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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관 공식 홈페이지 : http://www.hsdk.co.kr/
홍승길
*1940년 함북 청진 출생
*1971년6월19일 최용술 도주님으로부터 사범실력7단 (단증번호2호)
*대한합기도협회 본부도장 수덕관 수석사범 역임
*합기도수덕관 제1지부도장 수도관 창건
*전,새마을운동 중앙본부 연수원장 역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4,19혁명 공로자(건국 포장부511호)
*국가 유공자(55-000032)
*국가개혁국민총연합회 부총재
오재석
*1952년 경북 대구 달성군 출생
*최용술 도주님으로부터 실력 사범5단 승인
*대한합기도본부 수덕관1지부도장(수도관)수석사범 역임
*전 쌍방울건설 대표이사
*전,합기도수도관 총관장
곽성문
*1952년 경북 대구 달성군 출생
*수도관 사범역임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회장
*MBC보도국 사회부 외신부기자
*미 국무성 산하 미국의 소리(VOA)파견
*MBC 보도국 정치부 기자
*워싱턴 특파원
*뉴스테스크 편집부장,보도부국장
*스포츠국장,2000년 시드니올림픽 단장
*MBC-ESPN 대표이사,MBC드라마넷,MBC게임 대표이사
*제10회 세예대전 대상 수상(행초서 부문)
*17대 국회의원
문종금
*1958년 경북 울진 출생
*대한합기도 본부 수덕관 사범 역임
*대한합기도 본부 제1지부도장(수도관 사범 역임)
*영화감독
*패시픽월드 영화제작 주식회사 대표
*러시아무술 삼보 아시아 회장
김홍철
*1950년 전남 광주 출생
*1977년 대한민국해병대1사단 합기도 무술지도사범
*1982년 수도돤 본관 수석사범 역임
*외교통상교섭 전문위원
*해양수산부정책자문위원회 수산분과위원
*대통령직속농어업,농어촌특별대책위원회 위원
*제4회 바다의날 수산진흥유공 대통령표창
*미국 예일대학 경영학박사
*합기도수도관 총관장
*사단법인 전세계합기도 연맹 총재
*수협중앙회 대표이사
한국합기도의 명칭과 합기도의 원류(출처 : 수도관 블러그)
1. 한국합기도의 명칭과 합기도의 원류
지금 우리가 합기도라는 무술이름으로 수련하고 연마하고있는 이 무술은 대한민국합기도(합기도라는 명칭 이전에 합기술, 유술)는 도주이신 덕암 최용술선생님(1899~1986년)께서 해방 후(1946년 1월 15일) 덕암선생님의 고향인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광평리461번지(매곡면 150번지 할골내)에 돌아왔으나 고향을 떠난지 38년여의 세월이 흘러 고향에서 안착할 수가 없음에, 처음 경상북도 대구시 중앙통의 한국은행 옆에 거주하게되어 대구시에 정착하면서 부터 그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해방 직후 이었으므로 사회가 안정되지못하였으며 어수선하였다. 사회가 안정되지 못했을 뿐만아니라 경제상황도 어려운 시기였다. 1946년 여름 대구의 서문시장에서 조그만한 사건이 벌어져 최용술 선생의 무술이 세상에 얼굴을 내밀었으나 단순한 싸움으로 인하여 무술을 선보였기 때문에 그 사람(최용술선생님)이 누구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최용술 선생님이 대구에 정착한지 6개월여 짧은기간이었으므로 그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는 시기였다. 그러나 그 때 서문시장에서의 싸움으로 인해 당시에 그 현장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무용담으로 이야기만 난무하였다. 그 때 서문시장에서의 싸움에서 상대가 당시에 대구시내는 물론 여러지역에 상당히 알려진 씨름선수 였으며 이 지역에서는 알려진 힘께나 쓰는 사람으로 누구도 감히 접근을 꺼리는 어깨(?)였었던 탓이었다. 그러한 일이 있고 나서 대구시내 중앙통에서 생활하시던 최용술 선생님은 당시의 사회가 어수선했던 이유와 최용술 선생님 자신이 불의을 보면 참을 수가 없었던 강직하고 깐깐한 성품으로 인해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다. 최용술 선생님이 대구에서 생활을 시작한지 어언 2년여를 지나는 동안 이러한 크고 작은 일들이 대구시내의 세인들의 입에 이야기거리로 소문이 무성히 나돌고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세간의 사람들은 최용술 선생님을 "중앙통 그 영감"이라고만 불려졌다.
1948년 어느 날 대구시내 달성공원 앞(계산동) 대구양조장 골목에서 일어난 시비로 인해 당시의 대구양조장을 부친 서동진씨( 제3대국회의원, 서양화가)을 대신해서 맡아 운영하던 서복섭사장의 눈에 띠게 되었다. 서복섭 사장도 무술을 잘하는 영감이 중앙통에 있다는 정도는 풍문으로 만 들었던 때였으나 최용술 선생님의 무술과 얼굴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이 경영하는 대구양조장에서 일어난 양조장 인부들과의 다툼으로 인해 우연히 최용술 선생님을 만나게 된것이었다. 화가난 최용술 선생님을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하여 차를 권하면서 젊은 인부들의 무뢰함에 대한 이해를 구했다. 그리고 조금전에 양조장 마당에서 보았던 최용술 선생님의 무술에 문득 들어 왔던 이야기가 있어서 최용술 선생님에게 "중앙통에 계십니까?"하고 물었다. 말로만 듣던 바로 그 중앙통영감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서복섭 사장은 최용술 선생님에게 무술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으나, 최용술 선생님이 별로 신중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을 있다가 서복섭사장 자신도 무술을 좀 한다고 하고 무술이야기를 계속하자, 최용술 선생님이 "무슨 무술을 했느냐?" 고 물었다. 서복섭사장은 "유도를 좀 했습니다."고 대답하자, 최용술 선생님이 어디나를 한번 넘겨봐라.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서복섭사장이 30대 초반나이에 최용술 선생을 잡아 넘겨보려 했으나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유도를 좀 한다고 했던 자신이 나이든 영감에게 수모를 당한 것 같아 서복섭사장은 은근히 화가올라, "어디 다시한번 해보십시다." (이때, 서복섭 사장은 창문 밖으로 집어 던져 버리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하고 최용술 선생을 붙잡으려는 순간, 순식 간에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게 당했는데, " 퍽석 주져앉혀져 팔과 팔목을 쓸수가 없이 통층이 오고 힘이 빠져버리더라."는 것이다. 최용술 선생님이 술기를 풀고 나서도 한참을 통증에 고통을 느끼다가 " 선생님 저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사정을 하여 겨우 승락을 얻어, 서복섭 사장이 자신의 사무실에서 최용술 선생님께 개인 교습으로 무술을 배우게 되었다.(서복섭씨 증언)는 것이다. 이것이 최용술 선생님이 대구에서 처음으로 국내의 일반인에게 자신의 무술을 교습하기 시작한 것이 되었다. 그 후 유도로 이름난 신도환(국회의원)과도 만나게 되었고 신도한씨도 최용술 선생님을 깍듯이 선생님으로 모셨다고 한다. 이시기에 제자들 최용술 선생님께 무술의 이름을 묻자, "야와라(유), " 쥬지스(유술)" 이라고 했다고 한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사회는 더욱 혼란과 어려움에 놓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하여 당시에 생활이 어려웠던 최용술 선생님에게 본격적으로 무술을 가르치라고도 하고, 배우겠다는 사람들의 권유로, 1951년 2월 12일 "대한유권술"이라고 이름하여 개인교습을 시작하였다. 그 후에 1952년 최용술 선생님께 찾아와 무술을 배운 사람이 서병돈씨, 장승호씨였다. 그리고 이어서 1953년에 지한재씨, 김무홍씨, 문종원씨 등이 이었다. 그 후 1954년 대구시내 염매시장 옆 주택가의 어떤 할머니집의 헛간을 얻어 헛간을 띁어내어 공간을 만들어 무술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6년 봄 최용술선생님이 대구에 정착한 후 처음으로 대구시 중구 봉산동에 자신의 집을 마련하게되어, 자신의 집에 도장을 만들고 이곳에서 가르쳤다. 1958년 홍승길선생님, 김정윤선생 등이 최용술 선생님 문하에 입문하였다. 이 분들이 정식으로 최용술 선생님 자신의 집에서 가르친 제자들이다. 1960년 3월 정식으로 "대한합기술무도회(협회)"를 설립하여 최초의 최용술 선생님 무술인 단체가 설립되었다. 1963년 9월 "대한기도회"를 창립하고 최용술 선생님이 창립제1대 총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2년의 임기가 만료되어 1965년 10월 다시 최용술 선생님이 제2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그 동안 10여년이 흘러 오는 동안 최용술 선생님의 대구 봉산동에서 도장을 계속해서 운영하면서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고, 최용술 선생님으로 부터 무술을 배운 사람들이 최용술 선생님의 도장 개설 승락도 없이 저마다 각지에서 도장을 열고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더욱이 최용술 선생님으로 부터 무술을 배웠지만 몇 개월, 또는 단기간 배운사람들이 부족한 술기와 무술 습득 수준으로 도장을 열기도하고, 그런 사람들로부터 배운사람들이 또 도장을 열어 가르치면서 최용술 선생님이 가르친 무술이 변형되기 시작하고, 술기가 부족하면 다른 무술을 최용술 선생님 무술인 것처럼 가르쳐 최용술 선생님의 무술이 정도와 정술을 이탈해 가고 있었다. 최용술 선생님이 초청을 받아 어느 도장에가서 선생님에게 술기시범을 보이는 것을 보면, 선생님이 전혀 가르치지도 않았거나, 다른 무술을 하고 있거나, 술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상한 억지기술을 구사하거나 하는 이상한 무술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고 이렇게 한탄하시기도 하였다.
"현재 상태로서는 뭐 이 뒤죽박죽이야! 도장 어느 곳에든 가보면 전부가 다르고, 어디로 가는 건지 분간을 못하겠어" " 나는 내 딴에는 하느라고 하고 최선을 다했는 데, 어느 도장에가서 보면 이것이 무신(무슨) 도라할까.. 스모라고 할까. 무슨 이런 짓을 하니... 전부가 이상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 어떤사람이 와서( 최용술 선생님도장에) 한 몇달 있으면 안나와요, 그래서 아무개 어디 갔냐/라고 하면..., "저기 어디어디에 도장 차렸어요"라고 해,.... 그게 안되요! 내 생전에 이 무술이 바로 가는 것을 보고 죽어도 죽었으면 원이 없겠다......" 이렇게 안타깝게 걱정하였다.
1968년 최용술 선생님은 무술의 대통합과 술기를 바로잡아 올바른 술기로 전승하기 위해 더 늦기전에 통합을 위해, 1968년 5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대한무도회 전국합기도통합 제1회 전국시범대회"라는 명칭으로 시범대회를 하는 자리에 나가 시범을 보이는 한편, 당시의 무술인들이 추대하여, "대한합기도"라는 명칭의 도주로 취임하게되었다. 그리고 대구시에 있는 최용술 선생님의 도장에 ["대한합기도본부 합기도 도주 최용술" ]이라는 현판을 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에서 [합기도]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하게 되었다. 이 통합대회의 명예대회장이 김종필씨였다. 그리고 당시의 정계, 관계, 경제계 등 당시의 거물급인사들이 지도위원이었다.
"이 때의 통합선언문은 [ 우리들은 대한 합기도의 보다나은 발전을 위하여 이제까지 분파와 편견을 일소하고 전원 혼연일치 단결하여 오로지 기예연마와 무도수업으로서 심신을 단련하며, 인격을 토치하고 외유내강한 정의의 사도로서 건국도상의 국토방위대열에 앞장설 것이며 합기도가 민족고유의 슬기로운 호신무술로서 국내는 물론 세계만방에까지 그 기예와 정신을 펼치고저 하는 신념으로 우리 전국합기도 회원은 합기도 중흥의 기치를 높이들고 대한합기도협회의 한 깃발아래 뭉칠것을 30만 회원의 이름으로 온 국민 앞에 선서하며 이를 만천하에 선포한다. 1968년 5월 27일 장충체육관에서" ] 이다.
[합기도]라는 이름으로 이를 통합하기위해, 이와같은 웅대한 포부를 밝힌 대회를 개최하고 나서, 무엇보다 먼저 합기도라는 이름으로 술기를 통합해야 했고, 전국의 수많은 각 관장과 사범들에게 술기의 올바른 정립을 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970년 10월 31일 제1회 합기도주인증 "합기도공인단 심사 "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 제1회 공인단 심사는 대한 합기도 도주이신 최용술 선생님과 대한 합기도 본부도장(수덕관) 수석사범 홍승길 사범선생님이 주관하여 실시하였다. 이때, 3단이하는 유단자는 서울 신일체육관 유도장에서 실시하고, 4단이상은 서울 종묘에 있엇던 신무관 본관(김무홍관장)에서 실시하였다.
이 때 합기도주공인단 인증심사에서 각 도장에서 수여한 자신이 보유한 단증 정도의 술기가 부족하고, 술기의 습득정도가 미흡하여 , 각 도장 자체에서 수여한 유단자들의 단증에 나타 있는 단증과 그 단증소유자의 무술의 실력을 공인단심사위원들이 심사한 결과 자신들이 보유한 단증을 공인단증으로 인증하는데에 미치지못하는 경우에는, 각 도장에서 수여한 단증의 단수를 낮추어 내려 인정하였다.
자신이 보유한 도장에서 수여한 단증보다 공인단을 낮게 인정하자, 각 도장은 술기의 보유숫자, 각자의 무술의 습득정도와 기술구사 수준, 무술 실력 정도가 대한 합기도 본부 공인단증 인증 기준에 현저히 미치지못하여 술기의 통합과 일원화를 위해, 이러한 조치가 불가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수긍하지않았고, 각 도장에서 협조하지않게 되어 더이상 술기의 수준향상과 더 많은 술기를 각 도장에 전수할 수가 없었으며, 제1회 심사 후에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북 대구에 있는 대한합기도 본부 최용술 도주 선생님 직할 도장(수덕관)과 제1지부도장(수도관 홍승길 합기도 본부 수석사범)의 제자들과 그 이전에 최용술 선생님으로 부터 많은 술기를 받은 최용술 선생님의 일부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최용술 선생님이 보유하고 계신 많은 술기와 고도의 기술 수준인 고급술기는 더 이상 전수해 줄수가 없게 되었다. 물론 최용술 선생님으로 부터 오랜기간을 사사받은 몇분의 수제자들에게는 차별적으로 술기를 전수해 주기도하였으며, 특히 수제자에게는 최용술 선생님이 보유한 술기를 모두 전수하였다.
그로인해, 각 도장의 계열별로 술기는 그 종류와 숫자가 천차만별이 되고, 술기가 부족한 일부도장에서는 다른 무술을 혼합하여 가르치기도하여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되어가고 있으며, 대서가 멀어질 수록 더욱 심화되고 있다.
한국합기도의 본산이고 원류는 덕암 최용술 선생님인 것임을 최용술 선생님으로부터 무술을 배웠던 사람들은 모두다 알고 있다. 그러나 일부 에서는 마치 자신이 한국 합기도의 창시자인 것처럼 행세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탐문되고 있다. 이것은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되며, 신의와 의리를 목숨보다도 더 소중히 여겨야할 무도인들로서는 온당한 처사가 아닌 것이다. (제1.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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