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외출 (다울 문학모임 그 후)
출발하는 날까지 아예 지도를 들여다보지 않았습니다. 멀어봐야 국내일 테니 멀면 얼마나 멀까 싶었습니다.
사실, 김근용 사무국장님의 강압적인 약속에 차마 내려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말입니다.
다울에 가입한 다음날 전화가 왔습니다.
"김근용입니다. 같은 성남이니 얼마나 반갑습니까? 이번다울 시평회에 내려가겠다고 사나이끼리 약속해 주십시오!"
"사나이 끼리요? 사나이라........"
한참동안 뜸을 들이던 나는 얼떨결에 대답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좋습니다. 가겠습니다."
외박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아내에게 설명을 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아침 산책길에 아내에게 말을 했습니다.
"나 있잖아 다음달에 문학 모임이 있는데 꼭 오라고 하걸랑 그런데 일박이일로 하는가봐 아들 데리고 다녀오면 안될까? 사나이끼리 약속을 하자고 해서 김 시인 님과 약속을 해 버렸는데....."
"무슨 모임을 일박 이일씩이나 한다는 거야? 자기가 꼭 가야 할 자리야?"
"하하 내 자리가 어디 있었나? 앉으면 그곳이 내 자리인걸, 다만,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기가 쉽지않아서 그래. 직접 전화까지 해 주셨는데....."
"알았어, 아이 잘 챙겨서 다녀와요!"
아내는 그곳이 어디인지 지역을 묻지 않았습니다. 나 역시 그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몰랐습니다. 다만 아주 먼 거리라는 것 밖에는......
출발 전에 다울문학방에서 메모해온 교통안내편을 가지고 지도를 찾아보았습니다. 그곳은 저 멀리 남해 바다가 보이는 진동이란 곳이었습니다.
"아빠! 잘 알지도 못하는 문학 방이라면서 왜 그렇게 가시려고 하세요?"
차안에서 지겨운지 아이가 물었습니다.
"응, 사나이들끼리는 사나이들만 아는 그런 게 있단다. 그런 약속을 헌신짝처럼 뒤집는 그런 행동을 하면 안되는거야! 남아 일언은 중천금이란 말도 있잖니!"
"알았어요."
출발부터 밀린 고속도로를 고집한다는 것은 못할 짓이었습니다. 우리는 국도로 방향을 틀어 진천까지 달렸습니다. "생거진천 사후용인"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날 어떤 노인에게 효성스런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아들은 용인에서 가난하게 살고 있었고, 작은 아들은 진천에서 부유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어찌나 효성이 지극했던지 서로 아버지를 모시려고 하다가 결말이 나질 앉자, 마침내 현명하다는 사또에게 이 문제를 풀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또는 다음과 같은 공평한 답을 주었습니다.
“그러면 살아서는 진천의 부잣집 작은 아들에게서 맛있는 봉양을 받으시고, 죽어서는 용인의 큰아들이 골라 주는 좋은 명당에 묻히도록 하시오.”
지금도 유명하다는 쌀집에는 간판이 "생거진천 쌀"이라고 적혀있는 경우를 많이 보곤 합니다. 그 시골길을 달리고 또 달리며 나는 처음 뵙는 많은 다울 님들을 그려보았습니다. 눈에 익은 싯구 한 구절, 같이 아파하며 읽었던 어느 수필 글, 뼈가 아플 만큼 난타를 당했던 나의 시, 더불어 댓글로 때로는 변명 아닌 변명도 하고 때로는 겸허한 마음으로 몸 낮춰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댓글로 부족하여 쪽지로도 시의 느낌들을 날카롭게 혹은 공유하곤 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의 마음들을 한꺼번에 뵈려 하니 왜 그리 설레이던지요.
대전을 지나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에 차를 싣고 우리는 인삼랜드라는 휴게소에 들렸습니다. 인삼의 고장 금산이 근처에 있음을 실감시켜주는 그곳 인삼랜드 휴게소는 모든 제품들에 인삼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듯 보였습니다. 인삼 칼국수에 아들은 간짜장을 시켜 먹는데 무슨 맛인지 도통 모르겠고 그저 배고픔을 잊었다는 생각만 가지고 다시 출발을 했습니다.
11시 반에 출발한 차량은 진주에 도착하자 오후 5시를 가르키고 있었습니다. 다시 남해 고속도로에 차를 싣고 종횡무진 달리는데 도로 왼편으로 나는 깜짝놀란만한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습니다.
"우진아! 저기 좀 봐봐!"
"뭔데요 아빠?"
"저기 지금 보이는 것이 뭔 줄 알겠니?"
"귤 아니에요?"
"응, 귤 맞지! 와! 정말 남쪽은 남쪽인가 보다 육지에 귤나무 과수원이 다 있다니 말이야."
아이보다 제가 더 신이 났습니다.
퇴색된 도로에는 하루에 지친 썰물이 하행길 차량들을 부추기며 빠르게 빠져나갔고, 어둠을 주인으로 하는 가로등불빛과 자동차의 불빛들만 눈이 부시도록 밀려듭니다. 서녘을 기웃거리는 햇살은 귤 밭에 서서는 이내 자지러졌습니다. 노을에 기댄 귤은 더 없이 노랗게 보였습니다. 학동이란 이정표를 찾기 힘들어 다시 김근용 시인 님에게 전화를 넣어 보지만 이내 감감 무소식입니다. 조금 후에 다시 걸려온 전화
"어디쯤 오셨어요? 김덕길 시인님?"
반가운 목소리는 김근용 시인님 이셨습니다.
"진성 인터체인지 빠져나왔는데 진동이 어디인지 보이지를 않습니다."
"계속 마산 쪽으로 오시다 보면 학동 이정표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좌회전하세요!"
두 번째 학동인데 우리는 첫 번째 학동이정표를 보고 들어갔습니다. 당연히 베틀산은 어디에도 없었지요. 벼를 널던 아주머니께 여쭈어 보았더니 두 번째 학동이란 곳에서 좌회전을 하라시는군요. 다시 차를 돌려 안내된 이정표를 찾아 달렸습니다. 드디어 '베틀 지압'이 란 푯말이 보이고 '다울문학 시평회'이정표가 아주 작게 보이더군요. 베틀 가든이 베틀산장인가 싶어 기웃거려 보지만 차량이 없는 걸로 보아 이곳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계속 산 쪽으로 밀고 올라갔더니 드디어 '베틀산장'이란 이정표와 그 산장이 보이더군요.
가슴이 벅찼다기보다는 이 시골 오지까지 찾아 들어온 제가 대견스러워 웃음부터 났습니다.
산장에 불이 켜지고 장어구이를 위한 통나무 불꽃은 하늘을 향해 나래를 폈습니다. 차는 도착했는데 아무도 나와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분주하게 왔다갔다하시는 황토색 전통의상을 걸치신 분에게 다가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안녕하십니까? 김덕길입니다."
인사를 하면서 얼굴보다 명함부터 봐야 하는 첫 대면의 미안함을 혹 아십니까?
"오우 덕길님! 이거 반갑습니다. 덕길 님의 글은 익히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그 분은 장웅식 시인님 이셨던 것입니다. 이리도 반겨 주시니 저 역시 몸둘 바를 몰랐습니다.
"어서 들어가세요."
방안에 들어가 인사부터 건넸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우아 이게 누구세요? 김덕길 시인님 아니세요? 어라? 사진보다 왜 이렇게 젊은 겁니까? 너무 멋지십니다."
그 분은 멀리 바다건너 미국에서 친히 올라오신 신옥식(박꽃) 작가님 이셨습니다. 글에서 나눈 교감 때문일까요? 처음 뵙는 분이셨지만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이어서 나이 지긋하신 이곳 베틀산장의 주인님 옥길상 시인님, 차분하신 음성에 멋쟁이이신 문상철 시인님 등등
나는 모르오나 나를 알아주는 많은 분들의 가감 없는 반가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미리부터 오셔서 수고해주고 계시는 묘향심님과 최은주님의 동분서주하시는 모습은 오히려 늦게 나타난 제가 미안할 지경이었습니다.
장어구이의 환상적인 맛과, 김근용 시인님의 현란한 사회솜씨, 남주희선생님의 시창작 강의는 돈주고도 못 듣는 명 강의이셨습니다. 김순이님의 절묘한 노래 김순애님의 화려한 사회솜씨 멀리 압해도에서 북까지 가져와 명 연주를 보여주신 난타공연의 신데렐라 김은미 시인님 카리스마 넘치는 시적 세계에서 과연 시인 자신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일까?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던 황말남 시인님(성격이 아주 쾌활하시더군요 걱정 뚝), 직설적인 표현으로 과감하게 밀고 나가시던 다울의 회장님이신 박봉준 시인님(화기애애하신 친근한 모습 너무 멋지십니다) 귀에 걸면 귀가 리듬을 타 어디까지가 노래이고 어디까지가 시인 줄도 모르게 만드시던 기타리스트 이영자시인님(가요계로 진출하세요 아깝습니다.), 어느 한 분 멋지지 않으신 분 없겠고, 어느 한 분 아름답지 않은 분이 없사온데 어디를 가나 술이 돌아가고 감정에 불이 얹혀지면 큰 소리는 나오게 마련인가 봅니다.
"시인을 시인으로 부르지 마라. 네가 언제 독자들을 감동시킬 만큼 주옥같은 명시를 써 본적이 있더냐?"
올라올 때의 졸음운전을 미연에 방지하겠다는 생각으로 숲길 건너 방갈로에 자리를 펴고 잠이 들어있는데 뜬금없이 터져나온 이 말에 눈이 뻔쩍 뜨였습니다.
모두가 다 선배님들이고 모두가 다 나보다는 더 좋은 글을 쓰시는 인재들이온데 제가 어찌 그냥 이름을 부를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대통령도 대통령 님이라 부르라 하셨고, 잘 가르치나 못 가르치나를 떠나서 선생은 선생님이란 존칭어를 써 주는데, 어찌 시인이 한 우물을 파고 한 문학 동인으로 지내는 시인들끼리도 시인이라 부르지 말라 하십니까?
글이 좋다고 해서 시인대접을 해 주고 글이 나쁘다 해서 업신여기는 풍토는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 한편이 히트 쳤다고 해서 그 사람의 시가 다 좋은 것은 아닐 것이며 우리가 볼 때 좋은 시였던들 독자들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시 또한 잘 썼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시집 한 권도 내지 못한 분이라 해도 시인은 시인이며 소설책 한 권도 펴내지 못했더라도 등단을 했으면 소설가인 것입니다. 특히, 글을 쓰는 분들은 자기의 개성이 유달리 강하다 사료됩니다. 그래서 어느 술자리에서건 자신을 최대한 내 세우기에 급급하죠. 물론 자신들은 그걸 모릅니다. 겸허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과 시인이 시인이라 부르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과는 틀린 것입니다. 글은 첫째로 자신이 만족하는데 있고 이후 독자가 만족하는데 있습니다. 자신도 만족하지 못하는 글은 쓸 필요가 없을 겁니다. 독자를 만족시키지못하는 분들은 그만큼 채찍도 달게 받아야 하겠습니다. 어느 분들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사이트를 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런 부류에 속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단점까지도 글로 풀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시를 표절할까봐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시는 이미 시인의 손을 떠났으면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널리 읽혀야지요. 표절이 두려워서 은둔의 창고에 쌓아놓고만 있는 시가 어디 시입니까? 이미 자신의 손을 떠난 시는 독자가 판단 할 뿐입니다. 잘 썼으면 잘 쓴 대로 칭찬을 받으면 되는 겁니다 못 썼으면 가일 층 노력해서 더 수행정진하면 되는 것입니다. 자신만 세상에서 제일 잘난 양 행동한다는 것은 우습기짝이없는 일일 것입니다. '누구는 누구의 줄을 대서 유명한 모 잡지에 기고를 했다더라' '누구는 누구의 배경이 좋아서 신춘문예에 등단을 했다더라' 그렇게 해서 모 잡지에 자신의 글이 나온 들 그게 무슨 명예입니까? 오로지 글로만 승부를 내서 글로만 자기 생활을 책임지겠다는 분들과 우리들은 결코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각각 생활이 있습니다. 각기 맡겨진 직업이 따로 있죠. 글은 다만 취미생활의 연장일 뿐입니다. 그렇게 공부를 하다가 유명한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면 그보다 좋은 명예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하기 나름이겠지요. 두서 없이 내 소견을 피력했는데 듣기 거북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처음 나선 모임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많이 들어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동인 님들의 연령이 강양각색이다 보니 이견도 더 많은 듯 보입니다. 다 본인들의 말이 옳은 것 같지만 뒤집어 보면 누구나 다 장단점이 있습니다. 그것들을 보듬어 안고 가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이해와 배려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지난밤의 격렬했던 논쟁은 모닥불 속으로 들어가 활활 타올라 사라졌고, 이른 아침 저는 약속한대로 산행을 하기 위해 동인 님의 의견을 구했습니다.
다섯 분이 산을 올랐습니다. 같은 목표를 두고 오르는 산길에서의 동행은 어쩌면 또 다른 글 쓰기의 연속일 것입니다. 가슴으로 부르는 언어가 있습니다. 숨이 목까지 차 오를 때 느끼는 그 벅참과 원하던 글을 마쳤을 때 느끼는 그 가슴 벅참은 결코 틀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을 오르나봅니다. 보다 더 낳은 시를 만나기 위해.......
"누구 나랑 떡 찾으러 갈 사람 없나?"
옥길상 시인님께서 동행을 요구하셨는데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아 제가 일어섰습니다. 낯선곳을 가면 최대한 낯선 경험을 하자는 게 저의 글 쓰기 모태이니까요.
차에서 옥길상 시인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곳에서 혼자 생활하시는 겁니까?"
제가 궁금해서 여쭈어보았습니다.
"내사 마 혼자 살지, 애들이 돈 보내준다 아이가? 뭐 나는 지압하잖아 그리고 일 하러 가지, 한 육십 만원 가지면 한달 몬 살겠나? 그렇게 사는 거지 그래도 이곳에선 내가 제일 나이가 젊은 기라."
올해 육십 정도 되신 옥 시인님의 인생관은 그야말로 욕심 없는 무의 세상이셨습니다.
"그래도 마 여기 땅이 한 천평정도 되는 기라 여기 개발하면 평당 뭐 오십 정도 안 하겠나? 하하하"
전혀 세속의 때를 잊고 사시는 것은 아닌지라 그나마 세속에 절은 나와는 그런 대로 말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김시인 자네는 소설이 뭐라 생각하나? 내는 마 소설을 한번 쓰고 싶은데 내 뭐 아는 게 있어야지."
갑작스런 질문에 말을 못하는 날 알아보셨는지 옥시인님께서는 얼른 말을 이어나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소설을 쓰면서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한다 모 이런 게 있을 거 아이가?"
"저 역시 장편 두 편 써본 게 다인걸요. 제가 뭐 알겠습니까? 단, 소설은 첫째, 재미있게 써야 합니다. 느릿느릿 이어지는 줄거리로는 독자들이 계속 읽지를 않죠. 둘째, 반전이 있는 글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기가 막힌 반전은 소설을 살아있게 만들죠. 셋째, 시인이 쓰는 소설은 시적 구도가 살아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줄거리로만 이어가는 글보다는 은유와 풍자의 시적 구도 속에서 빼어난 언어 구사력이 살아 나오겠죠. 마지막으로 소설은 독자의 알권리를 해소시켜주는 글이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읽으며 독자로 하여금 잊고 있었던 지식이나 역사나 아니면 사랑의 감정까지도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내는 마 그동안 살아온 내 인생을 쓰고 싶으이, 제목을 베틀산 편지로 할까 고민중이라 카이"
"좋은데요. 베틀산 편지라 느낌이 오는걸요. 써보세요. 아마 좋은 작품이 나올 것입니다."
떡이 준비가 되지 않아 지금 시작하겠다는 떡집 아주머니의 말을 뒤로하고 나와 옥시인님은 막간을 이용하여 근처 온천으로 목욕을 갔습니다.
마산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목욕탕인데도 어찌 서울 유수의 그 화려한 찜질 방과 비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등도 밀어드리고 같이 따스한 욕조 속에 들어가 허심탄회한 말씀을 많이 들었어야 하는데 첫 대면자리여서인지 그렇게 못했음을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등은 밀어드리고 싶었는데.......
훈훈한 김이 나는 떡을 차에 싣고 행사장에 도착하니 이미 야외 행사장은 고풍스런 느낌과 간밤의 그 술기운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으며 세상에서 가장 고결한 모습들로 자리를 가득 메우고 계시더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양복이라도 가져오는 건데 그냥 등산복 차림이었으니 얼마나 저를 욕하셨을까요? 어쩔 수 없죠 그래도 제 얼굴에 눈이 부신다는 모 시인님의 칭찬에 그냥 웃어버렸습니다. 목욕탕에서 바로 나왔으니 얼굴에 빛이 당연히 났을 겁니다.
베틀산 산자락 야외무대에서 바람이 수런대는 갈잎을 뒤로하고 사십 여명의 다울문학 동인 님들이 모여서 만찬을 즐기는 모습은 흡사 외국 어느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풍족한 식사가 허기를 눌렀고 따사로운 햇살에 익어 가는 가을 베틀 산이 흥건하게 단풍에 젖어가고있으니 이 보다 더 좋은 만찬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시 낭송이 이어지는 동안 산비탈 좁은 길에 두 명의 어린 아이가 놀고있었습니다. 어찌나 앙증맞은지 뛰어가 저도 놀고싶어졌습니다.
김은미 시인님의 난타 공연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압권이었습니다. 손끝에서 터져나오는 그 신들림은 보는 우리들도 환상인데 직접 연주하는 님의 마음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마음 같아서는 기립박수라도 쳐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영자님의 세노야라는 노래는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가을 한낮의 햇살에 기대 내가 꿈을 꾸는 냥 음색은 그렇게 애절하게 사람을 끌고나갔습니다. 참으로 대단하신 분들이셨습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아쉬울 테지만, 이틀 간의 합동생활에 지쳤는지 이별을 이별답게 그렇게 나누지도 못하고 먼 길을 재촉해야만 했습니다.
"떡이랑 우렁 꼭 가지고 가세요 김 시인님!"
"고맙습니다 은주님 이렇게 챙겨주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친히 독자가 되어주시겠다는 문선옥님에게 직접 인사도 못 드리고 보내드렸는데 그 분께서 보내주신 우렁이는 된장찌개 속에서 구수함을 잃지 말라고 우리 집 주방에서 부글부글 끓고있습니다. 어찌 이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지요.
내가 많이 사랑했나보다
안개가 저벅저벅 온다
하행 선에 두고 온 썰물
상행 선에 밀물로 밀려
젖은 안개
자작자작 눈으로 온다
눈에 밟히는 것들을
내가 많이 사랑했나보다.
"아빠 지금 뭐 하세요?"
안개가 자욱한 고속도로를 달려서 올라오는데 아들이 묻습니다.
"응 지금 휴대폰 메모코너에 시 쓰는 중이야!"
"아빠는 휴대폰에다가도 시를 쓰세요?"
"응, 영감이 떠오를 땐 이렇게 몇 줄이라도 쓰곤 한단다."
베틀 바다
작달만한
응당 내가 할 일 이라는 듯
넘치는 끼 꾹꾹 누르며
단풍보다 더 붉은 얼굴로
어떤 이는 가슴에 시를 떨군다
어떤 이는 화폭에 시를 찍는다
이내 또 이별 앞에서
떨구는 눈물 눈물 같은 시
젖지 마라
안개가 대신 젖었으니 젖지 마라
다만 젖지 않는
떨궈도 젖지 않는 베틀 산
베틀 산 두고 온 바다.
용인 집에 아이를 내려놓고 늦은 저녁을 때운 후 다시 차를 몰아 정읍으로 향했습니다.
"덕길아! 감을 따야 하니껜 싸게 내려오니라!"
"나중에 가면 안돼요? 어머니?"
"아따 시방 뭔 소리여? 땡감이 홍시 되면 팔리간디?"
비몽사몽으로 정읍에 도착하여 네시간 자고 다시 일어나 밭으로 향합니다.
콩을 뽑아 집으로 가져오고 감나무의 감을 땄습니다. 딴 감을 골라 박스에 담아 정읍 약관에 냈더니 집에서 쓰는 박스라면서 다시 포장하라고 합니다. 다시 박스를 사 와서 무게를 달아 재 포장을 합니다. 땀이 비 오듯하지만 마음은 상쾌합니다. 어머니의 근심을 오늘 하루의 내 피곤함으로 인해 잊게 해 드릴 수 있으니까요.
저녁을 먹고 다시 출발해 용인에 오니 늦은 밤 열한시가 되었습니다. 저의 후기를 혹 기다리셨던 분이 계셨다면 그래서 늦었으니 용서하소서!
눈에 넣고 돌아온 다울 문학의 첫 방문 그래서 더욱 뜻깊습니다. 동인 님들의 글이 좋아 배우러 들어왔으니 많이 가르쳐 주십시오. 동인 님 한 분 한 분 일일히 감사의 말씀 올려야 하나 이 글로 대신하겠습니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김덕길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