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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를 보시지 않은 분은 1부 먼저 읽어보시고 오세요.
2부 시작----------------------
2009년 5월부터 SIDS 스터디를 조직해서 진행을 하였습니다. 고정적으로 나오는 몇 명의 멤버를 제외하고는 자주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스터디도 의욕은 있었지만, 학문적 진전은 더디게 진행되는 시기였습니다. 그럴때 서울에서 SIDS 조찬 세미나가
개최되었습니다. 소아과 의사들이 준비하여 발표를 하였습니다. 아침 7시에 시작하는 세미나라서 저와 정현희 회장님은 전날밤에
서울에 가서 하루 자고, 그 다음날 아침에 만났습니다. 우리는 둘 다 이 세미나에 참석하고 나서, 착찹한 심정이었습니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SIDS는 소아과 의사나 산부인과 의사인 임상병리학자만
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하면 안되는가? 였습니다. 그리고 우리와의 지식적인 측면에서의 격차도 꽤나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내려와서 세미나 자료집을 찬찬히 읽어 보았습니다. 거기에서 해답과 자신감을 얻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소아과 의사들도 독자적으로 이 실험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는 것과 외국의 문헌을 번안해서 발표하는
정도가 전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뭐가 다른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외국문헌 찾아서 번안하는 것은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그동안 그렇게 어렵게 생각했지? 하는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다 우리는 소아과 의사들과 차별화 할 수 있는 전략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의 대상이 일반 학부모가 아닌, 어린이집 교직원
이라면, 우리가 연구에서 앞서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씩 준비해 가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2009년12월에 정현희 회장님의 퇴임식장에서 한국 최초로 "SIDS 예방 캠페인"을 개최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2010년부터는 우리만의 연구를 시작하여 학회지에 게재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기회가 너무 빨리 찾아왔습니다. 2011년에 중앙보육정보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넷을 보니까 당신들이
SIDS로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데, 전국 어린이집 교직원 4만명 교육을 해 줄 수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우리의 자원은 고작 10여명 남짓이었습니다. 정현희 회장님과 며칠을 고민하였습니다. 고민 끝에 서로 'GO"를 외치게 됩니다.
정말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저는 약 6~7개월을 조마조마하게 살아야 했다.
2011년은 저 개인적으로 매우 바쁜 한 해 였다. 한국교육개발원의 중앙컨설팅단 위원으로 활동해서 1년간 전국의 초,중,고의
학교 컨설팅을 해야 했으며, 전북교육청의 혁신학교 심사위원을 맡아서 전북의 초등학교를 심사하러 다녀야 하는 시기에
이 SIDS 교육을 맡게 된 것이었다. 처음에 내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많은 SIDS 강의를 하게 되었다.
결국 이런 강행군은 나의 몸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2011년 7월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해서 딱 1년 정도 고생을 하였다.
그러나 인생을 뒤돌아보면, 가장 스펙터클한 한 해였지 않나 싶다. 전국을 누비며 돌아다닌 킬로미터 수가 아마 엄청날 것이다.
다시 SIDS 이야기로 넘어오면, 2011년 4월은 정말 치열한 한 달이었다. 당시 중앙보육정보센터장을 맡고 계셨던 이삼범 센터장님과
정말 많은 대화와 고성이 오고 갔다. 저와 통화를 할 때는 정말 괜찮았다. 그러나 어린이집 안전공제회와의 통화 후에 저에게 전화를
하셨을 때는 서로 고성이 오가는 수준이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4월 중순 쯤이었던 것 같은데, 한국교육개발원의 요청에
의해서 대전의 매탄초의 학부모 강의를 하고, 그 다음날 경주에서 전북교육청 일로 조찬모임이 있어서 경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신경주를 막 지날 즈음, 이 센터장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용의 요지는 어린이집 안전공제회가 자료집을 만들고, PPT를
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냥 원하는 것이 그것이면, 그랬게 이야기 하면 되는데, 우리의 고유 콘텐트가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성원의 역량 등의 이야기가 나왔다. 처음에는 운전하면서 전화를 받다가, 나중에는 통화가 길어져서 톨게이트 한 쪽에 차를 세우고,
본격적으로 통화를 하였다. 그분도 젊잖은 분이라 사실 저와 그분이 다툴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중간에 여러 사람이
끼여 있다는 느낌이었다. 이 분도 속시원하게 나에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렇게 50분을 통화했다. 나의 마지막 말은 그렇게 할 거면, 우리는 빠지겠다 였다. 일명 벼랑끝 전술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하기로 했고, 어린이집 안전공제회와 SIDS협회가 반반씩 나누어서 하고, 모든 대외적인 자료는 안전공제회가
하기로 했다. 이때의 느낌은 안전공제회가 '하이에나' 수준으로 느껴졌다. 정말 상대의 약점을 악착같이 물어뜯는 느낌이었다.
그때 우리는 아마추어라는 느낌을 절실히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 나와 통화를 많이 한 사람이 또 있었다.
그것은 SBS의 외주 작가인 이**작가였다. 그당시 제 기억으로는 "그것이 알고싶다" 편에 SIDS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락을 했으며, 촬영 협조와 대본 작업을 위한 인터뷰 등을 저에게 요청했다. 많은 통화를 하고, 준비를 하였으나,
끝내 촬영은 없었고, 지금도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모른다. 그 후에 그 작가와도 연락이 안된다.
지금 생각하면, 한 해에 너무 많은 기회가 우리에게 한꺼번에 찾아왔다. 특히 나에게는 더 그랬다.
4월에 광주에 서울에서 SIDS 강사 교육을 진행하고, 5월부터 본격적으로 전국 강의가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계속 발생했다. 각 지역 보육정보센터장님들이 원장이 원장 교육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중앙보육정보센터장님과는
어느 정도 합의를 본 상태였는데, 지역정보센터장님들이 반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각 지역정보센터장님들과 통화해서
지루한 설명과 협상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내가 개런티를 약속하는 상황이 되다 보니, 내 심정이 조마조마해 졌다.
그러는 과정에 제주도는 원래 우리가 가기로 했는데, 끝내 제주센터장님을 설득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담당자만 통화하고,
센터장님과는 통화를 못했다. 전화를 피하는 데 방법이 없었다. 이때 제주도를 정현희 회장님이 가기로 했는데, 이 사실을 어떻게
알려주느냐?가 나의 고민이었다. 그당시 임** 사무국장님과 여러 차례 상의를 하고, 우리 딴에는 그럴싸하게 포장한다고 했지만,
아마 자존심이 좀 상하지 않았나 싶다. 그 이후에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계속 발생했다. 충청도에서는 강사의 전공을 들먹였고,
전남에서는 강사가 비속어를 쓴다고 강사 자질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게 되었다.
이 이후에 중앙보육정보센터도 너무 걱정이 되었는지, 제가 경북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직접 센터장님과 담당팀장님이 찾아 왔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대책회의를 하고, 이 이후에 담당팀장님이 우리 강사들이 진행하는 곳들을 방문하여 체크를 하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이 SIDS 강의는 "원장님들이 강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바가 많이 퇴색되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이후에 우리의 강의 약간씩 빛을 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 강사들이 준비를 철저하게 한 덕분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2011년 사업평가에서 4개의 강의 주제 중 SIDS의 강의 만족도 점수가 가장 높게 나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 였다. 2012년부터는 소아과 의사들이 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2011년에도는 복건복지부가 예산을 편성했지만,
2012년부터는 안전공제회가 예산을 편성해서, 중앙보육정보센터가 그냥 도와주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은 전달했지만,
전혀 반영되는 시기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벼랑끝 전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오지 않았나 싶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업참여가 마땅치 않은 분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우리의 힘이 많이 미약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2011년부터는 고유의 콘텐트를 만드는 데 치중했다. 그 결과 "교직원의 윤리적 딜레마"라는 그럴싸한 연구를 만들어내게
되었다. 이 연구는 제가 SIDS 강의를 하면서, 피부로 느낀 바를 연구에 옮긴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더 의미가 특별하다.
그리고 2011년 12월에는 그동안의 SIDS 사례를 모아서, 영문으로 번안하여 국제학술대회에 발표를 했다. 이것은 SIDS 이후에
타임라인으로 학부모의 심정과 행동의 변화를 그대로 담아내었는데,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이 되었다는 보람도 갖게 되었다. 외국에 나와 보니, 영문으로 발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우리와 경쟁하는 SIDS 그룹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일본이다. 여기도 기술적 연구로
SIDS 접근하고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SIDS에 관한 연구는 인문학적으로 다 했다고 생각한다. 아마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과제는 지금까지 내가 고안한
연구를 쉽게 말로 풀어 쓰는 이야기 책 정도가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 기술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2년 후에 할 생각이다. 지금은 나에게 재난안전이 더 시급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SIDS 활동은 그만하고자 한다. 왜냐면, 그동안 열심히 했다. 그래서 쉴 자격도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국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역할과 책임은 다 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다른 분들이 했으면 한다.
그러나 내가 SIDS를 통해서 하나 얻은 소중한 것이 있다.
그것은 가치와 정신이다. 나는 SIDS를 통해서 어떠한 이익도 얻지 않을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을 하였다.
아마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자리에서는 매번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그 이유는 가치와 정신을 지키고 싶어서 였다.
내가 이것으로 이익을 얻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고생과 보람이 사라질 것 같아서 였다.
나는 이제 새로운 도전 정신과 가치를 창출하고자 한다. 아마 그 끝은 어떻게 매듭을 짓게 될 지 나도 궁금하다....
지금까지 긴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여기에 실명을 게재한 분들은 공인의 위치에 있는 분들만 그렇게 하였으며, 나머지 분들은 성만 사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구질구질하고, 자잘한 이야기는 과감하게 뺐습니다. 이 정도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은 연휴 잘 보내시구요...
호주에서 서금택 올림
첫댓글 교수님 쓰신 글을 읽고 있으니,
2011년 한국 Sids 예방협회를 만난 추억이
쎄록쎄록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어떤 내용인지도 모르고 내가 좋아하는
정현희회장님이 하는 일이니,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든것 같습니다..
제가 다리를 다쳐서 운전을 할 수가 잆어
남편이 광주까지 운전해준 덕분에 저는 하루종일
강사 과정 교육을 듣고, 덕분에 남편은 광주시내
구경을 지겹도록(?) 했지요.
그 인연으로 저는 경남 지역에서 12회에 걸쳐
영아돌연사 강의를 하게 되었고,지금까지
Sids 예방협회와 좋은인연을 맺고있습니다.
덕분에 영아돌연사 외 안전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으니 이 모두가 그동안 수고하신
교수님 덕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