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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미술<Gothic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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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 서유럽에서 일어난 미술로서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엽에 파리를 중심으로 일드 프랑스지방에서 일어나, 영국·독일·에스파냐·이탈리아로 급속히 퍼져간 미술로서 13세기에 프랑스·영국에서 명확한 양식이 확립되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서유럽 전체에 전파되어 더욱 발전·변화해서, 15세기초부터 이탈리아에서 형성된 르네상스 미술이 대표하는 근세미술로 바뀔 때까지 존속하였다. 고딕 양식은 특히 성당건축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평가를 받게되며 이와 함께 조각, 회화, 공예까지 확대 발전하게 된다. 4세기의 비잔틴 미술에서 중세가 끝나는 시점으로 보는 14세기까지를 중세로 볼 때 고딕 양식은 중세의 모든 미술 양식의 가장 완벽한 구현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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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는 원시적인 방식과 세련되고 복잡한 방식이 기묘하게 혼합된 로마네스크 양식을 거쳐 수도원 중심의 문화권에서 도시의 성장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성당 중심의 문화가 도래한다. 성당은 많은 수의 신자를 수용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주인 사람을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갖게 했다. 기독교가 전래된 이래 신의 완벽한 반영을 목적으로 하는 당시 중세의 미술에 있어서 이러한 양식의 변화는 중세인을 하나로 묶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 종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뿐 아니라 고딕 양식에 있어서 모든 미술의 목적이 단지 종교의 목적으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학문이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됐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로마네스크 예술가들은 수도사들이 많았으나 고딕예술가들은 세속의 전문가들이 많았다. 고딕이란 명칭은 르네상스의 이탈리아인이 중세건축을 조야(粗野)한 만족(蠻族) 고트인(Goth 人)이 가지고 온 것이라고 비난한 데서 유래한 것인데, 19세기이래 서유럽 중세미술의 한 양식을 가리키는 미술사상(美術史上)의 용어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 중세미술에 명확한 형식을 부여한 것은 북 프랑스였지만, 결국 전 서유럽적(的) 현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고트인들은 이 미술의 형성에는 직접 관계가 없었지만, 약간 모멸적인 뜻으로 말한 것이 이러한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고딕 미술의 양식은 먼저 건축에서, 특히 성당 건축에서 실현되었지만, 여기에 어울려서 형성된 조각·회화·공예에 대해서도 총괄적으로 이 양식의 명칭이 적용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중세에 그토록 많은 성당이 세워질 수 있었던 상황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그 해답을 중세인들의 생애에 있어 최고의 성취목표였던 성지순례에서 찾을 수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게 되는 성지순례는 사회적인 공동체 의식을 고취시켜 사회적인 연대성을 이루어내었으며, '민족단위의 힘'이라는 성격 발생에 큰 역할을 하였다. 즉성지순례가 민족적, 국가적인 행사가 되면서 이를 위해 모든 나라의 힘과 노력을 기울이게 되어 긴 여정을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마련하게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당건축이 생겨났으며 마을이 발생하게 되고,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오게 된다. 한편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수용해야 하는 성당 건축은 빠른 시간 안에 견고하게 지어야 한다는 이유로 단순하게 지어질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히 비장식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간단하면서도 집중적인 표현을 위해 고안된 것이 바로 내부의 기둥머리 조각이었고, 무엇을 어떻게 조각할 것인가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예언서나 기도서, 성가서, 성인·성녀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표현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 주제를 선택하고 해석을 전담하는 역할을 수도사들이 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그들이 선택한 주제를 어떻게 신비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느냐에 집중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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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딕 미술가들은 더 이상 그들이 무엇을 표상하느냐에만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라 어떻게 표상하느냐에 점차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있다. 즉 그들은 기원전 5세기 그리스 미술가들이 어떻게 아름다운 육체를 형상화하였는가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나움부르크 성당의 기사 조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있어서 이미 깊은 발전을 보여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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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트라스부스 성당의 남문의 팀파눔에 새겨진 '성모의 승천'(1220년경)에는 장면 전체에 걸쳐 부드러움이 스며 있고, 像 사이에는 감정의 유대, 눈빛과 몸짓으로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는 능력이 엿보인다. 이 한 발전단계를 통해 종교적 상징은 더욱 효과적인 표현을 이루게 되고, 위에서 보았던 최후의 심판은 이전에 비해 더욱 드라마틱한 효과를 낳게 된다. 프랑스,독일을 중심으로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에서 발달하여는데 이탈리아에서는 철저하게 발달하지는 않았다. |
【건축】 고딕 건축은 프랑스를 중심으로 기독교 미술의 절정기의 양식이다. 높은 건물과 첨탑, 첨두 아아치로 수직적 상승감을 나타내는 건물 양식이 대표적이다. 또 건물에 좁고 긴 창문의 스테인드 글래스도 특징할 만하다. 기독교의 발전은 예배를 위한 기능과 함께 미학적으로도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표현하는 상징물로서의 건축을 창안해 내려는 욕구로 교회의 건축 양식은 계속 발전하게 된다. 안정적인 동유럽에서 보다 다변하고 있던 서유럽에서는 12세기의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어 새로운 건축 양식을 만들어 내는 데 12세기 후반 북부 프랑스인들에 의한 성당 건축의 주심 원리를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고딕양식이 그 돌파구를 여는 것은 성당건축에서인데, 건축가들에게 최대의 난제가 된 것은 점차로 높이를 더해가는 석조궁륭의 가구법(架構法)이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시는 하늘과 좀더 갑게 올라가기 위하여 높은 첨탑을원하고 높은 천장을 원하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구조상의 안정을 확보하면서 상승성(上昇性)을 유지하는 형태를 나타낸 것은 리브(늑골상아치)궁륭과 첨단(尖端)아치이다. 고딕식 성당 건축의 특징은 일반적으로 구조 기술상(構造技術上)의 3요소(要素),즉 지골궁륭(支骨穹:ribbed vault)·버팀도리[飛樑:flying buttress]·첨두 아치(尖頭 arch)에 단적으로 보인다. 이것들의 조직적인 적용으로 말미암아 형태에 있어서는 앙고성(仰高性) 또는 상승감(上昇感)이 강조됨과 함께, 구조상에서는 사압력(斜壓力)이 크게 경감(輕減)된다. 이 3가지 요소는 이미 로마네스크 건축에도 있었다. 이런 것은 동방 기원(東方起原)임이 틀림없다. 12∼13세기 북프랑스의 한 건축가는 이 가구(架構)에 편리하고 강한 궁륭(vau1t)을 쓰겠다고 결심하고, 이것을 제1전제(前提)로 해서 논리적으로 전개해 나가면서 차례를 따라 새 양식의 실현을 추진해 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성당 건축형식은 합리적인 탐구와 실제적인 기술적 수련을 쌓아서 실현된 것이다. 고딕 건축에 있어서 가장 중요시되는 과제는 벽체의 양괴성(量塊性)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벽체는 엷어지고 창의 면적을 확대해 갔으나, 이 취약화된 벽체를 역학적(力學的)으로 보호하기 위하여 지골궁륭을 적용하였다. 이 구조에 의하면 궁륭의 무게가 지골(支骨:rib)에 의해 지주(支柱)에 집중되기 때문에, 벽체는 거의 중량을 받지 않게 된다. 더욱이 외벽에는 벽에 따라 부벽(扶壁:buttress)이 줄지어 서 있어서, 지주에 걸리는 사압력(斜壓力)을 외부에서 받쳐주고 있다. 또 궁륭·입구·창 등에서 로마네스크에서는 반원형 아치를 썼지만, 고딕에서는 첨두형 아치를 쓰게 되어, 첨두의 각을 넓히거나 좁혀서 넓이와 높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하여 성당 안의 공간 구성을 시각적으로 강조하게 되었다. 리브궁륭은 밀라노의 성암브로지오성당과 잉글랜드 북부 다람대성당의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최초로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북프랑스로 전해져서 12세기 전반에 최초의 고딕식 성당을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교차궁륭의 양선(梁線)에 이어서 대각선을 이루는 리브는 궁륭의 중량을 분산시켜 이것을 지주로 유도함으로써, 벽체에 가해지는 횡압(橫壓)을 줄이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첨두아치를 사용한 건축디자인은 이슬람건축에서 그 원류(源流)를 찾을 수 있는데, 이슬람의 영향 아래 조영(造營)된 시칠리아섬과 남이탈리아의 성당건축이 매개가 된 것인지, 혹은 십자군이 가져온 것인지, 그 경로는 명확하지 않다. 12세기 중엽에 이미 지골궁륭의 합리적 적용, 높은 비례의 복합주(複合柱)나 창, 내진회랑(內陣廻廊)의 해방된 공간 등, 고딕적 건축 사고(思考)가 이미 나타났다. 그러나 아직도 거기엔 로마네스크적인 점이 적지 않아, 과도기적 성격을 면할 수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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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이 때의 미술을 초기 고딕 미술이라고 한다. 13세기에서는 고전적 고딕 성당들이 지어졌다. 건축가들은 또 궁류형 천장의 아치들을 지탱하는 데 아치만으로도 충분함을 알게 되어 기둥들 사이의 무거운 석벽을 없애고 그 사이사이에 유리창을 끼워 넣기 시작한다. 창문들은 수직으로 위쪽은 뾰쭉아치로 아래쪽은 수평인모양으로 길게 수직으로 연이어나게 되었고 창문바깥쪽으로 무게의 압력이 전달되게 되므로 벽이 기둥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둥이나 창문 벽들은 상하로 수직적이 매우강조되게 되었다. 외부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엄청난 높이의 수직선의 다발들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눅들게 만들고 경건한 마음을 들게 하였다. 여기에 외부의 압력을 경감시키기 위해 뾰족아치를 사용하므로 여러 곳에 둥근 천장이 가능해졌다. 성당의 하중은 벽에서 부벽으로 옮겨진다. 이것으로 성당의 정점의 높이의 조절이 자유로와졌으며 고딕의 특징은 첨탑과 공중부벽은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이러한 버트레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위해 건물외부에 또다른 버틀레스를 나란히 세웠고 또 비스듬히 플라잉 버틀레스를 세워 구조의 약함을 보강하였다. 그결과 외부늑골의수직효과를 강조하게되고 더욱 종교적인 정신성을 표출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은 첨형아치와 공중부벽으로 쓸모없게 된 외벽을 화려한 스테인드 글라스로 치장한다. 이로서 돌과 유리로 완성된 성당의 황홀한 구조는 이전의 로마네스크에서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인간을 압도하고 천상의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하고 기독교의 또 다른 초월의 세계의 신비감을 하늘의 영광을 느끼게 한다. 높은 천장은 그 공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공간의 무게를 느끼게 하였고 하나님의 신성한 공간에 엄숙함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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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딕 양식은 로마네스크보다 더 엄격한 구성으로 건축적 완벽성을 지향했고 종교적 신념과 사상을 건축에 옮겨 중세 교회 건축양식을 대성했다. 창이 높아지며 채광(採光)을 풍부하게 하고, 전체로서 상승효과를 강하게 나타내어, 세련된 건축기술을 과시하는 레요낭 양식(rayonnant style)이 퍼졌다. 14∼15세기에는 후기 고딕 성당들이 건축되었고, 창의 디자인은 물결 모양을 이어 불꽃 모양을 나타내는 플랑브와이앙 양식(flamboyant style)이 유행하여 도시계획에 많이 사용되었다. 이탈리아의 고딕 건축은 전통적인 바실리카 형식이 존속하여, 궁륭은 낮고 창은 적어 고딕 특유의 경쾌한 상승감이 적고, 벽면이 넓어 자연히 내벽은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된다. 이탈리아에서는 예외적인 외관구성(外觀構成)을 보이는 밀라노대성당은 주로 북유럽 건축가의 손으로 지은 것이다. 독일은 최초에 북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14세기 이후에는 독일의 독특한 형식인 할렌키르헤(Hallenkirche)가 추진된다. 이것은 신랑(身廊)과 측랑(側廊)의 궁륭 높이를 균일하게 하고, 성당 내부를 높은 창에 둘러싸인 단일 공간으로 통일하는 것이다. 에스파냐에서도 당초에는 프랑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지만, 거기에 이슬람계 양식이 섞여 들어가 에스파냐 특유의 무데하르 형식이 형성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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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프랑스의 영향 아래 있으면서도, 영국 고유의 양식이 확보되어 있어서 13세기의 초영식(初英式:early English), 14세기의 장식식(裝飾式:decorated style), 14세기 이후의 수직식(垂直式:perpendicular style)이라고 하는 양식으로 그 발전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또 후기 고딕 건축에서는 교회 건축 이외에 플랑드르 및 이탈리아 북부에 발달한 시청사(市廳舍)나 저택 등의 세속적 건축에도 이것이 쓰였다. 대표적인 고딕 성당으로 1140년에 세운 생 드니사원의 예배당과 성가대석은 최초의 순수한 고딕건물로 추정된다. 그 외의 순수한 고딕 건물로는 1163년에 시작된 파리의 노트르담과 브르주, 라용 등이 있다. 생 드니는 고딕 성당의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서쪽 정면은 장미창이, 서쪽 현관에는 신학의 교과 과정이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다. 스테인드 글래스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노트르담 성당, 랭스 성당, 퀼른 성당, 웨스트민스터 성당이 대표적이다. 이 양식은 르네상스 이후 쇠퇴하다가 19세기 고딕 부활 운동이 일어나면서 대학 공중 건물, 상용건물 등의 건축에 이용된다. 13세기초의 고딕 양식은 큰 교회당 양식을 중단하고 수도원 건축, 지역교구교회, 가정 건축에서 사용되는 요소들을 채택함으로써 국가별, 지역별로 다양해졌다. 건축은 고딕시대를 결정짓는 대표물로서 1140년부터16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독일에서는 국경에 접한 프랑스 각지로부터 고딕양식을 받아 들였는데, 특히 퀼른과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프랑스양식이 두드러진다. 한편, 독일의 건축가들은 프라이부르크와 울름의 대성당에서 나타나듯이, 쌍탑형식을 배제하고 접면 중앙에 1기의 대탑을 두었고 또한성당 안에 단일공간을 만드는 <할렌키르헤(Hallenkirche)>의 형식을 개발하였다. 이탈리아의 건축가는 프랑스 고딕양식이 달성한 수직성을 강조하는 구조체계를 거부하고, 전통적인 바실리카식에 가까운 양식을 고집하였다. 13세기 중기 이후 시에나·피렌체·오르비에토 등의 대성당이 고딕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리브궁륭은 구조적인 의도보다도 장식적 효과가 중시되었다. 밀라노대성당에는 알프스를 경계로 한 남북유럽의 양식관(樣式觀)이 절충되었으며, 외관은 강한 인상을 준다. 이는 당시의 기술이나 지식 또한 발전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생드니 대수도원장 슈제르가 이 수도원 재건에 즈음하여, 전 유럽에서 건축가·조각가·공예가를 불러모아 고딕양식의 종합적 완성을 이루었다(1144년 성당 祭室部 완성). 건축에 중점을 두었으며 로마네스크의 반원아치에 대하여 첨두(尖頭)아치, 복잡한 교차 궁륭, 밖에서 건물을 지탱시켜 주는 버팀 벽 등을 짜맞추어 벽체를 극도로 줄이고, 가볍게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독특한 성당양식을 완성하였다. 두터운 벽 대신 찬란한 색채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건물을 둘러싸 성당 안을 빛으로 채웠다. 처음에는 건축에 종속되어 있던 조각도 차츰 벽체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스러운 3차원의 표현을 하게 되었다. 랭스대성당(1211년 기공)처럼 성 토머스의 신학체계와도 닮은, 정밀하고 광대한 도상학적(圖像學的)·시각적 체계 가운데 새로운 인간주의가 나타나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건축의 스콜라적 복잡성이 쇠퇴하고 대신에 벽면을 중심으로 한 회화가 1270년 무렵부터 급속히 발전하면서, 14세기 전반에는 플롯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근세미술로의 선구적 비약을 성취하였다. 조토 디 본도네가 그린 스크로배니가(家)의 예배당 벽화(1310년경) 등이 그것이다. 15세기에 들어서면 프랑스의 화염(火炎)양식과 영국의 수직양식 등 화려한 장식적 경향이 나타나, 조각·회화에도 말기로 갈수록 섬세한 정서적 요소가 강해졌다. |
【조각】 고딕의 성당은 ‘돌의 성서’라고 할 만큼 수많은 조상군(彫像群)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것들은 주로 성당의 정면·입구 및 문 위의 팀파눔(tympanum), 그것을 둘러싼 몇 층의 아치와 입구 양 옆의 열주(列柱), 그 아래의 돌벽에만 보이지만, 단지 그리스도교적 주제(主題)의 것뿐만이 아니고, 다채로운 주제가 풍부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게 정면 입구 주변을 장식하는 수많은 조상군과 부조(浮彫) 등에 의해 서유럽의 독자적인 인간상(人間像)이 비로소 확립되었다고 해도 좋다. 샤르트르대성당의 서쪽 정면 ‘왕의 문’을 비롯해서, 파리 부근의 12세기 후반의 성당 입구 조각은 원주인상(圓柱人像)의 새 요소가 있었으나, 양식상으로나 도상상(圖像上) 로마네스크 조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12세기 중엽의 조각은 건축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다가 점차 건축적인 원칙에서 벗어나 자연주의적 원리를 담게 되었다. 13세기에 들어와서, 샤르트르·파리·아미앙·랑스 등 잇달은 대성당의 장식과 조각에서 고딕 양식은 확립되었다. 샤르트르는 12세기 중반의 서쪽 정면을 그대로 보존하고, 13세기 초에 남북에 새로 큰 문을 냈고, 13세기 중반에 거기에 대규모 조상군과 부조를 장식해 놓았는데, 도상(圖像)의 풍부한 내용과 짜임새에서는 첫째 가는 예이다. 중세 그리스도교 신앙의 인간화 경향의 하나로 보이는 민중의 성모숭배(聖母崇拜)에 대응하여 성모에게 입구 장식을 바치게 된 것은 고딕 미술의 새로운 일면으로, 그 형식이 정해졌다. 13세기 고딕 도상은 복음서적인 《묵시록》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던 로마네스크 시대의 신비주의와 서사시적(敍事詩的) 경향에 대신해서, 신앙의 기초를 지성(知性)에 의해 다지고, 또한 인간적 감정과 융화하는 도상을 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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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13세기 고딕 조각의 이상주의를 양식상으로나 내용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 성자의 숭배에도 실제의 농민이나 기사의 모습을 같이 결부시켜 그 도상을 만들었다. 현실과의 접촉은 조상(彫像)의 현실감에 충실해야 한다는 욕구에 부응하여 고딕 조각의 사실주의로 나타나고, 중세인이 이상으로 삼은 인간상이 현실감을 가지고 표현된다. 13세기 중반부터 이미 사실주의의 진행은 고전주의를 깨뜨리고, 14세기는 개성화를 진전시켜 초상 및 초상적 작품의 예와 우아하고 아름다운 매너리즘의 조상이 나타난다. 그러나 그것도 조각가들의 힘찬 사실주의로 그 때까지의 우미(優美)한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성격적인 극적 조상을 실현하여, 건축에서 독립한 15세기 조각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후기 로마네스크에서 고딕 양식에 걸쳐 독일 조각은 훌륭하였으며, 13세기의 조상군, 13∼14세기의 슈트라스부르크의 조각은 프랑스에 못지 않은 힘 있는 성격적 표현을 이어왔다. 15세기에는 제단 조각(祭壇彫刻)으로 발달하고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는 목조주상(木彫鑄像)에 많은 명장(名匠)을 배출하였다. |
샤르트르 대성당 정면의 원주인상군(圓柱人像群)은 원기둥 모양의 형태와 의복주름의 장식적인 선각(線刻)에서 로마네스크의 흔적을 남기고 있으나, 얼굴에는 인간적인 감정과 고딕양식의 흐름이 나타난다. 전형적인 고딕조각은 13세기 북프랑스에서 나타나며, 파리·샤르트르(남부정면)·랭스·아미앵 등의 대성당에는 여러 개의 입상,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과 동식물의 표현은 로마네스크의 추상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서, 자연주의 내지 인간주의로 진전하였다. 이 세기에는 또 신학이 융성하여, 성당을 장식하는 조상군(彫像群)은 <돌의 성서>라고 표현되듯이 명확한 종교적 질서에 의하여 통일되었다. 정면의 중앙입구에는 중심기둥을 뒤로 그리스도상을 놓고, 좌우의 벽면에 6명씩의 사도상을 둔 입구 양쪽에는 성모자와 여러 성자가 배치되며, 입구의 안쪽으로 들어가면서 띠 모양의 아치에는 천사와 예언자의 상이 늘어서고, 그 주위의 벅면에는 <미덕>과 <악덕>을 표시하는 우의상(愚意像)과 <12개월의 행사>에 언유한 인간상이 끼워진다. 신으로부더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의 인간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었으며, 중세적 인간주의를 반영하는 새로운 미술영역이 개척되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조각에서도 독자적 양상을 보였는데, 선구자는 N. 피사노와 그 아들 지오반니다. 피사노가 1260년에 피사에서 최초로 제작한 설교단의 부조와 그 건축세부에는 남이탈리아에서 체득한 것으로 여겨지는 2양식이 명료하게 식별된다. 지오반니는 건축가로서 시에나대성당의 정면(하부), 기타 설계를 하였으며, 조각으로서는 피스토이아의 성 안드레아 성당의 설교단이 고딕양식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 자연주의와 이상주의를 결합하여 그리스도의 모습을 아름답게 조형하는가 하면 지상의 아름다운 격의 없는 마리아의 모습도 나타내었다. 대체로 소박한 표현 속에 시대정신을 표시하는 고유의 예술성을 포함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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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의 조각보다 더 추상적인 초기 고딕 조각이 남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조상들의 특징은 원주 자체의 견고한 원통형을 이용 환조 조각의 첫걸음을 내딛었으며 조용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이 조상들의 옷 주름은 금방 흐를 듯 유연하며 그 안에 생생한 육체가 숨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당시의 조각가들이 고대의 전통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이해하고자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랭스 성당의 조상은 고전주의가 자취를 감추고 간결, 수직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우미의 양식이 나타나 후기 고딕 양식의 기준이 된다. 최소한 이 시기의 조각가들은 성서의 이야기를 더욱 감동적으로 실감나게 자기들이 느낀 방식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인간의 감정을 전 시대 보다 더욱 사실적으로 나타내려고 노력한 점은 이 시기 이후 나타나는 르네상스의 기본원형이 되기에 이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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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프랑스인으로부터 조각의 전통을 전수받은 독일의 조각가들은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성당 내부에서 조각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고 종합적이고 계획적인 조각으로부터 자유로왔으며 훨씬 개성적인 표현을 구현하였다. 나움부르크 성당의 조상은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매장>은 나타낸 필사본은 인물들의 감정을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성서의 이야기를 전하되 베끼거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려고 한 것이 아닌 더욱 감동적이고 생명감을 불 넣으려 한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이탈리아 13세기에 이르러 고딕 조각이 이탈리아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데 이는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택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는 알 |
프스 이북보다 훨씬 고대의 전통아래 있었기 때문에 여기서의 조각은 덜 고딕적이었는 데 고딕적이라고 불릴만한 작가는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우아한 옷주름의 흐름과 성실한 모델링에서 프랑스의 영향과 고대의 전통이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국제양식 1375년과 1425년 사이에 서유럽에 전역에 퍼진 양식을 말하는 데, 주된 특징은 유연한 곡선 형식으로 인위적이고 목가적인 분위기에 세속적인 상류사회에 대한 관심이 두드러지게 표현된 것들이다. 이것은 13세기 중반 화려한 프랑스 궁정양식에서 기원을 찾아 볼 수 있는 데, 15세기 초까지 번성하였다. 국제양식 조각의 알프스 북부 최대 거장으로 클라우스 슬뤼터의 작품과 알프스 남부의 기베르티의 작품이 있다. 영국에서는 13세기 초기부터 링컨·졸즈베리·요크 등의 대성당이 조영되었는데, 프랑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명쾌한 비례와 단순한 비례로 얼리 잉글리시(초기 영국식)라는 독자적 양식을 확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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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대표적인 것으로 거대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들 수 있다. 초기 작품은 생드니대성당의 방사상제실군(放射狀祭室群)의 창문장식인데, 빨강·파랑·주황·녹색을 주조로 하는 그 수법은 파리(현재는 없음)·샤르트르(서쪽 정면)의 대성당에 전해지고, 또 서부 프랑스에서는 앙제·푸아티에의 대성당 등에 우수한 작품이 탄생되었다. 13세기가 되자 도상체계(圖像體系)도 풍부해지고 기술상으로도 자색을 주로 하는 배색이 세분화되어, 샤르트르대성당과 같이 넓은 공간이 천상적 분위기로 충만하게 되었다. 순수한 고딕건축의 도입이 적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스테인드글라스 대신에 벽화가 발달하였다. 고딕풍의 줄무늬와 색채에 의하여 독자적 화풍을 확립한 시에나출신인 S. 마르티니는 시에나의 화풍과 파리의 고딕회화와의 매개자(媒介者)가 되어 이른바 <국제적 고딕양식>의 형성에 관여하였다. 또한 고딕의 전통에서 출발하여 유채화의 연구를 거듭하고 근세회화로의 길을 확립시킨 것은 플랑드르출신의 반 아이크형제이다. 유명한 《헨트제단화》로 대표되는 여러 작품의 박진감 넘치는 묘사는 근세회화의 탄생을 뚜렷이 보여주는 동시에 중세적인 상징주의에 대한 집착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하여 내부로 유입된 빛은 현실세계의 빛이 아닌 오색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빛으로 바뀌나. 이러한 현실이 아닌 빛에 의하여 성당은 현실공간이 아니 하느님의 집으로서의 이상공간을 의미하는 곳이 된다.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해 마음의 눈으로 보는 빛의 세계와 어둠을 밝혀주는 세계, 즉 신의 세계를 체험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프로티누스의 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다. 그에 의하면 가시적 세계의 미는 비가시적 세계의 미의 반영이다. 또한 실재가 연속적인 일련의 평면들로 구성되어 있고, 그들 각각은 존재의 중심 광원으로부터 보다 멀리 있으며, 각각이 어떤 의미에서 보다 가까운 것들의 모방이라면 모든 미들은 희미하긴 해도 자기들이 암시하는 절대미와 궁극적으로 연계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모든 수준에서 미는 신과 친족관계에 있다는 어떤 의식이 영혼 속에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중세의 성당건축은 우리들에게 백과사전적인 가르침을 전달해주고 있으며, 당시의 성직자들은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 무지몽매한 사람들을 가르치는데 있어 이러한 예술의 힘을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성당에 새겨진 조각과 스테인드 글라스의 신비로운 효과에 의해 다양한 계급, 계층의 사람들은 하나가 됨을 느낄 수 있었고, 이것이야말로 사도 바울이 얘기한 '인간은 신 안에 살고 행동한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Emile M le은 'Mirror of History'에서 바로 이러한 점을 정확히 포착해 낸 동시에 도상의 표상적인 알레고리를 통해 중세미술의 풍부한 이해를 돕고 있다. 고전적인 주름, 고딕적 흔들림과 같은 필사본의 서정적 세련성 등은 전형적이고 새로운 특징으로 간주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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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펠텍케의 「에나이트」, 브누아 드 쌩모아레의 「트로이 로맨스」 등을 들 수 있다. 또 14세기에 둣치오의「시에나성당 마에스타」에서 패널화가 일반화되었다. 14세기초 지오토로 시작하여 15세기말 로지에 반데르 바이덴이나 보티첼리로 회화의 발전은 집약되고 그 특징은 양식화, 선적인 특질, 고딕식 흔들림이라 할 수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레스코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이는 알프스 북부에서 회화가 스테인드 글라스로 대치될 무렵, 이들은 그리스의 전통을 기억하고 있었으며 교회당에 유리벽을 사용하지 않았다. 패널화는 제단뒤으 칸막이로 제공되기이전에는 그다지 발전하지 못하였다. 타피스트리는 14세기부터 급속히 발달하여 성당내부의 제실, 애프스주변이나 ,기둥사이에 이용되었다.이는 바꿀 수 있는 벽화로서 후기고딕의 왕후귀족이 애용하였다. 13세기경부터 타블로화가 발달하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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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스코화, 벽면 모자이크, 패널화는 알프스 이남에서 활발하게 발전하였다. 13세기의 비잔틴의 전통이 남아 있었고, 이는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가 지옷토의 출현을 부른다. 그는 프레스코화로 유명한데, 환조라 할 만큼 공간의 깊이감, 원근법, 옷의 유연한 흐름 등은 평면 위에 가장 실감나게 바로 눈 앞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그렸다. 비잔틴 회화를 이어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하게 그린 화가 둣치오는 템페라로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한 장면으로 그렸다. 이 그림에서 원근법이 사용되었으며 시정 넘치는 친밀감과 사실적이고 깊이감 있게 공간을 나타내고 있다. 그 밖에 마르티니, 로렌쳇티 형제의 그림이 있다. 고딕 성당 건축에는 창문이 많고 벽면이 적어서, 벽에 벽화를 그릴 수 있는 공간이 없어서 벽화의 발달은 저조했고, 판화가 발달했으며, 자연히 스테인드 글라스의 발달이 싹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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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단한 것은 카롤링왕조 후기에도 있었고 12세기 전반기에도 있었으나, 12세기에 들어와서 고딕 성당 건축이 발달하면서 개화하게 되어, 맑은 청색과 강한 붉은 색의 배색이 훌륭하였고, 화상(畵像)도 점차 인간적 감정을 여유 있게 나타내게 되었다. 13세기에는 전성기에 달하여, 데생(dessin)은 자연스러움이 더해지고, 힘을 잃지 않았으며, 배색도 더욱 섬세해지고 그림에도 깊이가 더하게 되었다. 당시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오늘날에도 많이 보존하고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의 장관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여러여러 빛깔의 유리 조각을 H자형 납테에 끼워, 창문 전체를 종교적 화상으로 메운 이 스테인드 글라스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통해 들어오는 광선의 영롱함은 이 성당 안을 완전히 종교적인 법열(法悅)로 채우게 한다. |
성당 안에 들어서는 사람은 하나님의 빛으로 가득찬 무지개 빛의 실내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신의 속성인 빛이 실재하는 공간으로서의 성당이 탄생된다. 파리 왕성(王城) 안의 상트 샤펠은 4면이 모두 창인데, 모두 스테인드 글라스로 된 성당이다. 이런 추세는 13세기 중기 이후, 제작을 서둘러 장식 효과는 아름다우나 깊이가 없어지게 되었다.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에 걸쳐서 무색(無色) 유리에 단색 데생의 그리자유(grisaille) 수법이 나타났고, 한편 유색(有色) 유리는 회화(繪畵)의 영향으로 색조(色調)의 뉘앙스는 풍부하게 되었지만, 빛의 예술인 본래의 성질은 약화되었다. 종교예술이 나타내는 주제는 신의 존재를 신학적으로 입증시키는 원리와 일치하였는데, 예컨대 카오스(chaos)로부터 '빛'에로의 약속을 알려주는 '예수의 승천'이라던가 신이 사람으로 태어나는 '강생' 등이 그것이다. 한편 '최후의 심판'을 통해서는 모든 일에는 결말이 있고 시작과 끝이 있으며 생명의 존재가치를 귀결시켜주는 알레고리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종교세계에 있어 인류를 구원해준다는 기독교의 약속--희망, 빛, 힘--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라 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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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ile M le은 {Religious Art}에서 표상적 알레고리(typological allegory)로서 신약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즉, 구약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계시를 예언하고, 표상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구약의 사건들은 신약의 사건들의 모형이며 표상이다. 예컨대 출애굽의 사건은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숨은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애굽은 죄많은 옛 땅이고 약속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광야는 이 세상에서의 구원을 위한 투쟁이다. 홍해를 기적적으로 건너간 것과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세례에 해당된다. 모세와 바위는 그리스도를 뜻하며, 동시에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운 바위인 베드로를 지시하기도 한다. 한편 요나가 고래 뱃속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수난의 금요일부터 부활의 일요일까지, 지옥에 내려 갔다가 부활한 것의 알레고리로 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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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성경이 해석되는 방법에는 다음의 네가지--역사적인 방법, 풍자적인 방법, 표상적인 방법, 신비적인 방법이 있다고 설명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는 팔레스타인의 한 도시이지만, 풍자적으로는 호전적인 도시를 의미하며, 표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영혼을, 그리고 신비적으로는 궁극의 선조의 땅인 천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이러한 맥락 아래서 Bourges와 Chartre, Le Mans와 Tours의 스테인드글라스를 '구약과 신약 사이의 완벽한 조화'를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첫번째는 계시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으며 입으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고 있지만 상처를 통해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즉 복음은 진실이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자비의 증거인 동시에 신의 분노이며, 죽음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그리스도의 힘을 상징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최후의 심판 앞에서 마리아와 요한이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리고 있는 장면이다. 이 부분은 복음서에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서 신학자들은 다음과 해석한다. 본래 최후의 심판이 내려지는 숭고한 순간에는 그 어떤 기도도 그것을 피하게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중세의 사람들은 예수의 십자가 아래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눌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기도에 의해 인간이 구원될 수 있다고 믿었고, 예술가들은 이러한 믿음을 그들과 나누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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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는 저울을 들고 있는 대천사 미카엘의 모습이다. 신의 지혜와 대결하려고 하는 악마의 음모에도 흔들리지 않고 공정하게 인간의 덕과 악의 무게를 재고 있는 장면이다. 네번째는 천국 혹은 지옥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있는 문을 표현 한 것이다. 다섯번째는 바로 천국의 광경인데, 이 부분이 매우 흥미롭다. 단테에 의하면 천국은 음악과 빛으로만 이루어져 있으므로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또한 신학에서 말하는 영생은 최후의 심판으로 모든 것 새로와진 후에 원죄로 인한 무질서와 자연의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조화되어 순수해지게 되며 물이 맑아지고 순교자의 피로 물은 대지에는 꽃이 만발하게 된다. 의로운 자의 몸은 영광스러워지고 몸과 정신이 풍요해지며 영혼은 순수해져서 마침내 육체와 조화를 이루게 된다. |
그리하여 인간은 몸과 영혼에 모두 14가지의 선물을 받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육체에 입게되는 미, 민첩, 힘, 자유, 건강, 기쁨, 장수와 영혼에 입게되는 지혜, 친교, 조화, 영광, 권세, 안전, 즐거움이다. Chartre 성당 북문에는 바로 이러한 추상적인 모습이 눈부신 여인의 모습으로 顯現되어 있다. 이 아름다운 여인들은 천국의 영혼을 나타냄으로서 기독교인들로하여금 불완전한 세상을 잊게 해주고 천국을 가시화함으로써 표현 불가능한 세계를 우리의 눈앞에 펼쳐보여주는 것이다. 동시에 Chartre는 중세미술의 백과사전적인 성격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성당이라고 간주된다. 회화 부문에서 스테인드 글라스와 같이 다루어야 할 것은 사본장식(寫本裝飾)의 삽화인 미니어처(miniature)이다. 로마네스크 회화나 비잔틴 양식의 영향을 받아들여 인간상을 자연의 모습에 가깝게 해서, 인간적 감정의 분명한 모습을 그려낸 것은 13세기 초의 영국과 프랑스의 미니어처였다. 이것은 뒤에 건축의 호화스러운 액자에 끼워졌다가 13세기 후반부터는 왕후의 사치스러운 생활환경을 반영하게 되었다. 사본장식의 대표적 화가 장 퓌셀의 화풍은 파리 양식으로서, 당시의 고딕 미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3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서민적인 사실주의는 매너리즘(mannerism) 속에 사멸하는 고딕 회화를 구하게 되었다. 이것을 14세기 후반부터 활약하는 네덜란드 출신의 예술가들이 이어받아 사실주의를 착실하게 추진해 나갔다. 이탈리아에서의 고딕 건축은 알프스 이북의 건축과는 다소 달리, 창이 적고 벽면이 더 커서 벽화제작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13∼14세기에 이탈리아에서는 많은 우수한 화가들이 활약하여 14세기 미술의 방향을 크게 돌려놓았다. 이것은 15세기의 르네상스 미술로 그대로 이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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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조토(Giotto di Bondone)가 그린 인간상은 그 때까지 보지 못하던 힘찬 양감(量感)과 움직일 듯한 기운이 있어서 거의 조상(彫像)과 같은 인체인데, 북프랑스 성당의 고딕식 부조군(浮彫群)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14세기 이탈리아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셰나 화가들로, 저마다 걸작을 이 도시에 남겼다. 이들의 활약으로 14세기 후반에서 15세기 초에 걸쳐서, 전(全) 유럽적 유행을 보인 고딕 국제양식이 탄생하였다. 벽면이 없는 북방 고딕 건축은 벽화의 발전이 그리 성하지 못하였으나, 직물화(織物畵)로서 북프랑스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왕성하게 만들어졌다. 그 내용은 종교적·사전적 제재(史傳的題材)나 그 밖의 당시 풍속을 다룬 것들도 있어서 흥미롭다. 14세기경부터 종이가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자 판화도 유행하였으며, 또한, 남부 독일을 중심으로 목판화가 나타났고 얼마 뒤에는 동판화까지 나타나는 등 각지에서 여러 형태로 발전하였다. 회화로 채워져 있어야 할 성당의 벽면이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전 시대의 채색 사본은 화려하고 도상적인 주제를 표현한 색유리와 자리를 바꾸고 대성당의 건축과 함께 스테인드 글라스도 함께 황금시대를 맞는다. 프랑스의 회화의 중요 위치로 자리잡게 된 이 것은 1250년 이후 대성당 건축이 시들해지면서 사양길에 접어들고 다시 채색 사본이 유행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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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고딕 양식의 첫단계는 지옷토와 둣치오의 이탈리아 자연주의에 프랑스 시모네 마르티니의 우아함을 혼합시키고 후기 로마 회화의 고대 양식을 가미시킨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플랑드르 예술의 기초를 마련해 준다. 브뢰데들람의 <신전에서의 경배> 는 이탈리아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