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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성씨)-원주 이씨 | ||||
이지건 아들 <이남>이 <성전면 금당리>에 처음 터전잡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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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의 성씨 - 원주이씨(原州李氏)
신우는 고려 목종때 병부상서(병부에 속하는 정삼품벼슬)를 지낸뒤 원주에서 세거하면서 경주이씨에서 나와 본관을 원주이씨로 했다. 이는 원주이씨도 경주이씨의 시조 이알평의 후손들이 되는 것이다.
이후 반계는 수차례 영의정 벼슬을 거절했고 왕이 자신을 찾아온다는 소식에 식음을 전폐하고 7일만에 세상을 떠났다. 반계의 충정을 높게 평가한 조정에서는 사후에 영의정 벼슬을 내렸다. <이영화>는 여섯명의 아들을 두었고 여섯째 지건은 문관 정삼품의 벼슬인 통훈대부 통예원자통례에 이르게된다.
이지건의 아들인 <이남(楠)>은 광양현감, 문장현감을 지닌후 해남에서 성전면 금당리로 이주하게되면서 지역에서 생활을 시작한다. 남은 8명의 아들을 두게된다.
억복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지내 병사공파의 시조가 된다. 병사공파의 후손들은 현재 성전면 금당리, 월남리등에 거주하고 있다.
넷째 계복의 후손들은 나주시 공산면에 거주하고 의주부윤군을 지낸 다섯째 연복의 후손들은 광양에 생활하고 있다. 여섯째 순복은 정삼품 무관벼슬인 어모장군 충순위 대호군을 지냈고 후손들이 성전면 금당리 예동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 일곱째 현복의 후손들은 해남군 옥천, 계곡등에서 여덟째 원복의 후손들은 성전면 금당리 달매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다 .
억복의 손자 <빈>은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지평(정오품벼슬)에 올랐다. 빈의 아들 <담노>는 학문이 뛰어나고 월출산 자락인 안운마을 백운동에서 은거생활로 유명하다.
담노의 증손자 <의경>은 사도세자에게 직접 교육을 시킬정도로 높은 지식으로 알려졌다. 이에 <의경>은 왕으로부터 친필 칠언, 삼언시를 직접 하사받았다. 또한 왕은 의경에게 벼슬을 권유했으나 관직을 버리고 후학을 양성하기위해 월출산 아래에 터를 잡았다. <의경>은 월출산 아래 동강촌에 집을 짓고 후학을 위한 동강서원을 운영했다. 의경이 <동강선생>으로 불리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매년 음력 10월 11일부터 해남에서 영화부터 제사를 지낸다. 관내에서는 음력 10월 13일 억복부터 선조들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원주이씨 선조의 묘소에는 일반 주민들과 다른점을 찾아볼 수 있다. 묘의 형태가 왕릉처럼 지름이 3m가 넘는 대형묘의 모습을 하고 있다. 대형묘지는 예전 원주이씨의 경제적 능력과 위세를 파악할수 있게한다.
또 원주이씨의 묘소에는 비석을 찾아볼수 없다. 후손들에 따르면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관내 설치된 의경의 묘소에는 비석이 놓여있다. 이곳은 후손들이 만든 것이 아닌 의경의 제자들이 뜻을 모아 마련한 유일한 비석이다.
원주 이씨 문임을 맡아 5년째 활동중인 이철주(60)씨를 만나 문중에 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성전면 영풍리에 소재한 제각에 대해 이씨는 “제각 관리인이 없어지면서 제각의 관리가 많이 허술해졌다”며 “새로 제각을 보수하려는 것을 종친들과 협의중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문중 모임에 대해 이씨는 “해남에서 열리는 문중 시제에는 많은 종친들이 참여하고 있다”며 “강진지역에서 모이는 시제에는 매년 숫자가 줄어들어 지금은 50명정도가 조상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씨는 “강진에는 종친회가 별도로 구성되지 않아 매년 하루 날짜를 정해 종친들의 모습을 보고있다”며 “문중을 위해서는 종친회가 결성돼 활발한 활동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시선2
임형택 교수의 견해 ㅡ우리 고전을 찾아서 (2007,한길사)
<원주세고ㅡ 이빈 외 6인> 전라도 강진의 한 가문이 일궈낸 정신유산 - 호남의 명문 원주 이씨
...................<원주세고>는 강진지역에서 세거한 원주이시의 한 계통에서 10여대에 결쳐 낳은 문적들을 한데 묶은 것이다. 수록된 문적과 저자는 다음과 같다.
이빈 ㅡ 서주집 이언열 ㅡ 애일암유고 이의경 ㅡ 동강선생유고 / 오복편람 이존박 ㅡ 무명도기 이여박 ㅡ 수차설 / 이수원류 이시헌 ㅡ 자이선생집 이흠 ㅡ 계양유고 / 정우당집 <부록ㅡ정우당첩/백운동첩>
...........그런데 강진의 원주 이씨 '장서의 훌륭함'으로 호남지방에서는 드믄 경우다. 다만 국중에 알려진 정도의 현조를 받들고 있지 못한 점에서 약점이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사대부로서 위상을 높이고 지키기 위해서 더욱 분발하고 꾸준히 노력을 기울일 수도 있었을 터이다. 이 집안은 세대를 이어서 문학과 학문의 교양을 배양하기에 게으르지 않는 한편범절과 행실을 구비하기에 아무쪼록 힘을 다했다. 그리하여 강진의 원주 이씨는 문한가의 반열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었다. ................ ..................... <원주세고>는 한 가문의 문헌으로서 소중하지만 거기에 그치지않고 한 지방의 문헌으로서 값진 것이며 우리 역사문화를 풍부하게 인식하는 자료로도 이바지될 것이다.
3,참고사항 ㅡ월출산 백운동
원주 이씨 백운동첩의 <백운동>은 바로 <다산 정약용의 백운첩>, <초의선사의 백운동도>의 그 백운동이다.
ㅡ<참고자료1>ㅡ문화일보 2011,3,16자
......(중략)
# 달아래 마을에 꼭꼭 숨어 있는 백운동의 정취 월출산 아래 전남 강진의 마을 이름은 온통 ‘달 월(月)’자로 그득하다. 월하, 월남, 월송, 월평, 상월, 송월, 대월…. 대자면 끝도 없다. 월출산 우람한 암봉 위로 달이 돋는 모습이야 강진이 아닌 전남 영암 쪽의 것이라지만, 대신 강진 쪽은 흰 달빛에 빛나는 산 아래 마을의 정취를 갖고 있다. 영암 쪽의 월출산이 차갑고 무겁다면 강진 쪽의 월출산 자락은 밝고 따스하다. 강진 쪽 월출산 자락의 달아래(월하리) 안운마을에는 소쇄원 명옥헌과 나란히 견줄만한 전통 정원이 있는 백운동이 꼭꼭 숨어 있다. 드넓은 차밭의 이랑 사이로 깊이 들어서 찾아가는 곳. 지도 한 장으로는 도무지 찾아갈 수 없는 곳. 온통 울창한 동백나무로 사방을 다 닫은 숲의 한가운데 백운동이 있다. 어찌나 깊이 숨어 있던지 한 번 다녀온 뒤에 다시 되짚어 찾아가기조차 힘겨울 정도였다. 백운동이란 이름은 지금은 흩어지고만 절집 백운사 아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그곳에 400여년 전 선비 이담로가 은거하며 별서(別墅·별장)를 짓고 정원을 꾸몄다. 월출산 능선의 기기묘묘한 층암이 올려다보이는 이곳에 계곡물을 끌어들여 아홉 굽이 물길을 만들고 술잔을 띄웠다. 지금은 다 사라졌지만, 숲을 둘러 100그루의 홍매화를 심었고, 마당에는 3칸 초가를 들였다. 이쯤에서 이담로가 지은 ‘백운동유서기’를 펼쳐 이곳에 별서를 지은 뜻을 헤아려보자. “내가 이곳을 택한 이유는 한갓 그윽한 정취 때문만이 아니다.…한적하게 살며 심성을 함양하고 문흑(文黑)으로 낙(樂)을 삼는자 또한 이로 인해 도움이 되는 바 있을 것이다.…새장 속엔 달을 보고 우는 학이 있고 시렁 위엔 바람에 우는 거문고가 있다. 이것이 바로 백운동의 생활이다.”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새빨갛게 피어난 동백이 어우러진 백운동의 정원은 그것만으로도 족한데, 이런 풍경에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까지 풍성하게 잠겨 있으니 더할 나위 없다. 강진에 유배 중이던 정약용은 200여년 전 초겨울 이곳에서 십여일을 머물렀다. 백운동 주인이던 <이담로>의 6대 손자를 막내제자로 받아들인 인연이 계기가 됐다. 정약용은 백운동에 머물며 풍경에 반해 13편의 시를 짓고는 당시 동행했던 초의선사에게 그림을 그리라 했다. 그렇게 백운동의 절경을 담은 시와 그림을 묶어 펴낸 것이 지난 2001년 발견돼 학계를 흥분시켰던 ‘백운첩’이다. # 다산은 그 아름다운 정원에서 무엇을 했을까 초의선사가 백운첩에 그려낸 백운동의 풍경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다. 그 그림을 토대로 근래에 3칸짜리 초가까지 복원됐으니 지금 그린 것이라 해도 믿겨질 정도다. 옛 모습을 잃지 않은 것은 워낙 깊이 숨겨 있던 탓에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은 까닭이리라. 정약용은 백운동에 묵으며 어떻게 소일했을까. 7년 만에 다시 찾은 월출산을 제자와 함께 오르내렸을 것이고, 지금은 탑 하나와 진각국사비만 남아 있는 월남사, 적요하게 서 있던 무위사도 천천히 걸어 오갔을 것이었다. 제자들과 아홉 굽이 물길에 술잔을 띄우기도 했을 것이고, 때로는 인근에 지천이었다는 월출산 야생차를 따서 빚은 발효차를 앞에 놓고 고요한 명상에 잠기기도 했으리라. 백운동으로 들어서기 전에 꼭 봐야 하는 것이 바로 백운동이 들어선 ‘자리’다. ‘기가 막힌’ 자리에 들어서 있다는 것은 뒤로 물러서야 비로소 보인다.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근래 새로 세운 백운동 안내 현판 오른쪽으로 내려서 돌담을 따라가다 나오는 자그마한 저수지 앞이다. 여기에 서면 월출산의 늘어선 암봉과 그 아래로 울창한 동백나무 숲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그 숲의 한복판에 백운동이 마치 화룡점정처럼 들어서 있다. 볼수록 탐나 괜한 시기심까지 절로 갖게 되는 백운동 옆 땅의 임자는 전남 나주에서 빼어난 정원이 딸린 ‘죽설헌’을 지은 눈 밝은 화가 박태후씨다. 이제 막 꽃눈을 열기 시작한 울창한 동백숲을 지나 백운동으로 들어서면 물소리가 먼저 마중을 나온다. 도무지 계곡이 있을 법하지 않은 지형인데도 계곡물은 맑다. 비가 내린 뒤면 제법 힘찬 폭포가 내려온단다. 근래에 복원된 백운동 정원에는 사랑채, 초당, 정선재를 새로 짓고 돌담을 올려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지만, 아직 복원이 끝나지 않은데다 12대째 기거하고 있는 이씨 가문 후손의 살림집이 있어 다소 수선스러운 편이다. 살림집 툇마루에는 먹감나무에 흰 글씨로 ‘백운유거(白雲幽居·흰 구름에 그윽하게 깃들다)’란 400년 된 현판이 또렷한 채로 남아 있다. .......(이하 생략)...... | ||||
ㅡ<참고자료2> ㅡ조선일보 2009,5,21 | ||||
정민의 세설신어ㅡ [4] 백운동 원림(園林)이담로의 6대손 이시헌(李時憲·1803~1860)은 다산 문하의 막내 제자다. 그의 5대손인 이효천(李孝天) 옹이 지금도 백운동을 지키고 있다. 11대를 이어오며 지켜온 유서 깊은 공간이다.
초의의 백운동 그림이 워낙 세밀한 데다 12승경을 노래한 다산의 시가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복원사업이 마무리되면 우리는 호남의 유서 깊은 정원 하나를 되찾게 되는 셈이다. 이시헌은 이덕리(李德履·1728~?)가 지은 '동다기(東茶記)'를 필사해 세상에 전했다. 그는 직접 떡차를 만들어 두릉의 다산에게 보내기도 했다.
일제시대 이한영이란 이가 백운옥판차(白雲玉版茶)를 만들어 판매한 곳도 이 근처다. 백운동 원림의 바로 뒤쪽은 지금 아모레퍼시픽 다원의 너른 차밭이 자리 잡았다. 집주인은 지금도 옛 방식에 따라 집 뒤 대밭에서 나는 야생차로 차를 덖어 가까운 이들과 나누곤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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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양강님을 이번 5월 마지막주 토요일 탐진포럼 연사로 모시고 싶습니다.
장흥문화원과 연계하는 방안도 있을 것 같은데요.
좋은 구상 있으신분 제게 메일 좀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_______ 은퇴하면 차밭 일구고 싶습니다.
차밭 임료 저렴하게 경작할 수 있게 해 주실분 어디 없나요?