형님이시다." 일귀는 눈알을 부라리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그의 손은 연신 여인의 옷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여인의 두 눈은 공포로 잔뜩 치켜 떠진 채 전신을 비 맞은 참새 마냥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음산삼귀의 눈에는 이십여 명의 마을 주민들이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기껏 해봐야 자신들의 일초 반식 상대도 안 되는 평범한 촌부들이었다. 북소리가 멈췄다. 노인, 그는 허망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적을 바랬으나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음산삼귀의 앞에 모여 선 채 두려움에 싸인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때는 황금빛의 햇살이 산야에 부서져 내리는 한낮의 오후. 여인의 무르익은 몸매가 햇살에 반사되며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십대의 여인을 상큼한 햇과일에 비유한다면 삼십대의 여인은 풍요로움과 넉넉함의 대지다. 무르익을 대로 익어 곧 터질 것만 같은 나신은 돌부처라도 환장할 듯한 풍만한 완숙미를 뿜어내고 있었다. 햇볕에 그을린 약간은 까무잡잡한 얼굴은 산중에서 보기 힘든 미색이었고 촌부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풍만하며 요염했다. "흐흐흐, 도저히 못 참겠다." 일귀는 서둘러 자신의 하의를 끌어내렸다. 이미 독사대가리 마냥 독이 잔뜩 오른 그의 양물은 흉물스럽게 곤두서 있었다. 그는 여인의 다리를 활짝 벌렸다. 검은 덤불 속에 자리한 잘 발달된 옥궁이 낯선 침입자를 두려워하며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일귀는 그곳을 잔뜩 노려보며 가랑이 사이에 꿇어 앉았다. "이…이! 천벌을 받을 놈들!" 여인의 남편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자신의 앞에서 아내가 겁간을 당하려 하자 자신도 모르게 힘이 솟구친 것이다. 그는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일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입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흐르고 있었고 두 눈은 시뻘겋게 핏발이 선 채 독광를 뿜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뒈질 놈이 빨리 죽여 달라고 안달을 하는구나!" 이귀가 여인의 남편을 향해 장력을 날렸다. 슈아아앙-! 장력은 빠른 속도로 여인의 남편을 향해 밀려갔다. "그래, 이놈들아… 차라리 나를 죽여라!" 여인의 남편은 몸으로 장력을 맞이했다. '차라리 내가 먼저 죽는 게 마음이 편하다.' 그는 밀려오는 장력을 피할 생각도 않고 두 눈을 감았다. 장력은 그의 코 앞 한치 앞까지 다가들었다. 수하이자 동생들이 그렇게 바람을 잡아주는 동안 일귀는 자신의 양물을 한 손으로 잡아 옥궁의 입구에 갖다 대었다. 여리고 보드라운 감촉이 찌르르하니 등골을 타고 엉치뼈까지 전달되었다. "흐흐흐, 이 맛은 언제나 나를 흥분시키는군!" 일귀는 음소를 흘리며 엉덩이를 번쩍 치켜들었다. '저런…, 쳐죽일 놈들! 이들의 만행을 지켜보는 마을사람들은 내심 치를 떨었다. 하지만 이들은 안타까운 표정만 지을 뿐 자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벌써 이들에게 몇 사람이 희생되었다. 일귀는 엉덩이를 아래쪽으로 힘껏 내리 박았다. 그 순간, "멈춰랏!" 음산산맥 쪽에서 용이 울부짖는 듯한 창룡음이 울렸다. 슈아아앙---! 대기를 갈가리 찢는 파공음! 퍽! 잘 익은 수박이 뽀개지는 듯한 파열음과 처절한 비명이 동시에 울렸다. 푹 고꾸라지는 한 사람, 이귀였다. "어느 놈이냐?" 촌부를 강간하려던 일귀는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 순간 그는 화급히 지면을 굴러야 했다. 뒤통수를 쪼개는 예리한 강기가 화살처럼 날아든 것이다. |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
즐독 ㄳ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