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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광명대현령기(光明大玄靈氣)
①
설가장의 서고.
그곳에는 고금(古今)을 망라한 온갖 기문벽서(奇文僻書)들이 꽉 차 있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이곳에도 없다니......."
구석진 서가를 뒤적이던 백천강이 중얼거렸다.
그가 설가장에 머물게 된 지도 어언 반 년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그는 일곱 개의 서고를 모두 뒤졌다. 그러나 그가 찾는 대혈륜서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서고에 있는 수만 권의 책은 대부분 학문에 관한 책뿐이었다. 그 와중에서 하나 얻은 것이 있다면 서고를 정리하면서 수많은 책을 읽었다는 것이었다.
이미 백천강의 학문 경지는 대학자가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원래부터 초인적인 기억력과 오성(五性)을 천부적으로 타고 났던 것이다.
이미 그는 서가의 책을 모두 섭렵한 뒤였다.
하루 중 반나절은 해변 암초 위에서 도법(刀法)을 연마했고 나머지 시간은 오직 책을 읽는 데만 몰두했다. 따라서 그의 지식은 나날이 박학해져 갔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그의 가슴 깊숙이 숨어 있는 증오심과 한은 시간이 흐를수록 지식과 비례하여 더욱 쌓여가기만 하고 있었다.
"......!"
백천강은 일곱 번째 서고에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한 권의 책을 뽑아 들었다.
<천추승기어도록(天秋勝機御道錄)>
그것은 난해하기 그지없는 도학(道學)에 관한 책이었다. 그러나 백천강은 조금도 지체없이 책장을 넘겼다.
그의 머리 속에는 이미 수만 권의 학서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력이 있었으므로 천추승기어도록을 읽는 것은 조금도 어려울 것이 없었다.
그때였다.
스스스.......
그의 등뒤로부터 한 인영이 안개처럼 나타났다. 바로 설가장주 설붕비가 환영분광(幻影分光)의 신법으로 소리없이 나타난 것이다.
설붕비는 백천강이 넋을 잃은 채 읽고 있는 책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불과 반 년 동안에 이 아이는 본 설가장의 학서를 모두 읽었다. 실로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 아이야말로 천고기재(千古奇才)다. 아... 그러나.......'
다음 순간 설붕비의 노안에 어두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책읽기에 여념이 없는 백천강을 내려보며 내심 탄식을 금치 못했다.
'아... 이 아이의 내면에는 무서운 마성이 도사리고 있다. 이 아이는 장차... 어쩌면 대살성(大煞星)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문득 설붕비의 얼굴에 서릿발같은 살기가 어렸다. 그는 소리없이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차라리 지금 죽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情)을 끊음으로써 무림을 구할 수 있다면 지금이 가장 적기다.'
부르르.......
설붕비의 흰 수염이 가늘게 떨렸다.
그의 일수에 백천강의 생사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설붕비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엇인가가 자꾸만 그의 결심을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내려칠 것인가? 말 것인가?'
설붕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내 천추승기어도록을 모두 읽은 백천강이 책을 덮으며 돌아섰다.
팟!
그 순간 유령처럼 설붕비의 모습은 사라졌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서실.
설붕비는 백미를 잔뜩 찌푸리며 한 점 허공을 응시했다. 천장에 야명주(夜明珠)가 박힌 서실은 대낮처럼 환했다.
'그 아이가 이곳에 온 것은 반드시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 더군다나 그 아이가 연마하는 도법, 그것은 살인만을 위한 도법이다.'
설붕비는 이미 백천강이 도법을 익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한 점 허공을 응시하던 설붕비가 눈을 돌려 정면의 벽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새하얀 벽에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외경(畏敬)스럽게 만드는 천축국(天竺國)의 만다라(曼茶羅) 한 폭이 걸려 있었다.
만다라의 중심을 응시하던 설붕비가 중얼거렸다.
"그 아이의 몸 속에는 무서운 마기가 흐르고 있다. 만일... 그 마기를 몰아낼 수만 있다면 그 아이는 살성(殺星)에서 무림의 구성(救星)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큰 모험이다."
부르르.......
설붕비의 하얀 수염이 가늘게 떨었다. 잠시 후 그는 수중에 든 한 권의 책자를 내려 보았다.
<제마천무심법기해(制魔天武心法氣解)>
책자를 내려다보던 설붕비의 안색에 수시로 갈등의 빛이 어렸다.
"이것은 본문의 최상승 비공(秘功)이다. 과연 이것을 그 아이에게 익히게 해서 마기를 억누를 수가 있을 것인가?"
이렇게 중얼거리던 설붕비가 입술을 깨물더니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만약... 마기를 억누를 수가 없다면 이것은 오히려 대살성에게 날개를 달아주게 되는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하늘의 뜻(天意)에 달린 일이다."
설붕비는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는 눈을 뜬 후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②
백천강은 여덟 번째 서고에서 마지막 서가의 마지막 번째 책(冊)을 빼어들었다. 어느덧 사경(四更)도 중간을 넘어선 시각이었다.
주위는 적요하기 짝이 없었다.
귀뚤... 귀뚜르르르.......
서고 밖으로부터 늦가을의 풀벌레소리가 가는 계절을 아쉬워하듯 처량하게 울어댔다. 그러나 백천강의 귀에는 가는 세월을 아쉬워하는 풀벌레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것만 읽으면 다 읽는 셈이다."
그는 책의 표지를 살펴보았다.
<제마천무심법기해(制魔天武心法氣解)>
그 순간 백천강은 흠칫 놀랐다. 이제껏 본 책과는 너무나 틀린 이름 때문이었다.
그는 급히 책장을 넘겼다.
"......!"
그의 준미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첫 장에는 웅휘한 필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 항마멸사(抗魔滅邪)에 뜻을 두고 광명정대한 천하의 정공(正功)을 모아 그 힘을 합쳐 멸사지공(滅邪之功)을 남긴다.
천하마공은 인륜을 파하고 악을 뿌리는데 그 뜻이 있다면 천하정도인들은 정혈(正血)을 바쳐 멸사지법을 이루어야 한다. 정도의 힘을 모아 천하백도제파 삼백육십 문을 의문(義門)에 들게하니 이를 제마천문(制魔天門)이라 한다. 제마천문은 난세가 도래할 때마다 출세하여 멸사행을 이루리라.
제마천문비학(制魔天門秘學) 중 기본이 되는 제마천무심법을 남기노라. 이는 파사현공(破邪玄功)으로서.......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제마천문(制魔天門).
그것은 바로 십칠 년 전 대마성을 붕괴시킬 때 무림정도맹을 도왔던 신비문파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그런 제마천문의 비학(秘學)이 바로 설가장에 비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
백천강은 미동도 없이 제마천문심법기해에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무림사 이래에 유례가 없는 심법이었다.
불(佛), 도(道), 속(俗), 유(儒).
제마천문심법기해는 천하 모든 분야의 광명정대한 심법을 융합시킨 것으로 지극히 넓고 허허로우며 현기무궁(玄氣無窮)한 절대지고(絶對至高)의 심법이었다.
"이런 책이 서가에 꽂혀 있다니......!"
백천강은 경이로움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설붕비가 일부러 그 책을 꽂아두었을 줄이야 어찌 꿈엔들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무튼 백천강에게 있어서 그 책은 물고기에게 꼭 필요한 물과도 같은 소중한 책이었다.
백천강은 혈정단의 복용으로 체내에 마기와 함께 근 일백 년 가까운 내공을 갖고 있었다. 다만 심법(心法)을 익히지 못했기에 그 내공을 운용하기 못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손에 넣게 된 제마천문심법은 그에게 있어 가뭄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
백천강은 희열을 느끼며 즉시 제마천문심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초인적인 혜지와 오성을 가지고 있던 그는 책을 손에 잡은 지 반 시진도 못되어 제마천문심법의 오의를 완전히 터득했다.
제마천문심법.
그것은 광명대현령기(光明大玄靈氣)라고 불리기도 했다. 광명대현령기는 마를 비롯하여 사, 악, 요(妖) 등 모든 사마지공을 제압하는 힘이 있었다.
백천강은 마침내 광명대현령기의 구결(口訣)을 외운 후 그 자리에 정좌했다. 뒤이어 그는 즉시 연공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광명대현령기는 그 특징이 바로 정(靜)에 있었다.
"......!"
마치 부처의 미소와도 같은 고요한 정기가 백천강의 얼굴에 어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지그시 내려 감은 백천강의 전신에서 뿌연 서기(瑞氣)가 어리기 시작했다. 정녕 놀라운 일이었다.
단 한 번 운공했을 뿐인데도 그의 몸에서 서기가 어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파사지기(破邪之氣), 즉 광명대현령기였다.
그의 몸이 서기에 둘러싸이자 놀랄만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성으로 가득 찼던 그의 몸에 지극히 엄숙하고 숙연한 기도가 풍긴 것이다.
그것은 이제까지 백천강의 몸에서 느껴졌던 냉막함과 섬ㅉ한 기운을 감쪽같이 몰아내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아!"
불현듯 백천강의 뒤에서 기쁨과 안도에 찬 탄성이 들려나왔다. 탄성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설붕비였다.
신형을 감추고 줄곧 백천강을 지켜보고 있던 설붕비의 노안에 기쁨이 어렸다.
'성공이다. 저 아이는 이제 제마천문심법의 광명대현령기로 인해 차츰 마기를 씻어낼 수 있을 것이다.'
설붕비의 입가에 대단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흘렀다. 그는 돌아서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되면... 나 설붕비는 저 아이를 본문의 후계자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노기인(老奇人) 설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사라져 갔다. 그로부터 얼마나 지났을까?
스스스......
한동안 전신을 감싸고 있던 서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며 백천강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는 지극히 평화롭고 고요한 표정이었다. 얼굴에는 털끝만치의 사기(邪氣)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그는 입을 열었다.
"이제야 머리 속에 안개가 걷힌 기분이다. 내공심법이 이토록 중요한 것인 줄 지금껏 모르고 있었다니......."
그는 지금 머리가 지극히 맑을 뿐 아니라 전신에 무궁한 힘이 골고루 느껴지는 상태였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제껏 이해되지 않던 삼초 도식의 막혔던 부분까지 환히 떠오르는 것이었다.
광명대현령기의 심오한 힘이 백천강의 심지를 맑게 하고 지혜를 북돋운 것이었다. 마침내 백천강은 손에 들고 있던 제마천무심법기해를 서가에 꽂았다. 그리고는 자신의 품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꺼냈다.
<소녀미향탈심대법(素女迷香奪心大法)>
바로 그의 모친인 백수련에게서 얻은 책이었다.
"이제는 이것을 익힐 수가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내공을 익히지 못해 구결만 습득했을 뿐인데 이제야 완전히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천강은 소녀미향탈심대법의 한 구결을 암송했다.
"사환영겁소(邪幻永劫笑)."
그것은 소녀미향탈심대법의 소공(笑功) 중의 하나였다. 구결을 암송하며 백천강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참으로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졌다.
창백하도록 얇은 백천강의 입가에 참으로 신비한 미소가 어린 것이다. 만일 누군가 그 자리에 있어 백천강의 미소를 보았다면 그는 삽시간에 그 미소의 마력(魔力)에 이끌려 넋을 빼앗기고 말았을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마력적인 미소였다.
만일 설붕비가 그 미소를 보았더라면 그만 기절초풍을 하고 말았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마천문의 심법비학을 넘겨준 것을 뼈저리게 후회했을 것이다.
"후후후... 백천강아, 너는 결코 잊지 않았겠지? 천하가 다 너의 적이오. 원수라는 것을......."
문득 백천강의 입에서 끔찍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로부터 얼마 후 웃음을 거둔 백천강은 저주의 눈빛을 흘리며 소녀미향탈심대법을 품 속에 집어 넣었다.
③
흑웅(黑熊).
이름이 흑웅인 그는 몸집이 컸다. 자그만치 구 척이 넘는 키에다가 얼굴마저 검었다. 하지만 생김새와는 달리 그는 곰처럼 우직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쐐액!
파공성을 내며 허공을 가른 도끼가 한아름이나 되는 통나무에 떨어졌다.
파악!
경쾌한 소리를 내며 통나무는 여지없이 두 쪽이 났다.
설가장의 후원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는 흑웅은 삼십 세 정도의 중년인이었다. 그는 설가장의 하인으로 몹시 과묵한 성품이었다.
팍!
이번에는 팔뚝만한 굵기의 장작이 여지없이 정확하게 두 조각이 났다.
흑웅이 휘드르는 도끼는 무게가 삼백 근이나 나가는 거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흑웅은 그 철부(鐵斧)를 가볍게 휘두르며 조금도 힘들지 않게 장작을 패는 것이었다.
"......."
언제부터였을까? 흑웅이 장작을 패는 곳으로부터 삼 장 떨어진 거리에서 흑웅을 바라보는 백천강의 눈에서 기광이 흘렀다.
'흑웅, 저 자는 신력(神力)을 지녔다.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불현듯 백천강의 눈이 빛났다. 또다시 철부가 파공성을 내며 떨어졌다.
"......!"
그 순간 백천강은 보았다.
흑웅의 거대한 철부가 장작을 향해 떨어지는 순간 놀랍게도 철부의 끝이 장작에서 한 치 가량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작이 쫙 갈라지는 것을.
그것은 새로운 발견이었다.
'흑웅은 일신에 보이지 않는 무공을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설가장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쌍봉도의 어부들까지도... 그들은 결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의 발견은 옳았다. 그는 쌍봉도가 예사로운 섬이 아니라는 것을 확연히 깨달았다.
쌍봉도의 도민은 약 사백 명 정도였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지극히 평범한 어부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가공할 비밀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쌍봉도의 사람들 모두 일신에 가공할 무공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광명대현령기를 익힌 후부터 안력(眼力)이 전에 비할 바 없이 좋아진 백천강이 마침내 그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머지 않아 반드시 비밀을 밝혀내고 말리라.'
백천강은 내심 기소를 흘렸다. 흑웅을 지나친 그의 발걸음이 후원 사이의 소롯길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후였다.
월동문을 지나자 취월헌(翠月軒)이 시퍼런 동백림 사이로 드러났다. 취월헌은 바로 설씨 자매가 기거하는 곳이었다.
삘리리... 삘릴리리.......
적음(笛音).
사람의 애간장을 녹일 것만 같은 적음(笛音)이 취월헌 너머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취월헌으로 다가가던 백천강의 눈썹이 흔들렸다.
'화영(花英)의 기분이 몹시 울적한 모양이군.'
백천강은 설화영의 얼굴을 떠올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설화영은 경국지색의 미모는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서늘한 눈매가 보는 이들의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은 정말 신비감을 간직한 푸른 호수같았다.
하지만 백천강의 얼굴은 곧 딱딱하게 굳어졌다.
"나는... 여인을 증오한다."
싸늘하게 내뱉은 백천강이 곧바로 돌아섰다.
백천강의 가슴에 못박힌 한. 그것은 모친인 백수련이 불륜(不倫)을 맺는 광경에 연유한 것인지도 몰랐다.
바로 그 순간 적음이 뚝 끊기더니 설화영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가가(哥哥), 왜 발길을 돌리시는 거죠? 이 화영이 보기 싫어서인가요?"
"......!"
그녀의 음성을 듣고 걸음을 멈추는 백천강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사악하다는 말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무척이나 신비로우면서도 괴이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평상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낭랑하게 입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내가 화영을 싫어하겠소?"
"호호.... 소매는 가가가 오기를 애타게 기다렸어요."
백천강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화원.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화원에는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했다.
때는 어느덧 늦가을이었다. 중원의 낙양에는 이맘때면 첫눈이 내려 산과 들을 하얗게 덮을 시기였으나 동해의 쌍봉도는 뜻밖에도 온화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각양각색의 꽃 사이로 이어진 소로 끝에 인공으로 만든 아담한 연못이 있었다. 그 연못 한가운데 정자 한 채가 그림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화영정(花影亭).
꽃그림자가 물 속에 어른거린다는 말은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런 화월정의 난간에 연남빛 교의를 입은 소녀 하나가 교태로운 자세로 기대 서 있었다.
맑으면서 서늘한 한 쌍의 눈이 가까이 다가오는 백천강을 응시했다. 그 눈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날 기다렸다니 무엇 때문에?"
백천강이 연못을 가로지른 반월교를 지나 화영정에 오르며 물었다. 설화영은 취옥적(翠玉笛)을 만지작거리며 생긋 웃었다.
"소매는 가가만 보면 항상 기쁜 걸요?"
"그럴 리가.... 나보다 좋은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텐데......."
그때였다. 돌연 설화영의 음성이 젖어들었다.
"가가. 말을 돌리지 마세요. 화영은 가가가 처음 쌍봉도에 왔을 때부터......."
"......?"
"가가를 운명처럼 따르려고 결심했어요."
"......!"
백천강은 흠칫했다. 그녀의 손 때문이었다.
취옥적을 거머쥔 설화영의 섬섬옥수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지 못하는 것이 분명했다.
"소매를 경박하다 탓하지 마세요. 가가에게 향하는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는 걸요."
"......!"
다음 순간 백천강의 가슴이 뭉클했다. 주체할 수 없다는 듯이 가늘게 떨리는 설화영의 손. 그 손길의 서늘한 부드러움을 백천강은 정녕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기억해냈다.
쌍봉도에 도착한 그가 칠 주야를 혼미 속에서 깨어나 처음 느낀 손길을. 그 손길은 서늘했으나 한없이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설화영은 밤을 새워가며 그를 보살폈던 것이다.
때로는 백천강의 가슴에 옥용을 묻고 잠든 적도 있었다. 백천강이 어떻게 그러한 설화영의 손길을 잊을 수 있겠는가?
눈과 눈이 허공에서 얽혔다.
서늘하고 깊었으나 한없는 이야기를 간직한 눈 한 쌍과 무정하기 짝이 없는 눈 한 쌍이 얽힌 것이다.
"화영은 가가를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마음을 정(定)해 버렸어요."
설화영의 얼굴은 술에 취한 듯 붉었다.
미녀의 옥용이 붉어지는데야 어찌 사나이 철심이 녹지 않겠는가? 마침내 백천강의 눈빛에 약간의 온기가 돌았다.
"가가께서 일신에 어떤 기구한 사연이 있는지는 소매는 몰라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매의 마음이에요."
"화영."
백천강이 부드럽게 화영을 불렀다.
"네. 가가......."
"후회할 것이다."
부드러운 백천강의 말투에 설화영이 아름답게 웃었다.
"후회해도 좋아요. 가가의 마음만 녹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아요."
"화영!"
"......!"
다음 순간 설화영이 백천강의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머뭇거리던 백천강이 그녀의 교구를 살며시 안았다.
"아... 가가의 가슴은 넓어요. 소매는 마치 넓은 하늘에 안기는 기분이에요."
"나는......."
"소매는 항상 동경해 왔어요. 멋진 왕자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넓은 중원의 절승지(絶勝地)를 유람하는 것을 말이에요."
"내 몸에는......."
"그 어디라도 좋아요. 가가와 함께라면 설사 끊는 물 속... 또는 검림(劍林)이라도 즐거이 동행하겠어요."
"피비린내 나는......."
"가가의 모습에서는 항상 뼈저린 고독이 뭉쳐 있죠. 소매는 그 고독을 풀어드리고 싶은 거예요."
"후회할 것이다."
"소매는 후회하지 않아요. 소매는 어려서부터 줄곧 이 쌍봉도에서만 살아왔어요. 바깥 세상은 아무것도 몰라요. 다만 분명한 것은 어머니와 아버님의 뜨거운 피가 제게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에요."
"......."
설화영의 눈이 꿈꾸듯 몽롱해졌다.
"소매의 부모님 얘기를 해드릴까요?"
"......."
"제 아버님은 제 십오대 쌍봉도주(雙峯島主)가 되실 분이셨어요."
설화영의 취한 듯한 음성이 얼음장같은 백천강의 가슴을 뚫고 봄처럼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④
설인영(薛仁英).
쌍봉도의 제 십오대 도주가 될 영기발랄한 청년인 그의 운명은 빛나는 성좌(星座)처럼 확실했다.
그러나 대중원을 휩쓰는 피의 바람에 애정의 향풍이 실리면서 그의 운명은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했다.
그 일은 바로 십칠 년 전에 일어났다.
공포와 전율의 집마부(集魔府)인 대마성(大魔城)과 정도 무림맹의 한 판 승부가 벌어지던 때였다. 중원에 대혈풍이 불어닥칠 때 쌍봉도의 사백여 도민은 중원으로 출항했다. 정의라는 고기를 건지기 위해서였다.
싸움은 처절했다. 하늘도 흔들리고 땅도 흔들렸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목숨들이 피꽃(血花)을 토하며 스러져 갔다.
그런 와중에 설인영은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화수옥(花水玉)이란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여염집의 여인도 아니었고 정도무림맹의 여인도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뜻밖에도 그녀는 대마성의 여인이었다.
악의 꽃(惡花)이라는 별호로 불리웠던 화수옥.
운명은 잔혹했다. 결국 하늘은 설인영과 화수옥을 애정의 연못에 빠트리고 말았던 것이다.
선과 악의 기로에서 남녀는 부침했다.
설인영은 화수옥의 검을 가슴에 맞으면서 화수옥의 마음을 얻었고 화수옥은 설인영이 내민 사랑이라는 쓰디쓴 약을 먹으면서 사문(師門)으로부터 육신이 찢기는 고통을 당하고 만 것이다.
마침내 대혈풍의 막이 내리자 쌍봉도의 어부들은 정의라는 고기를 안고 섬으로 돌아왔다.
화수옥과 설인영은 상처투성이의 육신으로 섬으로 돌아와 얼마 남지 않은 생의 보금자리를 꾸몄다.
그들이 함께 한 기간은 오 년이었다. 짧다면 섬광(閃光)보다도 짧고 길다면 영원보다도 긴 그 오 년 동안 그들은 두 딸을 낳았다.
그 두 딸이 바로 설화영과 설운정 자매였다.
그런 연후 그들은 손을 잡고 나란히 세상을 떠나갔다. 부서지는 파도에 그들의 뜨거운 육신은 한 줌 재가 되어 흩어졌던 것이다.
"화영......."
백천강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뜻밖에도 그는 가슴이 젖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백천강의 품에 안긴 설화영이 눈물로 그의 가슴을 적신 것이다.
"저에게는 부모님의 뜨거운 피가 면면히 흐르고 있어요. 그러기에 가가와 함께 한다면 어떤 일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화영."
백천강은 손을 들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쓸었다. 차갑고 고독했던 그의 가슴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백천강의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던 처절한 한과 증오심이 꿈틀거리며 솟아 올랐다.
"화영."
"......?"
"난 화영을 받아들일 자격이 없는 몸이오."
백천강의 말에 설화영은 가슴에 묻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자격같은 것은 필요없어요."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화영을 받아들인다고 말해 주세요. 네?"
"만일 내가 목적을 이룬다면......."
"화영의 마음은 이미 결정되었어요."
"나는 이곳을 즉시 떠날 것이다."
"소녀 또한 가가를 따를 것이에요."
백천강의 싸늘한 말투에도 설화영은 막무가내였다. 다음 순간 백천강이 표독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말해 다오. 지하서고가 어디 있는지를!"
백천강의 손아귀에는 엄청난 힘이 들어가 있었다. 어깨를 잡힌 설화영이 놀란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는 아미를 파르르 떨며 물었다.
"그것이었나요. 가가가 쌍봉도에 온 목적이?"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그렇다. 나는 석가장의 지하서고에서 찾을 것이 있다."
"......!"
설화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한동안 백천강을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지하서고는 오직 조부님만이 열 수 있어요."
백천강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네가 도와준다면......."
"제가 도와준다면?"
"충분히 지하서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
설화영의 얼굴이 그 순간 도화빛이 되었다. 그녀는 급히 되물었다.
"가가. 화영을 믿나요?"
백천강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설화영이 서늘한 눈빛으로 백천강을 올려다보다가 살짝 눈을 감았다.
"부탁이 있어요."
"......?"
"저에게 입맞춤을 해주세요."
눈을 감은 설화영이 고개를 살짝 쳐들었다. 앵두같은 그녀의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난향(蘭香)과 함께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났다.
"오래 전부터 가가의 입김을 가지고 싶었어요."
"......!"
백천강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일방적인 설화영의 정열은 분명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정열은 냉막한 그의 마음을 현혹시키고도 남았다.
결국 백천강은 어쩔 수 없었다. 이성의 유혹을 견뎌낼 재간이 없는, 끓는 피를 가진 한 신체건강한 사내였던 것이다.
"으음!"
두 사람의 입술이 마주치는 찰나 적막 속에서 달디단 꽃향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취월헌의 화원에 핀 백화(百花)가 일제히 꽃잎을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화영정의 누각기둥이 잠긴 연못물에 꽃그림자가 목욕을 했기 때문이었을까? 짙은 꽃내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유유히 수면을 헤엄치던 금잉어란 놈들이 수면에 비친 두 남녀의 그림자를 보는 순간 부끄러운 듯 깊이 가라앉는 것이었다.
"아!"
설화영은 전신을 가늘게 떨며 백천강의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기나긴 입맞춤이 마침내 끝났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에요."
붉게 타오른 얼굴을 감추느라고 백천강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설화영은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어떻게?"
백천강은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치켜세웠다. 농익은 앵두같은 입술이 백천강의 코 앞에 있었다.
살며시 몸을 빼낸 설화영이 품 속에서 한 자루의 비수를 꺼냈다.
"이것은 단정검(斷情劍)이라고 불러요. 정을 끊는 검... 과거 이 단정검으로 어머니는 아버님의 가슴을 찔렀지요."
설화영의 뜻밖의 말에 백천강이 의아해했다.
"그것을 왜?"
"단정검은 결국 어머니와 아버님을 맺어지게 했지요. 이제 이것으로... 가가와 화영을 맺으려 해요."
"그... 그것이 무슨 뜻이지?"
백천강의 의혹은 아랑곳없이 설화영은 단정검을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가가의 최후 목적이 무엇이든간에... 화영은 가가를 돕겠어요. 이 단정검이 가가의 뜻을 이루어 줄 수 있을 거예요."
"......!"
그 순간 백천강의 눈썹 끝이 부르르 떨렸다. 마침내 그는 설화영이 의도하는 뜻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으로 당신을 찌르란 말인가?"
놀란 백천강의 말투에 설화영이 빙그레 웃었다.
"그래요. 가가는 총명한 분이에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임을 잘 알고 계실 거예요."
"화영!"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는 한동안 설화영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토록이나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득 백천강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뜨거운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경험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설화영을 끌어 안았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할 수 있는 것이 여인의 본능이라면 본능이다. 그래서 고래(古來)로부터 여자를 가리켜 여우라고 하는 지도 모르지만.
백천강의 가슴에 파묻힌 설화영이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곧 할아버지께서 오실 거예요. 가가께선 준비를 하셔야 해요."
백천강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어서 검을 제 목에 대세요."
설화영이 나직하면서 조급하게 말했다.
그 순간 백천강의 몸이 굳어졌다. 그는 들었던 것이다. 설붕비의 낯익은 기침소리가 가까이서 들리는 것을. 하지만 그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서요!"
초조해진 설화영이 스스로 단정검 끝에 가녀린 목을 갖다 댔다.
"아악!"
그녀는 날카롭게 비명을 내질렀다. 찰나지간 실같은 핏줄기가 눈부신 목덜미에서 흘러내렸다.
"무슨 짓이냐!"
천둥같은 호통과 함께 선풍(旋風)이 일어났다. 설붕비가 단숨에 능공허도신법(能功虛道身法)으로 날아든 것이다.
"아... 아니, 그게 무슨 짓이냐?"
백천강을 노려보는 설붕비의 흰 수염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설화영을 끌어안은 백천강이 다른 손에 거머쥔 비수로 그녀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천강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천강! 대체 무슨 짓이냐?"
의혹과 함께 분노성이 담긴 설붕비의 추궁이 화영정을 무너뜨릴 듯이 뒤흔들었다. 백천강은 충혈된 눈으로 설붕비를 노려보며 차갑게 입을 열었다.
"더 기다릴 수가 없었소."
"무엇을 말이냐?"
설붕비의 노안이 부릅떠졌다.
"소생이 이곳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요. 더는 기다릴 수가 없소."
"뭐, 뭐라고?"
질문을 던지며 설붕비가 앞으로 한 발짝 다가왔다. 백천강은 싸늘하고 살기띈 음성으로 내처 말했다.
"서시오. 노장주가 무공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소.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가차없이 찌르겠소."
설화영이 창백해진 얼굴 위로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애원했다.
"할아버지! 제발 영아를 살려 주세요!"
"영아야!"
설붕비는 노구를 부르르 떨었다. 백천강을 노려보던 그가 입술을 씹으며 노성으로 물었다.
"그래, 네 놈의 목적이 무엇이냐?"
설화영의 목에서 검을 거두지 않은 백천강이 냉막한 음성으로 말했다.
"지하서고!"
"지, 지하서고라고?"
놀란 설붕비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렇소. 이곳 설가장에 대대로 지하서고가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소. 그곳에 들어가게 해주시오."
"바... 바로 그것이 너의 목적이었느냐?"
"그렇소."
"으음!"
신음성을 토해내는 설붕비의 옷자락이 바람도 없는데 흔들렸다. 분노성이 무의식적으로 강기( 氣)를 일으킨 때문이었다.
지하서고. 그것은 쌍봉도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서고로써 그 위치는 물론이거니와 존재 여부조차도 아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마침내 설붕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뜻밖이었다.
"네 놈은... 노부를 실망시키는구나!"
"......?"
영문을 모르는 백천강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천강을 노려보던 설붕비는 탄식하듯 소리쳤다.
"네가 조금만 더 기다렸어도 노부 스스로 지하서고를 구경시켜줄 작정이었다."
"......!"
"너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노부도 네 놈에게 마기가 잠재하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마기를 없애려고 노력했다. 왜인지 아느냐? 그건 마기만 없애면 너는 장차 훌륭한 설가장의 기둥감이 될 수 있는 재질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순간을 참지 못하고 이런 일을 저지르다니......!"
백천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더 듣고 싶지 않소. 어서 지하서고로 안내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단정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악! 하... 할아버지!"
설화영은 비명을 질렀다. 학같이 매끈한 그녀의 목으로부터 또다시 선홍의 피가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러나 설붕비는 끝내 알지 못했다.
정작 설화영 스스로가 단정검 끝으로 목을 내밀어 피를 내게 하였다는 것을.
"네... 네 놈이 정녕!"
분노가 머리끝까지 오른 설붕비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부르르 신형을 떨었다. 한편 백천강의 마음 속은 깊은 감동으로 가득차 있었다.
'화영. 너는 내게 갚지 못할 빚을 안겨주는구나!'
그렇지만 백천강은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설붕비를 향해 말했다.
"어서 날 지하서고로 데려다 주시오"
"으으음!"
설붕비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온몸을 경련했다.
"흐흑! 할아버지 제발 저를 구해주세요!"
설화영은 눈물을 펑펑 쏟았다. 마침내 설붕비는 체념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 좋다. 노부를 따라와라."
⑤
설붕비가 앞장서 들어간 곳은 자신의 서실이었다. 그는 서실의 중앙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의자에 앉아 왼쪽 팔걸이의 구슬을 세 번 누르면 지하서고의 문이 열린다."
설화영의 목에 검을 겨누고 있던 백천강이 의자와 설붕비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그녀를 이끌고 의자로 향했다. 먼저 의자에 앉은 그는 곧 설화영을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그 광경에 설붕비의 안색이 싸늘하게 변했다.
"영아를 놓아주지 않을 셈이냐?"
백천강은 차갑게 말했다.
"내가 쌍봉도를 안전하게 떠날 때 풀어 주겠소."
"지... 지독한 놈!"
설붕비의 탄성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천강은 왼쪽 팔걸이에 솟아있는 엄지손가락 크기의 구슬을 세 번 눌렀다.
기이이... 잉.......
묘한 음향과 함께 의자가 서서히 왼쪽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번을 돌아 제자리로 온 의자는 멈추지 않고 두 번째 회전을 계속했다.
다시 한 번 설붕비에게 등을 보이게 된 백천강은 내심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인질로 설화영을 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 다음의 일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전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였다. 두 번째로 돌던 의자가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였다.
덜컹!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의자가 아래로 푹 꺼져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앗!'
백천강은 한순간 놀랐으나 곧 정신을 가다듬었다.
의자는 급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머리카락이 쭈빗거릴 정도의 속력이었다. 눈 앞은 그야말로 암흑천지였다. 그러나 지하서고로 처음 내려가는 것이 아닌지 백천강의 무릎에 앉은 설화영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어둠 속에서 청력을 돋구었던 백천강은 곧 안심했다.
의자는 무작정 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의자를 밑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기관장치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각(一刻)의 시간이 흘렀을까? 빠른 속도로 내려가던 의자가 서서히 속력을 줄이기 시작했다.
'이제 다 내려왔나 보군.'
백천강이 내심 중얼거릴 때였다.
덜컹!
쇳소리와 함께 의자가 멈추는 순간 눈 앞이 환하게 밝아졌다. 조명장치도 특이한 것이 분명했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백천강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곳은 방원 십 장이나 되는 거대한 석실이었다. 사면 벽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서가에는 책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실로 방대한 분량의 책이었다.
석실의 천장에는 야명주가 박혀 있어 환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군."
백천강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발했다. 이때 백천강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설화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본문의 비밀 무학서고(武學書庫)예요."
"본문(本門)?"
백천강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되물었다. 서늘한 눈웃음을 머금던 설화영이 나직하게 말했다.
"본문은 바로 신비문파로 내려오는 제마천문(制魔天門)이랍니다."
"제마천문!"
백천강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렇다면... 쌍봉도의 설가장이 바로 광명대현령기에 적혀 있던 비급의 제마천문이란 말인가!'
그는 내심 놀라며 중얼거렸다. 분명 그가 익힌 제마천문심법기해에 제마천문이란 이름이 적혀 있었다.
제마천문.
그 얼마나 놀라운 이름인가? 과거 대마성을 공격할 때 위기에 몰린 무림맹을 극적으로 도운 신비문파인 제마천문이 바로 쌍봉도의 설가장이었다니.
백천강의 놀라움을 짐작했다는 듯이 설화영이 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가도 짐작하셨겠지만... 쌍봉도 사람들은 모두 제마천문의 고수들이에요."
"......!"
"제마천문은 중원에 혈풍이 닥칠 때만 나서야 한다는 문규(門規) 때문에 평소에는 어부로 생활하는 습관이 이어져 내려왔어요."
"으음!"
백천강은 짧은 신음성을 토해냈다. 쌍봉도의 설가장에게 이토록 비밀스런 내력이 숨겨져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이곳의 무경(武經)들은 바로 제마천문의 조사들이 남긴 것들이에요. 뿐만 아니라 이곳은 제마천문주의 후계자들만 들어올 수가 있는 곳이에요."
백천강은 다시 한 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토록 많은 책들이 모두 무공비급이라니... 더군다나 이곳에 들어올 자격을 가진 사람은 오로지 제마천문주의 후계자뿐이라니!'
그는 넋을 잃은 듯이 사방을 에워싼 서가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가가. 가가께서 이곳에 들어오시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느닷없는 설화영의 질문에 백천강은 안색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한 권의 책을 찾기 위해서요."
"한 권의 책? 도대체 어떤 책인데 가가가 그토록 찾으시려 하시는 건가요?"
"대혈륜서(大血輪書)라는 책이오."
백천강의 짧은 대답에 설화영의 안색이 변했다.
"대혈륜서..., 그건 대체 어떤 책이죠?"
백천강은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 어머님의 사문(師門)이 남긴 책이오. 자세한 것은 나도 모르오."
설화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백천강은 서가의 책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서가에는 수많은 책이 꽂혀 있었다. 그것은 모두 무공비급들만은 아니었다.
기문진학(奇門陣學)을 비롯하여 역리성복(易理星卜), 변환역용지학(變幻易容之學) 등 여러 방면의 기서(奇書)들도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백천강은 자신이 찾으려는 대혈륜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최후의 방법은 모든 책을 일일이 살펴보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