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무대미술가 이원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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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경(88)은 무대미술가 1세대다. 하지만 이를 입증할 자료는 마땅찮다. 연극관련 행적을 증언할 만한 사진 한장 없다. 1941년 그가 무대장치를 맡았던 현대극장의 ‘흑룡강’ 공연 사진 한장이 연극관련 잡지에 되풀이 소개되지만 그조차 그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무대미술가다. 구술채록 때 그는 채록자보다 더 자주 펜을 움직였다. 그의 기억은 그림체로 먼저 표현됐다. 이면지를 메우는 손놀림이 잦아들어서야 설명이 부연처럼 덧붙었다. 기억조차 무대그림처럼 도안해내는 그의 감각이야말로 무대미술가임을 입증하는 최상의 자료인 셈이다.
경성 선린동에서 태어난 그는 경성유치원·교동보통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다. 권문세가 자식이나 수재들만 모인 학교를 다녔지만, 그는 법대나 상대를 가길 원했을 부친의 기대를 저버린 채 일본으로 건너갔다.
38년 무렵 그는 일본미술학교에 적을 두고 재동경 미술가들의 모임인 백우회를 들락거렸다. 하지만 그를 이끈 것은 축지소극장의 연극이었다. 축지소극장의 막에는 그리스 연극제전에서 모셔졌던 디오니소스를 상징하는 포도 한 송이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빈한한 인텔리겐차들이 모인 우중충하고 컴컴한 극장에서 하는 서양 번역극”을 보며 구속받지 않는 세계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는 감상적·낭만적·개인적이고 데카당한 내면 동기들에 충실했고, “자신을 위해서” 연극 세계에 빠져들었다.
당시 신협(新協)과 신축지(新築地)극단이 축지소극장의 전속처럼 활동했는데, 이원경은 신축지극단의 무대미술 연구생으로 입단했다. 일본극단의 조선인 연구생으로서 무대를 지켜보며 무대장치 평면도를 그리곤 했다. 그 일부가 겉장을 누런 삼베로 싼 그의 자그마한 수첩에 남아 있다. 신축지극단이 유락좌(有樂座)에서 공연한 ‘햄릿’의 무대장치 평면도에는 각 막과 장에 따른 무대장치 형상과 무대의 배치, 색 등이 자세히 밝혀져 있다.
이원경이 신축지극단에 소속되어 있을 무렵, 재일 연극인들의 활동은 다양했다(박스 기사 참조). 일제의 탄압으로 40년 신협과 신축지극단, 동경학생예술좌가 해산됐다. 이원경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비슷한 시기에 귀국한 김일영은 서대문에 있던 보호관찰소에 감금돼 있다가 조선연극문화협회 소속 극단의 무대장치를 담당했다. 이원경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처음으로 무대장치를 담당한 것은 40년 9월 공연된 극단 고협의 ‘무영탑’(현진건 작, 함세덕 각색)에서였다.
41년 동경학생예술좌원이었던 주영섭·윤묵이 극연좌를 이끌던 유치진과 함께 현대극장을 창립하면서, 만주국 설립을 옹호하는 내용의 유치진 작 ‘흑룡강’을 준비했다. 이원경은 무대장치 준비를 위해 연출 주영섭과 만주국을 답사하기도 했다. 이원경은 ‘조춘’이라는 독일작품 번역극의 무대장치를 한 후 유치진과의 불화로 현대극장을 나왔고, 징용을 피하려 광주로 내려가 미술교사로 재직했다.
이 시기 광주 수피아여고 근처 선교사 사택을 그린 그의 유화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다. 그리고 그는 경성의 연극계를 생각하며 ‘해적 후리베이즈’라는 작품을 일어로 써서 43년 ‘국민문학’에 투고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서양인을 나쁘게 표현한 이야기책들이 나돌았고, 그런 소재로 “스릴 있는 로맨스”를 쓴 것이었다.
60년대 이후 이원경의 연극이력은 다양하고 활발했다. 삼일로 창고극장 운영, 창극 연출, 희곡 창작을 했다. 또 연극관련 제반 사항에 강하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1908년 이인직의 ‘은세계’ 공연이 창극이 아니라고 주장하거나, 유치진의 ‘소’가 사카나카 마사오(阪中正夫)의 ‘말(馬)’을 모방했다고 보는 견해가 그 예다. 일본 가부키의 용어인 대단원과 나라쿠(奈落)가 오용되는 실태를 지적할 때나, 국립극장 설립과 관련된 이면사에 대해 논의할 때 그는 남다르게 강경하다.
이번 구술채록이 물꼬를 튼 곳은 해방 전 연극 풍속 쪽이었다. 그는 경성 중심지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경성의 공연문화에 대한 경험이 남달랐고, 예의 그림솜씨로 경성의 공연 풍경을 재연해냈다.
일제시대 경성의 새로운 문화로 유곽·요릿집·극장을 꼽을 수 있는데 이중 요릿집과 극장 문화의 관계가 이채롭다. 명월관·태화관·식도원·국일관 등 요릿집을 드나드는 기생들은 곱게 화장을 한 채 동양극장에 갔다. 요릿집 심부름꾼들은 공연 중에도 문을 열고 “○○아씨 놀음이오”라고 외쳤다. 연극은 일시 중단되고 이름이 불린 기생은 상인들로 채워진 극장의 다른 관객에게 자신을 ‘광고’ 하며 천천히 극장을 빠져나갔다.
종로 상인·기생들이 주요 관객이었으므로 기생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이 공연됐고 제한된 관객층 때문에 1주일 단위로 작품이 바뀌었다. 그래서 동양극장 전속작가들은 번갈아가며 빠른 속도로 집필했다. 어린 단원은 등장인물별로 대사를 옮겨 써서 배역을 맡은 배우들에게 나누어주었는데 이를 가키누키(書き拔き)라고 했다. 빠르게 옮겨 적기 위해 글자를 축약하거나 생략했다. 이 시기 필사대본에는 ‘이도령’이 ‘이도’ 또는 ‘이령’ 식으로 표기됐다.
또 명동에는 신천지라는 공터가 있었다. 말시바이(馬芝居)라 불리는 일종의 서커스 공연이 자주 열렸다. 그런가 하면 현재 장충체육관 자리의 둥근 공터에서 자전거대회가 열릴 때는 악사들의 생음악 연주와 “엄복동이냐 조수만이냐”를 외치는 관객들의 구호가 흥겹게 어우러졌다. 어려서 할머니와 함께 간 광무대에서는 경기입창과 철봉 이외에 줄타기가 자주 공연됐다.
40년 일제는 그 악명 높은 기예증 발급 심사를 했다. 배우·악사·가수들이 주요 심사대상이었다. 극작·연출·장치는 심사 면제를 받았다. 무대장치는 대개 나무 프레임에 광목을 박아 만든 캔버스를 이용했는데 이때 필요한 광목은 조선연극문화협회 소속 극단에만 배급됐다. 광목을 빼돌리면 생활비를 벌 수 있었다. 그래서 연극문화협회에 소속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는 것이다. 어두운 시절, 씁쓸한 이면이다.
〈백현미 전남대 교수·연극평론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