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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穡 | 1328 | 1396 | 韓山 | 穎叔 | 牧隱 | 文靖 | 韓山伯 |
牧隱文藁卷之十四 / 碑銘 /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
| 惠勤 | 1320 | 1376 | 牙氏 | 元惠 | 懶翁, 江月軒, 普濟尊者 | 禪覺 | 僧 |
玄陵在位之二十年庚戌秋九月十日。召師入京。十六日。就師所寓廣明寺。大會兩宗五敎諸山衲子。試其所自得。號曰功夫選。上親幸觀焉。師拈香畢。昇法座迺言曰。破却古今之窠臼。掃盡凡聖之蹤由。割斷衲子命根。抖擻衆生疑網。操縱在握。變通在機。三世諸佛。歷代祖師。其揆一也。在會諸德。請以實答。於是。以次入對。曲躬流汗。皆曰。未會。或理通而礙於事。或狂甚而失於言。一句便退。上若不豫色然。幻菴脩禪師後至。師歷問三句。三關會罷。還檜巖。辛亥八月二十六日。遣工部尙書張子溫齎書降印。法服鉢盂皆具。封爲王師,大曺溪宗師,禪敎都摠攝,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謂松廣寺東方第一道場。迺命居之。壬子秋。偶念指空三山兩水之記。欲移錫檜巖。會以召赴是寺法會。得請居焉。師曰。先師指空蓋嘗指畫重營。而燬于兵。敢不繼其志。迺謀於衆。增廣殿宇。工旣告畢。丙辰四月。大設落成之會。臺評以謂檜巖密邇京邑。士女往還。晝夜絡繹。或至廢業。禁之便。於是。有旨移住瑩源寺。逼迫上道。師適疾作。輿出三門至池邊。自導輿者從涅槃門出。大衆咸疑。失聲號哭。師顧曰。努力努力。無以余故中輟也。吾行當止於驪興耳。至漢江。謂護送官卓詹曰。吾疾劇。乞舟行泝流七日。方至驪興。又謂卓曰。欲少留。竢病間卽行。卓勉從之。寓神勒寺。五月十五日。卓又督行急。師曰。是不難。吾當逝矣。是日辰時。寂然而逝。郡人望見五彩雲蓋山頂。旣火之洗骨。無雲而雨者。方數百步。得舍利一石五十五粒。禱之。分爲五百五十八。四衆得之灰中以自秘者。莫知其數。神光照耀。三日乃已。釋達如夢見龍盤燒臺下。其狀如馬。及以喪舟還檜巖。無雨水漲。皆驪龍之助云。八月十五日。樹浮屠於寺之北崖。頂骨舍利。措于神勒寺。示其所終也。覆以石鐘。戒其無敢訛也。事聞于朝。諡曰禪覺。命臣穡爲文。臣仲和書丹篆額。臣謹按。師諱惠勤。號懶翁。初名元惠。享年五十七。法臘三十八。寧海府人也。俗姓牙氏。考諱瑞。具膳官。令母鄭氏。靈山郡人也。鄭夢見金色隼飛來啄其頭。忽墜卵。五彩爛然入懷中。因而有娠。以延祐庚申正月十五日生。年甫冠。隣友亡。問諸父老曰。死何之。皆曰。所不知也。中心痛悼。走入功德山。投了然師祝髮。師曰。汝爲何事出家。對以超三界利群生。且請開示。曰。汝之來此。是何物耶。曰。此能言能聽者。能來爾。但未知修進之術。曰吾亦如汝。猶未之知。可往求之。有餘師。至正甲申。至檜巖。晝夜獨坐。忽得開悟。尋師中國之志決矣。戊子三月。至燕都。參指空答問。契合十年。庚寅正日。空集衆下語。無能對者。師出衆吐數語。三拜而出。空西天百八代祖也。是春。南游江淛。秋八月。參平山。山問會見何人。曰。西天指空。日用千劍。山云。且置。指空千劍。將汝一劍來。師以坐具提山。山倒在禪床。大叫賊煞我。師曰。吾劍也能殺人。能活人。乃扶起。山以雪巖所傳及菴衣拂子表信。辛卯春。抵寶陁洛迦山。拜觀音。壬辰。至伏龍山。參千巖。適集江湖千餘人。選入室。巖問所自。師旣答。巖云。父母未生前。從甚處來。師曰。今朝四月初二日。巖許之。是歲北還。再參指空。空授以法衣拂子梵書。於是。游涉燕代山川。蕭然一閑道人也。名聞于內。乙未秋。奉聖旨住大都廣濟寺。丙申十月望。設開堂法會。帝遣院使。也先帖木兒賜金襴袈娑幣帛。皇太子以金襴袈娑象牙拂子來錫。師受袈裟。問衆曰。湛然空寂。本無一物。粲兮爛兮。從何而出。衆無對。徐曰。九重宮金口中。乃披拈香祝聖。陞座橫按柱杖。下數語便下。戊戌春。辭指空。得授記東還。且行且止。隨機說法。庚子。入臺山居焉。辛丑冬。上遣內詹事方節。迎入京。請說心要。賜滿繡袈裟水精拂子。公主獻瑪瑙拂子。 太后親施布施。請住神光寺。因辭。上曰。於法。吾亦退矣。不得已卽行。卜一月。紅賊蹂躪京畿。擧國南徙。僧徒震懼。請避賊。師曰。唯命是保。賊何能爲。數日請益急。是夕。夢一神人面有黑誌。具衣冠。作禮曰。衆散。賊必滅寺。願固師志。明日。至土地神座。視其貌則夢所見也。賊果不至。癸卯。入九月山。遣內侍金仲孫請還。乙巳三月。詣闕乞退。始得夙願。游龍門,元寂諸山。丙午。入金剛山。丁未秋。住淸平寺。其冬。猊寶巖以指空袈裟手書授師曰。治命也。己酉。再入臺山。庚戌春。司徒達叡奉指空靈骨。來措于檜巖。師禮師骨。因赴召。結夏廣明寺。秋初。還檜巖,九月。卽功夫選也。師所居室曰江月軒。平生未嘗習世俗文字。有請題詠。操筆立書。若不經意。理趣深遠。晚好黑戲。山水逼道權。嗚呼。道旣通。多能也宜哉。臣穡謹拜手稽首而爲之銘。銘曰。 展也禪覺。惟麟之角。王者之師。人天眼目。萬衲宗之。如水赴壑。而鮮克知。所立之卓。隼夢赫靈。在厥初生。龍神護喪。終然允臧。矧曰舍利。表其靈異。江之闊矣。皎皎明月。空耶色耶。上下洞徹。邈在高風。終古不滅。
목은문고 제14권 / 비명(碑銘) / 보제 존자(普濟尊者) 시(諡) 선각(禪覺)의 탑명(塔銘) 병서(幷序)
현릉(玄陵 공민왕)이 재위(在位)하신 지 20년째 되는 경술년(1370) 가을 9월 10일에 스님을 불러서 서울에 들어오게 하였다. 그달 16일에 스님이 우거(寓居)하고 있는 광명사(廣明寺)에, 양종(兩宗) 오교(五敎)에 속한 제산(諸山)의 납자(衲子)들을 대거 불러 모으고는, 각자 자득(自得)한 경지가 어떠한지 시험하면서 이를 공부선(功夫選)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때 상도 친히 행차하여 관람하였다.
스님이 분향(焚香)을 마치고 나서 법좌(法座)에 올라 말하기를 “과거와 현재의 상투적인 격식을 타파하고, 범부와 성인의 자취를 모조리 쓸어버린 뒤에, 납자의 명근(命根)을 끊어 버리고 중생의 의망(疑網)을 털어 버려야만, 조종(操縱)하는 권한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고서 기틀에 따라 거리낌 없이 변통(變通)할 수 있을 것이다. 삼세(三世)의 제불(諸佛)과 역대(歷代)의 조사(祖師)들이 행한 그 법도가 사실은 하나이니, 여기에 모인 여러 납자들은 꾸밈없이 사실대로 대답해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납자들이 차례로 들어가서 대면(對面)하게 되었는데, 몸을 굽히고 땀을 뻘뻘 흘리기만 할 뿐, 모두 모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중에 어떤 이는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어도 실제로는 체득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이는 너무도 광적(狂的)이 된 나머지 말에 실수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들 모두가 예외 없이 1구(句)에 막혀서 뒤로 물러서곤 하였다. 그래서 상도 관람하다가 언짢게 여기는 듯한 기색을 보였는데, 환암 혼수 선사(幻菴混脩禪師)가 뒤에 이르러서는 스님이 3구(句)와 3관(關)에 대해서 모두 차례로 점검을 할 수가 있었다. 이 대회를 마치고 나서 스님은 회암사(檜巖寺)로 돌아갔다.
신해년(1371, 공민왕20) 8월 26일에 공부 상서(工部尙書) 장자온(張子溫)을 보내 교서(敎書)와 함께 직인(職印)을 내리고 법복(法服)과 발우(鉢盂) 일체를 갖추게 하였으며, 왕사(王師) 대조계종사(大曹溪宗師)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 근수본지중흥조풍복국우세보제존자(勤修本智重興祖風福國祐世普濟尊者)에 봉하였다. 그리고 송광사(松廣寺)가 동방의 제일도량(第一道場)이라 하여, 스님을 그곳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임자년(1372, 공민왕21) 가을에 스님이 지공(指空)의 이른바 삼산(三山)과 양수(兩水)에 대한 기별(記別)을 우연히 떠올리고는 회암사로 석장(錫杖)을 옮기려고 생각하였는데, 때마침 부름을 받고 이 사찰의 법회(法會)에 참석하게 되었으므로, 상에게 요청하여 이곳에 거하도록 허락을 받았다. 이에 스님이 말하기를 “이곳은 대개 선사(先師)인 지공 스님께서 지시한 대로 중건한 곳인데 병화(兵火)로 소실(燒失)되고 말았으니, 어찌 감히 그 뜻을 이어받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대중과 상의하여 건물을 증축하여 더욱 넓히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공사가 모두 완료되자, 병진년(1376, 우왕2) 4월에 낙성(落成)을 축하하는 법회를 크게 열었다.
그런데 대간(臺諫)이 탄핵하여 논하기를 “회암사는 경읍(京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어서 사녀(士女)들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왕래하느라 더러는 생업(生業)을 폐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를 엄금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상이 분부를 내려 스님의 거처를 영남 밀양(密陽)의 영원사(瑩源寺)로 멀리 옮기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빨리 떠나도록 독촉을 받기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스님의 병이 도졌으므로 가마를 타고서 사찰의 대문(大門)을 빠져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못가에 이르렀을 때 스님이 직접 가마꾼에게 길을 일러 주며 열반문(涅槃門)으로 나가게 하였는데, 이를 목격한 대중들이 모두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목 놓아 통곡하자, 스님이 이들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부디 노력하고 노력해서 나 때문에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여행길은 마땅히 여흥(驪興)에서 끝날 것이다.” 하였다.
한강(漢江)에 이르렀을 때 스님이 호송 관원인 탁첨(卓詹)에게 “나의 병세가 위중하니 뱃길로 갔으면 좋겠다.”고 청하였다. 그리하여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 지 7일 만에 여흥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스님이 탁첨에게 “조금 머물면서 병에 차도가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으므로, 탁첨이 마지못해 그 부탁을 들어주면서 신륵사(神勒寺)에 머물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5월 15일에 탁첨이 다시 출발을 급히 재촉하자, 스님이 말하기를 “그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이제 내가 떠날 것이다.” 하고는, 이날 진시(辰時)에 조용히 입적(入寂)하였는데, 그때 고을 사람들이 바라보니 오색구름이 산마루에 덮여 있었다고 한다.
이에 화장(火葬)을 하고 나서 유골(遺骨)을 수습할 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비가 내려 사방 수백 보(步)의 땅을 적셨다. 사리(舍利) 155과(顆)를 얻었는데, 기도를 하고는 이를 다시 분류해서 558과를 얻었다. 이 밖에 사중(四衆)이 재[灰] 속에서 찾아내어 각자 비장(祕藏)한 사리가 또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그 뒤로 신령스러운 광채가 사흘 동안이나 비치다가 사라졌다 한다. 승려 달여(達如)가 꿈속에서 보니 화장한 곳의 누대(樓臺) 아래에 용(龍)이 서려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말[馬]과 흡사했다고 한다. 또 유골을 실은 배가 회암사로 돌아올 적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는데도 강물이 불어나 있었는데, 이 모두가 여강(驪江)의 용이 도와준 덕분이라고 하였다.
8월 15일에 회암사 북쪽 언덕에다 부도(浮屠)를 세웠다. 그리고 정골(頂骨)의 사리를 신륵사에 안치하였으니 이는 스님이 세상을 떠난 곳임을 보여 주기 위함이요, 그 위를 석종(石鐘)으로 덮어 보호하였으니 이는 감히 손을 대지 못하도록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스님에게 선각(禪覺)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리는 한편, 신(臣) 이색에게 비문(碑文)의 글을 짓도록 하고, 신 권중화(權仲和)에게 비문의 글씨와 전액(篆額)을 쓰도록 명하였다.
내가 삼가 살펴보건대, 스님의 휘(諱)는 혜근(惠勤)이요, 호는 나옹(懶翁)이며, 초명(初名)은 원혜(元惠)이다. 향년은 57세이고 법랍(法臘)은 38세이며, 영해부(寧海府) 출신으로서 속성(俗姓)은 아씨(牙氏)이다. 부친 휘 서구(瑞具)는 선관서 영(膳官署令)이요, 모친 정씨(鄭氏)는 영산군(靈山郡) 사람이다. 정씨의 꿈속에 황금색 송골매가 날아와서 머리를 부리로 찍더니 홀연히 알을 떨어뜨렸는데, 오색찬란한 그 알이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왔다. 이 꿈을 꾸고 나서 임신하여 연우(延祐) 경신년(1320, 충숙왕7) 정월 15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이 겨우 약관(弱冠)의 나이가 되었을 때에 이웃집에 살던 벗이 죽었는데, 여러 부로(父老)들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으나, 모두들 가는 곳이 어디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이에 마음이 너무도 아프고 슬픈 나머지 그 길로 공덕산(功德山)으로 달려가서 요연(了然) 스님에게 몸을 의탁하고 삭발(削髮)하였다. 이때 요연 스님이 “너는 무슨 목적으로 출가를 하였느냐?” 하고 묻자, 스님이 대답하기를 “삼계(三界)의 고통에서 해탈하여 뭇 중생들을 이롭게 해 주기 위함입니다.” 하고는, 앞길을 열어 보여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요연 스님이 또 묻기를 “여기에 온 너라는 물건은 어떤 물건이냐?” 하였는데, 스님이 대답하기를 “이 물건이 말도 할 줄 알고 들을 줄도 알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마는, 어떻게 닦아서 나아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요연 스님이 말하기를 “나 역시 너와 마찬가지로 아직 알지 못하고 있다. 다른 곳으로 가서 찾아보면 스승님이 계실 것이다.” 하였다.
지정(至正) 갑신년(1344, 충목왕 즉위년)에 회암사(檜巖寺)에 와서 밤낮으로 홀로 앉아 정진(精進)하던 중에 홀연히 깨달음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에 중국으로 스승을 찾아 떠날 결심을 하고는, 무자년(1348, 충목왕4) 3월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지공(指空)을 친견(親見)하였는데, 묻고 대답하는 사이에 서로들 계합(契合)하는 바가 있었다. 지정 10년 경인년(1350, 충정왕2) 정월 초하루에 지공이 대중을 모아 놓고 법어(法語)를 내렸을 때 제대로 대답하는 자가 아무도 없었는데, 스님이 대중 앞으로 나와서 몇 마디 말을 토해 낸 뒤에 세 번 절하고 나왔다. 지공은 서천(西天)의 108대(代) 조사(祖師)가 되는 분이다.
그해 봄에 남쪽으로 강절(江浙) 지방을 유력(遊歷)하고 나서, 가을 8월에 평산 처림 선사(平山處林禪師)를 친견하였다. 평산이 그동안 어떤 사람을 만나 보았느냐고 묻자, 서천의 지공이 날마다 일천 검(劍)을 쓰고 있더라고 대답하였는데, 평산이 다시 “지공의 일천 검은 우선 놔두고 너의 검 하나를 가져오라.”고 하자, 스님이 좌구(坐具)를 가지고 평산의 머리를 내려쳤다. 이에 평산이 선상(禪牀)에 엎어지면서 “도적이 나를 죽인다.” 하고 큰 소리로 부르짖자, 스님이 “나의 칼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고는, 평산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평산이 설암 조흠(雪巖祖欽)으로부터 전해 받은 급암 종신(及菴宗信)의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스님에게 주어 인가(認可)하는 뜻을 표하였다.
신묘년(1351, 충정왕3) 봄에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에 가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예배하였다. 임진년에 복룡산(伏龍山)에 가서 천암(千巖)을 친견하니, 천암이 마침 강호(江湖)에서 모여든 천여 명의 납자(衲子)를 대상으로 입실(入室)할 자격이 있는 자들을 뽑고 있었다. 천암이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자 스님이 대답을 하니, 천암이 “부모님이 낳아 주기 이전에는 어디에 있다가 왔느냐?” 하고 물었다. 이에 스님이 “오늘이 바로 4월 초이틀입니다.” 하니, 천암이 인가를 하였다. 이해에 북쪽으로 돌아가서 지공(指空)을 재차 친견하니, 지공이 법의와 불자와 범서(梵書)를 전해 주었다. 이에 연대(燕代)의 산천을 두루 유력(遊歷)하였는데, 유유자적하는 그 모습이 그야말로 하나의 한도인(閑道人)으로서, 명성이 자자하게 퍼져 마침내는 궁중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을미년(1355, 공민왕4) 가을에 성지(聖旨)를 받들고 대도(大都 연경(燕京))의 광제사(廣濟寺)에 머물렀다. 병신년 10월 보름날에 개당 법회(開堂法會)를 열자, 황제(皇帝)가 원사(院使) 야선첩목아(也先帖木兒)를 보내 금란 가사(金襴袈裟)와 폐백(幣帛)을 하사하였고, 황태자(皇太子)도 금란 가사와 상아 불자(象牙拂子)를 선물하였다. 스님이 가사(袈裟)를 받고는 대중에게 묻기를 “담연(湛然)히 텅 비고 고요해서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이 찬란한 가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하였는데, 아무도 대답하는 자가 없자 스님이 천천히 말하기를 “구중궁궐 안의 부처님 입에서 나왔느니라.” 하였다. 그러고는 분향(焚香)하고 황제의 복을 축원한 다음에 법좌(法座)에 올라 주장자(柱杖子)를 가로잡고서 몇 마디 말을 하고는 바로 내려왔다.
무술년(1358, 공민왕7) 봄에 지공과 작별하면서 수기(授記)를 받고 동방으로 돌아올 적에, 가다 쉬다 하면서 중생의 근기(根機)에 따라 설법을 해 주었다. 경자년에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가서 머물렀다. 신축년 겨울에 상이 내첨사(內詹事) 방절(方節)을 보내 스님을 서울로 맞아들인 뒤에, 심요(心要)에 대한 설법을 청하였다. 상은 스님에게 만수 가사(滿繡袈裟)와 수정 불자(水精拂子)를 하사하였고, 공주(公主 공민왕의 비(妃)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는 마노 불자(瑪瑙拂子)를 바쳤으며, 태후(太后)는 직접 보시(布施)를 베풀었다. 상이 스님에게 신광사(神光寺)에 있어 주기를 청하였으나 스님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나도 불법(佛法)에서 뒤로 물러나 있겠소.” 하였으므로, 스님이 어쩔 수 없이 곧장 신광사로 떠났다.
11월에 홍건적(紅巾賊)이 경기(京畿) 지방을 유린하자, 온 나라 사람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승려들도 겁에 질린 나머지 피신할 것을 청하였으나, 스님은 “불조(佛祖)의 혜명(慧命)을 지키고 있는데, 적들이 어떻게 해 볼 수가 있겠느냐.” 하면서 태연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승려들이 더욱 급하게 피신할 것을 청하였는데, 그날 밤 스님이 꿈을 꾸니 얼굴에 검은 사마귀가 있는 신인(神人)이 의관을 갖추고 절을 하면서 고하기를 “대중이 흩어지면 도적들이 반드시 이 사찰을 없애 버릴 것이니, 스님은 뜻을 굳게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토지신(土地神)을 안치한 자리에 가서 그 초상화를 보니 꿈속에 본 바로 그 얼굴이었는데, 과연 도적이 그 사찰에는 이르지 않았다.
계묘년(1363, 공민왕12)에 스님이 구월산(九月山)으로 들어가니, 상이 내시(內侍) 김중손(金仲孫)을 보내어 돌아오라고 청하였다. 을사년 3월에 대궐에 나아가서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한 결과, 비로소 허락을 받고 숙원(宿願)을 이루어 용문(龍門)과 원적(元寂) 등 여러 산사(山寺)에 노닐었다. 병오년에 금강산(金剛山)에 들어갔다. 정미년 가을에는 청평사(淸平寺)에 머물렀다. 그해 겨울에 예보암(猊寶巖)이 지공(指空)의 가사(袈裟)와 손수 쓴 편지를 스님에게 전해 주면서 지공의 유언(遺言)이라고 하였다. 기유년(1369, 공민왕18)에 다시 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갔다. 경술년 봄에 사도(司徒) 달예(達叡)가 지공의 영골(靈骨)을 받들고 와서 회암사(檜巖寺)에 안치하였으므로, 스님이 스승의 유골에 예배를 드렸다. 그러고는 상의 부름에 응하여 광명사(廣明寺)에서 하안거(夏安居)를 마쳤으며, 가을 초에 회암사로 돌아왔다가 9월에 위에서 언급한 공부선(功夫選)을 거행하였다.
스님은 자신의 거실을 강월헌(江月軒)이라고 이름하였다. 평소에 세속의 문자를 익힌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 붓을 잡고 곧장 써 내려갔는데, 별로 정신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심원(深遠)한 흥치가 우러나오곤 하였다. 만년에는 또 묵화(墨畫)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스님의 산수화(山水畫)는 유도권(劉道權 원(元)나라의 화가)의 화풍(畫風)과 비슷한 점이 있다. 아, 도(道)를 이미 통한 분이시니,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에 내가 삼가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탑명(塔銘)을 짓는 바이다. 명은 다음과 같다.
참으로 선각 스님으로 말하면 / 展也禪覺
기린의 뿔처럼 희유(稀有)하신 분 / 惟麟之角
우리 임금님의 스승이시요 / 王者之師
길 잃은 중생들의 지도자였네 / 人天眼目
많은 납자들이 종주(宗主)로 받들면서 / 萬衲宗之
물이 골짜기 쏟아지듯 모여들었지만 / 如水赴壑
제대로 아는 이 몇이나 되었을까 / 而鮮克知
스님이 이룩한 우뚝한 그 경지를 / 所立之卓
신령스러워라 송골매 날아온 꿈 / 隼夢赫靈
태어날 때부터 범상하지 않았는데 / 在厥初生
용신이 또 마지막 길을 보호하며 / 龍神護喪
마침내 편안한 안식처에 들게 했네 / 終然允藏
더구나 사리야 더 말할 게 있나 / 矧曰舍利
신비스러운 기적을 보여 줬는걸 / 表其靈異
끝없이 흐르는 여강(驪江) 물속에 / 江之闊矣
교교히 비치는 강월헌 밝은 달빛 / 皎皎明月
이것을 공이라 할지 색이라 할지 / 空耶色耶
위아래가 서로 통해 환히 빛나도다 / 上下洞徹
아득하여라 드높은 그 풍도여 / 邈在高風
영원토록 없어지지 않으리로다 / 終古不滅
[주-D001] 명근(命根) : 현재의 생을 영위하게 된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전세(前世)로부터의 업(業)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이다.[주-D002] 환암 혼수 선사(幻菴混脩禪師)가 …… 있었다 : 오직 환암 선사 한 사람만이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며 공부선(功夫選)을 통과하여 인정을 받았다는 말인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목은문고》 제10권 〈환암기(幻菴記)〉에 나온다. 3구(句)는 선가(禪家)에서 승려의 공부를 점검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운문(雲門) 3구ㆍ덕산(德山) 3구ㆍ파릉(巴陵) 3구ㆍ암두(巖頭) 3구ㆍ분양(汾陽) 3구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나옹(懶翁)의 법맥(法脈)이 임제종(臨濟宗)인 점을 감안할 때 아마도 임제(臨濟) 3구를 가리킨 것이 아닌가 싶다. 임제 3구에 대해서는 해설이 분분하나, 전통적인 해석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제1구는 “임제 내가 제시한 삼요의 인을 찍으면 붉은 도장 자국이 비좁기만 한데, 어떻게 생각할 사이도 없이 주인과 객의 신분이 분별되고 만다.[三要印開朱點窄 未容擬議主賓分]”이고, 제2구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어찌 교학(敎學)을 닦는 무착의 질문을 수용하겠는가마는, 방편이라 하더라도 어찌 뛰어난 근기를 저버리기야 하겠느냐.[妙解豈容無着問 漚和爭負截流機]”이고, 제3구는 “무대 위의 꼭두각시 춤을 보아라. 앉고 서고 하는 것이 숨은 사람의 짓이니라.[看取棚頭弄傀儡 抽牽元是裏頭人]”이다. 3관(關)은 임제종(臨濟宗) 황룡파(黃龍派)의 황룡 혜남 선사(黃龍慧南禪師)가 승려들을 접할 때마다 사용했던 “상좌가 태어나게 된 인연[生緣]은 어디에 있는가?” “나의 손은 어찌하여 부처의 손[佛手]과 같은가?” “나의 다리는 어찌하여 노새의 다리[驢脚]와 같은가?” 등의 세 가지 물음을 말하는데, 평생토록 여기에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천하의 총림(叢林)에서 ‘황룡 삼관(黃龍三關)’이라고 일컬었다 한다.[주-D003] 지공(指空)의 …… 기별(記別) : 지공이 연경(燕京)의 법원사(法源寺)에서 고려에 돌아가려는 나옹(懶翁)에게 “삼산(三山)과 양수(兩水)가 있는 곳에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와 똑같은 터가 있으니, 그곳에다 절을 지으면 불법(佛法)이 흥성할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므로, 나옹이 귀국한 뒤에 삼각산(三角山)을 마주 하고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남북으로 흐르는 곳에 터를 잡고 회암사를 중건한 것을 이른다.[주-D004] 사중(四衆) : 불교의 비구(比丘)ㆍ비구니(比丘尼)ㆍ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 즉 남자 승려ㆍ여자 승려ㆍ남자 신도ㆍ여자 신도를 가리키는 말로, 사부중(四部衆) 혹은 사부대중(四部大衆)이라고도 한다.[주-D005] 보타락가산(寶陀洛迦山) : 불교 신도 사이에 관세음보살이 거한다고 전해지는 인도 남해안의 산 이름으로, 각국에 이런 이름을 지닌 산들이 산재하는데, 여기서는 중국 절강(浙江)의 보타산(普陀山)을 가리킨다.[주-D006] 연대(燕代) : 전국 시대 연(燕)나라와 대(代)나라의 지역을 합쳐서 일컫는 말로, 하북(河北)의 서북부 지역과 산서(山西)의 동북부 지역에 해당한다.[주-D007] 한도인(閑道人) : 절학무위한도인(絶學無爲閑道人)의 준말로, 목은이 즐겨 쓰는 표현 중의 하나이다. 절학무위한도인이란 스스로 도를 깨우친 결과 더 이상 불법(佛法)을 배울 것이 없을 정도로 불교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는 말이다. 당(唐)나라 선승(禪僧) 영가 현각(永嘉玄覺)이 지은 〈증도가(證道歌)〉 첫머리에,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배움을 끊어 버린 채 아무 할 일도 없이 그저 한가하기만 한 도인은, 굳이 망상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참된 진리를 찾으려 하지도 않으며, 이름 없는 실제 성품이 바로 불성이 되고 허깨비 같은 허망한 몸이 바로 법신이 되는 것을.[君不見 絶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眞 無名實性卽佛性 幻化空身卽法身]”이라는 말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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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九 / 序 / 驪興神勤寺禪覺眞堂詩 幷序
釋志先。予未之相識也。國贐里之老嫗引之來。其言曰。吾師禪覺之塔。先生辱賜之銘。先等固已受先生岡極之惠矣。玆又將謁先生一言。以記吾師眞堂。先生幸無麾焉。吾師於五濁惡世。現相應機。譬則佛出也。是以。檜巖也猶砥林焉。神勒也猶雙林焉。先等攀呼悶絶。竟何益哉。回視化跡。月墮虛空。餘光已盡。幸有舍利存焉。所以奉之者至矣。道貌存焉。所以傳之者廣矣。今神勒石鍾。實所以厝頂骨舍利也。先等以謂後之禮舍利者。無以知吾師之道貌也。歆其風而未知其容儀之如何也。則於歸仰之心。必有所慊然者矣。進瞻道貌。退觀舍利。以欣以慕。夫豈無感悟於介然之頃者哉。此眞堂之所由作也。先生非知吾道者也。執筆紀纂。先生之事也。先生其終惠焉。予曰。先也言也是矣。今夫像設多矣。街童巷婦。豈盡知哉。必從而語之曰。是佛也。其名曰某也。是佛之弟子也。其名曰某也。然後始得展其歸仰之禮。而心冥於其像矣。不然則禪覺之眞。亦一丹靑故物爾。誰從而知之。先等區區之心。無以白於將來。宜其請之廑也。故不辭而系以詩。後之讀者。幸無譏焉。土木工程。常事也。故不書。其詩曰。 道之云妙。匪無匪有。於戲畫像。與衆孰愈。凜然其生。秀色天成。有來拜者。如聞其聲。
목은문고 제9권 / 서(序) /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선각(禪覺)의 진당(眞堂)을 위해서 지어 준 시 병서(幷序)
승려 지선(志先)과는 내가 일면식(一面識)도 없는데, 국신리(國贐里)의 노파가 그를 끌고서 나를 찾아왔다. 그가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스승인 선각(禪覺)의 탑(塔)에다 선생께서 명(銘)을 지어 주셨으니, 저희들이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생의 망극한 은혜를 입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또 우리 스승의 진당(眞堂)에다 기록해 둘 한마디 말씀을 청하려고 선생을 찾아뵙게 되었는데, 선생께서 이번에도 물리치지 않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우리 스승은 이 오탁악세(五濁惡世)에 모습을 드러내어 기틀에 응하셨으니, 비유하자면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했던 것과 같다고도 하겠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회암사(檜巖寺)는 기림(祇林)과도 같고, 신륵사(神勒寺)는 쌍림(雙林)과 같다고도 할 것입니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저희들이 부여잡고 울부짖으면서 정신이 아뜩해져 까무러친다 한들 그것이 끝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교화를 베푸신 자취를 뒤돌아보아도, 달이 허공 속에 떨어져 남은 빛마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만 같습니다. 그런 중에도 사리(舍利)가 남아 있어서 극진하게 받들어 모실 수가 있고, 도모(道貌 도인의 초상화)가 남아 있어서 널리 전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지금 이 신륵사의 석종(石鍾)으로 말하면, 실로 스승의 정골(頂骨) 사리를 받들어 모신 곳입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생각하기에, 뒷날 이 사리에 예배하는 이들이 우리 스승의 도모(道貌)가 어떠한지 알 수가 없고, 우리 스승의 풍도(風度)를 흠모하면서도 그 의표(儀表)가 어떠한지 알지를 못한다면, 우러러 귀의하려고 하는 마음에 필시 미흡한 점이 있게 되리라고 여겨졌습니다. 그러니 가령 그들이 나아와서는 우리 스승의 도모를 뵙고 물러가서는 사리를 예배하면서 마음속으로 환희를 일으켜 사모하게 한다면, 얼마 안 되는 그 시간 사이에서나마 어찌 감격하여 깨닫게 되는 점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진당(眞堂)을 세우게 된 이유입니다. 선생이 비록 우리 불도(佛道)를 아시는 분은 아니라 할지라도 붓을 잡고 글을 짓는 것은 그야말로 선생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니, 선생께서 끝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였다.
나는 말한다.
지선 스님의 말이 옳다. 지금 초상(肖像)을 설치해 놓은 곳이 많기는 하다마는, 길거리의 아이들이나 민간의 부녀자들이 어떻게 그것들을 모두 알 수가 있겠는가. 그들에게 반드시 ‘이것은 부처인데 그 이름은 무엇이고, 이것은 부처의 제자인데 그 이름은 무엇이다.’라고 말해 준 뒤에야 비로소 그들이 귀의하는 마음을 일으켜 제대로 예배를 하면서 은연중에 그 초상과 마음이 합치되는 느낌을 가질 수가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선각(禪覺)을 모신 진당(眞堂)도 단청(丹靑)을 칠해 놓은 하나의 고물(故物)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어느 누가 무슨 수로 알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되면 지선 스님 등의 절실한 그 마음도 앞으로 드러내 밝힐 수가 없게 될 것이니, 나를 찾아와서 간절히 청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내가 사양하지 않고 시 한 수를 지어 넣게 되었는데, 뒷날 읽는 사람들이 기롱이나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겠다. 토목 공사의 과정은 보통 다들 아는 일인 만큼 여기에서는 기록하지 않기로 한다. 시는 다음과 같다.
우리가 도를 묘하다고 말하는 것은 / 道之云妙
무도 아니고 유도 아니기 때문이라 / 匪無匪有
아 이분의 초상화를 한 번들 보시게나 / 於戲畫像
어느 것이 이보다 더 낫다고 하겠는가 / 與衆孰愈
늠름한 그 모습 마치 살아 있는 듯 / 凜然其生
빼어난 그림 솜씨 자연이 빚어낸 듯 / 秀色天成
여기에 찾아와서 예배를 올릴 때면 / 有來拜者
큰 스님의 목소리 들리는 듯하리로다 / 如聞其聲
[주-D001] 오탁악세(五濁惡世) : 인류의 수명이 8만 세에서 점차 감소되어 100세도 못 되는 때에 이르게 되면, 겁탁(劫濁)ㆍ견탁(見濁)ㆍ번뇌탁(煩惱濁)ㆍ중생탁(衆生濁)ㆍ명탁(命濁) 등 다섯 가지의 고통과 죄악이 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된다는 불교의 말세 사상을 가리킨다.[주-D002] 기림(祇林) : 인도 불교 성지(聖地)의 하나로, 석가모니가 머물면서 설법한 장소이다.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 혹은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하는데, 죽림정사(竹林精舍)와 더불어 불교 최초의 양대 정사로 꼽힌다.[주-D003] 쌍림(雙林) : 석가모니가 열반한 발제하(跋提河) 언덕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을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년(숙종 28)~1772년(영조 48) 미호집 제1권 / 시(詩) / ‘청’ 자를 얻다〔得淸字〕 화창한 봄 모래섬에 꽃나무 흩날리고 / 芳洲花樹散春晴 물가에 부는 바람 산들산들 청량해라 / 湖上輕風獵獵淸 근처 높은 벼랑 위 하얀 탑 우뚝하고 / 白㙮近從危壁出 저 멀리 석양에 붉은 누각 반짝이네 / 朱樓遙帶夕陽明 나옹 자취 안개처럼 색깔이 묘연하고 / 懶翁跡杳煙雲色 목로 시구 일월처럼 명성이 높구나 / 牧老詩懸日月名 먼 데 길손 노 멈춘 채 감개가 무량한데 / 遠客停橈多感慨 황량한 누대에선 만종 소리 울려오네 / 荒臺又送暮鐘聲 [주-D001] 하얀 탑 : 신륵사에 있는 3층 석탑을 말한다. 다층전탑(多層塼塔) 부근 강변 암반에 위치해 있다. 〈신륵사동대탑수리비(神勒寺東臺塔修理碑)〉에 따르면 현재 탑이 위치한 장소에서 나옹을 다비(茶毗)한 후 그 덕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주-D002] 나옹(懶翁) : 고려 말의 고승 혜근(惠勤, 1320~1376)의 호로, 성은 아(牙), 속명은 원혜(元惠),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강월헌(江月軒)ㆍ보제존자(普濟尊者)란 별호도 갖고 있다. 양주 회암사(檜巖寺)에서 좌선하며 깨달음을 얻고, 이후 원나라로 건너가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배우고, 광제사(廣濟寺)의 주지가 되기도 하였다. 귀국해서는 오대산 상두암(象頭庵)에 은거하다가 신광사(神光寺), 회암사(檜巖寺)의 주지를 역임했다. 공민왕의 왕사(王師)로서 왕명에 의해 밀양(密陽) 영원사(瑩源寺)로 거처를 옮기던 중 여주 신륵사(神勒寺)에서 입적하였다. 1379년(우왕5)에는 나옹을 추모하기 위해 보제존자석종(普濟尊者石鍾)과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鍾碑)가 세워졌는데, 이 비문을 이색(李穡)이 지었다.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있고, 비석과 부도는 회암사에 남아 있으며, 저서로 《나옹화상어록(懶翁和尙語錄)》과 《가송(歌頌)》이 전한다.[주-D003] 목로(牧老) 시구 : 목로는 이색(李穡, 1328~1396)으로,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나옹의 비명(碑銘)과 탑명(塔銘)을 썼으며, 부친 이곡(李穀)이 발원했던 대장경(大藏經) 불사(佛事)의 뜻을 계승하여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대장경을 간행한 뒤 신륵사에 대장각(大藏閣)을 건립해 1부를 보관하고 그 연유를 기록한 〈대장각기(大藏閣記)〉를 이숭인(李崇仁)에게 짓게 하였다. 여기서 말한 ‘목로 시구’는 이색이 지은 보제존자석종비(普濟尊者石鍾碑)의 말미에 있는 시(詩)를 가리키는데, 《국역 목은집》 문고(文藁) 제9권에 〈여흥(驪興)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선각(禪覺)의 진당(眞堂)을 위해서 지어 준 시〉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 고려대학교 한자한문연구소 | 강여진 (역) |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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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七 / 京畿 驪州牧
東至忠淸道忠州界四十四里,至江原道原州界十里。南至陰竹縣界三十三里。西至利川府界二十八里,至廣州界五十二里。北至砥平縣界三十七里,至楊根郡界五十七里。距京都一百九十里。
建置沿革
本高句麗骨乃斤縣。新羅景德王改黃驍,爲沂川郡領縣。高麗初改黃驪縣。一作黃利。顯宗屬原州,後置監務。高宗改永義。忠烈王三十一年,以順敬王后金氏之鄕,陞驪興郡。大明洪武二十一年(무진,1388,우왕14,창왕즉위),遷辛禑于郡,陞黃驪府。恭讓王元年,復降爲郡。本朝太宗朝,以元敬王后之鄕,復陞爲府,割陰竹縣北於西伊村以益之,自忠淸道來隷本道,後改爲都護府。睿宗元年,遷英陵于府北城山,革川寧縣來屬,改今名,陞爲牧。
| 우왕 | 14 | 1388 | 무진 | 洪武 | 21 | 61 | 5월, 輔理功臣의 호를 더하다. ○ 判典理司事가 되다. ○ 10월, 賀正使로 중국에 가다.목 |
| 공양왕 | 1 | 1389 | 기사 | 洪武 | 22 | 62 | 여름, 귀국하다. ○ 12월, 長湍으로 流配되다. |
佛宇
報恩寺。在驪江東岸鳳尾山。古神勒寺,有甓浮屠,故俗號甓寺。我睿宗朝,遷英陵于寺之西十里,遂改構爲巨刹,因賜今額。○寺有江月軒,高麗名僧懶翁所居。懶翁死,其徒弟藏舍利于石鍾,仍建眞堂,李穡爲記。又有大藏閣,李崇仁爲記。○金守溫記:“驪之爲州,居國上游,山明水麗,號稱樂土,而神勒寺正居形勝之中。昔玄陵王師懶翁、韓山牧隱李公二人相繼來遊,由是寺遂爲畿左名刹。越成化九年,大王大妃殿下命有司因舊更創,賜額‘報恩’,爲先王陵寢之道場焉。初,世祖大王夢見世宗大王,昵奉晤旨,歡如平昔。世祖追感益切,爲世宗大王、昭憲王后,欲於英陵之側創建佛寺,以爲薦福之所。乃命有司伐材,流桴積于江岸,一夕潦漲,盡爲狂濤所逸。明年世祖晏駕,國家多故,未遑經始。會日官上言:‘英陵坐局所直之宿,有不應古經者,宜改建玄宮,以膺丕休。’ 睿宗下群臣議,皆曰:‘改葬古矣。葬故有闕,則尙且改葬。況今風水之司有言,必有所稽,不可不從。’ 睿宗分遣宰相求擇厥地。群臣啓曰:‘驪興之北,有一大洞,岡巒列勢,主對粲然。法曰:「山頓水曲,子孫千億。」 以臣等所相,陵寢所安,無右於此。’ 睿宗傳旨于朝曰:‘可。’ 以成化五年己丑,遷世宗梓宮于驪州。襄事旣訖,大王大妃殿下懿旨若曰:‘先王見父王于夢,將欲創寺英陵之下,仙馭遄回,奄棄臣民,未及營締。今先王在天,而我等不亟從事於遺旨,其何以奉先王於地下乎?’ 卽命上黨府院君臣韓明澮、西平君臣韓繼禧等,令毋遠寢園,擇定置寺之處。臣明澮等啓曰:‘陵室坐地之內,無可立宇之地。神勒一寺,一名甓寺,古賢遊賞之迹宛然,且去先王塋域甚邇,鍾鼓之聲可達。若卽而修之,則因舊爲新,事半功倍,莫此爲便。’ 壬辰二月,懿旨傳:‘今陵室甫畢,不可又使齊民。今刊經都監已罷,所用錢谷尙多,其餘其內需司專掌出納,償役遊手,無或告弊。’命臣明澮、臣繼禧爲提調,驪州牧使臣李愼孝、原州牧使臣金春卿、內侍府尙膳臣李孝智爲監役官,以其年二月始役,告訖於冬十月。因舊而修葺者幾間,創新而改構者幾間,摠二百有餘間。鍾鼓道具與夫日用什器之類,悉皆新鑄。臣惟寺刹之興廢,固有待於其時,而又有數關。其間神勒風景之美,聞於我國,而士大夫風帆往來,舳艫相銜,未有一人就而興創。幸今黃驪大府,千百年山川磅礴之氣,潛藏秘伏,乃發於聖明之日,先王之玄宮載營厥邑。大事已定,大慶已始,開我國家億萬年無疆之基。於是府陞爲州,寺亦爲之一新,是乃時之所待而數之所關者然也。我大王大妃殿下不以時有古今地有彼此,而䀌念先王之遺旨,陵室旣遷,亟創佛寺,其善繼善述丕承丕顯之美,光于列聖,卓越前古。臣雖老昧,敢不拜手稽首,敬書于策,明示後世乎?” ○李穡詩:“遠岫長江外,疎松翠石傍。招提開福地,普濟敞眞堂。縣令頻腰笏,山僧獨面墻。何當尋野艇,淸嘯倚蒼茫?” ○金九容詩:“柞棹回蘆瀨,松舟繫石矼。淸風吹老樹,明月滿長江。說法龍應聽,參禪虎自降。往來幽興熟,苔徑接篷窓。” ○權近詩:“我來愛此好江山,終日乘舟又倚欄。水底森羅開佛刹,林間隱約見仙壇。指心頓敎遙傳慧,載事雄文酷似韓。珍重老禪勤授簡,留題還愧後人看。” ○崔脩詩:“甓寺鍾聲半夜鳴,廣陵歸客夢初驚。若敎張繼曾過此,未必寒山獨擅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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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三 / 記 / 潤筆菴記
四佛山。一名功德山。西天指空師所名也。釋覺寬與金贊成諱得培之室金氏造潤筆菴。走書求記。其言曰。山中有菴曰妙寂。了然禪師居之。懶翁出家處也。今懶翁旣寂。舍利遍國中。寫眞以供養者。又不可以一二計矣。然皆游歷之地。未必皆平日所留意。何也。不三宿桑下是已。若其最初發跡之地。剃以去煩惱。戒以受毗尼。所謂千聖不傳向上一路所由始也。所由入也。悟道於檜巖。印可於平山。皆從此中出。說法於大都。爲師於先王。亦從此中出。則功德山實爲懶翁之本元矣。懶翁旣寂矣。藏其舍利。垂其眞以供養者。今之求功德者之恒事也。亦知所謂眞功德乎。功德山。由懶翁名益傳。世之歆懶翁以修功德者。又如此其廣。功德在山乎。在懶翁乎。在奔走禮拜者乎。請先生一言以記。予曰。吾聞功德山在大院東。有峯突然而起。有大石。斲四如來形。皆四尺餘。凡求福者群趨之。此山得名之由也。聖智,妙圓,體自空,寂菴之名。豈虛立哉。求功德於妙寂。皆如懶翁。斯足矣。倂著之。庚申秋八月初吉。記。
목은문고 제3권 / 기(記) / 윤필암기(潤筆菴記)
사불산(四佛山)은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하는데, 서천(西天 인도(印度))의 지공 화상(指空和尙)이 붙인 이름이다. 승려 각관(覺寬)과 김 찬성(金贊成) 휘(諱) 득배(得培)의 부인 김씨(金氏)가 윤필암(潤筆菴)을 짓고는 급히 글을 보내 기문(記文)을 요청하면서 말하기를, “산속에 묘적암(妙寂菴)이 있는데, 이곳은 요연 선사(了然禪師)가 머물고 있을 적에 나옹(懶翁)이 출가(出家)했던 곳입니다. 지금 나옹이 입적(入寂)한 뒤에, 그의 사리(舍利)가 온 나라 안에 두루 퍼져 있음은 물론 진영(眞影)을 걸어 놓고서 공양(供養)하고 있는 곳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곳들은 모두 나옹이 생전에 유력(遊歷)한 곳이긴 하지만, 나옹이 이 모두에 대해서 평소에 꼭 유의(留意)했다고는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 밤을 계속 묵지 않는다는 본연의 자세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가령 맨 처음에 출가했던 이 묘적암으로 말하면, 머리를 깎아 번뇌를 제거하고 계(戒)를 지키기 위하여 비니(毘尼 율(律))를 받았던 곳이니, 이른바 ‘천성이 전하지 못한 향상의 한 가닥 길[千聖不傳 向上一路]’을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고 여기로부터 진입하게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회암사(檜巖寺)에서 도를 깨닫고 평산(平山)에게서 인가를 받게 된 것도 모두 여기에서 나왔고, 대도(大都 연경(燕京))에서 법문을 설파하고 선왕(先王 공민왕)의 스승이 된 것도 여기에서 나왔다고 할 것이니, 공덕산이야말로 나옹의 본고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옹이 일단 입적하고 나자, 그의 사리를 소장하고 그의 진영을 내걸어 공양하는 것이 지금 공덕(功德)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일이 되었고 보면, 이를 통해서 우리는 또 이른바 참공덕을 나옹이 얼마나 끼쳐 주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공덕산 역시 나옹 때문에 그 이름이 더욱 알려져서, 세상에서 나옹을 부러워하며 공덕을 닦으려 하는 자들이 또 이처럼 많이 나오게까지 되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과연 공덕이라는 것이 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아니면 분주히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 자신에게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니, 선생께서 한 말씀을 적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공덕산이 대원사(大院寺) 동쪽에 하나의 봉우리로 우뚝 솟아 있는데, 그곳의 큰 바위에 모두 넉 자 남짓한 크기의 여래상(如來像) 네 개를 사방에다 새겨 놓았기 때문에, 복을 구하려는 자들이 떼를 지어 몰려온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이 산의 이름이 붙여진 까닭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성지(聖智)는 묘원(妙圓)한 것이고 체성(體性)은 본래 공적(空寂)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묘적(妙寂)이라는 이 암자의 이름도 어찌 그냥 붙여진 것이라고 하겠는가. 모두 나옹이 했던 것처럼 이 묘적을 통해서 공덕을 구한다면 충분할 것 같기에, 이 점도 아울러 밝혀 두는 바이다.
경신년(1380, 우왕6) 가을 8월 초하룻날에 짓다.
[주-D001] 윤필암기(潤筆菴記) : 윤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執筆料)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 “이색이 왕명을 받들고 나옹의 부도명을 지어 주자, 문도들이 윤필의 재물을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그것을 받지 않고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윤필암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원래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나옹의 문도들이 다시 나옹과 관련이 있는 묘향산(妙香山)ㆍ금강산(金剛山)ㆍ소백산(小白山)ㆍ사불산(四佛山)ㆍ치악산(雉岳山)ㆍ용문산(龍門山)ㆍ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목은이 기문을 써 주었다.[주-D002] 뽕나무 …… 않는다 : 불법을 닦는 승려가 세속에 대한 애착을 끊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두타행(頭陀行)을 말한다. 《후한서(後漢書)》 권30 하 양해열전(襄楷列傳)에 “승려가 뽕나무 아래에서 사흘을 머물지 않는 것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은애가 생길까 두려워함이니, 그야말로 정진(精進)의 극치라고 하겠다.[浮屠不三宿桑下 不欲久生恩愛 精之至]”는 말이 나온다.[주-D003] 천성(千聖)이 …… 길 : 어떤 스승도 언어와 문자로 가르쳐 줄 수 없는 불교의 절대적인 경지를 독자적으로 철저하게 깨닫는 것을 말하는데, 《벽암록(碧巖錄)》 12칙(則)에 그 내용이 나온다.[주-D004] 평산(平山) : 중국 선종(禪宗)의 오가 칠종(五家七宗) 가운데 임제종(臨濟宗)에 속하는 급암(及菴) 종신(宗信)의 제자요 석옥(石屋) 청공(淸珙)의 동문이었던 평산(平山) 처림(處林)을 가리킨다. 나옹의 경지를 인정하고 법의(法衣)와 불자(拂子)를 내주었으며, 헤어질 때에도 게송(偈頌)을 지어 주면서 아쉬움을 표하였는데, 처음 만나서 문답한 내용이 《목은문고》 제14권의 〈보제존자시선각탑명(普濟尊者諡禪覺塔銘)〉에 보인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 “聖智 妙圓 體自空寂”这句话出自禅宗初祖菩提达摩与梁武帝的对话,是“净智妙圆,体自空寂”的另一种说法,核心是在讲真正的功德不在向外求取,而在自心本性的清净圆满。 完整原句是“净智妙圆,体自空寂,如是功德,不以世求”,意思是:清净的智慧圆满无缺,其本体本性空寂;这样的功德,不是靠世间有为的善行能求得的。 怎么理解这句话 净智妙圆:指自性本具的智慧,清净无染、圆满无缺,不是后天学来的知识。 体自空寂:这个智慧的本体是“空”且“寂”的,不住于任何形相,也不被妄念染污。 如是功德,不以世求:这种功德无法靠建寺、造像、布施等外在行为获得,只能向内体悟。 这段对话的来历 梁武帝问达摩:“我建寺、抄经、供僧,有什么功德?”达摩直接回答“无功德”,因为那是“有漏”的人天福报;真正的功德是“净智妙圆,体自空寂”这种无住相的内证境界。这段问答后来成为禅宗“直指人心、不假外求”的重要源头。 可以这样理解:福德是向外做的善事,会享尽;功德是向内明心见性,才是“不以世求”的。 .............................. “聖智 妙圓 體自空寂”这句话出自禅宗初祖菩提达摩与梁武帝的对话,是“净智妙圆,体自空寂”的另一种说法,核心是在讲真正的功德不在向外求取,而在自心本性的清净圆满。 完整原句是“净智妙圆,体自空寂,如是功德,不以世求”,意思是:清净的智慧圆满无缺,其本体本性空寂;这样的功德,不是靠世间有为的善行能求得的。 🧘 怎么理解这句话 净智妙圆:指自性本具的智慧,清净无染、圆满无缺,不是后天学来的知识。 体自空寂:这个智慧的本体是“空”且“寂”的,不住于任何形相,也不被妄念染污。 如是功德,不以世求:这种功德无法靠建寺、造像、布施等外在行为获得,只能向内体悟。 📖 这段对话的来历 梁武帝问达摩:“我建寺、抄经、供僧,有什么功德?”达摩直接回答“无功德”,因为那是“有漏”的人天福报;真正的功德是“净智妙圆,体自空寂”这种无住相的内证境界。这段问答后来成为禅宗“直指人心、不假外求”的重要源头。 可以这样理解:福德是向外做的善事,会享尽;功德是向内明心见性,才是“不以世求”的。 .............................. 净智妙圆 体自空寂 这句话出自禅宗初祖达摩祖师之口,是他在回答梁武帝“何为真功德”时所说的核心偈语,完整表述常为“净智妙圆,体自空寂,如是功德,不以世求”。 百科 这句话是什么意思 净智妙圆:指清净无染的智慧,能够圆满周遍,没有分别心和思量心 。 净智:心不着相,三轮体空,清净无染,称为净智。 妙圆:能施、所施、施物周遍法界,无有障碍,称为妙圆。 体自空寂:指其本体本性是真空而妙有,虽然照天照地,但复寂然不动 。 无所住生心:叫净智妙圆。 生心无所住:叫体自空寂。 这句话出自哪里 禅宗典籍:主要记载于《五灯会元》、《景德传灯录》、《祖堂集》等禅宗史书 。 历史对话:相传南朝梁武帝问达摩祖师:“朕即位以来,造寺写经,度僧不可胜纪,有何功德?”达摩回答并无功德,并进一步解释真功德即“净智妙圆,体自空寂”。 后续偈语:这句话后面通常接“如是功德,不以世求”,意指这样的功德不是在尘世中追求的 。 真功德和假功德有什么区别 假功德(人天小果): 有漏之因:如造寺、写经、度僧等,虽然有福报,但属于有漏之因。 如影随形:虽有非实,福报一尽,依然堕落,不能了脱生死 。 真功德(净智妙圆): 无漏功德:心地清净,不着相布施,无功德可居。 内心觉悟:真功德不在外求,而在内心觉悟,空寂无执,方能净智圆融 。 ............................. 🏮 【原文】达摩祖师曰:“净智妙圆,体自空寂,如是功德,不以世求。” 🏮 【译文】达摩祖师说:“真正清净的智慧功德不可思议,心中本自圆备具足,其理体本性真空而妙有,照天照地而复寂然不动。这样的解行修证,才是真实的功德,却不可以凭世间的人天福德有为之法就能求得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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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文選卷之七十四 / 記 / 潤筆菴記[李穡]
四佛山。一名功德山。西天指空師所名也。釋覺寬與金贊成諱得培之室金氏。造潤筆菴。走書求記。其言曰。山中有菴曰妙寂。了然禪師居之。懶翁出家處也。今懶翁旣寂。舍利遍國中。寫眞以供養者。又不可以一二計矣。然皆游歷之地。未必皆平日所留意。何也。不三宿桑下是已。若其最初發跡之地。剃以去煩惱。戒以受毗尼。所謂千聖不傳向上一路。所由始也。所由入也。悟道於檜巖。印可於平山。皆從此中出。說法於大都。爲師於先王。亦從此中出。則功德山。實爲懶翁之本元矣。懶翁旣寂矣。藏其舍利。垂其眞以供養者。今之求功德者之恒事也。亦知所謂眞功德乎。功德山。由懶翁名益傳。世之歆懶翁。以修功德者。又如此其廣。功德在山乎。在懶翁乎。在奔走禮拜者乎。請先生一言以記。予曰。吾聞功德山。在大院東。有峯突然而起。有大石。斲四如來形。皆四尺餘。凡求福者。群趨之此山。得名之由也。聖智妙圓。體自空寂。菴之名。豈虛立哉。求功德於妙寂。皆如懶翁斯足矣。倂著之。庚申秋八月初吉記。
윤필암기(潤筆菴記) / 이색(李穡)
사불산(四佛山)을 일명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름을 지은 사람은 지공(指空)스님이다.
중 각관(覺寬)과 찬성(贊成)이었던 김득배(金得培)의 부인 김씨가 이 산에다 윤필암이란 절을 짓고, 윤필암기를 지어달라고 편지를 보내는데 그 내용에는 “산 가운데 있는 암자를 묘적암(妙寂菴)이라 하는데, 요연선사(了然禪師)께서 계셨고, 나옹(懶翁)스님께서 출가(出家 처음으로 중이 됨)한 곳입니다. 지금은 나옹스님은 떠났으나 사리는 온나라에 펴졌으며, 그림을 그려서 모시는 곳도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그러나 모두 스쳐가신 땅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꼭 이런 곳을 다 평소에 유의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중은 뽕나무 아래서 사흘 밤을 계속해 자지 않는다.’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가 처음 출발한 곳으로 말할 것같으면, 머리를 깎음으로써 번뇌를 씻어버린 곳이요, 계명을 받음으로써 중이 된 곳이니, 이른바, ‘여러 성인이 전하지 못한 종문(宗門)의 지극한 곳[極處]’으로 지향하는 출발이 이에서 시작된 것이며, 도에 들어감도 이에서 시작되었다 하겠습니다. 도를 회암(檜巖)에서 깨닫고, 얻은 것을 평산(平山)에서 인정받으신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이며, 서울에서 설법해서 선왕(先王)의 스승이 되신 것도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니, 공덕산은 사실로 나옹의 본바탕이 되는 곳입니다. 나옹은 벌써 돌아가셨으되 그분의 사리를 간직하고, 그림을 모시어 공양하는 것은 오늘날 공덕을 구하는 사람들의 보통 일입니다마는, 소위 참된 공덕을 알고 그러는 것입니까? 공덕산은 나옹 때문에 이름을 더욱 전하게 되었고, 세상에서 나옹을 흠모하여 공덕을 닦는 사람도 그와 같이 넓은 지역에 깔렸으니, 따져볼 때 공덕이 산에 있는 것인지 나옹에게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아니하면 분주하게 다니며 예배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선생께서 한 말씀으로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였었다.
나는 이 글을 받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들으니 공덕산이 대원(大院) 동쪽에 있는데 우뚝 솟은 봉 위에 큰 돌이 네 갈래로 갈라졌고, 높이가 모두 넉 자 남짓한데, 마치 부처님의 모양같으므로 복을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떼를 지어 몰려와서 기도하기 때문에, 이 산을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성(聖)ㆍ지(智)ㆍ묘(妙)ㆍ원(圓)은 그 체(體)가 스스로 공적(空寂)한 것이니, ‘묘적암(妙寂菴)’이란 이름인들 어찌 근거 없이 생겼겠는가. 공덕을 묘적암에서 구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옹과 같이 하면 족할 것이다.” 하였다 아울러 드러낸다. 경신 추 8월 초하루 기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대연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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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二 / 記 / 香山潤筆菴記
香山在鴨綠水南岸平壤府之北。與遼陽爲界。山之大莫之與比。而長白之所分也。地多香木,冬靑。而仙佛舊迹存焉。山之名以香山。▣▣▣諸佛道場。作一▣▣▣普濟之游涉也。蓋嘗住錫于玆。及其示寂也。弟子勝智者。將奉舍利。以入此山。而覺淸者。亦師之弟子也。得舊址而屋之。三楹而止。功訖矣。而邀師之眞。垂之堂中。以修朝夕之禮。釋志先以覺淸之言。來請予記。予曰。淸之面。吾不能記。淸之言入吾耳者。志先之舌也。淸旣請于予。予忘之何害。淸雖未之請。有先上人之口罄。吾但知普濟耳。餘人何與焉。是以不復辭。普濟之弟子。莫可數也。而爲普濟奔走於入滅之後。銘浮圖。記眞堂。以謀其不朽者。踵相接也。從而和之者。無尊卑無智愚。合而爲一。牢不可破。是孰使之然哉。無亦吠形吠聲。其勢之必至歟。霜降鍾鳴。石投水受。感應交際之道。有不期然而然者歟。普濟之所以致此。必有其道矣。今夫髡而群游者。幾半於國。泝而求之數百年之上。其道之行也益盛。然其辭世而去也。如普濟之表表者。吾未之多聞也。當世之拳拳於普濟者。可知已。普濟在世。則謗者多。而及其歿也。趨向之又如此。嗚呼。人之心。果誰爲之主乎。吾於是告志先以此語。且以語淸。使其歸向之心益切。而謀所以傳師之舍利。益謹而又謹可也。山之勝。浮屠者多言之。惜乎予之衰也。無由而至其中矣。倂記之。
목은문고 제2권 / 기(記) / 향산(香山) 윤필암기(潤筆菴記)
향산은 압록강(鴨綠江)의 남쪽 평양부(平壤府)의 북쪽에 위치하여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산이 웅장해서 더불어 비할 데가 없으니 바로 장백산맥(長白山脈)이 뻗어 내려 나뉘어진 곳이다. 그곳에는 향나무를 위시해서 사철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데다 선도(仙道)와 불도(佛道)의 옛 자취가 서려 있기 때문에 향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불교의 도량(道場)이 있는 곳은 보제(普濟 나옹(懶翁) 혜근(惠勤))가 생전에 두루 유력(遊歷)을 하였는데, 일찍이 이 산에서도 주석(住錫)한 적이 있었으므로, 그가 입적(入寂)한 뒤에 제자인 승지(勝智)라는 자가 장차 사리(舍利)를 받들고서 이 산으로 들어오려고 하였다. 그런데 각청(覺淸)이라는 자도 보제의 제자였는데, 그가 옛터를 얻어 집을 지으면서 앞 기둥 세 개를 세우는 것으로 그치고는, 공사가 끝나자 스승의 진영(眞影)을 모셔 와 불당 안에다 걸어 놓고서 아침저녁으로 예배(禮拜)를 하였다.
그럴 즈음에 승려 지선(志先)이 각청의 부탁을 받고 나에게 와서 기문(記文)을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각청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지금 지선의 혀를 통해서 각청의 말이 나의 귀에 들어왔다. 각청이 나에게 청해 왔다 하더라도 내가 잊어버린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리고 각청이 청해 오지 않고 지선 상인(上人)이 입이 닳도록 요청한다 하더라도, 나는 단지 보제만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야 나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마는, 내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또 사양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보제의 제자들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리하여 보제가 입멸(入滅)한 뒤에 그를 위해 바쁘게 뛰어다니면서 부도(浮圖)에 명(銘)을 하고 진당(眞堂)에 기문을 내걸어 불후하게 되도록 꾀하는 승려들이 서로 줄을 잇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이들을 좇아 부화(附和)하는 민간인들이 존비(尊卑)나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한덩어리로 굳게 합쳐서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형세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과연 누가 그렇게 하도록 만든 것인가? 혹시 모양을 보고 짖자 소리를 듣고 짖어 대는 것처럼 형세상으로 볼 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서리가 내리자 종이 울리고 돌을 던지자 물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감응(感應)하고 교제(交際)하는 도리로 볼 때 꼭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쨌든 간에 보제가 이렇게 되도록 만든 이면에는 분명히 그의 도(道)가 작용한 점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지금 머리를 깎고 무리 지어 노니는 자들이 거의 나라의 반을 차지하고 있으니, 수백 년 위로 거슬러 올라가 찾아보더라도, 지금처럼 불교가 성행한 적은 있지 않았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을 떠나고 난 뒤에까지 보제처럼 탁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에 대해서는 내가 많이 들어 보지 못하였다. 그러니 지금 세상에서 충심으로 보제를 신봉하는 그 까닭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그런데 보제가 살아 있을 적에는 비방하는 자들이 그렇게도 많았건만, 막상 그가 죽고 나자 그를 사모하여 따르는 것이 또 이와 같으니, 아, 사람의 마음이란 과연 그 누가 주관하는 것인가.
이러한 내용의 말들을 내가 또 지선에게 일러 주면서 각청(各廳)에게도 아울러 이야기해 주도록 하였으니, 이는 보제에게 귀의하는 그의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게 하는 동시에 스승의 사리를 길이 전하는 일을 더욱 근실하게 행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 산의 승경(勝景)에 대해서는 승려들이 허다히 이야기하는데, 내 몸이 워낙 쇠해서 그 산을 한 번 찾아가 볼 수가 없으니 애석하기 짝이 없다. 이 점도 아울러 기록해 둔다.
| 지선에게 일러 주면서 각청(各廳)에게도->각청(覺淸) |
[주-D001] 윤필암기(潤筆菴記) : 윤필(潤筆)은 원래 글을 지어 주는 대가로 받는 일종의 사례금으로써 집필료(執筆料)를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8 지평현(砥平縣) 불우(佛宇) 조에, “이색이 왕명을 받들고 나옹의 부도명을 지어 주자, 문도들이 윤필의 재물을 마련하여 사례하였는데, 이색이 그것을 받지 않고 허물어진 절을 수리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윤필암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李穡以王旨撰懶翁浮屠銘 其徒致潤筆物 穡不受使修廢寺 因名之]”라고 하여 윤필암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원래 나옹의 사리탑이 있던 신륵사(神勒寺)와 회암사(檜巖寺) 외에도, 나옹의 문도들이 다시 나옹과 관련이 있는 묘향산(妙香山)ㆍ금강산(金剛山)ㆍ소백산(小白山)ㆍ사불산(四佛山)ㆍ치악산(雉岳山)ㆍ용문산(龍門山)ㆍ구룡산(九龍山) 등 일곱 곳에 진당(眞堂)을 세우고 사리를 나누어 모셨는데, 이 일곱 곳에 모두 목은이 기문을 써 주었다.[주-D002] 모양을 …… 것 : ‘한 마리의 개가 이상한 형체를 보고 짓자 다른 백 마리의 개가 그 소리를 듣고서 짖어 댄다.[一犬吠形 百犬吠聲]’는 속담에서 나온 말로, 어떤 일의 진위(眞僞)를 살피지도 않고 자기 주관도 없이 맹목적으로 붙좇는 것을 말한다. 《潛夫論 賢難》[주-D003] 서리가 …… 울리고 : 풍산(豐山)에 구종(九鍾)이 있는데, ‘이 종은 서리가 내리면 울줄을 안다[是知霜鳴]’는 전설이 있다. 《山海經 中山經》[주-D004] 돌을 …… 것 : 상호 간에 의기가 투합하는 것을 말한다.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의 병법을 터득하고 나서 군웅(群雄)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물을 돌에 던지는 것처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以水投石 莫之受], 한 고조(漢高祖)에게 유세할 적에는 마치 돌을 물에 던지는 것처럼 모두 받아들여졌다.[以石投水 莫之逆]는 이야기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이강(李康)의 《운명론(運命論)》에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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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72권 / 기(記) / 향산 윤필암 기(香山潤筆菴記) / 이색(李穡)
향산은 압록강 남쪽 기슭 평양부(平壤府) 북쪽에 있는데 요양(遼陽)과 경계를 이루었다. 산의 크기는 비할 데가 없으며 장백산의 분맥(分脈)이다. 향나무ㆍ사철나무가 많고 선불(仙佛)의 고적이 있다. 산의 이름을 향으로써 □□□□□□□□□ 여러 부처와 도장 □□□□□□ 보제(普濟)가 올라서 놀 적에 일찍이 거기서 머물렀다. 그가 입적하자 제자 승지(勝智)가 장차 사리(舍利)를 받들고 이 산에 들어가려 하였는데, 역시 보제의 제자인 각청(覺淸)이 옛터를 찾아 집을 짓는데 세 기둥으로써 끝났다. 일을 마친 뒤에 그 스승의 화상을 받들어 당(堂) 가운데 걸고 아침저녁으로 예를 닦았다. 중 지선(志先)이 각청의 부탁으로 내게 와서 기(記)를 청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각청의 얼굴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각청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온 것은 지선의 입을 통해서이다. 각청이 이미 그대에게 청하였는데 그대가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무엇이 해로우며, 각청이 비록 청하지 않았더라도 보제선사의 구경(口罄)이 있다. 나는 다만 보제를 알 뿐이라, 다른 사람은 무엇을 관여하리요.” 하고 다시는 사양하지 않았다. 보제의 제자가 수없이 많고 보제를 위하여 힘써서, 죽은 뒤에 부도(浮圖)에 새기고 진당(眞堂 화상을 모신 집)에 기록하여 오래 전하기를 꾀하는 이가 연달아 나오고, 붙좇는 이가 존비(尊卑)와 지우(智愚)에 상관없이 하나로 합하여 굳어져 깨뜨릴 수 없으니 이는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개 한 마리가 모양을 보고 짖으면 뭇 개가 소리를 듣고 따라 짖는 것과 같이 그 형세가 반드시 이럴 수 밖에 없었던 것인가? 서리가 떨어지면 종이 울고, 돌을 던지면 물이 응하는 감응교제(感應交際)하는 도(道)가 그러하기를 기약하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인가? 보제가 이에 이르게 한 것은 반드시 그 도(道)가 있는 것이다. 지금 불도를 믿는 무리가 나라에 거의 반이나 되고, 거슬러서 수백 년 전부터 따진다면 그 도가 더욱 성하게 행하였으나, 세상을 하직하고 간 뒤에 보제와 같이 뛰어난 이를 나는 많이 듣지 못하였으니, 당시에 보제를 정성으로 받들어 잊지 못하였던 것을 가히 알겠다. 보제가 세상에 있을 적에는 꾸짖는 자가 많았는데 그 죽음에 미쳐서는 따르고 생각하기를 또 이같이 하니, 아, 사람의 마음이 과연 누구를 주장하는가. 내가 이런 말로써 지선에게 말하고 또 각청에게 고하여 그 생각하는 마음을 더욱 간절히 하며, 그 스승의 사리(舍利) 전하기를 도모하기에 더욱 삼가고 삼가는 것이 가하다. 산의 좋은 경치는 중들이 많이 말하나, 내가 늙어 가서 볼 수 없음을 애석해 하여 함께 기록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김익현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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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은문고 제2권 / 기(記) / 금강산(金剛山) 윤필암기(潤筆菴記)
보제(普濟) 나옹(懶翁)이 입적(入寂)하자, 사람들이 비로소 그의 도를 크게 신봉하여 따르며 사모하였다. 그러니 더군다나 그의 문도(門徒)들이야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한산자(韓山子)가 왕명을 받들어 보제의 부도명(浮屠銘)을 지었는데, 바로 이로 인해서 윤필암(潤筆庵)이 지어지게 되었다. 윤필암은 모두 일곱 곳인데, 공양(供養)과 좌선(坐禪)에 필요한 기구들이 모두 더할 나위 없이 정결하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보제의 몸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어도 보제의 도는 이처럼 날이 갈수록 더욱 빛나게 드러나고 있으니, 보제가 얼마나 깊이 사람들을 감화시켰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하겠다.
금강산에 선주암(善住庵)이 있는데, 집만 있고 사람이 살지 않은 지가 거의 30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보제가 여기에서 여름 한 철을 지내면서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는 뭇 산봉우리들을 굽어보았으므로, 사람들이 나옹대(懶翁臺)라고 불렀다. 그 암자의 동쪽에는 향로봉(香爐峯)이 있고, 남쪽에는 금강대(金剛臺 표훈사(表訓寺) 북쪽의 석벽(石壁))가 서 있으며, 그 아래를 물이 휘돌아 마치 성벽처럼 감싸고 있다. 나옹은 천하를 유력(遊歷)하면서 산천을 두루 살펴본 분이다. 그런데 금강산에 들어와서는 벌집처럼 수없이 널려 있는 암자 중에서도 유독 여기에 머무르면서 결제(結制)를 하였으니, 그렇게 한 데에는 뭔가 분명히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지림(志林), 찬여(粲如), 지옥(志玉), 신원(信元), 각봉(覺鋒) 등이 나옹을 공경히 모실 계책을 세우고는, 이곳에다 진영(眞影)을 드리워 놓고 아침저녁으로 향화(香火)를 올리는 한편, 승려 15인을 공양하면서 불사(佛事)를 행하였다. 그리고 좌선을 통해 도를 깨달아 사람마다 모두 나옹처럼 되려고 노력하면서, 바쁘게 일을 하다가도 틈이 나기만 하면 오직 화두(話頭)만을 생각하면서 놓지 않았으니, 정말 뜻 있는 이들이라고 할 만하다.
지금 집기가 부족해지자 서울에 와서 신도들에게 보시(布施)를 청하는 한편, 기문(記文)을 구해 벽에다 걸어 놓고 뒷사람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였다. 그러고는 또 말하기를, “천 일 동안 좌선을 행하는 법회를 이미 지난해 3월 3일에 시작하였는데, 그 기한이 끝나면 다시 시작할 예정이니, 스승의 뜻을 이어받으려고 하는 이 일에 대해서도 아울러 기록해 주셨으면 합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지림 등이 이런 일을 행하다니, 또 얼마나 훌륭한가. 비록 영겁(永劫)의 세월이 지난다 할지라도, 천 일이 지나거든 또 천 일을 이어 가면서 마치 하루의 일처럼 행해 간다면, 여기에서 도를 체득하고 나가는 이들을 어찌 다 헤아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아래에 시주(施主)의 명단을 갖추 기록해 둔다.
기미년(1379, 우왕5) 윤5월 일에 짓다.
[주-D001] 결제(結制) : 승려들이 절 문을 나서지 않고 일정한 기간 동안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음력 4월 보름부터 시작하는 석 달 동안의 결제를 하안거(夏安居)라 하고, 10월 보름부터 석 달 동안 행하는 결제를 동안거(冬安居)라 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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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四 / 記 / 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韓山子旣筆普濟浮圖銘。則告其徒曰。普濟。我 先王之所師也。道尊德高。國中誰不致敬趨下風。聞緖論。以爲終身之幸哉。獨穡懶於伺候。雖竹院僧話。亦未嘗一及於耳。是以。普濟之出入禁闥。揀擇功夫也。亦不敢輕以進謁。變吾所守。蓋道不同。不相爲謨 故也。師旣示寂。有舍利之異。師道之益信於世。闔國奔趨。惟恐不及。穡又病。無由致意於其間久矣。有 旨撰其銘。則不敢不奉敎。但未知普濟之可吾文與否耳。雖然。當世大儒秉筆者不少。而穡獲承是命。夫豈徒然。未嘗不自幸且自悲也。旣而門人行禮於僕曰。潤筆。予却之曰。師。 先王之師也。穡。 先王之臣也。以 先王之臣。而銘 先王之師。禮不當如是。使 先王無恙。親賜臣。臣當辭謝。矧今 先王在天之靈。臨之在上。臣敢貪冒。自納於黷貨哉。師之弟子必欲報師恩者。修舊寺之廢。一以裨補國家。一以安處徒衆。則雖不潤吾之筆。其潤普濟之餘波。以及於物者。當益無窮矣。此釋志先,志守之奔走與夫定安君夫人任氏今爲比丘尼名妙德。德捨財。而彌智之有是菴也。此韓山子之有是記也。後之居是菴者。惟普濟之舍利。舍利於其身可也。吾儒者曰。舜何人也。予何人也。有爲者亦若是。請銘其座右。其檀越名氏。具錄于后。戊午秋八月。記。
목은문고 제4권 / 기(記) / 지평현(砥平縣) 미지산(彌智山)의 윤필암(潤筆菴)에 대한 기문
한산자(韓山子)가 보제(普濟)의 부도(浮圖 사리탑)에 명(銘)을 짓고 나서, 그 문도(門徒)들에게 이르기를, “보제는 우리 선왕(先王 공민왕)이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다. 그만큼 그분은 도(道)가 존귀하고 덕(德)이 고매하였다. 그러니 나라 안에서 그 누군들 공경하는 마음을 바치면서 그 문하에 달려가 한마디 말씀이라도 얻어듣는 것을 평생의 행운으로 여기지 않는 이가 있었겠는가. 그런데 나만은 유독 인사드리는 일을 게을리 한 나머지 죽원(竹院)의 승화(僧話)조차도 내 귀에 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 때문에 보제가 궁중을 출입할 때나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할 적에도 감히 경솔하게 나아가 찾아뵙고서 내가 지켜 오던 바를 바꾸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대개 도가 서로 같지 않으면 함께 일을 꾀할 수 없는 법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보제가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舍利)가 나오는 이적(異蹟)이 나타나자 세상에서 보제의 도를 더욱 믿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들이 행여 남에게 뒤질세라 달려가기에 바빴는데, 나만은 또 병이 드는 바람에 여기에 관심을 기울일 틈을 갖지 못한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다가 유지(有旨)를 내려 명(銘)을 짓도록 하였기에, 감히 그 분부를 받들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다만 보제가 나의 글을 괜찮게 여길지 어떨지는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이 세상의 대유(大儒)로서 글을 잘 짓는 이들이 적지 않은 터에, 유독 내가 이런 명을 받게 된 것을 어찌 우연으로만 돌릴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자신이 미상불 행운으로 여기면서도 한편 슬퍼지는 감정을 어찌할 수가 없다.” 하였다. 그런데 이윽고 보제의 문인(門人)이 나에게 예를 행하면서 “이것은 윤필료(潤筆料)입니다.” 하고 사례하기에, 내가 이를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스님은 선왕의 스승이었고, 나는 선왕의 신하였다. 내가 선왕의 신하 된 몸으로 선왕의 스승에게 명(銘)을 지어 드린 것이니, 예법(禮法)으로 볼 때 이렇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가령 선왕이 현재 아무 탈 없이 살아 계시어 친히 나에게 예물(禮物)을 내려 주신다 하더라도, 나는 핑계를 대고 사양했을 것이다. 그런데 더군다나 지금은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저 위에서 내려다보고 계실 텐데, 내가 감히 염치없이 재물을 탐낸 나머지 스스로 물욕(物慾)에 빠져들어서야 되겠는가. 스님의 제자로서 스승의 은혜를 꼭 갚으려고 하는 자가 있다면, 퇴락한 옛 절을 수리하여 한편으로는 국가에 보탬이 되게 하고 한편으로는 승도(僧徒)를 편안하게 거처하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비록 나의 붓 값을 치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제가 남겨 준 은덕을 더욱 윤택하게 하여 다른 모든 이에게 그 은혜를 끼쳐 주는 것이 갈수록 끝이 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이것은 모두 승려 지선(志先)과 지수(志守)가 열심히 뛰어다닌 공인 동시에, 지금은 묘덕(妙德)이란 이름의 비구니(比丘尼)가 된 정안군(定安君)의 부인 임씨(任氏)가 재물을 희사한 덕분이다. 이렇게 해서 미지산에 윤필암이 세워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내가 또 이 기문을 짓게 된 것이다.
뒷날 이 암자에 거처하는 이들은 보제의 사리가 바로 자기 몸의 사리로 될 수 있게끔 노력해야 할 것이다. 우리 유자(儒者)의 말 가운데에도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렇게 하기만 하면 나도 그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라는 격언이 있다. 부디 그 의미를 되새겨서 좌우명으로 삼기를 바란다. 단월(檀越)의 성명은 아래에다 갖추 기록한다.
무오년(1378, 우왕4) 가을 8월에 짓다.
[주-D001] 죽원(竹院)의 승화(僧話) : 절간에서 우연히 승려를 만나서 나누는 한담(閑談)을 말한다. 당(唐)나라 이섭(李涉)의 〈제학림사승사(題鶴林寺僧舍)〉라는 시에 “절간을 지나다가 스님과 만나 나눈 얘기, 떠도는 몸 반나절의 한가함을 또 얻었네.[因過竹院逢僧話 又得浮生半日閑]”라는 구절이 나온다.[주-D002] 공부선(工夫選) : 승려가 수행한 공부를 평가하던 시험인데, 공민왕(恭愍王) 19년(1370) 9월에 광명사(廣明寺)에 승려들을 모아 놓고 나옹(懶翁) 혜근(惠勤)에게 명하여 공부선을 행하게 했던 기록이 있다. 《高麗史 卷42 恭愍王世家》[주-D003] 도가 …… 법 : 《논어》 위령공(衛靈公)에 나오는 공자의 말이다.[주-D004] 순(舜)은 …… 것이다 : 《맹자》 등문공 상(滕文公上)에 안연(顔淵)의 말로 인용되어 나온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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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74권 / 기(記) /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 이색(李穡)
한산자(韓山子 이색 자신을 말함)는 이미 보제(普濟)스님의 명을 쓰고 그 제자에게 말하기를, “보제스님은 우리 선왕(先王)이 스승으로 삼았던 분이다. 도가 높고 덕이 높음에 온 나라 사람들 가운데 누가 공경하지 않을 사람이 있으며, 그 바람이 불어가는 아래 나아가 서론(緖論)을 들음으로써 일생의 다행으로 여기지 아니함이 있으리오. 그런데 홀로 나만이 문안드리는 데 게을러 비록 죽원(竹院 둘레에 대를 많이 심은 집)의 승어(僧語)라 하더라도 일찍 한번 귀에 미친 적이 없었고, 보제스님이 대궐에 출입하고 공부를 간택(揀擇)할 때에도 감히 경솔하게 내가 지키던 것을 바꾸어 나아가 보지 못함은, 다름이 아니라 대체로, ‘도가 같지 아니하면 서로 꾀할 수 없다.’는 공자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이 돌아가심에 사리가 나오는 이적(異蹟)이 있어 스님의 도가 세상에서 더욱 믿어지게 되어, 온 나라 안 사람들이 달려가 절하되 못 미칠까 걱정을 하였는데, 내 또 병을 앓아 그 사이 뜻을 드리지 못함이 오래요, 또 임금의 전갈이 있어 그분의 명(銘)을 지으라고 하므로, 감히 하교를 받들지 아니하지 못하겠다. 다만 보제스님에게 내 글이 합당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에 큰 선비로 글 잘 쓰는 사람이 적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명을 받자오니 어찌 도연(徒然 되는 대로 또는 그것뿐)한 것이겠습니까. 일찍이 스스로 다행으로 여기고 또 슬퍼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문인들이 나에게 예물을 가지고 와 윤필(潤筆 시ㆍ서ㆍ화를 써준 대가로 받는 예물)이라고 하였다. 내가 이것을 돌려보내면서 말하기를, “스님은 선왕의 스승이요, 나는 성왕의 신하입니다. 선왕의 신하로서 선왕의 스승의 명을 지었으니 이같은 예는 부당합니다. 선왕으로 하여금 병이 없이 오늘날까지 살아 계시게 하여, 친히 예물을 내려주시더라도 내가 의당 받지 아니하였을 터인데, 하물며 이제 선왕의 하늘에 계시는 영(靈)이 위에서 보고 계시니, 어찌 재물에 탐을 내어 스스로 재화 탐내는 데로 들어가겠습니까. 스님의 제자가 꼭 스승의 은혜를 갚고자 하는 자 옛 절의 황폐함을 수리하여 한편으로는 국가를 돕고 한편으로 신자들을 편안히 있게 하며, 비록 내 붓을 빛나게 하지 않더라도 그 보제스님의 여파(餘波)를 윤택하게 함으로써 물건에 미쳐감이 더욱 한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뜻과 선왕의 뜻을 지켜서 뛰어다닌 이유이오, 저 정안군(定安君)의 부인 임씨(任氏)는 이제 비구니가 되었고 이름을 묘덕(妙德)이라 하였는데, 덕이 재물을 희사하여 미지산에 이 암자가 있게 되었으니 이것이 나 한산자(韓山子)가 이 기를 쓰게 된 이유이다.
뒤에 이 암자에 와 있는 자는 오직 보제의 사리로써 그 몸의 사리로 함이 옳겠다. 우리 유교에, “순(舜)은 어떤 사람이며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함이 있는 자 또한 이와 같다.”는 말이 있는데 그 좌우명으로 삼아주기 바란다. 시주한 사람의 성명을 빠짐없이 뒤에 기록하였다. 무오년 가을 8월에 쓰다.
ⓒ 한국고전번역원 | 양대연 (역) |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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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기사명 (7)
| 1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72권 | 기(記) | 향산 윤필암 기(香山潤筆菴記) | 이색(李穡) | 1968~1970 |
| 2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73권 | 기(記) | 금강산 윤필암 기(金剛山潤筆菴記) | 이색(李穡) | 1968~1970 |
| 3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74권 | 기(記) | 윤필암기(潤筆菴記) | 이색(李穡) | 1968~1970 |
| 4 | 동문선(東文選) | 동문선 제74권 | 기(記) | 지평현 미지산 윤필암기(砥平縣彌智山潤筆菴記) | 이색(李穡) | 1968~1970 |
| 5 | 목은집(牧隱集) | 목은문고 제2권 | 기(記) | 향산(香山) 윤필암기(潤筆菴記) | 이색(李穡) | 2000~2003 |
| 6 | 목은집(牧隱集) | 목은문고 제2권 | 기(記) | 금강산(金剛山) 윤필암기(潤筆菴記) | 이색(李穡) | 2000~2003 |
| 7 | 목은집(牧隱集) | 목은문고 제3권 | 기(記) | 윤필암기(潤筆菴記) | 이색(李穡) | 2000~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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牧隱文藁卷之二 / 記 / 砥平縣彌智山竹杖菴重營記
釋覺照踵門請曰。砥平龍門山。世所知也。其名則曰彌智。舊有菴曰開現。居其菴而悟道者。失其名。得君王竹杖之賜。因額曰竹杖。山中人相傳如此。菴在山中。據高如在心。而上院在臍。則菴之爽塏。出林巒蒼翠之表。俯視雉岳,驪江。如在掌中。而近峯低揖。環列左右。秀狀溫籍。可愛可玩。四時之景。晦明變化。又不在言矣。面壁心灰。情境具泯。偏而沈寂。學者患之。出定之際。聳袂軒眉。片雲飛鳥。一碧万里。山屛江練。左映右帶。眼界廓然。心源瑩然。疑綱絶。業障滅。譬之病不能行者。如杖而起。行而無力者。如杖而健。則因境心生。因心道顯。而於所以用力之地。自有默契者矣。而況竹之虛中。迎刃而解者乎。此照之所以重營是菴也。又曰照之始有志於此也。無因無助。適柳代言室元氏至山中。照則告之。夫人欣然自爲功德主。用丁巳春三月始工。訖於秋七月。丹雘於九月。落成於十月。雖爲屋三間。而佛居中。僧居左右。與大叢林何異。一人發眞歸源。十方虛空。悉皆消隕。則僧家之多寡。屋舍之大小。有非吾輩所論矣。願先生賜一言以記。予曰。照也空華人世。旣以身入法矣。宜求乾栗馱於其心。以爲金剛不壞之地如此其急也。夫一坐具地。視三千大千世界。則大小自定也。然三千大千世界之起滅。又不出於方寸之心。求方寸心。又當於一坐具地得之。則一坐具地。何可少哉。此韓山子之所以爲之記也。後之讀者。幸無譏焉。己未五月日。記。
| 우왕 | 5 | 1379 | 기미 | 洪武 | 12 | 52 | 10월, 정당문학이 되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