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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장 이상한 흥정
[1]
-황금대야(黃金大爺) 만금적(萬金積).
그는 북경제일의 갑부(甲富)였다.
그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 그 자신조차 정확히 모를 정도로 많았다.
오죽했으면 황금으로만 따져 대명천자보다 더 많은 황금을 가지고 있고, 맘만 먹으면 황궁도 살 수 있다는 소문까지 나돌겠는가?
그러나 무엇보다 더 황자강을 놀라게 하는 것은 그에게 칠원성군상 가운데 하나인 문곡상(文曲像)이 있다는 것이었다.
"흐음……."
황자강은 무거운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녀를 안아주고…… 그녀가 준 것과 문곡상을 훔쳐 오라 이거지, 그럼 아무도 모르게 일을 해야겠군. 이제 알았다. 왜 네가 날 살려두었는지!"
황자강은 자운공주를 기이한 눈으로 바라보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결국 야제란 내 별호와 도둑솜씨를 인정한다는 말이군. 그렇지 않은가?"
"……."
자운공주는 침묵만을 고수했다. 그러거나말거나 황자강은 내처 말문을 이어갔다.
"나이와 신체 중요한 부분에 북두칠성점이 있다는 것만 알 뿐 이름도 모르니 나 같이 정력이 왕성한 사내만이 그 기녀를 은밀히 찾아내어 그녀가 주는 물건을 가져올 수 있다는 뜻 아니냐? 후훗!"
황자강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기루에 몇 명의 기녀가 있는지는 몰라도 점이 있는 계집을 몰래 찾을려면 저절로 기루의 기녀란 기녀는 모두 옷을 벗겨야 할 것이고…… 기녀들의 옷을 벗기기 위해서는 자연 운우지정(雲雨之情)을 쌓아야 하는 일……."
황자강은 자운공주의 눈치를 살피며 말을 잠시 끊어보았다.
"……."
하지만 자운공주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황자강을 바라볼 뿐이었다. 황자강은 흉물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클클클, 염려마라. 기녀가 천 명 아니라 만 명이 있다 해도 모조리 안아주면서 그 계집을 찾을 테니까."
"흥! 색마."
자운공주의 입에서 느닷없는 단어 하나가 튀어나왔다.
황자강은 되물었다.
"색마? 그래, 난 색마라고 치자. 그런 색마에게 그따위 일을 시키는 너는 그럼 무엇이냐?"
"……!"
자운공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황자강은 그런 자운공주를 향해 가엾다는 듯 이죽거렸다.
"할말 없지? 하지만 염려마라. 그 계집을 찾아 물건을 이상없이 받아낸 후 만금장으로 들어가 완벽하게 문곡상을 훔쳐올테니까. 넌 내 정력과 땅굴을 파고 자금성으로 들어온 그 두둑한 배짱과 도둑기술을 산 것이 아니냐?"
황자강의 질문에 자운공주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단 똑똑하군."
황자강은 당연하다는 듯 그녀의 말을 받았다.
"요즘은 똑똑하지 못하면 도둑질도 못한다. 돈 좀 있어 보이는 저택치고 보안장치가 안된 곳이 없다. 원래 사기꾼과 도둑놈 머리는 천재(天才)가 아니더냐? 머리가 텅빈 놈은 훔치거나 사기치지 못하는 법이다."
자운공주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아도 비밀을 엄수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겠군."
"이를 말이냐? 그런데 말이다."
문득 황자강은 씨익 웃었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대가가 있어야 일을 하는 데 신바람이 날 것 아니냐?"
자운공주의 두 눈썹이 치떠졌다.
"목숨을 살려준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거냐?"
황자강은 손바닥을 털어냈다.
"그거야 이 귀하신 몸이 필요해 살려준 것이 아니냐?"
"뭘 원하느냐?"
자운공주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황자강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특별한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보아하니 너도 무공깨나 하는 것 같은데…… 나도 이 기회에 무공좀 배워볼까 한다. 그럴 듯한 무공비급이 있으면 줘라."
"무공비급?"
자운공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물었다. 그러더니 돌연 무슨 생각을 했는지 교소를 터뜨렸다.
"호호호홋! 이제보니 조금전 당한 분풀이를 할 생각이구나."
'빌어먹을 년! 머리 한 번 똑소리나네!'
정곡(正鵠)을 찔렸는지 황자강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자운공주는 쾌히 승낙했다.
"만금장으로 잠입하려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은신술(隱身術)과 경공술(輕功術), 그리고 일신을 보호할 무공 정도는 익혀야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네 무공이 워낙 보잘 것 없어 무공비급을 줄 생각이었다."
말을 마친 자운공주는 곧바로 서가로 다가가 몇 권의 책을 꺼내왔다.
황자강은 탁자 위에 올려지는 책을 바라보았다.
-상류신투경(象流神偸經).
-천환보(天幻譜).
-미리신결(迷裏身訣).
-보리금강신경(菩提金剛神經).
황자강은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이름만 봐도 훔치고, 숨고, 속이고, 달리고, 몸을 호신하는 무공이 적힌 비급임을 알 수 있겠다.'
황자강이 네 권의 비급을 보고 있을 때 자운공주가 그 비급들의 내력을 설명했다.
"보리금강신경은 소림사의 물건이다. 진본이 아닌 사본이지만 네가 조금전 복용한 자황단을 녹여 내공화 시킬 수 있는 정종심법(正宗心法)이 수록되어 있다."
황자강은 속으로 생각했다.
'요놈이 소림사 땡중들 물건이라 이거지? 이것을 익히면 일갑자 내공을 지닌 고수가 된다 이 말인데…… 좋았어. 한번 익혀 보는 거다!'
자운공주가 말을 이었다.
"미리신결(迷裏身訣)은 삼백 년 전 강호 고수인 괘연망량(快燕 )의 독문신법이다."
"쾌연망량?"
황자강은 공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 한 번 재미있군. 망량이라면 도깨비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물찬 제비에 도깨비라……이름만 들어도 그가 달리기에는 달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군."
'이놈봐라!'
자운공주는 내심 놀랐다.
생각 외로 황자강의 머리가 잘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허리를 펴며 말했다.
"그럼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군, 천환보(天幻譜)는 오백 년 전 절문(切門)한 천하제일환가인 천환문(天幻門)의 비기(秘技)다. 역용, 변장, 변성, 변모는 물론 바위, 나무, 흙, 심지어 물과 같이 몸 전체를 변신시킬 수 있는 갖가지 환법술이 수록되어 있다."
"호오! 이것만 익히면 양물달린 사내가 계집도 된다 이건가?"
황자강은 우스갯소리처럼 중얼거렸다.
"……!"
자운공주는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그건 틀림없이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자운공주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은커녕 상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 생각을 왜 못했을까?'
자운공주는 넋을 잃은 듯 황자강을 바라보며 망연자실 중얼거렸다.
[2]
-천환문(天幻門).
오백 년 전까지만 해도 신기막측한 환술(幻術)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던 천하제일의 기환술가(奇幻術家)가 바로 천환문이었다.
그러나 그 배움이 워낙 심오하고 까다로워 문하의 제자들 가운데 천환문의 절기를 대성(大成)한 제자가 배출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천환문이 절문(絶門)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사도무림에서 일어났다.
오백 년 전, 사파(邪派)의 종주(宗主)인 사황성(邪皇城)은 천환문을 휘하에 두고 싶어했다.
천환문의 환법술은 사종무학(邪宗武學)의 한 부분을 차지할 만큼 뛰어났다. 하지만 당시 천환문주였던 환유자(幻幽子)는 완고했다.
환유자를 회유하기 불가능해지자 사황성에서는 환유자의 제자 풍령마수(風鈴魔手) 역천행(逆天行)에게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결국 풍령마수는 사부를 시해(弑害)하고 천환문을 송두리째 사황궁에 팔아넘겼다.
그러나 환유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 천환문의 비기가 수록되어 있는 천환보(天幻譜)를 감추었다.
풍령마수는 천환보를 포기한 채 사황성에 투신했다.
기실 사황성에서 노리는 것은 천환보였다. 알맹이 없는 천환문을 자신들 휘하에 두어봤자 강호인들의 눈총만 받게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일이 그렇게 되자 사황성에서는 결국 풍령마수마저 포기해 버렸다.
그리하여 천환문의 문하제자들은 강호에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그런 비운의 역사를 지닌 천환문의 비전비기를 자운공주가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운공주는 마지막 남은 비급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류신투경(象流神偸經)은 너에게 가장 걸맞는 무공이 될 것이다."
"그건 또 왜냐?"
황자강이 물었다. 자운공주는 설명했다.
"상류신투경은 이름 그대로 만상(萬象)의 흐름(流)을 훔쳐 마음대로 다스린다는 허황된 내용이 적혀 있다. 하지만 그 안에 기록되어 있는 만상제왕수(萬象帝王手)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수다. 비록 그 무공이 나타난 곳이 하오문(下午門)이고 그것을 사용한 사람이 도둑이긴 하지만 무영신투(無影神偸)는 백 년 전 천하제일수라는 명예를 한 몸에 받았던 초절정고수다."
"무영신투! 그럼 이 책이 투황(偸皇)의 비급이란 말이냐?"
황자강은 대경실색했다.
-투황(偸皇).
강호인들은 그를 무영신투라 부르지만 도계(盜界)에선 그를 투황이라 불렀다. 바로 도둑질의 황제란 뜻이었다.
도계에 몸을 담고 있는 황자강이 어찌 그런 투황의 이름을 모르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
무영신투 투황은 신출귀몰한 경공술과 신투술로 천하제일수라는 명예를 한 몸에 받아왔던 자였다.
하나 백 년 전 나타난 무황(武皇) 종리천(鍾里天)에게 패한 후 홀연 강호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그런 무영신투 투황의 무공비급이 지금 황자강의 손에 쥐어진 것이었다.
'이것만 익히면 난 도계(挑界)의 지존(至尊)이자 하늘이 된다!'
황자강은 떨리는 손으로 상류신투경을 집어들었다.
그는 빠르게 세 권의 비급을 훑었다.
'자황단을 복용하고 하루 안에 내공심법으로 그 정화를 녹이면 일갑자 내공이 생긴다고 했다. 보리금강신법이면 가능하다. 거기에 투황의 신수와, 쾌연망량의 경공술, 천환문의 환법술을 익히면 만금장 아니라 그 할애비라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다!'
그건 결코 헛된 꿈이 아니었다.
그것을 가능케하는 네 권의 비급이 그의 수중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순간 황자강은 욕심이 생겼다.
'기왕 뺏을 거라면 확실하게 뺏자! 나중에 달라하지 말고 줄 때 갖는 것이다. 계집도 마찬가지가 아니냐. 치마 벗었을 때 먹어야지 안먹겠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아끼겠다고 헛소리 했다가는 남 좋은 일만 시키고 만다!'
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황자강은 상류신투경을 내려놓으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좋군."
"좋지 않은 눈치인데…… 뭐가 불만이냐?"
자운공주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황자강은 콧구멍을 후비며 입을 열었다.
"당연히 불만이 있지. 봐라, 달리고, 훔치고, 숨는 것까지는 좋지만…… 만약 나보다 빠른 데다가 숨은 것까지 눈치채는 절정고수와 맞부딪치면 죽기밖에 더 하겠느냐? 싸우는 무공이 없지 않느냐? 치고 받아 이기는 무공이 있어야지 도망만친다고 되는 것이냐?"
"욕심이 과하군."
자운공주는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욕심이 아니라 당연한 거다. 안주면 난 그 일을 못한다."
황자강은 팔짱을 끼며 눈을 감아 버렸다.
완전히 배짱이었다. 그러나 똥배짱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비밀 리에 일을 시켜야할 입장에 놓인 자운공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주객전도(主客顚倒)라고 했던가?
칼자루가 어느 순간부터 자운공주에게서 황자강쪽으로 바뀌어진 것이었다.
자운공주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완전히 무대포군! 배짱과 무지(無知)…… 거기에다가 엄청난 욕심까지 갖춘 완벽한 불한당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운공주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기분이 상하기는커녕 왠지 모르게 듬직한 믿음감이 들기 시작했다.
'어차피 일회용(一回用)이다. 그 한 번 쓰는 것으로 대륙을 건질 수 있다면…… 좋다! 그만한 투자쯤이야……!'
자운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무엇을 원하느냐?"
"음……."
황자강은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에 들어갔다.
막상 싸울 수 있는 무공비급을 준다고 하자 마땅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뭐 그럴 듯한 것 없을까? 남들 다 하는 검법이나 장법말고 특별한 무공 같은 거면 죽여줄 텐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특별한 무공이 떠오르지 않았다.
황자강은 무공에 대해선 백지(白紙)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황자강은 고심하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튀는 것을 좋아한다."
자운공주가 물었다.
"튀는 거? 무엇이든 녹여내고 튀겨내는 뜨거운 열양진기의 무공을 말하느냐?"
황자강이 황당하다는 듯 외쳤다.
"무공으로 고기 튀길일 있냐? 공주라는 게 자기나라 말도 못알아 듣는단 말이냐?"
"이런……!"
자운공주의 눈썹이 위로 곤두섰다.
황자강은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파르르 떨지 말고 잘 들어라. 튀는 거란 튀기는 것이 아니라 남들 눈에 잘 띄고 멋있게 보이는 것을 말한다. 난 남들 다 할 줄 아는 검이나 칼보다는 좀 색다른 무공을 익히고 싶단 말이다. 무슨 뜻인지 알겠느냐?"
"……!"
자운공주는 잠시 황자강을 노려보다가 불쑥 한 마디 내뱉았다.
"무공은 멋이 아니라 도(道)다."
황자강은 즉시 공주의 말을 맞받아쳤다.
"도든 멋이든 싸워 이기면 장땡이다. 죽어 도를 찾는 것보다는 살아남는 게 먼저 아니냐?"
"인정하마."
자운공주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그게 아니라 너에게 참 무도(武道)를 말하려는 내 실수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으잉?"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자운공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주문은 상당히 까다롭지만…… 마침 네 입맛에 맞을 것 같은 무공비급이 있다."
자운공주는 서가로 다가갔다.
[3]
잠시 무엇인가를 찾는 듯 서가를 샅샅이 훑어내려가던 자운공주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있군."
이어 그녀는 서가 한 귀퉁이에서 먼지가 자욱히 쌓인 책을 한권 꺼내왔다.
황자강은 급히 책이름을 읽었다.
"낙뢰경(落雷經)이라…… 이름은 일단 마음에 드는군."
황자강은 이름만 보고도 마음이 흡족한 듯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그리고는 급히 물었다.
"이 안엔 어떤 무공이 들어 있느냐?"
자운공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낙뢰경엔 한 가지 무공심결이 수록되어 있다. 벽력마기(霹靂魔氣)라고 하는 것인데…… 일종의 내가탄기(內家彈氣)다."
"내가탄기? 그게 뭐냐?"
"내가탄기란 무형의 진기를 몸 밖으로 유출시켜 유형화 시키는 힘을 말한다."
황자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네 년이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것이냐? 난 무공에 대해선 백지다. 좀더 자세히 말해봐라."
"으으……!"
자운공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갑자기 널 처음 보았을 때 죽이지 못한 것이 후회된다."
"빌어먹을! 뻑하면 죽인다고 난리야, 내 목숨이 네년 주머니 속의 공기돌인 줄 아냐? 네 멋대로 만지작거리게?"
황자강도 지지않고 대들었다.
자운공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황자강을 표독스럽게 쏘아보며 소리쳤다.
"한번만 더 년이라고 말하면 모든 것을 백지화시키고 널 죽이겠다."
황자강도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자운공주의 면상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이년아! 그러는 넌 나보고 놈이라고 안그러냐?"
"노옴!"
쏴아아!
자운공주의 노성이 끝나는 순간 무형의 살기가 날카로운 검날처럼 황자강을 향해 날아왔다.
황자강은 일순 얼굴이 새파래졌다.
"잠, 잠깐!"
그는 다급히 손사래를 치며 뒤로 급급히 물러났다.
"늦었다!"
자운공주는 경기를 거두며 소리쳤다. 황자강은 워낙 다급했던 터라 경기가 거두어지는 것도 몰랐다.
"빌어먹을! 안그러면 되잖아!"
"정말이냐?"
자운공주는 다짐을 받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단호한 음성으로 물었다.
"약속한다."
"그럼 말부터 고쳐라. 난 일국의 공주다. 그리고 넌 천민 가운데서도 가장 천한 도둑이다. 존칭을 써라!"
"우라질…… 커억!"
욕지거리를 뱉어내던 황자강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나왔다. 비명을 지르는 황자강의 눈에는 경악의 빛이 역력했다.
사라진 것 같았던 날카로운 경기가 일시에 밀려들며 가슴팍 옷섶을 찢어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배짱 좋은 황자강이라 해도 이 순간 싸늘한 죽음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기죽을 그는 아니었다.
"빌어먹을! 지금까지 가만히 있어놓고 갑자기 웬 난리야? 난리는!"
그 말에 자운공주는 흠칫했다.
가만히 듣고보니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을 단 한 번도 공주 취급을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존칭은커녕 말도 멋대로 하고 심지어 계집이니, 년이니 하는 쌍스러운 말까지 입에 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상한 것은 바로 자운공주 자신이었다.
자운공주는 자신에게 계집이니, 년이니 하는 황자강의 말을 듣고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를 놀라게 했다.
'이럴 수가 있다니!'
자운공주는 망연자실(茫然自失)했다.
정말이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결과였다.
당금 황제인 아바마마조차 그녀에게 계집이니, 년이니 하지 않았다. 난생 처음으로 듣는 쌍스러운 말이었는데도 그녀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대번에 그는 금의위에게 붙잡혀가 혀가 뽑히고, 두 눈알이 파내어진 다음 목이 달아났을 터였다.
그러나 황자강에게 그런 말을 수 없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 말이 무척 자연스럽게 들려왔다.
그런 쌍스러운 말이 황자강이 지닌 분위기와 가장 자연스럽게 배합되어서일까? 아니면 마치 맞춤옷 마냥 편안하고 아무런 거리낌도 느끼지 못해서일까?
불한당이 고상한 말을 한다면 그것은 듣기 거북할 것이었다. 학식이 풍부한 대학사가 쌍스러운 말을 한다면 누구나 이맛살을 찌푸릴 것이 틀림없었다.
불한당은 불한당답게, 대학사는 대학사답게 말을 해야 듣는 사람이 꺼리낌이 없듯 황자강의 말투가 거칠고 쌍스러워도 듣는 사람은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런 탓인지 자운공주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본 공주가 참는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더 상스러운 말을 지껄인다면 그땐 혀를 뽑아버리겠다. 혀가 뽑혔다고 해서 도둑질을 못하고, 그 일을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알겠느냐?"
"알았…… 흠흠, 소이다. 헌데 언제까지 날 누를꺼…… 요?"
아직도 자운공주는 진기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황자강은 무겁게 자신의 몸을 짓눌러오는 무형의 강막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자운공주는 무형의 살기를 거두며 말했다.
"조금전 난 아무 것도 손에 쥐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놈 옷이 마치 칼에 짤리듯 베어졌다. 그게 내가탄기다. 보이지않으나 보이는 것보다 더 무서운 무공이다."
"떠그럴, 입으로 설명해 달라고 했지 누가 직접 눈으로 보여달라고 했나……."
"또!"
자운공주는 눈을 흡떴다.
황자강은 급히 손을 저었다.
"요! 요자를 할려고 했는데 왜 말을 끊나…… 요?"
'쓰벌! 정말 아니꼬와 못살겠군!'
요자를 붙이며 황자강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자운공주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네가 보리금강신법으로 만들 수 있는 내공은 일갑자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내가탄기를 흉내낼 수도 없다. 적어도 삼갑자 이상의 내공을 지녀야 가능하다."
"그럼 무용지물이잖아! 누가 이딴 걸 달래…… 요?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것을 줘야지…… 요!"
황자강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자운공주를 쳐다보았다. 자운공주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일갑자의 무공으로도 그것을 펼쳐낼 수 있는 방법은 있다. 수중에 검을 쥐면 검을 통해, 도를 쥐면 도를 통해, 창을 쥐면 창을 통해 뜨거운 열화살강(熱火殺 )이 뻗어나오게 된다."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할 것이지…… 요. 그럼 이것도 자동이군. 그 용변기처럼 말이야."
황자강은 모르는 척 조금전 화장실에서 있었던 일을 슬쩍 입에 담았다.
손은 탁자 위의 낙뢰경을 쥐고 있지만 그의 눈은 자운공주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파르르……!
자운공주의 면사가 눈에 띨 정도로 심하게 떨리는 것을 황자강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내심 쾌소를 터뜨렸다.
'히히히! 이년아. 네년이 아무리 잘난 척을 해도 난 네년의 벗은 아랫도리를 본 사람이다. 까불지 말라고.'
황자강은 당하고는 절대 살 수 없는 위인이 아니던가?
지금까지 무공이 없는 이유로 자운공주에게 질질 끌려다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까지 죽은 것은 아니었다.
"으으으!"
자운공주는 수치와 분노로 치떨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생각을 바꾸었다.
'구제불능인 자다. 이 자와 계속 상대하면 나만 피곤해질 뿐이다!'
자운공주는 자리에 앉았다.
"가라. 기한은 한달 주겠다. 한달 안에 일을 끝내고 돌아와라."
"한달씩이나?"
황자강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만약 내가 도망가면?"
자운공주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음…… 그렇군. 날 도망치게 내버려 둘 공주는 아니지."
황자강은 이상한 생각을 하며 웃음을 베어물었다.
자운공주가 말했다.
"알면 되었다. 그리고 한가지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조심?"
"요즘 북경 일대에 흐르는 공기가 심상치 않다. 눈에 띠게 강호 무림인들의 출입이 부쩍 늘어났다. 그들 가운데에는 상당한 무공을 지닌 초절정고수들도 있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운이 북경을 덮고 있으니 이 점 명심해서 각별히 행동하길 바란다."
"나같은 도둑에게 강호 고수들이 신경이나 쓰겠소…… 오?"
존칭을 붙인다고 황자강의 말꼬리가 이상하게 변했다. 하지만 자운공주는 그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네놈에게 도합 다섯 권의 무공비급이 있다는 것이 소문이라도 나면 넌 그날부터 강호인들의 표적이 될 것이다."
"표적! 이 비급들이 그렇게까지 대단한가?"
"그건 두고보면 안다."
"그런가? 그럼 가도 되지…… 요?"
"가라."
공주는 그 말을 끝으로 상체를 의자 깊숙이 묻으며 눈을 감았다.
갑작스레 피곤이 밀려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녀에게 아직 휴식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황자강이 불현듯 무언인가를 물어왔기 때문이었다.
"참! 아까 북두칠성점이 박힌 기녀가 있는 기루가 어디라고 했지…… 요?"
자운공주는 얼굴을 구기며 눈을 떴다.
"말하지 않았느냐?"
"글쎄, 공주가 까마귀 고기를 먹었거나…… 내가 까마귀 고기를 먹었거나 둘 중 한 사람은 분명 먹었을 것 같은데…… 난 들은 기억이 없거든…… 요?"
그의 말에 자운공주는 다소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없군…….'
정말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와 얘기를 나눈 것은 한시진도 채 되지 않는데 그 짧은 시간동안 자운공주는 자기 자신을 잃어도 너무나 많이 잃어버리고 있었다.
평소 냉철하던 그녀가 그에게 끌려다닐 정도로 정신을 차릴 겨를이 없어 그런 중요한 말도 까먹은 것이었다.
자운공주는 갑자기 피곤이 가중되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한시라도 빨리 황자강과 헤어지고 싶었다.
"몽환루(夢歡樓)! 그곳에 있다."
그녀는 내뱉듯이 말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몽환루! 분명 몽환루라 했느냐?"
순간 황자강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것은 그가 꿈에서라도 가고 싶어했던 곳에 가게된 기쁨 때문이었다.
대체 몽환루가 어떤 기루이기에 북경 유곽을 누비는 황자강이 이처럼 기뻐하는 것일까?
돌연 황자강이 손을 쑤욱 내밀었다.
"그럼 줘!"
자운공주는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몽패말이냐?"
"그럼! 몽환루에 가라면서 몽패(夢牌)도 없이 가란 말이냐?"
자운공주의 말이 이어졌다.
"지금은 없다. 하지만 이틀 안에 네 손에 그것이 쥐어질 것이다."
"이틀 씩이나 기다리라고? 지금 주면 안되냐?"
"지금 나에겐 몽패가 없다."
"왜 없어, 넌 공주잖아."
"몽패는 여자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아참! 계집이 기루를 드나들 리 없지. 네가 계집이란 것을 깜빡했다. 여간 쌀쌀맞고 살벌해야 말이지. 이건 완전히 선머슴도 할아버지할 정도니 정말 누가 데려갈런지 걱정된다."
황자강은 그렇게 빈정거리며 신형을 돌리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퍼억!
돌연 황자강의 명치 끝에 무엇인가가 날아들었다.
"컥!"
황자강은 명치 끝이 끊어질 듯 아픈 고통을 느끼는 순간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물이 찔끔나오고 숨이 턱 막히는 고통에 그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느새 일어선 것일까? 자운공주가 싸늘한 눈길로 그를 내려다 보았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했다. 그 경고를 어긴 죄다."
'크으…… 무공만 익혀봐라, 네년을 거꾸로 매달아놓고 죽도록 때리고 한 대 더 때리고 말테니까!'
황자강은 이빨을 우지끈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4]
자운공주는 말없이 찻잔을 응시했다. 찻잔 속의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가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자운공주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러는 그녀의 뇌리 속으로는 황자강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어떤 때는 능글맞은 모습으로, 어떤 때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 고통을 참아내는 모습으로, 어느 때는 역겹다 느껴질 정도로 비굴한 모습으로, 그러다가 어느 때는 얄미운 모습으로 시시각각 변했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자다."
그녀의 말마따나 황자강이 잠깐 사이에 자운공주에게 보여준 여러 모습은 커다란 혼돈이 되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운공주는 어느 것이 황자강의 진정한 모습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자운공주의 중얼거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약…… 그가 올바른 길을 통해 학문을 배웠다면…… 아마 세상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심기를 가진 사람을 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운공주의 예측은 일리가 있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없게 하는 자가 어떤 일을 꾸민다면 세상은 결코 그의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을 것이었다.
자운공주는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 자는 이곳을 나갈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게 반말을 하고 떠났다. 잘 있어…… 나 간다 하고……."
그 생각을 떠올리자 울화가 치밀기는커녕 새삼스럽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정말이지 황자강이란 자는 반말을 하지 말라고 그토록 타이르면서 따끔하게 혼까지 내줬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뿐이었다.
더욱이 그는 나갈 때 갑자기 자운공주를 돌아보며 그녀의 속을 왈칵 뒤집어 놓기까지 했던 것이다.
-핫핫핫, 공주! 몽환루의 그 기녀를 안을 때 공주 생각을 하겠다.
그때는 황자강이라는 작자가 자신의 명을 따르겠다는 의미로 들었다.
하지만 지금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몽환루에 보낸 첩자(諜者)와 자신은 똑같은 곳에 북두칠성점이 있지 않은가?
결국 그녀를 안으면서 공주를 안고 있다고 상상하겠다는 발칙하면서도 대역무도한 말이었다.
"흥!"
자운공주의 입에서 차가운 냉소가 토해졌다.
"돌아오기만 해봐라! 그땐 네 놈의 혀를 뽑아놓고 말테다."
허나 왠지 그녀의 말 속엔 살기나 분노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깃들어있지 않았다.
첫댓글 굿,,,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