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9.29.자정...
날이 밝는대로 나는 지리산으로 간다...
어머님이 무척 걱정하시는 눈치다. 전국적으로 비가 내릴
거라며 초저녁부터 몇 번이나 내게 일깨우신다.
지리산에 전화를 해보니 통제는 안 할 거란다. 그런데 산장이
예약 제라서 자리가 차면 못 들어 갈 수도 있다는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텐트도 안 가지고 가는데...
이번 산행은 확실히 비와의 싸움이 될 것 같은 느낌.
침낭과 간단한 옷가지들을 비닐로 감싸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준비를 한다.
우여곡절 끝에 한장님과 척키님은 가지 못하고 혼자 따나게
된 만큼 빠른 산행을 해볼 계획이다.
천식이 다시 나를 못 견디게 구는데....
거기다 불면증이 출발하는 날까지 떠나질 않는다.
야간 산행 통제, 대피소 야영 금지, 대피소 이용료 5,000원, 입산 및
대피소 사전 예약제 실시.
비행기 약 15분 지연 출발...
ke1902편 10시 15분 출발. 공항에서 비행기로 옮겨지는 셔틀버스 안에서...
아주머니 몇분이 늦어져 비행기 이륙 시간이 지연됨. 아주머니들 끼리 하는
말. 먼저 두분이 왔는데 나중 아주머니 들에게 "이렇게 늦으면 어떡해?!
최소 5분전엔 와야지..." 짜증섞인 말투다. "니들 땜에 위에서 얼마나 욕먹은
줄 알아? 비행기가 날씨땜에 뜰까 말까 하는판에 아주머니 몇 분 땜에 이래
서야 되겠냐며 욕 먹었단 말이야!..."
날씨 때문에 조금 걱정하던 차에 그 모습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광주 까지는 약 30분이 걸린다고 한다. 11시경 광주 공항에 도착. 광주도
제주만큼이나 비가 많이 내린다. 짐을 찾고는 안내 데스크로 가서 화엄사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을 물어 보았다.
"공항버스 999번이나 515번을 타고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구례로...
그리고 화엄사로 가세요." 상냥하게 일러준다. 마침 버스가 대기하고 있어서
차를 탈수 있었다. 버스비(1000원)
비행기에서 내릴 때부터 빗줄기가 거세게 내리쳤지만 다행히 우비를 입고
있어 젓지는 않았다.
11시 25분에 차를 탔는데 한참이나 차가 움직이지 않자 앞에 앉은 아주머니가
운전기사에게 언제 출발 하냐고 묻자 아저씨 왈 45분 출발이란다. 이런 빌어
먹을... 차는 45분 정각에 출발했고 17분 후에 고속 버스 터미널(종합 터미널)
에 도착 했다.
12시 35분 화엄사행 티켓을 끊고 (5000원) 비행기로 운반할수 없었던 가스 2개를
구입했다.
분식코너에서 아침겸 점심으로 떡만두국을 먹음.
버스는 예정대로 35분에 출발했고 약 1시간 40분이 소요될 예정이다.
제주에서 비오던 모습을 여기서도 볼수 있어서인가, 아니면 광주에 왔던 몇
번의 기억이 낯설움을 없애 주어서인가, 타향같은 느낌이 전혀 없다.
내가 지리산을 찾는 이유는 내 한계를 시험 할만큼은 넓다는 이유가 가장 큰
것 같다.
어제 밤 설레임으로 잠을 못자서 피곤한 탓으로 버스에서는 내내 졸았다.
버스는 구례를 거쳐 곧장 화엄사로 갔다. 나를 제외한 나머지 승객들은 구례에서
모두 하차했다. 승객이라곤 나 혼자 뿐이다. 날씨를 보건데 어쩌면 오늘 산에
오르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14시 10분 화엄사에 도착했지만 비로 인해 지리산 입산을 통제 한단다. 버스를
타고 노고단에 가면 내일쯤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고 한다. 일단은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시간이 남아 화엄사를 둘러 보기로 했다. 웅장함을
기대하고 가서 그런가 규모는 그리 커 보이지는 않는다. 문화재 입장료와 지리산
입장료가 같이 되어 있어서 2400원을 지불해야 했는데 적절치 못하단 생각이 들었다.
화엄사 대웅전 윗쪽으로 가면 구층암이란 암자가 있는데 한적하고 조용한게 참
맘에 들었다. 화엄사를 찬찬히 둘러보고 내려오니 16시 15분.
노고단으로 가는 버스는 17시 10분에 있는데 그것이 막차란다. 노고단으로 가는
버스는 아직1시간이나 남았다. 여정의 경로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관리원의 말에 따르면 이번 장마때 계곡을 잇는 철재 다리가 유실된채 아직 복구가
되지 않았단다.
주차장이 있는 지리산 탐방 안내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보니 1분 차이로 막차를
놓쳤다. 차표를 파는 아저씨가 만 오천원에 성삼재까지 태워 주신다 길래 하는수
없이 봉고차를 타고 갔다. 1분 차이로 치르는 대가가 너무 컸다. 15~20분 후
차는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했고 이천원의 입산료를 다시 지불하고 비를 맞으며
25분을 걸어 올라가니 노고단 산장에 도착했다. 중간에 지름길이 있어 그리로 올랐다.
배가 고파 밥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웠고, 우연히 산장에 먼저 와 있던 제주분을
만났다. 이런저런 애길 하다보니 지니고간 한일 소주 사홉들이를 다 비웠다.
내일은 뭘로 마시나.... 쩝
다음날의 계획을 짜보다 11시경 잠을 청했다.
10월 1일
윗침대 사람들이 짐챙기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5시.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거센 비가 아닌 안개비였지만 양이 많고 바람이 불어 30분이면 족히 옷을
적실만 하다. 좋지 못한 날씨. 그래서 그들과 같이 출발 하기로 했다. 밥과
미역국으로 아침식사를 준비하는데 6시쯤 되자 날이 훤히 밝는다. 같이 가기로
한 그들은 간단히 스프와 라면을 끓여먹고 6시 20분 출발, 6시 35분 나도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잔의 여유를 갖는다. 밤새부터 들려오던 근처 계곡의
물소리와 뿌연 안개... 정취가 그만이다. 그 누가 이 순간의 맛을 알까...
내가 그들과 식단이 다르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같이 출발 하지는 못했지만
이미 안개도 어느정도 걷히고 바람도 사라진 상태여서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네들이 떠나기전 몇 개의 담배를 얻으려 했으나 소주도 어젯밤 끝을
본 마당에 서너개 밖에 남지않은 담배 까지 줄수는 없었다. 참! 어제는 비가
온 탓으로 산장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침상 한층 전체를 혼자 쓸수 있어 무지
편했다.
아침도 든든히 먹었고, 7시 5분 천왕봉을 향해 출발했다.약한 안개비도 줄어들어
우비는 입지 않았고 반바지와 반팔티로 가뿐한 복장을 했다. 약 7분간 급경사를
오르니 노고단이 나타났다. 급경사라 매우 숨이 찼다. 안개 때문에 주변 경관은
보이지 않는다.
7시 20분 노고단 출발... 삼십분간은 워밍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오르는데
무척 고생하다가 그 이후부터 오르기가 수월해졌다. 7시 35분에 나보다 조금
일찍 출발한 두분을 만났고 부탁해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어느 대학의 박사님과
그 제자들로 식물분포를 알아보기 위해 오신거란다. 7시40분 돼지평전 도착.
멧돼지가 가끔 출현해 돼지평전이란 애기도 듣는다. 피아골 우측 왕시루봉쪽에
안개가 끼인 모습이 입을 벌어지게 만든다. 멀리 남동쪽으로 섬진강 줄기도 얼핏
보인다. 비온후라 그런지그 경치가 선명한게 기가 막히다.
10분을 구경하다 다시 출발 이 자연 앞에서 내 표현력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비극이 아닐수 없다. 참 앞서의 한 사람은 산을 아끼기 때문에 잘 오르지 않는단다...
경관을 보며 시간이 지체된 것 같아 걸음을 빨리 했다. 다시 바라보아도 산에
걸쳐진 안개와 그 사이사이로 삐죽 솟은 산들은 신들의 정원에 온것처럼 신비감을
불러 일으킨다.
비가 온 뒤라 공기가 아주 상쾌하다. 8시 17분 임걸령삼거리 도착 8분후 임걸령
도착. 혼자 야영한 사람이 텐트를 걷고 있었다. 8시 50분 노루목 도착. 잠시 쉬기로
했다. 중간 중간 오는길엔 도토리가 수없이 떨어져 있었다. 걷는 동안 머릿속엔
아무 생각도 없는 듯 하면서도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교차된다. 인생도 산행과
마찬가지다. 내 목표를 위해선 도중의 갈림길이 나타나더라도 계속 가던 길로
가야하는 것처럼... 55분 노루목 출발.
9시 10분 삼도봉 도착. 임걸령에서 야영했던 분을 다시 만나고 애기하며 보조식으로
약간의 비스켓을 먹었다.
안개가 너무 많이 끼어 주변 경관을 일절 관망할 수 없다.
날씨만 맑았다면 꽤나 멋진 경관이 펼쳐져 있을 것 같은 곳이다.
10분 휴식후 출발. 약 10분 동안 급경사의 내리막 길이 있는데 관절에 무리가
가기 쉬운 지형이다. 그 다음 부터는 능선을 따라 걷기가 수월해진다.
9시 34분 뱀사골 대피소 윗쪽에 도착. 지도상 토끼봉 까지 산세가 급하고 그
이후부터 능선을 따라 완만하다. 토끼봉 까지는 무리가 가지 않게 쉬엄 쉬엄 가기로
했다. 올해도 이길은 작년 올때처럼 비가 끼인 날씨가 똑 같다. 10시 8분 토끼봉에
도착해 아침에 같이 출발 하기로 했던 세분을 만났고 부탁해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왼쪽엔 섬진강이, 그 우측으론 운해에 둘러싸인 산이 보인다. 섬진강 위로도 얇은
안개가 끼어 그야말로 한폭의 산수화를 완성한다. 7분후 그들과 함께토끼봉 출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가 45분에 같이 휴식을 취했다. 중간에 주웠다며 잣 열매를
준다. 껍질을 까고 몇 알을 먹었는데 맛이 고소하다. 껍질채 잣을 보기는 처음이다.
11시 20분 명선봉 도착. 시원하게 탁 트인곳이 아니라 막힌 곳이다. 거기서 약 5분을
더가니 시설이 아주 잘 되어 있는 나무계단이 연하천 산장까지 내리막 길로 이어져
있다. 나무 계단이 되어 있어서 그런가 11시 37분에 생각보다 빨리 연하천 산장에 도착
했다. 산장의 규모는 다른곳에 비해 조금 작았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여기서 묵는
사람들이 많진 않지만 산장이 작은 만큼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쉽고 분위기가 참 좋은
곳이란다.내가 보기에도 관리인들 인상부터가 다른 산장에 비해 퍽 좋아 보인다.이곳
산장의 관리원들은 산악 구조대원들이란다. 조금후에 아까의 일행이 도착했다.
라면에 햄을 넣어 간단히 점심을 때우고, 후식으로 커피에 비스켓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자 약한 빗발이 시작되며 비가 내릴 듯 한다. 일단 아랫도리만 우비를
입고 12시 40분 먼저 출발 했다.
오늘부터 산장 예약제가 실시 된다는데 장터목에서 잘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 일단
세석까지 빨리 가보는 수 밖에....
13시 05분 삼각고지 도착. 길이 좋아 여기까진 단숨에 올수 있다. 내 기우와 달리
햇볕이 쨍쨍하게 비추며 날씨가 매우 좋아진다. 10분을 더 가니 벽소령 산장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한다. 어림으론 20분이면 도착할 듯 보인다. 추락 주의란 팻말이 있는데
조금 위태한 곳이긴 하다.조금후 이정표가 나오는데 벽소령 까지 3.2km 가 남았단다.
1간은 족히 더 가야 할 것 같다. 20분이란 나의 오산이었다.
밤새 내린 비로 나무나 땅이나 모두 젖어 있지만 날씨가 너무 좋아 점차 더워진다.
연하천에서 입었던 우비를 벗고 위에 입었던 긴 소매옷도 벗고 반바지와 티셔츠로
복장을 간편히 한다. 벌써 반바지는 우비안에 입었던 탓으로 땀에 젖어 축축하다.
잠시의 휴식을 마치고 13시 48분 형제봉에 도착. 장대한 산맥이 눈앞에 펼쳐진다.
바로앞 능선에 벽소령이 다시 나타났다. 그리 멀어 보이지는 않는데... 하지만 바로
앞 능선이 꽤 깊어 30분은 걸리겠다. 벽소령 좌측 능선에 길이 보이는데 그것이
등산로라면 시간이 더 걸릴 것 같다. 지도상엔 1시간 거리.(방금 전 벽소령을 본 곳은
형제봉 바로 전 봉우리.)
아까 보았던 곳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이 형제봉이었다.
그 형제봉 우측으로 천왕봉으로 가는 길이 계속된다. 좌측으로도 길의 흔적이 있어
헷갈릴 수도 있다. 형제봉 바위밑에 작은 굴처럼 된 틈이 있는데 비상시에는 피할만
하겠다.
벽소령에 가기 0.9km전 쯤에 양옆에 큰 바위가 있는 곳을 지나게 되는데, 그곳에 서면
맺혔던 땀들을 일순간에 씻어내는 추우리 만큼 시원한 바람을 맛볼 수 있다. 에어컨의
탁한 공기와는 비교가 될리 만무하다. 정신이 맑아지는 상쾌함을 느낀다. 누군가 이
길을 가게 된다면 한 5분만 서 있다 오길... 나름으로 마음이 가는 곳이다.
14시 34분 벽소령 대피소 도착.
한눈에 보기에도 깨끗한게 시설이 잘 돼어 있어 보인다. 두 명의 아마츄어 무선사
들이 서로 다른 주파수로 통신을 하고 있다. 인사를 건네도 아무런 대답도 않는다.
기분이 나쁘다.
시간상 세석 까지 밖에는 못 갈 것 같다. 잠시 지도를 펼치고 앞길을 살펴보다 다시
출발. 배낭을 짊어지고 갈 때에야 어디서 어디까지 가는 길 이냐며 아까의 그들이
무뚝뚝하게 묻는다. 장터목까지 간다고 짧게 대답은 해줬지만 역시 정이 안가는 사람
들이다. 벽소령 부터는 길이 잘 나있었다. 길은 그리 높지는 않은 기암 절벽들을
계속해서 끼고 도는데 바위절벽 사이사이 나무들이 잘 어우러져서 기막힌 풍경을
연출한다.
그 반대편으로는 넓게 산이 펼쳐져 보이고.... 혼자서 걷기엔 짜증나리 만치 괜찮은
곳이다. 혼자이기 때문에 풍경을 배경으로 자기 사진을 찍을 수 없다면 더더욱.
멋진 곳이긴 했지만 그만큼 낙석의 위험을 안고 있어 조심해야 했다. 길이 시원하게
뚫려 있다는 표현이 좋겠다. 그렇게 약 1km를 가니(15시 8분 도착) 다시 이정표가 나왔
는데 세석까지는 9km가 남았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부터는 이전의 길과 다르다.
15시 43분 선비샘 도착. 경운기 두석대분의 쓰레기 더미가 쌓여 있어 지저분한 느낌이든다. 세석산장 앞으로 6km. 연하천에서 먼저 출발한 이후로는 계속해서 혼자 산행하고
있다. 15시 55분 출발. 16시 28분 칠선봉 바로 가기전의 쉼터에 도착하자 음정에서 12시
쯤 등반을 시작했다는 목포분들이 쉬다가 출발하고 있었다. 그들도 장터목까지 간다고
한다.안개가 끼어 주변이 보이질 않는다. 맨 꼭대기에 앉아 담배 한 개를 피우며 안개
사이사이로 비치는 경치들을 보며 시원한 바람을 맞으니 신선이 따로 없다.
16시 45분 출발. 10분후 칠선봉 도착. 세석산장 앞으로 3km.
17시 15분 너무 배가 고파서 그냥 먹을수 있는 즉석죽(레토르트 식품)과 쵸콜릿 몇
조각을 먹었다. 다시 솟는 힘으로 22분 출발.
17시 50분 세석 산장 도착. 해가 뉘엇 뉘엇하자 잠깐 망설이다가 곧바로 장터목을 향한
다. 세석산장이 새로 지어져 있었는데 3년전에 묵었던 구 산장은 작은 화장실처럼 초라
하게 그 옆에 붙어 있다.
18시 7분 촛대봉 도착. 18시부터 저물기 시작 하더니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다.
촛대봉엔 바람과 안개와 바위들, 다가오는 어둠, 그리고 그 적막속에 홀로있는 나
뿐이다. 장터목까지 2.7km 남았다. 어둠이 더 깔리기 전에 서둘러야겠다. 18:11 촛대봉
에서 출발. 갑자기 어두워져 두려웁다. 거의 달리다 시피 약 0.9km를 10분만에 통과.
숨이 턱에까지 와 닿았다. 18:25 목포에서 출발했다던 일행 둘을 다시 만나자 마음이
한결 안정되고 여유도 생긴다.
18:50 도저히 어둠과 안개로 인하여 길을 찾을수 없어 랜턴을 사용하지만 가시거리가
6~8m밖에 안돼어 길 찾기가 수월치 않다. 특히 돌길을 지날땐 더 힘이 들다.
19:00 이정표가 나타났다. 장터목 앞으로 0.7km 안개와 바람과 어둠속의 우리들...
그 와중에도 안개속의 정취로 기분은 죽인다. 바위산에서 잠시 쉬며 담배 한 개피의
여유를... 정말 꿀맛이다. 야간 산행이라 속력은 확실히 빠른 것 같다.
19:27 드디어 장텁목산장에 입성. 가시거리 5m 안팎. 구름안개 때문에 랜턴의 불빛도
그이상 비추질 못한다. 혼자서 왔을 것을 생각하면 까마득 했다. 오후 6:10경 지리산
님께 보호해 달라고 마음속으로 빈 것이 통했나 보다. 혼자서 야간 산행을 한다는
것은 역시 위험한 일이다. 그들과 함께 푸짐하게 저녁을 먹었다. 그들이 가져온 술과
함께... 커피도 마시고...
산장으로 들어갈 때 관리인은 다시 산장 예약제가 오늘부터 시행됨을 알려주었고 다음
부터는 예약이 되지 안으면 일체 불가한다고 강조한다.
하늘엔 달도 별도 떴다. 어제의 날씨와는 정말 판이하다. 내일은 일출을 볼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의 고된 산행탓에 졸음이 엄습해 온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의 뿌듯함만은 감출
수가 없다. 3년이나 나를 안내해 주었던 지도가 이번에 완전히 뭉개졌다. 집에 가면
테이프로 잘 붙여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산장에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의 야경이 참 아름답다.
구름속을 뚫고 온 야간 산행은 꿈결처럼 스친다. 내일 하산해야 된다는 것이 오히려
아쉬웁다. 22:10취침.
10월 2일 5:05기상.
늦장을 부리다 보니 5:30 산장에서 꼴찌로 출발했다. 새벽 날씨가 차서 옷은 따뜻하게
챙겨 입었다. 밖은 아직도 캄캄하다. 그러나 어제처럼 안개가 끼이지 않아 다행이다.
앞선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쓰며 오르니 6:00 통천문에 도착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은 맺혔던 땀방울을 씻겨주고... 새벽의 찬 공기로 콧물이 맺히지만
이마엔 땀이 범벅이다.
10분후 드디어 천왕봉 정상에 도착했다. 산아래엔 구름들이 낮게 깔려있다. 이것이
하늘인가!... 땅인가!.... 일출을 보기엔 최상의 조건을 갖춘 날씨다. 나를 포함해
이순간 이 정상에 있는이는 불과 8명. 우리만이 일출을 보는 행운을 만끽하게 된다.
6:25 드디어 일출이 시작되었다.
비온뒤라 그런지 더욱 선명하다. 목포에서 온 분들이 말하길.. "이건 정말이지 신이
주신거다!..." 말로 형언하기 힘든 이 아름다움. 기쁨. 구름 사이로 삐죽이 솟아
있는 산들은 바다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
어찌보면 구름은 만년설을 이룩한 하얀 눈처럼도 보인다. 집에 전화를 걸어 어머니
에게 감동의 순간을 전하고 한참이나 사방의 경관에 빠져 들었다.
아~ 이 순간 여기서 영원하였으면...
이 곳의 바람은 정말이지 차가웁다. 두꺼운 옷을 껴입지 않고는 얼마 벼텨내기
힘들다. 산아래 낮게 깔렸던 구름들이 조금씩 상승하기 시작한다. 혼자 보기엔 너무도
아깝다. 정말 행운이 아닐수 없다. 날씨가 너무 좋아 노고단이 가깝게 보인다.
삼대가 복이 있다는 이 일출을 베풀어 준 신에게 감사 하지 않을수 없다. 여기선 더
이상 신선이 부럽지 않다.
그러나 너무 춥다. 사방으로 펼쳐진 아름다운 우리국토! 누가 보아도 탄성을 아니
지를수 없게 만드는 경치다. 천왕봉의 찬 바람을, 햇살을 맘껏 들이 마시고 나는 맨
마지막으로 하산한다. 바로 등돌리지 못하고 다시금 구름이며 산을 둘러 보아도 싫증
나지 않는다. 내려가기 싫은 마음을 달래고 또 달래며... 7:00 하산을 시작한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시니 이가 다 시리다. 21분후 중봉에 도착. 중봉과 천왕봉 사이
능선이 꽤 깊어 조금은 힘이 들다. 치밭목 산장까지는 3km.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산행 시작. 눈 아래 펼쳐진 저 구름바다 속으로 들어 가기가 쉽지 않다. 8:02 써리봉
도착. 써리봉 직전에 봉우리가 하나 더 있는데 거기서 부터는 치밭목 산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써리봉이 씌여진 이정표가 기둥 아래로 떨어져 있고 누군가 돌멩이로
날리지 않도록 눌러 놓았다. 8:41 치밭목 산장에 도착. 한 마디로 기쁘다.
산장의 크기는 연하천과 그리 차이가 없으며 묵는이도 얼마 없는 듯 하다. 시골
농가에나 온듯한 느낌이 드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다. 누런털을 가진 개도 한
마리 있다. 내실은 깨끗이 꾸며졌고 이용료는 3000원, 모포 대여비는 1000원.
약 100m를 가야 샘에 도착할수 있어서 한번 물을 뜨고 오면 다시 뜨러가시 지겹다.
여기서 남은 식량을 전부 해치우기로 했다. 일찍부터 산행을 시작해 배도 고프고 몸도
지쳤다. 음식을 먹는 내내 아까 그 누런개가 주위를 맴돈다. 냉정하게 다 먹어
치우자 녀석도 포기하고 저쪽에서 늘어진다. 식사를 마치고 몸이 노곤해 그곳에 있던
벤치에서 잠시 선잠을 청했다.
11:08 치밭목 산장에서 출발한다. 식사도 든든히 하고, 잠시 눈도 붙이고, 여유있게
실컷 쉰후의 출발이라 한결 가뿐하다. 햇볕이 참 따사롭다.
치밭목 산장에서 내려올땐 시원한 계곡물줄기 소리와 함께 할수 있다.
11:33 무제치기 폭포에 도착.
어림잡아 35m는 됨직한 높이에서 매끄러운 벽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물줄기는
부드러우면서도 웅장함을 함께 갖춘다. 폭포를 보려면 등산로에서 약20여미터를
벗어나면 나타나는 바위 바로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 거기선 폭포의 전경을 볼수가
있다. 시원한 물줄기 소리에 정신이 깨인다...
등산로옆에 배낭을 벗어두고 내려 갔다오는 것이 수월하다. 이쪽 코스를 택했다면
약간의 번거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보고오는 것이 후회되지 않을 듯 싶다.
11:15 장터목을 향해 마주오던 남자두분을 만났다. 마을까진 앞으로 2시간 30정도 더
소요된다고 한다. 그들은 등산중이고 나는 하산중이므로 2시간은 안걸릴 것 같다는,
나름의 판단을 해본다. 그들에게 무제치기 폭포를 보고 가라고 권하자 오기전 능선
에서 전경이 보인다고 한다. 12:00 이정표 만남. 거기엔 유평 앞으로 4.5km라 적혀
있다. 12:20 그들의 말대로 저멀리 무제치기 폭포가 보인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멀어
자세히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가까이서 보는것만은 못하다. 이 코스는 계속해서
계곡을 끼고 돌아 물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코스 중간 중간 충실한 길안내자
역할을 해주는 표싯기들을 눈여겨 보면 "회갑에 지리산 종주" '누구와 누구-아마도
연인 사이인듯한- 지리산에 오다' 등등 눈길을 끄는 것들이 보인다. 12:28 바위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쉼터에 이른다. 툴하게 튀어 나온 곳이라 가리는게 없어
시야가 뻥 뚤린게 시원스럽다. 앞으론 계속해서 산과 계곡이 뒤엉켜 있어 가깝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잠시 지도를 살펴보니 지금위치에서 북동쪽으로 하나의 능선을 지나 내리막 길로 약
2.5KM남짓한 것 같다. 10여분을 그렇게 쉬다가 다시 길을 재촉하니 12:52 한판골
능선에 이른다. 유평리 앞으로 2.8KM. 여기 오기 얼마전 부터는 길이 좋은 편이다.
거기서부터 비교적 괜찮은 내리막길을 따르는데 13:20 치밭목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뒤따라 내려왔다. 나보다 30분 가량 늦게 출발 했다한다. 잠시 쉬며 이야기를 나누
었다. 그는 나와 동년배이며 진주 사람으로 그곳 관리인과는 아는 사이인데 볼일이
있어 어제 올라갔던 것이란다. 그의 말에 의하면 치밭목 산장은 야영이 가능하다고
한다. 사이좋게 담배 한 개씩을 피운후 같이 하산한다.
13:30 혼자서 올라가는 여자 한분을 만나 다시 담소...
마침 그곳이 계곡이라 내친김에 그분이 가져온 녹차를 마시고 가기로 했다.
그녀가 오는 도중 주워온 밤과 녹차로 산중에서 한껏 정취를 맛본다. 더군다나 그녀는
차도기를 통째 들고 온 것이다. 호탕한 성격이다. 그렇게 이런저런 애기를 나누다
당당한 걸음의 그녀를 뒤로 보내고 14:08 다시 하산 시작. 14:25 드디어 "한판골 식당"
옆으로 난 등산로 길이 끝나고 작은 마을이 나타난다. 치밭목 산장으로 가는 코스
초입에 있는 "한판골 식당" 아주머니가 참 따뜻하게 대해준다. 감나무 아래 있는 평상
에서 쉬어 가라고도 하고 앞마당에 크게 자란 감나무에서 딴듯한 감도 몇 개 주신다.
게걸스럽게 감을 먹어 치우고, 옆으로 흐르는 계곡물에 입 언저리를 씻는데... 햐~
하고 절로 감탄이 나온다. 그때의 느낌을 어찌 표현해야 좋을지...
14:40 다시 출발. 채 3분도 안되어 계곡 줄기를 따라 도는 시멘트 포장길이 보인다.
폭이 사오십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계곡이 깨끗하다 못해 푸르러 버린 물줄기를
가득 품고 시원스레 이어져 있다. 민박집들과 식당들이 있는 것을 보니 이곳을 찾는
이가 꽤나 되는 모양이다. 15:00 대원사에 도착. 이곳은 비구니(여승)들이 계신 곳
이라고 어느새 동료가 되어버린 그가 일러준다. 규모가 보통의 사원정도이나, 입구에 들어서면 큰 야자수 나무 두개가 계단 양쪽으로 바로 보인다. 여승들이라 그런지
아니면 마당에 가지런히 깔린 잔디탓인지 하여간 보통의 사원보다 더 깔끔하단 인상을
받는다. 모든 절이 그러하겠지만 고요한것이 들리는 것이라곤 계곡물소리 뿐이다.
잠시 대원사를 둘러보고 25분을 걸은 후에 정류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장터목 산장
부터 당겨오던 왼쪽 다리 때문에 시간이 지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진주 까지 약 1시간 20분이 소요되었고, 진주에서 그와 이별하고 다시 광주로 갔다.
식당에서 저녁과 함께 소주도 곁들이며 이번 지리산행을 아쉬운 마음으로 접는다.
다음날 아침 10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돌아왔다.
지리산은 역시 나를 실망 시키지 아니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