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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1권 제6장 검문과의 싸움을 위하여 ① 흉터로 얼룩진 얼굴이 쉴새없이 떨렸다. 활짝 열린 뚜껑 안에 보이는 금원보 다섯 개와 호박, 비취, 자수 정, 온옥(溫玉) 등 각종 진귀한 보석과 질 좋은 비단 꾸러미 때문 만은 아니었다. 콧구멍에 박은 솜뭉치로 숨이 답답해져서도 아니며, 비명에 가까 운 괴성을 지르며 비단을 목에 걸고 보석의 황홀함에 젖은 땅꾼의 여편네들 때문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래, 이겼단 말이지. 그런데… 망할! 하필이면 왜 금호냔 말이 야?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쪽팔리지만 호법 주제에 문주인 자신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입구인 사곡(蛇谷)을 기어다니는 뱀들도 알고, 땅꾼들도 안 다. 그래서 자신을 비롯해 몇몇은 지금 은밀하게 단호삼에게 무공 을 배우는 중이었고, 근자에 들어 별거 아닌 무공을 절세 무공으 로 만들 수 있는 재주를 가르친 사 아저씨란 사람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사하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 다. 이런 것들을 믿고 산적 떼에서 녹산영웅문으로 둔갑을 시킨 것이 다. 그런데 오늘 기어이 사고를 치고 말았다. 혼례품을 빼앗긴 와운장 이나 아마 그 못지않게 엄청 힘 셀―결혼이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모(某) 집단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끄응!' 팽후는 눈앞이 캄캄해져 더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의자!!" "예." 눈치를 살피고 있던 천가진은 잽싸게 의자를 받쳤고, 팽후는 털푸 덕 의자에 앉으며 단호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한데 왜인지 단호 삼은 턱을 괴고 무척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흐, 제놈도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모양이지.' 지레짐작을 한 팽후는 일파의 문주다운 위엄을 서릿발같이 곤두세 우며 무게 있는 음성으로 불렀다. "단호법." 대답이 없다. 아니 어느 집 똥개가 짖느냐는 듯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다. 하지만 무공이 아닌 뛰어난 인품(人品)으로 문파를 이끌 기로 일찌감치 작심을 한 팽후는 잠시 기다리다 조금 음성을 높였 다. 하나 어디까지나 위엄을 잃지 않은 얼굴로. "단호법!" 보물에 눈이 어두워 온갖 지랄발광을 하던 여편네들은 '저녁을 지 어야겠어.' 하며 사라진 지 오래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는 아무 도 없었다. 예전 같으면, 아니 오늘 아침만 같아도 작은 목소리로 부르면 득 달같이 달려오든지, 미처 못 들어 대답을 못하면 옆구리를 찔러서 라도 알려주던 놈들이 멀찌감치 피해 멀뚱한 눈으로 팽후와 단호 삼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추상은린검 금호를 가볍게 물리친 단호삼이 두려웠던 것이다. '으으!' 내심 비명을 토하던 팽후는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벌써 열 번도 넘게 불렀다. 한 번 부를 때마다 언성은 조금씩 높 아졌고, 급기야는 목에서 피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천고(千古)에 길이 남을 명창이 되기 위해 득음(得音)을 하고자 함도 아니지 않 은가. 그런데도 목청이 찢어지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다만 녹산영웅문주라는 자리를 지키기 위한 팽후의 눈물겨 운 노력일 뿐이다. 만약 단호삼이 자신보다 무공이 약했다면 벌써 옆구리를 찌르며 ' 단호법' 하고 불렀을 것이다. 그렇게 해도 다른 수하들이 깔보지 않고 오히려 '참! 자상하신 주군이시다.' 하고 칭송할 테니까. 하 지만 팽후의 경우는 다르다. 두 주먹을 불끈 쥔 팽후는 이를 악물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불러보고 문주 자리를 넘기자.'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을 단지 인격 하나만으로 수하로 부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일 년치 밥을 싸서 따라다니며 말리리라고 굳게 다 짐하며 젖 먹던 힘을 짜내 고함을 지르려고 입을 벌릴 때였다. "왜 다들 저리 멀리 가 있지요, 문주님?" 쩍 벌어진 팽후의 입가로 피가 주르르 흘렀다. 드디어 득음(?)을 하고 만 것이다. "그걸……." '……몰라서 묻는 거냐?' 라고 하려던 말을 팽후는 꿀꺽 삼켜야만 하였다. 과연 이게 내 목 소리였던가 싶을 정도로 잔뜩 쉬어빠진 음성이 나왔기 때문이었 다. 다 죽어 가는 노인이 유언을 할 때처럼 듣기 싫은 음성에 단호삼 은 미간을 찌푸렸다. "목소리가 왜 그렇소? 혹시 코피를 너무 흘려서 그런 것이 아니 오?" 다들 황당이니, 당혹스럽다는 말을 자주 쓰지만 이럴 경우처럼 어 울리는 말은 없을 것이다.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진 팽후는 한숨을 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기에 그렇게 불러도 몰랐는가?" 처음 부를 때보다 훨씬 작은 음성이었지만 신기하게도 단호삼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묻고 있었으니까. "언제 불렀나요?" 팽후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어졌다가 다시 제 위치를 찾았다. 순간 적으로 무공이 높은 수하에게 감히, 겁대가리 없이 욕을 하려 했 던 것이다. ② 목구멍까지 올라온 놈을 뛰어난 인내로 밀어 넣은 팽후는 문주답 게 멋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불렀지. 그것도 아주 많이." 저런 식으로 말하는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단호삼은 머쓱한 표정을 하며 대꾸했다. "그랬군요. 뭐 좀 생각하느라고 못 들었어요." "글쎄, 그 생각이 뭐냐니까?" 약간 신경질적인 음성이다. 목청이 찢어지도록 부른 성의가 괘씸 해서라도 조금 알려주어야 했다. "아까 금호와 대결 때의 일을 잠시 생각했지요. 좀 위험했거든 요." 팽후의 눈이 잔떨림을 일으켰다. 금호 같은 고수를 상대함에 좀 위험했었다는 말보다 그걸 생각하 고 있다는 것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단호삼이 불러도 모를 정도 로 깊이 생각했음은 그때가 굉장히 위태로웠던 모양이었다. 그리 고, '이제는 쳐다볼 수도 없는 곳으로 가려 해.' 비록 이류무사지만 팽후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장(老將)이다. 그러고 보니 그새 단호삼이 훌쩍 커버린 느낌이었다. 성장이 멈춘 성인이 어찌 갑자기 키가 커지겠냐 마는, 눈을 한 번 끔뻑이고 다 시 보니 하늘 가까이까지 솟구쳐 버린 거목으로 다가왔다. 착각이 아닌가 싶어 다시 눈을 끔벅여 볼까 하다가 팽후는 그만 겁이 털컥 나서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행여 하늘에 구멍이 나면 큰일이 아닌가? 아니 벌써 하늘에 구멍이 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뚫린 구멍으로 걷잡을 수 없는 비가 퍼부어질 것이다. 그러면 거 목은 살겠지만, 그 밑에서 기생하는 잡초들의 운명은? 생각이 여기까지 발전하자 팽후는 진저리치며 입을 열었다. "오늘 일은 정말 유감이다, 단호법." 느닷없는 말에 단호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말인지?" 팽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애써 문주로써의 위엄을 지키지 않아 도 될 만큼 무거워 보였다. "내가 약한 상인들이나 우려먹는 것에 단호법이 늘 불만스럽게 생 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 속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네." 문득 그는 찌푸려지는 단호삼의 얼굴을 외면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따라 유난히 밤하늘에 많은 별들이 떠 있었다. 별들을 하나하나 헤아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과거, 내가 잘 아는 낭인무사가 있었다네. 그놈은 나보다도 못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성깔 하나는 정말 무지하게 더러웠지. 특히 술만 처먹으면 제놈은 천하제일고수였어. 그래서 놈과 다툼 이 없는 낭인무사가 없을 정도였고. 하지만 다 같은 처지라 낭인 무사들은 참았네. 그러던 어느 날, 놈은 길을 가던 한 무사와 어 깨가 슬쩍 부딪혔다고 시비를 걸었지. 그 북새통에 어깨가 스친 것 가지고 말야, 미친 짓이었지." 팽후의 말을 대충 정리하면 이러했다. 인생이 불쌍해 같이 술을 마셔준 팽후는 그 무사가 손속이 매섭기 로 이름이 난 청성파(靑城派)의 천수무정객(千手無情客) 악불위 (岳 蝟)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팽후는 대경하여 낭인무사를 말렸 다. 하나 이미 술이 꼭지까지 올라간 놈의 눈에는 상대가 설사 악 불위가 아니라 그보다 더한 절세고수라도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 며 빠닥빠닥 대들다가 단칼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본 내가 어떤 결심을 하게 됐는지 아는가?" 왜 그걸 모르겠는가? 자신도 그것 때문에 형을 잃은 사람이다. 단 호삼은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했겠지요." 팽후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옳으이. 자네는 그렇게 비겁하게 살아 무얼 하겠냐 하겠지. 가 만, 내 말을 더 듣게." 입을 달싹거리는 단호삼을 가만히 제어한 그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옛말에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네. 그 것을 비겁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이는 생명의 소중함을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네. 그래서 솔직히 나는 죽는 것 이 두렵네. 자네는 어떤가, 두렵지 않나?" 위엄을 지키느라고 늘 호법이란 말을 빼놓지 않던 말씨가 바뀌었 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단호삼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두렵지 않소. 문주님의 말은 잘 알겠지만, 그건 곧을 직(直)자의 깊은 뜻을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오." "곧을 직이라… 무슨 뜻인가?" 일순 단호삼의 눈에서 보는 사람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는 신 광이 번개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것은 길이 아니면 가지도 말며, 볼 것이 아니면 보지도 말라는 말과 일맥상통되는 것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거침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오. 물론 우리가 지금 옳은 일을 하고 있지는 않소. 먹고살기 위함이라는 핑계로 이 짓거리를 하고는 있지만… 언제까 지 약한 상인들만 고를 수는 없지 않겠소! 하지만……." 말을 하는 동안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난 단호삼의 음성이 점차적으 로 고조되어 잠시 마음을 추슬렀다. 그는 오늘 일의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원래 힘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터라 한 달 전부터 산적질에 나섰지만 상인들이나 덮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았다. 그러다 오늘 기어코 기다리던 상대를 만나고 말았다. 그 상대가 의외로 너무 강한 집단 소속이라는 게 변수였다. 하지 만 이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나 팽후는 너무 겁을 집어먹고 있어 녹산영웅문을 강호로 끌어들여 당당한 일문(一門)으로 만들 려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단호삼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오연히 외쳤다. "이번 일은 모두 내 책임. 혼자 해결을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시 오!" 이어 차가운 시선을 팽후에게 던진 후 그가 몸을 빙글 돌릴 때, "멈춰!" 목이 잔뜩 쉰 음성과 함께 팽후가 후드득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어디 가는가, 지금?" 단호삼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와운장!" "뭐?" 팽후는 일순 전신에 맥이 쭉 빠졌다. 아무리 남의 것을 뺏어먹고 산다지만 그래도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으며, 또 관아에 갇힌 동료 들을 구할 줄 아는 의리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저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것이다. 그래, 너 혼자 잘났다 싶어 팽후는 점점 화가 나는 것을 느꼈다. 그는 단호삼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런다고 일이 다 해결될 것 같으냐?" 와운장에 도착한 순간부터 그는 죽은목숨이나 진배없다. 그리고 자신의 죽음으로 만족할 광해검신 추성후가 아닐 것이다. 필시 이 곳으로 쳐들어 올 것이고… 혼례품을 되돌려 주어도 결과는 똑같 을 것이다. 무인이란, 특히 절정고수일수록 자존심이 강한 법이니까. ③ 자신의 생각대로 되어간다는 것을 안 단호삼은 내심 희미하게 웃 으면서도 불퉁하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설마 맞서 싸우자는 뜻은 아니겠지 요?"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속는 것 같은 더러운 기분 에 팽후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느낌에 자네를 현장에 투입하지 않았는 데,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싸울 수밖에……." 말을 흐린 그는 아직도 썩 마음이 안 내키는지 주절거렸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뭐가 되도 되겠지." 단호삼은 환하게 웃었다. "죽도, 밥도 아니면 떡이라도 되겠지요." "이 사람이, 떡이라니!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게. 가슴이 다 섬뜩하구먼." "그렇소? 하하하!" 그의 익살스런 말에 단호삼이 껄껄! 웃을 때였다. 어느새 주위로 몰려들었고, 그 중 쌍부무적 서황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단호법님, 이제 다 싸우셨습니까?" "싸우다니 우리가 언제……?" 무심결에 말을 받아넘기던 단호삼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서황의 말씨가 확 달라진 것을 그제야 눈치챈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 부성에 가까운 징그러운 미소를 잔뜩 띠고 있다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자라목처럼 움츠리며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한 단호삼은 피식 웃으며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좋아. 태도가 무척 마음에 들어. 앞으로도 계속 이런 자세를 유 지하도록." '이런… 젠장! 괜찮으니 전과 같이 하라고 하지 않고, 뭐 계속 이 렇게 하라고!' 순간 자라목이 독 오른 독사 대가리처럼 불쑥 튀어나왔고, "왜 불만 있어?" 라는 말에 다시 쏙 들어갔다. "……없습니다." 단호삼은 짐짓 손가락 마디를 오도독! 꺾으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 다. "있으면 더 좋은데, 정말 없어?" 여태까지 쌓아올린 부문주라는 명성을 일시에 무너뜨리는 망발이 다. 빠드득 이를 갈아붙이던 서황의 머리가 발딱 솟구쳤다. "있다! 왜 어쩔래?" "있으면……." 말하던 단호삼이 싱그럽게 웃으며 손을 들어올렸다. "맞지." 찰나, 슈앙―! 서황이 있던 자리에는 바람 소리와 눈썹 몇 개만 쪼로롱 날아다니 고 있었다. 두 사람의 짓궂은 장난으로 분위기는 한결 부드럽게 변했다. 웃음 이 멈추어지기를 기다린 팽후는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으며 입 을 열었다. "이제 다들 사태의 중요성을 인식했을 테니, 거두절미(去頭截尾) 하고 묻겠소. 좋은 계획이 있으면 기탄 없이들 말하시오!" 모두의 얼굴이 숙연해졌다.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일순 장내가 낮은 음성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일 년 동안 문주 행세를 한 덕분에 제법 관록이 붙은 팽후는 엄숙 한 눈빛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훑다가, 독사같이 가는 눈매를 가진 사순 가량의 중년인의 얼굴에 멈추었다. 팽후가 이곳, 땅꾼 마을을 빼앗기 전에 우두머리였다가 지금은 녹 산영웅문의 호법이 된 사왕(蛇王) 지다생(地多生)이었다. 무공은 그야말로 팽후의 일초지적도 되지 않지만 뱀을 부리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기에 사왕이라는 별호를 붙여주고 호법으로 삼은 것이다. 기실 녹산영웅문이라는 문파의 이름이 거창하듯이 모두들 별호만 큼은 최절정 고수였다. 공짜니까! "좋은 생각 없소, 지호법?"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자신은 뱀만 잡을 줄 알았지 그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도,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그래서 지다생은 어깨를 쭉 펴면서 당당하게 대답할 수가 있었다. "없소이다!" 팽후의 눈썹이 불끈 치솟았다. 돌대가리라는 게 저리 자랑스러울 까 하는 생각에 화가 치민 그가 한마디하려고 할 때였다. "아까 지호법이 내게 말한 것이 있지요." 단호삼을 돌아보는 팽후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떤 말을 했나?" 단호삼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사곡을 봉쇄해 놈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어떠냐고 한 것 같은데, 맞지요?" 무엇 때문에 자신을 두둔하는지 모르겠지만 지다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던 것 같소." "그리고… 음, 또 근처에 있는 뱀이란 뱀은 모조리 싸잡아 사곡에 넣어놓고, 비밀통로를 이용하여 밖으로 나가 와운장이 있는 강소 성(江消省)에도 몇몇을 보내 동태를 염탐하고, 또 제남에 가서 추 영화와 혼인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아보면서 식량도 사자고 하 지 않았소?" 지다생은 목뼈가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다고 하고, 팽 후는 마른침을 삼키며 급히 물었다. "그리고 또 뭐라 하던가?" "음… 초소를 만들고, 계곡 입구와 위에 함정을 설치하는 게 어떻 겠느냐고 했지요." "옳거니!!" 팽후는 자신의 무릎을 소리나게 쳤다. 몹시 흡족했는지 그는 흥분 된 어조로 물었다. "그게 모두 지호법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란 말이지?" 단호삼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분명히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지요." "호오! 정말……." 그때였다. 한 사내의 음성에 감탄하던 팽후의 음성이 잘린 것은. "문주님, 질문이 있습니다!!" 감히 문주님의 말씀을 잘라먹다니, 나쁜 놈! 평상시 같으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나 한껏 기분이 좋아진 팽후는 지금 기분 같아서는 모든 것을 용서해 줄 수가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구?" 목소리의 주인공으로 향해지던 팽후의 미간이 알게 모르게 찌푸려 졌다. 놀랍게도 이곳의 땅꾼이었기 때문이었다. ④ 뱀탕이 정력에 좋은 게 아니라 머리를 명석하게 만드는 모양이었 다. 지다생이 까무러칠 계책을 내놓는가 하면, 또 질문이 있다고 손을 번쩍 드는 땅꾼도 있으니. '그런데 이 자쓱들은……?' 은근히 속이 상한 그는 지나가는 길에 슬쩍 녹산영웅문의 주축을 이루는 옛 부하들에게 살벌한 눈길을 보내면서 입을 열었다. "말해 보게." 뱀 피부같이 비늘이 돋아 있는 사내는 몇 걸음 앞으로 나서며 어 깨를 쭉 폈다. 그리고는 큰소리로 말했다. "밥은 언제 먹나요?" 순간 쥐죽은듯한 고요가 찾아왔다. 작은 소리가 있다면 팽후의 쇳 소리 같은 콧바람 소리와 여기저기서 얼굴이 구겨지는 소리뿐이 다. 그러다, "맞다! 대체 밥은 언제 먹어?" "밥 먹고 합시다!!" 열화 같은 호응을 하는 사내들은 모두 땅꾼 출신의 녹산영웅문 출 신들이었다. 한데 화를 벌컥 내야 할 팽후의 얼굴에 괴이하게도 서서히 미소가 감도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단호삼이 말한 계책이 모두 지다생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그렇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단호삼에게 아랫입술을 물고 '꽉!' 하고 때 릴 듯이 위협 동작을 취한 뒤, 함성보다 더 크게 외쳤다. "좋다!! 오늘 본 문주가 무척 기분이 좋으니, 없는 거 빼고 있는 대로 먹고 마시자!!" '이왕 줄 수밖에 없다면 발가벗고 주자.'라는 팽후의 신조가 빛을 발하는 순간에 그는 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사람이 되었다. 앞다투어 몰려가는 사내들을 따라가던 지다생은 단호삼의 옆구리 를 꾹 질렀다. "체면을 세워줘서 정말 고맙소." "이거 술이 확 깨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하인이 되라는 이런 말 씀이오, 시방?" "그래. 왜 싫은가?" "싫지, 좋을 사람이 어딨소? 저 자식 하인이 되느니… 차라리 여 기 남겠소." "알아서 해. 하지만 여기 있으면 땀 깨나 흘려야 할걸." "그건 또 무슨 소리요? 땀을 흘리다니?" "참! 부문주는 아까 그 자리에 없었지." 고개를 주억거리던 팽후는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아까 말야. 여기 남은 사람들이 사곡에 뱀을 잡아다 풀고, 초소 를 만들고… 또 함정을 만들기로 했으니까 놀고먹을 생각은 아예 버리게." 서황의 머릿속이 환해졌다. 진짜로 술이 깬 것이다. 씻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사람에게 이 무슨 끔찍한 말인가? 일순간 땀을 뻘뻘 흘리며 일개미처럼 죽어라 하고 일하는 자신의 모습이 가물거리자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었다. "얘기가 끝난 걸로 알고 부문주 대신 지호법을……." "잠깐, 잠깐만요!" 몸을 일으키던 팽후는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도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는가?" 서황은 한숨을 쉬듯 입을 열었다. "하인이 되겠소." "싫다면서?" "젠장! 내가 하겠단 말이오!" "하인을?" "예." "잘할 수 있겠나?" "……예." "좋아, 그럼 하인이 되게." ⑤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비가 오다니. 그리고 우산을 받쳐야 하는 사람이 하필이면 왜 나란 말인가. 투덜투덜… 궁시렁, 궁시렁……! "거 좀, 그만하쇼. 시끄러워 죽겠네." "뭐여? 시끄럽다고?" 서황의 눈초리가 옆으로 길게 찢어졌다. 이때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그는 우산을 내팽개치며 두 소매를 둥 둥 걷어 올렸다. "이 새끼, 말버릇 좀 보소." "어어, 왜 그래요?" 토끼눈이 되어 뒷걸음치는 마광수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서황은 하얗게 웃었다. "저번에 그리 두드려 맞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려! 오늘 먼지가 풀풀 나도록 한번 맞아 봐라!!" 스윽 몸을 움직여 마광수의 멱살을 움켜잡고 팔을 번쩍 치켜들 때 서황의 팔을 붙잡는 손이 있었다. "그만둬." 내친걸음이다. "이 손 못놔?!" 말을 함과 동시에 서황은 팔을 거칠게 당겼다. 하지만 팔은 자신 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요지부동이자, "익―!" 하고 다시 용을 쓰는 그를 향해 단호삼은 써늘한 눈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내 앞에서 힘자랑을 하겠다는 건가, 지금?" 얼마나 용을 썼던지 엉덩이 쪽에서 풀피리 소리와 비슷야릇한 음 향이 나오는 순간, 서황은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몸을 땅에 닿 을 정도로 뉘이면서 힘을 썼지만 단호삼은 꼼짝도 않고 부끄러운 꼴만 보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는 것 이었다. 단호삼은 서황을 끌어당겨 바로 세우며 혀를 끌끌 찼다. "비를 맞지 않으려고 부문주가 선택한 일인데 이러면 어떡하나? 그렇게 하기 싫으면 나랑 바꿀래?" 단호삼은 부유한 상인의 호위무사이고, 자신은 하인이다. 마음이 야 꿀떡 같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서황은 고개를 젓고 말 았다. "……차라리 짐을 지겠네." 단호삼은 즉시 대답했다. "그렇게 하게. 하지만 이제 번복하면 안되네." "알았어." 확답을 들은 단호삼은 뒤에 엉거주춤 서 있는 짐꾼을 손짓으로 불 렀다. 짐꾼은 열 명으로 모두 녹산영웅문도들이었다. 짐꾼이 된 서황은 그 비를 쫄딱 맞으면서도 불평 한마디 할 수가 없었고, 얼마 후 제남에 도착한 그들은 주루(酒樓)부터 찾았다. 주루는 본시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라 소문이 빠른 법 이다. 소문은 곧 정보였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먼길을 온 상인을 이상히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사가 깊은 곳이라 주루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부 유한 상인 일행이 머물 만한 곳은 딱 한군데뿐이었다. 나래객점(拿來客店).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것을 상훈(商訓) 으로 내건 나래객점은 제남에서 유명한 객점이었다. 불결하고, 불친절하며 음식 종류도 적으면서 맛은 더럽게 없는. 그런데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줄을 잇는 것은 단지 값이 저렴하다 는 이유뿐이다. 오면 코털만 뽑고, 가면 그 손으로 돈만 받던 배불뚝이는 자리에 서 벌떡 일어나 코가 바닥에 닿도록 허리를 꺾었다. "어서 옵쇼!" 쩌렁쩌렁한 그의 음성 때문일까? 왁자지껄하던 실내가 일순간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며 모든 시선이 입구로 쏠렸다. 나래객점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들어보는 인사말에 깜짝 놀라던 그들은 또 한 번 놀랐다. 최고급 비단으로 만든 옷을 입은 사람이 호위무사에다 짐꾼을 거느리고 들어오고 있지 않은가. 이 또한 처 음 있는 일이다. 마광수는 옷에 묻은 빗물을 툭툭 털며 투덜거렸다. "에이, 옷이 다 적었잖아." 저 값비싼 옷이 젖었다. 배불뚝이의 고개가 벼락같이 돌아갔다. "수건… 야! 수건 가져오지 않고 뭘 해!" 멀뚱하게 서 있던 점소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수건이라니? 언제 우리 객점에 수건이 있었단 말인가? 걸레면 몰라도. "수건이라뇨? 수건이 어디……." "안채에 가서 뚱땡이에게 달라고 해!" 뚱땡이는 배불뚝이의 마누라였다. 확실히 돈이 좋기는 좋은 모양 이다. 아직 만져 보지도 않은 돈 냄새 때문에 감히 하늘같이 섬겨 오던 마누라님을 뚱땡이라 부르니 말이다. 점소이가 부리나케 뛰어가는 것을 확인한 배불뚝이의 고개가 원상 복귀되는 순간에 얼굴은 이미 비굴한 웃음으로 가득했다. 그가 헤 실헤실 웃으며 입을 열기 전에 단호삼이 한 발 앞섰다.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보다 우리가 묵을 방은 있 소? 우선 옷부터 갈아입었으면 좋겠는데." 시종도 아닌 호위무사가 나서는 것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 지만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매상 좀 올리겠다는 데. "몇 개나 쓰실려구요?" "한 방에 몇 명이나 들어갈 수가 있소?" 배불뚝이는 두 손을 마주 비비며 즉시 대답했다. "다 들어가실 만큼 방은 크지만, 침상은 하나뿐입죠, 네. 그러니 까 편히 쓰시려면……." 말을 흐린 그는 잠시 머릿수를 세어본 후 마광수에게 시선을 고정 시키며 입을 열었다. "지체 높으신 어르신께서 하인들과 같이 계실 수는 없을 것이고… 에, 가설랑무니… 이인 일조로 계산하면……." 쓰잘데없이 말을 길게 늘어놓을 기색이자 손을 저어 막은 단호삼 은 재빨리 입을 열었다. "알았소. 방을 일곱 개 주고, 음식은 이곳에서 제일 잘하는 걸로 가져오시오." ⑥ 음식을 탁자에 놓는 점소이가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단호 삼은 중얼거렸다. "비가 와서 그런지, 제남의 분위기가 썰렁하더군." 점소이의 손이 움찔했다. 평상시 같으면, 아니 이들이 평범한 손 님이라면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일이지만, 배불뚝이 주인에게 이 손님들에게만은 제발 친절하게 대하라는 주의를 들은 터였다. 하지만 남에게 굽실거리며 아부하는 게 싫어 박봉에도 불구하고 나래객점에 점소이로 있는 성격이 어디 가겠는가. 그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다 미친놈들 때문이지." 단호삼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의외로 빨리 정보를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 미친놈이라니, 대체 무슨 일인지 말씀해 주시겠소?" 세상에 이런 일이 다 있다니! 반말지거리에 익숙해져 있던 점소이 에게는 외경(畏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번쩍 고개를 치켜든 그는 단호삼의 얼굴을 처음으로 찬찬히 살피다 한숨을 쉬었다. "손님께서는 무사보다 선비가 더 어울리겠군요." 그의 말뜻을 알아차린 단호삼은 쓰게 웃었다. "별말씀을……." 이어 단호삼은 미리 준비하고 있던 은자 두 냥을 점소이의 손에 쥐어주며 넌지시 물었다. "작은 성의로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오." "이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약간 쑥스런 표정을 짓던 점소이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소인이 아는 대로 말씀 드리지요." 방안에 앉아 있는 단호삼, 서황, 마광수 세 사람은 식욕이 싹 달 아났다. 탁자 위에 가득 놓인 어자탕, 오리통구이, 소고기 편육 등 간만에 음식다운 음식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젓가락을 대지 못하고 있었 다. 점소이가 들려준 이야기 때문이었다. "참 하도 기가 차서 말이 다 안 나오네. 산적 주제에 감히 검문을 건드리다니요? 잘 아시겠지만 검문주가 누굽니까? 불과 일 년 만 에 검문을 와운장과 대등한 방파로 만든 분으로 사룡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마룡(魔龍) 비천혈신(飛天血神) 하후천(夏侯天) 아닙 니까? 그러기에 와운장주인 추성후가 무남독녀인 추영화를 기꺼이 시집을 보냈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 검문을 건드리다니. 완전히 미친놈들이지요. 한데 이상한 것은 산적… 아! 꼴같잖게 녹산영웅 문이라 하더군요. 하여튼 그놈들 중 대단한 놈이 하나 있는 모양 입니다. 단호삼이라던가? 그놈이 글쎄 추상은린검 금호를 이겼다 는 거지요, 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한참 더 이어진 점소이의 말을 대략 간추리면 금호의 패배에 의혹 을 품은 하후천은 진실 여부를 확인코자 와운장으로 사람을 보낸 한편, 녹산영웅문을 치기 위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무사들을 파 병(派兵)한다는 것이다. 사태가 이러하니 천하의 진미(珍味)인들 눈에 들어올 리가 만무한 법! 한참 만에야 단호삼은 심유한 눈길로 서황과 마광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걱정한다고 될 일도 아니니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그리고… 마 당주!" 마광수는 녹산영웅문의 천풍(天風), 질풍(疾風), 광풍(光風)의 세 개 당(堂) 중에 가장 약한 광풍당주였다. "예… 예? 저를 불렀습니까?" 잔뜩 졸아 있던 마광수는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그렇소." 내심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단호삼은 지체없이 말을 이 어갔다. "이제부터 식량을 구하는 일은 마당주가 직접 하시오." 모든 일을 단호삼이 하기로 정해 놓은 터라 마광수는 의아한 표정 으로 되물었다. "호법님께서는……?" "나와 부문주는 따로 할 일이 있소. 하니 행동에 각별히 조심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하시오." 무슨 일인지 궁금했으나 녹산영웅문의 태양인 단호삼에게 깊은 생 각이 있겠지 하며 마광수는 즉시 대답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
첫댓글 즐독 ㄳ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