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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6 章 女人은 배워야 한다
하나 단엽상의 시선은 이미 그에게서 허공으로 돌려져 있었다.
"나태한 젊은이 보다는 신선한 늙은이가 나에게는 더욱 필요하지……."
---나태한 젊은이 보다는 신선한 늙은이가 필요하다!
스스스!
단엽상의 무심한 독백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 환영(幻影)처럼 한 인물이 나타났다.
전신에 먹물처럼 짙은 흑포(黑袍)를 걸친 노인.
그가 걸친 흑포는 누가 입더라도 땅에 질질 끌릴 만큼 긴 것이었으나 그에게는 무릎도 채
덮여지지 않았다.
흑포노인은 한눈에 보아도 무서우리만큼 으시시한 분위기를 흘려냈다. 게다가 머리에는 괴
상한 관까지 쓰고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한 그루의 고목나무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속하, 대종사를 뵈옵니다."
생긴 것과 같이 음성마저도 비정하고 냉혹하기 이를 데 없다.
단엽상의 무심한 두 눈이 그를 향했다.
"섭궁(攝弓)! 기검하라는 아이를 지켜보게."
"알겠습니다."
"사람은 산(山)에 발이 걸려 넘어지는 경우는 없어도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지는 경우가
많네. 기억해 두게……."
"……!"
흑포노인, 섭궁의 눈이 번쩍 기광(奇光)을 발했다.
그는 이번의 임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깊이 인식했다.
(대종사께서 이제껏 무슨 일을 시키기 전에…… 이런 당부를 하신 적이 없었건만…….)
마마파천황 단엽상이 어떤 점에서 기검하를 이토록 중요시하게 여기는 것인가?
"물러가게."
"존명!"
섭궁은 나타날 때처럼 또 소리없이 사라졌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단엽상은 밖을 향해 나직이 분부했다.
"아씨를 불러오도록 하여라!"
"분부를 받자옵니다."
사르륵!
잠시 후, 옷자락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선 여인의 모습을 어떤 형용사가 있어 설명한단 말인가?
심산유곡의 성(聖)스러운 정화를 받고 피어난 꽃의 화신(花神)인가. 천상(天上)의 옥녀(玉女)
인가. 아니면 마(魔)의 요정(妖精)인가?
천하의 온갖 미(美)를 한몸에 집약시킨 듯한 미소녀!
먼 능선처럼 고운 아미, 정성들여 붙인 듯한 수려한 콧날, 그리고 꽃잎을 베어문 듯한 붉고
윤기 흐르는 입술.
그녀가 꽃이라면 천하가 화중지화(花中之花)이리라. 그리고 그녀가 밤하늘의 별이라면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샛별(慧星)일 것이다.
이지적이면서도 눈(雪)속에 핀 흑매(黑梅)처럼 차갑고 고고한 기품을 전신으로 피어내고 있
는 여인은 누구일까?
---십전냉모란 단금봉!
마마파천황 단엽상의 천금(千金)이다.
십전(十全)이란 별호가 말해주듯 그녀는 지혜는 물론 금기서화(琴技書畵) 등의 칠예(七藝)와
모든 학문에 달통한 천하제일(天下第一)의 재녀(才女)였다.
더구나, 그녀는 단엽상이 계집으로 태어났음을 통탄할 정도로 강한 의지와 무서운 결단력을
가진 여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윽한 방향(芳香)을 몰고온 그녀는 단엽상을 향해 응석부리듯 입을 열었다.
"아버님! 무슨 일로 소녀를 부르셨는지요?"
단엽상의 입가에 그에게서는 종처럼 보기드문 한 가닥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봉(鳳)아야! 기검하란 놈에게서 너를 보내라는 전갈이 왔다."
단금봉의 표정이 약간 어두어졌다.
"알고 있어요."
"그놈은 천하에 다시 없는 호색한(好色漢)이라고 그러더구나……."
단금봉은 씁쓸하게 웃었다.
"어쩔 수 없는걸요. 이미 아버님이 정하신 혼사……."
"그러나 네가 원하지 않는 일이면 신(神)이라도 어쩔 수 없다."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미 쏟아진 물…… 각오는 되어 있어요."
돌연, 단엽상의 안색이 엄숙한 빛을 띄웠다.
"너는 이 애비를 사람들이 무엇과 비교하는 줄 아느냐?"
"……?"
뜻밖에 질문을 받은 듯 그녀는 봉목을 동그랗게 떴으나 이내 담담하개 대꾸했다.
"살모사(殺母蛇)와 비교한다고 들었어요"
그 아버지에 그 딸이었다.
"살모사는 태어날 때, 어미를 죽인 다음 이 세상에 나온다. 이 애비는 네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성인(成人)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쓸데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단금봉은 부친의 음성에서 왠지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며 부친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시대는 난세(亂世)다. 그것도 이 땅이 생긴 이래 가장 강하고 무서운 효웅과 영웅이 항
거하는 열강제국(列强帝國)의 난세다. 이런 난세에서 죽이지 않으면 죽음을 당한다. 일단 유
사시에 부모도 용서치 않아야 된다. 바로 살모사와 같이……."
실로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이었으나 단엽상의 표정은 지극히 담담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욱 그를 사상최강의 승부사라 일컫는 것일게다.
단금봉은 그런 부친을 직시하며 내심 뜨거운 침을 삼키고 있었다.
(도대체 아버지는 얼마나 무서운 말씀을 하시려고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것일까?)
단금봉의 생각은 적중했다. 단엽상의 입에서는 실로 뜻밖의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아내를 세 번 가졌다. 첫 번째가 내가 모시던 주인, 마백수(魔魄手)의 애처 주설란(朱
雪蘭)…… 나는 그녀와 밀통(密通)을 한 후 마백수를 죽이고 또 그녀 역시 이용가치가 없어
지자 죽여버렸다."
"……."
단금봉의 얼굴에 놀라움과 더불어 강한 불신의 빛이 어렸다.
그러나 그녀는 부친이 절대로 어떤 상황하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마마파천황 단엽상은 당대의 효웅이나 결코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어떤 비정하고 가혹한 일이더라도 그는 한 번도 숨기는 일이 없었다.
한 마디로 어떤 겉치레나 형식적인 관념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는 일
은 언제나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가장 무서운 점이었다.
상대는 단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으며, 그에게 반항하는 순간부터가 바로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전대의 흑도대종사였던 지옥마제(地獄魔帝)의 처 파초염후(芭蕉艶后) 반교교(潘
嬌嬌)였다."
"……."
"당시 그녀는 이미 임신한 몸이었고, 지옥마제를 죽이기 위해 그녀와 밀통했다. 가장 손쉽게
흑도를 장악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었다. 세 번째가 바로 너를 낳은 여인이다. 아울러……
이 애비가 난생처음으로 사심없이 받아들인 유일한 여인이기도 하다."
"……."
단금봉은 내내 침묵을 지켰다.
"그런 너의 어머니는 죽고…… 너만 이제 나에게 유일한 혈육이요, 그 무엇보다도 귀중한
보물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단금봉의 입가에 가느다란 의미를 알 수 없는 매우 모호한 미소가 파문
처럼 일었다.
"평소의 아버님답지 않으시군요. 이제 저에게 진짜로 말씀하시고 싶은 것을 하도록 하세요."
단엽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아무 말없이 한 자루의 비수(匕首)를 꺼내놓았다. 끝이 악마의
이빨처럼 양 갈래로 갈라진 기형(奇形)이었다.
섬뜩하도록 시퍼렇게 광망을 발하고 있는 비수의 손잡이에는 노란 수실이 달려있었다.
"……?"
단금봉의 시선이 비수와 단엽상을 한차례 왕복할 때 단엽상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창랑금도(愴狼金刀)! 하늘의 신마저도 죽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신병암기다. 지금부터 네
가 지니도록 해라."
"아토록 귀한 것을 저에게 주시는 뜻은……."
단엽상이 비정하게 웃었다.
"기검하! 그 놈은 잠룡(潛龍)이다. 하나…… 언제까지 잠룡으로 지낼 놈이 아니다. 기검하!
그놈이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네 손으로 직접 그놈을 이 창랑금도로 죽여라!"
단금봉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빛내며 마마파천황 단엽상을 주시했다.
"아버님은 강해요. 설혹 백련대황교라 할지라도 아버님을 어쩌지 못해요. 한데…… 아무런
힘도 없는 한 소년에게 그토록 신경을 쓰시는 이유를 소녀는 알 수가 없군요."
"사람은 태산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없다, 하나 작은 돌멩이에 걸려 넘어진다. 조그만 일에
소홀한 자는 결코 큰 일을 이룰 수 없는 법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마마파천황 단엽상이야말로 단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완벽한 승부사가 아닌가?
단엽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금봉은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
"무엇이냐?"
"저는 아직 남자를 몰라요. 저는 그를 섬기는 동안 어쩌면 그를 사랑하게 되어 찌를 수 없
게 될지도 몰라요."
"나도 강요하진 않겠다."
단금봉의 야릇한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게 되어…… 아버님에게 빈틈이 보일 때 그에게 권해 아버님을 치게될
지도 모르죠. 그때는 오히려 이 창랑금도가 아버님을 찌르게 되는 결과가 될지도 몰라요. 그
래도 좋으신가요?"
실로 당돌한 말이었다. 그러나 마마파천황 단엽상은 호쾌한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좋아, 좋아……! 아주 마음에 드는 말이다. 역시 단엽상이 딸 하나는 제대로 키웠
다. 하하하……!"
그는 오랫동안 호쾌하게 웃었다. 그는 정말 유쾌한 것 같았다.
그가 이토록 기분좋게 웃어본 것은 아마 수십 년 이래 처음일 것이다.
"강한 자는 이기고…… 빈틈이 있는 자는 진다. 이것은 난세의 철칙! 다른 사람에게 칼을 맞
느니 너에게 맞는 것이 가장 통쾌한 죽음일지도 모르지. 하하하!"
그는 그답지 않게 흥분까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네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나 역시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언제든지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이예요, 아버님!"
단금봉은 미소를 지으며 야무지게 대꾸했다.
"하하하……! 하나, 아직 너는 나의 사랑하는 딸…… 오늘 밤은 부녀지간에 마음껏 취해보
자."
"네, 좋아요!"
실로 알 수 없는 부녀지간이었다.
아무튼 풍운은 이렇게 얽혀가기 시작했다.
* * *
지금 정자에는 쏟아지는 달빛 아래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일노일소로 적노와 기검하
였다.
적노는 여느 때와는 달리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전신에서는 무형 중에 상대를
찍어 누르는 듯한 위압감과 장중한 위엄이 뻗쳐나오고 있는 것이 일대종사가 아니고서는 결
코 흉내낼 수조차 없는 막대한 기세였다.
적노가 묵직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 예전에 이 늙은이에겐 한 가지 신분이 있었습니다."
"……."
기검하는 긴장된 얼굴로 적노의 얼굴을 직시했다.
(할아버님이 말한 적은 없어도 나는 짐작을 하고 있었어. 결코 아버님에 비해 뒤지지 않는
인물임을…….)
적노의 두 눈에 맑은 정광이 쏟아졌다.
"백 년 전, 세인들은 저를 가리켜 고검만리향(孤劍萬里香) 적자혁(赤磁爀)이라 불렀습니다."
"할아범이 고검만리향 적자혁……."
기검하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그가 추측하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놀랍고 엄청난 명호가 귓전을 때린 것이다.
---고검만리향 적자혁!
백 년 전 이 이름 위에 올려놓은 이름은 그 당시 없었으니 속세에 살아 있는 전설이요, 흐
르는 구름 같은 존재였다.
그에 대한 비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나 그의 모든 것이 철저한 신비에 가려 있었
다.
단지 세인들은 한 가지만은 영원히 기억할 뿐이다.
---고검만리향 적자혁! 그는 세 가지 향기를 지닌 지상최고의 신비객이다!
그에게는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세 가지 향기가 있었다.
첫 번째 향기는 죽음의 향기(死香)다.
그에게 있어 강함은 절대고수 구백구십삼 인의 죽음을 대신한다.
그들은 고검만리향 적자혁의 첫 번째 향기를 믿지 않았다.
하나 그의 강함을 의심한다는 자체가 곧 죽음이었다.
두 번째 향기는 바로 사랑의 향기(愛香)다.
그이 앞에서 감히 누가 여인과 풍류를 논할 수 있겠는가. 없었다. 그의 희미한 미소 하나에
불심으로 무장한 여승이 스스로 승포를 벗어 던졌다.
어디 그 뿐인가. 그의 고독한 눈빛 하나에 청상과부가 기꺼이 만인의 멸시를 감수하고 목숨
처럼 지켜오던 수절을 깨뜨렸다.
그의 싸늘하고 무정한 한 마디에 수많은 강호의 여인들이 눈물 속에 목을 매달았다.
그는 진정 사랑의 마술사였다.
---아름다운 미인을 가진 세상의 사내들이여 그 이름을 기억하라!
고검만리향 적자혁!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 어느 때든 그녀를 훔쳐갈 수 있을지니.
세 번째 향기는 바로 진실(眞實)의 향기다.
그는 위선(僞善)을 가장 싫어했다.
스스로 위선의 탈을 쓴 채 영웅협사임을 자처하는 간악한 자, 자신의 부와 천세를 도구로
쾌락과 정복을 탐한 자, 그러한 위선자들의 숨겨진 비리(非理)는 여지없이 파헤쳐졌다.
그리고 위선자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과 파멸 뿐이었다.
죽음…… 사랑…… 진실…… 그리고 향기로 대변되는 신비의 최강자 고검만리향!
그는 곧 무림유일의 집법자(執法者)였다.
하나 십육 년 전 그의 향기는 홀연히 강호에서 사라졌다.
그 신비의 향기가 바로 적노였다니!
적노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육 년, 공자님은 저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익히셨습니다. 특히 제가 공자님에게 심혈을 기
울인 것은 여인에 관한 것…… 그 이유를 아십니까?"
기검하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련대황교는 지상의 모든 것을 정복했지. 무림, 권력, 황궁, 심지어는 종교까지도…… 그러
나 단 한 가지 정복하지 못한 것은 여인이지."
"……."
"여인은 결코 힘으로 정복되는 동물(動物)이 아니니까…… 여인! 나약하게 보이나 그 힘은
절대적인 것, 여인을 정복할 수 있다면 능히 그 어떤 힘과도 대항할 수 있다. 백련대황
교…… 백련대황교에도 여인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하나 여인을 완벽하게 정복하지 못하면 오히려 패가망신을 당하는 법입니다."
적노는 비감의 표정을 떠올렸다.
"그 훌륭한 예가 바로 이 늙은이와 같은 경우입니다."
기검하는 나직이 신음했다.
(으음…… 적노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지는 모르지만 그 원인이 바로 여인이었다니…….)
기검하는 문득 구름 같은 의혹을 느꼈다. 그 순간 새삼스럽게 육 년 전 고금제일신의 구유
수명사가 들려주던 말이 뇌리를 스쳐갔다.
---혈주! 조개집 냄새로 찌든 놈은 전신이 박살나고 성기까지 거세당한 채 죽은 놈이었습
니다.
고검만리향의 처절한 한을…… 또한 그 한으로 인하여 향차 중원대륙이 엄청난 피바람에 휩
쓸리는 것을 누가 짐작이나 하랴.
적노는 격정을 애써 억누르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공자님이 이제껏 대한 여인들은 하잘 것 없는 여인들에 불과합니다. 이제 그런 여인들과는
질적(質的)으로 다른 한 여인을 정복(征服)하셔야 합니다."
"……?"
"그녀의 이름은 난향대부인(蘭香大夫人) 적설염(赤雪艶)! 이 늙은이가 이 세상의 어떤 사내
도 유혹할 수 없게 키워온 여인입니다."
기검하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세상에 어떤 사내도 정복할 수 없는 여인이라…… 설마 할아범이 석녀로 키웠을 리는
만무하고……?"
"그녀가 석녀인지 아닌지는 공자님이 직접 만나보면 아실 것입니다. 공자님은 바로 그녀를
정복해야 비로소 여인을 완전히 정복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험인가?)
기검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 세상의 어떤 여인도 유혹할 수 있는 사내와 어떤 사내도 유혹할 수
없는 여인과의 승부!
과연 그 결과는 어찌 될는지 궁금하다.
* * *
인간에 대한 괴사는 많다. 하나 맹세코 이보다 기막힌 인간에 대한 괴사는 없었다.
---난향대부인 적설염!
여인이다. 미치도록 아름다운 여인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마력적(魔力的)이니 뇌설적(腦殺的)이니 하는 따위의 속된 미사여구
(美辭麗句)로는 표현할 수 없는 최고최상(最高最上)의 미(美)였다.
한 번 보면 숨이 막히고, 음성을 들으면 자신의 모든 것을 스스로 내놓으며, 그녀가 한 번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아낌없이 내주게 되는 그런 여인이다.
그리고 그녀는 남자를 한없이 포근하고 편하게 해주는 여인이다.
어머님같고…… 누이같으며…… 때로는 연인처럼…… 친구처럼…… 또 동생처럼 사내를 순
한 양처럼 만드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있어 사내란 그저 말 잘듣는 강아지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없었다.
수천 수만의 사내들이 그녀를 여신(女神)으로 떠받들기를 주저치 않았으며, 그녀에게 맹목적
인 충성을 바쳤다.
그녀는 수만 명의 말 잘드는 인견(人犬)을 거느린 채 뜬 구름 속의 여신처럼 한 채의 그림
같은 전각에서 살고 있었다.
* * *
촉촉한 습기가 배인 밤안개가 야공을 뒤덮고 있다.
딜빛이 교교하게 청심호(靑心湖)를 넘나드는데 어둠을 감싸고 있는 짙은 밤안개가 꿈결처럼
모든 것을 휘감았다.
동쪽에서 청심호를 굽어보며 서 있는 한 채의 전각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실로 한 폭의 그림을 연상케 하는 아름다운 전각 역시 밤안개에 휘감겨 더욱 환상적인 전경
을 연출하고 있었다.
여인!
전신을 백의로 감싼 여인이 홀로 호수를 거닐고 있었다.
아무리 어둠이 짙어도 가릴 수 없는 희디흰 백의, 얼핏 가냘퍼 보이는 몸매지만 한 번 눈을
던지면 도저히 뗄 수가 없다.
구름처럼 둥글게 틀어올린 머리, 귀밑머리에 꽂힌 새빨간 작약(芍藥).
그 새빨간 작약으로 인해 더욱 희고 눈부신 목덜미 등 그녀의 미는 살아 생생하게 숨쉬고
있으므로 더욱 빛을 발한다.
그녀에게는 아무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관능과 요염함이 안개처럼 배
어 있었다.
여인은 밤안개에 전신을 맡긴 채 걷고 있다.
하늘거리는 걸음걸이가 그대로 사내의 숨을 멈추게 하고, 미간 사이로 약간 수심이 그늘진
모습이 사내의 철심을 갈가리 찢는다.
여신의 우아함과 고고한 기품이 향기처럼, 꿈결처럼 전시에 배어 있었다.
여인은 문득 걸음을 멈추어 호수가의 이름모를 야생화를 천천히 꺾어 코로 가져가서 한껏
화향을 들이마셨다.
그 고혹적인 자태…… 단순한 한 동작만으로도 세상 모든 사내들을 황홀한 죽음으로 인도할
수 있으리라!
안개…… 여인…… 그리고 밤은 정말 잘 어울렸다.
이때 한 쌍의 은밀한 눈이 그녀의 한동작 한동작을 놓치지 않고 쫓고 있었다.
(후후…… 사내가 많이 따는 계집이라 그런지…… 온통 사내를 홀리는 냄새로 가득찬 계집
이군.)
눈의 임자는 기검하, 바로 그였다.
(여인의 정복자가 되는 수칙 제 일조는 여자를 증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
절대로 여인에게 빠지지 않는다. 비로소 그 뜻이 실감나는 순간이로군. 썩 괜찮아! 나 기검
하가 정복할 만한 가치가 있어.)
여인은 사내의 시선을 예감으로 느꼈다.
난향대부인 적설염도 기검하의 시선을 의식하고 있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그윽한 방향
이 기검하의 코를 간지럽히고 있었다.
(여우 같은 계집! 어디 할아범이 얼마나 잘 가르쳤는지 시험해 볼까?)
기검하는 숲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그의 발자국 소리를 분명히 듣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기검하는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사내의 피를 끓게 하는 성숙한 여인의 체취가 물씬 그를
휘감았다.
"저…… 부인…… 이것을 좀……."
기검하는 짐짓 말까지 더듬으며 한 장의 서찰을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
난향대부인 적설염의 시선이 천천히 기검하에게로 향했다. 사내의 심혼을 송두리째 빨아들
일 것 같은 눈이다.
"이게 뭐죠?"
"그게…… 서…… 서찰입니다……."
기검하는 소년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래요?"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야릇한 시선으로 그를 훑어보며 서찰을 펼쳐 들었다.
<산고의 외로움을 달래지 못한 한 사나이가 부인에게 드리는…… 중략…… 앉으나 서나 자
나 깨나 그저 부인 생각에…….>
서찰의 내용은 유치해도 보통 유치한 것이 아닌 연애서찰이었다.
여자에 도가 텄다는 기검하가 여자에게 접근하는 첫 번째 방법이 고작 이런 연애서찰이었단
말인가?
기검하의 머리가 어찌 된 것이 아닌지 몰랐다.
"훗……!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어이가 없는지 마침내 어이없는 실소를 터뜨렸다.
그간 수많은 사내들의 접근을 지켜보아 왔지만 이토록 유치한 분홍빛 연서(戀書)는 난생처
음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검하는 내심 흉소를 머금고 있었다.
(흐흐…… 색다른 것에 대해서 계집들은 호기심이 많지…… 특히 사내를 많이 아는 계집일
수록 효과는 더욱 크다.)
이때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이 서찰을 공자가 쓴 것인가요?"
"그렇소이다."
"호호…… 아주 잘생기고 순진한 공자로군요. 나에게는 공자처럼 귀여운 동생이 있었어요."
(귀여운 동생……?)
기검하에게는 금시초문이었으나 그녀는 눈빛까지 아련하게 바꿔가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아주 나를 잘 따랐어요. 한데…… 이렇게 밤안개가 자욱하던 밤에 이 세상을 영
원히 하직하고 말았어요. 생각하면 참으로 가엾은 아이지요."
새빨간 거짓말이다. 사내를 많이 하는 계집은 이렇게 눈물까지 글썽이며 거짓말을 잘하는
것일까. 실제 그런 경우가 있는 여인보다 더욱 슬프게 연기를 잘했다.
이렇게 나오면 제아무리 철담간장의 사내라 할지라도 도리가 없지 않은가?
(후후…… 그럴 듯하게 가르쳐 놓았군. 이 세상 사내들이 얼이 빠진 채 맹종하는 것도 무리
가 아니야.)
차가우면 오기가 생기고 반항하면 꺾고 싶고, 그것이 이 세상 사나이들의 통념이다.
이렇게 어르고 달래면 도리가 없지 않겠는가?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사내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이 아는 여인이었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겠군,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물러서자.)
기검하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이만 가보아야겠소, 부인."
그러자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서찰을 기검하의 손에 다정히 쥐어주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곳의 문은 항상 열려 있으니 언제든지 와요, 동생!"
당장이라도 누님하며 감격케 할 포근한 어조요, 음성이었다.
"알겠소. 그럼 내일……."
기검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겨갔다.
그가 숲속으로 사라질 즈음 난향대부인 적설염은 실망한 듯 가볍게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
다.
"생각보다 외모와 기품은 뛰어난데…… 여자 후리는 솜씨는 형편없어."
난향대부인은 기검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 그녀가 어찌 기검하의 진정한 내심을 짐작하랴?
기검하는 밤안개 속을 느릿하게 걷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나를 알고 있다. 결국 그 어떤 방법으로도 정복할 수도 없다는 얘기…… 비록
그녀를 강제로 범한다 해도 그것은 그녀의 몸만 길들이는 것 뿐…… 그녀를 완전히 정복할
수는 없지!"
기검하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 공포(恐怖)! 사내가 아닌 공포로써 접근하는 방법 뿐이
다."
여자 후리는 방법은 복잡하고 많기도 하다.
공포로 접근하는 방법, 과연 그 실체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