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반역혐의에 관한 재판을 두고 12년 동안 논란을 일으켰던 이른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정치·사회사에 커다란 얼룩을 남겼다.
부유한 유대인 방직업자의 아들인 그는 1882년 파리의 에콜 폴리테크니크(이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직업군인이 되기로 결심하였고, 1889년 무렵에는 육군대위로 진급했다. 1894년 육군부에 들어갔으나 그해 독일 대사관원 장교에게 군사기밀을 팔아넘긴 죄로 고발당했다. 그는 10월 15일에 체포되어 12월 22일, 프랑스령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의 섬'이라는 악명 높은 범죄자 수용소에서 종신형을 살도록 선고받았다. 재판절차는 불충분한 증거만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는 범죄 사실을 부인하고 가족들도 끈질기게 그의 무죄를 뒷받침했지만 악의적인 반(反)유대주의파가 이끌던 여론과 프랑스의 언론들은 하나같이 그러한 배심원들의 평결과 종신형의 선고를 환영했다. 특히 에두아르 드뤼몽이 편집자로 있던 신문 〈리브르 파롤 La Libre Parole〉지는 드레퓌스를 불충스러운 프랑스 유대인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의혹이 싹트기 시작했다. 육군중령 피카르는 소령 C. F. 에스테라지가 스파이 조직에 가담했으며, 드레퓌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운 편지의 필적이 바로 에스테라지의 것이라는 증거를 찾아냈다. 피카르가 해임되자 사람들은 그가 찾아낸 증거들이 상관들의 심기를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드레퓌스 편에 서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그들 가운데는 언론인 조제프 레나크와, 역시 언론인으로 나중에 제1차 세계대전 때 총리를 지낸 조르주 클레망소, 상원의원 오귀스트 쇠레르 케스트네르도 있었다.
그러나 에스테라지가 증거를 날조하고 소문을 퍼뜨린 데다가 드레퓌스의 것이라는 편지 원본을 발견했던 소령 위베르 조제프 앙리가 새로운 문서들을 조작하고 나머지를 없애버리는 바람에, 이 사건은 어처구니없이 복잡하게 꼬여갔다. 에스테라지는 군법회의에 불려갔으나 무죄로 풀려났고 오히려 피카르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오히려 드레퓌스 사건의 재심을 요구하는 운동을 구체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1898년 1월 13일 소설가 에밀 졸라는 클레망소가 펴내는 〈오로르 Aurore〉지에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제목으로 공개서한을 발표했다. 이 신문은 그날 저녁까지 20만 부가 팔렸다. 졸라는 군부가 드레퓌스 사건을 잘못 재판한 사실을 숨기고 있으며, 육군부의 명령으로 에스테라지를 풀어주었다고 고발했다.
졸라의 편지를 계기로 드레퓌스 사건은 국민의 주목을 크게 끌기 시작했고 프랑스를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이 문제는 드레퓌스가 유죄냐 무죄냐를 따지는 개인적인 문제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재심을 반대하는 반(反)드레퓌스파, 민족주의자, 독재주의자들은 이 논쟁을 군부의 명예를 떨어뜨리려는 프랑스의 적들이 꾸민 음모라 여겼다. 한편 드레퓌스 대위의 누명을 벗기려는 드레퓌스파는 이 사건을 국가안보 논리에 종속되어버린 개인의 자유라는 원칙문제이자, 국가와는 관계없이 행동하는 군부의 권력에 맞서 싸우는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위신 문제로 보았다. 의회가 시끄러운 가운데 정부는 졸라를 재판에 회부하라는 민족주의자들의 압력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각지에서 반유대 폭동이 터지고 있었다. 한편 드레퓌스 사건을 재심하라는 탄원서에 약 3,000명이 서명했고 여기에는 아나톨 프랑스, 마르셀 프루스트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했다. 졸라에 대한 재판은 1898년 2월 7일 시작되었고, 명예훼손죄로 1년간의 징역형과 벌금 3,000프랑이 선고되었다. 그런데 1898~99년에 드레퓌스파는 커다란 힘을 얻었다. 앙리 소령이 자기가 문서를 위조했음을 고백한 뒤 1898년 8월말 자살했고, 에스테라지는 겁에 질려 벨기에를 거쳐 런던으로 도망을 간 것이다. 앙리의 자백으로 사건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재판을 다시 해달라는 드레퓌스 가족의 탄원을 외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1899년 6월 르네 발테크 루소가 이끄는 새로운 내각이 출범하면서 마침내 이 사건이 해결되었다. 재심을 받기 위해 악마의 섬에서 불려온 드레퓌스는 렌에서 열린 새로운 군법회의(1899. 8. 7~9. 9)에 출두했다. 이 재판은 유죄를 판결했으나 공화국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해 그를 사면했다. 드레퓌스는 이 조치를 일단 받아들이긴 했지만, 결백을 증명할 법적인 권리를 행사하기도 했다. 1904년 재심이 허가되었고, 1906년 6월 드레퓌스를 재판한 상고법원은 그의 결백을 밝혀냄으로써 지금까지의 모든 판결내용을 뒤집었다. 의회는 드레퓌스 복권에 대한 의안을 통과시켰다. 7월 22일 그는 공식적으로 복권되었고 레종도뇌르 훈장도 받았다. 그후 얼마 동안 다시 군에 복무하며 소령으로 진급한 뒤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소환되어 중령으로서 군수품 보급부대를 지휘했고, 전쟁이 끝나자 은퇴했다.
'라페르'(l'Affaire:사건)라고도 불리는 드레퓌스 사건은 프랑스 제3공화정의 역사와 현대사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사회적 세력들은 입장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또한 이로 말미암아 1905년 과감한 정교분리법(正敎分離法)이 제정되었으며, 좌익 반군부 세력과 우익 민족주의자들 사이가 더욱 멀어져 1914년, 또는 그후에도 종종 문제를 일으켰다. 따라서 프랑스 최고의 문필가들이 두 파로 나뉘어 격렬한 논쟁을 벌였는데, 이런 현상은 한 세대가 지나도록 프랑스인의 단결을 저해하는 요소가 되었다. 잘못된 충성심, 되풀이되는 어리석음, 비열한 문서 위조, 격한 극단론들이 뒤얽혀 상황은 국가적 위기로까지 치달았다. 그나마 프랑스의 면목을 살려준 것은 그후 반유대주의를 깊이 반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드레퓌스 사건이 가져온 최악의 결과는 프랑스의 약화를 부른 가장 큰 요인인 만성적인 내부분열을 일으키고 더욱 심화시켰다는 점이다.
Lettres d'un innocent : Alfred Dreyfus, Stock, 1898
거꾸로 읽는 세계사 : 유시민, 푸른나무, 1989
드레퓌스 사건과 지식인 : N. 할라즈, 황의방 역, 한길사, 1980
드레퓌스 사건 : 공일우, 신교문화사, 1975
France and the Dreyfus Affair : Douglas Johnson, Blandford Press, 1966
L'Affaire Dreyfus et la presse : Patrice Boussel, Colin, 1960
L'Affaire Dreyfus : Jacques Kayser, Gallimard, 1946
Souvenirs et correspondance publies par son fils. : Alfred Dreyas Grasset, 1936
Histoire de l'affaire Dreyfus, 7 tom. : Joseph Reinack·Revue Blanche, 1901-11
국가 방위를 위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1871년 1월 28일 휴전조약이 조인되면서 정식 강화조약을 체결할 권한을 가진 의회를 빠른 시일 내에 선출해야 했다. 2월 13일 보르도에서 개회한 새로운 의회는 나폴레옹 외교정책의 비판자였던 오를레앙파의 아돌프 티에르를 공화국의 행정수반으로 선택했다. 3월 1일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비준되었는데, 프랑스는 동부 프랑스의 독일군 주둔비와 막대한 배상금을 물게 되었고, 알자스와 로렌의 절반을 독일에 양도하게 되었다(제1차 세계대전 종결 때 이 지방들은 프랑스에 반환되었음). 강화조약이 체결된 며칠 후에 의회는 파리 코뮌의 반란에 직면했다. 3월 18일 티에르는 군대를 파견하여 국민방위군을 무장해제하려 했으나 유혈충돌이 발생하고 폭력사태가 확산되었다. 정부군은 서서히 파리를 포위하고, 파리 민중은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하여 평의회를 선출하여 파리 코뮌을 설립했는데, 거기에는 급진적인 공화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5월 21일 티에르의 정부군은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로부터 '피의 일주일'(5. 21~28) 동안 코뮌 투사들은 항전을 계속했으나, 결국 2만 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고 수천 명의 생존자들은 유배되거나 망명했다.
티에르는 효과적인 지도력을 발휘했으나, 그의 지지세력이었던 왕당파를 떠나 공화주의자에 동조하자 왕당파는 그를 해임하고(1873. 5) 군사령관인 마크마옹 원수를 내세웠다. 1875년 의회는 일련의 기본법을 채택하여 제3공화국 헌법을 마련했는데 이 헌법은 양원제 의회와 국무회의, 그리고 대통령직을 규정했다. 1880년대에 공화주의자는 급진파와 기회주의자로 나누어졌다. 좌파인 급진주의자들은 중앙집권, 반(反) 교회주의, 대외정책에서의 민족주의, 헌법개정, 그리고 사회개혁을 내세웠다. 이에 반하여 기회주의자들은 현체제의 유지와 시민의 사생활에 대한 정부간섭의 제한을 목표로 삼았다. 이 시기에 정부를 운영한 것은 기회주의자들이었으며 레옹 강베타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지도자였다.
1880~85년 총리직과 다른 각료직을 맡았던 쥘 페리는 의무교육제의 실시와 식민지 제국 건설에 공헌했다. 1885년에 연립내각의 국방장관이 된 불랑제 장군은 곧 공화제를 크게 위협하는 민중운동의 지도자로 나섰다. 그의 목표는 1889년의 의회선거에서 승리해 독재권을 장악하는 것이었으나 선거 직전에 브뤼셀로 도망감으로써 그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그결과 기회주의자의 세력이 강화되었다.
당시 새로 일어나고 있던 사회주의 운동은 공화국 지도자들의 정직성에 대한 회의를 더욱 강화시켰다. 1893년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의석을 얻고, 사회주의는 도시노동자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1900년경에는 많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쥘 게드와 장 조레스의 두 당으로 결집되었고 1905년에 양당은 합당하여 통합사회당(SFIO:지금의 사회당 전신)이 탄생했다. 1890년대에 제3공화국은 드레퓌스 사건이라는 최대의 정치적·도덕적 위기를 맞았다. 유대인 출신의 드레퓌스 대위는 1894년 독일에게 군사 기밀을 팔았다는 죄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사 기밀이 계속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에 누설되었고 또다른 장교 에스테라지 소령이 혐의자로 떠올랐다. 그러나 군부는 드레퓌스의 재심을 거부했다. 한편 언론과 일부 정치가, 그리고 좌파 지식인들이 드레퓌스 옹호에 나섰고, 우파 정치가와 가톨릭 주간지들이 군부를 옹호했다. 1898년에 드레퓌스에게 불리한 군대 문서의 일부가 위조된 사실이 드러났고 1899년의 군법회의는 드레퓌스의 형을 감형했으나 여전히 유죄를 선고했다. 그후 드레퓌스는 대통령의 사면을 받고 1906년의 민사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정치와 지적 생활에 큰 상처를 남겼다. 1899년부터 제3공화국 말기까지 프랑스의 정치생활의 중심이 된 것은 급진사회당이었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군부와 교회는 다 같이 큰 타격을 받았고 1905년에는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는 새로운 법이 제정되었다.
1871년 이후 약 20년간 프랑스는 국제적으로 고립된 상태였으나 1891년에 러시아와 느슨한 협약을 맺었는데, 1894년 이 협약은 군사동맹으로 발전했다. 1890년대에는 영국과의 대립이 중요한 외교 문제였지만 1904년에 프랑스는 독일에 위협을 느낀 영국과 협상을 맺고 양국간의 중요한 식민지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1899~1905년 좌파와 중앙정당의 연합인 공화파 블록이 형성되어 프랑스 정부를 안정시켰다. 그러나 우익 소수파는 급진적인 공화파와 타협하기를 거부하고 '악시옹 프랑세즈'의 깃발 아래 모였다. 이 조직은 드레퓌스의 새로운 재판에 반대하는 지식인들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1914년 무렵에는 아직 작은 운동에 불과했으나 공화국의 유력한 적이 되었다. 이에 못지 않게 심각했던 것은 대다수 노동자 계급의 소외였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새로이 탄생한 통합사회당에 투표하고 있었으나 사회당은 그들의 대표들이 부르주아 내각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결과 내각의 안전성을 보장해주고 있던 좌익연합이 깨어졌다. 급진주의자들은 사회주의자들이 공화파 블록에서 철수하자(1905) 다른 중앙 정당들과 손잡을 수밖에 없었다. 1906년 급진주의자인 조르주 클레망소가 총리가 되었다. 1907년 그의 정부는 영국과 러시아에 접근하여 3국협상을 성립시켰다. 클레망소의 후계자들은 화해정책을 채택했고, 특히 조제프 카요 내각이 모로코 문제에 관하여 독일에 유화적인 자세를 취하자 프랑스의 애국자들은 분노했다. 1912년 카요 대신 독일에 대한 강경론자인 레몽 푸앵카레가 총리가 되었고 다음해에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유신시대의 '암흑' 속인 1978년 출간되어 80년대의 젊은 지성들을 깨워주었던 책이다. 대학을 갓 입학하여 대면하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중에 빠지지 않았던 이 책은, '민중과 함께하는 지식인'의 참모습을 보여줌으로써 80년대의 대학에 뚜렷한 좌표를 던져주었다. 저자는 "비록 민중이 역사의 주인공이라고 하는 주장이 아직도 세계 여러 곳에서는 당위의 차원에 묶여 있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저력을 깨닫기 시작하는 민중이 늘어가고 있는 것도 역시 숨길 수 없는 오늘의 현실이다. 그렇기에 역사는 민중을 더욱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나아갈 것으로 믿는 사람만이 민중이 주인이 되는 역사와 구조를 실제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뜻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밝히고있다.
제1장 민중과 지식인 민중은 역사의 주인이다 ------ 10 가치있는 삶과 민중의 아픔 ------ 32 지식인·시인·민중 ------ 47 민중에 의한 것과 민중을 위한 것 ------ 58 사회과학·체제·민중 ------ 61 인간은 구조의 주인이다 ------ 68
제2장 이 땅의 젊은이와 문제의식 새벽을 만드는 사람들 ------ 84 어리석은 인간이 되자 ------ 92 길들여진 자여 그대 이름은 여성 ------ 101 자유·평등·민족자주 ------ 114 젊은 지성과 세가지 위기 ------ 126 오늘의 청소년 왜 방황하나 왜 집을 뛰쳐나가는가? ------ 135 왜 서울로 뛰쳐올라오나 ------ 138 性이냐 인간이냐 ------ 142
제3장 학문·교육·사회 한국 교육의 부조리 ------ 148 대학의 이념 ------ 161 한국인의 이그러진 자화상 ------ 181 淸富·淸權·淸名 ------ 201 壓勝은 위험하다 ------ 214 斷想 3題 산 바다 죽은 바다 ------ 217 비행기와 인권 ------ 218 세금과 권리 ------ 220
제4장 이 시대와 이 상황의 의미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 224 東歐 自由化는 무엇을 뜻하나 ------ 230 텔레비전과 꼭두각시 인간 ------ 237 테러리즘의 논리와 윤리 ------ 243 제3세계가 나아갈 길 ------ 248 분단상황의 지식인 ------ 265
“지식인의 몰락 또는 위기 담론에 동의하는가.” 특별취재팀이 지식인들에게 던진 물음이다. 한 교수는 이렇게 대답했다. “‘위기’니 ‘몰락’이니 하는 건 그 이전 지식인이 큰 힘을 쓰던 시절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하는 건데, 과연 그랬던 적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김진애(도시건축가)는 “‘합리적 대안 생산자’ ‘대승적 소통자’로서의 지식인 역할 자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진애는 “‘지식인의 ‘위기’니 ‘몰락’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고 말했다.
2002년 12월22일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신지식인 격려 다과회’에서 우수 신지식인들을 표창하고 있다. 국민의정부가 제2의건국 캠페인의 일환으로 신지식인 찾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관주도의 지식 사회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으로 해석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87년 이후 민주화 20년을 맞아 등장하고 있는 지식인의 죽음 논쟁은 199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 시절이다. 전상인(서울대 교수)은 “관 주도로 전 국민을 직업과 지위에 관계없이 신지식인으로 만들겠다는 김대중 정부의 발상은 우리나라 지식인 사회의 개편과 교체를 예고한 서막이었다”고 말한다. 98년 12월4일. 김대중 당시 대통령 주재로 열린 제12차 경제대책조정회의. 김태동 정책기획수석이 학력 위주의 지식인 개념을 독창성·능동성 위주로 확장시킨 ‘신지식인상’을 보고했다. 이듬해 초 신지식인 찾기 운동이 ‘제2의 건국’ 캠페인과 맞물려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용가리’로 272만달러 수출 계약을 성사시킨 심형래씨가 ‘신지식인 1호’로 선정되었다. 그는 신지식인 광고에 나와 “새로운 아이디어가 있으면 당신도 신지식인입니다”라고 말했다. 새로운 아이디어는 부가가치 창출의 다른 말이었다. 졸지에 ‘구지식인’으로 몰린 지식인들이 반발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수는 “우리 사회가 지식인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그 이유는 바로 엄격한 비판정신과 사회적 책임감에 있을 것이다. 신지식인은 이러한 지식인의 근본적 의미를 완전히 무시한다(경향신문 99년 4월29일자 칼럼)”고 했다.
지식인은 이제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자’가 되었다. 지식인은 비판적 이성이 거세된 전문가로 대체되고 있다. 권력에 위험하지 않은 지식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아니, 키워지고 있다. 교육부 정식 명칭은 교육‘인적자원부’이다. 사람을 어떻게 효율적인 생산 수단으로 만드는가를 고민한다는 뜻이다. 교육부가 2005년 대통령 보고에서 “다양화·특성화된 ‘시장반응형’ 인력을 양성”하고 “지식기반 경제의 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산학연 협력 활성화’를 통해 성장 동력을 창출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시장반응형 인적 자원? 이들이 바로 새 세대의 지식인이 될 것이다.
아직도 수많은 학자들이 있는데 우리 사회가 쉽게 이런 새 세대 지식인들에게 압도당할 것이라는 비관론이 의심스러워 보일 수 있다. 그렇다면 학자의 세계를 들여다 보자. 한 교수가 말한다. “대학 교수에게 중요한 게 두 가지가 있다면 하나는 연구 업적이고 또 하나는 연구비를 따오는 거예요.” 그는 자기 학교에서 우수 교수 평가 기준은 ‘연구비 수령 건수와 액수’라고 전했다. 이런 현상은 학계의 ‘빅브라더’ 한국학술진흥재단과 관련이 있다. 이른바 ‘학진’이란 약자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연구 지원 기관은 학계의 거대한 지배자다. 학진의 힘은 연간 1조원 가량을 쓴다는 사실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이 기관의 연구비 지원을 받으려 경쟁하는 체제, 이것이 한국 학술의 레짐(regime·체제)이다.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온 김모씨. “전 에세이식 글쓰기를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학진 체제 아래서는 빛을 볼 수 없어요. 학진은 정형화된 논문식 글쓰기밖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어진 김씨의 말. “이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아무도 읽지 않는 논문 마감 맞추는 걸 가리키는 말이에요. 좋은 평가로 연구비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논문 작성 노동자’만 수없이 양상되는 거죠.” 그는 “학진 체제 아래 지식인들이 신음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계간지 편집장은 “학술지 또는 계간지에서 그야말로 ‘재미있는’ 글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됐다. 담론 논쟁을 주도하는 경우도 거의 없어졌다. 모두 학진 등재지에 딱딱하고 재미없는, 심지어는 같은 전공자들도 안 읽어줄 글을 쓰느라 밤 새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틀에 박힌 지식을 재생산하는 데는 학진 체제가 유용할지 몰라도, 한 시대를 뛰어 넘는 창의적인 저술, 그 저술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라는 지식사회의 풍경은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어느 대학 교수는 “예전에는 권력이 정부에 반대되는 글쓰기를 통제하는 정도였다면 지금 학진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식인들의 글쓰기를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문 성과? 최근 한 문화재단에서는 학술상 심사를 벌였다. 심사위원 5명 중 2명이 추천대상을 내놓지 않았다. ‘사회개혁·발전과 학문업적을 연결시키는 저작’이 수상 요건이었지만 적격자가 없다고 판단했다. “대다수 학술상 주최측이 수상 요건 미흡 때문에 수상자 선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논문의 양은 갈수록 늘지만 ‘성과’라 할만한 결과물은 갈수록 줄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 교수들은 이런 체제에서 행복할까?
요즘 교수들은 정치권력, 경제권력과 사귀는 데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어느 방송 진행자는 “최근 모 대선 주자 캠프 소속의 지식인이 참여한 정치 관련 토론을 진행하다, 그 지식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봤다”고 말했다. 이런 살기어린 토론은 교수와 정치의 관계를 잘 드러낸다. “잘 나가는 대선 주자 캠프에 지식인 수백명이 줄서 있다”는 소문은 터무니없는 과장이 아니다. 어느 대학 교수는 지식인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3가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①정·관계에 진출하려면 대학에 사표를 내야 한다. ②대학에 있으면서 특정 정치 집단의 브레인이 되면 그 사실을 공개해야 한다. ③각종 위원회에 참여한 경우 그 활동을 통해 얻은 금전적 수입과 활동내역을 대학에 보고해야 한다.
부수입 올리고 영향력 행사하며 재미는 다 보고, 학생 가르치기는 소홀히 하는데도 ‘업적평가’ 점수를 덤으로 받는 이들이 오늘날 대표적인 지식인의 한 모습이다. 이렇게 정치권력에 종속되거나, 아니면 저항하거나 양 극단 사이에 방황해 온 것이 한국 지식인 사회이다.
기성 지식인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 메카니즘이 고장난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더 이상 지식인은 막걸리 집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강의실에서의 논쟁을 통해, 감옥의 사색을 통해 등장하지 않는다. 지식인은 미국이라는 거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고 있다. 미국 스탠퍼드 대학은 지난달 말 미국을 제외하고 올해 가장 많은 학부 합격생을 배출한 국가는 한국이라고 밝혔다. 35명이다. 불과 두자릿수라서 적다고 여겨진다면, 미국 이민세관국(ICE)의 최근 발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ICE는 지난해 말 기준으로 미국 내 외국인 학생 중 한국 출신이 9만3728명으로 전체(63만998명)의 14.9%를 차지, 국가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고 밝혔다. 미국 고등교육전문 주간신문 ‘고등교육 연감(The Chronicle of Higher Education)’에 따르면 99년에서 2003년 사이 미국 박사 학위 취득자의 학부를 조사한 결과, 서울대가 1655명으로 2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지식인 재생산의 주권을 잃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지식인은 ‘경제권력’과도 잘 어울린다. 대학은 재벌 총수들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지 못해 안달이고, 산학협동은 ‘산학일체’로 진화중이며 대기업 연구 용역비를 받는 상당수 교수들은 재벌개혁 이야기를 입밖으로 꺼내지도 않는다.
〈특별취재팀=김종목·손제민·장관순기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지금 왜 지식인이 문제인가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27:49
지식인은 신분적 특권이나 재산의 유무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지식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힘을 행사한다. 지식인과 그 출신 배경이 반드시 직접적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지식인의 지식은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지식인의 자유로움에 대한 주장은 이런 점을 강조한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한국학술진흥재단 전경. 연간 1조원 가량의 예산을 쓰는 이 재단은 ‘논문 작성 노동자’만 양성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학계에서 한국 학술의 레짐(regim·체제)이라고도 불린다. /김문석기자
하지만 지식이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독학으로 유명 지식인이 된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지식을 통해 힘을 행사하는 정도의 지식인이 되려면 권위 있는 교육기관에 소속되어 오랫동안 배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동안 지식의 습득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학(同學) 끼리 유대 관계도 맺어진다. 이른바 학벌(學閥)이라는 것은 이런 친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지식인은 한편으로 신분과 계급으로부터의 상대적인 자유로움과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위해 결속을 하며 문화적인 동질성을 도모한다.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은 두 가지 다른 집단을 상대한다. 하나는 지배 엘리트로서 정치적, 경제적 지배 집단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피지배 집단인 일반 대중이다. 지식인은 지배 엘리트와 결탁하기도 하고, 피지배 집단에 봉사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지식인은 기존 체제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주장하며 지배집단의 헤게모니를 정착시킨다. 후자의 경우에 지식인은 현 지배체제의 착취구조를 폭로하며 대중의 혁명의식을 고취시켜 새로운 지배체제를 만들려고 시도한다. 체제 고착이든 체제 전복이든 지식인은 자신의 무기인 지식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어느 경우에나 지식인의 힘은 자신의 이해 타산을 숨기면서 공정하고 보편적인 수사학을 동원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지금의 체제가 강고하게 버티건, 아니면 뒤집어져서 새로운 체제가 되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지식인이 지닌 관점을 보편성의 준거로 삼으면서 그의 상징적 권력을 인정해주는 상황이라면 지식인은 어느 쪽이라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어떠한가? 그럴 경우라면 지식인의 위기를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한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으로서의 지식인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가 위기에 처한 한말과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던 일제시대이다. 기존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권력 기반이 형성되는 상황에서 지식인은 당시의 위기에 대한 진단과 질곡에서 벗어날 방향을 일반 대중에게 알려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했다.
망국의 울분을 토로하고, 독립의 희망을 간절하게 표현하면서 지식인은 나라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자로서 인정받았다. 더구나 위기상황 돌파의 유력한 방법으로 교육을 통한 체제 갱생을 강하게 주장함으로써 지식인은 자신의 재생산 기반을 쉽게 마련할 수 있었다.
해방이 되자, 그동안 민족독립의 공통분모 아래 억눌려있던 지식인 집단의 다양한 노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당시의 냉전 상황에 따라 좌우의 극단적 대립을 보이면서 지식인은 양극화되었다.
이런 대립은 결국 한국전쟁으로 나타났고, 휴전과 더불어 남쪽과 북쪽의 체제는 각각의 이데올로기를 섬기면서 서로 이질적 이데올로기의 배제와 탄압에 골몰했다. 우파의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게 된 남쪽의 경우 지식인 집단은 민족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북쪽과의 경쟁에 적극 참여했다.
좌우의 민족통합 이데올로기가 억압된 상태에서, 1970년대의 지식인들은 한편으로 경제성장을 위한 개발독재의 옹호, 다른 한편으로 보편적 인권과 민주화 지향 노선으로 나뉘어 복무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하여 대부분의 지식인은 우리 사회의 인권과 민주화 노선의 역사적 타당성에 동의하게 되었다.
교육부가 2005년 말 대통령에게 보고한 ‘제2차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안)’. 대학의 인력 양성 목표를 ‘시장 반응형’에 두고 있으며, ‘인적 자원’도 ‘시장’에 중심을 둔 ‘인적 자본’으로 규정하고 있다.
민주화 노선이 대세를 점하기 시작한 1987년부터 지금에 이르는 20년 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권과 민주화의 명제를 확산시키는 작업에 주도적으로 가담했고, 그 명제의 안정적인 정착과 함께 그동안 상대적으로 억압되었던 민족 통합의 이데올로기도 두드러지게 되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의 차이를 넘어서서 민족 통합을 이루려는 이와 같은 남쪽의 시도는 동유럽과 소련의 해체, 중국의 급속한 개혁으로 위협을 느끼고 있던 북한의 모험주의를 견제하고, 새로운 국제질서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요청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이처럼 민주화와 민족 통합을 동시에 이루고자 노력했고, 지식인의 담론도 대체로 이런 방향에 호응했다고 볼 수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시기에는 인권 보장과 민주화의 장치가 제도적으로 마련되고 정착되었다. 언론에 대한 권력의 직접적 통제도 사라졌고, 그동안 금기 영역이었던 대통령의 권력에 대한 비판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공적인 자리에서 대통령이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였다.
그동안 지식인 현실 참여의 주요 통로였던 민주화 명제는 어느 정도 실현되었고, 민족 통합에 대한 전망도 남북 교류의 정책으로 구체화되었다. 하지만 부시 정권의 북한 퇴출 압박에 북한이 핵개발로 맞서면서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이런 국제정세의 변화를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대결을 주장하며, 민족 통합의 지향을 견제하는 담론이 부각되었고, 이른바 ‘신우파’라는 세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의 실현과 정착에 따라 지식인의 민주화 명제는 구호의 단계가 아니라, 구체적인 성취를 위한 것으로 변화되었다. 민족 통합의 명제는 정부의 주도 아래 검토되고 있으며, 이에 대해서 ‘신우파’의 미미한 견제만 보일 뿐이다. 민주화의 명제가 현실화되고, 민족 통합의 노력이 정부 차원에서 진행되면서, 이를 맹렬하게 요구하던 지식인은 담론의 초점을 잃고 새로운 열정을 찾아 헤매고 있다. 더구나 공산주의가 몰락한 국제환경의 변화와 더불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한국 사회가 강제로 포섭된 사건은 지식인의 위기의식을 첨예하게 만들고 있다.
여러 이데올로기가 각축하는 가운데 스스로 보편성을 구현한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익숙한 지식인이 이제 신자유주의의 나팔수로서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간섭을 최소화하고, 세계적인 ‘투명’ 경쟁 체제의 효율성을 당연하게 선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관점은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역사의 종말을 외치며 자신이 절대 지존임을 자랑한다.
그 헤게모니 체제에 대항하는 지식인은 대안 없이 허풍만 떠들어대는 자이고, 현실성이 없는 자로 취급 받는다. 지식인의 상상력은 대항 체제를 만들어내는 데 쓰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공장 체제 안에서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데 써야 한다고 선전된다. 그뿐만이 아니다. 지식인의 전통적 권력도구였던 글쓰기도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다.
바야흐로 문자시대가 가고, 새로운 구술시대와 영상시대가 오고 있는 마당에서 지식인은 자꾸 낯선 곳으로 몰리고 있다. 이전에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었던 자들이 지식인의 독점 영역에 침입하여 ‘신지식인’임을 주장한다. 그에 따라 자신은 어쩔 수 없이 ‘구지식인’으로 치부되는 형편이 된다. 보편적 지식인의 요새였던 대학의 변신도 현저하다.
대학도 수요와 공급 법칙의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면서 대학의 지식인은 상인(商人)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제 지식인은 시대의 방향을 이끄는 선구자가 아니라, 문화상품을 만들어 파는 샐러리맨의 처지가 된 것이다.
지식인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사고를 자랑하지 못한다. 그들의 지식은 문화 콘텐츠 개발에 연관될 경우에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들의 문화적 동질성도 더 이상 확보될 수 없다.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의 기반인 글쓰기의 위상 변화에 보이는 그들의 당혹감일 뿐이다. 그들의 옛 열정은 사그라졌고, 그들의 상징권력은 더 이상 당연시되지 않기 때문에 바야흐로 지식인의 위기가 설왕설래되고 있다.
〈장석만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지식 찍어내는 사회, 지성은 숨쉬는가
입력: 2007년 04월 22일 17:50:26
서울대 경제학부 김수행 교수는 1989년 3월부터 서울대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마르크스 강의였다. 학생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300명 규모의 강의실은 매번 만원이었다. 비좁은 계단을 파고들어 앉아 기어코 강의를 들었다.
91년에 이 강의를 수강했던 신모씨(36)는 “중간·기말 고사 때 1000여명이 모여 시험을 치르느라 건물 한 동을 다 빌릴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지난달 30일 김수행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현대마르크스 경제학’강의를 하고 있는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강의실. 210명이 들어올 수 있는 대형강의실이지만, 빈 자리가 많아 썰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손제민기자
그로부터 18년이 흐른 지난달 30일 오후 1시 서울대 멀티미디어강의동(83동) 506호. 김교수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가르치고 있었다. “케인스는 상당히 훌륭한 경제학자예요. 자기가 살던 시대 문제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죠.” ‘현대마르크스 경제학’ 과목. 이날 수업은 케인스의 유효 수요 이론과 장기 정체설에 관한 것이다. 210명 규모의 강의실에 40여명의 학생만 앉아 있다.
조교 정상준씨(32)는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수업에는 안 들어와도 시험 때 들어와서 밖에서 토론하고 ‘학습’한 가락으로 일필휘지 답을 적고 나가던 ‘고수’들이 있었다. 지금은 강의를 열심히 듣지만 판에 박힌 답안만 제출한다”고 말했다.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을 보면 다들 취업에 너무 매달려. 신입생 때부터 그래. 이해는 돼. 대한상공회의소 이런 데서는 성적표에 마르크스 경제학 표시가 돼 있으면 ‘이런 수업을 왜 들었느냐’고 물어본다지”라고 했다. 올해 정년을 맞는 김교수는 요즘 후임 문제를 걱정하고 있다. “경제학부 교수가 34명인데 미국 박사가 31명이야. 비주류 경제학은 나 하나뿐이야. 올해 내가 정년퇴직하면 비주류 경제학이 없어질지 몰라. 요즘 새로 들어온 경제학과 교수들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 마르크스 경제학을 둘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가진 젊은 교수들이 많아.”
이 문제는 비주류 경제학자를 뽑을 것인가라는 단순한 임용 문제가 아니라 한국 지식 사회에 비판적 지식인의 재생산 구조가 존재하는가의 문제이다. 학부 시절 김교수의 ‘마르크스’ 수업에 열광했던 인문학자 고병권씨는 ‘지식인의 비극적 죽음’을 예감했다고 한다. 그는 “예전에는 김교수 같은 분들의 글이 잡지에 실리면 논쟁에 불이 붙고, 대자보도 붙이고 했는데 지금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이제는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말하는 이도 드문 세상이 됐다. 실용과 부가가치 창출은 대학의 최고 목표가 되었다. 일부 대학의 국문학과는 ‘시나리오 학과’로 명칭을 바꿨다. 대학가 인문과학서점은 하나 둘 줄더니 요즘 대부분 문을 닫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걸쳐 전개된 ‘지식기반사회’ ‘지식기반경제’는 우리 사회가 지식을 비판이성의 관점이 아닌, 산업으로 수용하도록 주입시켰다. 교육의 목표는 ‘올바른 시민’의 육성이 아닌, ‘시장반응형 인간’ 양성으로 변했다. 기업은 대학의 진정한 주인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교육부와 전경련이 함께 경제교과서를 만들어 노동을 모욕하고 재벌을 찬양하는 세상이 됐다.
포털사이트 네이버는 ‘지식인’이란 명사를 동사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묻는다는 것은 ‘지식iN’ 네트워크와 검색툴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지식은 붕어빵처럼 대량생산되는 복제품이 된 것이다. 한때 시대 정신을 선도했던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저술활동은 쓴 사람과 평가하는 사람들만 읽는, 틀에 얽매인 지루한 논문들로 대체되고 있다. 학자는 ‘논문 작성 노동자’로 변모하고 있다. 이것이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풍경이다.
〈김종목·손제민기자〉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87년 이후 지식인상의 변화
입력: 2007년 04월 24일 17:29:28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주류적인 지식인상은 저항적 지식인이었다. 사르트르가 역설한 “지식인은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다. 지식인은 억압당하는 자의 편에 설 수밖에 없다”는 명제는 40대 이상의 사람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완상의 ‘민중과 지식인’은 80년대 대학 신입생의 필독도서였고, 그들을 새로운 현실로 인도하는 안내서였다. 스스로를 지식인으로 자각하는 것이 사회와 현실로 나아가는 초대장이었던 셈이다.
1971년 전태일 추모기도회에서 대중을 상대로 구국강연을 펼치고 있는 함석헌 선생.
-탈근대화, 천대받는 ‘진실’-
문익환 목사는 생전에 강연회에서 종종 지식인과 민중의 관계를 칼날과 칼등의 관계로 비유하곤 했는데,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지식인들은 비유 그대로 ‘민중의 칼날’이었다. 당시의 현실에서 지식인은 근대적 합리성과 서구식 민주주의에 대해 가장 많이 교육받은 존재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담지자로 기능했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이들에 의해 만질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현실적 실재로 감지됐다. 민중의 계몽가이자 선구자로서 지식인은 사회의 각 영역에 큰 자취를 남겼다. 시대의 선생으로 불린 함석헌과 리영희의 저작들, 장준하의 선구적 활동, 백낙청과 김현이 주도한 비평의식의 고도화, 박현채의 민족경제론, 탈춤과 같은 민중 문화의 재발견 등은 그러한 현상의 몇몇 예에 불과하다. 70, 80년대에 걸쳐 지식인은 민주화 투쟁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린 교사였으며, 특정한 의미에서 ‘민족’과 ‘문화’의 창안자이기도 했다.
광복군 장교 출신으로 박정희 군사정권에 저항하다 75년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준하 선생.
하지만 이제 이런 일들은 추억 속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굳이 푸코나 리오타르 같은 프랑스 사상가들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지식인의 사회적 위상이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다양하게 설명돼야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도래와 같은 세계사적 전환이 바탕을 이루며 거기에 한국 사회의 역사적 변천이 조응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밑바닥에 탈근대적 현실이 있다. 근대 극복을 목표로 출발한 탈근대주의는 근대가 창출한 각종 제도, 가치, 개념, 역사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데 일조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당연시했던 많은 것들이 사실은 근대에 이르러 ‘만들어진 전통’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실과 진실의 관계가 흔들렸다. 과거에는 현실을 깊게 파고들면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존재했다. 하지만 오늘날처럼 ‘진실’이라는 단어가 천대받은 적이 있었던가? 총체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따라서 현실을 총체적으로 재현·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탈근대주의가 가르친 진실이다.
리오타르는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가치를 여전히 설파하는 지식인이란 무지이거나 권력의지의 산물일 뿐이라고. ‘지식인의 종언’은 무엇보다 지식인 자신에 의해 천명됐다.
여기에 사회주의의 붕괴로 대표되는 이념의 붕괴는 한국 지식인상의 변화에서 기억할만한 사건이다. 박노해나 조정환, 이진경처럼 이 무렵 새로 등장한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채 선배 세대인 4·19세대, 유신세대와 자신들을 날카롭게 구분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시작되고 현실 사회주의가 몰락하면서 이러한 구분법의 의미도 모호해졌다. 이념의 붕괴는 역설적으로 사상의 해방을 몰고 왔다. 분수처럼 사상이 흩어졌으니, 사람들은 저마다 급진좌파에서 뉴라이트로, 헤겔에서 들뢰즈로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오늘날 한국 지식인 사회는 사상의 백가쟁명 시대를 새롭게 관통하고 있다. 그런 만큼 사상의 대변인으로서, 혹은 안내자로서 지식인의 사회적 입지는 현저하게 약화됐다.
아마도 지식인을 날것의 현실로 끌어내린 직접적인 계기는 외환위기일 것이다. 자살이 속출하고 노숙자로 넘쳐나는 거리가 매일 매스컴에 보도되면서,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를 중심으로 재편됐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신지식인’이다. 현재까지 3316명이 선정된 것으로 알려진 신지식인은 외환위기 속에서 경제적 가치창출이라는 일반적 목표에 국민을 동원하려는 상징조작이었다. 신지식인은 한편으로는 기존 지식인의 권위에 기대면서도 수량화, 물질화, 공유화라는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지식인의 ‘유용성’에 강력한 의문부호를 새겨놓았다.
-IMF뒤 평등에서 양극화로-
외환위기의 극복이 신자유주의의 적극적인 수용으로 귀결되면서 이러한 경향은 강화되었다. 신지식인은 이제 하나의 해프닝이 되고 말았지만, ‘인문학의 위기’는 필연이었다. 자본의 거칠 것 없는 자유와 제국으로의 수렴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는 담론의 중추를 민주주의로부터 돈으로, 평등과 인권으로부터 양극화와 개방으로 옮겨놓았다. 황우석이 찬양되던 시절, 각종 뉴스는 앞으로 벌어들일 로열티를 계산하느라 바빴다. 그곳에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지식인, 아니 환산되어서는 안 되는 지식인이 설 자리는 없다. 또한 황우석 사태는 지식인의 보루였던 도덕성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함으로써 마지막 옷고름을 풀어헤쳤다. 연이어 고위공직자나 총장 등의 표절사건이 불거지면서 ‘지식인의 종언’은 엉뚱한 방식으로 현실화됐다. 이것을 ‘관행’이라 하던데, 그렇다면 그러한 관행으로 지탱돼 온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을 누가 존경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은 혼돈의 와중에 서 있다. 그의 자산인 ‘지식’은 인터넷이 대신하며, 그의 도구인 ‘글쓰기’는 댓글보다 읽히지 않는다. 그의 언어인 보편성은 의심의 대상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은 신뢰성을 썩 잃었다. 시대의 양심이란 칭호는 역사책에나 둥지를 틀었다. 지식정보화사회에서 지식의 가치는 무한대로 상승했지만 지식인의 가치는 역사상 유례없이 추락했다. 교양과 지적 유희를 제공하고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지식의 효용성은 거듭 강조되지만, 이를 종합하고 비판할 지식인의 필요성을 적극 긍정하는 목소리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실 민주화라는 지상과제와 총체성을 강조하는 거대담론의 존재는 사상과 이론의 성찰을 억압해왔다. 이로부터 해방된 지식인들은 낡은 갑옷을 벗어던지고 근본을 파고들었다. 근대성, 젠더, 민족주의, 기억, 일상권력 등이 비판목록에 오르면서 전선(戰線)은 갈라졌고 심화됐다. 문제는 ‘부분’에 대한 비판이 ‘전체’로서 존재하는 권력과 어떠한 관계를 설정하는가이다.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지식인의 기능화 양상은 지식인 자신이 부분성에 매달려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최근에 지식인과 관계된 논의가 여전히 하나로 존재하는 ‘국가’로 수렴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황우석 사태가 애국주의의 광풍을 등에 업고 등장·확산됐던 상황, 현재 진보진영이나 보수진영 모두 ‘선진(화)’ 담론을 둘러싸고 경쟁적으로 국가정책 마련에 부심하는 경향, ‘인문학의 위기’론이 국가의 지원 요구로 귀결되는 풍경, 학술진흥재단이라는 국가기관이 학문의 기반을 좌우하는 현실 등은 지식인의 국가종속성 내지는 국가지향성을 강하게 예시한다.
이런 상황은 지식인과 국가의 관계를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권력의 민주성 문제만이 초점일 수 없다. 많은 논의들이 국가로 수렴될 때 그로 인해 가려지는 부분들이 상당하며 그런 부분들이 오히려 지식인의 질문과 대답을 기다리는 곳일 수 있다. 따라서 질문은 지식인들이 ‘민주화 이후’의 국가에 대해 얼마나 지혜롭게 대응하고 있는가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민주화되었을지언정 지식인의 국가론이 지혜로워졌다는 증거는 많지 않다. 국가와 지식인의 관계 설정은 현재진행형의 문제다.
그간 일어난 지식인상의 변화 중 ‘독립적 지식인’의 확산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강준만, 박노자, 고미숙, 이정우 등으로 대표되는 이들은 탈근대적 사유에 기반을 두면서 탈권위주의, 다원화 그리고 ‘대중’과의 직접소통을 지향한다. 여러 방면에서 과거 지식인의 존재방식과 다른 차원을 선보이는 이들의 활동은 향후 지식인상의 갱신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이들과 다른 궤도에 속하지만 공병호나 이덕일처럼 직접 대중을 상대로 한 자유저술가의 확산도 현 단계 지식인상의 또 다른 변모 양상을 보여준다.
-새로 떠오르는 ‘대중지성’-
최근에 ‘대중지성’ 개념이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도 지식인의 몰락과 대중의 등장이라는 현상과 연관이 깊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자율주의에 기반한 ‘다중네트워크’가 주도적으로 제창하고 있는 이 개념은 지식인의 위계적, 엘리트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대중을 근원에 두는 새로운 지식 창출·향유 방식을 겨냥한다. ‘대중지성’은 계몽주의적 지식인의 역할이 한계에 봉착하고, 인터넷의 발달에 따라 대중이 지식의 소비자이자 창조자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지식(인)과 변별되는 개념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사회의 물질적, 구조적 변화를 빠트리고 지식인상의 변화를 말할 수 없다. 서울대 입학생 중 상류층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아가는 현실을 덮어둔 채, 소득격차가 학력격차로 이어지고 학력격차가 신분고착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말하지 않고, 여전히 미국박사가 최고고 학연과 인맥이 우선시되는 문제를 괄호치고 지식인상을 논한다는 것은 난센스가 아닌가. 하지만 그러하기에 더더욱 ‘지식인’은 되새겨져야 할 화두이다. 과거에도 지식인은 학력과 신분으로서 규정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본시 실천적 개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라 ‘행위’이다. 허위에 저항하고, 현실을 인간화하며, 가야할 길을 묻는 한 그는 언제나 지식인인 것이다.
지식인 사회가 분명한 ‘민주 대 반민주’ 전선으로 양분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지식인 사회는 ‘사상해방’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게 분화됐다. 반공주의자는 냉전적 사회인식이 힘을 잃어가면서 세가 줄었다. 특히 2000년 6·15공동선언 등 남북한 화해무드가 지식사회 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파 지식인들도 반공주의를 배격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민족주의자의 경우 위세는 여전하지만, 인권·시민사회· 탈민족주의자의 부상도 두드러지고 있다. 너도 나도 자유주의를 자처할 만큼 자유주의자가 증가하고 있다. 노동, 성, 환경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하면서 지식인의 분포도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히 부상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동아시아론’ 등 대안 담론의 도전을 받고 있다. 좌파 지식인들의 우파 전향 및 ‘중도선언’이라는 새 경향도 나타났다. 80년대 중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포기한 좌파 경제학자 안병직(뉴라이트재단 이사장·서울대 명예교수)을 비롯해 90년대 소련 등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김영환(시대정신 편집위원), 신지호(자유주의연대 대표) 등 ‘주체사상파 운동권’들이 전향했다. 최근 홍윤기(동국대 교수), 황석영(소설가) 등은 ‘급진적인 좌파나 경직된 우파가 아닌 통합적 대안으로서의 중도’를 천명했다.
2006년 유신체제를 재평가한 역사교과서 편찬을 추진하다 4·19유족회원에게 멱살을 잡힌 서울대 이영훈 교수.
2003년 입국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기소됐던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
경향신문은 최근 이들의 사상 궤적을 토대로 ‘2007년 한국사회 지식인 지도’를 작성했다. 정치·경제·사회 이념의 좌우 성향(가로축), 민족주의 성향 여부(세로축)로 한 2차원 공간에 주요 지식인을 배열했다. 두 축의 교차점에서 멀수록 이념적 특성을 뚜렷이 보여준다. 강정구(동국대 교수)와 강만길(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장·고려대 명예교수)은 좌파 성향에 차이가 있지만 민족주의적 특성이 강하다. 강정구는 좌파 민족주의자, 홍세화(한겨레신문 기획위원)는 좌파 탈민족주의자, 복거일(문화미래포럼 대표·소설가)은 우파 탈민족주의자를 각각 대표한다.
김호기(연세대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 이념 분포 양상은 서구 사회와 다르다. 서구적 틀로는 좌파가 탈민족주의, 우파가 민족주의 중심으로 분포하지만 우리는 좌파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많다”며 “이는 김구 등 우파 민족주의 그룹이 몰락하고 나서 수십년간 반공체제가 공고해진 탓”이라고 말했다.
#민족주의자
좌우 이념 성향에 따라 북한체제의 포용 및 통일 방식의 개방성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좌파 민족주의자는 ‘분단 국가의 일부’로서 남한이 가진 정체성의 한계를 강조한다.
70년대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등을 써 통일지향의 필요성과 민족문제에 대한 자각을 일깨운 강만길, 남북한 모두의 내부 모순을 해소하기 위한 통일(분단체제론)을 주장한 백낙청(‘창작과 비평’ 편집인·서울대 명예교수) 등이 진보적 민족주의자다. 급진적 좌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북한도 우리의 일부’란 시각에서 반외세 자주 통일을 지향한다. ‘민중에 의한 통일’을 주장하는 백기완(통일문제연구소장), 강정구, 송두율(독일 뮌스터대 교수)이 있다. 우파 쪽의 대표적 인사로 신용하(독도학회장·이화여대 석좌교수), 서길수(고구려연구회 이사장·서경대 교수) 등이 있다. 남한 체제 우위의 통일을 추구하거나, 통일보다는 대외 영토·역사 문제에 천착한다. 중도적 민족주의자로는 ‘전통 문화·정신’을 강조하는 김지하(시인·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를 들 수 있다. 북한을 타도 대상으로 보는 통일지향 세력으로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을 보이는 인사로는 97년 월남한 ‘주체사상의 대부’ 황장엽(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들 수 있다.
#좌파·진보주의자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적 결함을 비판한다. 마르크스주의, 진보적 시민사회론, 근대비판주의 등으로 분화해 있다.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사회 구성과 발전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을 강조한다. 특히 불평등 문제를 주시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정치연구소 위원으로 활동 중인 장상환(경상대 교수)은 현실 참여를 통한 사회 개선을 추구한다. 오세철(연세대 명예교수)은 좌파 학자들 위주로 ‘부르주아 체제에 포섭되지 않는 대안학교’인 진보적 사회과학대학원의 설립을 추진중이다. 손호철(서강대 교수)은 계급·민중적 시각의 사회평론에 적극적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지식인 그룹으로는 문화주의, 트로츠키주의, 자율주의자가 있다. 문화주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을 비판하는 한편 자본주의 체제 내 문화가 계급 및 불평등 구조를 재생산한다고 본다. 강내희(중앙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그는 시민단체 ‘문화연대’를 통해 음악 저작권 강화 반대, 18세 선거권 낮추기 운동, 외국인 노동자 문화축제 등을 펼치고 있다. 트로츠키주의자 정성진(경상대 교수)은 국가 단위의 자본주의 극복이 아닌 세계 수준의 혁명을 추구한다. ‘노동계급의 국제연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같은 노선에는 국제사회주의 단체 ‘다함께’가 있다. 자율주의자 조정환(갈무리출판 대표)은 스탈린식의 일당(전위당) 독재를 거부하고 노동자 자율에 의한 혁명과 발전을 추구한다.
진보적 시민사회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사회변화의 주체를 ‘억압 당하는 노동계급’이 아닌 ‘시민’으로 본다. “민중이 자신의 다양한 이익을 체제에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는 최장집(고려대 교수)의 민주주의 담론이 이와 연계된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 김상조(한성대 교수), 참여연대 운영위원 조국(서울대 교수) 등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근대비판주의 지식인의 스펙트럼은 넓다. 페미니즘, 생태주의, 탈근대론 등 체제 비판 이론이 다양하게 분포해 있다. 국가주의, 개발론, 민족주의 등 근대적·권위주의적 담론을 거부한다. 페미니즘은 가부장적 사회체제가 가지는 폭압적 구조를 반대한다. 여성운동의 대가 이효재(이화여대 명예교수)로 시작된 페미니즘은 ‘여성의 신체’(조한혜정 연세대 교수)에서 ‘여성노동자’(조순경 이화여대 교수)까지 논의의 폭을 넓혔다.
생태주의는 ‘대안적’ 삶·사회를 꿈꾸는 급진적 개발반대론이다. ‘지속가능한 발전’(환경주의)을 넘어 ‘인간의 탐욕’이란 문제 의식에 기초해 “생태 문제를 최우선시하고 생태가치를 생활의 전반에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철(녹색평론 대표), 장회익(녹색대학 석좌교수)이 있다. 탈근대론자들은 ‘민족주의 비판’(임지현 한양대 교수), ‘냉전적 국가론 비판’(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소수자 소외 비판’(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 등을 통해 가부장적 획일주의, 순혈주의를 비판한다.
#우파·보수주의자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반대, 자본주의 지향을 유지한다. 반공주의, 반공주의에 비해 상대적으로 유연한 뉴라이트, 시장자유주의 등이 분포하지만 각각 명백히 구분되지 않은 채 혼재된 양상이다.
반공주의 지식인들은 ‘정통 보수’를 자칭하며 ‘대한민국의 법통’을 강조한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서 대한민국은 ‘반국가단체’인 북한에 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한·미동맹과 보안법을 최우선시한다. 조갑제(전 월간조선 대표)가 이 그룹의 대표적 지식인이다. ‘산업화 세력’에 대한 ‘민주화 세력’의 폄훼 시도를 적극 방어하는 이들은 “뉴라이트는 위장 전향한 빨갱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뉴라이트는 신지호 및 홍진표, 최홍재(각각 자유주의연대 사무총장, 조직위원장) 등 ‘전향 386’들이 주도하는 ‘신우파’ 그룹이다. 자유주의, 북한인권 중시, 대외개방 및 시장주도 경제, 기간산업 민영화 등을 주장한다. 최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찬성에서 드러나듯 “자폐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애국적 세계주의를 지향”한다. 대외 개방을 중시하는 탈민족주의자들이다.
“전통적 반공주의자들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됐고 사회 담론도 생산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지호의 지적처럼 뉴라이트 그룹은 최근 보수진영의 사회 이슈를 선점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창달을 통한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를 추구하는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박세일(서울대 교수), “자본주의의 참담한 모순만 다룬, 잘못된 역사쓰기는 바로 세워져야 한다”는 교과서포럼 공동대표 박효종(서울대 교수)이 같은 노선이다.
시장자유주의는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는 복거일, 자유시장 경제 지상론을 펴는 민경국(강원대 교수), 좌승희(경기개발연구원장) 등이 있다. 경제·통상 이슈에 집중하며, 정부의 시장개입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는 ‘작은 정부론’을 주창한다.
#자유주의자
국내 자유주의 개념은 포괄적이며 모호하다. 사회복지를 내세우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와 시장자유주의(libertarianism) 모두 자유주의로 해석된다.
최장집과 신지호 등 좌우파 지식인들이 모두 자유주의자를 자처한다. 상대적으로 이념 성향이 강하지 않은 지식인 그룹을 자유주의로 분류된다. 좌파와 우파를 넘나드는 총체적 시각으로 현상을 비판한다. 사회주의나 군부 독재 하에서의 ‘동원체제’ 등 억압적 권위를 거부한다. 윤평중(한신대 교수)은 자유주의자를 “열려 있으면서도 혼자 있을 수 있는 사람, 연대하면서도 패거리 만들지 않는 사람”이라며 “사회의 여러 이념들 간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지식인”이라고 정의했다. 최근 ‘중도’를 선언한 홍윤기(동국대 교수)가 자유주의자 가운데 상대적 좌파, 유럽적 우파로 통하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출신의 이근식(서울시립대 교수)이 상대적 우파로 분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