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출발
온동네 떠나갈 듯 울어 젖히는 소리를 내며 이 세상으로 나오면서 나의 삶은 시작되었다.
가슴에다 손수건을 달고 새롭게 출발한 초등학교 1학년의 새로운 출발부터 은퇴 후의 백수 생활 출발까지 있었다.
미취학 아동기의 색깔은 연한 연두색이다. 그림으로 표현하라면, 손가락에 묻어나는 파스텔을 가지고 오월 초, 산등성이가 켜켜이 겹쳐지는 고향마을을 그린다.
흑백 사진 같은 자연 색깔에서 연둣빛 잎들이 튀어나와 컬러사진으로 변해갈 즈음에 교육부에서 공식적으로 지원하는 새 입학식을 네 번을 했고, 네 번의 졸업을 했다. 그 뒤 군대 신병 훈련소에서, 결혼식장에서, 사회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고 수십 년을 달려서 오늘까지 왔다.
초등학교의 출발은 노란색이었다. 병아리가 되어 무리 지어 같이 다녔고, 하늘을 나는 솔개와 족제비가 무섭기도 했다. 그렇지만 엄마 닭을 따라 다닐 때면 푸른 초원이 낙원이라 생각했었다.
중학교에서의 출발은 오렌지색이었다. 산토끼가 되어 고향 뒷산을 뛰어다녔고,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핀 뒷동산에숨어있는 ‘문둥이’가 무서웠다. 그렇지만 고향의 산하를 오르내리는것이 마냥 좋았다.
고등학교의 출발은 진한 초록색이었다. 수고양이가 되어 여러 곳을 쏘다녔고, ‘강호 무림’으로 진출하기 위해 무예만을 갈고 닦았다. 하지만 나보다 덩치가 큰 진돗개가 많이 살고 있어서 주위를 살펴봐야만 했다.
대학교의 출발은 파란색이었다. 치타가 되어 전속력으로 달려보고, 여러 곳을 쏘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무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자와 호랑이가 있어서 항상 경계하여야 하고 때에 따라 ‘맞짱’도 감수해야 함을 알았다.
사회생활의 출발은 무지개색이었다. 동물이 아닌 인간으로 돌아와 바라본 무지개는 너무 멋있어 보이고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매일 바라보니 싫증도 났다. 그래서 일곱 색깔의 무지개를 떼어내서 나누어 미시적(微視的)으로 들여다봤다. 햇빛은 물이나 수정을 통과하면 가시광선이 무지개색으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감마선, X선, 자외선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북극에는 더 화려한 움직이는 무지개 ‘오로라’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희망과 자유, 이상 세계로 통하는 무지개는 ‘자연현상’일 뿐이고, 행복의 메신저는 결코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새로운 출발을 하려면 하던 일을 정리하거나, 보류하거나, 졸업해야 한다. 하던 일을 그대로 하면서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은 말장난일 뿐이다. 출발하려면 사전에 달려갈 거리를 항상 생각해서 체력을 안배해야 하고, 달리는 과정에 작전도 해야 한다.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기초체력도 필요하고, 무엇보다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초등 1학년 운동회 날이었다. 처음 참가해 보는 경쟁의 시간이었다. 누나는 “제일 안쪽 코스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운동장 바퀴를 돌 때 거리를 단축할 수 있다.”라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누나의 도움말이 ‘비법’ 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미처 모를 것이다.”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다. 곧 출발선에 서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친구들 눈치채지 않게 제일 먼저 뛰어가 출발선에 섰다. 그런데 천기가 누설되었는지 6학년 경기보조원 누나가 나를 끌고 바깥쪽에 세우면서 말했다. “키 순서에 따라 출발선에 세우는데, 너는 여섯 명의 출전자 중에 제일 키가 크기 때문에 제일 바깥쪽에 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출발신호에 따라 출발했다. 직선주로에서 커브가 시작되는 지점에 누나가 ‘잘한다’를 외치며 손을 흔드는 것이 보였다. 힘이 더 나는 것 같았다. 나는 전력을 다해 달려서 1등을 했다. 누나의 비법을 활용하지 못했지만, 누나의 응원이 있어서 1등을 했다.
이제는 법적으로 인정하는 출발은 더는 없다. 내 마음대로 출발하는 비공식적인 출발만을 수시로 할 수 있다. 아니 법적인 출발은 작년에 했다. 백수 생활의 출발이다.
어디까지 달려가야 할지 결승점이 보이지 않는다. 별 작전이 필요치 않다. 누나의 응원도 없다. 학교의 졸업식은 미리 정해져 있었는데 말이다. 그 달리기의 마지막 끝내기도 첫 운동회처럼 나의 의지로 하고 싶다. 스위스에서는 마지막 달리기를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도 이미 수천 명이 신청했다고 한다.
나의 의지대로 졸업하고, 나의 의지대로 새 출발 하는 것이 아니므로 ‘염라대왕’이 받아줄는지 의심스럽다. 그날까지 주위를 좀 돌아보면서, 뛰어가지 말고 천천히 걸어가야겠다.
첫댓글 연두새, 노란색, 오렌지색, 진한 초록색, 파란색, 무지개색 그리고 자유의지~너무 좋아요^^
색깔과 시대의흐름 그리고 조화가 어울리는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초등학교 출발에서 백수 시대의 새로운 출발 아마 지금 출발이 가장 자유스럽고 아름다운 결과가 오리라 생각됩니다. 잘 출발해서 멋진 삶이 되도록 응원합니다. 글을 잘 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