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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神仙)도 즐겨 찾았던 옛 선유봉(仙遊峰)이다.그 절경을 자랑하던 선유봉은 이제 사라졌다.납작한 평지에 섬으로 남았다.
선유의 섬은 정수장 시설과 장비를 그대로 안은 채 자연 속에 재활용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거기에 나무와 꽃을 심고 정자도
마련했다. '신선들의 유람지 국내 최초 환경재생 생태공원' 선유도 근린공원,선유공원 홈페이지는 선유공원을 이렇게 설명한다.
풍류와 한류의 발상지이기도 한 선유도길 역사탐방은 선유공원 정문을 들어서 왼쪽 공간에서 만나 출발한다.
만남의 공간 옆 붉은 벽돌 위에는 <한강선언>이있다.
이 선언은 '한강은 새롭게 흘러야 한다'는 부제로 한다.
이 한강선언은 2010년 10월 9일 '선유도한강문학축전'에서
작가 박범신이 쓰고 읽은 것이다.그 중 '문화와 예술'만 옮겨본다.
한강은 문화이며 예술이다.
우리의 춤과 노래와 이야기가 여기 있으며
전통적인 몸짓과 현대적인 영상과 과학기술의 원천이 여기 있다.
다양한 지역문화가 이 유역에 모여들어 원융하게 섞이고 창조되어 세계로 나아가고
세계의 문화가 또한 이 강물에 실려와 더 뛰어나게 가공된다. 새로운 르네상스의 물결이
이 강에서 시작돼 먼 변방과 세계 속으로 유장하게 퍼져나가야 마땅하다.
한강에는 예로부터 아름다운 경관에 걸맞는 명승과 명소가 많았다.금빛 모래벌과 갈대 무성한 습지
그리고 강변에 들어선 전망 좋은 언덕과 누정(樓亭) 등 한결 같이 운치 있고 미려(美麗)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강 하류에서 풍류와 멋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강으로 한껏 자랑하는 서강(西江)이다.
그 서강이 흐르는 곳에 '신선이 노니는 산' 선유봉(仙遊峰)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도성일원의 지도 경조오부에는 선유봉과 강 건너 망원정(望遠亭),양화진이 표시되어 있다.
선유봉은 한강일대에서도 빼어난 풍광을 지닌 곳으로 중국의 많은 문인들이 이 절경을 못잊어 남긴 시화가 많다.
옛날에는 선유봉이라는 약 40미터 높이의 산봉우리이었다. 한강 일대의 빼어난 풍광을 바라보는 경승지로,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에도 나온다. 1978년 선유도수원지를 이곳에 만들면서 수원지 정문에 '선유봉 유래비'를 세웠다.
2002년 수원지가 양화동 쥐산으로 이전하면서 유래비는 선유도공원 관리동 동남쪽으로 옮겼다. 그 비문을 여기에 옮긴다.
선유봉(仙游峰)
이곳은 두 봉우리로 고려시대로부터 양화나루를 경유하여 한두봉(현 절두산)을 잇는 한강의 절승,명소로서
고양이같이 생겼다고 하여 굉이산이라고도 불렀고 작은 봉우리의 한강변쪽 암벽에는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난세(亂世)에 있으면서도 절조(節操)를 지킨다는 뜻의 지주(祗柱)란 글씨를 새겨 놓았으며 196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선유봉과 양평동 사이가 육지로 이어져 있어서 선유봉 주민들은 이곳에서 밭농사와 고리를 잡아
생활을 하며 살았다.
조선시대에 중국의 사신들이 오면 유람차 이 선유봉의 정상에 올라 그 경치에 도취되아 많은 시를 남겼으며
또한 이곳에 많은 누각과 정자를 지어 운치를 더 하였고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많은 묵객시인(墨客詩人)들의
사랑을 받아 왔으나 일제시대에 채석으로 일부 파괴되고 6.25 사변 후 도로복구 작업을 위한 채석으로 완전히
파괴되어 그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현재는 선유수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그 옛날 선유봉에는 사대부들의 별서들이 가득했다.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도 선유봉에 영복정을 마련하고 삶을 즐겼다.
선조들은 자연을 퍽 친근하게 대하고 그렇게 자연친화의 생활을 즐겼다.자연 그 속에 나무와 꽃이 있고 물과 산이 있다고
이 자연을 정원이라고 하지 않았다.그때 나무는 나무이고 꽃도 꽃일 뿐이다.물도 물이고 산도 산이고 사람도 그저 사람이다.
그 산수간에 정자를 배치하면서 마침내 그 공간은 인문화공간으로 돌변한다.정자는 인간과 자연을 연결하는 매개가 되는 것이다.
드디어 그 공간은 인간이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정원이 되는 것이다.탐방객들과 현장 정자에 올라 선조들의 풍류를 음미해 보는
것도 퍽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한다.
<녹색기둥의 정원>이다.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고
기둥만 남긴 정원당쟁이로 뒤덮인 기둥이 공간에 고요함과 질서를 부여하여
사색과 휴식의 공간을 연출한다.
<수생식물원>이다. 여과지를 재활용한 수생식물원은 낮은 수반에
자리잡은 다양한 수생식물원의 모습과 생장과정을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다.
<시간의 정원>이다.약품침전지를 재활용하여 다양한 식물의 세계를 꾸민 공간, 방향원,
덩굴원, 식채원, 소리의 정원, 이끼원, 고사리원, 푸른 숲의 정원, 초력벽의 정원 등 작은 주제정원을 감상할 수 있다.
1978년 선유도에 정수장이 들어섰다.정수장에 시민들의 출입이 제한되었다.2000년 정수장이 폐쇄되었다.
그 정수장에 물을 주제로 한 공원을 만들기로 한다.산업화 도시화의 잔해인 정수장 건축물과 설비 등을
선유도 공간에 그대로 두었다.그 사이에 나무와 꽃도 심었다.그 시설을 재활용하여 <녹색 기둥의 정원>
<시간의 정원> <물을 주제로 한 수질정화원> <수생식물원> 등을 만들었다.2002년 4월 26일 선유도공원으로
문을 열었다.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강을 건너 강변도로 옆에 보이는 망원정이다.효령대군이 합강정으로 문을 연 정자다.동생 세종이 극심한 가믐피해 현장
도성 서쪽 들녁 서교(西郊)을 민정시찰을 하고 효령대군을 찾았다.그때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그 비가 말이다.
세종은 그 자리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비를 반가워한 나머지 합강정을 희우정(喜雨亭)으로 바꿨다고 한다.
효령은 전국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돌아보며 수덕을 쌓으려고 개나리 봇짐을 짊어지고 정처없이 길을 나섰다.
큰절이든 작은 절이든 가리지 않고 산속을 헤매었다.난데없이 불이 켜진 집을 발견하고 좋아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겨우 몸을 숨길만한 구석자리에 앉아 하룻밤을 보냈다.그 이튿날 눈을 떠보니 잡은 간곳이 없고 돌부처가 덜렁 서있었다.
효령대군은 참 기이하다며 돌부처를 흔들어보니 돌부처가 쑥 뽑혔다.돌부처는 두 사람이 들지도 못하는 것을 효령대군 혼자
가볍게 어깨에 메고 아무도 모르게 망원동 한강변에 갖다놓았다는 설이 있지만 야사(野史)에 불과하다.
하늘에서 내려온 돌부처가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아이를 못 낳는 여인은 물론이고 사대부 부인까지도
남편이 잘 되기를 빌기 위해 줄을 섰다.야사에는 면목동 월정사의 박수무당 아현동의 백련사 김 보살 번동의 김 보살 천호동의
선녀대신 답십리의 장군보살 망원동의 은수보살 화양동의 동자보살 송월동의 총각도사 등 장안에서 이름난 만신들이 망원동의
석조불상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세종의 여섯째 아들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죽임을 당한다.
억울하게 죽어간 금성대군을 모시는 금성당이 전국에 여러 군데에 있었다.망원동에도 서울에서 효험이 잘 듣는 금성당이 있었다.
이렇듯 망원동 한강변은 세종과 효령 그리고 금성대군 등 세종의 집안과 인연이 깊다.
난지도,난초와 지초가 만발한 아름다운 섬이었다.여의도처럼 상암동 한강하류에 둑을 쌓고 난지도를 '정비'했다.
서울은 쓰레기가 넘처났다.장안평을 마지막으로 쓰레기매립지가 동이 났다.난지도에 서울의 생활쓰레기를 쌓았다.
마침내 서울의 남산만한 쓰레기 산 두 개가 생겼다.쓰레기가 썩어 매탄가스가 나오고 쓰레기 썩은 침전물이 한강을
오염시켰다.난지도 생태복원공사를 시작했다.그 오염되었던 난지도에서 맹꽁이와 반디불이 나왔다.자연생태가
제대로 복원된 것이다.그곳에 하늘공원 노을공원 평화공원 등을 조성했다.
그 옆에는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 들어섰다.2002년 한일월드컵경기를 성공적으로 치른 곳이다.
그 축구장은 세계10대 명문축주장으로 선정된다.아름답고 기능면에서도 가장 탁월한 축구경기장으로 평가를 받았다.
신선까지 찾아 노니는 정도로 기가 막힌 절경을 자랑하는 선유도(仙遊島)다.
그 신선의 세계를 갈 때 건너야하는 선유교(仙遊橋)다.선유교 다리의 길이는 469미터, 폭이 4~14미터에
달하는 한강 최초의 보행자 전용 다리이다.선유교 모양도 참으로 예사롭지 않다.선유교는 한불 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2002년 4월 26일 준공되었다. 프랑스 건축가 리치오티가 설계하고 서울시가 시공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무지개 모양의 다리는 새로운 소재인 초고강도 콘트리트를 사용해 가볍고 날렵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리의 바닥과 난간은 환경친화적인 목재를 사용해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한강을 횡단하는 120m 구간의 무지개 모양 다리는 새로운 소재인 초고강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π형 단면의 날렵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아치형 교량에 설치된 투사식 조명기법은 교량의 형태를 아름답게 살려 줄 뿐 아니라 수면에 반사되는 조명경관을
연출한다.선유교 아치구간은 길이 120m로 애초부터 접속교량과 7° 틀어진 흔들거리는 구조로 설계됐다.
이 다리에는 선유도 공원을 설계할 당시 공원 이용객을 하루 8천703명으로 계산한 것을 고려해 1㎡당 1인(70㎏) 통행기준으로
흔들림 없이 건너갈 수 있도록 진동 감쇄 장치가 설치돼 있다. 이곳 구조물 점검반은 설계된 1㎡당 1인(70㎏) 이상이 통행할 경우
흔들거리는 현상이 나타나기는 하지만, 구조적으로는 1㎡당 7인(500㎏)이 통행해도 안전한 구조로 설계됐고, 진동감쇄장치도
정상작동 된다고 확인했다.
옛날 선유봉에는 사대부들이 다투어 별서를 지어 살면서 풍류를 즐겼다.선유봉 절경을 감상하는 세 가지 방법이 있었다.
첫째 그 산봉우리에 들어가 살면서 절경을 만끽하는 것이다. 둘째 배를 타고 산봉우리를 선유(船遊)하는 방법이다.
세째 강가의 둑에 올라 선유봉을 감상하는 방법이다.풍광이 너무 수려해 국내외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 선유봉을 노래했다.
명(明)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일찍이 이곳을 자주 유람하며 그 절경에 심취한다.
그는 작은 봉우리 돌벼랑에 '砥柱' 두 자를 새겨 그 절경을 예찬하였다.
지주(砥柱)는 중국(中國) 황하(黃河)의 중류에 있는 돌기둥이다. 그래서 지주봉(砥柱峯)이라고도 했다
황하의 거센 물 흐름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이 기둥 같다고 하여 붙여진 지주(砥柱)다.
그래서 지주는 중책을 맡거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나 역량을 비유하는 말로도 쓰이고 있다.
주지번은 서화(書畵)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양화진을 자주 찾아 시문(詩文)을 즐겼다.
그는 허난설헌(許蘭雪軒)으로 불리는 허균(許筠)의 누이 허초희(許楚姬)의 시를 중국에 소개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조선 선조 39년(1606)년에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는 한강을 유람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에 보인다.
또 <여지도서> <금천현>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누동천(樓洞川)이 금천현(衿川縣) 읍치(邑治) 남쪽 박달리(博達里)에 있다. 곱고 깨끗한 모래와 흰 돌이 수십 리에 걸쳐
평평하게 펼쳐 있는데 아래로 양화진(楊花津)에 닿아 있다. 중국사신 주지번이 석주(石洲) 권필과 더불어 양화도를 유람할 때
누동천의 물고기를 잡아서 먹고 말하기를 맛이 동정(洞庭)의 물고기의 맛과 흡사하다고 하였다. 대개 내의 형세가 평평하고
험한 여울과 큰 바위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 맛이 동정호(洞庭湖)의 물고기와 흡사한 것이다."
이렇듯 조선과 중국의 문인들이 이곳 양화진 선유봉을 찾아 풍류를 즐겼다.
이곳을 한 번 다녀간 중국인들은 그 절경을 못잊어 선유봉의 시와 그림에 담았다고 한다.
금세기 들어 전세계를 흔들고 있는 한류(Koran Wave)다.그 한류의 발상지임을 알리는 '노래비'다.
이 노래비는 선유교 남단 왼쪽 잔디밭,사람과 자전거가 수없이 다니는 길가에 서 있다.지켜보는 사람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 국문학 사상 가장 오래된 노래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비이다.
공무도하가의 무대가 양화나루(楊花渡)라고 양천읍지(1899년, 박준우)에 기록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조선(朝鮮)의 진졸(津卒) 곽리자고(涇里子高)의 아내 여옥(麗玉)이 지은 노래다.
자고(子高)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저어 가는데, 머리가 흰 미친 사람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호리병을 들고 어지러이 물을 건너고 있었다. 그의 아내가 뒤쫓아 외치며 막았으나,
다다르기도 전에 그 사람은 결국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謙隸)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으니, 그 소리는 심히 구슬펐다.
그의 아내는 노래가 끝나자 스스로 몸을 물에 던져 죽었다.
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麗玉)에게 그 광경을 이야기하고 노래를 들려주니, 여옥이 슬퍼하며,
곧 공후로 그 소리를 본받아 타니, 듣는 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부도하가(公無渡河歌)
저 님아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임은 그예 물을 건너셨네(公竟渡河)
물에 쓸려 돌아가시니(墮河而死)
가신님을 어이할꼬(當奈公何)
한국의 20대 청년 방탄소년단(BTS)이 지난 6월 1일 영국의 웸블리스타디움에서 역사적인 공연을 갖었다.
12만명의 유럽인들이 방탄소년단의 노래를 한국말로 따라 떼창하며 열광했다.70년대엔 상상하지 못할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한류가 전세계를 흔들고 있는 것이다.그들은 이미 세계적인 톱스타로 자리를 굳혔다.
한강에서 싹이 터서 자라온 풍류는 이제 한류로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8년 전 싸이( Psy 박재상)가 노래 '강남스타일'과 '말춤으로 전 세계인을 흔들었다.
34살의 싸이는 그 노래와 춤으로 유튜브 조회 24억뷰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한다.
유동식 연세대 명예교수(신학)는 "나폴레옹이나 징키스칸이 말을 타고 세계 정복에 실패하였으나
34살의 싸이는 마침내 말춤과 노래 강남스타일로 세계를 정복한 것"이라고 격찬했다.
그로부터 7년 뒤 24살의 방탄소년단(BTS)는 싸이의 기록을 모두 갈아치우는 등 한류의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